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역에 관한 시모음 9)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김명인
졸음기 그득 햇살로 쟁여졌으니
이곳도 언젠가 한 번쯤은 와 본 풍경 속이다
화단의 자미 늦여름 한낮을 꽃방석 그늘로 펼쳐 놓았네
작은 역사는 제 키 높이로 녹슨 기차 한 량 주저앉히고
허리 아래쪽만 꽉 깨물고 있다, 정오니까
나그네에겐 분별조차 고단하니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몇만 톤 졸음이나 그늘 안쪽에 부려 놓을까?
불멸불멸하면서 평생 떠도느라 빚졌으니
모로 고개 꺾은 저 승객도 이승이란 낯선 대합실
깨어나면 딱딱한 나무 의자쯤으로 여길 것인가
부강역 /문인수
경부선 야간 완행열차,
무궁화호가 서는 작은 역마다
몇몇 사람이 내리고
역세권의 어둠은 얼른 그들을 받는다.
객차를 꽉 메운 주말의 지친 표정들이 장시간
느리고 헐한 속도에 몸을 맡겼지만
목적지는 그러나
누구든 그 어디든 결코 변방이 아닐 것이다.
이 무슨 역인가, 당신인들 함부로 지나치겠는지…… 지금
저들의 중요 대목이다.
저 광경, 바로 여기에 와 인생 전부가 벌어져
한껏 기쁘다.
열두어살 딸아이와 함께 도착한
한 여자는
플랫폼까지 들어온, 커다랗게 웃는
남자의 마중을 받는다.
간이역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다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불꽃,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간이역 /박진표
잠시 쉬어가자
조금 늦어도
내 영혼
내 그림자 안고
아파도
온전한 나로 살자
가는 길
그 길이 꽃길 아니어도
나에게 당당할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겠지
내 삶의
그 어딘가에서
잊혀지지 않는
고운 향기로
누군가의 가슴에 남을 수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
바람도 우리의 삶도
가끔은 쉼이 필요한 것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작은 생명들의 노래 귀 기울이고
가끔은 쉬어가자
오고 가는 세월과 술 한잔 기울이며
동해남부선 /백무산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네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 옆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오래 전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가도 못할 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저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었던 아이
열일곱이랬고 고무공장에 일 다닌댔지
우산을 돌려주려 갔다 빵봉지를 들려주다
잡고 놓지 못했던 손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역에서 /윤꽃님
사람들이 오고 간다
나가고 들어오고, 들어오고 또 나간다
점과 점들이 선이 되고
선과 선들이 무한대로 꿈틀거린다
캐나다 민박집 앵카는
크로아티아 이민자인 정 많은 그 칠순 할머니는
내가 떠나오는 여름마다 눈물 글썽이며 말하곤 했지
“사람들은 왔다가 가는구나”
모국어와 외국어처럼 내 두뇌를 오가는
기차는 도착하고 출발하고, 출발하고 또 도착한다
눈물방울의 점을 아는 자만이
기차의 선을 이해할 수 있다
모국어의 뉘앙스를 잘 아는 자만이
외국어의 감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왕래발착 동사를 배우던 중학교 시절
어떤 애가 내게 왔다가 갔다
그 후로도 칠 년이던가, 팔 년이던가
빈번하게, 아니 지금도 빈도부사처럼
그 애가 한 말들이, 내가 못다 감지한 표현들이
늦게, 너무나도 뒤늦게 내게 왔다가 간다
복병처럼 곳곳에 숨어있다 나를 덮치는
과거완료의 끈질긴 기억들
기차역에 오면 더욱 문법적으로 대열을 가다듬고
지렁이처럼 꿈틀대곤 한다
많은 사람들, 사물들, 그만큼 많은 말들과 이미지들
그러나 어순도 없이 뒤죽박죽 왔다가 간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발차시간과 도착시간을 알리는 전광판 아래서
상행선과 하행선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분류하는
저 명멸하는 불빛을 보며
지금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의 무게로 무거워진 기차가 도착했다
그대가 도착했다, 고 그것은 내게 설명한다
그 설명을 듣자마자 내 온 몸과 마음
곳곳에 암기되어 있던 종합 기억이
일제히 한 시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아이고, 아이고” 우셨던가
앵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존과 밀은 뭐라고 하며 울까?
그대가 돌아오면 나는 뭐라고 하며 울까?
돌아, 오니까 웃을까?
한 순간 애틋하게 눈물 글썽이며
손을 흔들었던 그대가 다시 온다
점이 되어 선이 되어
꿈틀대는 무한대의 사랑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그때 포착한 이미지를
중학교 때 외웠던 영어단어처럼 정확히 기억한다
환영과 작별이 오고가는 역 대합실
나의 눈이 그대를 찾아 전광판처럼 빛난다
새벽에 잠 못이루던 그리움이 함께 반짝인다
그리움은 눈물
흐르지 못하고 눈에 고이는 눈물이다
잠시 눈물 비치는 순간의 움직임이다
만남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그대가 내게로 걸어온다
새로운 내가 그대에게로 걸어간다
우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대 내게 온전히 오고 있는가
나 그대에게 온전히 가고 있는가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뒤늦지 않게?
나는 길게 묻고 또 묻는다
기차가 인생을 비유하는 흔한 이미지인 것처럼
점과 선은 시점을 설명하는 쉬운 이미지였다
미래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밤기차1 /민경대
밤기차를 타본 사람은 출렁이는 세상을 안다
밤기차를 타보는 사람은 흔들린 세상에
흔들린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시간의 단추를 잡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밤 늦은 시간에 기차를 타본 사람은
시간이 데려다준 시간의 틈 속에 꽃이피고 지는
순간을 촬영하는 영사기를 돌리는 그림자를 안다
정동진역 /김영남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 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도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새벽 밀양역 /전성호
공중에서 차단기가 내려온다
수많은 점등 속에서 열차는
양 다리가 후들거리는 부산 남자를
승강장에 버려둔다
늑골이 빠진 벤치는
팔을 뻗어 남은 자의 어깨를 안아준다
캄캄한 손목 시침도
철로 옆 꽃길도 문을 닫는다
빈 가슴에 갑자기 우렛소리 몸 안 전체를
울리고 가는 이명
적막한 공간 한가운데 머문 채,
안경을 닦으며 첫 새벽을 맞는다
다시 먹구름 속을 달려온 화물열차
하얀 종아리를 싣고 남쪽으로 사라진다
검차망치를 든 그림자 하나 차량 뒤로
새벽 레일의 어둠을 두드리며 혼자 걸어간다
꿈, 간이역에서 /김은숙
저녁 간이역 안개 속으로 흘러들었다. 비어 있는 역사엔 그와 음악과 정지된 시간만 있었는데, 휘감기는 것이 음악이었는지 시간이었는지 파고드는 선율에 그도 넉넉히 풀어져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손을 잡은 것도 같은데, 함께 흘러가자는 뜻이었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올 수 없는 시간을 어쩌면 기다렸던 것일까, 역사 벽면의 낙서만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새겨놓은 흔적은 지금도 엉거주춤 있을까, 그가 웃었던가, 흘깃 바라본 것도 같은데 웅크려 있는 어둠 옆으로 슬그머니 붉은 얼굴의 음악이 앉았다 일어서자 잠시 뜨거운 눈빛이 흐른 것도 같은데, 무엇에 취했던 것일까, 여기저기 흩어지는 붉은 마음 급히 주워 담다가 스멀스멀 짙어지는 안개에 기대 몸을 숨긴 것도 같은데, 어디로 흘러가고 싶었던 걸까, 어느 곳으로 흘러갈 뻔한 걸까, 다만 저녁 짙은 안개에 묻혀 버린, 그 간이역의 시간
호남선湖南線 /김준태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 팥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남아 벗겨진다
기차는 가는데 빈 지게꾼만 어슬렁거리고
기차는 가는데 잘 배운 놈들은 떠나가는데
못 배운 누이들만 남아 샘물을 긷는데
기차는 가고 아아 기차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생솔가지 저녁연기만 허물어진 굴뚝을 뚫고 오르고
술에 취한 홀애비만 육이오의 과부를 어루만지고
농약을 마시고 죽은 머슴이 홀로 죽는다
인정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