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답사지 안내
1. 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Saemangeum Gunsan Free Economic Zone)
새만금은 전북 군산 ․ 김제 ․ 부안 앞바다를 방조제 33km를 세우고, 그 안에 땅 28,300 ha, 호수 11,800 ha를 만들 계획이다. 방조제 길이는 그간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네덜란드의 주다치 방조제(32.5km)보다 1.5km 더 길다.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140배에 달한다. 1970년대 초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갯벌간척예정지로 조사되었다가, 1980년대 초 냉해로 인한 쌀 흉작을 겪으면서 사업시행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1987년 대선후보로 출마하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전북지역에 개발 공약으로 새만금종합개발사업이 발표되었다.
1991년 첫 삽을 떨 때는 100% 농업식량생산기지 조성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2007년에는 30%는 비농업용지로 용도를 변경하고, 2008년에는 다기능 융복합기지로 계획되면서 농업용지는 30%, 70%는 비농업용지로 변경되었다. 여기에 경제와 산업, 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중심지, 녹색성장과 청정생태환경의 글로벌 명품 새만금 신도시를 건설할 계획이다.
새만금 공사는 두 번이나 공사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99년 불거진 시화호 수질오염사고 영향으로 2년 동안 물막이 공사가 중단되었다. 또 2003년에는 환경단체가 법원에 방조제 공사 집행정지 소송을 제기해 6개월간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2004년 서울고법의 공사재개 결정으로 2006년에야 최종 물막이 공사를 끝내고 보강공사를 거쳐 착공 20년 만인 2010년 4월 27일 방조제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전북 지역 갯벌 90% 이상이 사라지게 된다. 갯벌은 수산물생산과 생물들의 서식지, 오염정화, 여가활동 등의 다양한 기능을 하는 등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환경부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갯벌은 농경지와 비교했을 때 3.3배 이상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는 본과 가을 도요새와 물떼새 등 철새들이 통과하는 중요한 지역이다. 이제 방조제 건설로 말미암아 철새 도래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새만금’이란 명칭은 예로부터 김제(金堤) ․ 만경(萬頃) 평야를 ‘금만(金萬)평야’로 일컬어 왔던 ‘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꾸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붙여 만든 신조어다.
2. 김제 벽골제(碧骨堤)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서 신용리에 걸쳐 위치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다. 약3km에 이르는 제방이 현존하며 광범위한 고대 농경역사 및 문화와 토목․건축적 의의가 있다. 벽골제에 대한 연혁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의 기록[시개벽골지(始開碧骨池) 안장일천팔백보(岸長一千八百步), 처음 벽골지를 여니 제방의 길이가 일천팔백보이다)으로 소급된다.
그러나 흘해왕 21년, 즉 서기 330년은 이 지역이 백제 영토로 추정되므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신라본기에 삽입되었다고 보면 축조 시기는 백제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벽골제는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15년(1415)에 중수하였으나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이 제방을 운암제 설치에 따른 김제간선수로로 개조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장(全長) 약 3㎞에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총 5개의 수문을 품은 평지에 구축된 거대산업구조물인 벽골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경사회에서 치수(治水)의 기능을 헤아려야한다. 전통농경사회에서 치수는 식량생산에 절대적 요소로 생존의 문제이자 국가존속의 문제였다. 대규모 수리시설은 국가기간시설이었으며, 왕의 권능은 치수자로서의 기능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벽골제는 제방을 쌓는데만 연인원 32만여 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되며 이밖에 수문 및 하천 공사 등을 헤아릴 때 공사인원은 훨씬 증가한다. 당시 사회규모와 인구수 등을 고려하여 생각한다면 벽골제의 축조 유지 수축공사가 얼마나 거대한 국가단위 사업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3. 돼지형 만석꾼 집터 정구례 고가(鄭求禮 古家)
전북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 214-1번지에는 정구례 고가(鄭求禮 古家)로 널리 알려진 집이 있다. 정구례 사람의 본명은 정준섭(鄭峻燮)인데 구례 군수를 역임했다하여 정구례라 한다. 정구례 할아버지가 돼지꿈을 꾸고 집터를 잡았다하여 돼지형 만석꾼 터라고 하는데 야자형(也字形) 명당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모악산에서부터 내려온 산맥이 이곳에 와서 끝난 평야지의 명당이다.
이 집의 안채 오른쪽 앞에는 커다란 쌀뒤주가 놓여 있다. 1975년에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된 이 쌀뒤주는 고종임금 초인 1864년에 정준섭이 만들어 사용하던 것이다. 정준섭은 조부 때부터 전해 내려온 많은 토지를 소유한 토호(土豪)였다. 따라서 그의 집에는 매일 같이 많은 과객(過客)과 식객(食客)이 찾아왔으며, 그는 이들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이처럼 많은 외부인을 대접하기 위해서는 비축 하고 있는 쌀이 풍부해야만 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지금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초대형의 쌀뒤주를 제작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이 쌀뒤주는 용량이 쌀 70가마니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사방 한 변의 길이가 210cm이고 높이도 역시 210cm이다. 이 뒤주의 재료는 판자인데 그 두께가 3.3cm이다. 뒤주의 문은 앞면 가운데의 폭 68cm의 공간으로서 이 공간에 8개의 판자를 끼워 사용하였다. 지붕은 원래 초가지붕이다.
4. 전주 혁신도시 예정지 (시간이 되면)
전주시 만성동과 완주군 이서면 일대 930만여㎡에 조성되는 혁신도시에는 2012년까지 한국토지공사 · 전기안전공사 · 한국식품연구원 · 지방혁신인력개발원과 농촌진흥청 및 산하 기관인 원예연구소 · 작물과학원 · 농업과학기술원 등 14개 기관이 입주할 계획이다. 그러나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가 LH공사로 통합되면서 경남 진주혁신도시와 유치경쟁이 치열하다.
전주·완주 혁신도시는 전체 면적의 50% 이상을 공원·녹지·친수공간으로 꾸미는 등 친환경적으로 개발한다. 주거용지는 88만여㎡이며, 이 중 70~80%에는 아파트가 들어선다. 초등학교 2개와 중·고교 1개씩이 들어선다. 이들 학교는 학급당 학생수가 15~20인인 OECD 수준의 교육환경을 갖춘다. 혁신도시가 완공되면9667가구에 인구 2만9000여명이 상주하며, 1조9000여억원의 생산 유발효과가 기대된다.
5. 전주 한옥마을과 경기전 (시간이 되면)
전주시 완산구 교동(校洞)·풍남동(豊南洞) 일대 7만 6320평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성곽을 헐고 도로를 뚫은 뒤 일본 상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현재까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처음 전주에 들어오면서 다가동 근처 전주천변에 거주하였다. 당시 전주성 밖에 있으므로 성안과 엄연한 신분차이가 있었다.
1907년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되면서 성곽을 강제 철거하면서 일본인들이 성안으로 진출하여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세력을 확장 상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로 1930년대부터 한국인들이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면서 일본인들과 대립하였다.
문화공간으로는 판소리·춤·타악 등 전통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전주전통문화센터, 막걸리·청주의 제조과정 관람과 시음까지 할 수 있는 전주전통술박물관, 숙박을 하면서 온돌과 대청 마루 등 한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주한옥생활체험관, 전통 공예품을 전시하는 전주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 따위가 있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사적 339),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연회를 열었던 오목대와 이목대,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인 전주 전동성당, 전주향교 등의 문화유적도 있다.
답사지 산맥지도
첫댓글 조용하고 풍류가 흐르는 전통마당의 풍속에 여유로움이 한껏 그리워집니다.^^교수님 ~그날이 기다려지네요~^^
盛夏之節.의 중심인 7월..^^ 우리 한토회 제21회 답사는.. 개발과 보존 현장 어우려지는 멋진 답사가 될 것 같습니다. 정경연 교수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