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필름으로 보는 한국전쟁 영상입니다.
1951년 당시의 가평 전투 직후의 모습이며 북한군과 중공군의 남하를 피해 정들었던 집과 서울을 떠나는 피난민들입니다(이들은 1950년 당시 서울을 점령했던 북괴 공산당들의 끔찍하고 잔인한 만행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LzhID7yeb_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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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영상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난 7월 27일은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참전의 날이었습니다.
오늘날 세계 만방에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현재의 자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대한민국은 지난날 수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과도기의 세계 역사의 격랑을 헤쳐 나가는 그 과정 속에서 '대한민국호'도 결코 예외일 수 없이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거센 파도와 혹독한 바람과 폭풍우를 맞을 수 밖에 없었고 때로는 표류하며 심지어 파선까지 당하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치욕스러운 일제 강점기 36년만에 연합국 미국의 승리 덕분으로 핵폭탄 두 발을 맞은 전범국 일본의 패전과 항복으로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아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가 했더니 웬걸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역사를 되짚어 보자면, 1917년대 이래 마치 무섭게 밀려 오는 거센 파도와 같이 파죽지세의 붉은 노도 처럼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야욕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의 공산혁명으로 시작된 이래 제정 러시아를 통째로 집어 삼키더니 그 붉은 물결은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와 그리고 드넓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와 중남미를 붉다 못해 새빨갛게 물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시아 대륙의 남쪽 끝자락 반도에 위치한 마지막으로 남은 자유진영의 대한민국 마저 집어 삼키기 위하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명령과 함께 소련의 막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엎은 소련 장교 출신의 김일성의 진두지휘 아래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소련제 탱크들을 앞세운 북한 괴뢰도당들은 한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남한 마저 공산화를 시켜 한반도 전체를 그들의 공산통제하에 두기 위한 대전략의 침략을 감행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한국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풍전등화와도 같은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1950년 7월 7일 긴급히 유엔이 소집되고 미국을 주축으로 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유엔사가 통과되어 유엔군이 창설되었고 드디어 1950년 7월 27일 무려 세계 22개국에서 195만이 넘는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 유엔군들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세계 역사에도 처음 있는 전무후무한 엄청난 대사건입니다.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 아시아에서도 변방에 불과했고 존재 감 조차도 없어서 그당시에는 한국('Korea')이라는 나라는 이름 조차도 처음 들어보기 때문에 세계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나라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세계 22개국에서 참전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만, 어쩌면 마치 자유민주 진영의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심지어 막무가내식(*일명 무대뽀) 인해전술의 대가(?!) 모택동의 중공군까지 투입시킨 공산주의자들의 전세계를 엄몰하여 삼키려는 질풍노도의 붉은 파도로 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한 참전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 각지에서온 유엔군은 자유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전을 지켜주며 또한 재건과 발전을 위한 그 토대와 발판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함께 힘써 싸워주었으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피를 흘렸고 소중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바쳐 가면서 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을 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면(*참고로 아래의 사항들은 국가보훈처에서 집계하여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의 영원한 우방국이며 동맹국인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프랑스, 뉴질랜드, 필리핀, 튀르키예(터키),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등 총 16개국이 병력지원을 했고,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이 의료와 의료시설을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총 22개국에서 참전한 1,957,733명의 유엔군들중 151,129명이 전사, 사망, 부상, 실종,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유엔군 참전 용사들의 아름다운 희생과 헌신의 은혜를 입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세대를 거쳐서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른다해도 이분들의 값진 희생과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유엔군은 국제 평화에 대한 위협과 침해 및 침략행위에 대처하기 위해 유엔 회원국들의 병력으로 조직되는 군대입니다(#여기까지가 국가보훈처에서 밝힌 내용들 입니다).
국제 외교에 있어서 탁월한 천재성과 혜안과 안목과 비전을 지닌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기지로 1953년 6.25 한국 전쟁 직후 한국은 놀랍게도 강대국 미국과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의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이와같은 놀라운 관계 설정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실행되고 있어서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미국은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국방과 안보를 위해 헌신과 봉사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시점에서 우리가 늘 염두에 두고 유념해야할 사항이 있는데, 이번 게시물의 제목처럼 만일의 경우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주한미군이 철수라도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까요?
북괴와 함께 대한민국의 철천지 원수이며 세계적 민폐국 중공의 염원이기도 한 주한미군의 철수는 우리가 이미 몇 번에 걸친 좌파 정권을 통해서도 익히 경험하였고 그래서 다들 잘 알다시피 북한과의 배후를 힘입고 있는 좌파들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요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하며 광분하는 것이 이처럼 바로 주한미군의 영원한 철수인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대한민국에서 북한과 암약하는 좌파들(*이른바 주사파)과 함께 협공하여 그들의 70여년간 노리며 숙원했었던 대남침략 야욕을 성취하며 손쉽게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게시물은 지난 번의 게시물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오랜동안 전쟁 역사에 관한한 전문가로서 깊이 있는 통찰력과 혜안과 비전과 안목을 가진 존경하고 흠모하는 이춘근 박사님의 강의를 통해 최근의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한반도 주변의 정세와 전략과 안목과 비전을 제시한 것을 수퍼 마리아님 카페 회원님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영상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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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근 박사님에 대해 대략적으로 소개를 하자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육군 제3사관학교 교관으로 국제관계와 군사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육군 대위로 전역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오스틴)에서 전쟁론을 전공,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세종연구소 외교안보담당 연구위원,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을 역임하고,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캐나다의 빅토리아대학 정치학과 등에서 강의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역사학과에서 박사과정(전쟁사)을 수료했고 현재 자유기업원 부원장,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저서로는《북한 핵의 문제:발단, 전개, 전망》, 역서로《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새로운 제국―중국》등이 있으며, 국가안보, 전쟁, 전략관련 편저서와 논문을 다수 집필했습니다.
현재 이춘근 국제정치 아카데미 대표로 <이춘근 TV> 유튜브 방송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춘근 박사님에 대해 오래 전부터 팬이었고 늘 유튜브를 통해 강의를 즐겨 들어 왔었습니다.
(*참고로 이 게시물을 올린 필자도 물론 크리스챤이지만, 이춘근 박사가 언급한 전광훈목사나 그가 담임하는 사랑제일교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또한 전광훈목사의 신앙노선에도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전광훈 목사가 주창하는 것에도 일절 동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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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괴뢰도당들의 대한민국을 향한 도발 만행은 휴전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 3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도발과 침략을 지속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몇가지를 살펴보아도 여러분도 잘 아시는 사건들입니다만, 김신조를 앞세운 남파 간첩들의 박정희 대통령(*박정희 대통령 또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암살을 위한 청와대 습격 사건 즉 이른바 1·21 사태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입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서 일본에서 남파된 조총련 출신 간첩 문세광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 연설을 하던 연단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저격하여 권총을 발사했는데 오랫동안 군인으로서 몸에 밴 동작으로 대통령은 순간적으로 연단 아래로 몸을 숙여 저격을 피했지만 이로 인해 빗나간 총탄은 뒤쪽 귀빈석에 앉아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총탄을 머리에 맞고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온 국민들에게 국모로서 존경을 받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어처구니 없는 서거는 당시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슬픔과 비통을 안겨주었고 다시한번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또한 1968년 11월 2일 울진, 삼척 지역에 침투한 남파 무장 공비 간첩들에 의한 이승복 어린이(*게시물을 올린 필자와 동갑인 1959년생입니다) 가족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온 가족 몰살 사건은 엄청난 파장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무장 공비들은 가족들을 집안의 한곳에 몰아 놓고 위협하며 공산당의 체제 선전을 하던 중에 학교에서 반공 교육(*그당시에는 국가적으로 반공교육을 철저히 했습니다)을 받은 이승복 어린이(당시 10세)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자 이에 격분한 간첩들은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대검으로 찢어 잔인하게 죽였고 그의 여동생과 남동생과 어머니를 벽돌로 내리쳐 잔인하게 죽였으며 그의 형(15세)은 36군데나 칼에 찔려 거름더미에 던져져 사망케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웃집 이사를 돕다가 늦게 귀가했다가 이를 목격하였지만 무장 공비들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려 부상을 입었지만 그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탈출해 도주하여 향토예비군 초소에 이와같은 사건을 신고함으로써 무장공비들의 만행이 전국민들에게 알려져 당시에 대한민국 전체를 아연실색케 했고 전국민을 발칵 뒤집었고 공산당의 잔인한 만행에 분노와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이외에도 북괴의 도발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의 북한 경비병들에 의해 미군 경비장교들을 도끼로 찍어 죽이는 사건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이와같은 사건은 당시 판문점에서 북쪽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에 대한 벌목 작업을 지도하던 미국인 주한 UN군 장교 2명을 향해 이것에 대한 불만을 품은 북한 경비병들이 고의로 시비를 걸은 끝에 작업 도끼를 빼앗아 그 도끼로 무자비하게 내리쳐 결국 주한 유엔군 소속 미군 장교 2명이 어처구니 없게도 조선인민군 병력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계속해 오고 있는 북한 괴뢰도당들의 대남과 대미를 겨냥한 위협과 도발을 위한 미사일 발사는
수 없이 반복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만성이 되었는지 요즘도 또다시 북괴가 미사일을 쏜다고 해도 국민들은 또 시작이구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악스러운 사건들이 북괴에 의해 저질러진 것은 비단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닙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 양곤)의 아웅산 묘소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 사건'은 북괴 공작원들에 의해 묘소에 미리 설치한 테러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여명이 부상을 입은 초토화 폭탄 테러 사건입니다.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등 17명이 사망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늦게 도착해서 참변을 모면한 전두환 대통령은 사건 직후 모든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곧 바로 귀국을 했습니다.
또한 'KAL기 폭파 사건'은 북한 공작원 김승일, 김현희 두 남녀가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대한항공(KAL) 858기를 시한폭탄을 이용해 폭파하여 전원을 사망케한 사건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천안함 폭침 사건과 함께 연평도 포격 사건을 비롯하여 지금까지도 북괴는 수없이 많은 도발과 침략 행위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조차 없을 지경입니다. 이것이 바로 좌파(*주사파)들이 꿈꾸는 이론만 그럴듯한 허구와 환상에 빠져있는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들의 실체이며 실상입니다.
이 작자들이 대단한 착각에 빠져있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북괴 수뇌부로부터 좌파(*주사파)들의 그동안의 대남 사업의 노고와 수고에 대해 수많은 인민들이 보는 앞에서 훈장과 함께 대단한 치하를 받고 보상과 보답으로 공산당의 간부로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대단한 착각과 허무맹랑한 망상과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북괴 특히 북괴 수뇌부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바로 출신 성분입니다. 백두 혈통이라야만이 정통성을 인정 받을 수 있고 북한에 적을 두지 않은 외부의 협조자들과 동조자들은 아무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해도 만일 그래서 혁명을 완수하였다 해도 그들 외부 세력들은 단지 도구로서 이용을 했을뿐 제일 첫번째의 처분 대상감으로 숙청을 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공산당의 역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공산주의자들의 치명적인 속성입니다.
이러할진대 아직까지도 북괴에게 목을 매고 적과 내통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북괴에게 통째로 갖다 바치려고 하는 자들을 어찌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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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의 손녀인 마리아님은 비록 외국인이라 해도 요즘 한국의 웬만한 젊은이들 보다도 반공주의가 철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집단인지도 익히 들어온 바도 있었고, 한국에서 직접 생활을 하면서 한국인들의 정서와 한을 깊이 이해할뿐만 아니라 한국의 옛노래들 특히 전쟁가요와 고전 트롯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노랫말에 담긴 뜻과 의미와 역사적 배경과 함께 어려운 옛 구어체 단어의 뜻을 공부함에 있어서 그당시의 상황을 알아야만이 제대로 감성을 담아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알아야 하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리아는 이처럼 심도 있고 깊이 있게 공부를 하다보니 자유진영의 참전용사의 손녀이기 때문이기도한 그녀는 이처럼 철저한 반공주의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례로 마리아가 하는 사소한 행동들을 유심히 살펴보아도 그렇고 그리고 상황에 걸맞는 살짝살짝 던지는 마리아님의 재치있는 유머나 애드리브를 보아도 그렇거니와 또한 한국 음식을 너무나 좋아하다보니 한국인들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도 잘 먹고 웬만한 한국 음식은 직접 요리할 수도 있는 마리아님을 보면 그냥 평범한 이웃집에 사는 한국인 아가씨로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붙임성 있고 친근하고 수더분하며 어여쁜 대한 미국딸 아가씨입니다.
이처럼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에게 은혜를 입은 대한민국은 특히 우방국이며 동맹국인 미국으로 부터 휴전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한 원조와 아울러 갖가지 지원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대한민국의 자유와 안보를 책임감 있게 지켜주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보훈처에서 국가 차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각국의 나라들과 참전용사들을 일일이 수소문하여 그분들의 후손들까지 발굴하여 찾아가 지금도 답례와 보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정말 잘하고 있는 일이며 마땅히 해야할 중요한 일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도움과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정작 대한민국의 주요 동맹국이며 우방국일 뿐만아니라 최대의 원조와 지원과 수혜를 베풀어준 미국에게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뭔가 정치적인 앙금과 함께 석연치 않은 점들이 느껴지고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3대에 걸쳐 대한민국의 안보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봉사와 수고를 아끼지 않은
참전용사의 가족인 마리아 리스 가족에게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 보답을 해주었나요? 더군다나 참전용사의 직계후손 손녀이며 한국을 아끼고 사랑하여 한국에서 트롯 가수로서도 활동을 하고 있는 마리아 엘리자베스 리스에게 대한민국의 방송국과 가요계와 연예계는 어떤 보답을 해주었나요?
굳이 이러한 인센티브를 얻지 못한다 해도, 마리아님 입장에서는 이것을 바라지도 않지만 그녀가 이제껏 보여준 한국인들보다도 더 출중하고 빼어난 한국어 노래실력과 가창력을 감안하더라도 벌써 정상에도 몇 번을 서고도 남음이 있음에도 한국의 방송국 제작진들은 이런 마리아님을 미국인이며 참전용사의 손녀라는 신분 때문에라도 철저히 배제시켰고 경연 과정에서의 갖가지 부정을 저질러서 최종 12위라는 성적표를 안겨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고정출연자가 아니라 게스트로만 들쭉날쭉한 출연을 시키다가 급기야는 그녀를 방송국에서 퇴출을 시켜 망신과 굴욕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어떻게 온 한국인데.....
그들 스스로가 그녀에게 차세대를 이끌어갈 글로벌 트롯여제이며 글로벌 스타라고 호칭을 붙여 기대감을 잔뜩 심어준 그 주인공이며 당사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제껏 마리아님에게 한 것이 무엇인가요? 아니, 시쳇말로 방송국들과 삼류 유튜버들과 일부 한국인들은 이처럼 마리아님으로 하여금 깊은 실망과 좌절감과 실의에 빠져 장기간의 침체의 늪에 빠져 헤메이도록 마리아님에게 대체 무슨 짓들을 저지른 것인가요?
참전용사의 가족에게 대대로 감사를 드려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참전용사의 손녀에게 도리어 푸대접과 부정과 편견과 배척을 저지르고 왕따를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언론 권력을 이용해 갖가지 갑질을 서슴없이 저지른 일부 방송국들의 만행이 정말 괘씸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는 선배 트롯 가수 임영웅의 영어 발음이 좋지 않다고 마리아님이 비웃었다는 근거없는 낭설을 삼류 유튜버가 날조된 영상을 퍼뜨려 임영웅의 극성 팬들로 부터 말같지 않은 각종 비난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마리아님은 너무 기가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모두 거짓말이라면서 하소연을 했고 도와달라고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일로 인해 마리아님은 마음에 더욱 깊은 상처를 받았고 슬픔이 가중되었다고 합니다. 안그래도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던 중이었는데 이 일은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리아님의 입장에서는 정말 대단히 큰 충격과 실망과 상처를 준 사건인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방송국들의 갑질은 마리아님에게 더할 수 없는 깊은 수렁과 침체에 빠지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한국인으로서 마리아님과 마리아님의 가족분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고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마리아님이 언제쯤 다시 방송 활동을 재개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을 잘 추스르고 또한 마음의 상처가 잘 치유되어 이전보다 더욱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하기를 간절히 바래 봅니다.
https://youtu.be/_61PIcymOcs
'아내의 노래' - 마리아
https://youtu.be/xiKdOunLyx0
'삼팔선의 봄' - 마리아
https://youtu.be/gxnJd0GJ3h8
'Song for Liberty'(자유의 노래) - 나나 무수쿠리(Nana Mouskouri)
https://youtu.be/pB5vVMHqPsU
'Soldier of Fortune'(직업 군인-용병) - 딥 퍼플(Deep Purple)
https://youtu.be/7MZWWyYFPGA
'Epitaph'(묘비명) - 킹 크림슨(King Crimson)
https://youtu.be/FtEQuob2Pm8
비목 - 소프라노 신영옥
◇ 비목(碑木)
작사 : 한명희
작곡 : 장일남
성악가 : 소프라노 신영옥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전쟁의 여운과 산골의 아름다운 자연이 모태가 된 이 곡은 시대적 산물이자 무명용사의 희생을 상징하는 곡 이상으로 우리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고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 1995년 화천군 동촌리 평화의 댐에 비목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1996년부터 6월 6일 현충일을 전후하여 비목공원에서 비목문화제를 개최하여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젊은 영혼들의 넋을 추모하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위령제를 가집니다.
2013년 18회를 맞은 비목문화제는 2003년부터 화천 비목콩쿠르를 행사 일부로 더하여 성악 부문과 창작가곡 부문으로 개최합니다.
님들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영상에서 보이는 녹슬어 구멍난 철모와 함께 비목 주변에 피어난 얼레지, 노루귀, 함박꽃(산목련)이 유난히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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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게시물의 첫번째 뮤직비디오 영상은 참전용사의 손녀인 마리아님이 돌아가신 친할아버지를 그리며 할아버지께 바치는 곡 '아내의 노래'입니다.
두번째 곡 또한 마리아님의 청아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삼팔선의 봄'입니다.
세번째 곡은 Verdi(베르디)의 오페라 'Nabucco' 3막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팝으로 편곡 리메이킹한 곡인‘Song for liberty’ 입니다. 그리스 출신의 가수 나나 무수쿠리(Nana Mouskouri)의 곡입니다.
'나부코(Nabucco)'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캇네살 2세를 지칭합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은 유대인들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노역하면서 부르는 합창곡인데 옛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내용입니다.
1934년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아테네로 이주한 나나 무수쿠리는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의 재즈와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들으며 성장했고, 열두 살 때부터 보컬 수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청아한 소프라노 보이스의 바탕 위에 팝, 재즈, 샹송 등 장르를 넘나드는 폭넓은 음악성과 그리스어는 물론,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까지 구사하는 그녀의 언어 능력은 세계적인 성공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을 돌며 유럽을 평정한 그녀는 1964년 해리 벨라폰테의 초청으로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서면서 미국 시장에서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흔히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금세기 최고의 여성 엔터테이너로 꼽습니다. 그리고 나나 무수쿠리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에 대한 유럽의 대답’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450여 장의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세계적으로 2억 장이 넘는 경이적인 음반 판매액을 올렸습니다. 모두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능가하는 세계 최고기록입니다.
나나 무수쿠리의 수많은 히트곡 가운데 우리에게도 너무나 유명한 곡 ‘Plaisir d’amour’(사랑의 기쁨), Verdi(베르디)의 오페라 'Nabucco' 3막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팝으로 편곡 리메이킹한 곡인 ‘Song for liberty’(자유의 노래) ‘Only love’ 와 ‘Over and over’, 그리고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곡 ‘Why worry’ 등은 국내에서 특히 사랑을 받는 곡들입니다.
네번째 곡 'Soldier of Fortune'(직업 군인-용병)을 부른 딥 퍼플(Deep Purple)은 영국의 록 밴드로, 하드 록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룹 이름은 피터 드 로즈의 곡에서 따왔으며 비록 그들은 자신들을 헤비 메탈 밴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명곡 'Stairway to Heaven'으로 유명한 또다른 록 밴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그리고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와 함께 헤비 메탈의 선구자로 여겨집니다. 지금까지 딥 퍼플은 1억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딥 퍼플(Deep Purple)은 하드록의 교과서, 또는 헤비메탈의 개척자이자 록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밴드라고 합니다. 1968년 영국 허트포드에서 결성하고 1976년 해산하였으나 1984년에 재결합해서 2022년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입니다.
때문에 딥 퍼플은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밴드 중 하나로서, 여러 장르에 걸치는 복잡다양한 음악을 해왔지만 특히 하드록과 헤비메탈 등 헤비록 계열 록 음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밴드입니다.
흔히 70년대 헤비록 역사에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늘상 비교되며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와 함께 70년대 헤비록의 대표 밴드로 꼽힙니다. 또한 그들이 이후의 하드록, 헤비 메탈을 포함한 록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리프 등 연주기법이나 곡의 형식미 등등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70년대 내내 오리지널 멤버로 활동한 앞의 두 밴드에 비해, 딥 퍼플은 유달리 멤버 교체가 심했지만 덕분에 장르적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졌습니다.
다섯번째 뮤직비디오 영상의 곡 'Epitaph'(묘비명)는 영국 출신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킹 크림슨(King Crimson)이 1969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에 수록한 곡으로서 우리나라의 아트록 팬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이기도 합니다.
피터 신필드(Peter Sinfield)가 작사를 했고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이 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사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혼란한 세상으로 인해 묘비명에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화자의 좌절이 느껴집니다. 앨범을 발표한 1969년 그당시에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냉전, 케네디(J. F. Kennedy, 1917.05.29 ~ 1963.11.22) 대통령의 암살과 같은 집단적 이기주의와, 세대 차이, 그리고 미디어 권력(빅테크)의 상승으로 인한 여론 왜곡 등이 사회적인 큰문제로 대두 되었었습니다(*지금도 여전하고 오히려 더 심각한 상태임).
이 앨범에서 베이스를 담당했던 그렉은 이렇게 말합니다. "Epitaph는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을 혼란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것에 관한 노래예요. 우리는 당시 이상하게도 예언적인 방식으로 곡을 쓰는 능력이 있었는데 이 곡도 당시보다는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을 더 잘 보여 주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공포에 휩싸여 놀라는 표정을 그린 앨범의 표지도 그 것을 바라보는 심경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한편 그렉은 이 앨범에만 참여했고 이후에는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 밴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마지막 여섯번째 영상의 곡은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명가곡입니다.
화약 연기 사라진 전장, 두고 온 고향을 그리던 병사의 비목과 적막함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쓸쓸한 느낌의 곡인 '비목'입니다.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는 1939년 충청북도 충주 출생입니다. 1960년대 중반 비무장지대 전투초소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였고 초가을 어느 날 강원도 화천 백암사 부근에서 잡초 우거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십자 나무만 세워진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보고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 후, TBC 방송국 프로듀서 공채 3기로 입사하여 주간 라디오 프로그램 「가곡의 언덕」, 일일 프로그램 「가곡의 오솔길」등 가곡을 소개하는 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고 작곡가 장일남(1932∼2006)으로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를 의뢰받아 비목의 기억을 떠올려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는 내용의 시를 지었고 장일남이 곡을 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