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7■. 韓國 國文學者·時調詩人 嘉藍 李秉岐!
●. 개 요.
1891. 03. 05 전북 익산 ~ 1968. 11. 29 익산 시조시인·國文學者. 日帝强占기에 시조부흥운동에 앞장섰고 시조뿐만 아니라 국문학·서지학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본관은 연안 호는 가람(嘉藍 또는 伽藍)·가남(柯南).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는데 이는 장차 그의 국문학 연구에 밑거름이 되었다. 1906년 김문수와 결혼하고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漢城師範學校를 졸업했다. 그 후 전남남양공립보통학교 · 전남 제2공립보통학교 · 여산 공립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고문헌 수집 시조연구 및 창작을 시작했다. 1921년 권덕규 · 임경재 等과 朝鮮語硏究會를 조직해 우리말 연구운동에 앞장섰고 1926년 시조문학의 구심점이 된 시조회(詩調會)를 창립해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장했다. 1931년 南部地方을 돌아다니면서 한글과 문학에 관한 강연회를 열었고 주로 동아일보를 통해 문학론을 전개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있었으며 1939년부터 문장에 한중록·인현왕후전 等을 쉽게 풀이해 연재했는데 이는 그의 박학다식을 바탕으로 한 고전연구의 진가를 보여준 것이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된 후 함흥형무소에서 1년 가까이 복역하고 1943년 출감 후 낙향하여 농사와 고문헌 연구에 몰두했다. 해방직후 서울에 올라와 1946년 미 군정청 편수관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고전문학에 나타난 향토성 等의 論文을 발표했다. 그 뒤 단국대학교·新文學원·서라벌예술대학 等에서 講義했다. 6·25전쟁 중 고서(古書)를 트럭에 실어 날라 고향에 보관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동국대학교·국민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1952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6년 중앙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國語國文學에 논문 (別) 思美人曲·속(續) 思美人曲을 발표했다. 1962년 全北大學校에서 명예 文學博士 학위를 받았다. 고향에서 요양하다 1968년에 죽었으며 장례는 全羅北道 예총장(藝總葬)으로 치러졌다. 전주시 다가공원에 嘉藍詩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 내 용.
▲. 이병기(李秉岐) 1891(고종 28)∼1968. 國文學자·時調詩人.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가람(嘉藍). 全羅北道 益山出身. 辯護士 채(採)의 큰아들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 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全州公立普通學校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國語國文學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수집한 서책은 뒷날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었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 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 · 휘문 고등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朝鮮語綴字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 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으며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 6·25를 만나 1951년부터 全羅北道 전시연합대학 교수 全北大學校 文理大學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學術院 任命會員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술복 · 문복 · 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09월 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 부흥 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는데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의고조(擬古調)를 띠고 있었으며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 ∼12.13.)·율격(律格)과 시조 동아일보 1928.11.28. ∼12.1.)· 時調源流論 (新生 1929.1. ∼5.)· 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 (新民 1930.1.) · 시조는 혁신하자 (동아일보, 1932.1.23. ∼2.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 조론을 잇따라 발표한바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文章에 조남령(曺南嶺) · 오신혜(吳信惠) · 김상옥(金相沃) · 장응두(張應斗) · 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 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後 옥중작인 洪原低調 等에서 사회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결 론.
그의 후기작은 6·25사변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탱자 울 等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리의 고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후기의 특징으로 꼽히는데 이것은 現代時調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한 것이었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國文學分野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古傳作品들 閑中錄·仁顯王后전· 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等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그는 이밖에 많은 수필을 썼고 특히 平生 동안 극명하게 쓴 일기는 놀랄만하다. 主要著書로는 嘉藍時調集을 비롯하여 國文學槪論·國文學戰士·嘉藍文選 等이 있다. 全羅北道 예총장(藝總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1960년 學術院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全羅北道 全州市 다가공원에 詩碑가 세워졌습니다. 感謝합니다!
●. 揭 載.
1. 國家報勳處 2. 國務總理室 3. 牧民 Forum 代表 4. 國防部 5. 保健福祉 家族部 6. 警察廳 7. 國政院 8. 全州市廳 9.傷痍軍警會 10. 武功 受勳者會 11. 6.25參戰 戰友會 12. 獨立紀念館 13. 文化財廳 14. 全羅北道 道廳 15. 報勳敎育 硏究院 16. 戰歿軍警 遺族會 17. 戰爭 紀念館 18. 仁川大學 敎授 19. 益山市 嘉藍協會 理事 20. 全南大同財團 局長 21. 文化遺産 踏査會 Cafe' 22. 南原 崔明姬 文學會 理事 23. 大田顯忠院, 任實護國院 24. 全州市 圓佛敎 會長 25. 大韓民國 國家有功者會 26. 全羅北道 道廳 Monitor Cafe' 27. 越南 參戰 戰友會 28. 傷痍 軍警會 Cafe' 29. 南原 文化院 局長 30. 大韓民國 國家有功者 31. 國家有功者 廣場 32. 環境部 33. 其他 同僚입니다. 感謝 합니다!
●. 2013년 05월 07일. 全州市 文化遺産 保存會 龍虎 宋 哲 孝.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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