端宗의 最後
전왕 단종은 상왕(上王)이 된 후부터 별궁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삼
문 등의 상왕 복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하고 끝나자 정인지
는 세조에게 글을 올렸다.
《상왕께서는 성삼문의 음모를 벌써부터 아시고 계셨을 것으로 믿어집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체 비밀에 붙이신 것은 이 나라에 죄를 범
하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 그 어른에게 여전히 상왕의 위호(位
號)를 갖게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할 일이올시다.》
하는 글을 올렸다.
세조는 이 소문(疏文)을 보고 정인지 등 여러 궁신들을 불러놓고 상왕 폐
립에 대하여 문의하기 시작하자 모든 중신의 의견은 상왕 폐립으로 모아지
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조는 상왕(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하고 강원도 영월(江原道 寧越)로 추방하여 거기서 귀양살이를 하게 했다.
다음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순흥부(順興府)로 추방하여 귀양살
이를 하게 하였다.
금성대군은 매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만나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눈물을 흘려가면서 비밀히 노산군 복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모집
하였다. 어느날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자기 처소로 불렀다. 보흠이 오자 좌
우에 있던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후 단둘이 앉아서 시국이 되어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가 땅이 꺼지게 긴 한숨을 지으면서
"이부사는 이 시국을 어떻게 보오? 내버려 두는게 옳겠소? 좀 의견을 들
어봅시다."
하고 말을 걸었다.
이부사도 마음이 단종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금성대군과 동조하는 태도
를 보이면서
"글쎄올시다. 마음이 옳게 박힌 사람은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지 않을 것입
니다.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반문하는 것이었다.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요. 하지만 네멋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기
는 싫소. 나는 이런 내용의 간단한 격문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하나 좀
만들어 주겠소?"
"글은 부족합니다마는 만들어 보겠소이다. 그런데 내용은요?"
"세조는 인륜대도를 짓밟으면서까지 왕위를 약탈한 천하의 대죄인임을 천
명하고 다음으로 단종을 복위(復位)케 하는 것은 나라를 올바로 살리며 동
시에 백성을 살리는 첩경이라고 역설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잘 생각해
서 만들어 보오."
대군의 지시대로 이부사는 격문을 만들어 금성대군에게 올렸다. 대군은 이
것을 순흥병영(順興兵營) 및 남중(南中)의 동우자(同憂者)에게 나누어 주
게 하였다.
그런데 순흥의 관노(官奴) 하나(성명미상)는 벽과 벽 사이에 몰래 숨어서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목적으로 격문을 만들어 각지에 뿌리게 한 사실을
엿들은 후 대군의 측근에서 시종하는 시녀(侍女)의 손을 빌어 격문 몇장을
얻어 가지고 분주히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때 기천(基川=지금의 풍기) 현감(縣監)은 이 기밀을 알아내자 말을 달려
관노를 쫓아가서 증거물인 격문을 빼앗아 가지고 상경하여 격문을 증거로
고변하였다. 세조는 고변한 현감에게 특상을 줌과 동시에 훗일에 중용(重
用)할 것을 약속하여 돌려 보냈다.
금성대군의 복위 음모를 알게 된 세조는 대군과 동조한 사민이라면 한 사
람도 남겨 놓지 않고서 모두 참살하여 죽계(竹溪)란 시냇물에 쓸어넣게 하
였다. 그리하여 죽계수가 핏물로 한때는 홍하(紅河)가 되었고 또 금성대
군은 순흥에서 안동으로 끌려가 안동옥에서 그날 그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대군은 혼자서 어디로인가 없어졌다. 이 때문에 금부도사
(禁府都事=죄인을 맡아 보는 관직)는 말할 것도 없고 부사도 책임상 사면
팔방으로 사람을 내놓아 대군을 수색하게 했다. 그러나 종적은 묘연하였
다.
그일이 있은지 며칠쯤 되어 대군은 설렁설렁 돌아 왔다.
그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면서
"너희들은 수만 많지 쓸데없는 존재구나. 나 하나를 못 잡으니 말이다.
내가 도망하려면 얼마든지 하겠다만... 그런데 내가 돌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을 것 같아서..."
하고 여전히 웃음섞인 말을 했다.
대군은 죽음에 이르자 의관을 다시금 정제하고 호상(胡床)에 자리잡고 앉
아 있었다. 이때 금부도사는 금성대군에게 일어나 서향(西向)을 하라고
하면서
"대군전하! 여기 모신 전패(殿牌=세조의 위패)에 절을 하셔야 합니다."
고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대군은 이 말에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면서
"절을 하라고? 나의 임금은 영월에 계시다. 그런 말은 두번 다시 입밖에
내지 말라."
하고는 북으로 향하여 서서 통곡사배(痛哭四拜) 한 후 약사발을 마시었다.
그러나 마신 약으로 절명되지 않아서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남녀노소(男女老少) 누구나 다 대군이 불쌍해 "하느님도 무심하
시지"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었고 세조의 다섯째 아우였다. 집권욕(執
權慾)에 눈이 어두어진 세조의 눈은 아우도 조카도 분간하지 못하였던 모
양이다.
금성대군을 죽인 세조는 뒤이어 노산군(魯山君=단종)을 죽일 계획을 세웠
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賜藥)을 받들어
가지고 영월로 갔다.
그러나 당도해서부터는 단종이 계신곳으로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저하고 있으려니 나장(邏將)이 주의를 시켰다.
"그렇게 주저하시다간 시간에 지오(遲誤)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도사는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아 간신히 뜰 안으로 들어가 엎드렸
다. 이때 노산군은 당중(堂中)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나를 부르는 것이냐?"
고 부르는 연유를 물었다.
도사는 이 물음에 대하여 쾌히 대답할 용기도 내지 못하고 그저 어름어름
하고만 있었다. 그러자 노산군이 입산한 이래 측근에서 시종을 하고 있던
젊은이가 노산군을 교살(絞殺)할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한 줄 궁현
(弓弦=시위)으로 단종의 목을 졸라 질식을 시켰다.
그러나 절명(絶命)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허리띠를 이어서 조르고 또 졸
라 절명케 하였다. 때의 단종의 나이는 십칠세에 불과하였다.
이때 노산군은 교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이며 염구가 하나도 준비되
어 있지 않았다. 다만 연소한 승 하나가 와서 며칠간을 애절히 통곡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그 젊은 승은 단종의 시체를 짊어지고 어디론지 가버
렸다.
그후 이러한 두 가지 말이 떠돌게 되었다. 그 하나는 시체를 산 속으로 가
져다 태우려 한다는 말과, 또 다른 하나는 시체를 강중에 던져 없애려는
것인가보라다는 말, 이 두가지 말이 떠돌았다. 이 두가지 말 중 점필재(畢
齋=金宗直의 호)가 쓴 글, 즉 투강설(投江說)이 가장 옳은 것 같다고 사람
들은 말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 말을 쫓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젊은 승이란 기실은 간시도배
의 개노릇을 하는 자였던 모양이다. 단종의 넋은 지금도 여전히 강중에
표탕(漂蕩)하고 있을 것이다.
端宗 在越時의 斷 詩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한번 대궐에서 쫓겨난 이 몸, 벽산중에 외톨의 몸 되었네.]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밤마다 가면(의관을 입은 채 자는 것)을 하건만 잠만은 거짓이 없고, 끝
없는 한은 해마다 더욱 궁진해지질 않네.]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두견소리 새벽 언덕에 끊어지고 새벽달이 밝은데, 피는 봄 골짜기에 흘러
낙화가 붉어졌네.]
天聾?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
[하늘은 귀먹어 아직도 애소(哀訴)를 못 듣고 있는데, 어째서 수인(愁人)
의 귀만이 밝은고.]
위에 기혹한 한시는 단종이 십오세 때 강원도 영월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자기의 심중을 피력하여 쓸쓸히 읊은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단종이 얼마나 재인(才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도한 세조의 집권욕(執
權慾)은 이런 재주 있고 착한 조카를 내쫓아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조 제육대 임금인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는 영돈
녕부사 여양부원군(領敦寧府事礪良府院君) 현수(玹壽)의 딸이다.
세종 이십이년 경신(庚申=西紀 1,440년)에 탄생하여 갑술(甲戌) 정월 이십
이일에 왕비로 택봉되었다. 을해(乙亥) 칠월에 세조가 수선(受禪)하자 세
조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존칭하였다가 정축 육월에는 부인으로 봉
했다. 부인은 중종(中宗) 십육년 신사(辛巳=西紀 1,512년) 육월 사일에 팔
십이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송씨는 단종이 십칠세에 처참히 시해(弑害)되자 소년 과부(당
시의 나이 십팔세)로 팔십이세까지 외로이 지내다가 세상을 등지고 만 것
이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생활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결혼생활이 못 된데다 수
난생활이 그들을 별거시켰기 때문에 슬하에는 자녀가 있을 수 없었다. 그
리하여 송씨는 정말 쓸쓸히 외톨의 몸이 되어 팔십 평생을 보내고 말았다.
송씨의 한(恨)은 정말 끝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종의 부인 송씨의 무덤은 단종의 생질 해평부원군 정미수(海平府院君 鄭
眉壽)의 묘산(墓山) 속에 들어있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건천면(乾川面)이다.
부인은 재세중(在世中) 서울 안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부인은 동교(東郊)에다 집을 짖고 죽을 때까지 영월을 바라보기를 원하였
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의 조정도 이 원만은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왕가에서 지어준 집에서 잠시 기거하다가 따로 수간 초옥
을 짓고 나아가 여기서 소의소식(素衣素食)을 하면서 최후의 날까지 단종
의 명복을 빌다 세상을 등졌다.
이조 제칠대 임금 세조는 이조 제사대 임금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다. 휘
(諱)는 유( ), 자(字)는 수지(粹之)다.
태종 십칠년 정유(丁酉=西紀 1,417년) 구월 이십구일에 본궁에서 출생하였
고 세종 십년 무신(戊申)에 처음으로 진평대군(晋平大君)에 책봉되었다가
나중에 함평대군(咸平大君), 진양대군(晋陽大君) 또는 수양대군(首陽大君)
으로 고쳤다. 을해(乙亥) 윤 유월(閏六月) 십일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선양(禪讓)을 받았으며 무자(戊子) 구월 칠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한 후
다음날 - 곧 팔일에 수강궁(壽康宮) 정원에서 별세하였다. 재위 십삼년이
었고, 춘추는 오십이세였는데 슬하에는 삼남 일녀가 있었다.
위에서도 이미 말한바와 같이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고 문종의 둘째
아우인 동시에 문종의 아들인 단종의 친 삼촌이었다. 그러나 그의 왕위 찬
탈의 야욕은 이것들을 다 생각하지 않고 빼든 칼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
리하여 그는 형님인 문종시대의 모든 유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조카인
단종에게 충성을 하려는 신하며 사민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천하를 수중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인이 공노(共怒)할 살육행위를 감행한 것이다.
그 하나는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산골에서 잔명을 이어가는 단종을 교살해
그 시체를 강중에 던져 어복(魚腹)에 장사지내게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양씨에 관한 처리이다. 혜빈 양씨(惠嬪楊氏)는 일찍이 세종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와 혜빈이란 정일품(正一品) 품계까지 갖게 된 숙녀였
다. 이 양빈은 세종의 다섯 후궁 중 가장 부덕이 완비된 여인이었었기 때
문에 세종 재세시에는 가장 위함을 받고 지냈다.
그러다가 세종 신유(世宗辛酉)에 세종의 큰 아들 문종(文宗)의 비 현덕왕
후가 단종을 낳은지 아흐레쯤 도어 돌아가자 세종은 단종의 양육을 양씨가
맡도록 하였다.
양씨는 세종의 분부를 받들고 단종을 양육함에 전심 전력을 다하였다. 덕
택으로 단종은 열두살이 되도록 병없이 자라 문종의 뒤를 잇게까지 된 것
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공은 더욱 뚜렷해져 세종의 사랑과 신임이 더욱 두
터워졌다.
어느날 세종은 양씨에게
"왕자가 많기도 하지만 너무 기승해서 안심이 안 되는데 이 국새(國璽)를
맡길 일이 걱정된다. 이를 특별히 그대에게 맡기노니 소용 될 때마다 상감
께 주었다가 도로 그대가 맡고 있으라."
하고 신신부탁하였다.
그런데 세종, 문종이 다 돌아간 후 을해(乙亥)에 이르러 세조가 단종의 왕
위를 찬탈하고 옥새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양씨는 한사코 이에 응하지 않고
"옥새만은 죽어도 바치지 못하겠나이다. 대군의 부왕마마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 소녀에게 이를 맡기시며 <세자, 세손이 아닌 자로서 옥새를 내놓으라
하면 단연히 거절하라.>고 부탁 하시었나이다. 소녀는 부왕 세종의 부탁을
받들고자 하나이다."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양씨에게는 소생이 한남군(漢南軍) 어(王+於:한자폰트가 없음), 수춘군(壽
春君) 현(玹), 또 영풍군(永豊君) 전( ) 등 세 왕자가 있었다. 양씨는 세
조에게 생모는 아니었지만 명분상으로는 훌륭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양씨
가 자기의 명령에 불응하자 그는 서슴치 않고 당장에 죽이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동생뻘인 양씨 소생의 세 왕자까지도 세상을 등지게 하였
다.
세조는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함에 앞서 첫째로 모사(謨士)를 몰색하였
는데 이 물망에 오른 것이 권남(權擥)이란 사람이었다. 권남은 경상도 안
동 사람으로 기지(奇智)가 대단하기로 이름났고 또 하나의 모사는 권남이
천거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권남의 동지로서 기계(奇計) 그것보다도 힘
으로 한몫을 단단히 보는 한명회(韓明澮)란 인물이었다.
전자(前者) 권남은 유위(有爲)의 인재였지만 나이 서른다섯이 넘도록 알아
주는 사람이 없어 출세를 못했고 또 후자(後者) 한명회도 권남만 못지 않
은 사람이었지만 나이 사십에 겨우 경덕궁(景德宮=송도에 있음)지기로 출
세를 했다. 이 두사람은 그들의 처지가 이러했으므로 자연히 서로 지기가
된 것이다.
권남이 세조의 책사(策士)로 뽑혀 들어가자 한은 권의 추천으로 행동파의
제일인자로 되어 세조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세조의 찬탈 계획은 거의
다 권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 계획이 순순히 실행으로 옮겨진 것
은 한명회의 공이었다.
이 두 사람은 세조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되었던 존재였다. 다시 말하면
권남과 한명회는 세조에게 있어서 대공신인 것이다. 따라서 권은 좌익 일
등공신(佐翼一等功臣)이 되어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이르러 부귀와 공명이
하늘을 흔들었으며 또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익평공(翼平公)이란 시호(諡
號)를 내림과 동시에 세조묘에 배식(配食)케 하였다.
한은 좌리일등공신(佐理一等功臣)이 되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봉
작되었고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이르렀으며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충성공(忠成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도 권남과 다름없이 여생을 부귀 속에서, 영달 속에서 살다 세상을 등졌
다. 그러나 그 영광이 후세에 전하지 않음은 권, 한의 부귀와 영달이 불의
(不義)와 동조(同調)하였음에서 생겨진 것이 아닐까?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정정공(貞靖公) 윤번(尹 )의 딸이다. 태종 십팔년
무술(戊戌=西紀 1,418년) 십일월 십일일에 홍천 공아(洪川公衙)에서 출생
하였고 세종 십년 무신(戊申)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여 낙랑부대부인(樂浪
府大夫人)으로 봉했으며, 을해(乙亥)에 이르러 세조가 선양을 받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成宗) 십사년 계묘(癸卯) 삼월 삼십일에 온양행궁(溫陽
行宮)에서 육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는 이남 일녀가 있었
다.
王妃 所生의 王子와 公主
일남 덕종대왕(德種大王)
이남 예종대왕(睿宗大王)
일녀 의숙공주(懿淑公主)
後宮 所生의 王子
일남 덕원군(德源君=이름은 曙)
이남 창원군(昌原군=이름은 晟)
위에 기록한 두 왕자는 후궁 박씨의 소생이고 딴 후궁에게서는 소생이 없
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