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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무기
조선의 환도
칼날 왼쪽 면 갈아 절삭력 극대화
글 | 이석재 _ 전통무기연구가, 경인미술관 관장
국내의 국∙공립대학∙사립박물관이 소장한, 공식적으로 소재가 파악된 조선시대의 도검은 대략 300여 점 정도다. 이는 일본내에 남아있는, 군도를 제외하고도 수십만 자루를 상회한다는 일본의 도검 유물와 비교할 때 대략 2천대 1의 비율에 해당된다. 조선도검은 거의 멸종상태에 가까운데, 특이한 점은 극소량의 잔존유물에도 불구하고 도검의 규격과 형식이 놀라울 정도로 다채롭다는 점이다. 아울러 얼핏 투박하고 왜소해 보이는 환도에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전통공예와 과학의 조화로운 결합이 숨어 있다.
이 칼럼에서 설명하는 조선도검의 과학성은 다수 유물에서 모두 관찰, 반복되는 특징을 다루려고 한다. 이는 특정유물에서 발견되는 극단적 예외사항이 조선도검 전체 수준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고, 우리 칼을 평가함에 있어 보편적 특성이 제대로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도검의 과학성을 재발견하고 관련된 가
치의 바른 이해를 위해 먼저 알아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이 있다.
일본과 달리 일상 속에서 함께한 조선도검
특정 기물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그 기물이 적극 활용되기 위한 환경과 사용자의 필요가 선행되어야 한다. 도검은 동양권에서 중국의 전국시대 이전부터 전장에서 주요 병기의 자리를 장병기에 일찌 감치 내준 상태였다.
원거리 전투는 노궁(弩弓)에, 근접 전투는 모극(矛戟) 등에 살상력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었던 것인데, 그러한 이유로는 모극 등 장병기의 발달, 갑주(甲胄)등 개인 방어구의 발달, 전략전술의 발달로 전차와 기마의 전장 활용이 증가됨에 따라 살상병기로서의 도검의 효용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상)편편한 도신면(좌측면). (하)각진 도신면(우측면)
일면평조형도신의 예
시대가 바뀌면서 도검에 대한 조선의 환경은 주변국과는 많은 문화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중국과도 달랐지만, 특히 동시대의 일본과 비교할 때 더욱 그랬다. 물론 남명 선생처럼 ‘칼찬 유학자’도 있었고, 유서 깊은 가문에서는 전대의 고검을 가주의 처소에 모셔 놓고 벽사( 邪)와 수양의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칼은 본시 양의 기물이라 음한 것을 제압하는 성질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옛 문적과 문헌의 기록들을 보면, 조선시대의 도검은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보다 훨씬 친숙한 기물로서 선조들의 일상생활 속에 함께 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조선의 도검은 정치, 인종, 문화적인 제반사항 등의 환경적 본질에서 주변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특히 일본처럼 문화전반에 깃든 도검의 위상과 단순 비교할 경우, 우리 도검의 빛나는 가치는 간과되고 피상적 평가에 의한 오류를 범할 위험이 다분하다.
일본의 도검 또한,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시기에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공 이전까지 전쟁의 서전(緖戰)이 장수들의 칼싸움으로 시작되는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장에서의 주요 병기는 장병기의 차지였다. 주요 전투는 지세를 이용하는 병법과 진법, 기마무사에 의한 기창대의 활용, 장창 들린 보졸을 앞세운 후, 궁시가 다하고 창이 부러지는 최종단계에 들어서야 도검이 사용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도검은 사무라이들에게 있어서 변함없이 무사의 혼이자 무사도의 상징이었고, 임란 이후 내전이 사라진 통일일본의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하에서 사무라이들은 전장의 무인이 아닌 행정 관료로 직무가 변경되었지만 여전히 도검은 그들을 상징하며 추앙받는 기물이었다. 역설적으로 전쟁터에서 쓰임새가 사라진 일
본의 도검은 사무라이의 수행과 호신, 신분 과시, 의장 등의 용도를 위해 성능과 외장을 더욱 개선시키면서 발달해 갔던 것이다. 이런 결과만을 놓고 도검을 외형적으로 단순비교한다면, 조선도검의 실체를 바로 알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옻칠 단순마감방식 환도 칼집의 예(민제) 흑칠
어피 복합마감방식 환도 칼집의 예(관제) 어피 + 옻칠
저피 복합마감방식 환도 칼집의 예(관제) 저피 + 흑칠
복합소재 결합방식 환도 칼집의 예(관제) 갈대줄기 + 어피 + 흑칠
복합소재 결합방식 환도 칼집의 예(궁중) 한지 + 어피 + 주칠
조선시대 도검 날의 단면 유형
선진적인 통치 시스템이 조선도검 발달 막아
조선 개국 후 집권세력에 의한 무반천시의 환경도 도검 발달에 악영향을 끼친 주요 이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전기 200년간 도검이 주변국, 특히 일본에 비해 발달하지 못했던 주된 이유는 오히려 국가의 정치와 경영시스템의 발달, 화포 등 신형 무기의 개발에 따른 결과로 일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문화적 우위를 점하여 파생된 결과였다.
임란 이후 조선에서는 도검, 모극류 전반에 걸쳐 비약적 개선과 재편이 이루어지고‘무예도보통지’ 저작 시점에서는 상무와 자강의 무풍을 재정립하기 위해 무기의 표준화가 시도되지만,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로 이어지면서 도검은 호신과 장식, 또는 의례와 의장을 위한 용도로 역할이 한정되어 갔다.
결국 조선에서 도검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중앙집권제의 정립에 의한 선진적 정치와 통치시스템에 의한 문화의 전반적 수준이 일본보다 훨씬 앞서있었던 환경적 요인과 함께, 개인 무기로서 궁시의 선호∙권장과 과학적으로 앞선 무기인 화포와 화약의 사용이 상당부분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설명된 조선과 일본의 상황적 차이를 이해하면, 과학이라는 잣대를 도검의 어느 곳에 적용해야 하는 가에 대한 기준이 보인다. 과학기술적 우열의 관점보다는 도검의 활용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환경과 문화적 상황에 따른 차이로 인식하면 답은 간단하다.
조선시대 도검의 장단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여건 속에서 탄생한 결과물로 도검의 제작주체와 사용에 대한 당시 조선사회의 보편적 환경을 이해하면 그 실체가 보이게 된다.
기본적으로 국가 주도하에 생산, 지급되는 소모품
조선의 도검은 크게‘관제도검’과‘민제도검’의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이 글에서는 관제를 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민간에서도 도검이 제작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도검은 기본적으로 관에서 생산하고 공급하는 것이 조선의 상황이었고, 조정이 제시한 기준에 따라 제작된 보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도검의 수량과 수준 때문인데, 민간에서 도검을 제작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으나 수량도 적었고 조정의 군기감에 소속된 환도장(環刀匠) 수준의 전문도공이 아닌 야장(대장장이)들이 제작했던 결과로, 관제에 비해서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즉, 대부분의 도검은 수요와 생산, 디자인이 관에 의해 행해졌고, 중앙에서 정기적으로 각 지방 군영의 무기 현황을 점검한 후, 수요에 맞추어 수급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일본도 사진 : (상)다치太力의 예. (하)가나타 力의 예
일본도가 무사의 혼으로 취급될 수 있었던 근본원인은 국가운영의 중추가 무사계급이었음에 기인한다. 전쟁이 사라진 일본에서 무사가 근본을 잊지 않고, 자신의 표상으로서 항시 패용하고 다니던 도검은 가문과 후손에게 전해야 할 명분과 실리적 필요성이 함께하였기에 수백년을 이어가며 새 칼처럼 보존될 수 있었다. 조선에서도 무반들은 많은 수가 자신의 용검을 소장하고 있었지만, 일본과는 달리 조선군영의 무기는 기본적으로 소모품이었고, 원칙적으로는 관의 지급품이었다. 또한 무관들외의 개인이 필요에 의해 칼을 구입했다 해도,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관리하지 않는 한, 세월이 흘러 수명이 다하면 폐기하는 소모적 기물이었다.
동시에 도검/모극/궁시 등의 개인병기는 관아의 병기고에서 집단 관리되었기 때문에 개인이 특정무기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관리해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들이 조선도검과 일본도를 차이 나게 한 근본원인인 것이다.
조선의 도검은 조선 전기, 임란 전, 임란 후, 조선 중기, 조선 후기, 구한말 등의 기점 등을 거치며 특정시기마다 규격과 스타일이 다채롭게 변화했다. 그에 비해 일본의 경우 도검의 유형에 일정한 양식과 규격이 정착되면서 일찍부터 고유양식의 도검을 탄생시켰다. 그 속에도 여러 가지 다채로운 유형이 있으나 특정시점의 변화를 놓고 말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치(太刀), 우치카타나(打刀), 가타나(刀) 등의 종류로 구분된다. 외장은 패용방식과 장식, 도신의 규격, 휨각 등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를 조선도검의 수많은 형태와 규격, 도신의 휨각 등 형태변화의 다양성과 비교할 경우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도는 유형을 인식하기가 용이한데 비해 조선의 도검은 분명한 정형이 있음에도 그 정형에서 응용∙파생된 변화의 차이를 이해하게 되기까지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
삼각도와 육각도의 단점 보완한 ‘일면평조형도신’
우리 도검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 유물에 전체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이해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며, 여기에 중국, 일본의 도검에 대한 지식과 경험 또한 함께 필요하다.
동시에 시대상황을 이해하면서 도검에 적용된 외래적 요소와 우리 고유의 창의적 요소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호에서는 일단 가장 대표적인 우리 도검 고유의 특화된 장점 중 도신과 칼집, 두 가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조선의 무인들은 칼날의 한 면은 편편하고 다른 한 면은 중단위에 각진 형태로 배가 나온 칼을 많은 빈도로 사용하였다. 조선에만 있는 칼은 아니었고, 동시대 일본에도 유사한 형태의 도신이 존재하기도 했으나, 일본에서는 드문 예외의 형식이었던데 반해, 조선에서는 매우 선호된 도신의 일형식으로 극소수 남아있는 도검유물에서 의외로 다수를 차지하며 빈번히 보게 되는 도신의 형식이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의 무인들이 직접 칼을 주문제작할 경우는 물론, 육각단면이나 오각단면의 칼을 얻었을 때, 의도적으로 도신의 한쪽면(칼을 들고 상대를 겨눈 상태에서 왼쪽면)을 갈아내고 스스로 개량해서 사용했을 정도로 조선의 무인들이 유달리 선호했던 날의 형식이었다.
이러한 형식의 칼날은 관제 의장환도에서는 보기 드문 유형이지만 주로 민제와 부분적으로 관제의 실전용 환도에서 많이 확인되는 조선환도 특유의 독특한 도신유형이다. 조선의 무인들이 이 형태의 도신을 선호한 이유는 그 도신의 용도와 성능에 따른 것이었는데 일단 이 칼은 다채로운 대상에 유효한 절삭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의 도검에 ‘삼각도’ 라 부르는 칼이 있다. 도신의 단면이 이등변 삼각형의 구조라 삼각도라 부르는데, 이 칼날은 구조상 짚단 베기에 매우 용이하다. 또한 ‘육각도’ 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도신의 단면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칼은 중앙에 심이 있는 견고한 도신의 구조로서 대나무나 얇은 생목을 베기에 유용한 칼이다.
문제는 삼각도는 짚단에 특화된 칼이고, 육각도는 대나무 베기에 특화되었다는 용도의 제한이다. 물론 잘 훈련된 검도인은 육각도를 사용해도 대나무와 짚단을 모두 순조롭게 벨 수 있지만, 초심자에겐 용이하지 않으며, 삼각도의 경우는 숙달된 검도인이라 해도 대나무 베기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검도수련자 중 베기를 선호하는 이들이 한 자루의 칼로 단단한 대나무와 부드러운 짚단을 동시에 용이하게 베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절삭력을 가진 칼을 못 찾고 삼각도와 육각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칼이 바로 조선시대의 무인들이 선호했던 ‘일면평조형도신’ 의 칼이다. 도신의 한 면이 평조인 까닭에 삼각도처럼 짚단과 같은 부드럽고 유동적인 물체들을 용이하게 베어버리는데 우수한 성능을 발휘하며, 반대편 도신면의 중앙각은 육각도처럼 대나무와 같은 단단한 고체형 대상을 베는데 유효한 성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도검은 값비싼 기물이라 사제로 구입하기엔 경제적으로 쉽지 않았었다. 설령 도검을 소장한다 해도 현대의 진검소장자들처럼 도신의 망가짐을 각오하면서 함부로 대나무를 베지도 않았고, 상업적으로 짚단을 묶어 베기용으로 공급하는 이도 없었던 터라 이러한 칼은 지금보다 훨씬 소중하게 다뤄졌다. 그럼에도 도검이 생사를 가름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던 과거에는 도신의 성능은 사용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그런 이유로 조선의 무인들은 도검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도신으로서 일면평조형도신을 선택했던 것이다.
가볍고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환도의 칼집
조선의 칼집은 외형적으로는 옻을 이용한 주칠이나 흑칠마감한 정도거나, 기껏해야 어피를 감싸 마감처리한 정도로만 이해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그 구조와 견고함, 내구성 면에서 중국, 일본도검의 칼집이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자면, 관제의 실전용 환도의 경우, 최소한 저피(猪皮)로 칼집을 감싸 내구성을 높이고,
견고한 흑칠로써 내구제가 보이지 않도록 마감하는 경우가 기본이었다.
평균 이상 수준의 도검인 경우, 나무칼집 전체에 실처럼 가늘게 저민 갈대줄기를 틈새 없이 촘촘히 감아 일차 마감한 후 다시 세미한 두께로 얇게 가공된 어피를 이음새가 없을 정도로 칼집전체를 둘러 이차 마감하고, 최종적으로 그 위에 수차례 옻칠을 올려 마감한 후 칼집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서 저민 갈대줄기를 사용한 일차 처리방식은 기온과 습도에 반응하는 아교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칼집의 벌어짐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하며, 이차보강재로 사용된 어피의 가공수준은 중국과 일본의 칼집에서 쓰는 어피의 수준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함과 세미함이 있는데, 이 경우 어피의 두께가 얇다 해서 내구성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외에도 삼베를 감싼 후 옻칠을 올리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칼의 경우 저민 갈대줄기대신에 한지를 붙인 다음 옻칠을 올려 마감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으나, 무기로서의 견고함이 필요한 실전용 도검에서는 앞서 설명한 복합적 마감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전어도(傳御刀. 太祖御刀). 궁중유물 전시관
삼인도(三寅刀) 전쟁기념관
운검(雲劒. 환도) 육군박물관
일본과 중국의 경우에도 위와 같은 내구재를 사용하긴 하나, 마감재를 각각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단일방식이 대부분이며, 모든 내구제의 특성을 동시에 수용하고 복합적으로 조화시켜 칼집의 내구성을 높이는 조선의 방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즉, 복합소재의 칼집제조방식은 다수의 조선시대 도검에 보편적으로 적용된 방식
이며, 일정수준의 실전용 도검에 보편적으로 적용된 조선고유의 특화된 제작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조선환도 칼집의 내구성은 일본, 중국의 방식과 비교할 때 외부의 충격과 마모에 강하며, 계절의 기온변화로 인한 칼집의 수축에도 본체를 유지하게 하고, 우천등에 따른 습기변화에도 녹소로부터 도신을 보호하는데 뛰어난 성능을 지니고 있는 등 칼집의 기능을 최적화시킨다.
조선의 칼집은 복합재료의 조화를 통한 장점 외에도 등급규격의 일본, 중국 칼들과 비교할 때 우수한 장점을 지닌다. 중량이 가벼워서 환도의 무게를 감소시켜 환도의 장시간 패용을 쉽게 하며, 규격이 날씬하여 동급의 도신을 사용하는 경우, 칼집의 폭과 두께가 매우 얇아 도검을 패용한 상태의 활동을 용이하게 한다. 또한 내구성이 뛰어난 소재의 이상적 결합으로 무게는 감소하고, 규격은 줄었음에도 도신을 보호하는 성능은 월등히 높였고, 충격과 마모에도 멀티레이어에 의한 내구력을 발휘한다.
녹칠어피장별운검(綠漆漁皮裝別雲劍, 패도)육군 박물관
만초문운입사환도(蔓草文銀入絲環刀) 경인미술관
패검(佩劒, 黑漆裝環刀) 고려대학교 박물관
어피 사용 부분에서도 조선환도는 중국, 일본과 다른 점이 있다.
패월도나 운검유물처럼 어피가 외부로 돌출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주로 의장, 의례용으로 쓰이는 칼인 반면, 실전용 환도들은 어피와 같은 칼집의 내구제가 외부에서 구분이 안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이는 어피를 장식제가 아닌 내구제로서 실용적 목적에 더욱 충실히 사용했다는 의미이다. 부연하여 예를 든다면 심지어는 전어 도(傳御刀)와 같은 왕실의 칼에서도 동일한 방식이 확인된다. 어도 칼집의 경우는 나무 위에 한지로 감싸고 어피를 전체에 두른 다음 두껍게 올린 주칠로 마감한 방식이다.
이렇듯 조선의 무기에 사용된 공예장인들의 공력은 외형적 화려함이 아닌 내실에 충실한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② 조선의 환도
선조들의 과학적 아이디어 녹아든 조선도검
주변국의 도검과 비교할 때, 가장 명확하게 조선도검의 정체성을 나타내면서 중국, 일본의 칼과 쉽게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부속이 칼집에 달린 ‘패용장식’ 이다. 요즘 우리 나라 영화나 드라마의 사극을 보면, 과거에 비해 나름대로 고증과 재현에 충실한 소품들을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노력들은 주로 의상 등의 특정부분에 머물러 있을 뿐, 도검과 무기류 등의 고증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섬세함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중에서 가장 고증이 무시되는 부분이 도검의 휴대 방식, 또는 소지에 대한 부분이다.
위부터 : 육군박물관 녹칠장별운검. 고려대박물관 패검. 고려대박물관 예도. 고려대박물관 별운검
패용장식과 띠돈
도검은 ‘들고 다니는 것’ 이 아니라 ‘차는 것’
무관이 평상시 칼을 지니고 다니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전복(戰服)을 입든, 평복(平服)을 입든, 또는 갑주(甲胄)를 착용하든, 우리가 익히 아는 고유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결코‘들고 다니는 것’ 이 아니라‘차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나, 영화에서는 아직까지도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 이 주류
이며,‘ 차고다니는사람’ 을보는 것은 가뭄에 콩나듯 한다.
간혹 ‘차고 다니는 사람’을 봐도 제대로 된 ‘패용장식과 띠돈’ 등의 부속을 갖추고‘세조대(細條)’,‘ 광다회(廣多繪)’,‘ 요대(腰帶)’,‘ 녹대(鹿廗)’등의 띠를 이용해 차고 있는 것을 도무지 볼 수 없으니,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투적인 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도 영화나 드라마 속 전통의 구현에는 이렇듯 요원한 부분이 산재해 있는데, 고증이 있을지는 몰라도 재현이 미진한 것이 현실이다.
패용장식 (세종실록 군례서례의 검)
‘칼을 찰 수 있게 해주는 장식’인 이 패용장식에서 중국, 일본의 도검과 다른 우리 선조들의 독특한 발상과 과학적 창의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조선환도의 패용장식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고, 중국과 일본 역시 칼은 차고 다니던 기물이었다. 일본의 경우, 후대에 갑옷을 입고 패용하던 타찌(太刀)식의 ‘차는 방식’이 카타나(刀)로 변화됨에 따라 허리춤에 꽂는 방식으로 변화가 생기긴 하지만, 이는 표현의 차이일 뿐 결국‘차는 것’이다.
즉, 정식으로 칼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칼은 근본적으로 ‘차고 다니는 것’이지 결코 ‘들고 다니는 것’ 이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의 도검은 관제든 민제든 법제에 따라 제대로 만든 칼이라면, 공히 패용장식을 이용하여 휴대하였다. 전기에는 세종실록 군례서례의 ‘검’ 처럼 띠돈없이 패용장식에 달린 고리에 직접 띠를 엮어 차는 방식이었고, 중기 이후로 구한말까지는 띠돈을 달아 패용 시 도검의 위치조절이 쉬운 방식으로 개선되었다.
세간의 호사가들, 특히 인터넷에는 일본의 타찌 패용금구의 형태와 패용방식을 보고, 조선의 환도와 연결지어 단순비교하면서 조선도검의 패용방식이 조선 고유의 양식이 아닌 일본식을 차용한 것이라 단정 짓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 도검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인한 속단이다.
일본의 타찌 외에도 동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중국과 우리 도검의 패용방식을 간과한 추론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왕실유물보관소인 쇼소인(正倉院)유물에서 전해져오는‘가라다찌(唐大刀)’,‘ 가라요우노다찌(唐樣大刀)’,‘ 고마쯔루기(高麗劍)’,‘ 고마요우노다찌(高麗樣大刀)’에 이미 중국과 한국 고유의 선진적인 패용장식이 일본의 타찌에 선례로서 적용되었던 패용장식의 원형임을 확인할 수 있고, 후기에 속하는 송, 원대의 도검의 패용장식 또한 일본의 타찌에 비할 만한 다채로운 유형을 보이며 앞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용방식은 조선에서 더욱 세미하고 아름다우며, 과학적 기능까지 겸비한 우리식의 고유하고 독특한 장식으로 승화됐다.
조선환도 특유의 패용부속 ‘띠돈’
조선식의 패용장식은 부분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도검에서도 볼 수 있는 모티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만, 그 부분적인 조화가 조선식으로 승화되어 디테일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 조선환도의 패용장식인데, 그 결과물이 허리띠를 잡아주는 ‘띠돈’ 이라는 부속이다. 띠돈은 중국과 일본의 도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조선환도 특유의 패용부속이다. 아직까지 조선 띠돈과 똑같은 유형은 확인된 바 없다. 이 띠돈은 조선 중전기부터 확인되는 유물로서 조선 중기에 환도는 물론 궁대와 구군복에 착용하는 병부대 등에서도 빈번히 확인되는 우리 선조들의 과학적 아이디어가 담긴 금속공예의 산물이다.
띠돈은 기본적으로 끈을 달아 허리춤(군복이나 갑주를 입었을 경우)이나 가슴부분(평복시, 겨드랑이 보다 약간 낮은 위치)에 찰 수 있도록 해주며, 후면에는 광다회나 요대 등의 끈이 통과하도록 직사각형의 구멍이 있다. 또한 칼을 패용한 상태에서 칼의 전후를 바꾸기 쉽도록 띠돈의 하단에 회전할 수 있는 고리가 달려 있다. 이 회전용 고리는 중국 도검에 사용되는 패용장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현존하는 조선 띠돈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유성룡 도검에 속한 띠돈으로 띠돈의 전기유형으로 볼 수 있다. 이 띠돈의 하단에 달린 고리는 좌우로만 회전이 가능한 형식이며 차고 있는 칼의 위치를 앞뒤로만 바꿔줄 수 있는 단순 기능을 가진다. 중국식 띠돈은 단순히 허리띠에 거는 고리형 장식이기 때문에 줄을 뒤집어야만 칼의
위치가 바뀌는데, 이 경우, 걷거나 뛰게 되면 칼이 출렁이며 원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일본식 타찌의 경우는 칼집에 장착된 두 곳의 고리에 직접 줄을 거는 관계로 칼의 위치를 앞뒤로 바꾸기가 애초에 불가능한 방식이다.
기능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앞서있었던 조선의 띠돈은 조선 중기에 또 한번의 개량을 하여 완전히 주변국의 추격을 차단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초기에 ‘좌우’ 로 움직이던 띠돈 하단부의 고리에 ‘상하’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중간 연결부속을 추가한 것이 그것인데, 이 부속은 현대 여성의 목걸이 장신구에도 유사한 크기와 모양,
기능이 동일한 원리로 적용되어 있는 부속이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띠돈 장식은 띠돈에 직접 다는 띠를 사용해 도검의 패용과 해제를 매우 간편하게 하며, 패용한 도검의 전후 위치 변경을 쉽게 해 패용자가 취하는 자세에 따라 도검의 방향을 바꾸기 편리하다. 또한 상하로 움직이는 고리는 상체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굴절운동이 일어나게 해서 패용장식이나 칼의 움직임으로 인한 무리(무게 집중 등에 의한)를 완충하고 경감시키는 기능을 해주었다.
이 조선 특유의 패용장식인 띠돈은 그 기능으로 조선의 도검 패용자들에게 칼의 휴대를 간편하게 하고, 패용시 소지자의 움직임을 매우 편하게 했던 첨단의 장치였던 것이다.
호인 내부에 버튼식 잠금장치 클립 장착
일본도에 있어서 ‘호인’ 이란 부속은 도신과 코등이, 칼자루의 결합을 견고히 하고, 칼집과 칼몸을 결합할 때 칼집입구에 꼭 들어맞게 하여 칼날과 칼집의 결합을 안정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부속이다.
조선시대의 도검도 호인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는데, 일본도의 호인과 모양, 규격이 흡사하고, 동일한 용도로 쓰인 칼도 많았다. 그러나 도검의 수급이 관주도하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인지라 근본적으로 일본의 도검생산체제와는 차이가 있었다. 즉, 대량제조에 따른 결과로서 양산되는 칼과 같은 기성품화된 도검에 대해, 섬세하고 특히 정교한 작업을 요하는 칼날과 칼집의 개별적인 견고함을 전체적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도검에서 호인은 그 부속에 요구되었던 고유한 기능 중에서 최소한 칼집과 결합시 일본도의 호인과 그 역할에 대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도검을 사용한 후, 칼집에 다시 꽂아 패용한 상태에서 호인이 칼집입구에 잘 맞물리지 않거나, 마모되어 헐렁거릴 경우, 도검패용자의 보행시, 또는 주행시에 그 움직임으로 인하여 도검이 심하게 흔들거리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도신이 칼집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로 인한 결과로서 호인에 의지하지 않
고도 안전한 결합을 위한 별도의 장치가 필요했고, 결국은 그에 맞는 부속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도검을 칼집과 결합시 이탈을 방지하는 기능을 해주었던 ‘잠금장치’ 였다.
위부터 : 유성룡 도검. 육군박물관 흑칠장 소환도. 경희대박물관 환도
비녀방식 잠금장치 (조선환도)
초기의 잠금장치는 ①칼집의 패용장식에서 연장된 비녀형태의 고리를 코등이 상부에 난 구멍에 꽂는‘비녀장방식’이 사용되기도 했고, ②칼집입구의 양옆에 튀어나온 철심을 코등이나 내측의 절우(切羽)에 낸 작은 구멍에 맞물리는 방식도 있었다. 또한 민간에서 만들어진 코등이가 없는 칼들의 경우엔 삼국시대 환두대도의 결합방식을 그대로 고수하여 ③칼집입구에 깊숙이 집어넣어 맞물리게하여 결합시키는 원초적인 방식도 사용되었으나, 조선중후기 시점에서 근대 서양군도와 근현대 일본군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④‘클립을 이용한 버튼식 잠금장치’가 조선관제환도 잠금장치의 대세로서 정착하게 된다.
이 버튼식 잠금장치의 등장은 시대적으로 매우 앞선 방식인데, 동시대의 중국, 일본 등의 주변국 도검과 비교할 경우 더욱 그랬다. 특히 중국, 일본이 군도류의 칼에만 주로 사용했던 것에 비해, 조선은 그 이전부터 관제의 의장∙의례용 도검에 보편적으로 사용해왔던 장치였다는 점에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실용적 창의성을 확인할 수 있다.
버튼식 잠금장치의 위치는 칼자루하단의 상방과 측방을 이용한 두 가지 유형이 대표적인데, 칼집과 결합되는 클립의 처리가 후대의 군도와 비교해서 더욱 정교하고 세밀한 부속으로 마감되어 있는 점이 특히 뛰어난 점이다.
일본 군도는 메이지유신 이후로 서구문물의 수용이 가속되면서 서양군도를 모방한 양식이 선보였다. 초기의 일본왕실 의장용 도검과 군도는 미국과 유럽의 군도제조사에 주문제작하여 수입한 물건이다. 일본의 군도는 전대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대량생산에 따른 필요성 때문에 칼자루에 ‘클립을 이용한 버튼식 잠금장치’ 를 달았는데 일본, 중국, 서양 군도의 클립은 호인의 외부로 돌출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2차대전 말기의 일본군도까지 그대로 적용된 방식이었다.
이에 비해 시대적으로 앞서있던 조선 관제환도의 ‘잠금장치’ 의 클립은 호인의 내부에 장착되는 방식을 차용하였는데, 이는 클립자체는 물론 잠금장치를 보호하는데 있어서 매우 우수한 성능을 발휘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발상에 해당된다. 일본군도는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무심코 발도할 경우, 클립에 손상이 가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클립이 부러지게 된다.
그에 비해 조선환도의 클립은 클립 자체가 호인내부에 장착되어 견고히 클립을 지지하고 있는 관계로,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는 발도자체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도를 한다 해도 호인 속에서 외부로 노출된 부분에 유동적 충격이 가해져 부속의 손상자체가 발생하지 않거나, 손상된다 해도 매우 경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즉, 조선식 잠금장치는 후대의 일본, 중국의 군도에 장치된 원리보다 더 진보된 구조이며, 내구성과 공예적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까지 겸비한 장치였던 것이다.
버튼클립방식 잠금장치 (조선환도)
일본군도의 버튼클립방식 잠금장치
실용과 장식의 조화 ‥ 슴베와 자루 고정방식
한국, 중국, 일본의 도검을 놓고 볼 때, 칼몸의 슴베가 칼자루와 결합된 방식과 형태를 보고 어느 나라의 도검인지 판별이 가능한 기준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이미 1천여 년 전에 타찌의 고전적 전형이 등장한 이래로 슴베와 칼자루의 결합과 고정은 목정혈(目釘穴)방식을 기본으로 한다.
목정에 쓰이는 고정재료로는 초기에 동이나 구리 같은 비철금속을 사용했으나, 후기에 우찌카타나가 등장하고 타찌와 병용되는 시점을 지나 카타나가 일본도의 주류로 바뀐 시점에서는 대나무나 우각 등을 이용하여 슴베와 칼자루를 목정혈을 이용하여 고정시켰다. 즉, 일본식 슴베의 고정방식은 대나무 핀을 이용한‘메쿠기’방식이 주류인데 비해 동시대 조선의 대부분의 도검은 금속제 핀이나 금속제 핀의 가운데가 비어있는 파이프형태(유소혈)의 고정용 부속을 메쿠기대신 사용하여 칼날과 자루를 고정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결합으로 마감되는 고정방식도 있고, 이 방식에 더욱 견고함을 얻기 위해 슴베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칼자루의 상부 윗마개 장식에 관통시킨 후, 두드려서 이중마감을 하는 경우 또한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이외에 제3의 방식으로는 일본도의 메쿠기 고정방식과 유사한 것도 있다. 코등이 바로 위쪽 부위에 금속제 핀으로 일본도의 메쿠기처럼 마감하고, 윗마개 밑이나 칼자루의 중앙부 상단의 위치에 유소(수술장식)를 달기 위한 파이프 형태의 금속핀을 넣어 이중고정하는 방식이다.
중국의 경우는 조선도검의 슴베고정방식과 거의 동일한 방식이었고 일본만 달랐는데, 이 ‘도신과 칼자루의 분리’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차이가 구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과학과기술’지 5월호에서 설명했던‘ 조선의 환경적 특성’즉,‘ 조선군영의 무기는 기본적으로 소모품이었고, 원칙적으로 ‘관의 지급품’ 이라는 것과 ‘대부분의 도검은 기본적으로 관에서 생산하고 공급하는 시스템’으로 인한 결과인 것이다.
일본도가 도신을 무사의 생명이라 표현하며 중요시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의 도검, 특히 일반군사가 사용하는 전투용 환도류는 비록 백성의 수준에서는 고가의 물건이긴 했지만, 날과 칼에 부속된 모든 것 일체는 소모품이었다.
조선의 환도는 날을 자루와 분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날을 강제로 칼자루와 분리할 경우 금속핀 또는 속이 비어있는 파이프형 금속핀과 같은 칼자루의 고정장식을 파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의 도검은 일반인이 해체하기도 어렵거니와 해체하는 경우에는 해당 장식의 전면교체와 보수를 요구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이러한 방식은 칼날이 망가지면 칼을 버리는 ‘관제 도검문화’ 에서만 가능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슴베와 자루의 결합방식은 문화적∙환경적 배경에서 생긴‘다름’의 차이인 것인데, 한∙중∙일 삼국의 방식이 각기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는 구조이므로 무조건 특정한 이유를 들어 어떤 형식의 칼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문화적 이유에서 선호되고 계승된‘이유 있는 방식’인 것이다.
다만, 일본도의 경우, 목정혈을 잡아주는 목질의 핀이 마모되어 헐거워지거나, 충격으로 인하여 핀에 균열이 생기는 경우, 전투시 도검을 휘두르다 칼자루로부터 칼날이 튀어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의 칼자루 결합방식은 전투시에 칼날이 부러지고 휘어질망정 결합방식의 파손으로 인하여 칼자루에서 도신이 튀어나가는 경우
는 절대로 없으니, 이러한 특성을 장점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조선환도 슴베유형 도해 (육군박물관 학예지 11집)
일본도 하몬의 일부 유형의 예
조선환도 칼날의 부분열처리 흔적
열처리의 과학, 조선환도의 ‘도신’
조선시대의 도검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일본도 도신과 조선칼의 도신간 차이점을 논할 때 대표적으로 의문점을 갖는 부분이 ‘날문양(하몬)’ 이다. 일본도에서는 명확하게 보이고 한국 도검 유물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이 하몬인데, 호사가들 중에는 이를 두고 우리 도검의 도신에 부분 열처리가 없었다며 단정 짓는 경우가 많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조선시대 도검의 칼날에도 부분열처리를 함으로써 무기로서의 내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일찍이 철기가 발달한 나라이고, 도검이 무기로서 사용된 역사가 일본보다 앞선 나라인데 어찌 도검이 무기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내구성의 기본 과정인 열처리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없었겠는가.
다만, 조선환도에서는 일본도와 같은 방식의 표면 연마는 도검의 마감공정상 필수사항이 아니었기에,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하몬이 보이도록 처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일본도의 하몬은 도신의 날이 선쪽 부위를 열처리한 후, 그 열처리한 부분에 대해 십여 차례 이상의 숫돌질 공정을 거치면서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나타내기 위한 작업의 결과로 연마장인에 의한 미학적 영역에 속하는 부분이다. 우리 나라에서 의미하는 칼날을 연마한다는 의미는 ‘날을 벼려 더욱 날카롭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일본도에서 의미하는 도신의 연마는‘날을 벼려 더욱 날카롭게 하는 것은 물론, 날의 표면을 세분화된 숫돌질의 기법으로 장시간 공을 들여 연마하는 작업전체’를 의미한다. 도신 연마는 작업자체가 특화된 전문가의 영역인 것이다. 특
별히 공을 들여야 하는 보도급 칼일 경우 1~2개월 정도의 도신연마작업은 통상적인 수준이었다. 원래 하몬은 그 목적이 도신의 경도를 부위별로 달리하여 하나의 칼날에 ‘강함’과‘부드러움’ 의 성질을 동시에 깃들임으로써 무기
로서의 내구성과 성능을 높이는 열처리 기술에서 파생된 부가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도신연마공들의 실력을 가늠하는 장인기술의 척도로서 주객이 전도될 정도로 중요시되고 발달된 기술로 인정받았음은 물론 그 기술에 합당한 대가를 받으며 작업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관제 도검문화인 조선에서 날을 벼르는 가치를 과연 얼마나 인정했을 것인가의 여부는 자명하다. 조선에서는 하몬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와 공과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에서는 칼은 그들의 상징이고, 신분의 표상인지라, 칼이 대접받는 것이 당연한 환경적 요인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조선의 무인들은 아무리 일본칼이 무기로서 나아보였다고 해도 일본도를 얻을 경우, 자신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조선식 튠업’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외장을 바꾸고, 칼날의 경우엔 한쪽면을 갈아내기도 했다.
중국은 대국이고, 왜인들은 칼을 잘 쓴다지만, 조선에는 조선식의 도검에 대한 법제가 있었고, 무인들은 전통적인 자신들의 스타일을 고수하길 좋아했다. 심정적으로 낮게 보았던 ‘왜인’ 의 법제를 구태여 고수할 필요도 없었으며, 연마할만한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비용이 비싼 ‘일본식 하몬’ 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조선도검의 도신은 은은한 표면 광택에 날만 날카롭게 잘 벼려진 상태가 보편적인 도신연마의 표준이 되었던 것이며 일본, 중국의 도검과 마찬가지로 무기로서 충분히 쓰일 수 있는 ‘부분열처리’ 또한 당연히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일본도처럼 비용과 시간을 들여 화려한 하몬은 만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글 | 이석재 _ 전통무기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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