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거나 동기가 되는 것 중 가장 강력한 건 아마 사랑일 겁니다. 예술가들에게는 자신들의 뮤즈가
있었고, 무수히 많은 걸작들이 열정적인 사랑으로 태어났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사랑으로 태어난 게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죽하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애인을 죽여서라도 사랑을 얻으려는 열망을 가졌을까요?
물론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는 아니지요. 다행히 베를리오즈는 그걸 음악으로 표현했고,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할 수 있었으니 베를리오즈의 열망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입니다.
베를리오즈는 의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17세에 의학을 공부하러 파리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학보다는 음악에 끌렸고, 글루크의 오페라에 큰 감동을 받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뒤늦게 파리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이때 베를리오즈를 사로잡은 두 영웅이 세익스피어와 베토벤이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음악공부를 시작하고, 음악뿐 아니라 세익스피어에 심취하게 된 베를리오즈는 이전과는 다른
‘새롭고 훌륭한 음악’‘이미 예술의 최고봉에 다다른 베토벤과도 다른 방향’의 음악을 꿈꾸게 됩니다. 문학과 음악이 함께 중심이 되는 오페라적 발상을 한 거지요. 따라서 베를리오즈의 관현악곡은 문학적인 스토리뿐 아니라 기존과는 다른 거대하고,
화려한 소리 층을 가진, 상상에서나 있을 법한 소리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어찌보면 베를리오즈의 음악적 감수성의 배경은 문학적인 것이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도 했으니까요. 또 늦게 공부를 시작해 음악적 전통을 잘 몰랐기에 다른 사람이라면 배운 것을 떠올렸을 순간에 스스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실제로도 로시니는 ‘이 청년이 음악을 몰라서 다행이다. 음악을 알았으면 더 심하게 망칠 뻔 했다.’고 독설을 날렸다는군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베를리오즈는 ‘사상 최초의 사이키델릭한 교향곡(번스타인)’이라는 혁명적인 교향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음악만의 논리가 아닌 광기와 복수, 살인 같은 드라마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며, 드라마적 논리로 구성되는 독특한 교향곡이
만들어지게 된 거지요.이런 베를리오즈의 독창성, 감정에 충실하고, 다양한 악기가 등장하며, 드라마적 구성을 갖춘 곡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당시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치고, 바그너 같은 독일 작곡가들에게도 영감을 주게 됩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1830년 작곡되고, 초연되었습니다. 이 곡은 한 여성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서 시작되었는데, 27살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은 세익스피어 연극에서 오필리어 역을 맡은 아일랜드 배우 해리엇 스미슨이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한눈에 반해 수없이 많은 러브레터를 보내며 구애를 했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였던
해리엇은 베를리오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 베를리오즈는 거의 미치광이가 되다시피 했지요.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귄다는 소문이 돌자 복수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작곡된 것이 <환상교향곡>이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환상교향곡>을 스스로 이렇게 소개합니다.
“병적인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젊은 음악가는 희망 없는 사랑의 고뇌를 이기지 못하고 아편 자살을 꾀한다. 그러나
복용량이 너무 적어 죽음에 이르지는 못하고 기괴한 환상을 본다. 거기서 사랑하는 여인은 끊임없이 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고정악상의 선율이 된다.”
상상 속에서나 그것도 애인을 죽이는 파격적인 사랑을 상상한 걸 보면 베를리오즈의 정열적인 사랑이 무섭기까지 합니다.
그야말로 ‘질풍노도’ 같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낭만주의의 끝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를리오즈가 말하는
‘고정악상(이데픽스)’은 ‘특정한 음정 관계로 이루어진 동기나 주제’를 말하는데, 주인공을 묘사하는 특정한 멜로디를 말합니다.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ost 중 ‘누구누구의 테마’ 같은 거지요. <환상교향곡> 전 악장에는 헤리엇이 등장할 때마다 이른바 ‘애인의 선율’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곡의 진행에 따라서 점점 구체화되면서, 주인공의 애인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고, 또 전 악장의 통일성을 가져다 주는 음악적 모티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상교향곡>은 5악장으로 구성되는데, 각각 표제와 내용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1악장 꿈과 정열은 애인에 대한 막연한 갈망과 애인과의 만남, 연애에 따른 고통과 그 뒤에 느끼는 종교적인 위안이라는 스토리에 따라 음악도 진행이 됩니다.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은 베를리오즈가 어렸을 때 겪은 첫사랑의 멜로디를 목관이 연주하면, 뒤이어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이 추억을
회상하는데, 중간중간에 끊어지는 소리는 아련한 분위기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갑자기 즐거워지는 음악은 감정의 기복이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그러다 마침내 연인을 만나고,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함께 ‘애인의 선율’을 시작합니다. 주인공의 떨리는 가슴은 비올라와 첼로의 둥둥거리는 소리로 깔리는데, 심장은 점점 빨리 뛰면서 소리도 점점 커져갑니다. 제1바이올린의 연주하는선율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제1바이올린도 둘로 나뉘어 마치 메아리처럼 울립니다. 격정적인 연애 뒤에는 차분해진,
마치 찬송가의 마지막 같은 소리로 1악장은 마무리됩니다.
2악장은 떠들썩한 무도회에서 여인을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하프가 아주 아름다운 소리로 무도회를 엽니다. 현악기는 빠른
트레몰로 주법으로 무도회의 부산함을 표현하지요. 아름다운 무도회 왈츠가 연주되고, 주인공은 그녀를 발견합니다. 2악장의 고정악상은 왈츠에 맞춰 3박자로 연주됩니다. 그 뒤 흥겨운 무도회 음악으로 마무리되지요. 3악장 전원의 정경은 오보에와 잉글리쉬 혼이 연주하는 두 목동의 피리소리로 시작합니다. 둘은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를 부르는데, 오보에 소리는 저 멀리서 들립니다. 이번 예당 회원 음악회에서도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중간에 오보에 주자가 들어와 어리둥절했습니다. 미리 강의를 들었더라면 고개를 끄떡였을 텐데요. 피리소리는 평온합니다. 그런데 점점 소리가 불안해지더니 급기야 ‘애인의 선율’이 들리고, 갑자기 음악은 숨가빠지기 시작합니다. 애인의 등장에 주인공의 ‘심장은 경련을 일으키고, 불길한 상상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평온한 풍경은 잉글리쉬 혼만 연주하는 피리소리만 들리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팀파니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고, 피리소리는 마치 목이 메인 듯 끊어졌다 이어졌다 합니다.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은 짧지만, 아주 강렬한 악장입니다. 주인공은 애인을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러 가는 꿈을 꿉니다. 우울하고 엄숙하지만, 대론 밟고 당당한 행진곡이 들립니다. 바순은 주인공을 비웃는 듯하고, 금관은 빨리 걸으라는 집행인의 재촉을 떠올리게 합니다. 팀파니와 심벌즈, 북과 금관, 현악기소리가 떠들썩하고, 불안한 기운을 내뿜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클라리넷의 ‘애인의 선율’은 채 몇 마디 들리고는 갑자기 뚝 끊어지면서 강렬한 북소리와 총주로 단두대의 칼이 떨어지면서 주인공의 목이 잘리고 맙니다. 베를리오즈는 단두대의 칼이 떨어지는 소리를 북을 쓰되, 가죽을 빨리 잡아당겨 떨림이 이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쓰기까지 했답니다. 그야말로 순신간에, 단칼에 목이 잘려나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지요.
이렇듯 베를리오즈는 악기들을 더 세밀하게 써서 다양하고, 생생한 소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팀파니로 시작하는 4악장 도입부에도 첫 음 악센트에는 채 두 개로 치고, 다섯음은 오른손 하나로 치라고 지시했다네요. 5악장 마녀의 축제에서도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3파트로 나누고, 비올라는 2파트로 나누어, 여러 소리 층을 겹겹이 연주하게 함으로써, 한밤중의 스산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더욱 실감나게 드러내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다른 관현악곡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연주법을 써서
연주자들을 어렵게 했지요. 트레몰로(한 음을 빠르게 반복하는 기법)나 피치카토(손으로 현을 튕기는 기법), 약음기를 끼고
연주하는 것은 ‘애교’ 정도라고나 할까요, 활대로 현을 치는 ‘콜 레뇨’ 주법으로, 해골들이 춤출 때 뼈가 부딪치는 소리를
표현하려고까지 했다니, 아마 상상한 모든 걸 소리로 만들어내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5악장은 죽은 뒤에 마녀의 축제에 간 주인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무시무시한 유령과 마술사, 괴물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상한 소리로 불길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온몸을 둘러쌉니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려는 듯한 북소리와
총주가 갑자기 멈추며, 보통 클라리넷보다 짧은 E플랫 클라리넷이 ‘애인의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전 악장에서 들리던 우아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라 기괴한 소리가 되어 들립니다. 이어지는 목관들의 소리도 천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장례식의 종소리와 ‘심판의 날’ 멜로디가 들려오고, 관악기의 헉헉거리는 듯한 소리와 현악의 짧게 끊어지는 괴상한 소리가
합쳐지면서 복잡하고 불길하며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아주 여리게 들리던 소리가 갑자기 강렬한 소리로 바뀌기도
합니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손놀림이 빨라지며 부산한 소리가 이어지고, 점점 더 빨라지며 무시무시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마침내 북과 팀파니가 마무리를 합니다.
베를리오즈의 극적인 사랑은 음악적으로는 기괴한 환상 속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음악과는 다르게
헤리엇과 맺어지게 되지요. 하지만 이미 정열적인 사랑은 식어버린 걸까요, 베를리오즈는 결국 아내와 별거를 하며, 다른 사랑을 찾게 됩니다.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난 뒤에도 베를리오즈는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고, 아마도 그게 음악을 이끌어주는 영감의 원천이었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