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교훈
성경 본문: 마 1:1-17
처음 신약성서를 읽으려는, 사람 누구나 느끼는 생각 하나는 예수님의 족
보가 왜 서두에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족보 이야기는 처음 읽는 독자
에게 권태를 주기 때문에 흥미를 잃어 아예 성경을 덮어 버리는 경우도 있
습니다. 우리들도 이 족보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러나 어떤 개인의 생애를 서술하는 초두에 이런 것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상
가장 원칙적인 방법입니다.
이 본문의 우리들에게 관심밖의 것일지 모르나 예수님의 혈통이 아브라함
에까지 더듬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인상적인 사실이며 또한 이
계보가 대단히 용의주도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것은 더욱 주의해 보아야 할
일인 것입니다. 신약에 있는 우리 주님의 족보는 독특한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몇가지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책의 말씀은 일반적인, 어떤 사람의 생애나 인간의 사상, 또는 역사를
그린 그런 책이 아닙니다.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쓰여진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하신 일에 대해 말해 주는 책입니다. 예
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구원할 계획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
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
라](창3:15). 이사야 전도자도 예언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이 구원의 계획의 성취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탄생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안되겠을까요? 그것
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후부터 평화는 깨졌고 질서는 파괴되었으며 저주
와 멸망이 인간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낙원은 간 곳 없고 고뇌
와 슬픔만이 가득 찼습니다.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누가 인
류를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
든 자가 다 죄에 팔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려면 죄가 없는 의인이어야 되며 하늘로부터 난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해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습
니다.
천사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인을 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는 구원받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의롭다 하심
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어떻게 죄인이 구원 받을 수 있을가요?죄에는 반드시 값을 치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값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의 값으로 내어 주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사 53:5-6).
하나님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잘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
도를 주심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
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임으로 그를 통하여 상실한 인간의 위대
성을 되찾게 되고 그 안에서 축복을 누리며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
다.
2. 예수님은 인간 조상들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은 우리들과 같은 인간들입니다. 그 족보들 중에 나타난
모든 사람은 천사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며 사람이
십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시고 동정녀에게 나신 사람이십니
다.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그
가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이십니다. [내가 네게 큰 축복을 주시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
적의 문의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7,18)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시고 이세상에 오신 것을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
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
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게 속하였나 시험
하라 많은 거짓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
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
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1-3).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의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며 한결같
이 인간의 고뇌를 함께 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언제나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인 동시에 신이십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실 이 계보가 기록된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투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중
에 자기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주며, 번성케 하시고, 남의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남의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는 민족
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의 역사를 살펴 보면 다윗 왕과 솔
로몬 왕 이외의 시대에는 재난의 연속이었고 남의 지배를 받는 민족이 되었
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망하기를 다윗의 호순이 이 땅에 와서 자기들을 영광으
로 이끌어 줄 것을 꿈꾸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이 꿈의
현실자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서에 거듭거듭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주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 주었을 때 무리들이 다 놀라 외쳐 '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마12:23)하였고 가나안 여자 하나가 흉악히 귀
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할때에도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15:22)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여리고를 지나실 때 두 소경
이 길가에 앉았다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마
20:30,31)라 외쳤습니다.
이런 일이 절정에 달한 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에서 입성하실 때
입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며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
부분은 그 겉옷을 길가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게 펴고 앞에
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
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21:6-9).
이런 내용에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망
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결코 잊지 않았
던 것입니다. 정의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것이 되리라고 믿는 그 영광으로
이끌어 주실 다윗의 후손이 이땅에 오시리라는 것이 일반 백성들의 꿈이었
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 꿈의 응답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바르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꿈의 응답을 권
력과 부와 물질적인 부요로 생각했고 그들이 갈망하던 야욕의 실현으로 생
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평화와 사랑의 꿈, 그리고 완성과 만족의 꿈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
다고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주시는 삶이 인간의 모든 꿈에 대
한 응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다운 사랑과 평화,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인류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역사의 신기원이 됩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탄
생을 기점으로 기원 전과 기원 후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
도의 탄생은 인류 역사의 중대함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태
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
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2,3) 고 말씀합니다.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이룰 뿐 아니라 온 인류를
포용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을 관찰해 보면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조상 중에 이방인 조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
라합, 모압사람 룻, 헷사람 밧세바 등입니다. 특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
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시23:3)고 말씀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이방인 조상들은 어떤 의미를 줄까요? 그것
은 모든 민족이 예수님과 그의 구원 사역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조상 중에는 왕들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과 솔로몬같은 분들입니
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그로 하여
금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시며 그의 인성으로 그의 신적 특권을 상징하게 합
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조상 중에는 비천한 신분의 조상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사실상 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천막생
활을 하는 목동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역시 이런 목동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가난한 목수 부부였습니다.
이것은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와 가난한 자의 혼합체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부자와 가난한자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의 복음은 모든 사람
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계보는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여리고 여인 라합과 모압 여인 룻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 있습니
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다는 위대한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보편주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둘째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장벽이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평범한 계보에서는 어떤 여자의 이름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
수님의 게보에 이러한 이름들이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 계보에서 여자들 이
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자는 법률 상의 권리가 없습니다. 여자는 하나의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물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자는 단순히 그 여자의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
이고, 그 주인이 원하는 대로 처불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 기도문의 규례적
인 형식에 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이방인으로나, 노예로나,
여자로 만들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어떤 계보에도 이런 이름들
이 실려 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고 색다른 현상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이제까지 여자 경멸의 낡은 사상은 지나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같이 소중하고 그의 목적을 위해서는 다
같이 중요함을 말합니다.
셋째로, 성도와 죄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당신의 목적을 위해 쓰시고 당신의 일을
계획하시는 일에 합당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
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이 복음의 첫 머리에 우리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훌륭한 정통 교단으로 말미암아 공포에 떨며
쫓겨난 자들 가운데서 자기의 종을 찾아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이 자기를 상실한 죄의 타락에서 구하시기
위해, 그리고 상실해 버린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
으시고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탄생은 온 인류의 구원과 관계가 있으며 복음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
을 수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드리며 이 구원의 은총을 널리 전파합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성경 본문: 마 1:1-25
만유인력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 뉴우톤과 '나는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의심없이 믿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또한 로이드 존스,에브라함 링컨과
같은 많은 사람들도 예수의 탄생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의심
하고 그의 탄생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
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은 명확하고도 분명한 해답을 던져
줍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성경 전체의 개요를 보면,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것을 기록하였으며, 신약성경은 예수 그
리스도가 이미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우
리를 건져 주셨다는 구원완성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구
약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
음의 사복음서입니다.
사복음서를 보게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평생에 대해서 네가지 관점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가복음에서는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복음에서는
온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으로
선재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성육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예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복음서가 기록된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종과 노예에게
는 족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생애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강조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인 족보는 생략한 것입니다.
족보를 통해 본 예수 탄생의 의미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된 족보를 보면 서로 다른 점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십이대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조상으로부터 기록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브라함과 아담 아담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어 있습니
다.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이렇게 상이하게 기록되었습니까? 이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 마태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가장 존중하며 아브라함과 다윗왕의 족보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족보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거론함으로 예수를 갈릴리 바다에서 활동하던 혁명가로 생각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예수가 유대인의 진정한 구세주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누가복음은 이방 사람들에게 기록한 말씀입니다. 오늘날로 말
하면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로 인본주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 이방 사람들
에게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족보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
다. 그러므로 인과 유래방법에 의해서 족보를 연구해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
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네명의 여자
이름이 나옵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여성의 이름은 족보에 전혀 올리
지 않을 정도로 성의 차별이 대단했습니다. 그럼에도 마태 다말과 라합과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넣었다는 것은
파격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
님의 백성은 남녀와 신분, 종족의 차별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만민평등하다
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족보에 기록
된 여자들 모두가 부정한 여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할때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만큼 중
요하다고 위대한 구원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성경을 살펴보면 456회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이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예정된 탄생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장차 인간이 범죄하여 타
락할 것이며, 그 죄의 삯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구원사역을 이루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
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 구원사역의 완성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시간과 장소와 방법까지 예정하
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6절을 보면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
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빛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시대는 정치적, 종교적, 영적인 흑암의 시대였고, 오직 하나의 소망, 메시
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때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이 시대 또한 그때와 동일한 시대입니다. 정치적
으로는 암담하고 신앙은 겉돌며,영적으로 타락한 죄악이 만연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 탄생은 유일한 소망이며 기쁨입니다. 빛으로 오
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둠에서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우리들을
생각할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장소에 대
한 예언은 미가서 5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
는 유대 족속 중에서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내게서 내게로 나
아올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베들레헴은 떡집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우리의 "생명의 떡"으로 오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베들레헴은 '열
매'라는 말로 예수가 우리 부활의 첫열매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예수를 믿고 생활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18절을 보면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
습니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
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의 결합이 아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과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칠것이라"는 말씀의 성취입
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태어나야 했습
니까? 그것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범죄했기 때문에 육체로 범죄한 인간
은 죄의 삯으로 반드시 육체적 죽음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또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를 마땅히
지키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신 것
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다시 사심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은 복음
중에 복음이요 최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
생을 의미깊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만을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일평생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지막 하신
말씀이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
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성령으
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좌
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의 탄생은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입
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며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성탄의 계절
성경 본문: 마 1:1-25, 2:1-12
이달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인은 물론 만민이
즐거워하는 달입니다. 믿는 성도라면 이 달을 헛되이 보내고자하는 사
람이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
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마음 뿐이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우
리를 슬프게만 합니다. 그것도 연말이 되면, 우리를 더더욱 가슴 아프
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1. 네 이웃과 함께 하는 마음을
거리마다 아기 예수 탄생을 기리고, 찬양의 메아리는 우리의 가슴을
새롭게 하지만, 한편으로 이웃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
께 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아기 예수와 함께
그러나, 빛이 없는 응달에서
그늘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래가 없으며....
그들에게 기쁨으 주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
다. 死地에서 라일락은 피우지 못할지언정 그래도 우리에게 새롭게 태
어나는 마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듯 그들과 함께하는 마음을 갖자는
것입니다.
2. 베푸는 은혜로
그는 일생을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살지 않았고,언제나 없고 헐벗고
병든자의 편에 서서 살았습니다. 베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기
꺼이 베풀었던 그 사랑이 오늘의 가난한 이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것
은 크리스챤들의 역할입니다.하지만 요즘같이 삭말해져 가는 세상에서
우리들은 베푸는 자의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탄을 맞아 찬송소리는 드높지만 사랑과 관심이 적어지는 교회의 모
습을 고백하게 됩니다.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의 베푸심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엡
2:5) 따라서 받은 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정신입니다.
그것은 사랑이고 사랑이 없으면 은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성탄의 계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특히 12월은 1년중 어느 달보다도 사랑이 충만하게 넘치는 달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뻐하여 그분의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길
과도 같은 사랑을 감사하는 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쏟아겠습니다. 쏟는 것은 자
기 희생이 동반되는 것이고, 이것은 봉사하는 마음에서 얻어진다는 것
입니다. 네 이웃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
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다면 이 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결론 =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태어나려고 하는 12월을 맞아 나뿐만 아니
라 모든이들이 그분의 은혜로 기뻐하는 달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래서 새해는 이전보다 더욱 새로운 기쁨을 맞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성경 본문: 마 1:18-21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에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 요
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
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 예수는 왕이십니다 =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
수가 자기 백성을 소유한 왕이 되심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예수그리스도에 대
하여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
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을 기묘자라, 모
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
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
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왕이십니다.예수는 위대한 왕 다윗의 자손(마 1:1)으로 오셨습니
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 마2:1)를 경배하기
위하여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네가 유대
인의 왕이냐"하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네 말이 옳도다"라고 분명
히 대답하셨습니다 (마 27:11).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를 가지신 "만
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십니다."(계 17:14). 그러나 예수는 환영받지 못하
신 왕이셨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요
1:11)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왕으로 오신 초림의 예수는 세상을 통치하지
위하여 오신 정치적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 18:33-38).
그러므로 초림의 예수에게는 풍채나 위험이 없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사람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였습니다 (사 53:1-3).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막 16:19) 예수는 곧 다시 오십니다. 재림의 예수는 영
광스럽게 오실 것입니다. 재임의 예수는 "능력과 큰 영광" (마 24:30)오십
니다.
예수는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에수를 볼 것이며 예수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입니다.그리고 세상의 모드니
민족들은 재림의 예수를 인하여 슬피 울 것입니다 (계1:7). 재림의 예수께
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딤후 4:1)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
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
록 왕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십
니다 (딤전 6:15).
= 예수는 구원자이십니다 =
"이름을 예수라 하라...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Charles Hodge는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인간이 말한 모든 말들중에서 예수라는 용어보다 더
인간의 마음을 거룩하게 고양시키고 강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예숴라는 이름은 "구주"라는 뜻이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은 "위엄"이라는 뜻이 있고, 여호와는 "인격자"란 뜻이고, 주는 "능
력"을 말하고, 그리스도는 "기름을 부었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어느 칭호
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이름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고
무서워 떨며 묻고 있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주 예수
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행 16:31).
그렇습니다. 다른 어떤 인물이나, 어떤 권세나, 어떤 종교나 간구도 우리
이 구원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 자신은 자신이 영적이며 영원한 구원
을 위해서는 절대 무능상태에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육적, 지적, 물질적
어떤 능력으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보내시며 지어주신 "예수"라는 일므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증거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
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고하였습니다.
왜 예수라는 이름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까? 롬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
"이라고 했고,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
림이 없는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범죄함
으로 죽게된 인간을 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의 죽음을 대신하여 피흘려
죽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창 3:1-7)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은
짐승을 죽여 피흘리게 하시고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
다 (창 3:21). 그후 사람들의 속죄제물은 반드시 짐승의 피로 드리게 하셨
습니다 (레 4:1-35).
그런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히 9:12-26에 말씀하시기를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
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를,백성을 위하여 염
소를 속죄물로 바쳤습니다 (렘 15:11-23). 이와같이 대제사장은 피로 말미
암지 않고는 지송소에 들어가지 못했고, 짐숭의 피흘림이 없이는 사람을 받
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매년 반복해서 속죄제물을 드려야 했
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단 한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
셨습니다. 예수는 단 한번 피흘려 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
셨습니다. 다시는 누구도 피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사하여 주기 위하여 피를 흘려야 됩니다. 죄인이 아무리 피
를 흘려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도 속죄를 얻어야 할 죄인이
어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다른사람의 죄를 속해 주기 위하여 대신 죽을 의인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23)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땅위에서는 의인을 구하지
못하심으로 하나님께 친히 사람의 모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
1:14).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는 "흠없
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벧전 1:19) 입니다.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예수 내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피로 속죄함 얻었네"(찬송가 189장).
= 예수는 자기 백성의 구원자이십니다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할 자이심이라"(21절) 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말씀은 전적으로
예수께 소속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
수는 다른 사람,마귀의 자식을 위하여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
마스는 불신자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는 구원받을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피흘려 주셨습니다 (히 13:12).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덕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 15:24,26)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자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요
1:12),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 (요 17:1-26)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살후 3:2)
것처럼, 예수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원받기로 작정
된 예수의 백성들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마귀의 자식들과는 아무런 상
관이 없는 날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 속에서 우
리는 구세주의 피로써 죄의 씻음일 받지않고서 예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는 그의 백성 중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예수의 백성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
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하고 스스로 자기가 의롭다고 자랑한 바리새인은 분명히 예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하며 가슴을 치는 세리가 예수의 백성입니다.
자기 영혼에 병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자랑하는 자는 예수께서 거들떠 보
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영혼의 의사
이시기 때문입니다 (말 4:2). 뿐만 아니라 죄악에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다
고 자랑하는 자는 분명히 예수께서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백
성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인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2-13).
여러분, 남이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번민하고 있습니까?죄악의 무거운 짐
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고하
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찬송가 363장).
예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려고(마 20:28) 이 땅을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는 죄 때문에 몸부림치
며 애통하며 십자가 밑에 나오는 자를 멸시치 않으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예수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는 회개하는 죄인의 왕이시요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
고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주 앞에 나와 경배하는 여러분은 모두가 우리 예수의 백성이 되시고, 모든
죄 사함을 받으시고,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입어 영광 중에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를 맞이하여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임마누엘의 은총
성경 본문: 마 1:18-25
성탄을 경축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 위에 성탄의 주인공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나신 이 사실은 나시기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
를 통해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나실곳도 미가 선자자에 의해서 예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
은 틀림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
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예언이 이
루어져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여인
의 후손으로 태어날 메시아'를 예언했습니다. 그대로 처녀 마리아
에게 잉태되었습니다. 만약에 동정녀에게 잉태되어서 예수님이 나
지 아니 하였다면 우리 구주의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
간들은 반드시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위에 태어나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아도 벌써 죄의 씨를 받은 우리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씨를 받지 않고 태어나신 분이 한 분 계신
데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아담의 씨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
고 현숙한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이 땅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피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혈통인 요셉과 정혼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결혼
은 세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1. 약혼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
나 후견인, 혹은 중매인에 의해서 결혼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2.정
혼입니다. 당사자들이 성숙하여 선택권이 있을 때 결혼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3. 결혼입니다. 정혼 1년후 그 아내를 데려옵니다. 그런
데 아직 정혼한 사이인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요
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
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
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
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
신 말씀을 이루려 심이니라"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나심과 이 땅위에 태어나신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만 가지는 특수성입니다. 다
른 종교는 이런 법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서 태어났지만 예수님만은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
려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고로 행4장12절의 말씀 그대로 천하인간
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고 예수
님의 이름을 우리의 구원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신기한 이름입니다.
1. 나시기 전에 지은 이름입니다.
찬송가 101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나시기 전에 지으신 구주 이름 예수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중 귀하신 이름 예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십니다(마
1:21)
1) 그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엡2:8). 그 이름을 부
르면 구원을 얻습니다(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예수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구원을 얻으리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구원을 얻으리로다.
예수라는 그 이름이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바로 당신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은 이름 자체도 구원자입니다. 그
러므로 그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하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권세를 얻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
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21). 권세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경찰서장이 교통순경에게 권세를 주었더니 사
람들이 다 교통순경의 지시대로 따르게 됩니다. 권세가 있기때문입
니다. 오늘 가장 귀한 권세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얻는 하나님의 자
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으면
1.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2.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3. 마귀가 벌벌 떱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일입니다. 부흥회에서 돌아오는데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려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합니다. "집사님, 권사님들이
하시지 뭐 저에게까지 오십니까?"했더니 "아니요, 이권사가 하다가
연탄부지깽이로 이마를 맞아서 피까지 났어요"하는 겁니다. 어떻게
센지 피곤하지만 갔습니다. 제가 들어갔더니 알아보고 슬슬 숨었습
니다. 그때에 기도해서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자가 귀신들려 전도사에게 "너 같은게 전도사냐?"
하면서 막 욕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받고 갔더님 숨는 것입니
다. 기도하고 나아서 나중에는 집사까지 되었습니다.
4)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요14:14 "내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
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
여 내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하셨습니
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
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은혜를 구하면 은혜 주시고, 은사를 구하면
은사를 주시고, 신유를 구하면 신유를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
로 마귀를 쫓아내시기 바랍니다. 마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
희에게 열릴 것이니라"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나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의미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히브리 말로 복을 아쇠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뜻이니 곧 임마누엘 이라는 말입
니다. 돈푼 좀 가졌다고 뽑낼 필요 없습니다. 지위가 높아졌다고
뽑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면 돈 가진 사람
보다도 지위가 있는 사람도 최고의 축복자인 것을 믿으심기 바랍니
다. 반대로 하나님이 떠나면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
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받은 사람에게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약소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
기를 축원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
니라"(마18:20)고 했습니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가족이 둘러 앉아
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두세사람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곳에 반드
시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런 가정에는 마귀가 침범하지 못
합니다. 우환이 올 수가 없습니다. 늘 여러분의 가정이 찬송 소리
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은총이 함
께 하시고 우리 주님이 항상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
과 함께 하면 보혜사 성령께서 늘 여러분들을 보호하기 원합니다.
3년정에 풀러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거기서 설교를 제일 잘
한다는 목사님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허리우드의 베나이
스 교회에 가서 목사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하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보혜사 성
령이 당신들의 갈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뒤에서 약할 때
보혜사 성령이 등 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옆에서 외로울
때 보혜사 성령이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선물이
었습니다. 여러분, 예배 후의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
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는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늘
살기를 바랍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 성령이 늘 여러분과 교통을 해
야 합니다. 교통이 막히면 오도가도 못합니다. 성령이 마음대로 여
러분의 심령속에 들어올 수 있고, 가정속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
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
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거하시겠
음이라(요14:15-17)"고 했습니다.
동시에 이 교통이라는 말은 동업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여러분
과 늘 동업하면 매사에 성공합니다. 여러분 사업을 성령님과 함께
하십시요, 성령님과 동업하는 것은 성령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는 축복을 늘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시23:1).
부족함이 없는 삶은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하는 삶입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창15장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려고 전쟁에 나가서 다 진
멸하고 돌아왔습니다. 저쪽에서 군비를 정하고 확장해서 다시 쫓아
올지 몰라 공포 가운데 있었습니다. 잠을 자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했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하
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면 걱정이 없습니다. 시118:6에 "여
호와는 내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고,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엑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했고, 사41:10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
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했습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입으면 아무런 염려도, 근심도, 두려움도 없
습니다. 오늘 성탄을 축하하는 여러분에게 임마누엘의 은총이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임마누엘의 은총
성경 본문: 마 1:18-25
성탄을 경축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 위에 성탄의 주인공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나신 이 사실은 나시기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
를 통해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나실곳도 미가 선자자에 의해서 예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
은 틀림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
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예언이 이
루어져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여인
의 후손으로 태어날 메시아'를 예언했습니다. 그대로 처녀 마리아
에게 잉태되었습니다. 만약에 동정녀에게 잉태되어서 예수님이 나
지 아니 하였다면 우리 구주의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
간들은 반드시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위에 태어나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아도 벌써 죄의 씨를 받은 우리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씨를 받지 않고 태어나신 분이 한 분 계신
데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아담의 씨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
고 현숙한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이 땅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피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혈통인 요셉과 정혼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결혼
은 세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1. 약혼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
나 후견인, 혹은 중매인에 의해서 결혼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2.정
혼입니다. 당사자들이 성숙하여 선택권이 있을 때 결혼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3. 결혼입니다. 정혼 1년후 그 아내를 데려옵니다. 그런
데 아직 정혼한 사이인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요
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
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
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
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
신 말씀을 이루려 심이니라"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나심과 이 땅위에 태어나신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만 가지는 특수성입니다. 다
른 종교는 이런 법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서 태어났지만 예수님만은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
려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고로 행4장12절의 말씀 그대로 천하인간
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고 예수
님의 이름을 우리의 구원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신기한 이름입니다.
1. 나시기 전에 지은 이름입니다.
찬송가 101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나시기 전에 지으신 구주 이름 예수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중 귀하신 이름 예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십니다(마
1:21)
1) 그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엡2:8). 그 이름을 부
르면 구원을 얻습니다(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예수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구원을 얻으리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구원을 얻으리로다.
예수라는 그 이름이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바로 당신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은 이름 자체도 구원자입니다. 그
러므로 그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하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권세를 얻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
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21). 권세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경찰서장이 교통순경에게 권세를 주었더니 사
람들이 다 교통순경의 지시대로 따르게 됩니다. 권세가 있기때문입
니다. 오늘 가장 귀한 권세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얻는 하나님의 자
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으면
1.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2.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3. 마귀가 벌벌 떱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일입니다. 부흥회에서 돌아오는데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려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합니다. "집사님, 권사님들이
하시지 뭐 저에게까지 오십니까?"했더니 "아니요, 이권사가 하다가
연탄부지깽이로 이마를 맞아서 피까지 났어요"하는 겁니다. 어떻게
센지 피곤하지만 갔습니다. 제가 들어갔더니 알아보고 슬슬 숨었습
니다. 그때에 기도해서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자가 귀신들려 전도사에게 "너 같은게 전도사냐?"
하면서 막 욕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받고 갔더님 숨는 것입니
다. 기도하고 나아서 나중에는 집사까지 되었습니다.
4)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요14:14 "내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
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
여 내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하셨습니
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
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은혜를 구하면 은혜 주시고, 은사를 구하면
은사를 주시고, 신유를 구하면 신유를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
로 마귀를 쫓아내시기 바랍니다. 마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
희에게 열릴 것이니라"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나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의미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히브리 말로 복을 아쇠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뜻이니 곧 임마누엘 이라는 말입
니다. 돈푼 좀 가졌다고 뽑낼 필요 없습니다. 지위가 높아졌다고
뽑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면 돈 가진 사람
보다도 지위가 있는 사람도 최고의 축복자인 것을 믿으심기 바랍니
다. 반대로 하나님이 떠나면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
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받은 사람에게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약소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
기를 축원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
니라"(마18:20)고 했습니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가족이 둘러 앉아
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두세사람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곳에 반드
시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런 가정에는 마귀가 침범하지 못
합니다. 우환이 올 수가 없습니다. 늘 여러분의 가정이 찬송 소리
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은총이 함
께 하시고 우리 주님이 항상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
과 함께 하면 보혜사 성령께서 늘 여러분들을 보호하기 원합니다.
3년정에 풀러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거기서 설교를 제일 잘
한다는 목사님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허리우드의 베나이
스 교회에 가서 목사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하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보혜사 성
령이 당신들의 갈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뒤에서 약할 때
보혜사 성령이 등 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옆에서 외로울
때 보혜사 성령이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선물이
었습니다. 여러분, 예배 후의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
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는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늘
살기를 바랍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 성령이 늘 여러분과 교통을 해
야 합니다. 교통이 막히면 오도가도 못합니다. 성령이 마음대로 여
러분의 심령속에 들어올 수 있고, 가정속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
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
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거하시겠
음이라(요14:15-17)"고 했습니다.
동시에 이 교통이라는 말은 동업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여러분
과 늘 동업하면 매사에 성공합니다. 여러분 사업을 성령님과 함께
하십시요, 성령님과 동업하는 것은 성령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는 축복을 늘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시23:1).
부족함이 없는 삶은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하는 삶입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창15장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려고 전쟁에 나가서 다 진
멸하고 돌아왔습니다. 저쪽에서 군비를 정하고 확장해서 다시 쫓아
올지 몰라 공포 가운데 있었습니다. 잠을 자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했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하
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면 걱정이 없습니다. 시118:6에 "여
호와는 내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고,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엑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했고, 사41:10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
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했습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입으면 아무런 염려도, 근심도, 두려움도 없
습니다. 오늘 성탄을 축하하는 여러분에게 임마누엘의 은총이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이름 임마누엘
성경 본문: 마 1:21-25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명칭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몇가지를 요약정리해 보면 "나를 건져주신 예수님, 언제나 나와 함께 해주
시는 임마누엘 그리고 나를 우해 희생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들 수 있는데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에 대하여 살펴보고 같이 은혜
를 나눌려고 합니다.
첫째로, 위험한 자리에 있을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사 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때 그를
부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 뵈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우리가 위험한 자리에 있을 때입니다. 사람은 항상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우둔한 존재 그 자체가 인간이기 때무
입니다.
본래 사람들이란 말은 영어로는 모탈(Mortal)이라고 합니다. 죽을 존재로
서의 인간이란 뜻입니다.
사자보다 약하고 원숭이 보다 재주가 없으며 호랑이보다 용기가 없는 인간
입니다. 그래서 사람보다 더 강한자 앞에 쉽게 정복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
나 더 불행한 것은 원수로 변한 이웃에게 모해를 당할 때인 것입니다. 그때
는 영락없는 죽음의 길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삼상 28장에 보면 사울왕의 창을 피해 블레셋까지 밀려간 다윗을 보게 됩
니다. 그는 얼마나 화급했던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는 블레셋의 아기
스왕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 것입니다.
"왕이여, 기꺼이 당신의 종이 되고져 합니다."
다윗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아기스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습니다. 다윗
은 아기스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기스는 다윗을 언제
까지나 먹여살릴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이 벌어지
자 다윗을 어전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장군은 이 아기스왕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고 했지요?"
"물론입니다."
"감사하오. 이제 우리가 이스라엘과 일전을 치루어야 하는데 장군이 앞장
서서 싸워주어야겠오이다."
다윗은 참으로 진퇴양난의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위해 조국
과 동포를 죽여야 하는가?그것은 죽음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왕앞에서
물러나온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행할 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선한 아버
지께서 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살펴 주십시요."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장군들로 하여금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이니 필경 배반할 것"이라는 말을 퍼뜨리게 하여 위
기에서 건져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위험한 자리에 처해 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오사 우리의 양어깨
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안고 염려와 근심에
빠질 것이 아니라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온전히 신뢰하면서 주님은 우리를
덥썩 맡아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극심
한 환란 중에서도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두 건짐을 받았으니 사
자굴속의 다니엘과 풀무불속의 메드락 메삭,아벳느고가 그러했고 옥중에 갇
힌 베드로와 지하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구해주셨으니 우리도 위험한
자리에 처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둘째로, 앞길이 막혀 캄캄할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나자 제자들은 앞길이 꽉 막히고 눈앞
이 캄캄하여 어찌할바를 모르고 방안에 틀어박혀 문을 잠그고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주님은 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벽으로 들어오셨으니 이는
사방이 막히고 가리워졌어도 예수께서 친히 길이요, 문이 되어주신다는 것
을 직접적으로 제시해주신 말씀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벽앞에 선것 같은 절망적 상황에 곧잘 처해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
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자가 되십니다.
소설 '솔로몬의 동굴'에서 보면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솔로
몬 동굴에는 많은 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굴을 빠져 나가는 길은 오
직 한길 뿐입니다. 빛도 스며들지 못하는 작은 굴을 엎드려서 기다싶이 가
는 길 뿐입니다. 다른 길은 아무리 넓게 뚫렸어도 중간에 막혔거나 늪지가
있어서 백이면 백 다 빠져 죽거나 굶어죽게 됩니다. 그러면 이 굴을 어떻게
통과해야 합니까?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솔로몬 동굴앞에서 한 검둥이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정글속에서 나무
열매나 따 먹으며 굴속에서 기거했는데 여행자들은 그 거지 노인이 무엇을
알겠느냐고 구원을 요청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이 자기 생명을 앗아 가는
현상을 작가는 솔로몬 동굴이란 작품을 통해 풍자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솔로몬 동굴속에 기거하는 검둥이 노인같은 분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걸음 앞서가시니 우리는 어떤 장애가 가로막혔
다고 할찌라도 염려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여리고 성이 무
너지고 홍해가 갈라진 사실을 통해서 앞길이 막혔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들의 난관을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고독한 자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토굴속에서 홀로 기도하는 사도요한에게 주님은 찾아
오셔서 용기와 믿음을 주셨고 독자를 잃은 나인성과부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죽은 독자를 살려주시고 슬픔대신에 주님은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목마른자에게 생수가 되시고 무기력한 자에게 능력이 되
시며 어둠에 처할때 빛이 되어 주셨으니 우리는 앞못보는 맹인에게 지팡이
가 필요하듯 성도에겐 주님이 필요하다고 간청할 때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
로 찾아오사 기쁨과 위로와 평강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들
성경 본문: 마 10:16-23
예나 지금이나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
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다시 그들을 파송하신 기사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나가 전도해야 될 세상
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
야를 쏘다니며 먹이를 사냥하고 상대를 만나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맹수인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야의 대표적인 맹수는 뱀,독수리,전갈,이리 등입니다.
그 가운데 이리는 사납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맹수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맹수라도 사람보다 사납고 공격적인 것은 없습니다.
개를 훈련시키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개는 훈련시키는대로 한다고 합
니다. 훈련받은 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단 미친
개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외국 서커스단에서 쇼를 하는 호랑이나 코끼리 그리고 사자 같은 맹
수들도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누구에게나 대들고 배신을 일삼
고 있습니다. 사람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지만
20년을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이 고작 하는 일이 사기,횡령,협잡,부
정, 폭력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신 것
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가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1. 지혜롭게 순결하라.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당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난폭하고 거칠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이리로 비기는가하면 뱀과
비둘기를 들어 교훈하셨습니다.
뱀은 하등동물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고등동물인 인간을 넘어 뜨렸습
니다. 뱀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언제나 다니던 길로만 다닙니다.
둘째 한번 공격하기로 작정한 대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집요합니다.
셋째, 서두르지 않습니다. 신중합니다.
넷째, 통채로 삼켜 버립니다.
다섯째, 냉혈동물입니다.
여섯째,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뱀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하등동물이지만 그 지혜는 고등동물이 따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지혜를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는 뱀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동물입니다.
비둘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목적지향적입니다.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물을 복합시켜 보지 않고 한 가지만을 주시합니
다.
둘째, 평화적입니다.
다른 상대를 공격하거나 패거리를 지어 쪼아대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비둘기를 순결과 평화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령의 상징으로 묫
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와 순결의 조화를 생각해야 합니
다. 뱀같은 지혜만 강조하다 도면 순수성이 결여되기 쉽고, 비둘기같
은 순결만 강조되다 보면 지혜가 모자라게 됩니다.
지혜와 순결을 마치 자동차와 두 바퀴처럼 한 축을 중심으로 함께 움
직이고 굴러가야 합니다. 지혜만 있으면 매끄럽고 순결만 있으면 속아
넘아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롭고 순결한 양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리
때 같은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고 그리고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을 삼가라.
17절을 보면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
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교해야 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필요한 존재이면서 고통스
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닭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당하는 경우보다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손해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리나 전갈이나 독수리나
뱀 때문에 위기를 겪고 고통을 당했떤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은 것은 수를 셀 수 없었습
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아론과
누이였던 미리암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고라와 그의 일당들이 그를 괴
롭히고 반역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모세를 괴롭혔습니다.바울
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동족이며 선민인 유대인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디모데후서 4:9 이하를 보면 의도적으로 바울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
습니다. 그는 구리장색 알렉산더였습니다. 금속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장점을 덮
어두고 단점을 들추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리시니"라고
했고, "너도 저를 주의하라 "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의 목회 일
생동안 크나큰 가시였습니다.
40여년을 목회하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 속에 [조심해
야 될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밝힌 조심해야 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첫째 말이 많은 사람.
둘째,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흉잡는 사람.
셋째, 매사를 반대만 하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넷째, 성직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
다섯째,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여섯째,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곱째, 성직을 감투로 생각하는 사람.
여덟째 남을 대접하지 않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홉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열째 말로만 큰소리 치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
이상에서 열거한 열가지 항목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런지 의문입
니다.
사람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 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람 때문에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손해보고 길이 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목사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
습니다.
첫째는 노노 하는 사람입니다. (NO NO PEOPLE)
항상 안된다. 못한다고 머리 흔들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입니
다.
둘째는 요요하는 사람 (YO YO PEOPLE) 입니다.
줏대도 없고 소신도 없이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셋째는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입니다 (BLOW BLOW PEOPLE):바람
이 날리는 사람들.
생각도 크고 소리도 커서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 일을 해야할 때는 움
추려들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고고 하는 사람입니다 (GO GO PLOPLE)
생각도 말도 크고 동시에 소신껏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노노하는 사람,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 요요하는 사람들은 삼가해
야 할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좋다고 아무나 사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귀하다고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처녀가 결혼이 급하다고 아무나 배우자로 정할 수는 업지 않습니까?
[만남]은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선택과 결정은 신
중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재치 (TACT)와 만남(CONTACT)이라는 두 친구가 똑같이 사랑(LOVE)
이라는 처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접근 방법은 달랐습니다.
재치(MR.TACT)군은 현관에서 소녀의 부모를 만나 열심히 자기를 소개
하고 집안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남(MR CONTACT)은 뒷문에서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구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결혼에 성공
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성공비결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 만나고 조건 만나고 타
협하고 로비하고 있을 때 은밀한 곳에서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것이빈
다. 천번 만번 만나도 유익될 것이 없는 사람, 예수 믿고 경건생활하
는데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그 만남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사람은 삼가라]고 했습니다.
3.염려하지 말라.
19절을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또는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31을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
한복음 14:1이하를 보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5:7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말하는 것, 영원한 세계의 문제등 염
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단어는 오케이(OK)라
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
까?
미국 하버드대학 안에 있는 비지니스 스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
국 사람이 콕(COKE)이라고 부르는 코카콜라는 것입니다. 전세계 195개
국에 코카콜라가 진출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UN회원국 184개국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코카콜라를 가리켜 [미국 문화의 첨병] [자본주의의
우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1초에 4만병,1시간이면 1억4천4백만병, 하루면 30억병
가량이 소비됩니다.
코카콜라가 세계를 점령하게된 비결은 제조비법,독특한 광고전략,기
업경영 철학, 그리고 전쟁과 권력을 철저히 이용하는 네가지라고 합니
다.
그러나 물만큼 그 소비량이 많은 것은 아니빈다. 코카콜라는 떨어져
도 살지만 물 떨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세계도처
에 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산 속에도, 바다 속에도 땅 속에서도 물
이 있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당부는 헛소리
가 아닌 것입니다.
염려는 의심과 불신이 만들어 냅니다. 의심과 불신을 내쫓으면 염려
걱정도 함께 쫓겨난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을 찾겠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고 인내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신앙을 포기한다든지
주님을 떠나버린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
니다.
물론 참고 견디는 그 고통은 클 것입니다. 아픔도 크고 외로움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인내가 요청됩니다.
주님이 고통과 십자가의 아픔을 참으셨던 것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아멘.
가면서 전파하라
성경 본문: 마 10:5-15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신 일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
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신 일과 병자들을 고치신 일과 복음을 전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궁극적 목적을 살펴 보면 복
음을 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를 셀 수 없는 성공경부 운동과 제자훈련 운동이 일
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전도하지 않는 성경공부나 제자
훈련은 의미가 없습니다.
도시마다 기독교 이름을 내건 병원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본래 선교사들이
그 병원을 세울 때의 정신은 가난하고 불쌍한 병자들을 고쳐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병원들이 복음전도는 없애
버리고 의료 행위만 계속한다면 병원문을 닫든지, 이름을 바꾸어야 할 것입
니다.
주님은 부단히 열 두제자를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전도현장으
로 파송하셨습니다.
본문은 열 두제자를 전도현장으로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는 전도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피를 물려받은 동족입니다.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핍
박했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동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선교명령도 맨 먼저 예루살렘
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
니라"고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데서부터, 관계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전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면서 늘 느끼는 것입다만 내 가족이 제일 어렵고 가장 가가
운 사람이 제일 힘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
다.
가령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듣는 순간부터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번,세번, 진단
을 다시 해 보고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
은 영혼이 죽어가는 문제에 대해선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박테리아 때문에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
습니다. 24시간 만에 사람의 살점을 다 파먹고 죽게 만든다는 괴박테리아의
공포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보다 더 무서운 박테리아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송두리채 파멸시키는 박테리아, 그 이름 [죄의 박테리아]입니다.
이 박테리아는 영혼도, 정신도, 육체도 모조리 썩게 만들고 맙니다. 이 죄
의 박테리아를 퇴치하고 고치는 백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
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죄를 사함받고 내가 새 사람이 되는 것입
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가족, 네 친척에게로 가라"고, "가서 그들을 건져내라"고. 어떤 주부
는 주걱으로 밥을 퍼서 담을 때마다 십자가를 그으며 예수 믿게 해달라고기
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느니 남편 구두를 새벽마다 싸가지고 나와 신발임자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6개월 아침 금식을 하면서 남편 구원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건성피부증 때문에 가려워 하는 남편의 등을 긁어 주면서 십
자가를 긋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구원
해야 합니다.
2. 가면서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 여러가지 입니다만 그중에 하나는 기독교는 가
면서 전파하라는 종교인데 반해 불교는 한 곳에 머물면서 전파하는 종교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거리로 불교는 산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
즈음 웬일인지 불교가 기독교보다 더 설치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가면서 전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호흡하고 세상을
걸어가면서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16을 보면 "내
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보내십니다. 입산수도하는 도사처럼 찾아오는 사람
들에게만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가면서, 찾아가서, 기회를 만들어서 복
음을 전해야 합니다.
찾아 갑시다. 만납시다. 기회를 만듭시다.
그리고 가면서 전파하라는 말씀의 뜻은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두번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 가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3. 능력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전도자에게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사도 아닌데 무슨 재주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
이르리 깨끗케 하며 귀신을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이 전도하면서 당하게 될 사태들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고치
고 내쫓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둘째, 전도는 전투라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하셨는데 귀신은 순순히 쫓겨가는 법이 없습니다.
귀신은 더럽고, 악하고, 나쁜 존재입니다. 귀신은 방해꾼이고, 훼방꾼입니
다.귀신은 이간질에 능하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 귀신을 내쫓는 방법은
귀신보다 더 강한 능력을 받으면 되는데 그 능력은 예수 능력인 것입니다.
전도는 귀신이 점령하고 있는 영역을 빼앗는 전투이기 때문에 능력을 받아
야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마지막 때 사단이 인류를 위협하는 도구로 핵무기, 에이즈
박테리아 등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고칠 것을 고치고 막을 것을 막아내고, 내 쫓을 것
은 내 쫓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주여 능력을 주옵소서.
4.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9-10절을 보면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전도 이외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전도가 과연 될까? 그 사람이 내 말을 들어 줄까? 그 날 나와 줄까? 그 사
람이 예수를 믿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처신을 해
야 하는가? 등등 전도 자체보다 걱정거리가 더 많게 됩니다.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마치 무전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알몸으로 떠났습니
다. 이유는 관광 떠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예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시작했고 하고 있고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힘 주시고 동행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서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했고, 13절을 보면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아니
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여행 도중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 평안을 먼저 빌라는것입
니다.
그리고 평안을 비는 행위는 오늘 우리에게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도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평안이 성립됩
니다. 영혼의 참 평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둘째, 평안한 마음과 태도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작정하고 기도하는 대장자와 말다툼을 한다든지, 입씨름을 한다든지,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것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양보
하고 후퇴해야 합니다.
정신질환자를 상담요법으로 치료하는 사람은 고성을 지르거나 책상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환자의 심리상태를 편하고 안정되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말씨와 태도가 부드럽고 안정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태도 역시 평안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면서 한숨을 내
리쉰다든지 팔자 타령을 한다든지 하면 안됩니다.
예수의 복음을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6:15에서 "평
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6.지혜롭고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16절을 보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지혜와 순결은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두가지 큰 덕목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손해만 보게 되고 순결이 없으면 손가락질을 당하게 됩니다.
전도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문서 전도라고 합니다. 입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개인
전도라고 합니다. 발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방문 전도라고 합니
다. 온 몸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격 전도, 삶의 전도라고 합
니다.
우리가해야 할 전도는 온 몸 전도입니다. 그리고 가면서, 가서 하는 전도
라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은 매우 중요한 주간입니다.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1)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2) 자신의 건강과 감정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3) 다툼이나 충돌을 피해야 합니다.
4) 다음 주일은 전도 대상자의 시간과 여건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5) 단 한 사람만을 대상자로 작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는 실패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6) 대상자를 계속 양육해야 합니다.
(1) 좋은 본을 보입시다.
(2) 덕을 끼칩시다.
(3)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합시다.
(4) 계속 양육합시다.
가면서 전파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도 가면서 전파하라"고.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아멘.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성경 본문: 마 11:12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
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시며 항상 진노하시
고 심판을 베푸시며 좀처럼 좋은 것을 주지 않는 분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에덴에
는 죄악과 미움,질병,죽음 그리고 가난과 저주는 그 존재를 찾을 수 없었습
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왜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할까요?
1.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인간의 비극과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와 더러움, 미움과 가난과 질병, 저주와 죽음 등을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자 우리 안에 들어온
것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주권자가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에덴에
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면 누구든지 축복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하신 세계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심판은 영
적인 죽음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
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죽은 자는 살아있는 사람과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살아 있을 때 그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럽던 관계의 사가도 죽고나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
다. 이처럼 죽음이란 교제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배반한 후 영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후
손들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교
통이 끊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삶 가운데서 쫓아 버리고 자신이 주권자가
되는 인본주의적인 세계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죽음의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
고 하나님 없는 물질적인 세계 속에서 살다가 심판의 바람이 불어올 때 지
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환경의 저주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
를 내고 얼굴에 땀이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도록 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겨 피투성이가 되는 것
은 축복된 삶이 아닙니다.
또한 생활고로 하나님의 심판의 일부입니다.생활고 속에서도 하나님을 배
반하지 않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신앙은 돋보이지만
그 생활고 자체가 축복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창 3:1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병과 저주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이 흙인데 돌
아가기 위해서는 병이 들어야 합니다. 병은 우리를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지켜보는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돌을 옮겨 놓으라"는 명령을 죽은 나사로를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반역함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 이런 일이 생
긴 후에 마귀는 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용해 인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
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마귀가 인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만한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를 마귀의 종으로 내놓았
습니다. 누구든지 순종하는 자는 그 대상자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꼬임에 빠져 사단에게 순종했음으로 사단의 종이
되고 사단은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조건으로 삼아 사람들을 도적질하고 죽
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벗어나보려고 여러가지
애를 썼습니다. 르네상스 혁명, 18세계 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이성과 과학
을 통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몸부림쳤지만 절대로 인간에게 참
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인본주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일으킨 막스 레닌의 공
산주의는 70여년 동안 더 비참하고 더 가난하고 더 저주받은 세계를 인류에
게 남겼습니다.
이러므로 이 비극적인 실락원의 슬픔을 누가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천국
이 세상과 인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2천년전, 예수님을 동정녀
몸을 통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
생자를 주신 것이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시자 그는 광야
에 이끌려 40주 40야를 금식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나오셔서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낙원, 그리고 마귀가 세상 임금이 되버려 마귀의 고통 속에서 인류가 사는
이 세계 가운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천국을 이 세상 가운데 건설하시겠
다는 말씀이십니다.
이러므로 주님께서는 먼저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이것은 죄악을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가지 살아온 관행과 생각을 완전히 바꾸라는
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맞이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하늘나라 임금으로 오셔서 천국을 우리 가운데 세우
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종교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윤리나 도덕적
인 부흥운동만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근원적인 목
적은 천국을 이 땅에 건설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여의 공생애 기간 동안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는 곳마
다 용서와 사랑, 치료와 해방을 주셨고 평화와 영생을 주셨습니다. 수많으
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국을 눈으로 보
고 귀로 듣고 맛보고 만질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가지 그들이 살아온 마귀
의 나라 속에서의 고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유대인과 로마병정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통하여 이땅에 천국을 도래하게 하는 수단으로 삼으신 것입니
다.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
속에 천국을 세우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천국은 2천년전 갈보리 십자가에서부터 몸과 흘리신 보혈을 통하여 용서와
의와 생명의 천국이 이 땅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와 사망의 노예
가 되어 영원히 지옥으로 갈 수 밖에없고 태어날 때부터 죄속에서 태어났는
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청산하심으로 사망을 철폐하시고
용서와 의로움과 영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 아무 조건이 없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를 통하여 용서와 의로움과 영생을 얻
게되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용서와 사랑, 성령 충만의 천국을 우리
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됐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으로 화목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성령충만한 축복으로 인해 하나님
의 사랑이 우리 속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되면 거룩
한 삶의 열매가 우리에게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자유와 해방의 치료의 천국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마귀에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했으며
고통을 당했습니다. 더러운 마귀에게 더러움으로 묶이고 악한 마귀에게 악
으로 묶이고 점치는 귀신에게 거짓으로 묶였으며 연약함과 질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했스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게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과
치료의 천국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예
수님께서 마귀의 모든 정사와 권세를 묶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 이후 심판을 받아서 이 세상이 저
주와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이고 가난과 고통을 당하는 인류를 대신해 십자
가에서 죽으심으로 축복과 은혜와 부요의 은총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죽음으로서 죽음을 멸하시고 죽음을 장사지
내셨으며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영생과 하늘천국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야말로 그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통해서 엄청
난 변화를 우리에게 준 사건입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영적인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이 구만리장천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
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이
것은 우리가 있는 이곳에 하늘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하늘
나라가 갈보리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임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도록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통
해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에 계시
를 받아들이면 그로 말미암아 천국이 우리 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에수님을 믿고 거듭나자 마자 천국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존재가 되었습니
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셨으면 천국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주님께서 세우신 천국의 역사가
우리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은 나라를 세우러 오셨지 종교를 주로 오신 것
은 아닙니다. 마귀의 세력을 무찌르고 주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종교적인 시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천국을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에
서 못박혀 죽으시고 마귀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면 천국도 함께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
다. 왕이신 예수님과 그 나라의 권세인 성령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게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떠난 우리의 존재는 상사할 수도 없습니다.
3.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성경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가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 속에 하늘나라를 세우셨고 우리는 그 천국에
서 성령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와 함게 일하는 자로서 마
귀의 권세를 무찌르고 하늘나라를 확장하는 역사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
애 속에 마귀의 모든 나라 흔적을 없애버리고 우리의 삶 속에 하늘나라 역
사가 넘쳐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노하여 다른 나라를 빼앗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어놓고 전 국민이 힘을 합해 전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천
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나라를 침노하고 마귀를 내어 쫓고 점령해
야 하는 것이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예비해 놓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보냈을 때
그곳에 있는 가나안 일곱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점령하라고 말씀하신 것
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천국을 우리가
점령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쳐들어가듯이 우리
도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고 천국 십자가를 통해 그 나라를 점령해야 되는
것입니다. 점령하기 위해서는 피흘리기까지 싸우며 침노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시애틀에서 어느 성도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 성도
는 성남지역에서 30만평의 땅이 자신의 할아버지 소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
습니다. 6.25 사변 후 미국으로 무작정 이민을 했기에 자신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계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기꾼들이 서류를 변조해 그 땅을 매매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성도는 그 땅이 합법적으로 할아버지의 땅이요, 상속권이 자기에게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을 찾기 위하여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법
적으로 그 성도의 땅엔데 다른 사람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되찾기 위해서
는 싸워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찾아준 천국은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상속재산입니다. 그 천국은 용서와 의와 생명의 천국이요,
화해와 사랑과 성령충만의 천국이요, 자유와 해방과 치료의 천국이요, 축복
과 은혜의 부요의 천국이며 영생과 영원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
리의 것임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가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는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었으니 이제
되었다. 할렐루야"라고 외쳤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위해서는 침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천국에 속한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중복음과
삼중복음이야말로 천국의 실체를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확실한 믿음으로 천국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
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
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해야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여 의와 영원한 생명은 내것입
니다. 자유와 해방과 치료를 주시고 악한 영들을 다 쫓아내고 자유와 해방
을 주옵소서. 저주를 물리쳐 주시고 축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
다.
악한 마귀는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려고 공중의 권세를 잡고
우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천국을 침노해 들어
가야 합니다. 힘있고 강하게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 속에서 원수 마귀를 대적하고 몰아내야 합니다.마귀는 이
스라엘을 가로막았던 가나안 일곱족속과 같습니다. 우리는 악한 영을 쫓아
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귀산아 물
러갈찌어다"라고 강하게 대적해야합니다.
물리치지 않으면 악한 영들은 그곳에 집을 세우고 끈질기게 버립니다. 전
쟁하는 군사의 마음으로 강력히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조금도 의심없이 입으로 시인하고 강력
히 내 것으로 주장해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함을 주장해야 합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라고 믿음으로 주장해야 합니다.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해 건강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계속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고백
을 해야 합니다.
인도네시아 이브라인 목사님의 아들이 뇌성마비로 태어났지만 바라봄의 법
칙을 사용해 건강한 아들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너는 예수님 이름으로 치료
받았다. 너는 뇌성마비 환자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너를 깨끗이 치료하셨
다"라고 강력히 믿음을 주장했을 때 3년만에 뇌성마비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뇌성마비 환자였다는 조그마한 흔적도 남지않고 깨끗이 치유되
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상황, 무슨 일을 만나든지 믿음의 긍정적인 고백을 통해 천국
이 우리의 현실 가운데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많은 민족의 조상이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이름을 바
꾸고 자신의 의지를 입으로 시인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천국을 주장하십시오. "축복은 내것이다. 저주는 물러갔
다. 축복과 하나님 은총을 방해하는 악한 원수 마귀는 물러갈찌어다"라고
강력히 믿음을 주장하십시오. 천국은 침노한 자가 빼앗습니다.
믿음과 기도로 침노하면서 마귀를 물리치고 입술로 주장하십시오. 강력히
내것으로 휘어 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
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환경과 삶 가운데 천국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
다.
오늘날 이 세계는 영적인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흑암의 나라와 그
리스도께서 갈보리 죽으심으로 이루신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
음으로 천국 백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천국의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강력히 마귀를 대적하고 입술의 고백과 긍정적인 시인을 통해 천국
이 우리의 삶과 가정, 이 사회와 이 나라와 온 세계에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도시들
성경 본문: 마 11:20-24
현대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구 집중문제, 교
통문제, 주택문제, 대기오염, 환경파괴,범죄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가 봐도 도시가 크면 클수록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도 큰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대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시규모가 크면 클수록 문제도 크
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오늘까지 남아 있는 것도 없
어져 버린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 라든지, 폼페이 같은 도시는 없어졌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도시도 없어졌습니다. 그 세도시는 고라신, 벱세다, 가
버나움입니다. 그 세도시는 서울이나 뉴욕처럼 큰 도시느니 아닙다만 그러
나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큰 도시 구실을 했습니다.
그 도시들이 왜 없어졌는가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현대 도시의 성격 규명
과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불신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
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신의 결과입니다. 믿으면 회개운동이 일어납니
다만 안 믿으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도시를 사람으로 의인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라신,벱세다,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과정입
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가 없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느끼고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 단계는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와 가지고 있는 잘못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변명하거
나 핑계를 대면 안됩니다.
셋째 단계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하고 믿음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다
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낱낱이 마치 자술서를 쓰는 것처럼 내가 지은 죄를 숨김없이 고백해
야 합니다.
넷째 단계는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고백만으로 끝나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내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단계는 사죄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내 죄를 고백하면 그리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약속하고 있
습니다. 눈보다 더 희개 양털보다 더 희게 사하신다고 약속하셨고(사
1:18),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고 했습니다 (사 44:22). 그리고 동이 서에
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가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했습니다 (시 103:12).
여섯째 단계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참회개는 거기서 돌아서야 합니다. 거기서 발을 빼고 손을 씻고 그 현장을
떠나야 합니다. 죄에 대해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참된 회개는 방향을 바꾸
는 것입니다.
일곱째 단계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이켰으며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딴데로 가면 안됩니다.
여덟번째 단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되돌이 근성이 있습니다. 회개했노라고 하지만 옛날 그때 거기
로 되돌아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른다면 죄길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 하
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신 도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도 목격했습니다
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도시들은 어떻습니까? 서울 장안에 사는 사람치고 교회를 모르는 사
람과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
니 서울 시민 1200만을 생각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들 가운데 고라신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없으면 그 다음은 멸망 밖에 없는 것입니다.
2.교만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
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올라 가겠다고 설쳤던 루시퍼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시날 평원에 모여 성을 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벽
돌을 만들고 역청을 만들어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성의 높이는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하나님을 낮추고 자
기네 이름을 떨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탑은 무너졌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쌓으려 했던 교만의 탑은 지금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역시 교만과 패륜과 부도덕과 불신
때문에 유황불에 녹아 없어졌습니다.
개인도, 도시도, 역사도, 왕조도 교만하면 안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바벧론 왕조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 때문에 쫓겨났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도 왕위에서 쫓겨갔고, 페르시아의 국무총리 하만도 교만 때문에 죽었습
니다.
영국의 신학자였던 테일러(Jeremy Taylor)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무엇
이었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때 당신은 無였다. 그후 여러해 동안 당신은 무
엇이었는가를 생각해봐.그것은 연약함이었다.
그 다음 당신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큰 죄인이다. 당신은 이웃
과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부모와 이웃에게 빚진 자이
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날마다 우리는 겸손해야 된다"라고 했습니
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 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대표로
조만식장로님이 주기철 목사님을 찾아가 교회의 청빙결정을 전하고 모시기
로 했습니다. 주기촐 목사님을 찾아온 조만식 장로님은 젊은 주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희 교회에 부임하실 것을 허락해 주
십시오"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
를 다닐 때 조만식 장로님은 교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주일 낮 조만식 장로님이 바쁜 일로 예배에
늦었습니다. 황급히 들어서는 조만식 장로님을 본 주기철 목사님이 소리쳤
습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장로님이 예배에 늦으면 어떻게 본이
되겠습니까?" 그날 조장로님은 문간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 다시
는 예배에 늦지 않겠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 한국교회를 빛냈던 두 거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다던 가버나움 도시는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버나움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가온(gaon)이라는 말이 있스빈다. 그 뜻
은 "베풀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실체나 가진 것은 손톱만한 것인데 그것을
부풀려서 마치 세상 것을 다 알고, 다 가졌고, 다 통달한 것처럼 자기도취
에 빠져 있는 것이 교만 즉 [가온]인 것입니다. 주드(zud)라는 단어도 있습
니다. 그 뜻은 우쭐대다.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을 가장 적절하
게 묘사한 헬라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투포(tupho)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
은 "천천히 타 버리다","꺼져가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
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섭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사람은 천천히 마
치 촛불이 꺼져가는 것처럼 천천히 타버리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교만은 언젠가는 명성도,성공도, 소유도,인기도 꺼져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편 119:21을 보면 '교만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6을 보면 "주께서는 굡나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을 멀리 해야 합니다.
3.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라신,벱세다,가버나움,이 도시들이 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습니까?
20절을 보면 "책망을 받았고",21절을 보면 "화가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받
았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음부에가지 낮아지리라"는 책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땅도,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저주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
니다.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 벗은대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러나 셈과 야벱은 얼굴을 돌리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옷을 덮어 드렸습니다.
잠이 깬 뒤 노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됐고 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바로 그 함의 자손들이 훗날 시돈, 그랄, 소돔,고모라에 흩어져 살았고 흑
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저주의 반대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
가 바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와 내 가족과 내 친척과 내 이웃과, 내 친구
와 그리고 우리나라가 축복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복도 여러가지입니다. 재물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명예의 복, 부부
이 복 등 그 종류가 가지가지 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복음 다 받거나 소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 한 가지 복을 선택해야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는 복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복의 비결이기 때문입니
다.
저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제대로 먹고,입고,
쓰는 것이 한스러울 만큼 부러웠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제가 제일 가
난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은 저에게 예수 믿는 것과 공부하는 것은 그
만두어선 안된다면 논을 팔고 밭을 팔아 공부를 시켜 주셨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무엇이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박도둑놈
이 됐을까?깡패가 됐을가?아니면 벌써 죽었을까? 생각할 수록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몸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는 찬송이
감격으로 다가섭니다.
여러분, 불신은 저주의 원인입니다. 교만은 저주와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버립시다. 믿음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저주받아 죽어가는 내 가족, 내 친척,내 이웃, 내 친구들을 건져냅
시다.
저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사랑하는 예수
내가 받은 구원을 증거합시다.
저들을 저주의 무더기 속에 방치해 둘 수가 없습니다.
건져내야 합니다.
살려내야 합니다.
함께 축복받고 영생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새해를 바라보며
성경 본문: 마 11:25-30
모든 일을 함에 있어 분명한 목표와 계획이 없으면 귀중한 시간과 금
전과 노력이 그만 허비되고 맙니다. 물론 인간 세상에는 인간으로서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그래도 목표가 분명하고 계획
이 명확하면 어떠한 우발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대처 능력과 지혜가 생
겨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가온 1994년 새해를 맞이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결정하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정
하는 태도에 따라서 이 해가 성공적일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
다.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잘 정리, 다음과같이 목표를 잘 세워서 승
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는 새해
성숙한 신앙안이 되기 위해 새해에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될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
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정의로운 삶을
살 것을 크게 강조하고 계십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 그 발걸음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드러나
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없는 사람은 그 발걸음이 자행 자지하며 불의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
님을 떠나 정의가 사라진 사람은 협잡꾼, 공갈배, 모리배가 되기 쉽습
니다. 즉 인격적인 파탄을 가져오게 됩니다. 정의를 잃어버린 인간은
인간의 길을 포기한 동물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마음 깊이 하나님의 계명을
새기고 우리의 발걸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
워하며 행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정의가 있는 올바른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결혼계약을 무시하고 자행자지하고 아이들도 부모
의 뜻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 가정은 파탄에 이르고 말 것
입니다.
사회도 정의가 사라져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이 없는 자를 무시하고
짓밟으며 폭력이 난무하면 머지않아 파탄이 오고 말 것입니다.
국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스빈다. 국가 정의가 사라지고 부정 부패가
팽배하면 곧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새해에
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정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목표를 세워야 합니
다.
그리고 또 우리는 정직한 사람으로서 새해를 살도록 마음에 각오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거짓이 가득한 사람은 신뢰를 잃고 맙니다. 우리
는 신뢰를 잃은 사람의 말로를 이솝의 우화를 통해 알고 있지 않습니
까?
한 소년이 들에서 양을 치다가 무료해서 "늑대가 나왔다"고 소리쳤습
니다. 마을 사람들은 바쁜 일손을 멈추고 소년에게로 달려왔습니다.
그 소년은 빙긋이 웃으며 거짓말이었다고 했고 사람들은 그를 꾸짖고
돌아갔습니다.
얼마 지난후 이 소년은 다시 외쳤습니다. "사람 살려요,늑대가 나왔
어요."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급히 뛰어 왔으나 또 속은 줄 알고는 책
망하며 돌아갔습니다. 그후 정말로 늑대가 나타나 소년은 목청껏 다급
하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구하러 뛰어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늑대에게 희생당했습니다. 신뢰를 잃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자꾸만 하면 신뢰를 잃게 되고 그
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존재하기를 그쳐야 합니다.
바야흐로 국제화시대, 개방화시대를 맞은 우리는 이제 신뢰를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신뢰받는 개인,신뢰받는 민족이 되어야 그 개인과 민
족이 살고 번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거짓의 모든 누
더기를 벗어비리고 정직한 사람으로서 새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새해에 우리는 깨끗한 사람이 될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겠습니
다. 음란, 방탕하게 살면 거치른 세파에 휘몰려서 침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또 새해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섬기고 있는 교회, 속해 있는 사회나 단체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더러운 것 중의 하나는 배반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함으로 인류 역사에 영원히 버림받
고 말았습니다. 배신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자신이 배반한 상대방을 모
함하며 위협하는데 이런 사람은 이미 인격 파탄자로서 그의 인생도 파
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 새해에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으
로 잘 길들임을 받아 순종적이고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계 어느 곳엘 가나 사람들은 몰인정하고
사나우며 무서워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부드럽
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오르는 억세고 사나운 사람이 기업을 차지할 것 같지만
성경은 온유한 사람이 풍부한 화평을 즐기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새해에 우리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의 분수를 알아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분수를 넘어서 탐욕으로 날
뛰다가 실패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받은 것이 아니
라 주는 것입니다. 관심을 주고 시간, 물질, 도움을 주고 베푸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러므로 새해에는 어찌하든지 나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
니라 서로 사랑을 줌으로 해서 모두가 잘 사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삶
우리는 인본주의라는 암에 걸려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
야 합니다. 맡기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또 "네 짐을 야웨께 맡겨 버리라 그리하
면 너를 돌보아 주겠다"고 말씀하고 곗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지 못합니다. 어찌하던지 인
본주의에 서서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열심히 기도함으로 믿음이 마음
속에 생겨나면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여러분께서는 아무리 바빠도 매일 성경 5장을 읽고 하루에 30분 이
상 기도하는 것을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 때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
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홀로 지어
서 인간들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
해 우리의 구원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
리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면 주님께서 책임지고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
지 않고 내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며 하나님을 제외시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멍에 밑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 있으면 실제 멍에는 예수님 목에 걸려
있고 우리 목에는 멍에가 걸리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멍에를 힘차게
끌고 가시고 우리는 그 멍에 밑에 들어가 쉽고 가볍게 은혜로써 인생
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
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받아서 그 은혜로 사는 새해를 만들어야 하겠습
니다.
3. 하늘나라를 세우며 사는 삶
현재의 우리의 삶은 모두 모래성과 같습니다. 현재 보와 권세, 명예
를 만족할 만큼 가졌다 해도 세월이 지나면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옛
바벧론의 영화가 어디 있습니까? 저 거창하던 로마의 영화도 오늘날
거름무더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것은 다 지나가고 맙니다. 더욱이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때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취하는 모든 것은 모래벌판의 장난
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께서 오라고 하시면 이 땅에 쌓아놓은 모래성
을 저버리고 우리는 천국으로 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므로 현재의
삶을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는 일중에는 주된 일이 있고 부속족인 일
이 있습니다. 나의 주된 일, 주업은 예수님을 섬기고 하늘나라를 세우
는 데 있어야 하며 인생을 사는 것은 부업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바꾸면 모든 일이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을 여러분 삶의 주업을 삼으시기를 주님의 일
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에서도 먼저 해야할 일은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먹고 자고 지
장에 나가는 그런 하숙행같은 생활이 주업이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주 앞에 조용히 앉아 기도하며 주의 음성을 듣는 큐티(QT)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읽고 새로 깨달은 바나 의문나
는 것을 함께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먼저 해야할 일이 있고 나중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영
업이면 그 직장은 일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예
배하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은 반드시 하나님과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하는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일은 주님으
로부터 일주일의 남은 날들을 축복받고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날은 가족들과 함께 지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서의 맡은 봉사가 끝나면 곧 집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지내십시오. 주
일날 교회에 나와 주님께 예배드리고 귀가하여 가족들이 단란하게 대
화하며 지내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악한 세대에서 가정을 지킬 수 있
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 진
행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진행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영혼 구원
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신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삼 일만에 부활 승천하심으로 성령께서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
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영혼 구원을 언제나 최대의 중대사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내 일을 해주시는 것입니
다.
베드로가 자기의 배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먼저 섬겼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원하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배에 모시고 섬긴 베
드로의 배에서 나오시면서 예수님은 빈손 털며 "고맙네. 열심히 살게
나!"하고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책임한 예수님이 아니십니
다.
베드로를 보시더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야, 이제 깊은 데로 가서 그
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니 잡힌 것이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졌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무책임하게 떠나가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
나님은 드리는 자에게는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다시 안
겨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살자
조국은 우리 삶의 터전입니다. 조국은 친정과 같습니다. 친정이 잘삼
녀서 친정에서 아무것도 안도와줘도 가슴을 펴고 삽니다. 그러나 친정
이 못살면 친정을 도와주지도 않는데 온 시집식구들이 "뭘 훔쳐서 친
정에 안가져다주나?"하는 의심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사는 것이 고달
프고 애달픈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잘살면 해외에 가서도 어깨를 쭉
펴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못 살면 어느 곳에 가나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옛날에 제가 어려서 시골에 살 때 저희 집에서 개를 많이 길렀습니
다. 저희 집 개가 동네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부잣집 개가 내려온다고
해서 개조차 대접을 해 주었습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국민들이 대접을 받지, 나라가 연약하면 국민들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조국을 잃었던 때를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일정 36년 동안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고, 이름도 문자도
말도 빼앗기고, 잃어버린 땅에서 천민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
다. 6.25 때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참히 생명을 잃고 짓밟혔습니
까? 이러므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민족의 지도자를 위해서 끊임없
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자연을 사랑하고 오염을 막는 일에서부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없이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자
연을 파괴하는 것은 스스로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새해에는 어찌하던지 솔선하여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
랑의 실천을 자연사랑으로부터 시작, 쓰레기도 줄이고 환경을 정화하
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중도덕을 지키고 국가 재산을 귀히 여기며 살아야 합
니다. 공원의 벤치나 공중변소, 공중전화 등도 함께 깨끗이 사용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내게 무엇을 해 주었나' 질문하지
말고'내가 국가를 의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실행하며 살아
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강과 질서가 바로 잡힌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우리가 전하
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올바로 증거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
로도 잘못 살면서 남에게 복음을 외친들 무슨 효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
치게 얻는 삶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해야만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잘 지키고 관리해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야 하겠습니다. 이래야만 그리스도와 참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돛단배는 바닷물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에 관계없이 돛의 방
향대로 나아갑니다. 강풍이 불고 바다가 요동을 쳐도 돛의 방향에 따
라 물을 거슬러 올가기도 합니다. 물이나 바람이 배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돛이 배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세상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마음의 돛의 방향대로 살아가
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목적지 항구를 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돛을 놓
는 것처럼 우리도 한해를 살아가면서 어떠한 삶을 살겠다는 마음의 방
향을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향 설정없이 바람부는대로 산다면 그
인생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금년 새해에는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십시다.
첫째, 성숙한 성도의 생활을 할 것을 결심하며,
둘째,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주의 은혜로
살며 ,
셋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최우선에 두며,
넷째,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늘 기도하며 작은 일이라도 나라를 위
해 헌신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이러한 마음의 돛을 확실하게 세우고 이 한해를 살
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의 평화
성경 본문: 마 11:28
서 론
많은 때에 사탄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생각으로서 사람들
을 괴롭히기를 좋아하다. 많은 때에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괴로운 마음을 안고 나를 찾아 오곤 한다. 만일 당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괴로워한다면 나는 당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인이 아니라고
보증해 줄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괴로움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조금도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
요가 없다. 당신이 괴로워 한다는 사실이 성령께서 아직도 당신과 함께 하
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인 것이다.
I.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까지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 예수께
서 오늘의 본문에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A.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백성들을 위하여 부
르짖거나 기도하지도 말고 그들을 위하여 내게 중보하지도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B.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에브라임은 우상과 연합하였
으니 그냥 내버려 두라.
C.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내버려두신) 사람들의 죄
악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D.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라 그들을 위하여 더이상 기도하지 말라.
내가 듣지 않겠다. 나는 그들을 포기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얼마나 끔찍
한 일인가?
II.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 것. 많은때에 우리가 어떤, 일테면 어린이들
에게 대한 성적 학대나 혹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잔학 행위들에 관하여
읽거나 들을때에 우리들은 [저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야]라고 단정짓게 되지
만,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요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을
죄에서 정하게 하신다고 선포하고 있다.
A. 간음도 용서 못받을 죄는 아니다.
1. 다윗은 간음죄를 지었다. 하지만 그가 회개할때 선지자는 말하기를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했다.
2. 예수님은 사람들이 돌로 치려 했었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게 말씀하셨다.[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B. 살인죄도 용서 못받을 죄는 아니다.
1. 다윗은 또한 살인자이기도 했었다.
2. 바울의 손은 성도를 죽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스데반 집사
의 죽음과 그 처형을 이루는 일에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III. 성경의 고찰
A. 성령의 처음 책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죄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
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神이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지 않으리
니.
1. 가장 영광된 진리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
이다.
a.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b. 하나님의 신이 언제나 사람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것이 경고이다.
c. 하나님의 신이 한 사람과 함께하기를 그치는 때가 있다.
d. 성령께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나아오게 하시면 더이상 죄
에 대한 가책이 없어지는 것이다.
2. 만일 오늘 아침 하나님의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에 함께 하신다면 감사
한 일이다. 성령께서 더이상 당신과 함께하시지 않을 때가 올 수도 있다.
B. 요한복음 12:39에서 바리새인들과 관련하여 그것이 말씀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것이 아
니라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1. 어떻게 그들이 믿을 수 없게 되었는가?
2. 처음 그들이 예수를 만나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을때에 그들은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었다.
a. 몇몇 질문들과 논쟁이 있고난 후 그들은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결
정을 내렸다.
b. 그들이 다른 기적을 접할때마다 그 질문은 다시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그 메시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는 매번 그들의 대덥은 [그렇지 않
다(no)]는 것이었다.
c. 그들은 너무나 여러분 아니(No) 라고 말해버렸기 때문에 이제와서는 그
렇다(Yes)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을 수
없느니라]
C. 본문에서 귀신들리고 눈 멀고 벙어리되면 이 사람이 예수님께 이끌려
왔을때에 예수님은 그를 고치사 그로하여금 보며 말할 수 있게 하셨다. 여
기에서 그가 메시야였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
은 놀라며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라고 말하기 시작했었는데 그것은
곧 메시야의 호칭들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1. 어떻든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믿을 수 없으므로 이제 이 인정된 기적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시인해야만 하도록 강요되
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귀신의 힘으로 이 일을 한다고 말하게 되었
던 것이다.
2. 마귀들에 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사실상의 속성이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접근하고 있거나 혹은 이미 당도해 버렸다는 증거였다. 성령
이 더이상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
라. 그들을 위하여 더이상 기도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버렸느니라]고 말씀
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말이다.
D. 예수께서 성령이 죄에 대하여 증거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셨다.
1. 당신의 마음에 예수는 메시야이시며, 그가 당신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
다는 성령의 증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로 나아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2. 당신의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거부하는 것은 궁극적으
로 당신을 하나님의 신이 더이상 함께하지 아니하시는 자리에 빠뜨리게 될
것이다.
3.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는다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까지도 더이상 용서는 없는 것이다.
E.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이땅에 보내신 것이 세상을 저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고 선포하셨다. 또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저주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나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하므로
이미 저주를 받았느니라.
1. 이것이 바로 저주이다. 빛이 이 세상에 있으나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오
지 아니하는 것이다.
2. 그들이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는 것은 그들이 어두움을 사랑하는 까닭
이다. 인간은 그 행위가 악하므로 어두움을 빛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다.
3. 나에게 예수를 영접하는 것에 관한 지적인 논쟁 따위를 하려들지 말라
당신의 문제는 당신이 죄를 사랑하는데에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두움을 빛
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F. 만일 당신이 크고 흰 하나님의 보좌의 심판대에 나가서게 된다면, 거기
서 당신에게 오직 하나의 선고가 내려질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짓말이
나 당신이 속였던 사람들등 당신이 행했던 모든 죄악된 것들을 낱낱이 파고
들지 않으실 것이다. 오직 하나의 선고는 바로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
신의 구세주로 모셔들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선고일 것이다.
IV. 의학적인 견해에 의하면 쇠약증으로 알려진 현상들이 있다. 이것은 육
체의 어느 근육이나 기관을 사용하지 아니하므로 말미암아 그 기능을 상실
한 것이다.
A. 만일 당신이 팔을 옆구리에 묶어 놓고 사용하지 아니한다면 오랜 시간
이 경과한 후 당신의 팔 근육은 쇠약해질 것이며 마침내 그 기능을 잃고 말
것이다.
B. 학자들은 당신이 충분히 오랫동안 아주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있게 되
면 눈의 신경 세포를 자극시켜줄 빛이 없으므로 당신은 눈이 멀게 될것이라
고 말한다.
C. 당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일을 상당 시간동안 거부하면
나중에 당신은 그리스도에 순종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결국
당신은 바리새인들처럼 믿지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V. 형이상학적 견해애 의하면 모든 행위와 결정들은 당신의 뇌에 관련된
어떤 패턴을 형성한다고 한다.자꾸만 반복되는 어떤 행위는 나주엥 가샤가
는 자동적으로 그 일을 하게 하는 일종의 패턴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당신
은 어떤 여성들이 말을 하면서도 뜨게질을 계속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눈을 감고도 그 일을 하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A. 처음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서 당신의 마음속에 성령의
이끄심을 느꼈을 때에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참으로 전쟁이 계속되었을 것인
데 그때에 당신이 몇몇 이유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한 분
이 아니라고 결정하여 [No]라고 말했다면.
1. 다음번에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요청을 받을때에는 [No]
라고 말하기가 조금도 쉬워질 것이다. 이미 당신의 뇌에는 패턴이 시작되었
기 때문이다.
2. 당신은 너무나 여러번 [No]라고 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거의 자동
적인 대답이 되어버린 것이다.
3. 누군가 당신에게 지금 예수를 영접하라고 요청하면 당신의 온 몸이 일
어나서 그 사고에 대하여 저항하여 당신은 그 생각에 격렬히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4. 당신은 이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일에 가까워진 것이다. 당신은
요한이[그러므로 그들은 능히 믿지 못하였다]고 말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처지에 이르러 가고 있는 것이다.
B.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정하는 일의 십분의 9에 가까운 숫자가
이미 십대때에 이루어진다. 십대때에는 아직 유순할 때이며 또한 아직 계속
적인 거부로서 그 마음이 굳어지지 아니했을 때인 것이다.
1. 인생의 평균 수명은 70년이다.
2. 만일 당신이 25세로서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이제 당신의
구원받을 기회는 5,000분의 일빡에 되지 않는 것이다.
3. 만일 당신이 35세이며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면 당신의 기회는 125.000
분의 1밖에 안된다.
4. 격차는 점차 증대하여 만일 당신이 65세가 되도록 계속해서 예수 그리
스도를 거부해 왔다면 당신이 이 기회를 져버렸으므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기
회는 아주 희박하여 당신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 은혜의 기적이라 아
니할 수 없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주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에 주를 부르라]고 말했던 것이다.
6.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네가 주의 음성을 들으면 네 마음을 강퍅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C. 오늘 당신이 이 자리를 떠날때에, 당신은 천국으로 가는 길에 서게 되
거나 아니면 지옥으로 향한 거보를 내딛게 될 것이다.
세 종류의 사람
성경 본문: 마 12:1-3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에 대
해서 세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거미와 같은 유형, 둘째는
개미와 같이 자기만을 위하여 준비하는 이기적인 유형, 셋째는 남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꿀벌과 같은 남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탈무드에서는 인간을 평가할 때 세가지 기준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첫째
는 돈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둘째는 쾌락적인 생활에 빠져 있는가를 통
해서, 셋째로는 감정을 말하는데 노여움 등의 감정을 얼마나 억제할 수 있
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세 종류의 신자
중요한 것은 오늘날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이 모습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
가? 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조명하면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예
수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하는 과정을 일곱가지 단계로 구분해서 말
씀합니다.
첫번째는 탄생과 유년시절, 두번째는 삼년동안의 공생애 사역의 준비과정,
세번째는 갈릴리 바닷에서 전도하던 시기, 네번째는 갈릴리 전도를 마치시
는 말기 전도시기, 다섯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
렘으로 입성하시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여섯번째는 예수께서 예
루살렘의 성문밖 골고다 언덕에서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하시면서 죽으시
고 다시금 그 고통과 괴로움이 죽음으로 끝나는 사건을, 일곱번째는 사흘만
에 사망이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셔서 사십일동안 지상에서 부활 이후에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이 일곱가지 단계중에서 특별히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해서 전도하시던
세번째 단계입니다.
안식일에 제자 열두명을 데리시고 회당을 향해서 가실 때에 밀밭사이로 지
나가시는 중에 시장해서 배고픈 제자들이 남의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숨어서 바라보던 바리새인들이 "보소서! 당신의 제
자들이 밀이삭을 주워 먹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는 힐
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말씀하시면서 한편 손마
른 사람을 고쳐주시는가를 그 기적적인 역사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볼 수 있는 것은 제자들과 바리새인, 한편 손마른 사람은 아무 대가
도 없이 병이 나았습니다. 값없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과 9절에 보면 '그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과 수고와 값으로는 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너무 귀한
은혜라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값없이 은혜를 받고 값없이 새사람이 되고, 값없이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이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와 같은 본능적인 신자
본문은 교회 안에서 세 종류의 사람을 제시해 주면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첫번째는 교회 안에는 제자들과 같은 부류가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라고 말썸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
도를 따르며 기초적인 신앙은 있었으나 육체적인 욕구를 따라서 움직이는
세속적인 신자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
씀하실 때에 배와 그물과 고기와 모든 가정과 아내와 자식까지 뒤로 하고
주님을 따르던 신앙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밀
이삭을 잘라 먹던 본능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도 열심히 봉사를 잘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하지 말아
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사퍄트"라는 말로서 '노동으로 부터 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은 안식일의 참다운 의미입니다. 안식일은 하던 일을 중지하는 단순한 날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을 향해서 거룩하게 경배하며 육체
적인 정신적인 노동으로부터 영육간에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구별하고 축복된 날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은 토요일을 그들의 안식일로 지켰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고 돌아가셨다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그 구원을 완성하신 다음
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인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
다.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이 망가졌
으나 망가진 인간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해 주심으로 새롭게 창조
하신 새창조의 날이기 때문에 바로 이 주님의 부활의 날을 새로운 안식일로
우리가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전자를 육적인 안식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살아있는 영적인 안식일입니다.
제자들의 이 모습을 통해 오늘날 경제문제로 주일성수를 범하는 교인들의
유형을 볼 수 있습니다. 돈이라면 신앙도 잘라버리고 , 돈버는 일이라면 세
상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도 버젓이 하는 본능적인 신자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안식
일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는 예수님과 나의 관게가 정상이 되느냐 안되느냐
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디칸은 계산적인 사고의 사람과 영감적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계산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타산적이며, 영감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손해를 봐도 그 이상의 축복을 기대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계산적인 사고에서 영감적인 사고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소유를 위해서 사는 사람과 소유
보다는 삶의 의미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사
람은 얼마나 돈이 많으냐에 삶의 의미를 두고, 후자의 사람은 삶자체에서
의미와 기쁨을 느낍니다.
제자들과 같은 성도는 아침에 이슬을 머금었다가 태양이 떠오를 때 꽃이
피지만 저녁에는 쭈그러 드는 나팔꽃과 같은 신자이며, 남에 의해 끌려오는
인력거와 같은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비판하는 신자
두번째로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신
자는 적은 문제를 가지고 문제를 만들고 비난하고 비평하고 욕하는 공격적
인 언어의 사람들입니다.
1절을 보면 "이삭을 잘라 먹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원문에 보면 "이삭
을 잘라 먹기를 시작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별로 문제될 것도 없는데
불구하고 비난을 시작한 두도지 같은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가
시처럼 콕콕 찌르기도 합니다. 개구리처럼 개골개골 울기만하는 신자입니
다. 교회에서 자기는 안하고 남만 시키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눈속의 들보를 먼
저 보고 네 형제의 티를 빼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바리새인들도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능
력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허물이 있다면 이삭을 잘라 먹는 제자들보다
그런 영져인 잘못을 범함 바리새인들이 더 큰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처럼 순종하는 신자
세번째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 회복되어 성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건강하지도 못
하고 초라한 사람이었지만 예수께서 손을 내밀라고 했을 때 손을 내밀었습
니다. 불구자였지만 순종했습니다. 순종이 최고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관심과 사랑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회당 안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한편 손마른 사람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12절 말씀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귀하냐"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불구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인정해 주었으며 귀중하게 여겨 그는 너무 감격
하여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13절을 통하여 순종하면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능적인 신앙을 버리고 늘 겸손하게 한편 손마른 사람처럼
부족하지만 순종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
성경 본문: 마 13:10-17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사나이
까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룻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룻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았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
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
으니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
을까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것
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본장을 통하여 7가지의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에 대한 비밀
스러운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이렇게 비유를 통해 가르치신 이유는 영적
으로 우매한 백성들에게 하늘나라의 진리를 직접 선포할때에 그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본장에 나타난 비유는 7가지로 구분되는데 "
아노트"라는 학자는 7가지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분류 하였습니다.
1.관계
1)씨뿌리는자 - 여러 계급이 사람들에 대한 천국의 관계
2)가라자 - 사악한 사람들에 대한 천국의 관계
2.성장
1)겨자씨 - 살아 난다는 관념하에서의 천국의 성장
2)누룩 - 점차 퍼진다는 관념에서의 천국의 성장
3.귀중함
1)감춰진 보화 - 감춰진 것을 발견한다는 생각하에서의 천국의 귀중함
2)좋은 진주 - 제공된 것을 놓치지 않고 손에 넣는다는 생각 하에서의 천
국의 귀중함
4.분리
1)끄는 그물 - 세상 끝날에 선인과 악인 사이의 분리또한 13장에 나타난 7
개의 비유를 아시아의 일곱교회와 연결시키는 학자도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인내로 유명하며 - 씨뿌리는자는 인내로 유명하다서머나
교회는 "유대인이 아니며"- 이는 가라지의 비유이다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자리이며" 겨자씨의 비유이다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이며 - 여자와 누룩의
비유이다사데 교회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이며 들판에 감춰진 보화이
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말을 들은 값진 진주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토하여 내었다는 것이다.좋은 것은 모으고 나쁜것은 내
어버리는 비유이다.
유명한 해석가인 "랑게"는 일곱비유에서 일련의 교회의 역사적 발전을
보았습니다.씨뿌리는자의 비유에서 사도시대의 모습을 더듬어 볼수 있으며
가라지의 비유에서 이단 가운데 발생한 고대 카토릭 교회를 보고 자라서
하나의 나무가 되었다면 공중의 새가 와서 깃들었을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콘스탄틴 대제시대에 설립된외모를 갖춘 교회의 묘사를 보며 가루 서말속
에 넣은 누룩의 비유에서는 유럽의 미개한 종족들 사이에 기독교 신앙이
중세교회를 통해서 보급되고 변화를 일으키는 영향을 보며 밭에 있는 보화
의 비유에서는 종교개혁 시대를 보고 진주의 비유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근
대 문화 곧 세속주의 수용 사이의 대조를 보며 끄는 그물의 비유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볼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무에게나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려면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믿음이 있는 자는
천국의비밀에 대한 지식이 주어질 것입니다.또한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
어서 배우고 순종하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을 갖고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에
게 천국의 진리가 계시 될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은 보긴 보아도 듣긴 들어도
깨닫지못함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자는 세상적인것에 대한 사랑과
교만한마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대한 무지와 이해의 결핍이 야기 되는 것입
니다이러한 무지를 극복하려면 성령을 온전히 의지해야 하며(고전2:10)하
나님의 뜻을 알고자 노력하여 성경을 상고해야하고(요5:39) 예수그리스를
바라보아야 (히12:2)합니다.
이렇게 할때에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감추인것을 드러내어 하나님
의 뜻을 전달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쫏아 살게 하려함인것입니
다.
성도님들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뜻을 쫏아 살아가시는 삶이 되어지
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매우 신나는 일입니다.왜냐하면 비밀이란 원
래 아무나 아는것이 아니요 알만한 사람만 알아야 하는것이기 때문입니
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듣게 교훈한것이 아니고 비유를 통
해서 말씀 하셨는데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
다. 먼저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겔12:2)(14절-15절)
(겔 12:2)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
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
한 족속임이니라
모든 사람은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를 소경이라 하고 들을 귀를 가지고 듣지 못하
는 자를 귀머거리 라고 합니다.이러한 자는 감각기관이 불구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감지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습
니다.그러나 영적으로 눈먼 소경과 귀머거리가 또한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눈먼자와 소경된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전하는 진리
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죄로 말미암는 경우
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
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라 "말씀 하신것처럼 패역한
백성 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없는 것입니다.죄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멀게하고 귀먹게하는 특성이있습니다.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아주
무감각하게 만들어 영적인 불구자로 만들어 버립니다.이러한 무감각한 상
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게하는 세속적인 일에더더욱 열심있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진단하며 영적인 불구에서 벗어 날수 있도록 힘을 기
울여야 하겠습니다.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
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
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다음으로는 13장3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곧 창세전 부터 감추인것을 드
러내리라함을 이루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것입니다.
이것은 아삽의 시중에서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비밀한 말
을 발표하리니"라는 귀절을 인용한 것입니다(시78:2)
한편 "창세부터 감추인것들"과 옛 비밀한 말은 구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사역들을 의미 합니다(시78편)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것은 결국 구약시대 때부터 비밀
로 내려오던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어리석은 무리들에게 보다 쉽게 설명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비밀을 아는것이 허락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
다.왜 이러한 지식이 제자들에게는 허락이 되었을까요? 주님의 설명에 의
하면 그것은재자들이 이미 소유한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있는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자는 그 있는것도 빼앗기
리라"라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에게는 신비를 아는것이 허락되지 않
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들에게는 왜 허락되지 않았을까요?그들에게 무엇
인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이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제자들이 소
유하고 있었던 것 즉 제자들로 하여금 천국의 비밀을 받아들일수 있는 능
력을 발휘하도록 했던 그 어떤것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그러므로 그들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능력이 없었고 그들이 깨닫고 있는것조차도 잃어버
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리에게는 없었던 그 무엇이 제자들에게는 있었던가요? 제
자들과유대 지도자들과 둘러서 있는 무리간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요? 제자들은예수를 왕으로 영접했고 그리고 바로 예수께 대한 이와같은
행위와 태도 때문에그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을수 있었다는 것이 나타나 있
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배척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할수도 없었으며 그들은 받을수도
없었다.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자들에게는 그 자신을 그들에게 주
셨습니다.그리하여 그들은 천국의 모든 원리들과 특권들을 식별하고 소유
할수 있었습니다.그렇지만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충성을 지금까지 거부했고
그래서 천국을 볼수 도 들어갈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의 배경을
생각해 보면 그 상황을 이렇게말할수 있을것입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이 무리는 그들이 태어나면서 부터받은 종교훈련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길
들에 대한 예비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성
경이 전하는 메세지의 성취로서 이 땅에 오셨던것입니다.그때에 그들중 일
부는 그를 영접했으나 그외 사람들은 배척을 하였습니다. 배척한 사람에
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그들이 초기종교 교육을 통
해 얻은 모든것의 참된 가치마저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그래
서 왕에 대한 그들의 불충성 때문에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지 아니한이 무
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
들이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생생한 묘사를 해주
고자 하셨던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그러므로 내
가 저희에게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
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르었으니 일렀으되너희
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예수님
께서는 이같은 이사야의 예언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보지도 못하며 듣지 못한다는 책망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요?"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
으니 이는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네게 고침을 받을까 두
려워함이라"이 구절에서 전체의 핵심이 분명히 드러납니다.주님은 사람들
이 제자들이 보았던그것을 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들은 보기는
보았으나 보지 못했고 듣기는 들었으니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과연 그 이
유는 무엇인가요?그것은 그들이 보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고 듣
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왕이 없이는 천국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가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왕되신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것입
니다.불순종으로 인한 이 우둔함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까닭은 무리들로 하여금 보거나 듣거나 느끼지 못하도
록 함이 아니요 그들이 자진해서 보고 듣고 느끼도록 만들기 위함이었습
니다.(마태 복음 강해.캠벨 몰간지음. 원광연 옮김.아가페 출판사. P325-327
참조)
오늘 13장은 여러가지를 통해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것을 우리에게 허락을
하셨습니다.영적으로 무지몽매한 자가 되어서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긴 보아도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구속
의 은혜에 늘 젖어있으면서 평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교훈
에 귀를 귀울임으로서 영혼의 상태가 흐려지지 않도록 힘을 기울여야 하며
오늘날 아직도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
며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수 때를 기다리라
성경 본문: 마 13:24-30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속히 악의 역사를 끝내고, 의의 역사,자유
와 평화의 역사를 이룩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성급한 욕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교훈은 추수 때
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급한 심판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
를 그릇치기 쉽다는 것입니다. 좀 고통스럽더라도 정해진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의 가라지 비유의 요점입
니다.
1.인내를 기다리라.
먼저 우리가 이 비유에서 배울 것은 고통스럽더라도 추수 때까지 인
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비유에서 종들이 밭에 가라지가 나온 것을 보고 가서 '지금 당장 뽑
아버릴까요?'라고 주인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결국 지금 당
장 뽑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종들의 의사 표시입니다. 그것은 곧 오늘
우리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에게 "가만 두어라. 가
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둘 다 추수때까지 함
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가라지를 싫어하시지만 자기가 사랑하시는 좋은 밀 때문에
추수 때까지 참으시며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우리에
게 권면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느니만큼
티도 없고 흠도 없는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기를 힘
쓰시오. 그리고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
하시오 (벧후 3:14-15)."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결실이 이루어질 때까지 부지런히 자라야
할 것입니다. 머지 않아 추수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내놓
을 열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치기도 합니다. 가뭄이 오기도 한 것입니다. 메뚜기
떼가 몰려 오기도 합니다. 병충해로 인하여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이
것은 곧 신앙의 결실을 방해하는 고난의 요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는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추수 때 열매를 내놓을 수 없다면 우리는 심판을 면할 수
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불의와 그로 인하여 오늘 고
난들을 불평하지 말고 참고 견뎌 부지런히 열매 맺기 위한 노력을 쉬
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고난의 때가 아닙니다. 바로 축복의 때입니다. 이 때를 고난
의 시기로 받아 들이지 말고 열매를 맺기 위하여 허락된 축복의 기간
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열심으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아름다운
신앙의 결실들이 이루어지는 축복받은 삶이 될 것입니다. 이 축복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하루 하루가 차라리 즐겁고 보람을 느
끼는 순간들이 될 것입니다.
2. 넓은 밀 밭을 보라
다음으로 우리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비유에서 종들이 놀라 주인에게 와서 보고했습니다. "주인이여,당신이
밭에 뿌린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
겼습니까?"
이것은 가라지를 보고 놀랐다는 표정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종들에
게는 이 가라지를 보고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가라지가 유
독 크게 돋보였던 것입니다. 그 가라지 때문에 모든 밭이 다 못쓰기
될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곧 모든 밭은 가
라지고 꽉 차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인의 대답은 너무나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만 두라는 것입니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
입니다. 주인은 결코 초조하지 않습니다. 여유가 만만합니다. 그는 결
코 가라지가 그 밀밭 전체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내다 본 것입니다. 아니 가라지는 그 많은 밀이삭에 비교하여 볼 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 밭을 지배하는 것
은 밀이지 결코 가라지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주인은 가라지
때문에 결코 추수때의 풍성한 수확이 줄어들 것이라고 보지 않았습니
다.
같은 사실을 놓고 주인과 이렇게 정반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
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주인이 가졌던 역사적 안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나 사회를 볼 때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
은 가라지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를 덮고 있는 어두움과 악의
역사만을 보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불의와 부조리와
부도덕과 착취와 억압만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생활에서도 항
상 우리는 짜증스러운 일들과 고통스러운 일들만이 눈에 띄는 것입니
다. 그래서 우리는 늘 절망하고 늘 낙심하며 늘 한숨짓는 것입니다.
세계 경제 상황이나 정치적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오
히려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만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
고 있습니다. 더우기 우리 나라의 형편은 점점 암담합니다. 따라서 사
람들의 마음도 더욱 각박하여져서 예의와 염치를 모르고 서로 물고 뜯
는 불신과 부도덕의 사회로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눈을 들어 밀밭을 보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계 속에서 일
어나고 있는 가라지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경작하시는 세상
밭에는 밀 이삭이 충실하게 익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악의 역사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실
이상으로 확대되어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하나님께서 뿌려두신 밀 이삭들이 조용히 무성하게 자라고 있음을 우
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요란스럽지는 않아도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놀라운 세력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보아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선하
신 하나님이심을 항상 기억합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
님이 이룩해가시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확신입니다. 의의 역사, 빛의
역사,진리의 역사는 그 뿌리를 점점 더 깊이 내리면서 그 무성한 가지
를 넓게 펼쳐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추수 때를 기다리는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비록 고난과 어둠의 역사가 있다 할지라도 인내함으로
극복하고 성숙의 역사, 창조의 역사를 이룩해 갑시다. 눈을들어 누렇
게 익어가는 넓은 하나님의 밀밭을 보면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남은
때를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함께 자라게 두어라
성경 본문: 마 13:24-30, 34-41
(마 13: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
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덧
뿌리고 갔더니
(마 13: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마 13: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아니하
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 13: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
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13: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뽑을
까 염려하노라
(마 13: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
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묶
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마 13: 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
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3: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나
나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마 13: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 13: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 13: 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
은 천사들이니
(마 13: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세상은 씨 뿌림과 자라남과 거둠이 반복되어 지는 장소입니다. 만물의
시작이있듯이 끝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 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며 악한 사단의 세력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곳입니다. 사단의
사역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지 못하도록 하고 자기의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며 한곳에만 머물지
않고다른곳에서도 활동하려고 두루 돌아다닙니다(벧전5:8)
(벧전 5: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다니
며 삼킬 자를 찾나니
돌아 다니다가 깨어있지 않고 잠자는 성도를 삼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가운데에서도 잠잘때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린다고 하였습니
다.
가라지는 곡식과 함께 자라면서 곡식을 잘 자라지 못하게 하며 곡식과
가라지가같이 자랄때 가라지를 뽑으려 해도 잘 구별이 되지 않아 쉽게 뽑
아 버릴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에게 유익한것만을 구하고 필요치 아니한것은 내
뱉는 성질이 있지만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달라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게 두어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 이유는 참된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고 또한 그것들을 세상
에 밝히기위함 입니다. 곡식 가운데 뿌려진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의 상태
와 관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라지때문에 손상 당하는 곡식에
대해 슬퍼하는 열심있는종 들은 가라지를 뽑아 버리고 싶어 합니다(28절)
그러나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실수로 실수로 인하여 알곡을 가라지로 잘못알고 뽑아 버릴수
도 있기때문이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무리들을 존속시킨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잘못하여 신실한 성도를 축출한다는 것은 더욱 슬픈일이 될것이
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수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가 함께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추수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 할것입니다.
(참고) 성도들은 왜 곡식에 비유 되는가?곡식은 귀하고 정선된 씨의 산물
입니다. 성도는 바로 성령의 산물입니다.
씨가 곡식이 되려면 먼저 땅에 뿌려져야 하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
을 입거나 혹은 거룩한 열매들을 맺기 위해서는 은혜의 씨도 먼저 그들의
마음속에 뿌려져야 한다.또한 곡식은 유익한 낟알입니다.이와같이 성도들
은 세상사람들의 유익한 사람들입니다.(잠10:21)
(잠 10: 21)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없
으므로 죽느니라
성도들이 곡식으로 비유되는 것은 곡식이 진정한 곡식으로 사용되기 이
전에는 모든 기후 조건을 이기고 견디어 내야 하는 것처럼 성도도 진정한
성도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격심한 고난과 박해,시련과 시험의 때를 인내하
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기에 성도가 곡식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곡식이 완전히 익기전에 불순한 기후로 인하여 병약하고 빛깔도 변하는
것처럼한 사람이 성도로 인정받기까지는 사단의 유혹이나 자신과 세상의
유혹으로 인하여 지극히 병약하고 나약해질때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쾌적하게 빛나고 하나님께서 건조하고 시기 적절한 기후
를 보내실때면 그 곡식이 놀랍게 살아나게 되는 것처럼 성도가 시험중에
있다든가 낙심중에 있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설수 있어
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도 성도를 곡식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가라
지의 비유를 통하여 경계하는 신앙을 가질것을 교훈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내에서 이루어 지는 선과악의 혼합을 이해해야 합니
다. 가라지 같은 성도가 있어서 교회성장에 폐를 끼치는 무리가 있을찌라
도 우리는그들을 함부로 정죄할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심판을 종말까지 보류하시며 그날에 이르러서는 가라
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는
말씀이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추수때에 주인에 의해 알
곡으로 거두어 질수 있도록 준비 합시다.
오늘 본문은 곡식과 가리지의 비유인데 아울러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설명하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37절을 보면은"좋은씨를 뿌리는자는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인자는 복음의 첫 선포자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좋은 씨를 뿌린다는
것은바로 오늘날에도 복음은 계속 선포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
다.
다음으로 밭은 세상이라 하였습니다. 밭을 세상이라함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이스라엘을 넘어 온세상에 미칠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좋은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 하였습니다.인자에 의해 이 세상에 뿌려진자
들을 말합니다.천국의 아들이라는 말은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을 가진 자들
을 의미하는데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이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과 그 이
웃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이며 성령의 여러 열매를 맺을수 있는 믿음과 인
내를 소유한것을 가리킵니다가라지는 악한자들의 아들들이요 하였습니다.
악한자들에 의해 흩뿌려진자들을말합니다.이들은 할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의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라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 독보리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도 불리우며 싹의 모습이
밀이나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피기까지는 얼른 식별하기가
어렵고 잘못해 서 먹었을 경우에는 급한설사와 구토등의 여러가지 증상이
있으며 심하게 되면 목숨을 잃을 경우도 있습니다.이 가라지를 심은자는
마귀라고 하였는데 마귀의 속 성은 이와같이 위장에 능수능란합니다.그리
고 잠복성이 매우 강합니다.이삭이 나오기 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
가지의 외형과 성장과정을 보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감춰진 마각을 드
러내 놓고 알곡에게 해를 끼칩니다.또한 마귀의 속성은 해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러므로 가라지는 알곡뿐 아니라 인체에 큰 피해를 가져다 줍니
다.결국은 마귀는 성도를 의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고 불법과 부정을 하
도록 강요하는 자임을 41절에서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라고 하였습니다.세상끝은 문자적으로
이 시대의완료를 말합니다.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암시하며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끝은 단순히 세계를 운행시키는힘의 단순한 궤멸이
아니며 생명의 단 순한 고갈도 아니고 여명의 우연한 단절도 아닙니다.때
가 차고 이르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것처럼 세상의 끝은 적절한때와
순서에 따라오는 결말입니다.
그리고 세상끝의 추숫군은 천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들은 구약에
서 주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역활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것중의 천사의 중대한 역활 과
책임은 세상끝날에 인자와 함께 세상에 와서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하는 역
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교훈하여 주
고 있는것은교회는 이 세상에 있어서 천국의 모형임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
다. 그러나 마귀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교회안에 침투해서 성도들과 같이
활동하고양의 가죽을 쓰고 이리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어
지럽히고 성도 를 빼앗아 가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러
한 마귀를 단번에 제거하지 않고 함께 자라게 두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을 잘못 뽑을수가 있기 때문이며 교회
안에서가라지 같은 성도가 진실로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함께 자라게 두어라 는 말씀속의 의미
는 인간의 지식으로 는 교회안에서 침된 신앙의 소유자와 비신앙적인 자
를 구별하기 심히 어렵기에교회 안에서 어떤 한 신자가 특별히 들어나는
뚜렷한 범죄를 한일이 없는 이상 아무도 그를 배격할수 없으므로 비신앙적
인 사람일지라도 참고 용납하여 끝까지기다려야 할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속에서 다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교회안에는 두가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알곡과 가라지가 있듯이
온전한자와 온전치 못한 자가 있고 중생한자와 중생치 못한자가 교회안에
서 공존하며열심있는자와 태만한자가 있고 영적인자와 육적인 성도가 있
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같이 공존하여 자라고 있지만 세상 끝날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교훈하여 주고 있습니다.가라지는 영원한 불로 알곡은
주인의 창고에 들이게 될것입니다. 먼저는 주인에 의하여 흩어져 있던 가
라지가 모아질것입니다.그런후에단으로 묶일것입니다.한 묶음의 무신론자
들.한묶음의 박해자들.한 묶음의 위선자들. 한 묶음의 이단자들이 묶여져
불가운데 던져지게 될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세상 끝날에 분명히 있을것은 사실입니다.그날에 가서 알
곡되지 못하고 가라지가 되어서 그때에 울며 이를 갊이 없는 성도로 준비
하여야 합니다. 다시한번 본문에서 요구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
다.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로 비유된 성도들이 있는데 알곡과 가라지를 구
분할수 있 는 사람은 없으며 아무도 그 어느 누구라도 정죄할수 없음을
보여주고 혹시라도왜 교회안에 잘못된 성도를 그냥 나두냐고 항변하는 성
도는 "함께 자라게 두어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세상 끝날 주님
이 구별해 낼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그리고 그날에 가서 주인에 의해 거두
어지는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
1. 좋은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성장에 방해되는 가시와 엉겅퀴등에 대항하
여 싸워야 합니다(마13:22)
(마 13: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와 엉겅퀴가 많은 땅은 그 토양 자체는 비옥하나 밭위가 손질되지
않아 싹은나지만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을수 없는 땅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환
경,물질등의 외부적 요소가 가져오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방
황하는 사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은 이러한 자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신앙이 온전히 자라지 못하고 알곡으로 남지 못하는 자가 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성도에게 있어서 내세에 관한 관심을 멀리하
게 됩 니다. 즉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는 현세 위주의 생각으로 영원한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와
용기가 없는 상태를말합니다.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세상을 향한 욕구로
혼탁해지고 나누어진 사람 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정함이 없습니다.(약1:8)
(약 1: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재리의 유혹
이란 재물 자체에 대한 필요한 욕구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필요 이
상의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오류에 빠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주께서 그쓸것을 미리 알고 채워 주시므
로 현재의 삶에서 겪게 되는 물질의 빈곤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마음에 평
안을 누릴수있습니다.또한 참된 성도는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부"보다는
하나님께 부요함으로써 영원한 기쁨과 세상이 주는 거짓 기쁨을 바꾸지 말
아야 합니다.
2.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도록 힘써야 합니다(벧후1:5-7)
(벧후 1: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지식을,
(벧후 1: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인내를,인내에 경건을,
(벧후 1: 7) 경건에 형제 우애를,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진정으로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더 나아가서 충
실한 알곡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에 덕을 더하여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덕이란 믿음의 선한 싸음에서 남자답고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말합니다교회 안에서도 성도가 많이 있지만 교회를 위해서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성도는그리 많지 않습니다.교회에서 알곡으로 남기를 원하면 진정
한 용기를 발휘하여충성된 일군이 다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3. 무엇보다도 매일 죽음과 심판에 대한 의식과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신
32:39)
(신 32: 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
다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하나니 내 손에
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굳건히 믿는자는 죽음에 관하여 초월할수 있으며 죽
음에 대해초월할수 있는 자는 세상이 그를 이기지 못할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성경 본문: 마 13:3-9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 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복음을 말씀하실 때 그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또는 비유
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인데 아주 일상적이고 평
범한 자연현상을 비유로 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본질적인 힘이나 신비에
직면할 때 그것에서 가장 쉽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춥고 지루한 겨울이 지나면 잔설이 채 녹기도 전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서둘러 들로 나아가 굳은 땅을 파 엎고 돌을 가려내고 흙을 부드럽게 고른
다음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바라는 벅찬 마음으로 씨를 뿌립니다.
추수할 때 까지 뜨거운 태양아래 비지땀을 흘리며 부지런한 농부의 수고로
운 비배관리와 구충작업등 여러가지 일들이 꾸준히 계속되어야 하지만 인간
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기후가 농사에 미치는 영향은 자못 막대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농부가 한 해 농사를 잘 지어 풍성한 수확을 거두려면 좋은
씨, 좋은 밭, 좋은 일꾼, 좋은 기후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농부가 자기가 원하는 농사를 위하여 우선 필요한 일은 종자, 즉 씨의 선
택입니다. 좋은 씨를 심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채종이 반농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해 농사로 한 해 겨울을
넘기기 어려웠던 궁핍한 시절에도 씨앗만은 생명처럼 소중히 보관하였습니
다. 그러나 천국복음을 씨로 비유하고 있는 이 말씀에서는 뿌린 씨를 배양
할 밭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에는 네가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씨를 수용할
수 조차 없는 딱딱한 마음, 수용은 해도 뿌리 내리기 어려운 경박한 마음,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열매를 맺을 만큼 순수하지 못한 마음, 이와같은 마
음밭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원하는 사람은 복음이 떨어져서 아무런 장애없이 충실하게 자랄 수 있는 토
양의 마음밭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1. 굳은 마음을 파 엎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나 고정관념, 또는 편견이나 아집으로 굳게 닫혀있는
마음을 활짝 열고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을 절대화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
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란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세계의 50억인 가운데 한 사람의 생각일 뿐이며 자기 하는 일이 아무리 옳
아도 상대적일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과 자기를 중
심으로 사는 생활의 차이입니다. 하나님밖에 절대자가 없고 하나님의 일
이외의 절대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2. 말씀의 성장을 방해하는 돌같은 죄와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죄와 악이 존재하는 한 천국은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
다.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
를 위하여 추수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렘5:24-25)
이사야 59:1절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의 해결없이 천국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
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
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3. 결실을 방해하는 가시덤불과 잡초와 같은 세속주의와 욕심을 척결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
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고 로마서 12:6절에는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
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노아시대와 방불한 물질주의, 세속주의, 향락주의에 있습
니다. 인간의 내면세계, 영적세계의 황폐와 도덕성의 몰락으로 상호 불신과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인신매매와 폭력, 살생등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4. 하나님 나라는 옥토에서 배양되는 신령한 나라입니다.
먼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죄와 허물을 진심으로 회개하여 사죄
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이 옥토에 떨어진 씨처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
도록 정성껏 가꾸어 질 때 천국은 우리들 안에서 확장될 것입니다.
지금은 온 민족이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또 다
시 사는 획기적인 변혁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순결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이
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역사하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겨자씨의 성장
성경 본문: 마 13:31-32, 막 4:30-32, 눅 13:18-19
(마 13: 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막 4: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막 4: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막 4: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눅 13: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눅 13: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
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잠시 생각하셨습니다.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막 4:30),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눅 13:18) 하셨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무엇으로 비유하는 것이 좋을것인가를 생각하신 것입
니다. 천국에 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습니다. 또 사람
들은 사실 천국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서야 알 일들을 말
씀하시는 것과 같으셨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이 있습니
다. 사실 다 모를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엄마 나 어떻게 나았어?", "엄마 나
어디로 나았어" 라는 질문은 부모를 당혹케 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
을 다 동원합니다.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배꼽으로 나았어" 등 말하지만 사
실 어린아이가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도 천국에 관한 문제
를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는 이와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면서 우리가 가게 될 천국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
를 넓히시기를 바랍니다.
1. 자기밭에 심은 겨자씨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자기밭에 심은 겨자씨라고 말합니다. 자기밭은 무엇입니
까? 제가 한국컴퓨터선교회에 전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간혹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목사님은 목회 않하십니까?" "저 목회합니다. 컴퓨터선교가
제 목회입니다." 간혹 우리는 특수한 부분에 있는 사역자는 인정하지 않으
려고 하는 풍토가 있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좀 밭이 특수할 뿐입
니다. 제 밭은 "컴퓨터선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의 밭은 어디입니까? 가정을
돌보는 어머님은 그 곳이 자기 밭입니다.
지하철 파업때 서울지하철 본부에서 약간 복귀자 명단을 늘렸다고 하더군
요 그래서 언론에서 매일 몇명이 복귀했다고 방송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심
리가 나는 복귀하지 않았는데 누가 했지 하고 생각하니 혼자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또 다음날 까지 복귀신청을 연장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은 불안하기 짝이없었습니다. 바로 우리가정을 먹여 살리는 밭
인 직장을 잃지는 않나 해서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가족들은 서류로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서류는 필
요없고 실물이 필요하니까 본인이 직접 복귀해야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
다. 결국 자기의 밭 우리 가정을 먹여 살리는 밭을 잃지 않으려고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밭을 더 잘 만들어 보자는 의도에서 였습니다. 그 다
음날 정상 근무하며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쳐 죄송하는 고개숙여 인사하는
역무원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밭을 더 잘 만들어 가기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먼저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자기 밭이 다 따로 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해도 내가 남편것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을 위
해서 기도해 줄 수는 있지만 남편의 죄를 내가 대신해서 회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이
것이 바로 자기의 밭인 것입니다.
천국을 위한 나의 밭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2. 제일 작은 씨입니다.
이제 자기 밭에 제일 작은 씨를 뿌려봅시다. 마가는 겨자씨를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막 4:31) 라고 말합니다. 겨자씨 자체가 작은
씨 입니다. 그런데 추가로 더 작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일 작은것을 말함은 분명합니다. 이 작은 씨앗이 무엇입니까?
기드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집과 자신은 제일 작은자라고 말했습니
다.
(삿 6: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
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스가랴는 예수님이 타시게 될 나귀에 대해 작은 나귀새끼라고 예언했습니
다
(슥 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바울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자 보다 더 작은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엡 3: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예수님은 작은일에 충성한것을 칭찬하십니다.
(마 25: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
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지극히 작은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마 25: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작은 생선 두어마리로 축복하셨습니다.
(마 15: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성경책도 작은책입니다.
(계 10: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
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
거늘
제일 작은 아릅다운 것이었습니다. 낮아지고 겸손하고 교만하지 아니한
작은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축복하실 만한 것이었습니다. 큰것을 가지고는
축복하지 않습니다. 축복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께 축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들 중에 제일작은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시작은 모두 작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작은 씨앗을 뿌려봅시다.
오늘 전도하는 것 작은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오늘 남을 용서하고 사랑을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앞에서 제일 작은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자가 있는 곳에는 주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3. 공중의 새들이 깃들입니다.
작은 씨앗은 성장하였습니다.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린 작은
씨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할 제목은 바로 우리가 뿌린
작은씨가 살아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남북 통일을 위하여 정말 많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의 작은 기도였습
니다. 그러나 이제 내 작은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기를 기도하십시다.
그 응답이 남북 정상회담을 열개 되었다면 어떤 연유에서 김일성주석이 만
나자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 기회가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마
련되도록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구약 성경에서 사용한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겔 17: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
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
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겔 31: 6)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
래 거하였었느니라
(단 4: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
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오늘의 한국교회에 많은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진실로 많은 사람들이 모
여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교회에서 편안함과 안식을 깃들이게 하고 있
나를 또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 끼리의 잔치가 아닌가 되돌아 보아
야 합니다. 성장의 이유는 분명합니다. 각양 많은 새를 깃들이게 한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폭군같은 큰 새가 있어서 다른 새를 괴롭히고 편안
히 있게하지 않는다면 나무는 아무리 성장했어도 많은 새는 오지 않을 것입
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새가 날아 올 수 있는 교회를 만듭시다.
또한 우리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
많은 새가 깃들일 만큼 우리나무(기독교)가 성장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아시아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복음의 볼
모지나 다름없이 있습니다. 우물안 개구리 처럼 우리가 볼 수 있는 나무 몇
그루에 얼마의 새가 모여든다고 해서 오늘 성경의 본문말씀처럼 새가 깃들
일 정도로 모든것이 성장하고 끝났다고 생각하면 않됩니다.
(마 24: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예수님은 작은 생명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 씨앗이 진실로 다 성장하게
되는 날은 바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고 있습니까?
이제 세계선교를 위하여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계획
하고 실행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료>
본래 이 비유는 마가복음과 Q자료에 다 들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유의 주요 특징들은 두 형태의 비유에 있어 비슷하다. 그러나 마
태와 누가는 마가와 달리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어 이것
이 Q자료의 특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새가 "가지들"에 둥우리를 친다는 언급(마가에서는 그늘이 강조됨)
2) 겨자씨 식물을 "나무"라고 말하고 있는 점
3) 겨자씨 비유가 누룩 비유와 연결되어 있는 점
마태복음에서의 "대조"와 "성장"이 강조되는 점
"밭에 심어지고"(성장)
"모든 씨 보다 작은 것"(대조)
"자라면"(성장)
"나물보다 커서"(대조)
"나무가 된다"(성장과 대조)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본래 비유에 반영되어 있는 "성장"과 "대조"의
요소를 각기 자기 상황에 따라 비유의 요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는 대조를
누가는 성장을
마태는 대조와 성장을 둘 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4대 교훈
성경 본문: 마 14:13-21, 막 6:30-44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전도하신지 2년 4월쯤에 벧새다 광야에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써 여인과 아이를 제외하고, 5천명을 먹이신 큰
이적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군중이 예수님의 설교에 감동되어 각각 가지
고 있던 식물을 제공하여 대중과 같이 먹은 것이다하고, 어떤이는 광
주리가 있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기의 규례에 의거하여 음식을 광
주리에 가지고 온 것이라 하여 이를 표호적 비유라 했다.
그러나 이는 적지 않은 오해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이 4복음에서다 기
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사가 여상 여실히 당시의 사실을 그대
로 설명하여 털끝 만큼도 의심을 용납할 여지가 없도록 그것이 이적임
을 증거하였다.
1. 자비,
마태복음 14장 14절에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거
나 먹여 주시는 것은 불쌍히 여기시는 그의 자비로써 행하시는 것이
다.
예수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함도 이 까닭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강림
하신 것도 자비요, 수고하신 것도 자비요, 이적을 행하심도 자비이다.
길거리에서 주리고 여위고, 힘없는 군중을 많이 보는 우리는 당시 예
수를 따라 다니던 유대군중의 가련한 상태를 잘 짐작할 수 있다. 예수
께서 마른 나무가지와도 같고 목자없는 양과도 같은 무리들 위에 자비
의 팔을 펴신 것이 곧 이적이다.
예수의 자비를 입고,예수의 증인된 우리 신자도 자비심을 발하여 ,
선을 행할 것도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들고 오늘 한국의 거리에 나서려
는 사람은 더욱 예수의 자비심을 본받아 동포를 대하여 할 것이다.
2. 순종,
서산에 해가 기울어 광야에 석양빛이 자못 히미할 때에 돌아갈 바를
모르는 주린 대중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모습과 심회를 지
금 우리가 생각하여도 눈물이 흐르려 한다.
마태복음 14:16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너희가 먹을
주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오늘날 기성교회의 신자된 우리는 모름지기 각성할 일
이 있다.이스라엘이 세계에 대한 책임이 무엇이어던가? 기성교회가 세
상에 대한 책임이 무엇인가? 오늘날 기성교회가 저 무리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일 것이 있는가? 오늘날 기성교회가 저 무리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을 것이 있는가? 빈약한 형제에게 시여할 것이 있는가?
예수께서 지금도 한국교회를 향하여 석양에 광야에서 돌아갈 바를 모
르는 민중과도 같은 한국사람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지
않는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못함도 문제이지만 그보다도 영의 양식을 줄
것이 없다면 이것을 장차 어찌하랴!
먹일 것이 없는 제자들은 오병이어를 예수에게 바치고 예수의 명하시
는대로 순종하였다. 그리하여 5천인 대중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리도 소유한 바를 예수에게 바치고 순종하면, 무리에게 먹일 것이
있을 것이다.
3.검약
마태복음 14:20에 "배불리 먹고 부스러기를 주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찼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폐물 이용하시는 검약의 생
애를 배울 수 있다. 부스러기 같은 폐물의 인물도 귀히 쓰시는 예수
님은 만물의 주인이시지만, 부스러기 물건 또한 천하게 버리지 아니셨
다.
폐물이용은 근대 경제학상 중요한 부분을 점령하였다.
부스러기를 모은 것 중에도 교역자는 부스러기 시간을 잘 이용하여야
한다. 시간이 없어 독서를 못한다는 말은 흔히 듣는 말이다. 서적 중
에는 학자들의 부스러기 시간의 산물이 많은 것이다.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에드먼드(EDMAN,CHARLES R)박사는 교수하고 목
축을 하면서도 매년 신약 주석 한권씩을 저술한다. 이것이 부스러기
시간의 산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50년 생활에서 매일 2시간의 부스르기 시간만 모은다면
36.500시간의 근면을 쌓는 다면 위대한 성공을 할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부스러기를 모으는 공부를 한자는 부스러기 인물로서
귀중한 인물을 이루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다.
4. 질서와 조직
마가복음 6:39와 40을 보면 "무리들을 100명씩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라"하시었다.여기서 우리는 질서와 조직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대중으로 하여금 질서 정연한 분대의 조직을 하게 하지 않으셨
더라면 혼잡한 속에 식량 분배는 심히 곤란하여, 시간과 노력만 허비
하고, 얻어먹지 못한 자도 있었을 것이다.
질서와 조직은 우주 만물의 법칙이니, 인사 역시 질서와 조직을 요구
하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 한국 큰 교회의 목사 중에는 설교를 흔히 다른 목사에
게 의로하는 일이 없지아니하다. 그 이유는 교무가 번다한 까닭이라고
한다. 아무리 큰 교회의 시무라도 질서와 조직이 있을 것이면, 사반공
배할 것이 아닌가?하여튼 사무에 바빠서 목사가 설교를 못한다면 이에
게 더 큰 불행이 없다.
예수에게 이 질서와 조직을 배우는 목자는 반드시 무리하게 먹을 것
을 줄만한 설교 준비 시간이 있을 것이다.
5. 결말
어린아이의 오병이도 예수께 바쳐, 예수의 손을 경유 할 때 큰 무리
를 먹였으니 우리의 적은 소유와 바치고 주님의 손을 경유하면 주님의
큰 일을 성취할 것이다.
바람 앞에 선 인생길
성경 본문: 마 14:22-33
세례요한이 순교한 이후에 예수니의 복음사역은 본격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게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시고 오천명의 남
자를 먹이고도 열두광주리를 남긴 사건 이후의 내요입니다. 오처녕의 많은
무리를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제자들에게 먼저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가던 그들이 한밤중에 큰 시련의
풍랑을 만나게 되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본
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두가지 삶의 요소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예수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
문 22절에 보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예수께서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녀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제자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남보다 앞서 건너가야 할 사명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세상에 편안한 삶의 만족에 안주하며 살아가고자 합니
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먼저 신앙에 앞서
갈 뿐 아니라 생활의 모든 면에서도 앞장서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역경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4절에 보
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몹시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
하여 고난을당하더라"고 했습니다.오늘날 이 시대 속에서 예수 믿고, 복음
안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바람 앞에 선 인생입니다. 다시 말해 이
시대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이 시대적인 유혹과 바람에 역행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
니"고 했습니다. 시련을 만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아주적절한 시간에 적
절한 방법으로 찾아오셨던 것입니다.그런데 제자들은 가장 어두운 암흑의
시기에, 가장 바람에 시달리는 고통 속에 있을 때에, 바다를 걸어서 이적의
방법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했습니다.
거기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확실치 않은 믿음으로 검푸른 바다에 뛰어
들어 예수님께로 가다가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바다에 빠져 절망
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오늘 말씀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만용은 실패를 가져온다.
본문 28-30절을 보면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이라
고 생각한 베드로가 믿음과 확신이 없이 "주여 만일 주시오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며 바다 위로 뛰어 들었습니다. 이는 확실치 않은
신앙으로 검푸른 바다에 뛰어들었던 베드로의 만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만용은 숙고함이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오늘날 현실의 바다에도 확실한 신앙이 없이 베드로와 같이 뛰어드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확실한 신앙아과 확실한 신뢰와 믿음이 업이 그저 성급한
마음으로 , 남보다 앞서가려는 생각만으로 현실의 바다에 뛰어 듭니다. 그
러나 물에 빠진 베드로를 보십시오. 결국 확신없는 만용의 신앙은 실패를
가져옵니다.
이와 같은 비유로 만용을 피운 개구리의 최후를 풍자한 이야기가 있습니
다. 욕심많은 개구리가 하루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자기도 저 기러기처럼 하
늘을 높이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기러기에게 어떻게 하면
공중을 날아 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그러나 기러기는 긴막대기 하나를
부리에다 물고 그 끝을 개구리에게 물렸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
습니다. 하늘을 나르자 개구리는 너무나 좋았고 그 모습을 본 다른 개구리
들은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물었습
니다. 만용에 찬 개구리는 "내가 생각했지"라고 말하다 그만 떨어져 죽었습
니다.
개구리의 만용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이 만용은 실패를 가져옵니
다. 또한 만용적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용기도 좋지만 그 용기가
진정한 신앙에 바탕을 둔 용기가 아닐 때 결국은 불행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베드로도 분명 뜨거운 열망은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
장에 보면, 베드로는 '주님' 이라는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향해서 겉옷을
두르고 그 어느 제자들보다 먼저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
은 신앙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확
실한 신앙이 없는 만용의 행동이었습니다.
확신한 신앙이 없는 만용의 사람은 시각이 항상 옳지 않은 것을 볼 수 있
습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이 신앙인데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가, 바람을 보다가 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주님을 보다가 현실을 보다
가 하는 이중적인 시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신앙, 오직 주만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은 시련 중에 함께 하신다.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은 만용을 부리며 사는 우리들이지만 실패와 시련에
빠질 때에 주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30,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말씀하
십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바로 옆에 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확실
치 않은신앙으로 물에 뛰어들고, 물 속에 빠져 허덕이는 절박한 시련 가운
데서도 베드로 가까이에서 그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건져주셨
습니다.
20세기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는 성경말씀의 가장 핵심 메시지를 그
어떤 말씀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
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린 아이가 9개월을 다 채우지 못하고 7개월, 8개월 만에 태어날 때는 인
큐베이터라는 유리관 안에 넣고, 세균에 감염되지 않게 알맞은 온도와 공
기, 습도를 맞추어 영양분을 공급하며, 아기를 양육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불완전한 우리들을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이라는 인큐
베이터 안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시련에 빠질 때 즉각 건져주시고, 우리가
넘어질 때 일으켜주십니다. 시련 앞에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항상 우리
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일본 책 중에 '침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침묵'은 일본에 복음전파
될 때 있었던 역사적 비극을 소개한 것입니다.일본 사람들이 처음에 예수믿
을 때 일본정부에 의해 예수믿으면 죽음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정부에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하면 바다에 썰
물이 빠져 나가고 나면 그 해변가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거기다가 사람들을
묶어놓았습니다. 다음날 밀물이 밀려들어올때 물이 가슴에 오고, 목 위에
오고, 숨을 못쉬게 하여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풀어줘도 예수 믿겠다고 하면 점점 물에 빠져 죽게하는 십자가의 형틀이었
습니다.
그때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폴튜캅 신부가 가슴을 치면서 하나
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저 그리스도인들을 살려주십시
오.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까?"라고 소리지를 때 하나님께서 "폴튜캅
신부야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다. 나는 저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
고 있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상하고, 답답하고, 문제가 복잡하고 어려움에 직면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이아니라 우리가 맛보는 그 고통에 함께 참여
하시며, 그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 고통을 함께 이겨가고 계십니다.
3.시련은 신앙의 성장을 가져온다.
여기서 중요산 사실은 이렇게 맛본 시련은 우리의 신앙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요한 칼빈은 말하기를 고통이 없이 형통하기만 하고, 근심과 걱정거리가
없으면 믿음은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어려운 시련 속에서 더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제자들은 신앙의모습이 변했습니다. 먼저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절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경배하는 신앙
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시련을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경배의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편안한 사람들은 교회에 잘 안나옵니다. 신앙생활을 게을리 합니
다. 그러나 시련을 통하여, 역경을 통하여 믿음이 성장한 사람은 경베하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또한 말
씀을 사모합니다. 경배하는 신앙, 예배하는신앙, 성경중심의 신앙,이것은
바로 시련이 가져다주는 선물인 것입니다.
또한 시련을 통해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
는 고백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
들이라는 신앙의 신성적 고백이 바로 시련을 통해 생긴 것입니다. 이와같이
시련은 우리에게 있어서 금같은 믿음을 주는 축복입니다.
만용은 시련을 가져오지만 시련 중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그리
고 그 시련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합니다.
적은 믿음과 큰 시련
성경 본문: 마 14:22-33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두 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재앙은 티끌
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
해서 태어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전자에 말은 고난을 승리한 욥의
말이고 후자는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전제하는 바가 고난은 결단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필연의 산물임을 강조합니
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인간이 고난을 당하는 원인과 고난을 이기는
승리의 비결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 말슴은 이 고난의 원인을
네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 고난을 당하는 원인 =
첫번째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22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
기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라고 말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결단코 제자들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주님 곁에서 이적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명하시
므로 순종하며 가다가 풍랑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 살
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할 때에 도리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에는병도 고치보려 하고 축복도 받아보려고 예수를 믿었는
데 이 예수를 믿은 다음에 우리 생활에 고난이 찾아옵니다. 이 고난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찾아오는 고난인 것입니다.
두번째로 시대에 역행할 때 찾아오게 됩니다.
본문 24절의 말씀을 보게되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라는 말은 바로 제자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서 항해했더
라면 바람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들이 거슬리는 바람을 뚫
고서라도 목적지에 달성하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에 고난의 바람이 직면하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이 시대에 불어오는 시대적인 바람에 순응해서 바람
부는대로 살게 되면 절대로 고난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불의의
바람도 있고, 죄악의 바람도 있습니다. 또한 불법의 바람, 음란의 바람, 유
혹과 불신의 바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말로 죄악의 바람
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바람에 도전하여 내가 바로 살아보려하
고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세상을 승리해보려 할 때에 우리에게
시대적인 바람이 필연적으로 불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예수보다 앞서 나아가려 할 때 찾아오게 됩니다.
예수께서 본문 22절에서 "이제 너희는 내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
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난후 예수께
서는 제자들을 두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단코 제자들이 예수보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란 말씀은 아니
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범한 세상 사
람들로부터 앞서서 신앙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말슴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를 따라 가기보다 먼저 풍랑의
시련의 바다를 건너감으로 인해 큰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보다 앞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시련이 반드시 오
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보다 내 생각을 앞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시련이 반드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고, 예수보
다 내 생활과 내 삶을 앞세울 때에 환난과 시련은 필연적으로 오게 됩니다.
네번째로 기도하지 않고 인생을 출발할 때 찾아오게 됩니다.
본문 23절의 말슴을 보면 "무리들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
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제거하는 능력을 소유한 전능의 주
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의 주님, 은혜의 주님,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는 주님이 다른 데 가지 아니하고 또 기도하려고 산으로 올
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기도는 신앙의 생명이며 기도는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본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가 신앙의 본질이
기 때문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문제를 기도로 시작하
고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시
는 에수님의 제자들은 기도없이 인생을 출발했기에 문제에 봉착하여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신앙의 생명, 신앙의 비밀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고
난의 자리에 반드시 예수께서 찾아와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
수님은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일지라도 환난을 당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두
지 아니하시고 한밤중에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예수님을 몰라보고 유령이라고 하며
놀라 두려워 떨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
하십니다. 여기서 이 "내니"라는 말은 헬라원문의 '에이미'라고 하는 말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께서 이 풍랑의 갈릴리 바다
에 찾아와서 제자들에게 강한 역사를 보여주시기를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
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상태였으며 이때 베드로가 "주
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게 되었습니
다.
또한 예수님의 "오라"는 대답에 베드로가 그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과 자
신 사이에 풍랑의 바다를 뚫고 예수께로 달려갑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
을 통해 그의 신앙적 특성을 보게 됩니다.
= 고난을 이기는 비결 =
베드로의 신앙은 신뢰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만일 주시어든" 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의심하는 말이 아니고 헬라
원문에 '과연 주님이십니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것은 에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
는 신뢰의 신앙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이
시며 능력의 구주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의 신앙은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올라 하소서" 라고 주님을 향해
기도하였고 "오라{" 고 하는 말씀에 그는 순종하여 자기의 몸을 바다에 던
졌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
니다. 예수님을 능력의 구주로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기도하며 자
신을 바다에 던지는 이런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신앙을 가
지고 갈릴리 바다를 걸어갔지만 그는 중도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믿음이 '적은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빠
져들어가는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즉각적으로 그를
일으키시며 베드로의 믿음을 '적은 믿음'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에 도전하여 나갈 때에 내 믿음이 크냐 적으냐, 내 믿음이 참 믿음이
냐 거짓 믿음이냐, 이것이 우리의 생명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요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큰 시련을 이겨낼 수 없음에
도 불구하고, 제자 베드로는 적은 믿음을 가지고 현실의 큰 시련을 극복하
려고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적은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돌밭에 뿌려진 믿음입니다. 돌밭에 뿌리웠
다고 하는 말은 말씀을 듣고 즉시는 기쁨으로 받으나 환난과 핍박이 올 때
느니 곧 넘어지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큰 믿음 작은 믿음의 차이 뿐이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문제는 내 믿음이 과연 큰 믿음이냐 하는
사실입니다.
적은 믿음을 가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려다 실패한 베드로처럼 우리들
도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큰 시련의 현실을 도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의문점과 문제점이 무엇이냐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
라 그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도전할때 자신의 믿음이 분량을 알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큰 믿음을 가졌다면 현실의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이길 것이지만
여러분의 믿음이 크지 못할 때는 여러분은 현실의 환난에 깨어지고 넘어지
고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은 믿음을 가지고 고난의 바다를 건너가려던 베드로는 물에 빠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적은 믿음을 가지고 현실에 도전하다가 그는 여러가지
문제 봉착할 것입니다.
오늘날 큰 믿음을 갖지 못하면 이 현실의 바다에서 여러가지 문제점에 봉
착하게 됩니다.
그 첫째는 놀라기를 잘하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나타난 말씀을 보게 되
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면서 무서워하고 놀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
늘날 믿음이 적으면 작은 일에도 항상 놀라고 두려워 합니다.
두번째는 허깨비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님의 찾아오셨는데
도 생명의 주님을 향해서 유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
앙이 적기 때문에 허깨비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와같은 문제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 세상의 환난이 문제가 아니라 이
환난을 대처하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문제입니다.
큰 믿음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큰 환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예수님과
함께 움직일 때 큰 믿음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나타난 말씀을 보면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
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가정을 이루고, 예수님과 함께 사업을 하고 예수님과
함께 결혼하고,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 속에 큰
믿음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 속에서도, 불의하고 불법스런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
께 살아가는 생활을 할 때 여러분의 믿음에 놀라운 부흥이 있고 승리와 성
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오늘 이 세상에
서 갈릴리 바다와 같은 세상의 풍랑이 불어오며 역경의 비비람이 집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사랑을 통하여 풍랑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강하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크게 해주옵소서. 놀라운 성령의 은혜와 사랑
으로 이제 큰 믿음을 소유하여 예수와 함께하는 승리의 삶을 살도록 역사해
주옵소서.
내 믿음을 크게 하는 길은 예수와 함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위대한 실패, 위대한 성공
성경 본문: 마 14:26-33
인간은 저마다 다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꿈의 성취를 위해서 우리는
자나 깨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지 가운데 가장 강한
의지는 성공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 마음속에 자기의 인생을 성공
과 실패로 가늠하는 그러한 평가 기준에 대해서 분명한 의식을 갖지 못하면
자칫 인생을 불행하게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
문에 끝없는 열등감, 좌절, 실망으로 말미암아 인생 전체에 불행을 가져오
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성공과 실패로 말하지만 그리스동니들에게는 실패도 성공도 없습니
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경륜속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실패도 하나님의 뜻이
요 성공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공했다고 해서 행복하거나 실패했다고 해
서 불행한 이유가 없는데 우리는 거기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배우역을
맡아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각본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
에 대해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잘하고 있다면 그것이 성공입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보면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베드로라는 개인적
인 독특한 성격상, 그의 생애는 더욱 다양하게 전개됩니다. 그는 어떤 모양
으로든지 예수님을 나타내는 제자로서 위대한 생애를 실현했습니다. 그는
넘어져도 위대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실패도
성공도 위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하나
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실패와 성공은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하
는 일은 성공이요, 말씀없이 하는 일은 실패입니다. 말씀은 곧 우리의 생명
입니다. 하나님 말씀없이 정신력이나 자기 자신의 의지에 근거하는 것을 신
념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신념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
스도인은 자기 신념을 포기하여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말슴을 믿는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생활이 분명한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면
실패도 성공도 위대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실패와 성공 모두에 주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
리는 이시간 주님의 손을 잡고 있느냐,인간의 손을 잡고 있느냐,아니면 마
귀의 손을 잡고 있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누구의 손을 잡
고 왔느냐와 그 과정이 신앙적인가를 살펴야 합니다.지금 우리는 주의 손을
붙잡고 의지하고 있는지요?
셋째, 그리스도인은 실패와 성공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곧 주님의 일이 됩니
다. 넘어져도 주님을 증거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합니다. 인도의 선
교사였던 윌리암 케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계획하라.그리고 하
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우리를 향해 걸어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요청해야하
겠습니다. 주님 찾아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