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여사님은 한국 부동산을 사고 파는 일까지 엄마에게 부탁할 정도로 엄마를 믿었고,
동생들이 미국에 갈 때마다 흔쾌히 자기 집에 있으라고 했다.
그 정도로 엄마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엄마는 그 분을 칭할 때 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 분의 집은 원래 부자였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남편 재산만 보고 결혼을 했다는 걸로 보아
재물 욕심이 많은 편인 것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분 집에 처음 갔었는데 방금 전 엄마에게
심여사 아줌마 집이 몇 평이었지?
하고 물어보니
대지 300평에 건평 100평이었지
하고 자기 집처럼 정확하게 기억하셨다.
우리 집도 당시 집에 수영장도 있고 작은 홈바도 가지고 있어서 친구들이 집에 오면 부러워 하곤 했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안엔 비단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넘으면 우리가 뛰어 놀던 작은 놀이터도 있었다.
거기서 그네도 타고 미끄럼도 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남 부러운줄 모르고 살다가 우리집에는 없는 테니스 코트, 당구장, 지하 전체를 호텔 바처럼 꾸며 놓은
으리으리한 홈바 등을 보니 어린마음에 그 집 언니 오빠들이 부럽게 느껴졌다.
땅도 여기 저기 많았는데, 심여사님의 땅 욕심은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도 멈출 줄을 몰랐다.
암 진단을 받고도 포천 땅을 매입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하니 말이다.
심여사님은 내가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그 정도로 부자인데 뭘 이민까지 가나 싶었는데 이민을 가서도 스페니쉬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해서
한국에서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그 분은 엄마에게 절대 섭섭하게 대하지 않으셨는데 이상하게 동생들은 금방 그 집에서 나와 다른 집을 구했다.
졸업할 때까지 렌트나 식비까지도 내지 말고 그냥 있으라는데도 말이다.
얘기를 들어 보니 일요일에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교회에 데리고 간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그렇게 독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 가족이 다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절과 성당을 왔다 갔다 하는 박쥐들이면서 말이다.
성당을 잘 나가지 않던 아빠도 결국에는 윤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성당에서 장례를 치렀다.
막내는 심여사 아줌마가 교회에 데려간 바로 그 다음 주에 바로 집을 구해 나왔다.
셋째는 좀 더 버텼던 것 같은데 날더러 절대 아줌마 집에 가지 말라고 그냥 처음부터 집을 구하든지 안 되면
기숙사에 있으라고 한 걸로 보아 종교 강요가 좀 심했던 것 같다.
그런 얘기를 다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모 걱정을 했다.
이모는 우리같은 나이롱 신자들이 아니라 정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억지로 교회에 데려가면 당연히 그 집에서 배겨나질 못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모가 그 집을 나와 어느 교수 집에 입주 가사 도우미로 들어 가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평생 사람을 써 봤으면 써 봤지 남의 살림을 해 본 적이 없는 이모가 어떻게 버틸까 싶어 걱정을 했지만
이모는 그 나이에도 써 주는 집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좋아하셨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일을 해서 빚의 일부라도 갚고 싶었는데 나이가 많아 일자리를 못 구할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고 했다.
인격도 존중해 주고 업무 범위도 명확해서 전혀 힘들지 않다고 하셨다.
무슨 교수집이 그렇게 잘 사는지 모르겠다며 집에 엘리베이터도 있고, 집에서 바로 선착장으로 연결되어 요트를
타러 나갈 수도 있다고 하셨다. 요트도 몇 백만불은 하지만 한 번 기름을 넣으면 이천불이 후딱 넘어서
친구 요트를 같이 쓰는 것조차 버거웠던 기억이 있던 나는 굉장한 부잣집으로 가셨나 보다 하고 짐작만 했다.
79세의 가사 도우미를 쓰는 것도 미국이니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이모가 워낙 음전하고 요리 솜씨가 좋은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모는 처음에 그 집이 왜 그렇게 부자인지도 모르고 일만 했다고 한다.
그 집 아버지가 무슨 큰 회사 회장이라는데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모는 그 회사의 이름조차
듣고도 잊어 버렸다.
아들은 어디서 밥은 먹는지, 6개월 비자 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이모는
그 집 주인 아버지가 부자든 말든 신경 쓸 여력조차도 없었다.
첫 월급을 받자 마자 엄마에게 비행기표 값과 엄마가 챙겨준 비상금의 일부부터 부쳐준 걸 보고
엄마가 우시던 생각이 난다.
이렇게 깔끔을 떨어 그렇게 복이 없는 걸까?
남편복 없는 사람은 자식복도 없다더니 친자식도 아니고 입양한 자식 때문에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다니....
하면서 탄식을 하셨다. 하지만 이모에게 아들은 그냥 아들일 뿐 입양했다고 뭐가 달랐겠는가?
그 집에 어느 날 그 부부의 아버지가 오신다고 전 식솔이 쓸고 닦고 특별 요리를 만들고 아주 난리가 났다.
모임은 거의 본가나 장남 집에서 해서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말 어쩌다 오시는 아버지의 방문으로 온 집이 축제 분위기라 이모도 이모의 필살기인 만두도 빚고
순대도 만들고 가자미 식혜 같은 것도 만드셨다.
집 게이트에서 현관까지 차로 한참을 달려야 할 정도로 넓은 집이었지만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는 집이었다.
이모와 동갑인 그 집 아버지는 이북 출신이었다.
하지만 수 십 년 동안 미국화 되어서 아주 유쾌하고 농담도 잘 하고, 겉만 한국 사람이지 마인드나 가치관은
완전히 미국분이었다.
그렇게 수 십년을 사셨다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미국인 신분으로 북한에
직접 가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분은 이모의 음식이 입맛에 맞으셨는지 어디 출신인가를 물으셨고 한 고향은 아니지만
같은 함경도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 저것 물으시며 반가와 하셔서 이모도 모처럼 고향 친구라도 만난 듯 기뻤다.
게다가 나이까지 동갑이니 두 사람은 급 친밀감을 느꼈다.
사업체는 큰 아들에게 이미 물려주고 마나님까지 돌아 가셔서 십 년 가까이 혼자 사시던 그 분은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만나 봐야 자신의 재산만 노리는 여자들이니 마음만 다칠 뿐이었다.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던 아버지가 거의 매일이다 시피 막내 딸 집에 오니 사람들은 금방 눈치를 챘다.
이모는 결혼 생활을 하긴 했지만 남편의 바람 이후로 한 번도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결혼 생활을 할 때조차도 시어머니가 같이 살면서 잠자리를 못하게 했다.
퍽하면 방문을 열고 불러대는 바람에 집에서는 부부관계가 거의 불가능했다.
오죽하면 신혼초에는 남편이 이모를 밖으로 불러내어 간첩 접선하듯 밖에서 만나 관계를 하고 오곤 했을까?
그렇게 괴롭히던 시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이모 손을 꼭 잡더니
“세상에 너같은 며느리는 없는데.... 내가 너한테 죄가 많다.”
는 말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신혼초부터 그렇게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한 번 관계를 가졌으니
깊은 정이 붙기 힘들었을 것이다. 말만 아내지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는 남편은
결국 밖에서 다른 여자를 찾았다.
나이만 79세이지 처녀 같은 이모는 난생처음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다고 그동안 이모에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모는 화려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여성적이고 지적으로 생기셨다.
탈렌트 김미숙씨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옛날 분이셔서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살림 솜씨도 정말 야무졌다.
이모의 그 쫄깃한 피에 감탄이 나오는 그 꽉찬 만두속이라니....
만두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이모 만두라면 배가 터지게 먹곤 했다.
엄마 친구분들 중에 성훈엄마라고 하는 분과 이 신사동언니의 만두 실력은 정말 막상막하였다.
결국 신사동 언니는 북한 최고, 성훈엄마는 남한최고로 결론이 났지만 말이다.
그리고 남편을 섬기는 태도도 정말 존경스러웠다. 남녀가 동등하고 어쩌고를 떠나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극진히 대할 수 있다는 건 존경받아 마땅한 것 같다.
여성적이고 조신하기만 하던 이모가 사업을 하면서 좀 털털한 성격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전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다시 일본 기생 모드로 바뀌었다.
인물도 좋고 솜씨도 야무진 이모에게 관심을 보인 남자들이 왜 없었겠냐마는
이모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남자라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죽으면 죽었지 다시 결혼할 마음은 없다고 하면서....
아들 때문에 사는 거지 남의 건물에서 첩 살림 내려다 보던 그 날, 자신은 죽은 거라고 하셨다.
이모가 경제력이 없었다면 어쩔 수 없이 재혼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모는 집도 있었고, 가게도 있었고, 이모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아들의 부도가 아니었다면 이모는 그렇게 혼자 살다 가셨을 사람이었다.
아무리 뼈가 부서져라 헌신을 해도 한 번도 자신에게 예쁘다 잘한다 한 적이 없는 남편과는 달리
이 회장님은 너무 다정다감했다.
눈이 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회장님의 눈을 보면 처녀처럼 가슴이 뛰었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데이트를 즐겼다.
여느집 같았으면 행여 재산이라도 빼돌릴까 훼방이라도 놓을 수 있었겠지만,
이 집 이남 일녀는 오히려 기뻐했다.
적적하게 살던 아버지에게 좋은 친구가 생겼다고 어떻게 하든 도와 주려 했다.
이모가 있던 집, 교수 부인인 막내딸이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이모의 비자 기간이 만료 되어 간다고 슬쩍 흘린 것도 그 딸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 코치도 해 주었다고 한다.
너무 이 여자 저 여자 별 여자를 다 보아 온 회장님은 재혼은 아예 포기하고 살았는데
79세에 마치 첫사랑에라도 빠진 듯 이모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그 사이 우리는 이 회장님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000의 창업자였다.
이모는 그 기업을 잘 몰랐지만 우리 네 자매는 000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 했다.
000의 창업자가 한국사람이라는 건 얼핏 들은 것 같았지만 우리가 아는 사람이 그것도 79세나 된
신사동이모가 그 집 안방마님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불법체류자로 만들 수 없었던 회장님은 이모를 라스베가스로 데리고 가셨다.
그 때 이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용기라는 걸 타 보았다고 했다.
라스베가스는 미국에서 혼인증명서를 가장 빨리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증명서 때문에 약식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에 그걸로 끝인가 했더니
다시 하와이로 가서 카할라 호텔에서 정식으로 결혼식도 치뤘다.
이 모든 일들이 단 몇 달 사이에 다 일어났다.
항공기 티켓까지 남이 끊어 준 걸 들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가 급하게 챙겨준 백달러짜리 오십 장이 이모의 전재산이었다.
평생 그렇게 살림 살고 시어머니 모시느라, 또 이혼한 이후에는 아들 키우고 사업 하고 전남편 병수발까지 하느라
그렇게 뼈가 부서져라 고단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런데 남은 건 산더미같은 빚과 수중의 오천불이 전부였다.
그 오천 불마저도 이모 성격으로는 갚아야 할 돈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79세의 나이에 남의 집 입주 도우미로 들어가던 날은 또 어떤 심정이었을까?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최고령 신데렐라가 되리라 상상이라도 해 봤을까?
남자라면 학을 떼다시피 하던 자신이 79세에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게 될 거라고....
아이코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썼는데 오늘도 후편을 완성 못했네요.
일해야 돼서 여기서 맺고
다음 편에는 부득이 19금 이야기를 좀 해야할 것 같아요.
신사동 이모의 완전 반전 매력이 펼쳐지니 기대해 주세요.
경4방이니 그런 얘기 해도 되죠?
소심한 성격이니 돌 맞을까봐 미리 방어합니다.
모두들 행복한 하루 되시구요.
일반적으로는 재력있는 사람을 만나면 신데렐라라고 하긴 하지만..... 저도 매너김님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야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되는 거구요. 저도 제 기준의 신데렐라가 되서 제 이야기도 한 번 써 보고 싶네요.
너무.너무.잼나게 즐독했습니다
79세 19금 벌써 다음글이
기다려집니다
춤추는 별님
맛저하시고 편안한 쉼하셔요
감사합니다 🙏⚘️🎶
애선님 반가와요 ^^ 오늘 일을 좀 했더니 많이 피곤한데 내일 아침에도 컨디션만 허락하면 또 써 보려구요. 애선님도 편안한 밤 되세요 ^^
오랫만에 굿 입니다 물흐르듯 옆에서 애기 해주듯 써내려간 글속에 저도 모르게 빠르게 읽어 내려 갔네요 다시금 감사
뼈 때리는 비평도 필요도 하겠지만 이렇게 칭찬해 주시니 또 쓸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참대남님 ^^
춤추는 별님의 19금 기대가 됩니다..
무삭제 버젼 49금도 괜찮습니다 ㅎㅎㅎ
19금 들어가기도 전에 12시가 다 되어 버려서... 감질나게 해 드려 죄송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