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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묵상글 ( 대림 제2주간 토요일. - 나의 예언자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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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의 예언자는?
대림 2주 토요일-2012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세례자 요한은 다시 온 엘리아입니다.
엘리야 시대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시 온 엘리야, 곧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당대 사람들은 몰라보고
당대 사람들이 제멋대로 다뤄 죽고 난 뒤에야 후대 사람이 알아봅니다.
그러면 왜 당대에는 알아보지 못하고 후대에야 알아볼까요?
그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요즘 선거판에서는 <내가 하면 검증, 남이 하면 Negative 공세>,
이런 현상과 깊이, 아니 정확히 관련이 있지요.
예언자는 똑같은 예언, 곧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데
그것이 나에게 하면 예언이 아니고 트집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하면 트집이 아니고 예언이 되는 것이지요.
누구든 당장은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이는 아이가 주사를 놓는 의사를 나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슬픈 운명입니다.
나중에는 높이 칭송받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는 죽일 놈입니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미래의 칭송을 생각하며 현재의 냉대와 질시를 감수하는 것은
아무리 예언자의 운명일지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예언자들은 그러므로 용기 있는 사람 그 이상의
이런 운명을 주신 하느님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존재입니다.
살을 에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듯
그 아픈 짓을 독하게 해내는 존재이고
그 대가로 살해당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잘못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짚어내는 사람,
나의 아픈 곳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후벼 파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이 나의 엘리야이고 나의 요한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엘리야와 나의 요한은 과연 누구일까요?
나는 지금 그들을 하느님께서 바로 내게 보내신
나의 엘리야와 나의 요한으로 알아보고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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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말라키서>(3,1,23)에서는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내린 율법과 규정을 기억하라는 말(3,22)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여기에는 엘리야아 오지 않았는데 어뗗게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슴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이제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며,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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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에게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게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루카복음 1장16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 그를 죽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을 수 있는데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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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림시기에 준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대림특강과 성탄판공을 준비합니다. 대림특강을 통해서 주님 성탄의 의미를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았다면 예물을 준비했던 동방박사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와서 경배했던 목동들처럼 깨어 주님의 탄생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탄판공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있는 죄의 뿌리들을 없애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모시는 최초의 구유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을 맞이하는 정갈한 구유로 만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했던 시메온과 한나처럼 기도하며 주님의 탄생을 축복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10일에 코네티컷 한인성당에서 ‘대림특강’을 하였습니다. 주제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VIP' 그리고 신앙의 'MVP' 되자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으뜸과 세상의 최고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선악과를 쟁취하는 것이지만, 신앙의 으뜸과 신앙의 최고는 회개하는 것이고, 회개했다면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으뜸과 신앙의 최고가 되어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대림시기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대림시기 전례에 사용하는 두 가지 감사송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마련해 주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합니다. 독서와 복음도 이런 전례의 구조에 맞게 정해졌습니다. 두 번째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독서와 복음도 이런 전례의 구조에 맞게 정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주님의 탄생 그리고 천사들의 경배로 정점을 이루게 됩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성탄이 이제 우리의 삶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전례를 통해서 성탄을 준비하고,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그저 통과의례로 연말연시의 과정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그저 2000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어린 시절 가슴이 설렜던 빛바랜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은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멀리 동방에서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러왔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성탄에 합당한 예물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정화되어 이제 내가 주님을 맞이하는 구유가 되면 좋겠습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침묵과 관상 속에서 주님의 성탄을 경건하게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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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엘리야는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뿐더러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혹시, 혹시 말입니다. 우리도 이런 실수를 한 건 아닐까요? 이미 주님께서는 많은 선한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물며 선한 것을 우리 멋대로 다루지는 않았는지요.
우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우리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시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또한 이 시기는 기다리는 동시에 우리 영적인 부분을 다시금 정화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지나쳤을지 모릅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듣고 따르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거나, 귀찮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의 의미는 이미 지난 일에 대한 질책이 아닙니다. 다가올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증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고난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길 끝에 영광을 얻게 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늘 승리와 영광만이 있기를 바랄지 모르지만,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꼭 겨울이 없는 봄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영적인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까지 사랑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고난을 받아들일 때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두루마리와 곽 티슈
얼마 전 읽은 책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있었습니다. 두루마리와 곽티슈에 대한 해학적 고찰이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두루마리 휴지는 언제 끝날지 가늠 할 수 있습니다.
곽 티슈는 생각지도 못한 날 끝나버립니다.
우리 인생과 참 많이 비슷합니다.
어떤 삶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있지만
어떤 삶은 생각지도 못한 날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루마리일지 곽티슈일지를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정하는 것이니까요.
두루마리던지, 곽티슈던지 끝나기 전까지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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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사람이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취업도 되지 않고, 집에 안 좋은 일이 계속되어서 너무 힘든 상황에서 친한 친구가 이 점쟁이를 소개해 준 것입니다. 그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믿지 않는다면서도 시간을 내서 찾아갑니다. 점쟁이는 꽤 긴 시간 동안 점을 보더니 갑자기 큰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될 팔자입니다.”
이 사람은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점쟁이가 절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 어려운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분명히 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왕이 없으니 ‘대통령이 되는 것일까?’ 싶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아직 때가 안 되었을 뿐’이라면서 계속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남자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란 없습니다. 노력해야 여기에 걸맞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왕이 될 수 있을까요? 혹시 모르겠습니다. ‘게으름의 왕’도 왕이라고 한다면 말이지요.
어떤 사람의 ‘인맥’이 대단하다면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그렇다면 저절로 그 인맥이 생기고, 좋은 관계도 저절로 된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만큼 노력했기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좋은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맡긴 듯이 계속 요구만 하고 있으면서 하느님과 좋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말라키서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지요. 문제는 엘리야가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룬 것입니다. 엘리야를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도 없었기에 세례자 요한을 함부로 다룬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그칠까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고난을 줄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먼저 해야 구원의 길에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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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부요한 삶은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고 더 적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니콜라스 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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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우리가 살아있는 또 하나의 엘리야요 세례자 요한이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좋습니다.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새벽에 일어나 카톡을 열으니 김남조 시인의 대표작인 “겨울바다”라는 시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지난 10월10일에 96세로 선종한,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지닌 유명한 가톨릭의 여류시인입니다. 마지막 시집은 93세때 냈다하니 참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겨울바다”시중 마음에 와닿은 대목이었습니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그대로 뜨거운 기도의 시인의 기도시임을 깨닫게 합니다. 겨울바다에 서듯, 새벽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면 맨먼저 바라보는 겨울하늘입니다. 이어 떠오르는 예전에 써놨던 두편의 자작 고백시입니다.
“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하늘
흰구를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정주”라는 시에 이어 언젠가 인용했던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다음 고백시입니다. 물론 여기서 당신이 가리키는 바는 평생 연모戀慕의 대상인 주님입니다. 새벽마다 기상하여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 오는 겨울하늘에 저절로 떠오르는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자작시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싶은 당신”-1998.11.22
이런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에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의 순례여정중에 엘리야,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함을 봅니다. 결코 예수님은 혼자가 아닌 무수한 도반들과 함께 함을 봅니다. 말그대로 “더불어(together)”의 여정이요 이점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내용으로 그 앞에는 높은 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이 일어납니다. 세 애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동행했으며, 영광스러운 변모시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세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와 엘리야와도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눴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영적지평은 이렇듯 영원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으며 우리 또한 이런 예수님과 평생 도반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득 작년에 선종하신 전임 교황인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자신의 영적스승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는 고백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의 흠모하고 존경하는 성인들을 스승이자 도반으로 삼아 깊은 친교를 나눴던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분명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니셨을 것입니다. 오늘 집회서에서 엘리야의 활약은 얼마나 눈부신지요! 한마디로 하느님과 완전 사랑의 일치를 이룬 삶이었기에 이런 자유자재한 기적이요, 에녹과 모세에 이은 승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 끝부분은 공동번역이 더 실감이 납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며, 당신과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을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 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집회48,11)
이 대목은 30년전 어느 수녀님의 편지글에 순진하게도 당신을 저로 착각하고 많이 행복해 했던 내용인데 후에야 집회서의 말씀임을 알고 실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이런 당신은 엘리야는 물론 궁극에는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이런 대상에 해당된다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좌우간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면면한 전통은 엘리야의 재림입니다. 오늘의 구약의 집회서와 마지막 성서, 말라기서 마지막 구절, 그리고 루가 복음에 연이어 나오는 공통적 내용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48,10)
똑같은 내용이 구약의 마지막권 말라기서 맨끝에도 나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어 루카복음 즈카르야의 노래에도 나옵니다.
“그는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아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1,17)
새삼 엘리야,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 죽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안에 다 살아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주님은 세례자 요한이 재림한 엘리야요 이를 알아보지 못한 무지한 이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또 예수님 자신도 당신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에게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내적으로 엘리야, 세례자 요한과, 또 우리와 운명공동체처럼 깊이 결속되어 있는지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후 부활하시어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악순환의 반복을 끊고, 이 회개와 은총의 대림시기 또 하나의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 되어 이분들이 못다한 화해와 일치, 평화의 일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극단의 분열과 갈등의 전쟁의 시대에 화해와 일치, 평화의 일꾼이 되는 것보다 중대한 사명은 없으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평화의 일꾼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 평화의 일꾼이 되어 사는 것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끝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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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17,12)
사랑이
탐욕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사랑이
이길 것입니다
희망이
현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희망이
이길 것입니다
믿음이
맹종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믿음이
이길 것입니다
밝음이
어둠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밝음이
이길 것입니다
진리가
거짓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진리가
이길 것입니다
착함이
악함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착함이
이길 것입니다
자유가
억압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자유가
이길 것입니다
연대가
배척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연대가
이길 것입니다
평화가
폭력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평화가
이길 것입니다
살림이
죽임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나
끝내 살림이
이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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