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첫 번째 근거: 창세기 15장 6절
3. 신약의 세 번째 인용: 야고보서 2장 23-24절!
(1) 구원은 믿음으로, 상급은 행함으로?
- 야고보서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이 구절은 심히 난해합니다. 디벨리우스는 "신약에서 가장 난해한 것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왜 난해구인지 이해가 안 가시지요? 왜냐하면 개역개정 성경에 번역이 안 되어 있는 "알라" 즉 "그러나"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야고보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18절이 17절과 반대되는 내용이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반대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도리어 17절의 야고보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난해구인 것입니다.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구절이 난해구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주석들을 읽었으나, 어떤 주석에도 답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WBC주석에서 랄프 마틴은 이 구절에 대한 세 가지 대표적인 견해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를 취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해석이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 번째 해석이 그래도 낫다."
또, 댄 매카트니는 여덟 가지 견해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를 취했는데, 가장 많은 학자들이 취하는 견해입니다. 무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이한수, 채영삼 교수 등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댄이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8. 최근 주석들 중 가장 공통된 해결책은 이 책에서도 취하고 있는 것으로, 가상의 대화-상대자가 특별히 자신의 믿음을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에 반대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를 사용하여 '어떤 사람은 이것을 말하고 다른 사람은 저것을 말한다'고 말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야고보가 반대하는 것은 행위와 믿음이 어느 정도 분리될 수 있으며 믿음이든 행위든 하나만이라도 괜찮다는 개념이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너'와 '나'의 이와 같은 사용은 증거가 약할지라도, 언어의 자연스러움을 가장 적게 손상시키는 해결책이다."
이처럼 주석들은 이 구절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연구할 때 항상 그 구절에 대해 반박이 불가능한 완전한 해석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래서 결함이 있는 이 해석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야고보서 2장에 대한 저의 해석이 뒤집혀서 2장 14-26절에 대한 모든 주석을 다시 읽고 온종일 씨름한 날이라 너무 지쳤고 피곤했습니다. 하필이면 그럴 때 생각지 못한 난해구가 나타나고, 주석들 스스로 정확한 답이 아니라고 자인하는 것을 보고 저는 감당할 수 없를 정도로 급 피곤해졌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스트레스가 밀려왔습니다.
저는 체력과 정신력 모두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성경을 펴서 야고보서 2장 14-18절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해가 안 되는 어려운 구절들에 대한 답은 거의 항상 전후 문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의 읽기 시작한지 1분? 혹은 3분이 안 되어서였습니다. 순간적으로 거짓말처럼 이 구절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당시 저는 혹시 본문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14절부터 읽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 구절의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에 '믿음이 있노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행함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이 단락을 쓴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그 믿음이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후 15-17절에서 스스로 질문에 답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처럼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묻겠습니다. 야고보가 편지를 쓴 성도들 중에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 이런 자들만 있었을까요? 즉, 믿음을 오해하고 구원파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자들만 있었을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어느 교회나 이런 자들이 있는가 하면, 믿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성도님들도 있습니다. 18절의 "어떤 사람"은 14절에 나오는 "사람"과 다른 그런 성도들입니다.
그 증거로, 14-18절에 나오는 화자가 둘입니다. 14절의 "믿음이 있노라"라고 말하는 "사람"과 18절에서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이 그들입니다. 그 사이 16절에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오기는 하나,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으로 한 비유에 나오는 말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화자는 14절에 나오는 "사람"과 18절에 나오는 "어떤 사람" 둘뿐이고 그 둘이 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단체로 착각하듯 "어떤 사람"이 야고보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14절에 나오는 "사람"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믿음이 있노라"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18절에서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딱 받아서 "너는 믿음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이로 보건대 실제로 14절을 받고 있음이 틀림없지요!
그러면 14절을 받고 있는데 왜 15절이 아니라 18절에 이 구절이 나올까요? 그것은 14-17절까지는 "믿음이 있노라" 하나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에 대해 야고보가 평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바로 18절을 쓴 것입니다. 18절은 14절에 나오는 교인뿐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한 말입니다. 야고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이고, 그가 14절에 나오는 사람에게 한 말입니다. 그 뒤 야고보가 이 어떤 사람이 한 말에 동의하면서 설명을 이어간 것입니다. 즉, "앞의 사람(14절)이 말한 것은 잘못된 말이고, 이 어떤 사람의(18절) 말이 옳다!"고 하면서 설명을 계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14-18절의 흐름과 구조입니다.
이상 설명해드린 것처럼, 18절은 야고보가 아니라 어떤 성도가 14절 같은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교인에게 한 말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이 서로 상반됩니다. 그러므로 18절 앞에 "그러나"라는 단어가 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그날 순간적으로 난해구가 풀렸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한편, 저는 그 뒤 고든 케디의 책을 읽다가 이런 말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2:18). 여기서 '어떤 사람'은 분명히 어떤 신자입니다. 그는 입으로의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과 대화 중입니다. 이 신자는 야고보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당신은 믿음이 있고('믿음 그 자체' 2:17), 나는 행위가 있다(순종을 낳는 믿음)고 말합니다."
저처럼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똑같은 견해지요! 그래서 확증이 되고 좋았습니다.
- 야고보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거짓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14-17절에서 설명한 믿음과 행함이 분리된 것이고, 또 하나는, 19절에 나타나 있는 대로 신조에 대한 지적 수긍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참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바로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야고보는 귀신들도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또, 귀신들도 성경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타락한 후 줄곧 성경의 각종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거나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귀신들도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습니다. 귀신이 예수님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마가복음 1:24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리고 귀신들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습니다. 군대 귀신이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눅8:31)한 것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존재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럽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섬뜩한 경고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성경이 진리라고 믿는다. 나는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믿는다. 나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 자이며 구원받았다. 죽은 후 천국에 갈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행함이 따르질 않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이것은 성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귀신의 믿음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귀신들의 믿음보다도 못한 믿음입니다. 이에 대해 로버트 플러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네가 유일신론을 인정한 것은 옳다. 하지만 귀신도 지적으로는 유일신론을 인정하는 것을 아느냐? 그리고 귀신들은 너희보다 그 고백에 더 합리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적어도 다가올 심판이 두려워서 떤다!"
그러므로 결코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믿음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이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것은 로이드 존즈가 산데만주의 이단 이라고 거듭 지적한 것으로, 로마서 10장 9-10절에 입각한 거짓 구원의 확신입니다.
저는 중학생 때 성서침례교회에 다니는 친구로부터 이것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미 교회에 다니는 저에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둘 다 인정하고 시인하자 이 구절들을 찾아서 읽어주었습니다.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리고 "봤지! 너는 이제 구원받았어.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 그러니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산데만주의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아십니까? 참 믿음은 회개를 전제합니다(막1:15, 행20:21, 히6:1). 또한,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만 아니라 주님으로 모셔들인 것을 전제합니다. 진실로 주님으로 모셔 들였기 때문에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고, 그래서 순종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한 마태복음 7장 21절과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와 달리 산데만주의식의 질문과 이에 기초한 구원의 확신은 이 구절과 정면충돌합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믿고 시인만 하면 회개도 안 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지 않아도, 즉 어떻게 살든지 천국에 간다는 구원파식 구원론입니다. 이것은 정통이 아닙니다. 교회에 교묘히 침투한 이단사설입니다. 그런데도 정통의 탈을 쓰고 오래도록 많은 목사와 신자들을 미혹해왔습니다. 때문에 로이드 존즈는 산데만주의를 다음과 같이 강하게 성토하고 질타했습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주의가 흔히 교회를 황폐화시키곤 했습니다. 이 점은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고수하고 있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방금 인용한 구절을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70여 년 전에 교회 안에 산데만주의(Sandemanism)라 불리는 무서운 이단이 있었습니다. ... 그들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느 것을 느끼든지 간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도 문제가 아니다. 그가 일단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된다.' -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것이 그들이 들고 나오는 성경 본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앙주의'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거니와 그 이단이 교회를 무섭게 황폐화시켰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도 이런 이단사설에 속고 있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절대로 속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런 자들을 깨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이 구절은 14-19절이 아니라 21-26절에 붙여야 합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19절 뒤에 붙여야 제가 설명하기 원하는 것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붙였습니다.
야고보는 이 구절에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거나, 신조를 수긍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자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탄식합니다. 저도 그런 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그들을 "허탄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허탄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허탄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케노스"이며 "공허한, 허무맹랑한"이라는 뜻입니다. 즉 공허하고 허무맹랑한 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 사람에 대해 사용될 때, 이 단어는 '속이 빈, 천박한, 판단력이 부족한'이란 뜻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의 용법에서 케노스는 문자적으로 '빈'이란 뜻인데, 이 구절에서는 '속이 빈', 곧 '어리석은' 사람을 뜻합니다. 때문에 이한수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탄한 사람'으로 부른 것은 그가 영적 진리를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는 우매자라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지능을 얕보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바울도 약간 다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지능이나 지식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 법무부장관을 지낸 어른이 검사장 바로 밑 차장 검사까지 지낸 변호사를 제게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그 변호사의 부친은 목사님입니다. 그런데도 완전한 구원파 같은 구원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안타까워서 설명해주었으나 전혀 알아듣질 못할 뿐만 아니라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아직 총각이고 하버드를 졸업한 허대니 목사님에게 전에 어떤 분이 서울대 의대와 동 대학원을 나온 똑똑하고 예쁜 자매님을 소개시켜주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잘되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한국에 왔을 때 물어보았더니 한번 만나고 바로 헤어졌다고 합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매님이 믿기만 하면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잘못된 구원론을 맹신하고 있었고,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받아들이질 않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세상적으로는 최고의 지성인이지만 이런 이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프고 아프다 못해 마음이 무너집니다. 제발 여러분 중에는 이런 사람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여러분, 여기서 야고보가 뭐라고 물었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 싶으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땅히 알고 싶어 해야 합니다. 즉, 참 믿음과 거짓 믿음 그리고 그 결과를 아는 데 진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헛것"으로 번역된 "아그로스"는 문자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또는 "일하지 않는"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행함(works)이 없는 믿음은 일하지(work)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14절에서 '구원하지' 못하고, 16절에서 '유익'이 없고, 17절과 20절에서는 '죽은'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잘 듣는 자가 되십시오. 그리하여 바르게 알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꼭 천국에 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