● 시선이 선정한 시인―양문규(『시선』 2013년 여름호)
▲ 2004년 이시영 불교문학 수상식장 앞에서―필자, 시인 나태주, 이시영, 신경림과 함께
▲ 1983년 영동문학의 밤―영동문화원
▲ 1991년 첫 시집 출판기념회―시인 양선규, 송찬호, 김완하, 김흥수, (?), 김대현, 필자(딸 새날, 아내), 백남천, 김종인, 공광규, 박운식, 김시천과 함께
▲ 1997년 실천문학 시절 베트남 여행―문학평론가 고영직, 이성욱, 시인 도종환, 소설가 박범신, 필자, 소설가 전성태, 문학평론가 방민호, 소설가 김영현과 함께
▲ 2011년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고축문 낭독―시인 나문석과 함께
▲ 1991년 작가회의 수련회―시인 이원규와 함께
▲ 1990년 광주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순회 공연장(한남대)―시인 김남주와 함께
양문규
1960년 충북 영동 출생. 충남고등학교 졸업, 청주대학교 국어국문과와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문학박사), 1989년 『한국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총무국장, 열림원 기획위원, (주) 실천문학 기획실장, 대전대학교 겸임교수. 현재 계간 『시에』 편집주간,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대표.
● 자선 대표시
개망초 외 9편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사는 걸까
오늘 밤도 그 핏기 없는 살덩이를
별빛 속에 사르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만 떨구고 사는 걸까
하늘 한번 떳떳하게
우러러보지 못하고 사는 걸까
시궁창보다도 더 어둡고
암울한 이 땅 속에
살과 뼈를 묻고
거친 비바람 헤치며
억만 년 꽃을 피우고 지우며,
또 그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꿈과 희망
고뇌와 실의 속에서도
더불어 함께 살아온 이 땅의
참 눈물이면서도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사는 걸까
―『벙어리 연가』(실천문학사, 1991)
꽃들에 대하여
올해 처음으로 피어난 꽃들에 대하여
아름답다 말하지 말자
봄날로부터 가을의 해거름까지
우리들이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의 어디에나 피어 있을
그 꽃들을 함부로 얘기하지 말자
그리움과 사랑 같은
혹은 순수나 빛깔 따위
마음을 치장하는 너울이 아님을
가지마다 흐드러지는 잎의 하나하나에
말 못할 아픔 베올로 짜여 있음을
우리 얘기하지 말자
묏등가에 서 있는 들꽃 한 송이
멀리서 그저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아니, 이 땅의 주름진 하늘 끝에 닿아
되돌려지는 메아리로
누구나 꽃밭에서 생각하던
통곡하다 떠나간 거리의 한모퉁이
들꽃에 대하여도
우리 말하지 말자
결코 아름답다 말하지 말자
―『벙어리 연가』(실천문학사, 1991)
화정(花井)을 떠나며
꽃나무,
우물가의 꽃나무
영원한 봄날의 꿈나무
꿈속에서도 꽃을 퍼붓던 꽃나무
오로지 하나의 집 위에
향그런 열매를 달던 꽃나무
모진 바람 몰아친다
저 밖의 바람
모스러진 꽃나무 모가지를 꺾고
그 커단 바윗덩이 우물을 매운다
집을 비운다
모든 것이 일순간
솟구치고 솟구치는 검붉은 피
땅속 깊이 스며
옛 생각 껴안고
나지막하게 엎드려 울 때
저 밖의 바람
꽃나무의 비애 외면하고
화정을 떠난다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실천문학사, 2002)
영국사에는 범종(梵鐘)이 없다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산과 산 사이로 구름이 낮게 흘러가고
바람 속을 종소리 대신
소똥 묻은 새가 울고 간다
스님은 심장을 드러내고 계곡물 소리를 듣는다
서로 가는 것을 묻지 않고,
길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소리들이 되돌아와 발 디디는 곳마다
종을 울린다
물은 흘러가는 것을 묻지 않고 계속 흐른다
마음 속의 관음(觀音)
종소리 아닌 종이 운다
절 밖
아름드리 은행나무,
큰 울음
나뭇등걸 속에 내장한 채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다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실천문학사, 2002)
장선리
마당 한가운데 너럭바위 있다
댓돌 위 검정 고무신 있다
마루 한쪽 맷돌 확독 있다
뒤뜰 크고 작은 독 있다
외양간 코뚜레한 소 있다
사랑채 흙벽 종다래끼 뒤웅박
키 호돌이 삼태기 있다
뒷간 똥장군 똥바가지 있다
정짓간 쇠솥 있다
조왕신 절구통 절굿공이 있다
헛간 벽 쇠스랑 갱이 갈쿠리 걸려 있다
도리깨 홀태,
족답식 탈곡기 있다
쟁기 지게에 얹혀 있다
닭장 닭둥우리 있다
개울 나무다리 놓여 있다
뒷산 서낭당 있다
상엿집 있다
천태산 남고개 너머
더 깊은 골짝
장선리
―『집으로 가는 길』(시와에세이, 2005)
감을 매달며
어머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감 깎는다
족히 열 접 넘어 보이는 감들
어머니 손끝에서 껍질 벗겨진다
나는 잘 깎인, 둥그런
감들 싸리꼬챙이 꿰어 처마 끝에 매단다
시커먼 그을음뿐인
내 몸도 실은, 속살마저
가을볕으로 포개지는 연한 건시(乾柿)가 되고 싶다
헌 푸대 자루에 담긴
저물 대로 저문 어머니 뼈같이
상강(霜降) 무렵, 허공 중에 매달리고 싶다
―『집으로 가는 길』(시와에세이, 2005)
식량주의자
식량주의자였던 아버지 평생 농사꾼으로 산다
논과 밭과 한 몸으로 연민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아버지의 연대
쌀 보리 밀 콩 감자 고구마를 위하여
일흔, 하고도 네 해 동안 보급 길 걸어왔다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땅속에 낙원이 들어앉길 바라진 않았지만
똥막대기보다 못한 농사가 뭐 그리 대단해
폐농의 논과 밭 밟지 않고
사월과 오월 사이
거침없이 자운영 꽃 자청한 검붉은 울음
아직도 토해내는 것인가
새파랗게 빛나는 농사는 어디에도 없는데,
―『식량주의자』(시와에세이, 2010)
시래깃국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 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식량주의자』(시와에세이, 2010)
우화루(雨花樓)
운주 대둔산 구름다리를 건너 배티재 골짜기 에돌아 빠져 나가면 경천 불명산(佛明山) 화암사 우화루에 닿는다
삼거리 대추나무 집 홀로된 노인 다랭이논에 모를 내면서 얼레지 해질녘 빗소리에 묻혀 꽃잎 떨어냈다 하고, 부헝이 울음 따라 산마루 넘어갔다고도 한다
핏빛 얼룩무늬 쪽진 머릿속에 살짝 감추고 구름에 가려진 불명산을 날아오르면 심장 한가운데로 물소리 콸콸 흘러드는 곳, 늙은 대추나무 비의 여인 알고나 있을까
걸릴 것 없이 피었다 지는 꽃송이처럼 또한 머뭄 없이 가야할 길을 아는 노스님은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다 겹겹 흘러가는 비와 꽃을 본다
내가 보낸 봄날을 뭐라 해야 하나 얼레지 꽃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나는 또 흘러간 봄날을 뜯어본다
밤하늘 별들은 비안개 속에서도 저 혼자 구름을 개고 집으로 돌아오는 산길에 한 무더기 꽃을 뿌려놓는다
―『유심』(2011, 07/08호)
행복한 사진
늙은 몸이 폭설 끌어안고도 우렁우렁 꿈이 세다
고요한 나뭇등걸 속에는
아직도 푸른 잎사귀들이
귓바퀴를 쫑긋거린다
광기에 찬 예술가들,
포장지로 감싼 성직자들,
혀가 긴 정치가들,
곰팡내가 나는 공직자들
피 묻은 입술의 사업가들,
……그래그래
우리는 모두 견디는 중이다
한때는 나도 독재자를 등 뒤에 두고
산행을 갔다
꿈은 저렇게 무거운 옷을 걸치고도
앵글 앞에서 환한 표정을 지어줄 수 있다
다람쥐에게 슬쩍 등
내밀어 주는 일
너구리에게 사글세도 없이
굴을 내주는 일
딱따구리를 불러들여
구멍을 빌려주는 일
해와 달과 별에게
……그래그래
또, 나의 가장 뜨거운
눈을 맞추어 보는
꿈은 꿈이어서 스스로 독려하며
나는 아직 힘이 세다
―문학사상』(2011년 2월호)
● 시작메모
낮은 곳에서 부르는 노래
냉이, 벌금자리, 돌나물 등이 파릇하게 봄기운을 일깨우자 복수초와 산수유가 노오랗게 꽃망울 터뜨립니다. 들과 산에서는 산꿩과 비둘기가 우는데요. 농부들은 들녘으로 잰걸음을 합니다. 한 해 양식을 구하기 위해 거름을 뿌리고 논과 밭갈이를 시작합니다. 평생 농사일을 하고 계신 아버지도 인삼밭에 지주목을 세우고 차광막을 얹습니다.
시를 쓰겠다고 시를 쫓아다닌 지가 30여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하지만 시와 함께 하면서 밥을 빌고, 옷과 집을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길은 사무사(思無邪)와 맞닿아 있으면서 여여(如如)한 삶의 발자취입니다.
시가 본래 사무사와 여여한 삶의 발자취라 한다면 농사 또한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아니 농사가 사무사와 여여한 삶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 아닐까요.
1999년 불혹이 되는 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향 농막, 중화사, 영국사를 거쳐 여여산방의 생활은 뭇 생명과 더불어 행복한 삶의 양식을 구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특히 천태산 은행나무는 고귀한 생명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겨, 자연 ․ 생명 ․ 평화 ․ 시가 어우러진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봄 속에 여름이 있고, 여름 속에 가을이 깃들어 있습니다. 또한 가을 속에 겨울이 찾아듭니다. 농사가 계절의 순리를 따라가듯이 나의 시 또한 조수초목의 빛과 그림자를 따라갈 것입니다. 거기 천태산과 천년 은행나무가 행복한 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 시선이 선정한 시인 작품론
맑은 그리움의 모서리
정훈
세상이 참으로 수상하다. 언제는 수상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겠는가마는 요즘에는 그 느낌이 다르다. 한 치 앞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나날이 보도되는 각종 사건이나 범죄를 보면 가히 인면수심이란 말이 절로 생각난다. 인간과 세상을 섬기고 떠받드는 마음이 아니라, 우선 내가 먼저이고 내가 먼저 살아야겠다는 이기심이 자기 둘레의 존재들을 파괴하고 병들게 하는 것이다. 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크게는 나라 사이의 문제까지 극도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더 이상의 치유가 불가능하기까지 팽배하다. 제 안의 모심을 짓밟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경쟁’이라는 희한한 내적 윤리에 갇혀서 위험천만한 외줄 위에 놓인 것처럼 앞날을 점치기조차 버거울 지경이다.
양문규 시인의 작품들을 읽기에 앞서 이런 내심(內心)을 토로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가 시를 쓰고 읊는 마음의 뒷면에는 삶의 진실한 가치와 자리가 놓여있다. 이는 사람의 보편적인 생리이기도 하고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의 심성이다. 태초에 생겨났던 인간의 깨끗한 심성을 재확인하는 것이 시를 읽고 쓰는 것일진대, 이 경건한 행위를 지속하게 하는 힘과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모두 삶의 원형으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내팽겨져 나왔다는 무의식적인 자각일 것이다. 양문규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의 시는 지복한 시간과 공간에 걸쳐있다.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무엇을 얻거나 이루고자 하는 욕심이 없다. 그 또한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십여 년을 보내면서 차마 말 못할 일들을 겪었던 사람이다. 결국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인근 천태산 자락에 머물면서, 그야말로 자연과 호흡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도시적 사고방식과 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연과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고뇌와 그리움은 여느 시인처럼 소박하고 인간적인 것이다. 그의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시와에세이, 2011)에는 그 무렵의 심사가 나타나 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천태산 영국사 뒷방에 든 이후 당신 곁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당신 곁에서 묵은해를 보내고 망탑봉에 올라 새해를 맞이할 것입니다. 서울을 생각하며 화정을 생각하고, 무엇보다 내 속에 한 몸이 되어 있는 당신을 기리며 한 해를 맞이할 것입니다.(239쪽)
서울생활에 대한 기억들은 끝내 지워버릴 수 없고, 앞으로도 남아있게 될 편린이다. 인지상정의 감정이 시인마저 비껴갈 수는 없는 법이겠다. 시인은 추억의 공간에 놓인 타향의 기억을 간직한 채 지금 이곳의 공간인 천태산에서 자연과 벗한다. 시인과 자연은 쉽게 묶일 정도로 친밀한 관계이다. 자연의 삶은 인위와 가식에서 벗어나서 맑고 깨끗하고 소박한 마음의 의지와 닿아 있다. 그의 시 또한 허장성세나 언어적 위장이 판을 치는 최근의 시 경향에 멀찍하게 비켜 서 있다. 그의 시가 지향하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바, 세상사에서 비롯하는 온갖 부정적이고 오염된 물질세계의 속성에서 한껏 멀어지려는 시 정신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부터 시인에게 마련된 의식이 아니라 자연과 문명의 지난한 싸움과 변증법적인 고뇌를 거친 다음에 이룩한 것이다. 자연이 주는 풍요로운 의식은 도시문명의 속악한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 본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
어머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감 깎는다
족히 열 접 넘어 보이는 감들
어머니 손끝에서 껍질 벗겨진다
나는 잘 깎인, 둥그런
감들 싸리꼬챙이 꿰어 처마 끝에 매단다
시커먼 그을음뿐인
내 몸도 실은, 속살마저
가을볕으로 포개지는 연한 건시(乾柿)가 되고 싶다
헌 푸대 자루에 담긴
저물 대로 저문 어머니 뼈같이
상강(霜降) 무렵, 허공 중에 매달리고 싶다
―「감을 매달며」(『집으로 가는 길』, 시와에세이, 2005) 전문
시인은 “가을볕으로 포개지는 연한 건시(乾柿)가 되고 싶”어 한다. 이런 소박한 꿈은, 그가 각박한 인간 사회에서 덧칠하게 된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욕망들을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작품에 나오는 ‘어머니’가 뜻하는 바, 자연에 순응하면서 한평생을 살아온 존재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애(敬愛)를 시인은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저물 대로 저문 어머니 뼈같이/상강(霜降) 무렵, 허공 중에 매달리고 싶”어하는 화자의 바람은 숙성이 잘 된 장(醬)처럼 그윽하다. 자연에 대한 귀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연 자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시는 떠나온 자리에서 온순하게 자라나는 모든 것들에 애정이 닿아 있다. 그것이 사람이기도 하고 식물이기도 하면서, 꼭 집어서 뭐라 말하기 힘든 분위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 속에는 삶의 가치나 방향보다는, 혹은 특정한 지향의식보다는 ‘덩그러니’ 놓여있는 안온함으로 가득 차 있다. 지복한 체험이 불러일으키는 안온함은 시인으로 하여금 세상의 풍요로움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게 한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시래깃국」(『식량주의자』, 시와에세이, 2010) 부분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하고 부르면/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는 정경을 상상한다. 이 “시리고도 따뜻한” 모습은 흔히 볼 수는 없는 장면이지만 능히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밥상이 놓인 그림이기도 하다. 눈여겨 볼 점은 화자가 이 장면을 형상화하면서 쓴 ‘통증’이라는 시어다. 상처나 아픔, 그리고 몸 구석구석에서 번지고 있었을 덜 아문 흉터들이 일순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시인에게 통증을 사라지게 했던 ‘시래깃국’의 표징은,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복된 정서를 안겨다주는 원(原) 고향과도 같은 소재이다. 생활에서 얻는 단순한 진실의 묘득(妙得),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삶의 깨달음을 우리는 양문규 시인의 시들에서 보게 된다.
시인이 첫 시집이었던 『벙어리 연가』(실천문학사, 1991)에서부터 최근에 나온 제4시집 『식량주의자』(시와에세이, 2010)에 이르기까지 보여주는 시세계는 일정한 궤도를 그리고 있다. 넓게 봐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되, 세상을 향해 겨누는 날카로운 눈길이 무뎌지는 반면 존재의 성찰은 더욱 빛이 난다. 시간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드는 법이어서 그의 시 또한 젊은 날의 치열하고 타협하지 않는 단독자의 인식이 세상살이의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 묵직한 시적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원시반본(原始反本)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가 다시 되돌아가는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떠나온 자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한 세계를 아우르면서 주물렀던 자리에서 피어올랐던 수많은 고뇌와 방황이 포함된 세계이다.
시궁창보다도 더 어둡고
암울한 이 땅 속에
살과 뼈를 묻고
거친 비바람 헤치며
억만 년 꽃을 피우고 지우며,
또 그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꿈과 희망
고뇌와 실의 속에서도
더불어 함께 살아온 이 땅의
참 눈물이면서도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사는 걸까
―「개망초」(『벙어리 연가』, 실천문학사, 1991) 부분
올해 처음으로 피어난 꽃들에 대하여
아름답다 말하지 말자
봄날로부터 가을의 해거름까지
우리들이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의 어디에나 피어 있을
그 꽃들을 함부로 얘기하지 말자
그리움과 사랑 같은
혹은 순수나 빛깔 따위
마음을 치장하는 너울이 아님을
가지마다 흐드러지는 잎의 하나하나에
말 못할 아픔 베올로 짜여 있음을
우리 얘기하지 말자
―「꽃들에 대하여」(『벙어리 연가』, 실천문학사, 1991) 부분
그가 노래한 꽃과 풀들은 우리 산천에 아무렇게나 무리지어, 혹은 드문드문 피어있는 식물들이다. 식물들을 자주 시적 소재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얼마나 그가 우리 땅과 자연에 애정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숱한 식물 이미지를 추구했던 첫 시집에서 보여준 시적 인식은, 실은 세상을 향한 시인의 목소리가 숨어있는 발화의 형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사는 걸까”(「개망초」)나 “이 땅의 어디에나 피어 있을/그 꽃들을 함부로 얘기하지 말자”(「꽃들에 대하여」)와 같은 진술은 이 땅 어디에나 피어 있는 꽃들과 풀들에 대한 우리 인식의 지평에서 한 다리 건너뛴 의미영역으로 치달린다. 그것은 불온한 시대를 헤집는 시인의 마음이고, 아직 완전한 아름다움을 갖지 못한 세상의 존재들에게 시인의 의식이 개입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시인의 의식은 참된 삶에 대한 의지와 다른 이름이 아니다.
그는 고단했던 서울생활을 등지고 천태산으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삶의 참된 가치를 생각하게 했던 서울생활을 통해서 더욱 마음을 단련했을 것이다. 이럴 때 그가 보는 세상은 한결 웅숭깊어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시집인 『영국사에는 범종에 없다』(실천문학사, 2002)에 실린 「영국사에는 범종(梵鐘)이 없다」의 구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물은 흘러가는 것을 묻지 않고 계속 흐른다//마음 속의 관음(觀音)/종소리 아닌 종이 운다”. 가는 세월을 붙잡지 않고, 미련 없이 흘러가는 물처럼 시인의 마음 또한 부드러워졌으리라. 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강함에 무릎 꿇는 약한 존재로서 말랑함은 아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예전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멀리까지 나아갔지만 실은 제 속에 담긴 우주를 응시하기 위한 에움길이었음을 확인한다. ‘마음 속의 관음’, 다시 말해서 들리지는 않지만 그 어떤 곳이라도 들리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천지간의 우주 음(音)을 포착해낸 시인의 마음은, 일상 속에 널려있는 모든 존재들이 내뿜는 기운이 바로 하늘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음이다. 자연과 고향산천의 그리움은 시인 자신이 머물고 자리 잡아야 하는 데가 어디인지 깨닫게 한다.
마당 한가운데 너럭바위 있다
댓돌 위 검정 고무신 있다
마루 한쪽 맷돌 확독 있다
뒤뜰 크고 작은 독 있다
외양간 코뚜레한 소 있다
사랑채 흙벽 종다래끼 뒤웅박
키 호돌이 삼태기 있다
뒷간 똥장군 똥바가지 있다
정짓간 쇠솥 있다
조왕신 절구통 절굿공이 있다
헛간 벽 쇠스랑 갱이 갈쿠리 걸려 있다
도리깨 홀태,
족답식 탈곡기 있다
쟁기 지게에 얹혀 있다
닭장 닭둥우리 있다
개울 나무다리 놓여 있다
뒷산 서낭당 있다
상엿집 있다
천태산 남고개 너머
더 깊은 골짝
장선리
―「장선리」(『집으로 가는 길』, 시와에세이, 2005) 전문
위 시처럼 아무런 조건이나 욕심이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시인에게는 천상(天上)의 모습인 것이다. “너럭바위”“고무신”“뒤웅박”“닭둥우리”들은 장선리를 구성하는 요소임과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시인에게 장선리와 등가로 놓여있다. 시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약 없는 앞날을 위해 질주하는, 복잡한 현대인의 모습과 상치되는 자리에 ‘장선리’를 배치한다. 자연과 인간이 행복하게 결합하는 순간을 마치 카메라의 정지된 화면처럼 보여주는 시 「장선리」에서 시인이 되돌아간 곳은, 아무런 걱정 없이 천진난만하기만 했던 우리들의 유년이 자라났던 공간이다. 이 속에 들어가면 격렬한 풍랑의 노여움도 말끔히 사라지고, 머릿속을 맴돌던 상처의 기억들도 지워진다. 산 고개 너머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잠깐 목을 축였다 쉬어가는 곳에 시인이 서 있다. 양문규 시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를 쓴다. 여기에서 자연과 시인은 하나가 된다. 자연(自然), 말 그대로 저절로 그렇게 존재하게 되는 공간에서는 애써 꾸미지 않아도 그럴듯한 세계가 독자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시인은 자연에 놓여있는 조그만 존재일 뿐인 자기 자신을 허투루 과장하지 않는다. 이 축소된 자아로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제 속을 말끔히 비우는데 부단한 노력을 한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 우리가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서정시가 주는 미덕을 떠올릴 수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자아는 세계와 상응하고, 이 상응의 기운에 놓여있는 존재는 세상과 자아의 대립과 분별이 가져다주는 슬픔에 빠져들지 않는다. 다만 음유할 뿐이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마음의 결을 가다듬지 않을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말쑥한 속성에 비추어 시인의 내면이 투명한 거울처럼 눈앞에 불쑥 나타나기 때문이다.
걸릴 것 없이 피었다 지는 꽃송이처럼 또한 머뭄 없이 가야할 길을 아는 노스님은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다 겹겹 흘러가는 비와 꽃을 본다
내가 보낸 봄날을 뭐라 해야 하나 얼레지 꽃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나는 또 흘러간 봄날을 뜯어본다
밤하늘 별들은 비안개 속에서도 저 혼자 구름을 개고 집으로 돌아오는 산길에 한 무더기 꽃을 뿌려놓는다
―「우화루(雨花樓)」(『유심』, 2011, 07/08) 부분
“머뭄 없이 가야할 길을 아는 노스님”과 “밤하늘 별들”을 무심코 응시하는 시인은 “흘러간 봄날을 뜯어”보기만 하는 “내”, 곧 시인 자신과 대비된다. 사실 침묵의 자전 운동을 하는 자연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자연의 은밀한 속삭임을 흘려보낼 때가 많다. 자연의 비의가 아니라 자연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도 이를 의심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시인은 겸손하게도 우리 인간이 지닌 허점을 보태거나 빼지도 않고 그대로 게워낸다. 이것이 자기 확인이고 자기 긍정이다. 이 확인과 긍정을 거치면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인 ‘인간’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일들을 아무런 회한이나 미련 없이 떠나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인간이기에 쉽지 않은 특징을 객관화해서 시적 형상화의 도마에 올려놓게 되면, 시인과 독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동질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과 독자 사이의 공통의식은 곧 감성적인 공분모이고, 이 공감각의 서정이 시로 하여금 울림을 자아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기에 한계가 있지만, 한계를 자각하는 힘이 있기에 드넓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연적 능력과 권능의 축복을 알아차리는 자다. 양문규 시인의 시들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거기’는 자연이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제공했던 유토피아적 공간이다. 지고지순했던 원초적 공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해지고 황폐해진 오늘날에서는 그곳으로 회귀하는 길이 여의치 않다. 도시 문명과 정보의 가속화로 말미암은 정신적 질병은 예민한 시인의 감성에 포착되어, 속수무책으로 ‘앓아버린다.’ 이 지독한 신열(身熱)은, 못내 그리워하지만 쉽사리 안착할 수 없는 존재의 원형에서 비롯하는 절대적 거리감에 대한 우울일 것이다. 비로소 ‘집’에 돌아오게 된 시인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훨씬 앞질러서 나아가버린 시인의 발자국에 달라붙어 있는 자연적 원형질에 대한 그리움이 앞으로도 그를 시인이게끔 할 것이다. “저 혼자 구름을 개고 집으로 돌아오는 산길에 한 무더기 꽃을 뿌려놓는” 밤하늘의 별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는 자, 그는 끝끝내 돌아가지 못할 궁극적인 고향이 건네는 은은한 향기에 이미 취해버린 사람이다. 역으로, 자신과 세계의 원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기에 그는 지복한 존재의 표정들을 잡아내어 자신과 함께 ‘그곳’으로 데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밤하늘의 별들과 꽃, 그리고 산속 제각각의 얼굴로 남아있는 유․무형의 존재들이 시인과 함께 나란히 걷는 길을 생각한다. 그 맑고 투명한 길 위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마음이 진정 우리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표정들이 부끄러운 듯 내보이는 속내라면 좋겠다. 외롭지 않기에 그렇고, 또한 그 모든 외로움들을 흩날리게 할 수 있는 완전한 그리움이 있기에 그렇다. 이 온통 그리움들의 모퉁이에서 서성이는 시들을 양문규 시인은 노래한다.
정훈
경남 마산 출생.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