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75
8월7일[연중 제1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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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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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JvWkde2joM
(신기훈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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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세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는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엄청난 수효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고 이집트 탈출이라는 막중한 소명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가 느꼈던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엄청났습니다.
출애굽의 스타트는 장엄하고 대단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과 가축들이 무리를 지어 질서 정연하게 행렬했습니다. 집요한 파라오의 훼방을 보란 듯이 물리쳤습니다. 백성들은 영도자 모세의 탁월한 지도력에 박수를 치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본격적인 광야 여정이 시작되면서, 그리고 그 여정이 일 년 이 년도 아니고 기약도 없이 길어지면서, 여기저기서 다양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공동체들이 겪는 우여곡절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이 체험한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주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때맞춰 보내주시고, 다양한 모습으로 섭리하시고 동반해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광야 여정의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터트렸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던 모세 입장이 참으로 난감해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당연히 이런저런 불편함이 생길 터이고, 백성들이 그 정도 고통은 감내해줄 줄 알았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 백성들 앞에 모세는 신물이 났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을 민족의 지도자로 불러주신 하느님에게도 원망의 마음이 들어 이렇게 외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모세가 온 몸으로 느꼈던 지도자로서의 고통과 서글픔을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항상 대면하고, 하느님과 지속적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모세의 모습에서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파악하게 됩니다.
모세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애써 꾸민다거나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현재 상황과 느낌, 고통과 두려움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느님 면전에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 진솔한 모세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흐뭇하게 여기십니다. 그와 항상 소통하시고, 그의 인생 여정에 늘 동행하시고, 그의 고통스러운 목소리, 그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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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26iytbqm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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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싶은 마음이 기적을 만든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라고 하십니다. 주고 싶은 마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기적을 만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사랑이 아직은 부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진 것에 먼저 감사하며 모든 이의 배를 불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기적은 시작됩니다.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패치 아담스’(1998)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의사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패치 아담스는 본래 ‘헌터 아담스’였습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나 아버지까지 잃은 헌터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자살 기도를 합니다. 삶의 목적도 없고, 살아갈 자신감도 없습니다.
자살이 미수에 그치자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치료받습니다. 거기서 정신적 스승 아서를 만납니다. 모두 아서를 미친 사람이라 하지만 아서는 그들더러 미쳤다고 합니다. 아서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본질을 보라는 뜻입니다.
아서에게 깨달음을 얻은 헌터는 함께 지내는 루디를 다람쥐 공포에서 해방해줍니다. 루디는 환각으로 다람쥐를 보고 무서워서 화장실도 못 갑니다. 헌터는 자신도 다람쥐가 보이는 것처럼 작대기로 총을 만들어 루디가 보는 앞에서 다람쥐들을 소탕합니다.
루디는 헌터의 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총탄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다람쥐들이 죽은 것을 보고는 매우 흡족해합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헌터 아담스는 이제 패치 아담스라는 별명을 가집니다. 패치(Patch)는 ‘상처를 치유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되기로 합니다. 늦은 나이에 의대에 입학합니다. 아담스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데도 수석을 놓치지 않습니다.
3학년이 되기 전엔 환자를 만나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는데도 환자들을 만나 이야기해주고 들어주며 웃겨줍니다. 아기들에게는 우스운 복장으로 쇼를 하고, 스파게티 목욕을 하고 싶다는 할머니에게는 스파게티로 목욕도 시켜줍니다. 급기야는 시골 농장을 개조해 무료로 환자들을 돌보아줍니다.
의사가 되기 전까지 진료행위를 해서는 안 되니까 비밀리에 하는데 발각되어 퇴학 조처가 내려집니다. 패치 아담스는 주립의학협회에 퇴학을 철회해 달라고 제소합니다. 연설을 통해 의사는 성적과 권위가 아닌 사람을 대하는 친밀함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협회는 교칙을 어기기는 했지만 좋은 열정과 성적을 인정하여 퇴학을 철회합니다. 그 후 그는 12년간 패치는 의료행위를 계속했고 15,000명 이상의 환자에게 무료 치료를 했고 어떤 의료사고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더 주려고 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은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꾸 우리더러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내어주는 마음이 바로 기적의 재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내어줄 것이 없다고 합니다. 혹은 능력 밖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성적인 판단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케이티라는 여인은 쌍둥이를 임신한 행복한 엄마였습니다. 2010년 3월 마침내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중 한 아이는 태어난 지 20분 만에 사망했습니다. 아이의 심장이 멎었습니다. 27주 만에 태어나 몸무게가 1kg도 안 나가던 아이는 엄마 곁을 떠났습니다. 엄마는 환자복을 벗고 축 처진 아기를 가슴에 안았습니다.
엄마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을 때 아기의 멎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망 진단이 내려진 2시간 뒤 아기는 눈을 뜨고 작은 손을 뻗어 엄마의 손가락을 잡았습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줄 것이 있습니다. 체온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려는 사람에게 능력도 주십니다. 패치 아담스는 주려는 마음만 있었지, 능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문제에만 집중하다 보면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려고 할 때 제자들에게 원하셨던 것도 상황에 관한 이성적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를 넘어선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판단을 넘어서 능력까지 끌어들입니다. 모든 변화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믿고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합니다. 모든 것을 모든 이들에게 주고 싶은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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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셨다. 외딴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배불리 먹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역시 외딴곳에서 음식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갔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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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는 ‘미운 오리 새끼 모임’이라고 생각하는 ‘평화신문 신앙강좌 기획팀’ 모임이 보스턴에서 있었습니다. 자발적인 열성과 깊은 신앙으로 무장된 분들입니다. 토론토에서, 플로리다에서, 뉴욕에서, 버지니아에서 모였습니다. 신앙강좌 기획팀의 열정으로 장재명 신부님의 ‘교부 이야기’는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박재찬 신부님의 ‘토마스 머튼과 영성’도 많은 분들의 참여 속에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11월에는 김재덕 신부님의 피정이 기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줌으로 강의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신부님을 모시고 피정을 하려고 합니다. 이번 피정에도 벌써 많은 분들이 신청하고 있습니다. 보스턴에 오면 보통은 찰스 강, 하버드 대학, MIT 공대를 보곤 합니다. 하지만 이번 ‘기획팀’은 ‘미운 오리 새끼’들인지라 다른 곳을 찾았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찾았습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를 기념하는 슈라인을 찾았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것을 찾으려는 분들의 뜨거운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강좌 기획팀은 11월 피정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번 모임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모임방을 마련해 주셨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제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오래 된 차가 있었습니다. 한 독지가가 차를 새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답니다. 신부님은 아직은 필요 없기도 해서 대답을 미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독지가는 ‘새 차’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차가 좋지만 너무 비싸고, 운전하기에 부담스러워서 며칠 가지고 있다고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독지가의 아들이 ‘역시 신부님은 다르네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좀 저렴하고, 작은 차를 마련해 주어서 그것은 감사한 마음으로 타고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더 편하고, 더 비싸고, 더 좋은 것을 찾지만 신부님은 자신의 분수에 맞는 것을 찾았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부님의 정성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정성과 따뜻한 마음이 독지가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먼저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생각하여라.”
우리의 몸에는 많은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면역기능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있는 바이러스들이 활동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의 면역기능이 저하되고 그럴 때, 우리 몸에 있는 바이러스들이 활동하게 됩니다. 본당에는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 단체들은 기도와 활동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기도하는 단체,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단체는 어려움이 다가와도 쉽게 이겨냅니다. 그러나 기도가 부족한 단체, 세상의 기준으로 움직이는 단체는 겉으로는 잘 되는 것 같아 보여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약간의 문제만 생겨도 분란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었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분들도 가끔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뜻대로, 멋대로 살았지만 신앙인이 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면 세상의 풍랑을 이겨낼 수 있는데 순간 자기 뜻대로 살려 했기 때문입니다. 한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주님의 뜻이 내 삶의 중심이 되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내 삶의 중심이 되는 ‘신앙강좌 기획팀’과 주님의 뜻을 따르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신부님’께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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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주님께서는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시편 146[145],7)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도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루카 1,53). 그런데 현실은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는 하느님에 대한 그분들의 찬미가 공허할 만큼 가혹합니다.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날마다 수많은 이가 죽어 갑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두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분께서 어찌하여 오늘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버려두시는가?” 세상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식이 기적뿐이라면 복음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세상의 배고픈 이들에게 빵이 부족하지 않도록 그분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가르침이라면 우리는 좀 더 유익한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간이 협력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경계하여야 할 첫 번째 유혹은, 군중을 돌려보내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우리는 이 같은 각자도생의 논리에 매우 익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이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필리 2,5)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구체적 사랑을 실천합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가진 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이가 ‘나’와 ‘우리 가족’에게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욕심으로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는다면 세상의 배고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오늘 이야기를 ‘빵을 많게 하신(multiplication) 기적’이 아니라 ‘빵을 나누게 하신(distribution)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형제들과 우리가 가진 빵을 나누려는 사람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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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마태 14,15-2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의 ‘끼니’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실제 사건이지만, ‘한 끼 식사’만은 아닌 상징적인 사건이고, 계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중의 배고픔을 보시고 갑자기 일으키신 기적이 아니라,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려고 전부터 생각하셨던 계획을 실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라는 제자들의 말은, 자신들의 배고픔보다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 ‘사랑’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자비 없는 ‘각자도생의 논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건의했습니다. 군중을 해산하면,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가다가 먹을거리를 살 것입니다.
그들이 전부 다 가난하고 돈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든 것은,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병의 치유를 원해서’였고(마태 14,13-14), 또 ‘영적인 갈망’ 때문에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원한 것은 ‘빵’이 아니라, ‘치유’와 ‘새로운 가르침’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중을 해산시켜서 각자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자는 제자들의 건의를, “우리는 군중의 배고픔을 책임지기 싫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은, 이제 곧 당신이 하실 일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돈도 없고, 빵도 없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잘 알고 계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인가 특별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들어 있는 암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수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으니, 제자들의 말은 “저희의 힘으로는 이 군중을 먹일 수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아무 일도 못 합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말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뜻이라면,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다.”라는 뜻도 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말을,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신 뒤에 그 ‘기적의 빵’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받아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이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가 먹을 것을 마련해서 군중을 먹여라.”가 아니었고,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할 테니 너희가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라.”가 됩니다. 일용할 양식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것을 나누어 먹는 일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해석할 때, 누군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자, 그 모범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것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래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기적 이야기를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억지로 만들어낸 해석일 뿐이고, 주님의 기적을 깎아내리는 해석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된 일이라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변화와 ‘나눔’ 자체를 기적과 같은 일로 본다고 해도, 그것은 처음에 빵과 물고기를 내놓은 사람이 한 일이지 ‘주님의 기적’은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은, 그냥 단순하게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대할 때, 빵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나눔’도 중요하고, ‘사랑 실천’도 중요하지만, 빵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더 중요하고,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라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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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가엾은 마음’은 애끊는 마음, 곧 자식의 고통을 보고 내장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는 어미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헤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마르코 복음 6장 34절)입니다. 그 가엾은 마음은 예수님을 움직여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시고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저녁이 되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된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각자 스스로 먹을거리를 구하게 하자고 예수님께 건의합니다.
군중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어 여자와 어린이들 말고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배불리 먹이십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베푸신 선물이 열두 지파인 이스라엘에 풍성하게 흘러넘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께서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베푸신 만나의 기적과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을 먹인 기적 (열왕기 역사서 하권 4장 42절-44절 참조)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예수님께서 이르시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발뺌하던 제자들은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봉사를 합니다.
제자들도 이제 예수님의 마음,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나 봅니다. 우리도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가엾이 여길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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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오 복음 14장 16절)
나눔의 빛이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힌다. 나눔의 빛이 바로 섬김의 빵이다. 기쁘게 주는 것이 기쁘게 나누는 것이다. 생활 속의 나눔이 바로 생활 속의 참된 진리이다.
나눔의 빵은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을 치유한다. 나눔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은총의 통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나눔이다. 나눔은 회개의 참된 실천이다
절절한 사랑이 나눔이다. 공동체의 생명은 나눔으로 성장한다. 삶의 이야기는 나눔의 이야기다.
복음이 있는 곳에 나눔의 빵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눔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의 나눔이 우리를 살린다. 우리에게는 나눔이 있다. 나눔이 살길이다. 나눔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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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배를 타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아마도 의로운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과 슬픔을 수습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곳, 저곳에서 몰려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저 같으면 휴식을 방해하는 그들에게 짜증을 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희생적인 삶을 보여주십니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양식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말합니다.“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이고 환자이며 갈 곳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지금 머무는 장소는 한적한 광야로 음식을 구할 장소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해결책을 예수님께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굶주림에 처해있는 군중에게 양식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대안을 제시합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요것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적게 여기지 않으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놀라운 결과를 마주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하면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첫 시작을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고” 하루의 끝맺음을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며” 정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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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회사에 스펙도 좋고 실적도 좋은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스펙도 낮고 실적도 변변치 않은 동료 직원이 먼저 승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스펙 좋고 실적 좋은 남자가 인정하기가 쉬웠을까요? 억울해하는 그에게 상사는 이렇게 말해 줍니다.
“자네가 능력 있는 인재라는 것을 인정하네. 하지만 자네는 혼자 일하는 유형이지.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았을 때도 자네와 관련 없다고 생각하면 단칼에 거절했어. 회사는 팀이 중요하네. 완벽한 개인은 없어. 완벽한 팀이 있을 뿐이야.”
승진에서 빠진 이유에 공감 가지 않습니까? 사실 함께하는 삶은 이 세상 안에서 분명히 중요합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는 ‘팀’의 존재는 더 중요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어떨까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지요. 개인보다 팀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나’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고,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팀을 외면합니다.
현대의 기업에서 팀의 능력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 시작에서부터 ‘팀’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혹시 당신 뜻과 반대되는 이 모습에 서운하시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팀에서 활동하든, 혼자 활동하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팀 안에서 활동하며 최선을 다할 때,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함께하는 모습을 당신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혼자서도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을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먹을 것을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마련해줄 수 있음에도 제자들에게 먼저 해결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십니다. 팀을 이루어야 함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할 이웃에 대해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에게 상처를 줬다는 이유로,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함께하지 못할 이유를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할 이유를 찾으셨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웃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과도 함께할 수 없게 됩니다. 함께하려는 예수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이니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팀’의 중요성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함께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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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맛나는 세상>
마태오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살맛나는 세상>
나는
다만 내 힘으로
먹고 살고
너는
다만 네 힘으로
먹고 살면
그게 어디
주님 뜻 따르는
살맛나는 세상인가
너는
바로 내 덕분에
먹고 살고
나는
바로 네 덕분에
먹고 살아야
그게 바로
주님 뜻 이루는
살맛나는 세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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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혜롭고 조화로운 삶>
오늘 주님의 동선이랄까 행위를 보면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혼자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이것을 안 사람들은 극성스럽다 싶은 정도로 육로로 주님 계신 곳으로 갑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보시어 병을 고쳐주시고 이어서 굶주린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주님은 요한의 죽음 다음에 당신의 시간이 필요하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주님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주님의 상태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성가시다고 생각하시거나 화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엾이 보시고 치유해주십니다.
오늘 저는 이런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성찰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열정에 감동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저도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렇게 할 수는 있는지 성찰케 되었습니다.
우선 저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즈음부터 과부하가 걸리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을 하였고, 일도 힘에 부치니 금세 지치고 그래서 일을 하며 자주 짜증을 내고 화까지 내었으며 제가 잘못하고서는 옆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리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해 처음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가지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성찰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피정이나 쉼을 통한 재충전의 시간을 제가 가졌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반성하였지만, 오늘 다시 오늘 주님처럼 나의 시간 그러니까 재충전의 시간 없이 모든 시간을 이웃을 위해 내주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 주님처럼 할 수 없다면 주님의 사랑에 그저 감동과 감탄이나 하며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주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일상을 소개하는 마르코 복음 1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고된 일정을 소화해내시고 다음 날 새벽 외딴곳으로 가 기도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외딴곳으로 가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신 것은 오늘뿐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외딴곳에 가신 것이거나 요한의 죽음에 당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특별히 가신 것이 아닙니다.
실로 요즘 사람들은 혼족이라고 할 정도로 혼자 밥 먹고 술 먹으며 병적으로 혼자 지내지만 정작 외딴곳에 홀로 가는 것은 하지 못하거나 않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스마트폰과 종일 지내고 사람들과 대면하고 하느님과 대면하는 시간은 피하고 가상 공간과 폐쇄 공간에서 이상한 내용이나 뒤지면서 하루를 흘려버립니다.
주님처럼 열심히 일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그런 다음 기도와 쉼의 시간, 곧 사랑 재충전의 시간을 외딴곳에서 갖는, 그런 지혜롭고 조화로운 삶이 실로 요구되는 요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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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김과 나눔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본받읍시다>
- 모세, 예수, 프란치스코 교황 -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시편81,2ㄱ)
시편 화답송 후렴에 힘이 납니다. 나이 70대를 넘어서면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는 동요들이고, 가장 많이 읽는 책들은 위인들의 평전입니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여기 수도원에서 정주하다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제가 아침 산책 때 마다 부르는, 또 피정중 “희망의 여정” 강의시 연세 지극한 피정자들이 한결같이 열창하는 동요는 바다입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참으로 각자 속한 공동체에 희망, 꿈을 주면서 그 희망과 꿈을 실현시켜 가는 희망의 지도자가, 꿈의 지도자가 위대하고 훌륭한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지도자를 지닌 공동체는 행복한 공동체입니다. 명심할 바 지도자는 공동체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공동체의 수준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정말 훌륭한 지도자를 뽑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직접 보고 배우는 훌륭한 희망의 지도자는 공동체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읽었던 평전은 대부분 위대한 공동체들의 지도자들의 평전이었습니다. 제가 아끼고 보관중인 “퇴계평전(인간의 길을 밝혀준 스승)”이, “율곡평전(나라를 걱정한 철인)”이, “다산평전(백성을 사랑한 학자)”이 그러하고 무수한 평전들이 대부분 공동체에 기여한 분들입니다.
수많은 위대한 평전보다 오늘 지금 살아 있는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위대하고 훌륭한 희망의 지도자들을 모신 공동체는 얼마나 행복하겠는지요! 그러니 2000년 위대한 전통을 지닌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참 행복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지도자로 모실 수 있는 성인들이 즐비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지도자 없다 실망할 것이 아니라 이런 성인들을, 위인들을 찾아 배우는 것이요, 내 자신 지도자의 덕성을 키우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 자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인생 궁극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의 역할과 영향력은 얼마나 절대적인지요! 작금의 혼란중인 국내 상황을 접하면서 누구나 지니는 생각일 것입니다. 정말 지도자 잘못 만나면, 지도자가 통합의 중심 역할을 못하면, 공동체도 나라도 망할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 독서중 위대한 지도자 두 분을 만나 배웁니다. 민수기의 모세요, 마태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저는 여기에다 한 분을 주저없이 추천하니 현재의 위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성인을 교황으로 보신 천주교 신자들은 행복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혼란스러운 국내상황의 어둡고 우울한 뉴스들을 대하다가 교황청 뉴스에 눈이 번쩍 열렸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Pope Francis: Next World Youth Day in Seoul, South Korea”
(교황 프란치스코: 다음 세계 젊은이의 날은 남한의 서울에서)
사우스 코리아에서 코리아로 통일된 한나라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교황님은 행사를 마치면서 집전한 미사에서 강론후 조마조마 기다리던 관중들에게 “유럽의 서쪽끝에서 극동의 남한 서울로” 2027년 세계 젊은이날 행사가 열릴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은 세계적입니다. 이번 37차 세계 젊은이날 행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대한 희망의 지도자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폐막 미사중 강론에서 “교회와 세계는 지구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젊은이들을 필요로 한다”며 “빛나라shine”, “들어라listen”, “두려워하지 마라be not afraid”는 요지의 명강론을 하셨습니다.
늘 감탄하는 바이지만 저는 교황님 강론보다 더 좋은 강론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홈페이지에 오르는 교황님 강론은 가능한 모두 읽으려 노력합니다.
이어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공부입니다.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의 진퇴양난, 고립무원의 처지가 참으로 외롭고 힘들고 불쌍해 보입니다. 예나 이제나 불평하는 배은망덕의 무지의 사람들에 대해, 구제불능의 사람들에 대해 얼핏 절망감도 듭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는 탐욕의 무지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었는지 다음 절박한 기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찬미와 감사 기도만 있는게 아니라 이런 탄원기도도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정신 건강을 위해 이런 하소연의 스트레스 푸는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느님도 그의 사정을 알고 기도하는 자도 자신의 신원을 더욱 분명히 자각하게 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백성을 배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다.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너무 실감나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니 하느님은 모세를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느님께 기도하는 자들만이 국민의, 공동체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이런 기도하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대통령을, 교회 지도자로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음에 관한 충격적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예감했을 주님은 외딴곳으로 물러가 자신을 추스르며 영적전의를 새로이 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 광야의 외딴곳이 아니라 외딴곳의 광야를 가득 채운 참 가엾은 굶주리고 병든 군중들이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가난한 민초들이, 민중들이 겪는 고난이 참 길고 큽니다.
예수님의 대응이 신속 기민합니다.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빛을 발합니다. 모세처럼 탄원과 탄식의 기도도 바치지 않고 조용히 제자들이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참으로 간절히, 경건히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광야에서 모세에 이어 광야에서 예수님이요 광야 여정중인 우리를 위한 똑같은 파스카 예수님께서 당신 사제들을 통해 미사중 성체를 나누십니다. 바로 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지극정성의 사랑과 기도에 감격, 감동한 이들이 마음을 열고 가진 것을 다 나눴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오늘 이야기를 “빵을 많게 하신 (mulitiplication)기적”이 아니라, “빵을 나누게 하신(distribution) 기적" 이라고 부릅니다. 군중이 한 마음이 되어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고 가진 것을 모두 나누게 하셨으니 아, 바로 이것이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 예수님의 위대함입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군중을 감동시킨 기도와 사랑이 참으로 지도자의 위대한 자질임을 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다 합니다. 없어서 굶주린게 아니라 나누지 않아 굶주린 것이요, 나누기로 하면 오히려 차고 넘칠 것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섬김과 나눔의 영성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위대한 주님을 본받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섬김과 나눔의 지도자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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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예수님 안에 머물면!>
오늘 복음(마태14,13-21)은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을 배불리신 기적사화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그 소문을 듣고 여러 고을에서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니, 사람들은 모두 배분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면!'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머물면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은 늘 일어날 수 있고, 이와같은 기적을 우리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 세계 인구가 80억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 인구 중에서 8억 명 정도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배불리 먹는 사람들에 의해서 버려지는 음식물의 양이 꽤나 많다고 합니다. 좀 배부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안에 머물게 되면, 굶주림에 허덕이는 많은 형제자매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예수님의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더 채우려고 하는 욕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나눔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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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xDcuoPjQ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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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 16)
나눔의 빛이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힌다.
나눔의 빛이
바로
섬김의 빵이다.
기쁘게
주는 것이
기쁘게
나누는 것이다.
생활속의
나눔이 바로
생활속의 참된
진리이다.
나눔의 빵은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을
치유한다.
나눔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은총의 통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나눔이다.
나눔은
회개의
참된
실천이다
절절한
사랑이
나눔이다.
공동체의
생명은
나눔으로
성장한다.
삶의
이야기는
나눔의
이야기다.
복음이
있는 곳에
나눔의 빵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눔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의 나눔이
우리를 살린다.
우리에게는
나눔이 있다.
나눔이
살 길이다.
나눔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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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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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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