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구국의 낙하산 이순신, 조선을 구하다
앞서 신사임당과 아들 이이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려드렸는데요. 같은 시기 덕수 이씨 가문에 또 한 명의 영웅이 등장하니, 그분은 아아~, 성웅 이순신 제독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임진왜란을 패배한 전쟁이라고 여기지만 이는 가리지날입니다. 제대로 대비를 안 해 초기에 너무 쉽게 패했을 뿐, 전체 군인 사망자수는 조선과 일본이 비슷한 수준이었고, 비록 조선의 민간 피해가 컸지만, 엄연히 결과적으로는 영토를 지켜낸 승리한 전쟁이었지요.
조선 전기 200년간은 통일신라시대와 더불어 오랜 기간 외적의 침입이 없던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그건 명나라가 중원을 굳건히 지킨 효과가 컸지요. 우리가 흔히 명나라 군대라고 하면 약하다는 이미지를 갖지만, 애초 주원장이 홍건적을 이끌고 원나라를 몰아낸 직후에는 80만 대군까지 거느린 강군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성계가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으로 진출했다면 잃어버린 만주 땅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권력에 눈이 멀어 만주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당시 왜구를 물리치며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받던 이성계와 주변 장수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북쪽 몽골 초원으로 밀려난 원나라 군대를 뒤쫓고 있던 명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의 요동 침범에 대응하면 당해낼 수 없단 걸 뼈저리게 알고 있던 것이죠. 왕의 명령을 따르자니 5만여 명 군대가 몰살할 판이고, 명령을 어기자니 목이 달아날 터. 마침 총사령관 최영은 우왕이 자기 곁에 있으라며 붙잡는 바람에 따라오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목숨을 건 도박을 한 셈이지요.
실제로 명군이 북방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일 당시, 베트남도 잃어버린 북방 고토를 회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베트남은 원나라 최전성기 쿠빌라이칸의 침공 시 백등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세 차례나 물리친 바 있었기에 자신감을 가졌다는데, 북방을 정리한 명나라가 작심하고 1407년 20만 대군을 보내어 베트남군을 깨버립니다. 그리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와 태자는 명나라 황궁까지 끌려가 목이 잘리면서 한때 명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당시 이성계 등 야전 사령관들의 판단이 사실 옳았다고 보입니다.
이처럼 굳건하던 명나라가 서서히 망조가 들고 만주 여진족이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막 일어나던 16세기 후반, 일본은 150여 년간의 전국시대 내전을 끝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장악합니다. 앞서 세종대왕님 편에 언급했듯이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접한 뒤 내전에서 유용하게 쓰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자, 땅을 더 차지하고픈 욕망 속에 도요토미는 조선을 지나 명나라를 거쳐 인도까지 먹겠다는 야심을 품고 각 다이묘(지방 영주)에게 전쟁준비를 독려하지요.
하지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하며 중개 무역으로 먹고살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이에 1591년 조선에 조총 2정을 바치며 일본의 전쟁 준비 소식을 전하지만, 조선 정부는 조총을 시범 발사해보고는 아무리 빨라야 1분에 1발씩만 발사 가능해 활보다 발사 간격이 길고, 총통보다도 약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요.
당시 조선이 그렇게 판단한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숙련된 조선 군사의 화살 발사 간격이 조총 발사 간격보다 3배 빨랐던 건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조선의 일선 군사들에게는 일본에 조총이란 신무기가 있더라는 정보가 전해지지 않아 임진왜란 초기에 일선 장수와 병사들은 조총을 처음 보고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문제는 조선 조정은 실제 일본에서 조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랐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던 오다 노부나가는 훈련 시간이 짧게 걸려 일반 농민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조총의 유용성을 깨닫고 세계 최초로 3단 대열 사격 전술을 개발합니다. 즉, 쏘고 난 뒤 뒤로 물러서 준비하는 사이에 다음 열에서 총을 쏘는 식으로 프로세스를 개선하여 1분당 3발 연속 발사를 가능케 함으로써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관동 지역을 주름잡던 다케다 신겐의 기병대를 몰살시킨 경험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지요. 당시 이 전투에서 유래한 말이 ‘무댓뽀(무철포)’입니다. 철포(조총)도 없이 덤비는 다케다 군대의 무모함을 비웃은 것이죠.
게다가 정탐차 일본으로 조선통신사를 보낼 때도 나름 분란을 없앤답시고 동인, 서인 한 명씩 보냈더니만 서인 황윤길은 “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늘 반대 주장을 하던 동인 측 김성일이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하필 그때가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인지라 김성일의 의견을 채택해 또 한 번 대비할 기회를 놓칩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1년 전부터 전쟁 소문이 떠돌았다고 합니다. 특히 영남 지방에선 곧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에 피난 가려는 양반층의 짚신 사재기가 일어나 짚신값이 폭등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요.
이런 수상한 정세 속에서 남인의 영수, 류성룡은 만약을 대비해 선조에게 젊은 무관들의 발탁을 추천하니 그 중 한 명이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원래 이순신은 다른 무신들에 비해 늦은 32세에 과거에 합격해 진급도 늦었습니다. 1587년 두만강 국경에서 여진족의 습격을 막던 중 벌어진 녹둔도 전투 당시, 수십여 명의 조선 수비군을 향해 1000여 명의 여진족 기병이 기습해 많은 부하가 죽고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자 부상 당한 몸으로 적군을 추격해 그나마 절반은 구해오지요. 그러나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상관 이일이 처벌을 두려워해 허위 보고를 하는 바람에 패장으로 낙인 찍혀 사형 위기에 처하게 되죠. 하지만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선조는 이순신을 사면하고 백의종군을 명하며 눈여겨본 적이 있었다네요.
흔히 우리는 백의종군이라고 하면 장군이 군졸로 강등되어 창 들고 일선에서 싸우게 되는 처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잠시 야전 지휘를 놓고 참모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고위 임원을 하다가 고문 역으로 빠지는 것과 같은 형태이지요. 그러자 이순신은 다음해 이일과 함께 여진족 부락을 역습해 직접 여진 추장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려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일선에 복귀하게 되는데, 그후 전라도 정읍현감으로 부임했다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합니다.
원래 선조는 매우 똑똑하고 사리 판단이 빠른 현명한 군주였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정통성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이게 결국 그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그는 조선 왕 중 최초로 정비 소생 대군이 아닌 후궁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습니다. 선조 바로 앞 임금인 명종은 세자가 일찍 죽어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건강이 악화되자, 미래를 예감한 듯 여러 왕손들을 불러 환담을 하다가 왕의 모자, 익선관을 써보라고 권했다지요? 그러자 다들 좋다고 왕관을 썼으나 열두 살 하성군(선조)만은 임금님의 관을 쓰는 것은 신하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며 거부했고, 이를 눈여겨본 인순대비(명종의 부인)가 그를 왕에 올렸습니다. 그 일화 말고도 어릴 적부터 총명하다고 익히 소문이 났던 선조는 콤플렉스를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고, 우수한 인재 등용에 노력했기에 전란이 터지지 않고 오래 살지만 않았다면 명군으로 기억되었을 인물입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3년 전 터진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불교계가 공모했다는 모함으로 서산대사(휴정)와 사명대사(유정)가 잡혀 왔을 때에도 죄가 없다고 풀어주었고, 이순신에 대한 처벌 상소에도 명확한 판단을 했으니, 선조가 가짜뉴스에 속는 암군이었다면 임진왜란 시 맹활약한 이분들은 전쟁 전에 이미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이처럼 선조는 이미 이순신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고,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이던 류성룡도 어릴 적부터 그의 됨됨이를 잘 알았기에 사간원에서 고속 승진에 줄곧 반대했음에도 결국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보냅니다.
당시 이순신을 수군의 60%가 집결해 있던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보냈으면 임란 초기에 더 빨리 전쟁 상황을 역전시키지 않았을까 아쉬운 측면이 있지만,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보낸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즉,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도) 6개 수군 진영 중 전라좌도가 가장 문제가 많은 부대였기 때문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겁니다. 수년 전 왜구가 호남 해안을 침탈한 적이 있었는데 전라좌수영 수군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죄다 도망가버려 군기반장이 필요했거든요. 또한 당시만 해도 일본이 그렇게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조선 전체를 먹으려 들 줄 모르고 1만여 명 정도의 왜구가 해안가를 노략질할 것으로 오판한 것이죠.
하지만, 당시 종6품이던 이순신을 고속 승진시켜 정3품인 수군절도사로 임명한 것은 분명히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서인은 물론이고 같은 동인이지만 파가 갈라진 북인 측에서 보기엔, 왕의 권력을 등에 업은 류성룡이 친한 친구 동생을 낙하산으로 임명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 초기에 다른 수군절도사들이 그를 배척했고, 특히 수군 대선배 원균은 이순신에게 아주 적대적이었는데 이는 명백한 인사 정책의 실패였지요.
하지만, 이순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격한 군율을 시행하는 지엄한 사령관이자 자상한 관리자라는 상반된 이미지 속에 초기부터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전쟁을 염두에 두고 가상 해전을 실전처럼 거듭하며 혹시 소문대로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거북선을 만들게 합니다. 이에 불과 전쟁 발발 하루 전날 거북선을 완성하고, 전라도 수군이 1년 만에 문제 수군에서 구국의 강군으로 거듭났기에 기적을 이루었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 아니었고, 임진왜란 당시 다른 수영에서 만든 2척의 다른 거북선도 있었기에 거북선의 창시자도 아니지요.
반면 경상도 수군절도사 박홍과 원균은 배를 불태우고 도망갔으니….
이후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임진왜란 초기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에 기뻐하며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최초의 관직을 만들면서까지 연속 승진을 시켜주지만, 이후 이순신의 인기가 날로 올라가고 명나라에서도 찬사를 보내자 본인의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를 죽이려 들게 됩니다. 똑똑하기는 하나 너무나 자신의 안위만 걱정한 선조였기에 많은 의병장들 역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이었기에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사망했음에도, 그 당시부터 실은 일부러 총에 맞았다거나 전쟁 후 처벌이 두려워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대두되었지요. 실제로 선조는 이순신 제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시큰둥해 오히려 보고하던 신하들이 더 놀랐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순신과 선조와의 악연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앞서 제가 임진왜란은 승리한 전쟁이라고 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들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중 첫 번째는 일본군의 보급 실패였습니다.
수, 당의 고구려 침략에서도 항상 보급이 문제였는데, 일본 역시 보급이 발목을 잡습니다. 일본군은 부산으로 상륙해 한양까지 무작정 내달렸는데, 조선 국왕만 사로잡은 뒤 조선군을 총알받이로 세우고 조선을 보급기지로 삼아 명나라로 쳐들어갈 생각을 한 것이죠. 반면 200년간 평화 모드에 빠져 당시 3만 명이라던 조선군은 껍데기만 남은 조직이었고, 그나마 믿었던 신립 장군의 기병대는 조총부대의 공격 앞에 괴멸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가 버립니다.
일본에서는 패배한 성주는 당연히 본인의 성에서 할복 자살을 하거나 항복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조선이나 중국은 군주가 잡히면 끝장이기에 도망간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지요. 실제로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백제 왕이 왕궁을 버리고 후퇴한 경우가 많았고, 고려 현종도 거란2차 침입 때 나주까지 피신한 전통이 있다는 걸 모른 겁니다. 그리고 6·25전쟁 시에도 동일한 일이 반복된 거지요. 그래서 역사 공부가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 20일 만에 한양까지 초고속 진격했지만 놓쳐버린 선조를 잡으러 가야 하는데 후방에선 이순신 제독이 일본에서 오는 보급선을 차단해버렸고, 조선 땅에선 빼앗아 먹을 식량도 모자랐기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 함락 후 더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게다가 곡창지대 호남으로의 진격은 진주성 전투, 웅치, 이치 전투, 금산 전투 등에서 번번히 막히다 보니, 15만 명의 일본군 중 1만 명은 쫄졸 굶다가 항복하게 됩니다.
그후 이들 항왜 군인들은 조선군에 편입되는데, 훗날 ‘이괄의 난’ 때 인조가 남쪽으로 도망가야 했던 것도 이괄 부대의 선봉에 선 항왜 부대가 맹활약했기 때문이었고, 그들 중 일부는 심지어 40여 년 뒤 병자호란 때까지 참전하게 됩니다.
두 번째 승리요인은 의병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에는 일반 백성들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게릴라 전술로 큰 활약을 했다고 여겼는데, 최근 연구에선 이들 중 상당수가 원래 군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즉, 당시 조선은 지역 방어 전략이어서 각 지방마다 일부 직업군인이 있고 비상시 평민들을 소집해 훈련을 시키고 있으면 중앙 정부에서 보낸 군사령관이 지휘하는 방식이었는데, 일본의 빠른 진격 탓에 제대로 정비되기도 전에 다 통과해버린 겁니다.
그러니 이들 군인이나 소집된 청년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도 없고 밥도 주는 이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각 지역의 부유한 유지들이 직접 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전투를 독려한 겁니다.
그래서 홍의장군 곽재우 등 각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군인이 앞장서고 백성들이 동참한 의병들이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고, 나중에 수습이 된 다음에 다시 관군으로 편입된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많은 일반 백성들이 울분에 차서 곡괭이며 몽둥이를 들더라도 일본에서 150년이나 내전을 치르고 온 베테랑 군인들에게 게릴라전으로라도 맞싸워 이길 수 있었을까요? 군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훈련 며칠 했다고 갑자기 착착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일본군은 기습작전으로 나오는 각지의 의병들에 크게 당황합니다. 일본에서는 무사계급이 아닌 백성은 고분고분하게 새 주인을 따랐는데, 조선 백성이 얼마나 꼬장꼬장한 줄 몰랐던 거지요.
이처럼 흩어진 병사들과 백성들까지도 힘을 합쳐 싸웠지만, 이후 선조가 의병장들을 탄압하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 시에는 대부분이 의병으로 나서지 않아 인조가 고립무원에 빠지고 맙니다.
세 번째 승리요인은 조선군의 우월한 장거리 무기였습니다.
앞서 일본의 조총 위력을 설명드렸는데, 조선은 비록 조총은 없었지만 총통 등 소형 대포가 발달했습니다. 크기별로 천자문 첫 네 글자를 딴 이들 총통 중 가장 큰 천자총통, 지자총통은 육지에선 운용하기 어려워 수군에 배치했기에 이순신 제독은 일본 수군의 장기인 근접 백병전을 피하고 멀리서 포격으로 침몰시키는 전술을 썼으며, 행주대첩 등에서는 소형 총통과 함께 시간차 폭탄 비격진천뢰, 동시 발사 로켓화살 신기전 등 신무기를 선보이며 일본군의 의지를 꺾어버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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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황자총통
길이(cm) 130~136 89~89.5 79~83.8 50.4 88.8~89.2
구경(cm) 11.8~13 10.5 6~7.5 4 5.8~5.9
발사물 대장군전 1발/조란탄 100발 장군전 1발/조란탄 100발 차대전 1발/조란탄 100발 피령차중전 1발/조란탄 40발 피령목전 1발/조란탄 40발
사거리 900보 800보 800보, 1500보 1100보 1000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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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승리요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사 정책 실패였습니다.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선봉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이들을 잘 몰라요.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베테랑 다이묘들이 아닌 신참들이어서, 임진왜란에 대해 잘 모르면 이들의 존재는 미미하거든요. 도요토미는 조선 출병을 위해 모은 대군의 지휘관들이 딴마음을 먹고 본인을 배신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통일 과정에서 활약한 중신들 대신 자신이 새로이 키우던 30대의 전쟁 꿈나무들에게 지휘를 맡기고 군대도 예로부터 도요토미 세력권이던 관서 지역 일대에서만 차출했는데, 누가 1군을 맡을 건지 다투다가 더 적극적으로 어필한 고니시가 낙점되었지요.
그런데 독실한 가톨릭 신도인 고니시는 조선 땅에 천주교를 전파하겠다는 소명 의식을 가져서 본인 부대 휘장에는 십자가 마크를 걸고 포르투갈 성공회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를 데리고 들어와 선교 활동도 병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러 온 사람이 부산진성, 동래성, 신립 부대를 다 격파하고 양민을 막 죽이냐? 엉?
그러다 보니 일본학자 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웅천왜성(지금의 창원, 진해)에서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인들에게 포교했고, 잡아간 조선 포로 중 일부가 천주교로 개종했다며, 천주교가 일본을 통해 이때 조선에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아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 그리고, 왜 우리나라 드라마에선 고니시 옆에 승려가 같이 나오는 겁니까? 서양 신부가 같이 다녔는데….
만약 고니시가 평양에서 의주로 곧바로 공격했다면 이순신이 등장하기 전 전쟁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자신의 사위인지라 조선이 살아남아야 자기네 가문이 돈을 벌 수 있다는 개인적 이유도 있었기에 명나라와의 종전 협상을 주도하게 되지요. 그러고 보니 대마도주와 결혼시킨 고니시 딸의 이름은 마리아였네요.
이에 1군을 빼앗겨 앙심을 품은 가토는 평양성에서 멈춘 고니시를 욕하고 다녀서 조선 조정에서도 이 두 사람 사이가 매우 나쁘단 걸 알 지경이었어요. 그러니 고니시는 조선 측에 밀정을 보내 가토가 조선으로 건너오는 시기를 알려줘서 조선 수군이 가토를 대신 죽여주길 원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출정하지 않았고, 이를 빌미로 선조가 이순신 제독을 한양으로 압송해버리는 사태로 꼬이게 됩니다.
그후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에 갇혀 명군의 공격을 받던 가토가 고니시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이를 무시해버리면서 완전히 웬수 지간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가토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요토미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편으로 참전해 서로 칼을 부딪히며 싸우게 되는데, 이때 패배한 고니시는 목이 잘리고, 고니시의 땅도 가토가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만 해도 막장인데, 임진왜란 당시 총사령관을 맡은 도요토미의 양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겨우 20세 나이에 불과했어요. 원래 도요토미는 조선을 정복한 뒤 통치자로 우키타를 임명할 계획이었다는데, 이 젊은이는 한양 점령 후 연상의 조선 기생에게 반해 놀기에 바빴다고 합니다. 결국 도요토미가 애송이들을 선봉장에 세운 것도 큰 실수였던 거지요.
다섯 번째 승리요인은 명나라의 참전입니다.
흔히 명군이 일본군보다 더 포악했다고 비난하지만, 초기에 5만 명을 파견해 평양성을 탈환하고 정유재란 말기에 20만 명을 투입해 일본군을 압박했어요. 또 명군이 가져온 네덜란드제 거대 대포 ‘홍화포’의 위력을 보고는 일본군은 명군이 결코 약체가 아님을 알고 더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 역사상 중국에게 도움받은 유일한 사례라 할 만합니다.
당시 명 황제는 신종 만력제라는 암군이었는데, 48년의 재위 기간 중 무려 30년간 업무를 보지 않고 방에 처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 관료들은 황제 얼굴을 전혀 몰랐다고 할 정도였는데 30년 만에 갑자기 신하들 앞에 신종 황제가 나타나 조선을 구하라고 명하니 모두가 놀랄 지경이었다죠. 야사에 따르면, 어느 날 신종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서는 “황제는 유비 형님이 환생하신 것이고, 동생 장비가 조선 왕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지금 동생 장비가 위기에 처했으니 황제는 당장 구하십시오.”라고 했다나요?
이처럼 명군의 참전으로 평양성을 빼앗긴 뒤 벽제관에서 겨우 막아낸 일본은, 전쟁의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해안까지 철수하여 종전 협상을 벌이면서 명나라에게 조선 8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은 명나라가 직접 차지하고 남쪽 4개 도는 일본이 가지자고 제안을 하지요. 그러나 중간에서 중재하던 심유경의 장난질이 들켜 목이 달아나면서 협상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다시 벌어집니다. 정유재란 당시에도 신종은 명군이 대충대충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하여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고 다그쳐서, 가토 기요마사가 지킨 울산왜성 공격 시 명군이 죽자살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우물이 말라 죽을 뻔한 고생을 한 가토는, 그후 규슈의 영주가 되자 구마모토성을 지으며 우물을 120개나 팠다고 합니다.
뭐 일본 사정은 그렇다 치고, 황제 꿈에 관우가 나오는 바람에 조선으로 출병했던 명나라 장수들은 전쟁이 끝난 뒤 선조에게 “이게 다 관우 무안왕 덕이니 사당을 지어 보답하라.”고 요구해 1598년 숭례문(남대문) 밖에 첫 번째 관우 사당을 만들지요. 지금은 동묘에 새로 지은 관왕묘가 남아 있습니다만…. 그런데 관왕묘를 만든 후 첫 제사 때 명나라 장수들이 선조에게, 황제에게 행하는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조아리기)를 관우상에도 하라고 강요했는데,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이 겨우 이를 말려 사배례(네 번 절하기)만 하기로 타협함으로써 선조가 관우상에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겪습니다. 이후 인조가 병자호란 때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를 하기 전까지는 이것이 최대의 치욕이었지요.
이처럼 아군인지 적인지 헷갈리게 한 명나라이지만, 청에게 멸망한 이후에는 오히려 조선에서 나라를 구해주신 명신종 황제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어, 숙종 때에는 서인들이 충북 괴산에 만동묘 사당을 세우고 무려 1937년까지 매년 제사를 올려주었답니다. 하지만 중일 전쟁을 시작한 일제가 이를 고깝게 여겨 중단시키고 사당마저 불태워버립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승리요인은 우리나라의 날씨였습니다.
여기서 퀴~즈, 일본군은 바다에선 이순신 장군을 제일 무서워했는데, 육지에선 어느 장군을 제일 무서워했을까요? 권율? 김시민? 아뇨~. 동장군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대인 일본에서 4월에 출병한 일본군은 예상외로 전쟁이 길어져 1592년 조선 땅에서 첫 겨울을 맞이하는데…. 이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극악의 환경이었습니다. 애초 여름옷만 입고 왔는데 특히나 그때 유독 더 추운 날씨에 얼어 죽거나 동상 걸리는 경우가 허다해 전투를 할 수 없었다지요.
또한 여름이라고 해서 낫지도 않은 것이, 당시 일본은 육식을 전면 금지해 가축을 거의 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에 왔더니 가축 바이러스에 의한 풍토병에 감염되어 설사를 줄줄 했으니…. 아마도 이질과 콜레라였을 겁니다. 당시 시냇물과 강물을 통해 가축 분뇨가 그대로 흘러가던 시대이니 물을 마시고 집단 감염되었을 거예요. 결국 임진왜란 첫해를 제외하고 남쪽 해안에 왜성을 짓고 웅크리고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고 하네요. 정말 조선의 헬날씨를 진정 온몸으로 느꼈을 겁니다.
이처럼 조선은 이순신 제독뿐 아니라 수많은 영웅들 덕분에 어렵게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온 국토가 유린되어 오랜 기간 혼돈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조선 519년을 논할 때 임진왜란은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지요. 게다가 류성룡이 말년에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쓴 《징비록》은 조선에서는 거의 금서가 된 반면, 유출된 사본이 일본에 전래된 후 1695년에 발매되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바탕으로 기병, 포병, 수군 전술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중국으로 재수출되기까지 했지요.
그런 와중에도 조선왕조는 반성 없이 흘러갑니다. 선조는 새 장가를 들더니 떡하고 영창대군을 낳자 그를 새로 세자로 세우고 싶어 했지만 결국 광해군이 왕위를 승계합니다. 하지만 광해군 역시 아버지처럼 방계 출신인 데다가 둘째 왕자라는 본인의 위치가 늘 불안했기에 권위를 높이고자 창덕궁, 창경궁을 보수하는 한편, 새로이 경희궁을 짓더니 또다시 경복궁보다 더 큰 인경궁 공사를 벌이죠. 이에 백성들은 중노동에 죽어나가고 가뜩이나 모자라던 재정을 파탄낸 데 이어, 결국 새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한 뒤 감금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지요.
최근 여러 영화 등에서 광해군이 새로 일어서던 후금(청)과 명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잘했다고 하여 백성을 진정으로 생각한 명군이라고 나오기도 하지만…, 그건 가리지날입니다.
조선 때는 물론 구한말 사학자들도 그를 패륜 암군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광해군을 처음으로 명군이라 주장한 학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이나바 이와키치, 다카와 고조 등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들이에요.
1920년대에 일본제국의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과 만주는 원래 같은 민족이었다는 논리를 펴면서, 광해군이 옛 역사를 잘 알아 “우리민족끼리 잘 지내자.”며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한 외교의 달인이라고 띄운 것이죠. 그후 이 같은 역사 왜곡을 바탕으로 일본과 조선, 만주는 모두 예전엔 다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이었다며, 1932년 만주국을 세울 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데려와 꼭두각시 임금으로 앉히는 데 요긴하게 써먹습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명나라가 지원군을 요구했을 때 광해군이 은밀히 도원수 강홍립에게 “우리 군사를 살려야 하니 싸우지 말고 항복하라.”고 밀서를 쥐어주었다라고 아시는데, 그건 나중에 서인들이 광해군이 명나라의 은혜를 무시했다며 잘못을 논할 때 주장한 것으로 실체 증거가 없어요. 정작 광해군의 측근들인 북인들마저 친명파였기에 결국 명을 돕기 위해 파병을 한 것인데, 원래 광해군은 줄기차게 파병을 반대하긴 했습니다. 백성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들 군인들이 새 궁궐을 열심히 짓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만약 진짜로 중립 외교를 할 것이었다면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어야 했겠죠.
또한 문제는 원래 강홍립은 무관이 아니었단 거지요. 원래 문관 출신으로 명에 사신으로 다녔는데 명나라와 프리토킹이 가능한 출중한 중국어 실력을 보유했다는 이유로 총사령관에 앉힌 겁니다. 고려시대에는 문관도 종종 전투에 참여했기에 경험이 있었지만, 이 사람은 그런 경력자가 아니었으니 비극이 시작된 겁니다. 요즘에도 영어 하나 잘한다고 요직에 앉히는 경우랑 비슷하죠. 문제는 이들 중 다수가 영어만 잘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군대 경험이 없던 강홍립 역시 무고한 병사들을 죽이게 됩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당시 강홍립이 전투를 지시했는데, 진행 과정은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의 정반대 상황이었습니다. 즉 후금군은 1만여 기병대,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부대였기에 일본군에게 배운 3단 조총 사격술을 전개하지만, 이미 그 전투에 대해 더 연구한 후금군은 조총 사격 범위 밖에서 대치하다가 바람이 조선군 쪽으로 불자 말을 제자리걸음 하게 해 흙먼지를 일으킨 후, 긴 창을 앞세우고 돌격합니다. 그래서 조선군 조총수들은 자욱한 흙먼지가 들어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조준 사격도 없이 한 발 쏘고는 창에 가슴이 뚫려버립니다.
그렇게 8000여 명이 죽고 나서야 강홍립과 4000여 명의 잔존 병사는 항복합니다. 게다가 포로 중 양반인 장수와 부관 500여 명은 목이 잘리고, 평민 병사들은 후금군에 흡수되어 여러 전쟁에 끌려다니며 소모되니, 임진왜란 이후 겨우겨우 키워 온 정예병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진 겁니다. 즉, 임진왜란의 교훈을 가장 잘 소화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당사자가 아닌 여진족이었고, 결국 이들이 중원을 차지하게 됩니다. 강홍립이 대패한 이 사르후 전투는 결국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할 빌미를 제공하게 되니, 광해군의 우수한 외교력이란 것도 후대의 착각인 거죠. 또한 광해군 시기의 치적으로 꼽는 ‘대동법’도, 실제로는 광해군은 반대했으나 신하들이 관철시킨 것이라네요.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재해석이 오히려 식민사학의 잔재라고 비판합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 역시 선조의 DNA를 받아 본인 안위를 먼저 생각한 왕이었기에 병자호란 시 청군이 항복을 요구하자 결사 항전 대신 항복하러 나간 것이죠. 하나 더 어이없는 사실은, 애초 남한산성은 또다시 일본이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한양 남쪽에 새로 지은 전초기지였는데, 정묘호란을 겪은 10년 뒤에 병자호란이 터졌음에도 그 최후의 보루에 식량과 전쟁물자를 제대로 채워 놓지 않아 병사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 무능한 왕과 책상머리 관료들 때문에 백성 50만 명이 만주로 끌려간 것이죠.
다만, 그후 조선 조정이 포로 송환을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관련 영화 등에서 나오는데, 이는 가리지날 정보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1607년 선조가 일본에 사명대사를 파견해 “우리 백성은 (명나라) 천자의 자식”이라며 포로 송환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된 포로 중 5667명만 귀국길에 올랐지요. 당시 많은 일본 다이묘들이 이 사실을 숨겨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남은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도공은 무사급의 대우를 받은 터라 귀국을 거부합니다. 심지어 일부 도공은 조선에 돌아왔다가 다시금 동생이나 동료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간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조 역시 속환사를 파견해 임진왜란 때처럼 수년간 많은 포로를 데려왔는데, 일부 양반들이 돈을 구해 직접 만주로 찾으러 가다 보니 점차 몸값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돈 없는 양민들을 위해 조정에서 돈을 빌려주기도 했고, 송환금 인플레를 방지하고자 최대 협상금액을 100냥이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만, 양반들이 이보다 더 돈을 내고 데려오는 바람에 다른 평민들은 돈이 모자라 데려오지 못해 사회 문제가 됩니다. 그때 국내로 돌아온 많은 여성들을 몸이 더럽혀졌다는 뜻으로 ‘환향년’이라 불렀고, 이들을 손가락질하고 쫓아낸 슬픈 역사가 지금은 ‘화냥년’이라는 비속어로 남았습니다.
그 이후 수십 년간 돈 안 내고 탈출한 포로를 송환하라고 청이 요구해 일부가 붙잡혀 가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숨겨주었는데, 인조, 효종에 이어 현종 때까지도 머리를 조아리며 청 사신에게 사과해야 했지요.
그러고 보면, 조선왕조가 아주 야박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국제 정세 판단력이 매우 떨어지고, 군사력이 개판이며, 사회지도층이 제일 말썽이고, 현실 감각 떨어지는 관료들이 실제 부가가치를 창출해 주시는 백성을 우습게 보고 핍박했을 뿐이지요. 왠지 얼마 전까지 뉴스에서도 자주 보는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면…, 그건 기분 탓일 겁니다.
쓰다 보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2연타 환란을 간략히 설명했네요.
그리고, 끝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야기 시작 때 두 덕수 이씨 가문의 위인이 같은 시대에 나왔다고 했는데요.
이순신 제독은 강직한 성품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무관 임명 초기부터 돋보였다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들은 말년의 이이 선생이 덕수 이씨 가문에서 나온 이 기특한 젊은이를 한번 만나보려 했지만, 이순신은 “주위의 오해를 살까 두렵다.”며 인사청탁으로 비쳐질까 봐 거절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두 덕수 이씨 위인은 서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순신 제독에겐 생명의 은인이었다가 목숨을 위협한 내부의 적이 되어버린 선조 역시, 평생 단 한 번도 이순신이나 원균을 만난 적이 없었답니다.
첫댓글 중교학창시절 역사시간엔
몇년도엔 무슨일 또 몇년도엔 뭔 사건 하고
시험을 위한 암기공부위주의 역사시간이었는데 근래에 tv에 방영되는 역사이야기도 학교에서 배울수없었던 재밌고 유익한 프로그램이라 재미있게 보는중인데
마도로스님이 이런 재미있고 유익한 이순신 제독에 관한 글을 올려주셨네요.
전에 *명량*이라는 이순신장군에 관한 영화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올려주신 이순신장군의
그당시 상황
나라.외교.정치.등등
그동안 뒤에 가려져있던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풀어주시니 저에겐 많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위대한 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은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근인데
영화를 한편 본것처럼 긴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단한 역사학자 이십니다
역사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잘 보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정말 존경하는 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