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六臣의 節介
단종(端宗)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하고 이름만의 상왕(上
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에서 비탄에 잠긴 세월을 보내는 때였다. 당시
의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서 은밀한 중에 계획을 착
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모자(同謨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 )이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대
세가 그른 것을 일찍이 점치고 이 음모를 밀고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서 사전에 발각되어 형을 당한 집현전 학사들이 후세(後世)에 일컫는 사육
신(死六臣)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얘기이다.
세조(世祖)는 이들을 친히 국문하고 온갖 악형과 감언이설로 자기에게 돌
아오기를 권하였으니 끝내 그들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
여 세조와 그를 따르는 인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와는 달리 단종 복위를 위해서 직접적인 가담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
단종을 보필한 사람들을 일컬어 단종 생육신(端宗 生六臣)이라고 한다. 어
린 단종을 보필한다는 미명 아래 왕위를 빼앗은 세조(世祖)에게 국록(國
祿)을 받는 것은 일대치욕(一大恥辱)이라고 생각한 그들 생육신은 김시습
(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성담수(成聃壽),
원호(元昊) 등으로 단종의 신하였던 것을 잊지 않고 두문(杜門)하여 세상
을 등진 채 늙어 죽었다.
여기에는 생육신 이외에 두 사람이 더 소개되어 있다. 즉 권절(權節), 조
상치(曺尙治) 두 사람인데 그들도 생육신에 못지 않은 절신(節臣)이었으므
로 여기 넣어서 생팔신(生八臣)의 얘기를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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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梅月堂 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강릉(江陵) 사람으로 자(子)는 열경(悅卿) 호(號)는 매
월당(梅月堂)이라고 했다. 고고의 소리를 내며 세상에 나오는 시간부터
마치 글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이 천부(天賦)의 글재주를 지니고 있
었다. 세살 때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다섯 살에는 시문(詩文)을 지을 수
있었다 하니 그의 재간이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다섯살 때 통달해서 당시에는 신동(神童)이란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때 집현전 학사의 한 사람이었던 최치운(崔致雲)이 어린 그를 보고 천하
의 기재(奇才)라고 칭찬하면서 지어 준 이름이 시습이라는 이름이다.
이조의 성군인 세종(世宗)은 시습의 소문을 듣고는 어린 그를 승정원(承政
院)으로 불렀다.
세종은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하명하여 시습의 재주를 시험
하게 하였다. 거의 땅에 닿을 정도의 작은 키에 작은 몸매를 본 박이창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네가 시습이라는 애냐?"
"예! 그러하옵니다."
체구에 비해서 또렷하고 낭랑한 목소리에 이창은 다시 한번 어린 시습을
자세히 보았다.
"너는 오늘 황공하옵게도 상감마마께오서 직접 네 재주를 시험하시려고 하
시었으나 사정상 내가 대신 시험하니 그리 알고 잘 듣고 대꾸하여라. 알았
느냐?"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좌중의 모든 사람은 그의 대답에 다시금 놀랬다. 이창은 웃음 띠운 얼굴
로 시습을 향해서 한마디 읊었다.
"童子之學 白鶴舞 靑空之末"
(어린 아이의 배움은 흰 학이 푸른 하늘가를 날아서 춤추는 듯하다.)
눈을 반짝이며 박이창의 첫 마디를 듣던 시습의 댓귀(對句)는
"聖主之德 黃龍飜 碧空之中"
(어진 임금의 은총은 누른 용이 푸른 하늘 한가운데서 번득임과 같도다.)
시습의 화답이 너무나 엄청나서 박이창은 몰론 거기 앉아 있던 모든 사람
은 놀라고 과연 들은 대로 신동이라고 칭송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박이창은 눈만 반짝이고 앉아 있는 시습을 얼른 안아 무릎에 앉혔다. 몇
번이나 시(詩)로서 어린 시습을 시험했으나 회수가 거듭될수록 그의 글재
주에는 아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은 이창의 보고를 듣고 곧 시습을 내전에 들도록 하라고 분부하였다.
아직도 어머니 품에서 젖이나 빨게 생긴 어린애였으므로 세종은
"시습이가 바로 너냐? 가까이 오너라."
"예!"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조용히 상감 앞으로 가까이 나
갔다.
"많은 글을 배워서 성취하면 장래에 과인이 좋은 인재로 쓰리라. 알겠느
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종의 용안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시습의 천재에 감탄한 세종은 그에게
상으로 비단 오십필을 하사하면서
"비단을 하사하겠으니 네가 직접 가지고 가거라."
하였다.
시습은 머리를 조아린 채 곰곰 생각하는 것같더니 비단 필을 모두 풀어 끝
과 끝을 서로 이었다. 이렇게 오십필을 이어가더니 상감께 공손히 하례(賀
禮)를 하고는 비단 한 끝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때 아닌 비단 사태
(沙汰)가 대궐 문 밖까지 펼쳐져서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어쩌면 저리도 어린 것이 머리를 씀이 기발한가?"
이 소문이 퍼져 하루 사이에 온 장안이 어린 김시습은 신동인 게 분명하다
는 얘기가 자자하게 되었다.
시습의 나이 열세살이 되었을 때는 당시의 대석학(大碩學)인 김반(金泮),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구하고 있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文宗)이 병약하여 계속해서 승하하니 뒤를 이어 나
이 열두살에 왕위에 오른 것이 단종이었다. 시습은 그때 스물 한살의 청년
으로 삼각산(三角山)으로 들어가서 독서를 일삼고 있었다. 어린 단종의
자리를 탐낸 수양대군이 마침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
가자 그는 땅을 치며 무심한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성군이신 세종이 승하하고 인자하신 문종이 잇달아 승하셨다. 그런데 대
도(大道)가 아닌 왕위 찬탈이 웬말이냐? 이런 나라 꼬락서니 속에서 글을
배워 어디다 쓰고 시는 지어 무엇하겠느냐?'
그는 신변에 있던 서적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주저함이란 없었다. 정도
(正道)를 살아가려고 배운 글이므로 정도가 무너진 세상에서는 소용이 없
어진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는 스스로 승호
(僧號)를 설잠(雪岑), 청한자(淸寒子), 췌세옹(贅世翁) 등으로 불렀다.
남달리 작은 키에 몸매도 작아 어디 한 군데도 위엄이 있어 보이는 데라고
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무섭지 않고 두렵지가 않았다. 뛰어나게
영민한 두뇌에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곧아서 누구도 용납이 안 되었다.
지나치게 영민한 그의 머리는 화도 되었다.
삭발한 머리로 어느 한 절간에서만 수양을 하지 않고 온나라 산천을 메주
밟듯 쏘다녔다.
혹시 어느 사람이 그에게 학문을 구하려고 하면 마치 미친 사람 모양 돌을
던지고 활을 쏘면서 고함을 쳤다.
"이런 세상에서 학문은 닦아서 무얼 하느냐? 논밭이나 갈아서 배나 부르게
살면 된다. 그것이 제일이다."
일리가 있는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그의 언행을 이상히 보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어쩌다가 벼슬아치들이 그의 눈에 띄게 되면 또 시비감이었다.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 너희 놈들은 백성만 들들 볶아 대느냐?"
말을 마치고는 대성통곡(大聲痛哭)하니 당시의 벼슬아치들도 그를 미친 사
람으로 대접하고 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달밝은 고요한 밤이면 냇가에 나가 앉아 글을 쓸 백지가 넉넉히 있
을 리 없으므로 종이 한 장을 잘게 썰어 놓고는 시를 읊으며 붓을 들어 작
은 글씨로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종이가 까매 없어질 때까지 계속하곤
했다. 이미 붓을 버리고 시를 아니 짓기로 맹서한 그였지만 섬광처럼 지나
가는 시심(詩心)을 그냥 두기에는 안타까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손재주도 남달리 뛰어났다. 벼슬아치들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그는 자
연히 순박하게 땅을 파고 세상을 살아가는 농부를 좋아해서 그들의 모습을
나무로 다듬어 만들었다. 이렇게 형형색색의 농부 인형들을 늘어 놓고 하
루 종일 보고만 앉아 있다가 끝내는 시를 적은 종이 조각과 함께 나무인형
을 불살라 버리고 한숨을 몰아쉬며 울분을 삭였다.
목청이 남달리 좋은 그는 달밤을 즐겨하였다. 고요한 산중은 정적 뿐 아무
도 없고 오직 달만이 벗이었다. 그러면 그는 그의 낭랑하고도 우렁찬 음성
으로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노
라면 너무나 지금의 자기하고 닮은 굴원의 심중을 절절이 알 수 있었다.
세상이 모두 탁하고 더러운데 유독 혼자만 깨끗하려니 미친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시습은 세종이 내전으로 불러서 하던 옥음이 아직도 귀에 울리는 것 같았
다.
"글을 성취하면 훗날 크게 쓰리라."
하던 음성이다.
그는 묵묵히 무릎을 꿇었다. 세상 인심은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옷깃이 젖어와도 그는 영릉(英陵=세종대왕의 묘소)을
멀리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씻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당시의 현관(顯官)인 서거정(徐居正)을 시중에서 만났다. 그의 신
랄한 입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다 떨어진 옷에 허리를 새끼로
두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강중(剛中)은 그동안 살아 있었소? 불의(不義)의 부귀란 부운(浮雲)과 같
은 것! 그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다니 답답하구료."
서거정은 언제나 시습을 국사(國士)로 존중할 줄 아는 너그러운 인품을 지
닌 사람이었으므로 그저 묵묵부답(默默不答)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고 듣고
만 있었다. 이러한 얘기들이 세조의 귀에 아니 들어갈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세조는 내전에서 열리는 법회(法會)에 시습을 불렀다.
임금의 명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 신하 된 몸이다. 직접 벼슬에 참
례하지는 않았어도 만 백성은 임금의 신하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싫어하면서도 법회에 참례할 수밖에 없었다. 법회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더 앉아 있기가 이제는 진정으로 지루하고 먼동이 터오자 몸이 비틀리는
듯 했다.
아까부터 빠져 나갈 구멍만 찾고 있던 시습은 모두들 밤을 세운 새벽이라
피곤하여 눈이 몽롱해져 있음을 틈타서 슬그머니 일어서서는 쏜살같이 뛰
어나갔다. 어느 누가 감히 상감이 친히 연 법회 자리를 도중에서 뛰어 나
갈 수 있단 말인가? 모두들 정신이 번쩍 들고 아연해져서 곧 세조에게 품
하자 상감은 진노해서 곧 잡아들이라고 추상 같은 하명을 내렸다. 사령(使
令)은 뒤쫓아 나갔다.
그러나 쫓아가던 사령은 기가 막혔다. 똥과 오줌과 가진 오물(汚物)이 범
벅이 되어 있는 구덩이 속에 으젓이 얼굴만 내어 놓고 있지 않은가? 마구
휘저어 놓아서 냄새는 천지를 진동했다. 사령은 고함을 쳤다.
"어서 나오지 못하겠는가?"
"안 나가겠다. 어서 데려가고 싶으면 이리로 들어와서 안고 나가거라 하
하...."
시습은 가가대소를 하며 사령을 골려 주고 있었다.
"고얀놈! 감히 누구의 명령이라고 네가 어기느냐?"
"이 똥만도 못한 더러운 앞잡이 놈아! 똥과 오줌이 무서워서 앞에도 못 오
느냐?"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사령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별 미친 놈 다 보겠군!"
하고 투덜거리면서 돌아가 버렸다.
그야말로 욕해도 통하질 않고 미친 척하니 속수무책(束手無策)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살다가 나이 마흔일곱이 되는 해에 무슨 생각에선지 머리를
기르고 부인을 맞아 들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이제야 자기 정신으로 돌아간 줄 알고 이제는 세조에
나가 벼슬도 하고 부인과 부귀도 함께 누리라고 제가끔 그에게 권해 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생활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이대로 초
토에 묻혀 사는 것이 훨씬 좋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는 또 죄없고 명리(名利)를 모르는 순진한 애들과 놀기를 즐겨했다. 하
루는 거리에서 애들과 놀고 있는데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이 그
앞을 지나갔다. 그의 험구(險口)가 또 시작되었다.
"여봐라! 정창손아!"
당대의 세도가인 정창손을 함부로 이름을 불러대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상감도 영의정이나 기타 대감(大監) 청호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대를 못
하는 법이었다. 오로지 시습만 할 수 있는 행동과 언행이었다. 시종들도
정창손도 발을 멈추었다. 이 꼴을 보던 사람들도 가슴을 떨며 그 귀추를
겁 반 호기심 반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욕을
해대었다.
"정창손아! 네놈이 영의정 자리에 올라 섰구나. 그래 그 자리가 그다지도
연연하더냐? 십년세도가 없다는 진리를 모르고 살지는 않을 텐데... 지금
이라도 늦지는 않다.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깨끗이 물러서거라! 어떠하
냐? 내 말이... "
미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정창손은 탓하지도 않
고 초헌( 軒)을 재촉해서 자리를 피했다.
시습은 그 뒷모양에다 대고 가가대소를 퍼부었다. 필시 후환(後患)이 무
서울 거라고 거기 모여선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했다.
시습의 언행이 이렇게 두려운 것이 없이 거칠었기 때문에 그와 친분이 있
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와 가깝게 지내면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지목당하고 자기 몸에 화가 미칠 듯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종실 중의 한 사람인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을 비롯하여
남효온(南孝溫), 안응세(安應世), 홍유손(洪裕孫) 등은 여전히 그를 비호
하고 친교를 끊지 않았다.
세상사란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줍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진리이다. 그들
은 시습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 수있었다. 그리고 천재는 기인(奇人)이라
고 하는 말은 곧 이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 어린 상
감이 왕위에 있는 것을 기화로 대군의 신분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미
워하는 그의 기백이 가상하기도 해서 그들은 시습을 높이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부인 복도 못 타고난 모양인지 시습은 늦게나마 얻은 부인
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흔연했다. 별로 크게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세상
과 벗하고 살 팔자가 못 된다고 일찍이 체념을 하였기 때문일까?
그는 다시 머리를 깎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전처럼 강릉, 양양간을 왕래
하면서 산천과 더불어 살아갔다. 그때에 양양 원으로 있던 유자한(柳自漢)
은 그를 대할 때마다 특별한 예로서 대했다. 그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유자한은 항상 자기를 찾는 그에게 극진한 예로서 충고를 잊지 않았다.
"다시 가업을 이으시고 안온한 생활을 하십시오."
"아니요. 세상 꼴이 하두 뒤승숭하니 산이나 물이나 벗하고 사는 편이 훨
씬 마음에 편안하오."
시습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것이었다.
시습은 탁월한 손재간으로 산에서 나무를 잘라 잘 다듬어서 자화상(自畵
像)을 두 가지로 만들었다. 하나는 젊었을 때의 자기의 얼굴이요, 또 하
나는 늙었은 자기였다. 그는 한적할 때면 두 화상을 꺼내 놓고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네 얼굴이 지극히 못났고 네 말이 망언(妄言)으로만 일관하니 이렇게 초
토에 묻혀서 고생함이 마땅하다."
이 말이야 말로 자신을 한탄해 마지 않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일찍이
세 살에 글을 이해하고 다섯 살에 중용, 대학을 통독하여 작시를 일삼은
천재도 이군(二君)을 섬길 수 없는 지조로 인해 초토 속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으니 후세에 뜻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배울 점과 아울러 생각할 점을
남기고 있다.
그는 쉰아홉 천명(天命)을 다하는 날까지 산천을 소요하면서 지냈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가 가진 천부의 재간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
다. 그러나 그를 모르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미친놈>이
라고 가벼이 부르며 천대했다.
그가 나이 쉰아홉에 세상을 뜬 후 숙종(肅宗)조에 와서 그에게 집의(執義)
의 벼슬을 내렸다가 다시 정조(正祖) 때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내리고
청간공(淸簡公)이라는 시호까지 하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자손이 없었으므로 홍산(鴻山)에 있는 무량사(無量寺) 곁
에 빈소(殯所)가 마련되고 삼년을 지냈다. 삼년의 춘풍 추우가 지난 후에
그를 장사지내려 개관(開棺)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시습의 시체는 살아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절에 있
던 중들은 혀를 내두르며 모두들 탄성을 올렸다.
"과연 부처님이 되신 게 틀림없다."
그들은 시습이 생전에 있을 때도 안하던 일을 서슴지 않고 했다. 합장을
하고 그를 가리켜 <부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그
들은 제가끔 고개를 숙이며 염불을 했다.
그들은 두렵기까지 했다. 시습이 생존했을 때 미친놈 취급을 하던 자기들
스스로가 큰 죄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2. 生六臣의 節介 - 秋江 南孝溫
남효온(南孝溫)은 의령(宜寧) 사람으로 호(號)를 추강(秋江)이라고도 하고
행우(杏雨)라고도 불렀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글 보기를 좋아하고 글 짓
기를 천적인 양 글 속에 묻혀서 지냈다.
일찍이 대학자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닦고 인격을 기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가는 제자의 학문에 김종직도
항상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효온을 대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추강! 우리 추강!"
하면서 그를 경칭(敬稱)해 마지 않았다.
당시 석학으로 유명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시습(金時習),
안응세(安應世) 같은 대선배들도 효온을 형제와 같이 애지중지 아끼고 사
랑했다.
성종(成宗)시대, 그의 나이 이십칠세 때였다. 그는 임금께 소릉(昭陵=문
종의 왕후의 능)을 복구(復舊)시켜 달라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상소문이 무시당한 것을 알게 되자 이때부터 세상을
등지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명승지와 명산을 벗삼고 세월을 보내자는 심산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풀길
없는 생활이 계속 진행되었다.
"높은 산에나 올라가자! 그리고 마음껏 이 마음을 달래어 보자! 그래도 시
원치 않으면 소리를 높여 통곡이나 해보자!"
얼마 후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 부중(府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조정의 일이나 부중의 일이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참고 있을 수가 없도록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리고 귀를 시끄럽게 했다.
그가 사건 하나 하나를 예리하게 비평하며 비난을 일삼자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함부로 해도 괜찮단 말인가?"
하고 마치 자기 일 모양 걱정을 해 주었다.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김굉필, 정여창은 항상 그의 말을 위험하게 느껴
서 충언을 잊지 않았다.
"여보게 추강! 옛부터 입은 화의 문이라고 해왔네. 제발 아무리 비위에 안
맞는 일이 있어도 참고 함부로 떠들지 말게."
그러나 그의 귀는 선배들의 충언이 들리지를 않는 듯 여전히 위언(危言)과
격론(激論)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대했다.
어느날 매월당 김시습은 효온을 찾았다.
"여보게 추강!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부귀를 등지고 백면서생을 일삼으려 하
나?"
"형은 왜 그렇게 석학의 머리를 썩히고만 있소?"
효온의 재빠른 반문에 시습은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야 일찍이 세종대왕의 지우(知遇)를 얻어 성은에 보답하려고 학문을 닦
았으나... 그대는 무엇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느냐 말일세!"
"모르시는 말씀이요. 매월당은 소릉사(小陵事)를 천지의 변으로 아시우?
그렇지 않으면... 나는 소릉이 복구되지 않는 한 부귀도 영화도 안중에 없
소이다."
"과연 추강의 말이 옳소. 나 역시 오늘날의 고생이 낙으로만 여겨지는 터
이니."
과연 열사의 기풍이 역연했다. 세상꼴이 보기 싫으면 효온은 표연히 산
속으로 들어가 가슴을 달랜 후에 다시 부중으로 들어오곤 했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는 도중 그는 문득 [사육신]의 유지(遺志)를 후세의 사람들
에게 전해서 충의의 본보기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드디어 만난을 무릅쓰고 이들 학자들의 충성심을 청사에 남기기로 결
심하고 붓을 들었다. 성삼문 등의 갸륵한 얘기들 즉, [사육신전]을 기록
하려는 결의였다. 효온의 아들이며 부인은 걱정이 되어 말렸으나 누구도
그의 뜻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이었다. 사랑에서 붓을 들고 목숨과 바꾸는 대사업에 착수하고 있
는 효온은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선생님! 그 일만은 제발 고만두십시오!"
[사육신전]이라는 말까지도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은 [그일]이
라는 말로 대신하였다. 그러나 효온은 시치미를 딱 떼었다.
"아니! '그일'이라니, 무슨 소리냐?"
"아니올시다. 지금 집필중에 있으신 것 말씀입니다."
"너희들 하고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서들 물러가거라."
"선생님!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선생님 신변을 염려해서 드리는 말씀입니
다. 제발 삼가주십시오."
"듣기도 싫다. 너희들은 학문이란 무엇 때문에 연마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
르고 있는 위인들이다."
"그러나 군자는 위험한 곳에 가깝게 가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지금 이런
세상에서는 근신하는 길만이 잘하는 거라고 저희들은 생각됩니다."
"그러면 너희들 잘 들어라. 모두들 글을 쓸만한 문인(文人)들이 조정의 행
패가 두려워 현인들의 충의를 기록해서 남기지 못한다면 길이길이 한이 될
것이 아닌가?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세상이 하두 뒤숭숭해서 말씀을 여쭙는 것입
니다."
"자네들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나도 아니지만 현세에 내가 아니 쓰면 감
히 이 대사업을 해낼 용기 있는 학자가 없을 걸세. 그러니 나는 목숨을 바
쳐서라도 이 [사육신전]만은 완성해서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하도
록 하겠네."
그의 뜻이 너무나 거룩하고 간절하였으므로 그 다음 말을 누구도 잇지를
못하고 숙연히 앉아만 있었다.
붓을 다시 잡은 그는 문장의 진행과 더불어 같이 울고 같이 한숨지으며 끝
내 힘찬 기백으로 [사육신전]을 탈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남효온이 없
었던들 아무도 사육신의 원통한 혼을 위로할 사람이 없었고, 사육신의 충
성스런 면모를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울적해서 한잔, 세상꼴이 답답하다고 한잔,
위언격론을 일삼기 위해서 한잔, 거의 사시 장취(長醉) 속에서 지냈다. 언
제나 취중에서 사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그래서 효온의 어머니는 기어코 그에게 충고를 하기로 결심하고 어느날 그
를 불러 앉혔다.
"아들아! 술은 과하면 광약(狂藥)이 되는 법. 네가 그것을 모르고 마시는
건 아니겠지만 어미 마음이 너무나 답답만 하구나."
그의 몽롱한 정신에서도 어머니의 이 말은 귓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예. 소자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취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는 못 사
는 자식이오니 어머님께서는 양해하시고 너무 허물하지 마십시오."
"아니다. 네 어미가 너를 허물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 몸을 위해
서나 집안을 위해서나 아주 술을 입에다 대지 않고 지내도록 힘써다오."
어머니의 눈이 빛나고 있음은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로 얼마 더 사시지도 못하실 어머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는 싶지
않았다. 그는 단주(斷酒)를 순간적으로 결심하고 머리를 들고 어머니 앞
에서 맹서를 했다.
"어머님!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단연코 오늘부터
술을 끊어 어머님 말씀에 부응(副應)하겠사오니 소자를 용서하시고 걱정을
놓으십시오."
어머니는 기뻤다. 그러면서도 잘난 아들이 세상을 잘못 만나 괴로워하며
술로 잊어버리려는 것을 슬퍼하였다...
그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술을 한 모금도 안마시고 지주부(止酒賦)라는 글
을 지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모든 세상사를 잊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은
술의 힘을 빌리는 일이었으나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단음(斷飮)하고 지켜 나갔다. 그는 울적할 때는 더욱 학문을 닦았고 글을
썼다.
세조 치하에서는 과거를 아니 하려고 결심한 그였지만 울적한 마음의 분출
구는 글과 벗하는 것뿐이었다.
세상을 탄하면서 글 속에서만 묻혀 사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는 그 일도 답
답하게 보였다.
"얘야, 넌 학문만 닦아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 남과 같이 과거도 해서 세
상에 그 재주를 알려야지. 그대로 머리 속에만 쌓아 두어서는 소용이 없
지 않으냐?"
어머니 걱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늙은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저려온 그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
는 생각했다.
'옳지! 장원급제를 해서 어머니를 또 한 번 기쁘게 해드리자. 그러나 벼
슬은 하지 말자.'
"그럼 이번에 진사과거(進士科擧)를 응시하겠습니다. 어머님의 소원이시
라면..."
"오냐! 과연 효자로다. 그렇듯 싫어하면서도 이 에미를 위해서 과거에 응
하겠다니... 과연 내 아들이다."
어머니의 기쁨은 상상 외로 컸다.
그는 약속대로 과거에 응시하였고 무난히 급제할 수가 있었다. 온 집안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이 컸고 그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그의 제자들도
이제는 선생님이 정신을 차리시고 출세를 꿈꾸시나보다고 자기 일처럼 기
뻐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누가 권해도 그는 결코 벼슬은
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도 효성스런 아들이었지만 벼슬하기를 권하는 어
머니의 말은 한사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양
해를 구했다.
"어머니,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 드린바와 같이
소자는 절대적으로 이 세조치하에서만은 국녹을 아니 받겠습니다. 누가 뭐
래도 이 소자의 결심은 동요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너 혼자만 버티어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 신숙주 같으신 대학자님
도 지금의 상감을 받들어 많은 일들을 해 오시고 있다는데..."
"그런 역적의 얘기는 어머님 입에 올리지도 마십시오. 어머님 입이 더러
워질까 소자 저으기 걱정이 됩니다."
"아니다. 세상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너 혼자만 유독 그렇게 곧은 척해보
아야 세상이 알아 주는 법이 아닌데. 네 생각이 이 에미로선 여간 답답하
고 안타까운 게 아니구나?"
"어머님! 어떤 말씀으로 저를 나무라시고 권하셔도 그 결심만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불효막심한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말을 마치고 두 모자는 함께 울음을 삼켰다. 아들은 아들대로 어머니는 어
머니대로의 슬픔을 동시에 터뜨린 것이다.
그는 길지 않은 생애를 마쳤다. 천수가 삼십구세였다니 너무나 그의 글이
아깝고 또 충성이 아깝다.
세월이 흘러 이조 정조(正祖) 갑진(甲辰)에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란 높은
벼슬로 고인의 충혼의백(忠魂義魄)을 위로하고 시호를 문정공(文貞公)이라
고 내렸다.
3. 生六臣의 節介 -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이맹전(李孟專)은 벽진(璧珍) 사람으로 호(號)를 경은(耕隱)이라 일컬었
다.
세종(世宗) 정미(丁未)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출세하였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상왕초(上王初)에 지방관으로 내려가
거창 현감으로 있었다.
청백리(淸白吏)로서 그 이름이 청사에 빛나는 너무나 유명한 그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소문이 자자한 세조의 횡포를 귀 가지고 들을 수없고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감연히 벼슬자리를 내 놓기로 결심했다.
벼슬을 사는 동안에도 청백리로 이름이 떨쳤으므로 현감을 내놓고 선산(善
山)으로 물러나온 후의 생활은 이루 형용하기 난감할 정도였다.
세조는 그의 뛰어난 문장을 아깝게 여겨 사람을 시켜 몇 번이나 재고를 권
고해 왔다. 그러나 그는 굳이 고집하고 응하지를 않았다. 삼십여년 두문
불출(杜門不出) 사랑방만 지키고 산 그는 단 한 번도 북향(北向)해서 자리
를 앉은 일이 없기로도 유명했다.
당시의 선비가 벼슬을 아니 하면 궁색하기란 불을 보는 것과 같이 환한 얘
기였다. 날이 갈수록 집안 살림이 궁핍하다 못해 끼니가 간데 없이 되고
방은 뚫어지다 못해 흙이 꾸역꾸역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막을
만한 자리하나 마련할 형편이 못되었고 어쩌다 지어낸 밥상에는 똑똑한 수
저 한 벌이 없었다.
진정 적빈(赤貧)이란 씻은 듯하다더니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이 틀림없었
다.
그는 항시 세상을 귀찮게 여기고 그를 긴히 만나고자 찾는 사람도 만나기
를 꺼려 하였다. 그의 자제들은 이 일을 걱정하다 못해 가장인 맹전에게
물었다.
"왜 모처럼 찾아오는 친지들도 아니 만나시고 사절하십니까?"
"그런 것은 너희들이 걱정할 문제가 못된다. 나는 몸이 불편해서 수양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이다."
밥도 제대로 못 끓이는 이 집 형편에 약을 구할 도리가 없으므로 그의 부
인이나 자제들은 근심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 사람을 늘 사절하는 그였지만 매달 초하룻날이 되면 새벽같이
자리를 걷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동천에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재배
삼배를 공손히 마쳤다. 그의 이런 행동은 식구들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
기에 넉넉했다. 궁금한 식구들은 그에게 또 물었다.
"매월 초하룻날이면 동천을 향해서 해에다 배례를 하시니 그건 무슨 뜻입
니까?"
"너희들은 몰라도 좋으니라. 그저 내 몸에 병이 들어서 하느님께 완쾌를
기도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하늘에 기도를 하시지 왜 동배(東拜)를 하
시는지 참말로 이상하군요?"
"그런 것은 모두 몰라도 좋은 일. 아예 걱정들은 할 필요가 없느니라."
맹전의 대답이 이러하니 가인(家人)들도 더 이상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 김종직(金宗直)이 맹전을 찾아왔다. 맹전이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두
문불출을 일삼는다는 얘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는 것이 옳은 일인지
주저되었지만 위문도 할겸 만나자는 청을 들여보냈다.
가인이 이 말을 맹전에게 전하자 그는 거의 뛰다시피 나가서 종직의 손을
마주잡고 맞아들였다. 집안 모든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납득이 가지 않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김종직은 들은바와 달라 그의 병이 완쾌되었나 싶
어 물어보었다.
"선생의 병환이 좀 쾌복(快復)되신 것 같사온대 어떠십니까?"
"병이 하룻동안에 완쾌될 리야 있겠습니까? 하오나 선생과 같은 대인군자
를 만나 뵙고 흉금을 털어 놓고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오늘 얻은 것 같아
서 이렇게 기운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야 김종직도 그의 흉중을 살필 수 있는 것 같아 흐뭇했다.
"이선생, 그 심중과 뜻을 얼마쯤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더욱 서로 자중자애(自重自愛)하여 세상을 큰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나가십
시다."
"예! 김선생도 부디 오래오래 사셔서 나라가 되어가는 꼴을 지켜보십시
오."
그들은 이와같이 뜻 깊은 약속을 교환하고 재회를 얘기하며 헤어졌다.
김종직은 그제서야 맹전의 병은 신체의 병이 아님을 깨닫고 은근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맹전의 부인이 들어왔다.
"영감, 이러다간 모두들 굶어 죽겠소이다. 어떻게 조치를 하셔야 되지 않
겠습니까?"
"글쎄, 난들 어떻게 하오?"
"그러니 걱정입니다. 애들까지도 영감 때문에 길이 꽉 막혀버려서 과거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땅 한뙤기 없으니 농사를 짓는다고도 할 수 없고...
기가 막히기가 이를데 없군요."
"그럼 당신을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 얘기요? 얘기나 시원히 해보시구
료."
"생각컨대 그전까지는 몸에 병환이 심하셔서 그런 줄만 알고 약을 대접 못
하는게 죄스럽더니 이제는 그렇지도 않으신 것 같고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
다."
"아니 그렇지 않다니, 내 병이 그럼 하루 아침에 이슬 사라지듯 사라졌단
말이요? 무슨 말이요?"
"그게 아니라 김종직 선생이 오시던 날은 몇 시간이나 일어나 앉으셔서 아
무 병환도 없으신 것같이 오랜 시간 얘기도 나누시고 얼굴빛도 참으로 좋
으시던데요."
"그야 지지지우를 만나니 어찌 반갑지 아니했겠소."
"그러시겠지만 옆에서 뵙기에도 조금도 병환이 있으신 분 같지도 않더군
요."
"그렇게 알면 되지 않소."
"그러지 않아도 한 걱정 덜어서 요사이는 집안이 한결 명랑해진 듯해서 드
리는 말씀이예요."
"아뭏든 잘 된 일이요."
"여보, 영감! 제발 못 이기는 척하시고 조정에 좀 참례해 보시구료. 이렇
게 더 가다간 영감은 물론 식구들 전부가 굶어 죽기 알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
지 않소. 그 더러운 나라 안에 들어가 국록을 받아먹고 생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어 없어지는 게 얼마나 장한 일이라는 걸 언제나 나
는 주장하고 있으니 다시는 내게 그런 말로 괴롭히지 마시오."
부인은 어지간히 답답했다. 진정으로 모진 목숨을 억지로 끊을 수도 없고
살아 나가자니 조석으로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하므로 절로 한숨이 나왔
다. 남편의 청백한 성격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부인은 더 권해 보아
야 영감만을 괴롭히고 아무 소득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집안에 재산이 있어서 생활을 걱정하지 않고 지내는 터라도 이렇게 벼슬을
고사(固事)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조반석죽도 못 이어가는 이러한 처지에
벼슬을 사양하는 것은 그가 아니면 감히 아무도 흉내도 못낼 일이었다.
상인(商人)이 아닌 양반의 자제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고 벼슬을 못하여 생
기는 궁상이란 지금의 우리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비참한 일이었다. 혹
뜻있는 사람이 있어 그를 동정하여 얼만큼은 보태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사시사철을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또 나라
와 등지고 공공연히 임금을 반대하는 역적과 비슷한 이들 선비와 식구들을
도와줄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는 구십을 살았다고 한다. 그 동안에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은 가히 짐작
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그가 세상을 뜬 후 정조(正祖) 신축(辛丑)에 이조판서(吏曺判書)의 벼슬을
증(贈)하고 동시에 정간공(靖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한결같은 충혼
(忠魂)을 위로하였다.
4. 生六臣의 節介 - 어계(漁溪) 조려(趙旅)
조려(趙旅)는 함안(咸安) 사람으로 호(號)를 어계(漁溪)라 했다.
단종 계유(癸酉)에 진사문과에 무난히 등제(登第)하여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의 문장은 탁월해서 사림(士林)으로부터 많은 신망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려는 돌연히 유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무슨 일인
가 의아한 눈으로 보는 동문들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을해(乙亥)년 들어서부터는 대과에도 참가하지
않고 두문불출을하고 지냈다.
을해년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바로 그해다. 조려는 수양
대군 곧 세조의 신하가 되기 싫었고 그의 정도(正道)가 아닌 찬탈이 밉기
그지 없었다. 어린 왕을 보필해서 선정을 해야 하거늘 어린 상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많은 충신을 죽이고 일가를 몰살하는 그 야망이 미웠다. 그의
시문(詩文)에는 항상 고사리를 채식(採食)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어
하는 뜻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대도가 짖밟히는 세상꼴이며 나라 사직이 근심되었다.
이런 면에서 조려는 김시습과 뜻을 같이 했고 서로의 학문을 존경했다.
그 무렵 상왕이던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산골 영월
(寧越)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청량포(淸凉浦) 근처에 자리잡은 노산군의 우거(寓居)를 가려면 나룻배가
그 강을 건너다주어야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억울한 노산군을 찾을 충신들과 뜻있는 사람들의 왕래
를 막기 위해 교통을 두절시켰다. 따라서 청량포에 있는 모든 나룻배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도록 엄명이 전달되어 있었다.
조려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초옥에서 글만 읽고 지냈으나 어린 상감의 생각
이 떠날 때가 없었다. 멀리 상감이 계신 곳은 오백리나 상거한 곳이다.
지금은 무얼 하시고 계실지, 중전까지 헤어지시고 홀로 산골 두메에서 무
엇을 잡숫고 어떠한 지경에 놓여 계신지가 자못 궁금하고 염려 스러웠다.
그렇게도 총명하신 중전께서는 또 얼마나 지아비를 생이별한 슬픔을 안고
지내시는지 모두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상감이 계신 곳
에 가서 한 번 뵙고 싶었다.
그러나 왕래를 끊고 배를 금지했다니 그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여간
그는 아침 일찍 단종이 있는 강원도 영월 땅으로 향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백리 길이니 하루에 칠, 팔십리씩 걸어가도 칠일은 걸린다. 직접 용안
을 못 뵈어도 상관없고 그저 옥체가 만강하신 것만 듣고 오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 이튿날 새벽녘에 일어나 길을 떠났다.
첫날은 거의 백리길을 걸을 수 있었으나 다음날은 조금 피로했으므로 걸음
이 느려지고 그 다음날, 또 다음날은 점점 걷는 거리가 짧아졌다. 그러나
상감의 옥체를 염려하는 그의 마음은 몸의 피로를 잊을 수 있게 하였다.
일주일안에 그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몸은 정말 솜같이 피로해 있었다.
그는 멀리 상감의 동헌이 바라보이는 청량포 앞에 와 닿았다. 바로 강 건
너 있을 상감의 용안을 우러러뵙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마냥 흘렀
다.
"상감마마! 소신 조여가 멀리 용안을 우러러 뵈오려 오백리 길을 멀다 않
고 왔사옵니다. 굽어 살피옵소서."
그는 상감이 계실 동헌을 향해 마치 앞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
면서 국궁배례를 하였다. 그리고 곧 근처에 있는 친구인 원관란(元觀瀾)의
집을 찾았다. 원관란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상감의 근황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유관란은 놀라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면서 조여를 반겼다.
"이것이 웬일이시오? 오백여리 먼 길을... 과연 그 충심이 하늘에 닿겠
소이다."
"무슨 말씀을. 자나 깨나 귀양 오신 상감 옥체만이 나의 관심의 전부인 것
을... 수일 폐를 끼치게 될 것이 걱정이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푹 쉬시고 몸이 다풀리신 다음에 떠나시도록 하십
시오."
"고맙소이다. 항상 친구같이 좋은 것은 없는가 여겨집니다. 그건 그렇거니
와 상감께서는 옥체만강하옵신지 궁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예, 바로 상감께서 유합시는 근처에 사는 촌부를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늘 동안에 홀로 나가 앉아 계신답니다. 예전대로 곤룡
포를 입으시고 으젓이 앉아 계신 용안을 뵈올 때마다 그 고을 모든 사람이
눈물로 옷깃을 적신다 하더군요."
"오호! 과연 상감마마는 위풍당당하시군요. 어떻게 하면 한 번 가뵐 수
있을지..."
그는 혼자서 상감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잡숫고 지내시는 일을 어떠 하시온지 알고 계십니까?"
"예, 그 얘기도 촌부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근처에서 잡히는 좋은 생선은
모조리 제일 먼저 상감께 진상하는 사람이 많이 있고 또 수라를 받드는 하
인도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하늘의 비호입니다. 제발 성수무강하시어서 다시 햇빛을 보시고 억
울함을 씻으실 날이 있어야 하겠는데..."
두 사람은 한숨만 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밤마다 어두어진 청량포 강가에 나와 앉아 건너편에 보이는 상감의
동헌을 향해 만수무강을 빌고는 큰 소리로 성수만세(聖壽萬歲)를 호창(呼
唱)하였다.
그저 오래 오래 살아주어야만 일이 다 성취될 듯 싶은 마음이 이런 행동을
낳게 한 것이었다.
며칠을 유숙하고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날부
터 그는 또 상감의 소식이 알고 싶어졌다. 솜같이 피곤해진 몸을 쉴 말미
도 아니 주고 그는 다시 영월로 떠났다.
이렇게 그는 영월과 고향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한달에도 날짜가 허락하는
한 상감 곁 영월 땅에서 살기를 즐겨했다.
세월은 흘러 상감이 영월로 정배를 가고 삼년째 되는 정축년(丁丑年) 정월
초열흘. 바로 하늘도 땅도 같이 호곡해 마지 않은 단종의 마지막 날이었
다. 조려는 마침 고향에 와 있었다. 영월을 등지고 온지 열흘도 채 안 된
날이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메어지듯 아파 오는 것을 가눌 길이 없었다. 땅을 쳐도 보았
다. 가슴을 쥐어뜯어도 보았다. 그러나 원통함은 풀리지 않았고 이제는
이미 가신 님에게 대한 단심만이 영월 땅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는 곧 길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상감의 눈감으신 용안이라도 뵙고 쓸쓸
한 정배지에서 상감의 옥체나마 수렴하고 싶어서였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발길을 재촉하여 청량포 강가에 이르렀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배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강을 건너야만 단종의 빈소
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는 우왕좌왕 어쩔 바를 몰랐다. 하늘을 우러러도 보았다.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두 뺨을 적시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며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
다. 얼마를 통곡하다 자기 정신으로 돌아간 그는 결심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 지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강을 건너가자.'
그는 훌훌 의관(衣冠)을 벗어 꽁꽁 묶어 등에 짊어졌다. 그냥 알몸으로 강
을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막 한 발을 강 속에 집어 넣으려는 순간 무엇인
가 뒤에서 잡아 당기는 것이 있었다. 그가 깜짝 놀래 멈칫하자 뒤에서 짊
어진 옷을 또 한 번 잡아 당겼다. 머리칼이 하늘로 솟았다. 그는 반사적
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그는 "흑!" 하고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옷을 잡아당긴 장본인은 사람도 아니고 더욱 귀신도 아니었다. 그것
은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빛나는 대호(大虎)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마음을 도사렸다. 무서운 생각을 누르고 산중의 왕
인 호랑이에게 자기의 마음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는 목소리를 굳건히
가다듬었다.
"네 이놈, 범아! 내 옷을 왜 잡아당기느냐? 나는 불원천리 영월적소에서
한을 품고 처참히 세상을 떠나신 상감을 뵙고자 온 것이다. 그런데 청량
포가 길을 막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하늘이 나를 도와서
이 나루를 건너거게만 되면 상감의 빈소로 가서 왕의 옥체를 수렴(收斂)도
하겠지만... 만일 이 강을 못 건너간다면 나는 이대로 강속으로 걸어갈
작정이다. 가다가 가다가 못 가면 이대로 창파의 귀신이 될 각오도 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내 갈 길을 방해하며 끌어 잡아당긴단 말이
냐? 너는 만가지 동물중의 명물이라고 들었는데 네게 어떤 꾀라도 있단
말이냐? 그렇다면 내게 지시를 해주려무나.."
아무리 동물 중에도 영물이라고 한들 그의 말이 들릴 리 없고 그의 뜻을
알 까닭이 없지만 하도 다급한 끝이라 그는 이렇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가끔 세상에는 상식과 지식으로는 이해 안 되는 일이 생기는데 바
로 이때 그런 일이 생겼다.
조려의 말을 듣고 눈만 번쩍이고 있던 호랑이는 마치 말을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고개를 크게 두어번 끄떡끄떡하더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넓죽이 엎디었다.
조려는 급한 김에 말을 했지만 이렇게 되자 과연 호랑이가 영물이라는 것
을 깨달았다.
"오라. 네가 나를 업어다 준다는 것이 틀림없으렷다. 이것이 천우신조가
아니면 무엇이랴. 과연 불쌍하신 상감을 위한 하늘의 뜻이로다."
그는 급히 호랑이 등으로 뛰어 올라탔다. 분초가 급했다.
"어서 가자. 네 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어서 강으로 내려서라!"
그는 마치 말을 몰 듯 대호 등에 업혀서 명령하였다. 호랑이는 주저없이
강물로 뛰어 들어 단숨에 청량포 대안에 와 닿았다. 마치 그의 명령을 알
아듣기나 한 것처럼 섬광같이 빠른 동작이었다. 호랑이 덕에 강을 건너간
조여는 호랑이 등을 어루만지며 인사를 했다.
"과연 영물이로다. 네 은혜는 길이 잊지 않으마."
호랑이도 조려의 말을 알아듣고 기쁜 듯이 고개를 끄떡이더니 그 큰 몸집
을 서서히 산 속으로 숨겼다.
그는 상감의 빈소를 찾아 들어갔다.
빈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단종의 시체를 지키는 수직자(守直者) 두
사람이 어이없이 앉아 있었다. 일국의 국왕이었던 사람의 빈소가 이럴 수
가 있을 것인가 생각하며 그는 통곡하였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을 치고
인지상정을 탄해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곧 눈물을 거두고 일어섰
다. 그리고 사배(四拜)를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또 새로운 눈물이 하염
없이 흘러 내렸다.
그는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수의(壽衣)도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입
고 있는 옷 그대로에다가 공들이고 정성을 다해 수렴을 마쳤다. 그리고
또 손모아 명복을 빌고 사배를 드린 후 빈소를 나와 캄캄한 강가로 나와
섰다. 이제는 이 강을 걸어 건너야만 할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었다. 시체나마 상감의 용안을 오로지 자기 혼자만 뵐 수
있었다. 게다가 수렴도 정성을 모아 해드렸다. 이제는 죽어서 님을 따라
가는 길도 헛되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의 눈에서는 또다시 끝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 아까 산속으로 들어갔던 호랑이가 다시 그의 앞에 오더니 넓죽
이 엎드렸다. 어서 타라는 듯했다.
"오! 넌 아까 그 호랑이가 아니냐! 불쌍하신 상감의 용안도 돌아가신 후나
마 뵈옵고 또 직접 내 손으로 소원이던 수렴도 해올렸다. 그러나 어찌 이
다지도 세상 인심은 냉랭하더란 말이냐! 촌부 한 사람도 빈소에 참배 온
사람이 없으니! 너희 동물의 세계가 오히려 부럽고 또 부끄럽기도 하구
나!"
그는 말이 통하는 인간에게 지껄이듯 이렇게 자기의 심회를 털어놓고는 다
시 호랑이 등에 업혔다. 조금 전과 똑같이 그는 호랑이 덕으로 청량포를
단숨에 넘을 수 있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도와주신 것. 그러나 네 은혜는 내가 세상에서 생명
을 다하는 날까지 잊지 못하겠다."
여전히 호랑이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양 서서히 산중으로 사라지고 말았
다.
고향에 돌아온 조려의 얘기를 전해 들은 사람은 누구나 감동하여 그의 충
의심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추강 남효온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해서 읊은 시 한수를 여기 소개 한
다.
虎渡淸凉浦
ㅡ호랑이가 조려를 업어 청량포를 건너 주니
趙翁 魯山
ㅡ조려는 노산군의 시체를 염하고 돌아오도다.
5. 生六臣의 節介 - 文斗 成聃壽
성담수(成聃壽)는 창녕(昌寧) 사람으로 호(號)를 문두(文斗)라 일컬었다.
세종 경오(庚午)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敎理)로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되
었다.
그는 유명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과 한 집안 사람이었다. 성담수는
항상 성삼문과 만나기만 하면 사직(社稷)에 관한 걱정만을 얘기했다.
"자네와 나는 어디까지나 왕실을 위해 이 목숨 다하기까지 어떠한 난관이
닥쳐와도 뚫고 나가야 하네!"
대하기만 하면 성삼문은 이 말로 인사를 대신 하다시피 했다.
그도 성삼문에게 못지 않은 충심을 그에게 맹서했다.
"저도 생명이 진하도록 어리신 상감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일은 끝나고 말았다. 상왕으로 수강궁에서 비탄에 젖어 있는 어린
상감을 받들어서 다시 왕위에 모셔야 되겠다는 집현전 학사들의 모의가 사
전에 탄로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조가 조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성삼문을
죽여 없애자 담수도 성삼문의 친척이기 때문에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네 이놈! 성삼문과 모의한 사실을 낱낱이 얘기하면 살려둘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
추상 같은 호령과 무서운 매틀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담수는 끝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너희들 맘대로 죽이겠으면 죽이고 살리겠으면 살
려라."
그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그는 어떠한 형이 가해져도 끄떡 안하고 냉소
만 띠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김해(金海)로 추방되어 삼년이라는 세월을 귀양살이 하게
되었다. 그는 삼년후에 대사(大赦)가 내려 공주(公州)로 갔다.
담수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사부(士夫)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향리에서 일개 농부와 똑같은 옷과 음식을 취하면서 지내기가 일쑤였다.
향리 사람들이 일개 전부(田夫)로만 알 뿐 어떤 사람인가를 알지 못할 정
도로 그는 자기를 숨기고 소박하게 살았다.
담수에게 육촌(六寸) 형의 아들이 한 사람 있었는데 이름을 몽정(夢井)이
라 하고 경기감사(京畿監司)로 있었다.
몽정은 경기감사가 된 후 담수를 친히 찾아보았다. 그러나 문 앞에 당도
한 몽정은 담수의 집 대문이 일개 춘부에 집만도 못한 것을 보고 놀랐다.
더구나 집만도 안내된 몽정은 집 속이 어찌나 퇴락하였는지 비바람도 막지
못하게 된 형편인데다 방이란 방은 모두가 흙방이고 깔자리 한 닢 변변한
게 안 보이는데는 더욱 놀래버렸다.
담수의 성품을 잘 아는 몽정은 인사만 치르고 그대로 하직을 하고 돌아왔
다. 돌아온 그는 곧 돗자리 몇 닢을 담수의 집으로 보냈다. 아무리 강직
한 그일지라도 돗자리마저 아니 받을 리야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가인
이 이 일을 담수에게 알리자 그는 곧
"이 돗자리는 흙방에 깔기에 지나치게 좋은 자리다. 우리 집 방에는 가당
한 돗자리가 아니지 않느냐? 어서 빨리 돌려 보내라."
하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흉하기 그지없는 방안에다 이 돗자리를 깔면 흙이 나오는 것을 막
는다 생각한 가인들은 그것을 돌려 보내가기 아까왔다. 그래도 담수는 재
삼 재사 돌려보내야 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인들은 입을 모아
"그건 너무 하시는 처사십니다. 이 돗자리가 무슨 뇌물로 들어온 것이 아
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보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담수는 가인의 말을 다 들은 후
"너희들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이 돗자리는 우리 집에
가당치도 않은 물건이란 말이다. 어서 두말하지 말고 곧 돌려 보내라!"
역정을 내는 가장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세조 치하의 어느 해. 죄인의 자제를 등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세조가 인심수습을 위한 한 수단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 벼슬은 벼슬중의
말단직인 참봉(參奉=종구품)의 자리였다.
죄인의 자제들은 호기도래(好機到來)라 생각하고 누구나 머리를 싸매고 이
자리를 차지하려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담수만은 이 권내에서 벗어나 참
봉 벼슬을 헌신짝같이 여겼다.
가인들은 그에게 나가기를 종용해 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강요로 그
의 마음이 움직일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는 유유자적 낚시질을 일삼았다. 나물죽을 한 술 떠 먹고는 낚싯대를
걸머메고 낚시터로 향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고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아서 가는 낚시는 세상 도피행이라고 볼 수 있다.
집에서는 시를 읊어 우울한 심사를 풀곤 했다. 그의 조어시(釣魚詩) 한
수를 보면 뛰어난 시재(詩才)를 알 수 있다.
把竿終日 江邊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변에서 머물러 있다가)
垂足滄浪團一眠
(푸른 물결 속에 발을 넣고 졸기도 하는도다.)
夢與白鷗飛萬里
(꿈속에서 백구와 짝이 되어 만리창공을 날다가)
覺來身在夕陽天
(문득 꿈에서 깨어나니 몸은 석양이 비낀 하늘 아래 있구나.)
죄인의 족질(族姪)로 아니 직접 주목 받아서 국문을 받고 귀양살이를 삼년
이나 하고 지낸 그에게 어찌 그런 여유가 있었는지? 오리혀 지금의 우리
들 심경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얘기다.
그는 죄인들의 자제를 붙들고 그런 치욕적인 벼슬은 단념하라고 충고하기
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이구동성(異口同聲)이었다.
"아 이기회에 우리들이 나라 혜택을 못 받으면 언제나 다시 햇빛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세상 일이란 그런 것만은 아닐세. 자네들은 역사를 무엇 때문에 배우고
학문을 무엇하려고 배웠나? 지금 이런 나라에서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국록을 받아 벼슬을 한다는 것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께 면목이 없고 집안
선조들에게 욕보이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되는 것일세!"
그의 이런 충언이 벼슬에 급급한 그들의 귀에 옳게 들어갈 수는 없었다.
오히려 뒤돌아 세워 놓고 욕하기가 상례였다.
그는 그들이 자기 말을 듣거나 아니 듣거나 개의하지 않고 벼슬을 탐내어
법석대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일일이 충언을 잊지 않았다.
그는 늙는 날까지 이 어지러운 세태를 목도할 수가 없었다. 우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조의 태도가 미웠다.
세종, 문종, 단종 대대로 충의를 맹세한 중신들의 손바닥을 뒤집는 듯한
배반도 증오스러웠다. 이래가지고 어찌 나라가 제대로 잘되어 나갈 것인
지 저으기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나날의 삶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누구에
게도 호소할 수 없고 흉중을 털어놀 동조자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채 몸이 늙기도 전에 충분(忠憤)에 못이겨 죽고 말았다.
정조(正祖) 신축(辛丑)년에 이르러 상감은 그의 고절(高節)에 감동하여 이
조판서의 벼슬을 증하고 다시 그에게 정숙공(靖肅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충혼과 의백을 위로해 주었다.
6. 生六臣의 節介 - 觀瀾齊 元昊
원호(元昊)는 원주(原州) 사람으로 호(號)를 관란제(觀瀾齊)라 불렀다.
세종(世宗) 계묘(癸卯)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까지
올라선 사람이다.
단종(端宗)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그는 결연히 이 자리를 내
놓고 초야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寧
越)땅으로 정배를 떠나게 되자 그는 조석으로 호곡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는 하루 빨리 천우신조가 있어 어린 임금의 왕위복구가 이루어 지기를 하
늘에 기원하며 나날을 지냈다. 그러나 하늘도 강자에게 가담하는 모양인지
이 모든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생활은 죽기가 원이었다. 그래도 단종이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그의
소망과 희망은 한가닥 없어지기 않고 있었다. 상감이 살아 있는 동안은 자
기도 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왕
위복구 모의도 탄로되고 말았다.
하늘이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힘이 모자랐고
세조는 국가와 온 백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지방 벼슬아치들의 의분과 거
사는 세조의 눈에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세조는 이렇게 역도가 도량(跳梁)하는 것은 노산군이 살아 있는 연유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곧 영월의 노산군을 세상에 살려 둘 수 없다고 결
정지었다. 물론 거기에는 세종 때부터 많은 은총을 받아오던 변심한 중신
들이 시사한 바가 컸던 것이다.
영월 적소에서 아무 소식도 모르고 한적한 시간을 무료히 보내고 있던 단
종이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금성대군의
모의 탄로가 약간의 책임을 가질 수도 있다.
단종의 죽음은 온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번져갔다. 온 백성은 소리없
이 울었다. 세조 치하의 벼슬아치들의 눈이 무서운 착한 백성들은 서로
서로 몰래 가슴을 태우고 쥐어뜯으며 오열을 금치 못했다.
벼슬을 살아서 세조의 국록을 먹는 인간들도 몰래 눈물을 감추고 가슴으로
울었다. 죄없이 사사(賜死)당한 어린 임금의 기구한 운명이 뼈가 저리도
록 슬펐다.
원호는 예기 못한바는 아니었지만 실신할 정도로 비탄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는 진정 세상을 살아나갈 아무 의의도 보람도 없었다.
그는 하룻밤을 그대로 영월 땅을 향해 배례하고 앉아 묵상하고 울며 지냈
다. 동이 텄다. 그는 홀연히 영월 땅으로 향해 집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가인에게 이 뜻을 전했다.
"무엇 때문에 그 먼 데를 가려고 하십니까?"
모두들 이와같이 말하며 말렸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요지부동(搖之不動)
이었다.
"나는 삼년 동안을 집에는 아니 돌아오겠소. 상감의 복상(服喪)을 삼년간
할 예정이요."
"아니, 어디서 무얼 먹고 지내면서 삼년 동안이나 지나겠습니까?"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한 빛을 나타내지 않고 태연히 대답
했다.
"천상 천하에 오로지 한분이신 귀하신 옥체가 죽음을 당하셨는데 내 한 몸
쯤은 어디서 무얼 먹으면 어떻단 말이요. 살다 살다 못 살면 우리 님을
따를 뿐이요."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결의를 막을 힘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가인들의
만류를 무릎쓰고 그는 입은 채로 곧 길을 떠났다.
영월 땅은 원주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그는 곧 영월 땅에 가 닿았다.
잠잘 곳이 있을 리가 없었고 더구나 그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월은 산골 두메였다. 그런데다 그는 상복(喪服)을 입고 있었다. 정월달
이니 춥기가 말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은 어떻게 구걸해서라도 잠은 잘
수 있을 것이고 밥도 얻어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왕 삼년이라는 세월을 복상하기로 작정하였으므로 하루 이틀만
편안히 자기를 원치 않았다. 며칠이라도 따뜻한 잠자리가 그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는 한 발 한 발 산중으로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토굴을 하나 발견해서 삼년간의 거주지로 삼을 작정으로...
그는 드디어 비바람을 막을 만한 토굴을 하나 발견했다. 삭풍이 휘몰아
쳐오는 겨울도 여기서 나야 할 것이고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여름
도 이 토굴에서 지내야 했다.
단종을 위한 복상의 토굴생활은 이만저만 비참한 게 아니었다. 비바람은
막아 준다고 해도 눈보라쳐오는 겨울밤을 몇 밤이나 뜬눈으로 보냈는지 헤
아릴 수도 없었다. 짐승이 무서워 찌는 듯한 여름밤도 토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야만 했다. 따로이 먹을 음식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연명만 되
도록 온갖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다 뜯어다 먹었다. 잡아 먹을 수 있는
작은 짐승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 먹었다.
삼년이란 긴 세월은 그에게 눈물과 한숨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삼년의 복
상이 끝났다. 남아 있는 목숨을 달래면서 그는 자기 고향으로 몸을 움직였
다.
많은 날이 새삼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몇 번이나 죽기보다도 어려운
삶을 저주하고 죽으려고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 있는
육체를 지탱하려면 또 그의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
다.
마침내 삼년상을 마친 그는 원주로 돌아왔다. 모든 고향 사람들은 어디서
죽었던 사람이 살아 온 듯 반기며 인사를 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날부터 자기 방 속에서 두문불출을 일삼았다. 으레 앉는 자
리는 동쪽을 향하고 어린 임금의 참사를 추모하며 지냈다. 가인들이 그를
보고 그의 좌와(坐臥)를 이상히 여겨 물었다.
"어찌해서 꼭 그 자리에만 계십니까?"
"상감이 돌아가신 곳이 영월 땅! 나는 항상 그 분을 추모하는 의미로 이렇
게 자리를 하고 앉아 있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의 삶은 오로지 단종의 추모를 위한 것이고 단종
을 생각하는 일념 뿐이었다.
정조(正祖) 신축년(辛丑年)에 상감은 그의 고고(孤高)한 단심을 높이 평하
여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정간(貞簡)이란 시호는 그의 곧은 절개를
뜻함이다.
7 . 율정 권절
권절(권절)은 안동(안동) 사람으로 호(호)를 율정(율정)이라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힘이 장사였던
그를 사람들은 남이(남이) 장군에 비해서 말했다.
또 문장에도 통달하여 그 재주가 월등하였다. 세종 정묘(정묘)에는 문과
에 급제하고 마침내 문무를 겸전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무
(무)로는 사복시(사복시) 직장(직장)으로도 있었고 문(문)으로는 집현전
교리로도 있었다.
수양대군으로 있던 세조가 그런 인재를 놓칠리가 없었다. 더욱이 대사를
성취하려면 기어이 이러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이 친히 그의 집을 찾아갔다.
"난 권공을 꼭 동지로 맞고 싶으니 미의(미의)를 살펴 주시면 무상의 영
광이겠소이다."
그가 수양의 야망을 모를 리 없었다.
"저어 뭘! 많은 좋은 인재들이 대감의 주위에는 많사온데..."
그는 어쨌던지간에 자리를 회피할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끈질기게 몇 번이나 그의 대답을 들으려고 찾아왔다. 그는 난처했다. 죽어
도 그의 야망에 야합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종친이라는
것보다 상감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육박해 가는 때였다.
자신의 생명이 중하기는 하지만 수양대군과 같이 자리를 하고 음모를 얘
기하기란 죽는 일보다도 더 싫었다. 수양은 지치지 않고 문무를 겸한 그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손을 써왔으나 그는 수양대군을 피해서 은신을 일삼았
다. 그러나 은신도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어렵기 짝이 없었다. 친척 집에
숨어 있는 권절을 찾아낸 수양대군은 단신 또 그를 찾아왔다.
"권공! 내 말을 들어 주시오. 권공 같으신 분을 얻게 되면 귀신에게 쇠
몽둥이와 같은 역할이 되고도 남을 줄 익히 알고 이렇게 재삼재사 권공을
괴롭히는 겁니다."
"대감! 벌써 여러 차례 사양의 말씀을 올립니다마는 저로서는 세종대왕
의 총애를 받아 국록을 먹고 지낸 몸이라 그 전통을 무시하고 어리신 왕을
보필은 못할망정 그 자리를 찬탈하려는 음모에는 하늘에 머리를 두고는 감
히 가담할 수 없사옵니다."
"권공의 말씀은 지극히 곡해(곡해)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절대로 단종의
자리가 탐나서 음모를 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시다면 무엇 때문에 이 나라에 있는 병력을 무시하고 사병(사병)을
기르시기에 골몰하십니까?"
그의 음성은 노해서 약간 떨렸다.
"그것은 권공이 진정 모르는 말씀입니다.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어리신
상감을 위해서 충성을 다해서 보필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근
래 들어온 극비에 속하는 소식인데 좌의정 김종서가 상감을 없애려고 갖은
흉계를 다 꾸미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어리신 상감을 위
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을 수 있으며 사직을 지켜 주는 사병을 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권절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아니 구토증이 나도록 속이 들어다보이는
그의 권모술수(권모술수)가 미웁고 비겁해 보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김종서같이 오로지 사직과 상감만을 위하고 생각하는 일
념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을 모독하다니...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 곧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야기될 것을 생각하니 몸서리
가 쳐졌다. 이다지도 정권욕이라는 것이 크고 대단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더욱 더 근신하고 한 발자국도 밖에는 나가지를 않았다. 거처도 다
시 옮겼다. 가인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수양대군도 이제는 단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양의 음모는 착착 진행되어 김종서 등 눈에 가시 같은 존재를 다 처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일년 후 단종을 허울좋은 상왕(상왕)으로 만들고 단종 스스로
양위(양위)한다는 대의명분(대의명분)을 세워서 세조 원년으로 호를 바꾸
게 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곧 권절을 내버려 둘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권
절 같은 준재(준재)를 초야에 묻혀 놓기가 아깝게 생각되어서였다. 과연
세조는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혜안(혜안)을 가진 영매(영매)한 인물이었
다.
세조는 권절에게 첨지중추부사(첨지중추부사)란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금병(금병)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권절이 이 벼슬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는 임금이 내린 벼슬을
고사하기가 무엇보다도 어려웠다. 이 땅에서 생명을 향유하고 사는 한 상
감의 하명을 거절하는 길은 단 한길밖에는 없었다. 미친 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올바른 정신으로는 조정을 잡고 휘두르는 세조의 엄명을 거
역하기란 정말 난감했다.
그는 미쳐버렸다. 그편이 훨씬 편안했다. 주변 사람들의 근심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고 가인들의 걱정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미친 모양이다.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어떻게 저런 모양으로 되어
버렸을까?"
이것은 그를 아는 친지들의 걱정스런 화제였다.
"어떻게 하면 좋담. 벼슬은 마다 하시고 이제는 저런 꼴이 되셨으니..."
이것은 집안 식구들이 맹랑한 그의 모양을 근심하다 못해 토한 얘기였
다.
이제는 미쳤으니 미친 척해야만 했다. 그는 거리로 나섰다. 미친놈이 되
려면 본격적으로 미친놈이 되어야 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미쳐 있었다. 세조 치하에서 국록을 먹는 높은 벼슬
자리의 대감을 만나도 그랬다. 말단 벼슬을 천직으로 알고 지내는 미관(미
관)인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는 입가에 정말 미친 사람에게만 있는 헤픈 웃음까지 흘리며 입버릇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이렇게 지껄였다.
"나라가 태평해져 잘 사시리라. 나라가 태평해져 성주(성주)의 덕이 크
시리다!"
그의 야유였다. 이제는 길가는 애들까지도 미친 권절을 만나면 그의 말
을 흉내내기가 보통이었다.
"나라가 태평해져 잘 사시리다! 나라가 태평해져 성주의 덕이 크시리
다!"
동심이 그의 뜻을 알 수는 더욱 없었다. 그의 옆을 따르면서 또 한 번
외우고는 꺄르르 웃고 흩어지면 권절은 쓸쓸했다. 진정으로 미친 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이렇게 하면서도 사는 것이 과연 잘 하는
것인지도 분간이 안갔다. 그는 결국 이와같이 일생을 마쳤다.
이조 숙종(숙종)조에 와서 숙종은 그의 충의를 높이 평하여 이조판서란
벼슬과 충숙공(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찬하였다.
8. 정제 조상치
조상치(조상치)는 창녕(창녕) 사람으로 호를 정제(정제)라 부르기도 하
고 단고(단고)라고 부르기도 했다. 세종 기해(기해)에 생원 문과(생원문
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부제학(부제학)으로 출세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선양(선양)을 받자 높은 지위에 있는 벼슬아치
들이나 낮은 자리에 급급하는 미관말직들까지 앞을 다투어 세조에게 나아
가 아부를 겸한 하사(하사)를 올리기에 혈안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조상치만은 신병을 핑계삼아 입하(입하)를 하지 않았고 뿐만 아
니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세조에게 올리고 벼슬을 사퇴하고 말았다.
< 군자(군자)의 도에는 여러 길이 있사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도 군
자가 취할 태도입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에 뒤로 물러설 줄 아는 것도
군자의 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컨대 소신은 말직을 이 시기에 물러나고 싶사오니 부디 청허(청허)하여
주시기 비옵니다.>
이 글을 받아 쥔 세조는 이렇게 뛰어난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결심
하고 그를 중용(중용)해서 그 마음을 잡아 두기 위해 그의 사퇴 글을 반려
(반려)하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오히려 과할 정도의 예조참판 벼슬을 내리
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상치에게 예조참판이 눈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도대체 벼슬이 우습게만 보였다.
그는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는 세조의 성화 같은 참정(참정) 권고가 시끄
럽고 나중에는 뜻하지 않은 화로 발전될 것을 염려하여 곧장 동대문으로
나와 고향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만인이 바라는 좋은 벼슬자리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초야에 묻히기로
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조상치를 본 우국지사(우국지사)의 한 사람인 박팽
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분은 우리 사림(사림)의 스승이시다. 그 높으신 절개를 감히 누가
따를 수 있으리오!"
다시 성삼문은
"그분은 영주(영주=영천)의 청풍(청풍)이시다. 우리들은 그분에 비하면
죄인에 불과한 몸이다."
하고 그를 칭송하였다.
마침내 그는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 와서 세상을 잊고 지냈다. 만나는 사
람이라고는 향촌의 촌부들 뿐이었다. 아무 야망도 야심도 없는 소박한 인
심이 그를 끌었다. 그의 머리 속을 오락가락하는 것은 어린 상감이 누구의
비호도 없이 산골 두메 영월 적소에 있을 것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일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묻히겠다는 뜻을 밝히
자 그를 높히고 칭송해 마지 않았던 박팽년, 성삼문을 생각하였다.
그들은 뜻이 맞는 동조자들과 왕위 복구를 도모하다 사전에 세조의 귀에
들어가서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목숨이 붙어 있을뿐이지
살아 있다는 심정이 아니었다.
아니 이땅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다. 많은 우국지사들이 참변을 당한 이때
에 게다가 수없는 종친들이 귀양살이를 떠나고 박해를 받고 있는 이때에
혼자만이 알뜰하게 목숨이라고 보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단종이 살아 있다니... 끝내 멀리서나마 바라 뵙고 살고
싶었다.
(열다섯 되던 해에 영월 적소로 떠나셨으니 금년은 열여섯이 되셨으리
라! 부디 사육신들의 사무친 원한이어! 눈감고 나라를 지켜 보아주오!)
하루종일 감회는 이러한 우수 속에서만 교차되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어
린 상감의 소식이 그의 가슴을 적시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단종은 일찍이 문장에 뛰어났다. 할아버지 되는 세종이 그렇게 탁월하게
글에 치중하던 사람이요, 또 아버지 되는 문종이 병약해서 일찍 승하는
하였을망정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던 사람이라 그 혈통에서 나온 단종도 문
장력은 타인이 감탄할 정도였다.
단종은 영월 적소에서 홀로 지내면서 많은 피눈물 나는 시문(시문)을 엮
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중에 단종이 열여섯 되던 해에 지은 시가 바
로 앞에 소개된 자규사(자규사)이다.
단종은 즉위한 이래 하루도 마음 편안한 날이 없었다. 수양대군은 좌의
정 김종서가 상가이 어림을 기화로 단종을 폐위하려는 음모를 한다고 죽여
없앴다.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두렵고 못마땅한 존
재가 김종서였기 때문이었다.
총명한 단종은 비록 어렸을망정 그의 무서운 야망을 몰랐을 리는 없었
다. 그는 전전긍긍 속에서의 나날이 역겨워 수양대군에게 <양위>라는 미명
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더 피비린내 나는 일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충신들의 단종 왕위복구를 위한 모의는 단종을
사고무친하고 두메산골인 영월 땅으로 몰라 넣게 하고 말았다. 겨우 나이
열다섯살 되던 해였다.
단종의 적소 근처에 있는 향촌 사람들은 어린 임금의 도도하고 으젓한
풍모와 태도에 놀라고 감복했다. 그러나 단종은 항상 우수에 잠긴 생활이
었다.
결국 그의 이 쓸쓸한 심중이 <자규사>로 나타난 셈이다.
조상치는 이 시를 전해 들은 후부터는 거의 매일 이 <자규사>를 외우면
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영천으로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세조가
있는 서향(서향)을 해서 자리를 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조상치는 <자규사>에 화답해서 이렇게 노래 불렀다.
자규제자규제
( 두견이 우는구나! 두견이 울어! )
야월공산하소소
( 달밝은 밤에 하늘에 호소하는 것인가! 산에 호소하는 소린가! )
간야중조총안소
( 뭇새들은 모두 보금자리에 들어 편히 자고 있는데, )
독향화기혈만토
( 너 혼자만이 외로이 꽃가지에 앉아서 피를 토하고 있구나! )
형단영고모초래췌
( 외로운 그 모양도 애닯어라! )
불긍존숭수이고
( 그러나 누구도 네 소리가 아름답다고 들어주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구
나! )
오호인간원한개독이
( 오호라! 인간 원한도 많은데 너만이 울어 예면 무얼 하는가! )
의사충신격불평, 굴지난진수
( 나라일을 걱정하는 의사 충신의 수는 손꼽아 헤아릴 수도 없건만. )
조상치는 두견이, 즉 상감이 피를 토하듯이 울며 사는 세월을 생각하고
이렇게 슬픈 시를 읊었던 것이다.
단종은 마침내 큰 한을 안고 그의 나이 열일곱되던 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조상치는 통곡을 그칠 줄 몰랐다. 찾아오는 사람도 일체 맞지 않
았다.
외부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까지도 만나기를 싫어하였다.
이제는 진정으로 목숨을 부지할 힘을 잃어버렸다. 그보다도 살아나가야
할 아무 의의가 없었다. 성군이신 세종치하에서 많은 성은을 입고 살아온
그였다. 어린 단종을 보필해서 더욱 견고한 사직을 이룩하려고 결심을 굳
게 한 그였다. 그러나 단종은 이미 가고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표표히 집을 나섰다. 우울한 가슴을 달래기는 강가가 좋았다. 늘 이
럴 때면 즐겨 가는 장소다. 낚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은어(은어)가 노
니는 잔잔한 맑은 물 속을 무심히 들여다보며 앉아 있었다.
번거러운 생각을 없애려면 걷는 일이 그로서는 제일 쉬웠기 때문이다.
얼마를 걷다가 보니 저 멀리 길고도 넓적한 돌이 눈에 띠었다.
그는 그 돌을 자세히 보고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그것은 길고도 적당한 넓이의 완석(완석=탁마(탁마)를 가하지 않은 돌)
이었다. 문뜩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이 돌로 그가 죽은 후에 세워 놓을
비석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돌을 집으로 운반케 하였다.
자기가 죽는 날을 예기나 하고 있던 양 강변에서 발견하여 운반해다 놓
은 돌의 표면에다 다음과 같은 문귀를 써 놓고 이를 조각시켰다.
< 노산조부제학포인조상치지묘 >
라는 비문이었다.
즉 노산군 시대에 부제학을 지낸 조상치의 무덤이라는 뜻이었다.
세조시대에 지낸 부제학은 아니라는 뜻이다.
단종조에서 지낸 벼슬이 부제학이지 세조조에 지낸 벼슬이 아니라는 것
을 분명히 후세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그의 곧은 성품의 일면이 나타
나 있다.
이렇게 비문을 만들어서 세워 놓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간 후 후세의 사
람들은 자기를 이군(이군)을 섬긴 사람으로 간주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손
수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 죽음으로 뜻을 바친 사육신과 똑같은 서열에 올려 놓고 싶은 생팔
신의 행상을 낱낱히 기록했다.
그대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세상에 살면서 빈한과 싸우고 혹은 세조의
횡포에 무언의 항거를 일삼은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