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금과 가출의 위기, 제너럴 채의 지혜를 빌립시다. - 셋 1/3
글을 쓰다 보니 무척 길어졌습니다.
"송금과 가출의 위기, 제너럴 채의 지혜를 빌립시다. - 셋"은 3부로 나누어서
하루에 하나씩 올립니다.
3편 다 읽으셔야 전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펌 : 채명신 장군님 회고록 - 베트남 전쟁과 나)
전투 경험이 없는 병사들은 ‘제 방귀에 놀란다’는 옛 속담처럼 사격군기가 확실히 서지 않을 때가 허다했다.
전장에서의 과도기적 전쟁공포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경우가 초전에는 흔히 있었던 병폐의 하나다.
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는 1966. 9. 16 부산 3부두를 출발하여 1966. 9. 22 월남 나트랑에 상륙하여 인근지역인 닌호아에 주둔했다.
백마사단 본대가 파월하기 전 부사단장 백문 준장이 인솔하는 선발대가 닌호아에 도착했다.
숙영지 외곽 경계를 위해 야간 매복을 내보냈는데 그 매복 진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수류탄을 투척하고 기관총을 발사하는 등 격전을 방불케 하는 일이 생겼다.
날이 새면서 격전장 전방을 살피니 난데없이 물소 20마리가 죽어 자빠져 있었다.
매복 진지의 백마부대 병사들이 한 떼의 물소가 몰려 오는 것을 베트콩이 공격해 오는 것으로 겁먹은 나머지,
일제사격전을 벌인다는 것이 적이 아니라 물소 떼를 사격했던 것이다.
아침 10시가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월남 사람들이 떼로 몰려 와 아우성을 쳤다.
“물소 값 물어내라"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니 그 고장의 군수와 경찰서장까지 나타났다.
백문 준장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채명신 장군께 전화를 걸어 왔다.
내용인즉, 물소를 죽였는데 물소 값 물어내라는 것이었다.
백마부대 선발대로 왔으니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기에,
“배상해 주고 민심을 달래라.”
고 하며 주월사령부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3,000달러를 보내 주었다.
채명신 장군께서는
“소 임자가 달라는 대로 물어 줘라.”
고 일렀다. 그리고 덧붙여 반드시 지방 유지 입회하에 주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소값 흥정을 하는 데 시세를 알아 보니 한 마리에 30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데
100달러씩 달라고 하기에 다 주라고 했다.
군수와 경찰서장 입회하에 20마리 값 2,000달러를 배상했다
그렇게 되면 그 물소는 한국군의 차지가 되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 경찰서장이 “몇 마리 줄 수 없느냐”고 사정하더란다.
“경찰관이 매일 밤 매복 근무를 하는데 서장으로서 미안해 사기 양양을 시키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다섯 마리를 떼어주니 군수가 또 달라고 하기에 또 주고,
소 임자까지 나서서 사정사정하기에 20마리 다 나누어 주었다.
소값 2,000달러를 물어 주고 소 20마리 다 나누어 준 것으로 그 해프닝은 끝났다.
그 사건은 손해가 아니었다. 닌호아 인심이 확 돌아섰던 것이다.
과거 프랑스군이나 일본군 그리고 요즈음 미군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외국군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던 주민들이 한국군의 협조자가 된 것이었다.
중공의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처음으로 게릴라전을 시작할 때 부하들에게 하달한
8대 요소 중 하나가 ‘물건을 살 때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정당한 가격을 주도록 하라.’는 것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소값 2,000달러가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보다 몇 배 더 아군에게 유익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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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전쟁 얘기가 나오길 기대했는데, 실망하셨다구요?
그렇다고 한베 가족에 대한 얘기도 아니라고요?
조금만 참고 읽어 보세요.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했습니다.
조금 뒤에 본론이 나옵니다.
주월파병 한국군은 전투는 안하고 물소사냥만 한 것 처럼 왜 글을 쓰느냐?
파월 장병들을 비하하려는 목적에서 쓴 글이 아니냐?
천만에 말씀입니다.
물소가 몰려 오는 것을 베트콩이 공격해 오는 것으로 오인한 나머지,
물소 떼를 사격했던 것이다.
DMZ서 근무서보신 분들은 이해할 겁니다.
제가 옛날에 들었던 얘기인데,
부시럭 거리는 소릴 듣고는 방아쇠를 당겨서,
그 다음날 아무 것도 없으면,,, 영창가고,
고라니나 하다못해 쥐새끼라도 한 마리 죽어 있으면
포상휴가간다고 하더군요(?)
행여 간첩이 사살되었을 때는 제대때까지 휴가 준다고 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근무서다가 물소를 베트콩으로 오인해서 죽였으니???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오히려 경계를 철저히 섰다고 자랑해야 하는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윗글을 쓰는 목적은 조금뒤 하기로 하고,
일단 시장하신 분들을 위하여 물소고기 요리를 대접합니다.
자 아침 굶고 오신분, 아직 점심 식사 안하신 분들,,,,
그 물소고기로 만들 수 있는 벳남음식을 올립니다.
만약에 그 때 그 물소가 한국군 소유가 되었고,
벳남 요리사가 요리했다면 이런 요리가 나왔을 겁니다.
또 참고삼아,,,
베트남에서는 염소고기를 최고로 친다고 하더군요.
물소 고기는 질겨서 잘 먹질 않아서 돼지고기보다 더 싸다고 하더군요.
저도 이 음식 얘기는 들었던 것이라 정확히 잘 모릅니다.
시장하신 분들은 벳남 물소고기 요리 잡수시러 빨랑빨랑 모여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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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bo 쇠고기
보 바이 온bo bay mon : 일곱 가지 쇠고기 요리
퍼 보pho bo : 쇠고기 국물 국수 :
쇠고기 퍼 Pho Bo (퍼·보)
너무나 잘 알려진 베트남 국수의 대표로 알고 있는 음식.
쇠고기 퍼는 면 위에 삶은 쇠고기나 생 쇠고기 조각을 얹고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우골 국물의 스프를 부어 만든 것.
익힌 숙주나물 (때로는 안 익은 것이 나오는 곳도 있음) 을
민트 풀 등과 라임을 짜서 넣어 먹음.
쇠고기 고명을 얹은 국수 Pho Xao Ap Chao (퍼·쌰오·업 챠오) ;
퍼에 쇠고기와 야채를 고명으로 뿌리고 팥고물을 뿌린 것.
고수나 생 야채와 함께 느억맘 소스에 찍어 먹는다.
면이 약간 질긴 편이다.
후에 명물 · 쇠고기 면 Bun Bo Hue (분·보·후에) ;
후에 지방의 명물 요리.
냉면만한 굵기의 면에 족발이나 레몬, 파인애플 등으로
국물을 만든 스프를 한 것.
부드러운 풀이나 바나나의 꽃 풀을 넣어 먹는다.
기호로 칠리 페이스트 (고추가루 액체 소스) 를 넣어
더욱 맵게 먹는 것이 후에 지방의 정통 방식.
(참고 : 후에 - 구 벳남 왕조의 수도)
Com binn dan 다양하고 신선한 야채, 고기, 그리고 생선요리가 곁들여진 밥. ;
당신이 원하는 재료를 선택하세요 Giai Khat 이것은 "가벼운 음식"을 뜻한다. -차, 커피, 과일,
쥬스, 케익, 맥주 Pho 수프로 만들거나 튀긴 닭고기 혹은 쇠고기가 곁들여진 국수 (pho xao) .
mi (노란 국수) 나 mien (투명한 국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Com rang 깍두기모양으로 썰은 야채와 소세지를 함께 볶은 밥 Bun cha ;
불에 구운 저민 돼지고기와 베이컨과 함께 먹는 쌀밀가루 국수 (bun) .
시큼한 소스, 깍두기모양으로 썰은 양배추, 그리고
신선한 야채류 한 접시가 제공된다.
종종 스프링 롤 (Spring Rolls) 과 함께 나온다. Nem 스프링 롤 (Spring Rolls) : 저민 돼지고기,
콩싹, 셜롯 (파의 한 종류) 그리고 버섯 모두를 말린 쌀가루를 입혀 바싹 튀긴 것 Chao 닭고기,
생선 혹은 돼지의 심장을 넣은 쌀죽 Xoi 걸쭉한 밥, 보통 소세지 고기와 잘게 찢은 말린 쇠고기와
함께 제공된다.
쌀국수에 쇠고기를 얹힌 것 : 퍼 가 (Pho bo)
쌀국수에 푹 익힌 쇠고기를 얹힌 것 : 퍼 찐 (Pho chin) <-- 추천 (한국인 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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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요리 맞있게 드셨나요?
너무 질겨서 못드시겠다고요?
아니 Pho chin은 내 입에는 맞아서 꼽배기로 먹고
지금 추가고 드시는 중이시라고요?
먼저 드신 분들을 위해 다음 얘기로 넘어갑니다.
지금까지 드시는 분은, 천천히 다 드시고 오셔도 됩니다.
어자피 카폐에 쓴 글이니깐, 천천히 읽으셔도 됩니다.
절대로 못 볼 경우는 없을 겁니다.
혹시 쇠고기 요리 급히 드시다가 체한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월남전과 우리 한베가족에 관련된 얘기에
제가 이 얘기를 이 시리즈에서 앞부분에 쓴 이유는
물소사건이후 처리과정을 주목해서 입니다.
자, 그 얘기도 조금뒤에 하기로 하고,
일단 진도 나갑니다.
졸지 말고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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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채명신 장군님 회고록 - 베트남 전쟁과 나)
나는 작전참모부장 근무 이전부터 베트남의 역사를 비롯하여
정치, 종교, 사회문제 등 여러 국면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고,
정세 분석을 내 나름대로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한 이상 직접 기본 업무와 연관될 것이므로 더욱 심층분석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 7월 15일 구엔 칸 장군 집권시 월남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최초로 9월에 1개 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한 바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 파병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베트남 전쟁은 게릴라전이기 때문에 정규군이 파견된다 하여도
목표나 표적 찾기가 매우 불확실하고,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이 월맹뿐만 아니라 월남공화국 국민까지도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6.25당시 북한지역에서 백골병단을 지휘, 게릴라전을 폈었기 때문에
게릴라전에 대응하는 정규군의 어려움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내가 작전참모부장으로 고민한 것은 바로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이 예측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움직임이 분명한 이상 확전시 동반 확전의 군대로 미국은 한국군을 지목할 것이라고 판단,
한국방어를 위해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이 현역사단이 한정되어 있는
그들의 상황에서 한국군에 대한 파병 요청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한국군이 본격적 확전의 주체로서
베트남전에서 전투에 개입하다면 패퇴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피해를 우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들기 부대와 같은 비전투부대를 파견하여 미군과 월남군을 돕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전참모부장으로서 우리에게게 유리한 방책만 세울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전투부대 파병이 있을 경우를 대비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그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이 무렵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장군이 나를 불렀다.
“채 장군, 청와대에서 각하께 보고사항이 있는데 함께 가세.”
나는 급변하는 내외 정세의 변천 과정을 주시하고 있을 때여서,
그러잖아도 내심 박 대통령이 언젠가는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 가겠습니다.”
더 이상 긴 말이 없어도 그와 나의 의중은 베트남전쟁에 관한 사항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1965년 3월,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한 지 며칠 지나지 않던 그날, 나는 총장을 따라 청와대로 향했다.
총장과 내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자 박 대통령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얼굴빛이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기운이 감돌며 밝은 빚이 아니었다.
“자, 앉게.”
먼저 박 대통령이 자리에 앉았다. 앉기가 무섭게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긴 호흡으로 뱉어내고 있었다.
분위기를 알아차린 총장은 몹시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나 또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 분위기로 젖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긴장된 가운데 총장의 보고는 끝났다.
총장과 내가 막 일어나서 집무실에서 나갈 채비를 하자 박 대통령이 총장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총장은 먼저 가고, 채 장군은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할 게 있어.”
하며 나를 자리에 앉게 했다. 총장은 거수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박 대통령은 얼굴이 무거워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 대통령은 약간 억양을 높이며,
“재 장군, 월남에 전투부대 보내면 한국군 잘 싸우겠지. 곧 해결될 거야”
자신있는 그다운 억양이었다.
“각하, 무슨 근거로 그렇게 낙관하십니까. 저는 전투부대 파병을 반대합니다.”
박 대통령은 얼굴빛이 벌개지면서 놀라는 기색으로 변했다.
“무엇이? 한국군이 해결 못한다고.”
“네 어렵습니다. 게릴라전에 정규군이 승리하려면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박 대통령이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낀 손가락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매우 흥분한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하였다.
평소 그가 그렇게 흥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채 장군 생각이 틀렸어.”
“아닙니다. 베트남의 게릴라들 베트콩은 틀립니다.”
“무엇이 틀려?”
나를 향해 대드는 것과 같은 자세로 억양을 높였다.
그리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채 장군, 지난날의 6·25 전투경험에다 교육훈련도 잘 되어 있고 반공정신도 강하고 사기도 높잖아!”
나는 박 대통령의 항변에 지지 않고 억양을 높였다.
“각하의 말씀은 다 옳습니다. 그러나 월남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채 장군의 그런 대답은 뜻밖이군. 어째서 그래.”
대통령은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한편 당황하는 기색도 보였다.
평소 그가 그렇게 흥분한 적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 또한 내심 당황하였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당황하는 빛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갔다.
“각하. 2차대전이 끝나자 5년여 동안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던 일본군이 물러갈 때
그들 무기의 일부를 취득한 공산월맹이 독립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공산월맹은 일본군 점령하에도 비밀조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며 소극적인 투쟁을 해 왔지만,
일본군 철수 후 대규모 무장세력으로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대부대가 지난날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반도에 진주하자
인도지나반도 전역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공산월맹은 전국토 모든 도시와 촌락을 무장투쟁을 위한 전투기지로 만들면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면 격렬한 게릴라전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8년 동안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프랑스군이 마지막 거점인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에서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월맹의 승리로 끝났고,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공산월맹으로,
남쪽은 자유월남공화국으로 양분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은 흥분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담배를 낀 두 손가락의 떨림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안도하면 다음 이야기로 이어 갔다.
“각하, 이때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은 17도선 이북으로 철수하면서
많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정예 병력 상당수를 남쪽에 남겨 두고 통일을 위한 계속 투쟁을 지시하였습니다.
그 후 17도선 이남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고 딘 디엠(Ngo Dinh Diem)대통령 정권이 들어서서
철저한 반공정책으로 공산조직을 탄압하자, 공산세력은 일시적으로 지하에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 딘 디엠 정권의 족벌정치와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반항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이 가톨릭 신자인 대통령과 소수 권력층에 대한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불교신자들은 종교적인 불만과 반항을 격화시키자,
이 투쟁이 도화선이 되어 혼란이 퍼져
1963년 11월 1일 두옹(둥)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을 지도자로 하는
군사 쿠데타에 의해 디엠 정권은 무너지고
디엠 대통령 형제는 암살당하였습니다.
*** (고딘디엠은 장기집권에 들어가자 가톨릭계와 불교계 지도자인
*** ♥찌광(釋智先), ♥ 땀짜오 등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 1963년 고딘디엠은 압도적 다수표를 얻어 3選에 성공했으나,
*** 취임식을 거행한 지 6일이 지난 11월1일, 불교도인 정반민(楊文明) 장군이 주도하는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 쿠데타軍 부대가 사이공에 있는 軍 총사령부, 방송국, 근위여단 본부, 기타 주요시설 등을 모두 점령하자,
*** 고딘디엠 대통령은 1963년 11월2일 이른 아침 가톨릭 신부 앞에서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 그는 『국민들의 반대 함성에 의해 대통령직을 하야하지만
*** 주님께서 자유 베트남을 끝내 지켜주시고 무한히 번영시켜 주실 것』을 간곡히 기원한 후
*** 쿠데타軍 사령부에 전화하여 자기 위치를 알려주고 연행해 갈 것을 요청했다.
*** 고딘디엠 대통령을 체포하여 軍 장갑차로 호송하던 육군 소령은,
*** 쿠데타軍 사령관의 비밀 지시에 따라 도중에서 고딘디엠을 사살했다.)
미국은 디엠 정권 수립시부터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였으나,
미국과 디엠 정권 간의 마찰과 갈등은 심화된 가운데, 쿠데타를 맞았는데,
미국은 새로운 군사정권 지도자들 간에 권력 싸움이 시작되어
군사 쿠데타가 반복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세력 확장을 위해 지하에서 꾸준히 조직을 강화하여 본격적인 게릴라전에 의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64년 8월 2일과 4일 공해상에서 공산월맹의 함정이 미 해군 함정을 공격한 데 이어,
지상에서 베트콩들이 미군 고문관의 숙소와 기지 등을 습격하여
많은 미국인들을 살해하고 시설들을 파괴하는 격렬한 투쟁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 (제1차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반민 대장의 군사혁명위원회는 출범 3개월 만에
*** 다른 파 불교도인 웬칸(阮慶) 장군이 주도하는 제2차 쿠데타에 의해 1964년 1월30일 쓰러졌다.
***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64년 9월12일에는 가톨릭교도인 람반활(林文發) 장군이
*** 주도하는 제3차 쿠데타가 발생했다.
***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쿠데타가 세 번 더 일어났다.
*** 그 때마다 軍은 소속 지휘관 성향에 따라 쿠데타군과 反쿠데타군으로 편이 갈려서 전투를 했다.
***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무고한 사병들이 개죽음을 당했다.
*** 이 과정에서 병사들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對共작전은 엉망이 되었다.
*** 1964 년 베트남 정규軍 총 병력은 46만3063명이었는데, 같은 해에 발생한 도망병 수는 15만 명에 달했다.
*** 이들 중 11만 명은 상관들의 설득에 따라 軍에 복귀했으나, 3만8596명은 영원히 탈영했다.
*** 자주국방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 베트남 정부는 하는 수 없이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에 전투부대 파견을 요청했다.)
*** (1965년 2월3일, 미국 정부는 베트남 참전을 발표했다.
*** 미군 참전에 이어 한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이 참전했다.
*** 이 상황에서 1966년 3월11일, 중부 베트남에서 지역감정에 기인한 반란이 일어났다.
*** 월맹 출신 실향민들의 地緣(지연)을 대표하는 웬까오끼(阮高祺) 수상이
*** 중부 베트남을 관장하고 있는 제1군단장직에 있는 웬찬띠 중장을 해임하자
*** 중부 베트남의 民·官·軍은 공항, 부두, 시장, 학교, 상점을 모두 폐쇄하고
*** 『웬까오끼 수상의 이번 조치는 독재적이고 反민주적이며 중부 베트남을 차별대우하는 폭거이므로
*** 웬찬띠 중장을 즉각 제1군단장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 원상복귀 시키라』는
*** 구호를 앞세워 무장 항거에 들어갔다.
*** 반란은 2개월 동안 사상자 906명을 내고 1966년 5월14일 겨우 진압됐다.
*** 이 사건을 중부 베트남에서는 「민주화 투쟁」이라고 부르고,
*** 중앙정부 측에서는 「중부 베트남의 반란」이라고 불렀다. 이 후유증은 對共작전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
대통령은 줄담배를 피우면서도 열심히 내 설명을 듣고 있었다.
초기에 분노의 빛까지도 보였던 것이,
내 충정에 의한 한마디 한마디에 진지한 얼굴빛으로 변하면서,
때로는 고대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각하. 지금까지 보고드린 월남 정세는 더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20년 가까운 게릴라전의 실전경험을 통해 세계 최강의 게릴라로 성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긴 세월 월남의 많은 촌락과 산야에다 게릴라전을 위한 전투기지를 완성해 놓았다는 점이
정규군에게는 커다란 장애가 될 것입니다.
베트콩들의 또 다른 강점은 월맹 대통령 호치민이
반프랑스 독립투쟁의 국민적 영웅이며 애국자라는 인식이
남,북 월남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는 점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투쟁이 반식민지 독립투쟁의 숭고한 목적 달성에 있다는 신념에 불타고 있는 점입니다.
아울러 베트콩은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성역지대를 통해
월맹의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지원 루트 등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쉽게 승패를 가릴 수 없는 형태의 전쟁이 월남전쟁입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미군도 힘들겠구면.”
“그렇습니다. 각하. 미국은 남·북 월남 전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고
남·북한의 모든 월남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적인 여론을 감안할 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와 같은 협박으로 쉽게 항복하리라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채 장군. 한국군이 월남에서 잘 싸울 자신이 있다는 내 생각은 과욕일까?”
“각하, 상황의 진전을 좀 지켜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들기 부대 파견까지는 무난하며, 명분도 뚜렷하고 성공할 자신도 있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앞으로 미군 전투부대가 월남전에 투입되고 전쟁이 더욱 확대되어
한국에 주둔 중인 2개미군 사단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린다면
이는 우리나라 안보에 결정적인 치명타가 될 것이며 제 2의 6.25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대통령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바로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걱정이야.
김일성이가 자신만만하고 의기 양양하게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 잃는 것은 휴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다’라고 떠들어 대고 있는데 말이야.”
박 대통령과 나의 고민과 우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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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내용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채명신 장군의 파월과정이나
저의 베트남 결혼과정에서 많은 유사점이 있었습니다.
채명신 장군께서는 파월될 것이라는 분위기에 따라서
개인적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될 상황을 가정하여 혼자서 많은 공부와 준비를 하셨고,
저에게 국제결혼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이 90년대 후반일 껍니다.
그 당시 중국 국제결혼 분위기에 휩쓸려서
2003년부터 계속 중국,베트남 결혼카폐나 인터넷 자료등을 찾아다녔습니다.
꼭 베트남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지만,
단지 중국아니면 베트남으로 국제결혼을 하겠구나하고
양쪽의 정보를 몇년동안 이리저리 획득했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음. 《서경》의 열명편에 나오는 말)
이란 말을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몹시도 좋아하셨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착실하게 사전 준비를 한 채명신 장군께서야 말로 진정한 실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독대로 많은 내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 한국군이 파병해야 했는가?
*** 문제는 앞으로 미군 전투부대가 월남전에 투입되고 전쟁이 더욱 확대되어
*** 한국에 주둔 중인 2개미군 사단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린다면
*** 이는 우리나라 안보에 결정적인 치명타가 될 것이며 제 2의 6.25는 너무나 자명한 것
*** 김일성이가 자신만만하고 의기 양양하게
***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 잃는 것은 휴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다’ 라고 떠들어 대고 있다.
결국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파병했다는 결론이 되는군요.
채명신 장군의 강연 내용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 있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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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965년초에 플레이쿠 미군 특수부대의 기지가 습격을 받아 가지고 피해를 입었죠.
그리고 얼마 후에 사이공에 있는 미군 전용호텔이 베트콩에 폭파당해 가지고 엄청나게 많은 미군들이 피해를 입었어요.
돈킹만에서 움직이던 미국의 7함대를 월맹의 어뢰정 3척이 공격을 해왔습니다.
존슨대통령이 거기에 대한 보복으로 즉각 폭격을 시작했고
65년 3월15일에 해병대 3500명을 다낭에 상륙시켜 가지고 본격적인 지상전투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차! 미국이 본격적으로 7함대도 개입했다고 하면 그다음 월남전에 투입할 수 있는 미군 부대가 어떤 부대가 있겠느냐.
뻔히 다 아는 거죠 지도만 보면 훤히 아는 거예요.
하와이에 있는 해병사단이 먼저 들어가고, 그 다음에 텍사스주에 있는 예비사단,
그 다음에 캘리포니아 북쪽에 있는 1개 사단 그 다음 어디가 들어가느냐.
한반도에 있는 2개의 미군 사단을 돌리는 겁니다. 가장 우선 순위가 높아요 지리적으로도 좋고.
그런데 그 당시 우리의 안보현황이 어땠느냐 하면 6.25 때보다도 남북간에 힘의 격차가 컸습니다.
북쪽이 더 유리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유리했습니다.
군사력 뿐만 아니라 막강한 중국과 소련의 배후세력이 동맹관계에 있죠.
거기다가 우리는 춘궁기가 되면 수천 수만명이 굶는 때인데
이북은 1인당 700그램정도의 넉넉한 배급을 주고 있을 때예요.
그리고 우리는 전력이 없어서 등잔불을 켰지만 북은 전력이 엄청나게 남아 돌아가고 있을 때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우리 국민소득이 얼마입니까. 78달러 정도 밖에 안됐는데 북쪽은 120달러였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김일성이는 의기양양해서 「우리가 밀고 나가면 잃는 것은 휴전선이요
얻는 건 조국 통일이다」 하고 큰 소리를 뻥뻥 쳤습니다.
그만한 힘도 있었고 모든 여건이 김일성이 절대 유리했다고요.
왜 못나왔습니까. 6.25 때는 미군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미군 2개 사단이 버티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미군사단을 빼서 월남으로 돌리면 어떻게 합니까. 6.25 때는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뺏겼지만
이번에는 3일만에 부산까지 뺏길 판이에요.
그걸 우리 박대통령께서는 전략을 아시는 분이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박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우리 두 개 전투부대를 보내니까 미군들은 한 명도 빼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 박대통령 같은 분이 계셨으니까 그렇지, 여러분들이 박대통령을 좋아하신다고 하지만
그 분의 업적을 똑똑히 알고 좋아하셔야 됩니다.
그 분이 경제부흥을 이룩했다는 것도 큰 업적이지만 김일성이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게 제2의 6.25를 막았다는
그 이상의 큰 업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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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독대 내용을 통해 왜 채명신 장군이 향후 베트남 전장에서
「100명의 베트콩을 포기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라는 캐치프레이를 내걸고,
민사심리전과 대민지원활동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려고 했던 힌트도 나와 있습니다.
한국군은 심리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활발한 대민작전을 명령받았고,
각 부대는 이 훈령에 따라 매주 1회이상 필히 대민지원을 나가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서 나와 있습니다.
*** 나는 처음부터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 파병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 왜냐하면, 베트남 전쟁은 게릴라전이기 때문에 정규군이 파견된다 하여도
*** 목표나 표적 찾기가 매우 불확실하고,
***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이 월맹뿐만 아니라 월남공화국 국민까지도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6.25당시 북한지역에서 백골병단을 지휘, 게릴라전을 폈었기 때문에
*** 게릴라전에 대응하는 정규군의 어려움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 내가 작전참모부장으로 고민한 것은 바로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이 예측되었기 때문이었다.
*** 미국의 움직임이 분명한 이상 확전시 동반 확전의 군대로 미국은 한국군을 지목할 것이라고 판단,
*** 한국방어를 위해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이 현역사단이 한정되어 있는
*** 그들의 상황에서 한국군에 대한 파병 요청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었다.
*** 나는 한국군이 본격적 확전의 주체로서
*** 베트남전에서 전투에 개입하다면 패퇴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피해를 우려했던 것이다.
*** 따라서 비들기 부대와 같은 비전투부대를 파견하여 미군과 월남군을 돕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작전참모부장으로서 우리에게게 유리한 방책만 세울 것이 아니라,
*** 불가피하게 전투부대 파병이 있을 경우를 대비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 그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 게릴라전에 대응하는 정규군의 어려움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나는 한국군이 본격적 확전의 주체로서
베트남전에서 전투에 개입하다면 패퇴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피해를 우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들기 부대와 같은 비전투부대를 파견하여 미군과 월남군을 돕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기에,
채명신 장군께서는 장병에게 ‘전투는 30%, 대민지원과 심리전은 70%로 설정한다’고 훈시했으나 현실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일단 작전부터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베트콩의 총알이 날라오는데, 전투는 하질 않고 벼베기부터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초기의 군사작전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전술책임지역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민사심리전의 비중은 파병 초기에는 군사작전 70%, 민사심리전 30%였지만,
1967년 중반기부터는 군사작전과 민사심리전이 각각 50%에 이르는 대등한 수준으로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68년 구정공세로 미국내에서 반전여론이 높아짐에 따라
미군 및 연합군들의 적극적인 군사활동에 제약이 걸린 것이 한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전체적으로 볼 때 전 한국군의 활동 중 약 40%는 민사심리전과 대민지원사업을 한 것으로 추축됩니다.
물론 이 수치는, 전반적으로 대민지원을 하는 비들기부대가 존재했었으나,
또한 일선 전투 병사들의 직접적인 활동이라고 하기보다는 행정적인 명령에 의한 활동지침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인원 32만명의 종합적인 활동 비율면에서 본다면,
월남파병시 한국군은 군사작전은 65% 수준, 민사작전과 대민지원사업내용은 35%수준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정확한 진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과 월남파병 서적 등에서 파월 한국군의 대민지원 등을 검색하여 얻은 가설이니까요.
만약에 [부천]상로수님이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일선 전투병사로서의 대민활동과 군사작전의 비율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댓글을 달아주시면 고맙겠네요.
또한 이 독대의 대화 내용 중에서 자기감정을 억누루고 충언을 귀다듬으면 듣는 박 전대통령의
인격과 지혜가 엇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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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 ○ 의자왕(義慈王)
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이 재위 33년(632)에 태자로 삼았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무왕이 죽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백제 의자왕 2년(642) 가을 7월에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 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김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않았는데, 백제의 대군이 또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선덕여왕이 명하여 막게 하였으므로 유신은 마침내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가서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2천 명을 목베었다.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또 백제가 다시 침입해 왔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선덕여왕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존망(存亡)이 공(公)의 한 몸에 달렸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가서 이를 도모해 주시오.”
유신은 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하여 서쪽으로 가는 길에 자기 집 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집안의 남녀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갔다.
여름 5월에 [당] 태종이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왕이 군사 3만 명을 내어 그를 도왔다.
백제가 그 빈틈을 타서 나라 서쪽의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다.
백제 의자왕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싸웠다.
* 옥문곡 1. - 경주(慶州)와 영천 사이에 건천(乾川)면에 있는 송선리 마을 근처 오봉산의 여근곡(女根谷)이란 설도 있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옥문곡(玉門谷)”이라 칭하였으나 동일한 지명 미상으로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일(卷第一) 기이(紀異) 편(篇)의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에
富山下果有女根谷:과연(果)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이 있다고 적혀 있음에 근거하여
비슷한 뜻을 가진 ‘여근곡(女根谷)’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 옥문곡 2. - 합천의 가야면 구원리 해인사 부근 또는 쌍책면 성산리 옥전은 경주 월성으로 부터
서쪽이면서 위도상 약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김유신 열전에서 대야성 싸움에서 옥문곡으로 유인한 전투사가 있는바 가장 유력한 지점으로 생각된다는 설.
* 옥문곡 3.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소재 ‘백화산(白華山)’의 소개 ‘증보 상주문화유적 p50’에
‘옥문곡 골짜기’가 거명되며 ‘상주시청-상주의 문화유산-금돌성’ 안내에도 역시 ‘옥문곡 골짜기’가 거명된다는 설.
백제 의자왕 9년(649) 가을 8월에 왕은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백제 의자왕 13년(653) 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다.
백제 의자왕 15년(655) 봄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가을 7월에 마천성(馬川城)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8월에 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백제 의자왕 16년(656) 봄 3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 성충(成忠 -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時]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險隘]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미래의 전쟁이 발생할 때, 지세의 잇점을 이용한 장기적인 방어전을 하자는 의견)
그러나 왕은 살펴보지 않았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6월에 , 귀신 하나가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더니 세 자[尺] 가량의 깊이에서 한 마리의 거북이 있었다.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는데 『백제는 둥근 달[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月新]과 같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巫]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울 것입니다.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國家]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뜻일까 합니다.”
왕이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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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백제를] 치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췗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여름 5월 21일에 신라 태종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처음 육지에 내려서 군사들의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에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당나라[大國]의 후원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만일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세 좋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압니다.”
(당나라군을 먼저 집중 공격하자는 의견)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를 먼저 집중 공격하자는 의견)
왕은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쨊角之勢]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친다면[對陣]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 - 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탄현(炭峴 - 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重閉]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지세의 잇점을 이용한 장기적인 방어전 의견)
이 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方舟] 없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幷馬]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 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두나라 군대를 백제영토 내로 입국시켜, 함정에 빠뜨리셔 잡자는 의견)
왕이 그럴 듯이 여겼다.
가을 7월 9일에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의 아들 반굴(盤屈)과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 - 또는 관창(官昌)이 분전하다 전사했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이 날 정방(定方)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 크게 깨뜨렸다.
7월 12일에 당나라와 신라군이 의자왕의 도성을 에워싸고자 하여 소부리(所夫里) 벌판으로 나아가는데,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고는
7월 13일에 의자왕이 좌우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에 몸을 보전했다.
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뛰어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의자왕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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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암(落花岩) - 1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바위.
*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 궁녀들이 백마강(白馬江)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 후세 사람들이 그 애닳은 전설이 있는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다.
** 백제 무왕(武王) 37년(636) 3월에 왕은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 사비하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 [포구의] 양쪽 언덕에는 기이한 바위와 돌[奇巖怪石]이 들쭉날쭉 서 있고,
** 간간이 기이하고 이상한 화초가 끼어 있어 그림과 같았다.
** 왕은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琴]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 수행한 자들도 여러 차례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곳을 대왕포(大王浦)라 하였다.
* 백제가 망하던 날,
* 앞장 서 가던 궁녀가 바위 끝으로 가 두 손을 모아 궁성을 향해 읍하더니
* 치마를 뒤집어 쓰고 백마강 푸른 물을 향해 떨어졌다.
* 죽더라도 깨끗이 죽고 싶은 궁녀들은 부소산 서쪽 백마강으로 내민 큰 바위로 몰려갔다.
* 지난날 왕을 모시고 노래와 춤으로 흥겹게 놀던 바위였다.
* 그러자 다른 궁녀들도 뒤를 이어 떨어졌다.
* 많은 궁녀가 앞을 다투어 벼랑에서 떨어지는 광경은 비참하다기보다
* 차라리 꽃같이 찬란한 정경이었다.
*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岩)이라고 불렀다.
*** 낙화암[ 落花巖 ] - 2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백마강변의 부소산에 있는 바위.
***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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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 좌평 성충(成忠)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諫)하였으나,
***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 마침내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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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에 소정방이 백제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사비에서 배에 타고 당나라로 돌아가서 당나라 서울[京師]로 보냈다.
백제는 본래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호(萬戶)가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 현을 통할하게 하였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渠長]들을 발탁하여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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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과 가출의 위기, 제너럴 채의 지혜를 빌립시다. - 셋"은 3부로 나누어서
하루에 하나씩 올립니다.
다음 번엔 2편을 올리겠습니다.
모두 다 읽으셔야 전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첫댓글 흥미 진진한 역사 이야기 네요...^*^ 추후 송금과 가출의 위기 탈출 방안을 알수 있겠네요.....^^;; 이렇게 좋은 글을 놔두고 쓸데 없는데 안력을 소모 했네요....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