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안경라 시인의 시집 가운데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이 눈에 들어오는 시는 이웃과 가족에 관한 작품들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비와 꽃」의 어머니. 「초경」의 딸아이. 「그냥」의 막내. 「노숙자」의 홈리스. 「제일 좋은 때」의 어머니. 「나 누구예요?」의 어머니. 「미쳤다」의 남편. 「아흔아홉 번째 아침」의 어머니. 「네가 행복하다면」의 아들. 「우울한 똥」의 아이. 「명언 두 줄」의 큰 오라버니. 「어여쁜 신부야」의 울보 신부. 「사랑한다는 말로 이별을 하고」의 어머니.
이렇게 작품 제목만 열거해봐도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시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맡은 배역이 있게 마련이다. 안경라 시인은 여성이므로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누나이거나 동생,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그 배역일 것이다. 그 많은 배역들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살아온 것이 안경라 시인의 인생일 것이다.
출판사 서평
(A) 낮잠 드신 구순 어머니
꽃이 입술을 다문 고요한
오후 한나절
꽃잎을 떠난 나비 한 마리
어머니 심장 속에서 날갯짓하는가 보다
가슴 절벽을 뚫고 깊은 향기,
들숨
날숨
처음부터 꽃이셨던
어머니!
(B) 불면의 노모 입 다문 귀 옆에서
환갑을 넘긴 독신 아들
이제 그만 주무시라는 독백이
열 번보다 더 길게 밤을 보내고 있다.
(C) 내년 생신 카드엔 이렇게 써야겠네
어머니!
이 봄, 어머니도 살아 계시니 좋은 때입니다.
(D) 이국 하늘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며
어머니 까만 눈동자처럼
반짝이는 별들에게 물었다
나, 누구예요?
나는 누구예요?
(E)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지요
지상에서 눈물 한 방울 떨어지면
천상에서는 백 송이의 꽃이 핀다지요
오래전부터 사랑한다는 말로 이별을 준비하신 어머니
오늘 소녀처럼 곱게 단장을 하고 떠나십니다
세상의 문을 닫고 영원한 안식의 나라 문을 열고 가시는 길
어머니 가시는 길 꽃길 되소서
가장 크신 사랑의 손 잡고 가소서
바람과 구름과 새, 햇살과 꽃과 달빛
이런 것들과도 친구가 되는 나라에서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오래오래 평안하소서.
인용한 문장들은 모두가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 들어간 작품들이다. (A)에서는 어머니에게서 ‘꽃’을 발견하고 (B)에서는 ‘불면’을 만나고 (C)에서는 ‘좋은 때’를 말하고 (D)에서는 ‘치매’를 보다가 끝내 (E)에서는 그 어머니와 ‘이별’을 하게 된다. 이별이라 하지만 슬픈 이별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별이다.
인생에서 노년과 죽음은 괴롭고 힘든 시기이지만 피할 수 없는 생명의 과업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 기간과 그 일을 어떻게 견디고 넘기느냐에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살가운 피붙이가 있다면 훨씬 수월하게 건널 수 있는 강물일 것이다. 안경라 시인은 한 어머니의 좋은 딸로서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어머니와 동행함으로 아름다운 이별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딸, 이러한 이웃, 부러운 일이고 감사한 노릇이다.
이 시집에는 인용하고 싶은 좋은 시들이 많다. 하지만 결론 삼아 두 편만 더 시 전편을 인용해볼까 한다.
급성간염으로 힘들었던 여학생 때
큰 오라버니는
야 임마, 그렇게 아플 때 시를 써 봐
사랑하는 사람 만나 스물 넷에
나는 재미동포가 되었다
이십여 년 만에 친정 가서
큰오빠 미안해요 그동안 자주 소식 주지 못해서
아냐 괜찮아, 너만 잘 살면 돼.
―「명언 두 줄」 전문
짐짓 심상한 것 같지만 많은 내용이 숨어 있는 글이다. 인생 삽화다. 단 두 줄. 단 두 마디의 말. 그렇지만 그 말은 인생을 바꾼 말이고 또 인생을 종합 정리한 말이다. 20년, 30년을 사이에 두고 메아리처럼 울리는 말이다. 멀찍이 인생을 바라보며 인생을 다스려주는 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힘이 있는 말인가!
산책을 하다가
수국 한 대궁 꺾어 오며 미안해 미안해
누군가 아버지를 이 땅에서 데려가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수국처럼
나는 그 누군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꽃의 눈물은 말라서 투명하고
내 기억은 나이 먹어 이별을 이해하네.
―「수국을 꺾으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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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인의 말 5
1부
꽃의 로댕 12
눈빛 ―누가 복음 22장을 읽고 13
품속 15
나비와 꽃 16
초경 18
그냥 19
내가 시인이라서 20
치통 ―백치白痴 21
치통 ―반성 22
자전거를 타다가 23
기다림 24
한 걸음에 대한 명상 26
노숙자 27
보湺 29
장맛비 31
아직도 널 기다려 32
제일 좋은 때 33
자세히 봤더니 35
2부
사부의 응원 38
밤바다에서 39
나비 40
천년 나무 41
나, 누구예요? 43
미쳤다 45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46
그러니까 47
봄에게 48
돌배나무꽃 49
그대를 생각하는 동안 저녁이 50
아흔 아홉 번째 아침 51
네가 행복하다면 52
우울한 똥 54
동백나무 55
봄비 56
불만 58
화성, 그녀 59
3부
웃는 꽃 62
수선화 63
방금이라는 시간 64
오늘을 측량한다 65
아픈가요 66
가시 67
야자놀이 68
밥 70
블랙홀 72
빛이 나는 것들 73
명언 두 줄 74
한 사람 75
소나기 76
푸른색을 뺀 어떤 고독 77
아직도 가야할 길 78
몰입 79
너를 사랑하는 일 80
4부
하늘 82
하늘색깔 83
어여쁜 신부야 84
괄약근 86
가을산 87
시즌 88
일문일답 90
이것도 91
하루살이 92
작품 93
모자 쓰고 잠이 드셨네 94
TV를 보다가 96
사랑한다는 말로 이별을 하고 97
수국을 꺾으며 99
혓바늘 100
석류 101
담장을 허문 집 102
해설 파스텔 화폭 같은 시 - 나태주 104
작가 소개
안경라
글작가
안경라 시인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고, 미주 {중앙일보}와 《한글문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듣고 싶었던 말』, 『물소리 바람소리(공저)』등이 있다. 제1회 미주동포문학상 (시), 제16회 가산문학상(시), 제1회 해외풀꽃시인상을 수상한 바가 있고, 현재 재미시인협회 회장과 미주한국문인협회이사, {미주시학} 편집주간을 맡아하고 있다.일상적 대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함과 동시에, 자아와 세계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통해 다만 일상이 아닌, 보다 진지한 삶의 문제로 이끄는 데에 안경라의 시가 있다. 즉 일상의 시화詩化, 이것이 안경라 시집 『아직도 널 기다려』의 시세계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