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에 대한 비판적 검토(4)
1. 검토 분야 : 이순신을 잡아라/한산도대첩(138쪽∼151쪽)
2. 검토 중점 : 저자의 한산해전 이해 수준/오류
3. 세부 검토 내용
(1) 이순신을 잡아라(138∼141쪽)
“이순신이란 자가 대관절 누구인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일본 최고의 수군 권위자 구키 요시타카를 불렀다. 그대를 보내면 이순신을 잡을 수 있는가? 구키 요시타카가 솔직하게 말했다. “이순신 함대의 2배에 달하는 병력을 주십시오. 이순신의 목을 들고 오겠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참전하고 있던 또 한 명의 해군 전문가를 투입시켰다. ‘와키자카, 너는 부산으로 가서 해전을 준비하라. 그리고 이순신을 죽여라’”(138∼140쪽)
-> 검토1 :임진왜란 해전을 이해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일본 측의 임진왜란 관련 자료는 대개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인 도노오카 진자에몬의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1592년) 그리고 전쟁 이후에 발간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기물인 <태합기(太閤記)>(1637년), 임진왜란 참전 장수의 가문에서 편찬한 도도다카도라 가문의 <도도가문각서(藤當家覺書)>(1641년)와 와키자카 가문의 <협판가전기(脇坂家傳記)>(1642년) 정도이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이순신의 이름이 없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순신이란 이름이 일본에 처음 알려진 것은 중국에서 편찬한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1606년)과 그것의 축약형인 <무비지(武備志)>(1621년)가 일본에 전래된 1632년 경 이후부터이다. <양조평양록>에는 이순신((李舜臣)이 ‘이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順臣)’, ‘이통제(李統制)’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 책에 영향을 받아 편찬된 호리 교안(堀杏庵)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1659년)에 처음으로 이순신(李舜臣)이 이순신(李順臣), ‘이통제(李統制)’로 언급되고 있지만 아주 지엽적인 인물 소개 수준이다. 일본인들이 이순신이란 인물을 처음으로 훌륭한 무장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조선에서 1604년에 만들어진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본격 소개된 1695년부터이며, 이를 토대로 1705년에 만들어져 일본에 널리 전파된 <조선태평기>와 <조선군기대전>에 의해서다. <징비록>에 묘사된 이순신 장군의 호의적이고, 영웅적인 모습이 처음으로 일본인들에게 자세히 소개된 것이다.(출처 : 김준배, 『일본 문헌 속의 이순신 표상』(민속원, 2022)) 이렇게 볼 때 이순신(李舜臣)이 정확한 이름과 더불어 일본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시점은 1700년 전후이다.
-> 검토2 : 한산해전 당시 일본군들은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마치 일본의 도요토시 히데요시나 일본의 수군 장수들이 이순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시나리오를 쓰고, 소설화하면서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다. 이순신의 <장계>를 분석해 보면, 한산해전을 앞두고 당시 일본 수군 장수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전라도 수군이다. 일본군들은 부산 상륙 당시부터 조선의 경상도 수군은 모두 무력화된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제1차/제2차 출동에서 7회의 해전을 모두 패하면서부터 전라도에 강력한 조선 수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그 이후 한산해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산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기본적으로 전라도의 조선 수군 격파를 목표로 하였던 것이지, 그 지휘관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독백..<함께 차를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요,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라는 등>의 내용은 누군가의 창작물이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2) 한산해전 관련(142∼153쪽)
가. 선조의 출정 명령 관련
“전라도 관찰사 이광으로부터 일본의 함대가 증파되어 부산으로 모여든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142쪽 첫 줄)
-> 검토 : 임금 선조는 임진왜란이 벌어진 후 수시로 전라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명령/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일본의 조선 침략의 교두보요 본거지인 부산포 주변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후방을 위협함으로써 진격의 속도를 늦추거나 도리어 후퇴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임금의 지시가 사전에 있었지만 이순신이 제3차 출동을 시작한 것은 자체 정보에 의한 판단이었다. 아래는 제3차 출동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이순신의 장계이다.
“위의 전지를 전하는 서장에 의한 순찰사의 공문이 또 도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떼를 지어 출몰하는 적을 맞이하여 낱낱이 무찌르고자, 서로 공문을 돌려 약속하며 배들을 정비하고, 경상도의 적세를 탐문하였는데, <가덕 거제 등지의 왜선이 혹 10여 척 혹은 30여 척이 떼를 지어 출몰한다>할 뿐 아니라 본도 금산 지경에도 적세가 크게 뻗치었는바, 수륙으로 나누어 침범한 적들이 곳곳에서 불길같이 일어나도 한 사람도 맞아 싸운 적이 없어서 적이 바로 몰아오게 되었으므로 처음에 본도 우수사와 모이기로 약속한 이달 7월 처4일 저녁 때 약속한 곳에 도착하여 초5일 서로 약속하고 초6일....함대를 거느리고 일시에 발선하여....”(<견내량파왜병장>)
이를 통해 볼 때 부산포 쪽의 <일본의 함선을 남김없이 쳐부수>라는 임금의 명령이 계속 유효했지만, 이순신이 제3차 출동을 단행한 것은 <가덕 거제 등지의 왜선이 혹 10여 척 혹은 30여 척이 떼를 지어 출몰한다>할 뿐 아니라 본도 금산 지경에도 적세가 크게 뻗치었는바, 수륙으로 나누어 침범한 적들이 곳곳에서 불길같이 일어나도 한 사람도 맞아 싸운 적이 없어서 적이 바로 몰아오게 되었으므로...> 라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따라서 저자가 <전라도 관찰사 이광으로부터 일본의 함대가 증파되어 부산으로 모여든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는 것과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 이순신이 제3차 출동을 시작할 때의 작전 목표는 <가덕‧거제 등지에 혹 10여 척 혹은 30여 척이 떼를 지어 출몰하는> 일본의 함대를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 중심이 된 조선 수군은 일본의 정예 수군 함대가 전라도의 조선 수군을 격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동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3차 출전을 시작하였다. 또 한편 일본 수군도 이순신이 중심이 된 조선의 함대가 가덕‧거제 등지에 출몰하는 일본의 함대를 격파하러 마주 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전라도 함대를 찾아 서진(西進)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측이 우연인 것처럼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장소가 견내량이었던 것이다.
나. 한산 해전 관련 오류
① “대략 60척의 연합 함대가 구축되었다.”(142쪽)
-> 검토1 : 이순신의 장계에는 경상우수영의 함대만 7척으로 명시하였고, 전라좌/우수영의 함선 척수는 명시하지 않았다. 제2차 출동 시의 전라좌(23척)/우수영(25척) 함선을 기준으로 하면 55척이고, 제1차 출동 때의 전라좌수영 24척을 기준으로 하면 56척이다. 일본 측의 자료 <고려선전기>에는 58척(거북선 3척 포함)으로 기록하였다.
-> 검토2 : 연합 함대..는 통합 함대가 정확한 표현이다. 연합은 서로 다른 나라의 군이 함께 했을 때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사례) 한미 연합사령부, 조명 수군 연합 함대
② “견내량 근방, 거제도 위편에 왜군 함대 70여 척이 정박해 있습니다.”(142쪽)
-> 검토 : <견내량파왜병장>에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오늘 하오 2시 경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산해전 관련 가장 정확한 자료는 이순신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이다. 정확하게 견내량에 70여 척이 머물러 있었는데, 왜 견내량 근방 거제도 위편...이란 표현이 나오는지..이 책 144쪽 한산대첩 지도에도 견내량 포구가 아니라 그 거제도 위쪽 입구 바다에 70여 척이 정박해 있는 것으로 그려놓았다(이건 정말 이 분야에 무지한 사람이라고 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다. 주변에 이순신/한산해전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 있었으면 즉시 바로잡을 수 있는 수준의 팩트인데...참으로 이상하고 괴이하다)
③ “7월 8일 오전, 이순신의 함대가 소장군도를 돌아 견내량 쪽으로 접근했다. 아니나 다를까. 적군의 함대 70여 척이 견내량 건너편에서 보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함대 70여 척이 앞서 있고, 구키 요시타카와 참모장으로 참여한 가토 요시아키의 부대는 와키자가 뒤쪽에 나머지 70여 척의 함대로 진을 치고 있었다.”(142∼143쪽)
-> 검토 :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일본의 대‧중‧소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음이 확인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140척의 일본 함선이 한산도해전에 참여한 것이 된다. 이보다 심한 왜곡, 오류는 없을 것이다. 전부 소설 같은 이야기다.
④ “와키자카의 일본 선발대가 무섭게 견내량에서 내달리고 있을 때 이순신의 지시에 따라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통영만 쪽에 가서 매복했다. 원균과 경상우수영의 7척의 함대는 화도 쪽에 매복했다. 당연히 선봉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맡았다. 이순신은 광양 현감 어영담에게 명령했다. ‘5척의 판옥선을 끌고 가서 와키자카의 함대를 유인해 주시오’(145쪽)
-> 검토1 : 전라우수영 함대가 통영만 쪽에 매복했는지..경상우수영의 7척의 함대가 화도에 매복했는지...에 관한 아무런 근거..출처가 없다. 그냥 작가적 상상을 발휘했을 뿐이다.
-> 검토2 : 이순신의 장계에는 “..먼저 판옥선 5,6척을 시켜서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쫓아서 습격할 기세를 보였더니 여러 배의 적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 돌아 나오자, 적들도 줄곧 쫓아오므로, ...” 라고 되어 있다. 일본 함대의 유인 책임을 맡았다는 광양 현감 어영담...출처가 어디인지...?
⑤ “장사진을 펴며 일렬로 전진하던 일본의 주력 함대인 세키부네는 거북선과 부딪히며 그대로 바다 아래로 무너져내렸다.”(148쪽)
-> 검토 : 주력함대가 세키부네라니(문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음)...거북선의 충돌 전술이 또 묘사된다. 한산해전 때 거북선의 활약에 대해 이순신은 기록한 것이 없다. 다만 한산해전의 전과에 대해 이순신은...“좌돌격장 급제 이기남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잡아 머리 7급을 베었으며...우돌격장 급제 박이량은 머리 1급을 베었고...”(<견내량파왜병장>)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갑오년(1594년)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는 우돌격장으로 참여한 이언량이 일본의 중선(中船) 2척을 분멸한 것으로 전공이 기록되어 있다. 거북선의 전과(戰果)에 어디에도 충돌해서 격파했다는 내용이 없다. 나아가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거북선의 전과가 판옥선 보다도 우위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산해전의 경우 녹도 만호 정운은 일본의 층각대선 2척을 격파하였고,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조방장 어영담은 일본의 대선 2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거북선 보다 2배 이상의 전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북선을 폄훼할 일도 아니다. 앞의 검토(3)에서 확인한 것처럼 거북선은 대장선을 격파하고 지휘관을 사살하여 개전 초기에 적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키는 역할,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선봉의 역할, 적 함대의 진영 흩뜨리는 역할, 심리적 공포감 조성의 역할 등 전장의 주도권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니 단순히 전과만을 가지고 거북선의 가치를 따질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잘 못 알려진 것처럼 적선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선수에 충돌을 해서 격파한다는 등의 오류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거북선의 역할에 주목해야 할 때이다.
*** 이배사님들께 꼭 알려드리고 싶은 내용입니다. 신화화된 거북선, 만능의 거북선에서 판옥선의 문제점을 보완한...최첨단 근접포격용 돌격선으로..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⑥ “좌열에서 포를 쏘고 배를 90도로 돌려 뱃머리에서 포를 쏜 후 다시 90도로 움직여 우열에서 포를 쏘았다. 판옥선이 90도씩 회전하는 그 순간 함포를 재장전하는 시간과 포의 열기를 식혀야 할 시간을 확보하였다. 그렇게 학익진을 전개한 조선의 함대가 일사불란하게 몸을 틀어가며 포를 쏘았고, 그러면서도 대열을 유지하였다.”(148쪽)
-> 검토 : 참으로 어려운 부분을 소설처럼, 만화처럼 쉽게 묘사했다. 거북선에서, 판옥선에서 총통을 어떻게 운영했는지는 아직도 정론이 없다. 정론을 확립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와 관련된 임진왜란 당시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전을 기록한 이순신의 <장계>가 그나마 참고해 볼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자료이다. 일부 거북선을 연구하는 분들(특히 총통을 연구하는 이공학 분야 연구자)이 거북선의 포혈 좌/우 각 6개, 용의 입에 1개, 꼬리 밑에 1개 총 14개소에 총통이 모두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4개 소에 모두 총통을 배치하려면 총통발사에 관련된 인원이 최소 42명(총통 1문당 3명이 배치될 경우) 이상이 필요하다. 승선 인원 130명 기준...격군 약 72∼80명(노 18∼20개, 하나의 노에 4명 할당 시)을 제외하면 활을 쏘는 사부와 총통을 쏘는 포 요원 등의 전투요원과 타공, 요수, 정수, 무상 등의 필수 항해 요원, 지휘관을 보좌하는 군관 및 행정요원 등에 50여 명이 배정될 수 있을 뿐이다. 과연 50여 명의 인원 중 사부 15명∼18명과 항해 요원, 군관 및 행정요원 등을 제외하고 몇 명이나 총통 운영에 배치할 수 있었을까? 조선 후기의 기록을 보면 총통을 발사하는 전문요원인 화포장이 대개 10명 정도로 기록된 자료가 많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거북선은 이보다 다소 작았음을 전제했을 때 화포장은 이 보다 적은 8명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화포장 1명이 1문의 총통을 책임지고 운영한다고 보았을 때 거북선/판옥선 1척에는 8문 정도의 총통 운영이 가능하며, 포요원은 24명 정도가 소요된다. 이렇게 볼 때 거북선, 판옥선의 모든 포혈에 고정된 총통이 배치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이 문제는 현재 연구자들 사이의 쟁점 사안인데..저의 의견을 한 번 피력해 보았습니다) 저자는...이런 고민 없이 모든 포혈에 총통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전제하고 좌열에서 쏘고, 90도 회전해서 우열에서 쏘고...참 편리한 생각이다.
⑦ “이 때 통영 쪽에 매복해 있던 이억기의 함대까지 일본 함대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등 뒤에서 조선군의 함포 소리가 들리자 일본군들은 사색이 되었다. 바다에서 조선의 수군에게 빠져나갈 곳 없이 갇혀버렸다. 그 뿐 아니었다. 화도 쪽에서 원균의 판옥선 7척이 부지런히 가세해서 와키자카를 포위했다. 학익진이 세 방향에서 전개된 것이다. 세 방향에서 쏘아대는 조선군의 함포 사격에, 돌격만을 생각했던 일본의 전투선들은 포 받이 역할만을 할 뿐이었다.”(149쪽)
-> 검토 : 통영 쪽에 이억기 함대가 매복해 있었다..화도 쪽에 원균의 판옥선 7척이 와키자카를 포위했다. 학익진이 세 방향에서 전개되었다...모두 저자의 주관적 각색이다. 심각한 수준의 사실 왜곡이다.
⑧ “와키자카의 안택선 역시 격침되었다. 와키자카는 급히 작은 전함으로 옮겨 타고 한산도로 도망하였다. 살아남은 왜군 수백 명이 와키자카의 뒤를 따라 한산도로 기어올라 가쁜 숨을 내뒤며 쓰러졌다. 그러나 끝까지 쫓아 온 조선의 판옥선들이 와키자카를 한산도까지 실어다 준 마지막 전함마저 불태워버렸다. ...원균은 다른 쪽에서 일본 함대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이 포위를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 틈을 노려 와키자카가 탈출을 시도했고, 결국 살아서 도망치고 말았다.”(150∼151쪽)
-> 검토 : 와키자카는 노의 수가 많은 조선(早船)을 타고 있었는데, 전세가 불리하자 필사적으로 후퇴하여 견내량을 거쳐 김해에 도착하였다. 한산도로 도망한 자는 와키자카의 부하 장수와 장병들이다.(<脇坂記>의 기록 200여명, <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 400여 명) 와키자카가 한산도로 도망갔다가 탈출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저자는 무슨 자료를 본 것일까? 아마도 <협판기>를 직접 보지 않았거나, <협판기>를 인용한 2, 3차의 잘못 해석된 자료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 한산해전 종합 검토 : 한산해전 관련 1차 자료는 이순신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이고 일본의 자료는 <협판기(脇坂記)>이다. 그런데 저자는 <견내량파왜병장>의 내용도, <협판기>의 내용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략적으로, 소설처럼 이 글을 쓴 것 같다. 위와 같은 오류가 이 책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오는 까닭은 1차 사료가 아니라 기존의 다양한 2차, 3차, 4차 자료들을 저자 수준에서 임의적으로 수집하여 내용을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임진왜란 해전 관련해서 이제까지 이런 책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나올 수 없는 책이다(이런 정도의 자료 해석 수준으로는 그 어떤 논문집에도 논문이 게재될 수 없을 것이며, 학위논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저자의 제대로된 연구성과를 토대로 서술된 것이 아니라 유투브 동영상을 만들며 저자의 관점에서/저자의 수준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한 마디로 이 분야 전문/선행 연구자들로부터 심사과정을 거치거나...검증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
4. 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에 대한 비판적 검토(4) 소감/결언
- 이 책은 연구서가 아니다. 이순신/임진왜란 관련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면서 수집하고, 작성한 자료를 엮어 책으로 낸 것이다.
- 저자는 연구서를 낼 만한 이순신/임진왜란 관련 객관적 연구실적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중간 중간 저자가 강조하고, 역설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저자의 수준에서 각색한 아무런 근거 없는 상상의 산물이거나 강의용 애드립이다. 저자는 논의하는 주제의 기존의 연구성과 나아가 쟁점이 되는 부분에 대한 이해도도 깊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이 책의 수준은 상식을 넘어서지 못한다. 오히려 상식 이하의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통영에 사시면서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통영 시민들
의 한산해전 이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 처음 검토할 때는 저자의 홍보 태도나 사실의 왜곡에 대해 심기가 불편하기도 했는데, 검토가 진행될수록 점점 저자가 걱정이 된다. 이런 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판매하고 있으니 그 후폭풍을 어찌 감당할지!(일반국민들에게 너무나 널리 알려진 한산해전...에 대한 저자의 이해가 참으로 우려스울 정도이다. 통영의 한산대첩제 관계자들이 이 책을 본다면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앞으로 이 책은 이순신을 처음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오류 찾기 시험용으로 사용하면 좋을 듯 하다.
* 결언 : 이 책의 실체를 알았으니 더 이상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검토는 여기서 그치도록 하고 나머지 짐은 격군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읽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끝>
첫댓글 맞아요!
오류 찾기 숙제로써 아주 좋은 책이군요..
고생하셨습니다..ㅎ
유투브 동영상 강의와 저서가..참 다르네요. 저자의 유투브 동영상 감의를 몇 강좌 들었을 때는..좀 오버하지만..그런대로 들을만 하다..이런 느낌이었는데...활자화..되니 완전히 다르네요....저자도..이런 사태 예상 못했을 듯..싶어요.
마지막 검토를 멋지게 해 주셨네요.
저도 하다가 이젠 하기 싫어지고 회의감이 들기도 하더군요.
왜 이짓을 해야 하는가?
그래도 이순신장군이 주는 교훈을 국민 다수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명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의 관심보다 더욱 줄어드는 검토 욕구입니다.
우리 회원들도 이젠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듯하니 저도 이쯤에서 막살할까 싶은 마음이 듭니다.ㅠ
우리의 영웅..이순신....을 일본 사람들이 어느 시점부터 제대로 알게 되었는지... 평소의 관심 주제였는데,.. 김준배 교수가 좋은 연구성과를 출간하여 나름대로 속시원하게 정리를 하였구요. 거북선과 판옥선의 총통운영 ....특히 몇 문의 총통이 배치되었을까..몇 명의 총통운영요원이 배정되었을까..가 궁금했는데...우리 연구자님들..제대로 속 시원하게 ..입장 표명을 정확히 안해 주셔서...나의 의견을 한 번 피력해 본 것입니다.(이 문제...좀 더 고민해 보시길..)
참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입장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일단..인터넷..다음.. 통합 웹..카페에... 황현필..이순신의 바다 ..검색하면..저와 격군님이 올린 몇 개의 검토안이...노출이 되어 있는 상태이니..저자와 출판사가 이미 보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순신의 바다>에 대해 찬양, 칭송 일색의 블로그, 후기, 댓글..등이 넘쳐나는 가운데 비판적 시각, 오류의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었으니...시간이 가면서..어느 정도 중화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검토 내용을 많이 보아 주시고...SNS를 통해 널리 알리는 것도...한 방법일 듯 싶네요...ㅎ
역사를 연구하는 후손들의 책무, 사명감...
수고많으십니다
사실은 검토하면서..깜짝 놀랐습니다. 수년간 이순신/임진왜란 관련 자료를 뒤지면서..유투브 동영상 강의준비를 하고..강의 내용에 대한 호평도 쏟아지고..60만명의 팔로어도 생기게 되고...이런 분의 ...이순신/임진왜란..이해 수준이..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안했거든요. 유투브 동영상..오류가 있었지만...나름대로 들을만 했거든요. 그런데 활자화되니....그게 아니네요...또 한편..짐을 내려놓으니..홀가분하네요...ㅎ
인쇄해서 읽었습니다.
5쪽 분량이면 논문 심사평입니다.
논문 투고 후 이런 심사평을 받는다면, 연구를 안하던지..장계부터 정확하게 읽던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준으로는 논문 투고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죠~
저는 일심님 검토 글을 읽고,
우선 <<임진장초>>의 <견내량파왜병장>을 쭉 읽었습니다.
마치 목욕할 때 때를 밀고 찬물로 헹군 기분입니다.
다음으로 제가 원고를 쓸 때 혹여나 '연합'의 용례를 어찌 사용하고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확히 잡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황현필 강사 외 전문가로 자칭하는 분들도 해전 당시 일본군이 이순신의 이름을 숙지하고 호명하였다고 강의하는 내용에 대해, 김준배 선생님의 <일본 문헌 속의 이순신 표상> 내용을 소개 연결해 주셔서 정확한 사실을 습득했습니다. 이통제 이순신의 정확한 함자가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시점이 1700년 전후네요..
몇 년 전 <이순신 정설 확립>을 위해 순천향대이순신연구소가 있는 순천향대학교에서 학술행사가 있었죠..
당시 김시덕 선생님의 강의 내용 중 <징비록>과 이 부분을 언급하여 주셨습니다.
세밀한 검토,정확한 내용 제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역시..열선루님의 눈썰미가 매섭네요... 제가 이제까지 이순신 장군을 공부하면서..늘 자문하고..살펴보았던 문제 중의 일부를..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 때문에 ..쏟아 놓게 되었네요.....이순신..일본인들은 언제부터..이순신을 제대로 알았을까..그들은 왜 이순신을 연구하고..때로는 존경했을까....그들은 어떻게 이순신을 활용했을까...일본 자료를 세부적으로 연구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내용인데...김시덕 교수에 이어..저의 제자이기도 한 김준배 교수가 일본통으로서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으니..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또 한편..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거북선의 해전 전술 관련 .....많지는 않아도..어느정도...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분명히 있는데...왜...충돌 전술이라는..재래식 전술로 둔갑을 시켜 이리도 오래동안..드라마..영화..소설..심지어..한국사 강사로 명망이 있는 ...황현필이라는 분까지도...그렇게 이해하고..전파하게 되었을까...결국은 이순신을 연구한다는..연구자들의 탓이 아닐까 생각됩니다......이런 문제들 포함해서....제가 물러나기 전에 마무리할 주제들이 꽤 있네요...ㅎ.
넙쭉~~~지금은 업무시간이라 나중에 보려고 출력해서 챙깁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여수 본영에 사시는 이배사님들...한산도 옆 통영에 사시는 이배사님들...좀 더 관심을 가지시고...함께 배워봐요....ㅎ
만약 이배사의 의견이 저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유튜브 화면에 비친 그 양반 성격이나 언행을 감안하면 아마도 겸허히 수용하기 이전에 자기 논리를 앞 세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가 좀 걱정스럽더군요.
세상은 호/불호, 긍정/부정이 있지만..그래도..역사적 사실/학문의 공간은 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자..출판사 이미 보았을 거구요. 더 중요한 것은...인터넷 공간을 공유하는 저자의 팔로어들...일반인들이지요. 자료를 살펴보면...나름 판단 기준이 서지 않겠습니까? 60만 팔로어...굉장한 영향력을 지닌 분이기 때문에...오히려 더 ..이런 비판적 시각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이런 저서..처음 보거든요....이 분...제가 알기로...이 책이...첫 저서..이거든요...많은 생각을 하겠지요... ㅎ
안녕하세요
일심님을 만나 뵌적은 없지만 예전 KBS역사스페셜 영상에서는 몇 번 보았습니다.
일심님께서 쓰신 이순신의 바다라는 책에 대하여 비판적 검토 1~4까지 잘 읽었습니다.
검토가 완료되시면 이를 바탕으로 코로나가 잠잠해지는 훗날에 이배사에서 토론도 하고 그리고 저자(황현필)와 토론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검토한 내용처럼 잘 못 된 책을 읽은 많은 구독자분들의 역사 문제를 제대로 알릴 필요가 요구됨) 감사합다.
설 명절 잘 보내세요^^
넹..반갑습니다. 이배사 토론은 지금..이 곳이 자유토론방이니..관심있으신 분은 보시고, 의견이 있으신 분은 댓글 달고 하면 될 것 같구요. 저자와 토론 문제는...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일단은 역할을 한 것이지요. 지적하고 비판한 부분에 대하여 저자가 어느정도..반론을 하고 싶은 부분도 있겠지만...자료의 오류에 대한 지적들...특히 격군께서 지적하신 부분들은...반론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들이어서..저자와 출판사에서..참고하면 될 것 같아요. 즐거운 명절되세요...^^
쪽집게 과외를 받은 느낌입니다.
덕분에 공부하고 갑니다 ㅎ
한산해전 관련된 것이니...과외 공부만 하고..도망가지 마시고...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널리 알려 주세요. 이전에 그만두려다..한산해전까지 검토한 이유는..통영에 대해..한산해전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가지고 있지만...이 책...한산해전 뒤로...정말...안 보았어요...또 검토할까봐...보기가... 두려워요 ^^
애정을 가지고 검토해 주신 일심님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부족한 공부도 보충하구요.ㅎ
자료의 오류에 대한 지적에 대해 그쪽의 반응이 사뭇 궁금해 지기도 합니다.
60만 팔로어들이 있으니...그냥 밀어부치겠지요...그러나 역사는..진리는...어떤 열광하는 그룹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니..그리고 활자화되어..두고 두고..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테니...아마도 다시는 이런 책 안 만들겠지요..관심을 가져 주셔서..고맙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