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세계 열강의 시선에서 본 조선의 최후
전혀 유쾌하지 않은 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 등 조선 말기 발암 유발 이야기 대신 당시 열강들의 입장에서 조선의 멸망을 간략히 압축하겠습니다.
- 흥선대원군의 정치
60여 년간의 세도정치를 끝장내고 서원을 축소해 왕권을 강화한 흥선대원군의 집권 초기는 매우 훌륭했어요. 당시 서원은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도 면제받았으니 고려 말기 거대 불교 사찰처럼 국가 경제엔 큰 재앙이었거든요.
또한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쳐들어온 프랑스, 미국과의 전투에서도 승리 같지 않은 승리를 거둔 뒤 더 강하게 쇄국정치를 표방했는데, 지금에야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난하지만 당시로선 당연한 결정이었지요.
실제로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일시 점령했을 때, “조선이 9명의 프랑스 신부를 죽였다. 우리 백인 1명은 조선인 1000명과 맞먹는 가치이니 우리는 9000명의 조선인을 죽이겠다.”고까지 협박했으니, 당시 위정자로선 서양 오랑캐의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 문호 개방 요구는 씨알도 안 먹히는 무리한 요구였지요.
이처럼 두 차례 외국 군대를 물리친 대원군은 정치력은 훌륭했으나 경제 관념이 적었으니, 왕실 권위를 세운답시고 임진왜란 때 불탄 뒤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새로 짓느라 당백전을 만드는 등 국가 경제를 어지럽혔고, 며느리 하나 잘못 골라서 조선왕조를 다시금 민 씨 세도정치로 회귀하게 만들어 망조를 들게 하니…, 대원군의 한계였습니다.
- 더 그레이트 게임
이런 암담한 조선에게 외부의 사정은 더 엄혹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를 맞아 세계 열강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때였는지라 청나라가 100여 년 전의 위세는 사라지고 서구 열강이 갈라먹는 먹잇감 신세가 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충격을 받고 해외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부국강병을 모색합니다. 그러나 민씨 일파는 대원군의 정책에 무조건 반대한답시고 무리하게 1876년 개항을 서둘렀다가 일본, 청, 독일 등 외국 자본에 경제가 잠식당하게 되니, 이는 120여 년 후인 1997년에 벌어진, OECD 가입 후 금융 개방했다가 투기 자본에 고스란히 당했던, IMF 외환위기 상황과 참 유사했습니다.
그런데도 민씨 일가가 부정축재를 일삼으면서 국고가 바닥나자 군인 월급마저 떼먹었고, 1882년에 임오군란이 터져 청군이 국내로 진군해 23세의 위안스카이가 내정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스러운 항복을 한 후, 조선은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어 자치는 인정되나 외교, 국방은 청나라에 오로지 의존해야 하는 처지였지요. 이에 청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고종은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는데, 러시아는 그 대가로 늘 원해 왔던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을 얻고자 함경도 영흥항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고 승낙을 받아냅니다. 그러자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답시고 1885년 거문도를 점령해 해밀턴섬이라고 이름까지 짓습니다. 2년 전 수교 맺은 나라의 섬을 무단 점령한 것이죠.
하지만 거문도 섬 주민들은 이 점령군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합니다. 워낙 탐관오리들이 세금을 떼먹었는데 영국은 아주 신사적으로 먹을 것도 주고 세금도 안 받고 영어도 가르쳐주고, 무료로 진료까지 해주었으니까요.
영국이 이렇게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막강한 해군을 바탕으로 캐나다, 인도, 중동, 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 등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세계 최강대국 영국은, 시베리아로 팽창한 뒤 발칸 반도와 아시아로 남하하려는 러시아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러시아는 영국처럼 바다로 세계를 장악하고 싶어 했지만, 러시아의 바다는 모조리 겨울에 얼어붙는 바람에 끊임없이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고자 노력했거든요. 그래서 1813년 페르시아(이란)와 협약을 맺어 항구를 빌리려 하자, 이라크와 인도까지 삼킨 영국은 페르시아를 압박해 무산시켜버리지요.
대신 페르시아 위쪽 땅을 보상 차원에서 러시아에 떼어주게 되니…. 같은 민족이 살던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이 지금과 같은 국경선으로 갈라져 타지키스탄은 오랫동안 러시아-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이 점령하게 되지요. 중간에 페르시아만 땅 뺏긴 바보가 된 거죠….
그래서 1813년 러시아의 페르시아 진출로 시작해 1907년 영러협상까지 약 100년간 전개해 온 19세기 글로벌 냉전체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페르시아에 이어 조선을 새로운 각축장으로 삼게 된 겁니다.
하지만 정작 이 거문도 점령에 대해 가장 늦게 안 곳은 우리의 조선 정부…. 장하다. 청나라와 프랑스, 러시아, 일본 대사가 조선 관리들에게 급히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청·프·러·일 대사: “소식 들었냐청? 영국 넘들이 너네 거문도 섬을 점령했다스키. 빨리 영국에 항의해라니뽄!”
조선 관리: “거문도? 거제도를 잘못 얘기하는 거 아니조선? 어제도 거제도 멸치 진상품 잘 받았다한양~.”
청·프·러·일 대사: “아놔다해 ~. 그 섬 말고 거문도다부르봉. 답답하니뽄. 너넨 자기네 섬 이름도 리스트 안하나타샤?”
조선 관리: “리얼리? 우리나라에 그런 섬이 있다고종? 근데 왜 전라도 감영에선 연락이 없지개판?”
영국 대사: “음, 우리가 점령한 건 맞는데…, 그게 너네 섬이냐글랜드? 우린 임자 없는 섬인 줄 알았다드레이크.”
일본 대사: “오~, 그렇게 하면 되는거냐니뽄? 다음에 우리도 저 동해 울릉도 옆 작은 섬에다 똑같이 써먹자료마.”
뒤늦게 거문도의 존재를 파악한 조선 정부가 영국에 항의하지만, 영국은 조선 정부를 깔보고 반환하지 않으려 들죠. 그래서 결국 청이 종주국으로서 대신 나섭니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 외교권이 없다며 조선 영토 점령은 청에 대한 배반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선 정부가 보낸 속국 인정 서류까지 제출합니다.
하지만 고종은 청의 이런 간섭에 불만을 품고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자 용산에 청군을 대기시킨 청군 조선 파병 사령관 위안스카이는 청 황제에게 고종을 폐위시키자고까지 제안합니다. 이 새파란 청나라 장수에게 갈굼을 당해 가슴에 비수가 박힌 고종은, 이후 정중히 황제로 대접해주는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아버지처럼 모시게 되고, 조선 왕을 열심히 갈구던 위안스카이는 1915년 청을 대신한 중화제국 황제가 되니……, 중국 역사상 최후의 황제가 되지요.
그사이 다른 서구 열강들도 영국을 압박하니 결국 22개월 만에 거문도를 반환하게 되지요. 하마터면 홍콩처럼 거문도가 영국 땅이 될 뻔한 순간을 모면하게 되는데, 그 소식도 가장 늦게 안 곳이 조선 정부였으니 답이 없었어요.
이처럼 서구 열강이 조선도 눈여겨보기 시작하던 그때, 민 씨 일파에 돈을 주고 벼슬을 산 사또들의 학정에 분노한 동학농민군이 일어납니다(1894년). 호남에서 가장 큰 전주성까지 함락되는 등 분노한 농민군에게 관군이 밀리자 민 씨 일파는 250여 년 전 이자성의 농민군에 멸망한 명나라를 떠올리며 민 씨 정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해 청나라에 원군을 청하고, 청나라는 패권제국으로서 조선에 재차 군대를 보냅니다. 하지만,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병 시 자동으로 파병하기로 서명한 일본군도 조선에 출병해 우금치 전투 등에서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학살한 후 두 나라가 청일전쟁을 벌이지만 예상외로 일본이 압승하지요.
그런데 청일전쟁 당시 정작 우리 백성을 지켜야 할 조선군은 뭘 했는지 아세요? 본인이 속한 부대 상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양 조선군은 일본군과 함께 평양으로 북상하고, 평양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이를 막아내는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 땅에서 펼쳐진 남의 나라 전쟁에서 조선군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다고 하지요. 농민군에게도 지고 파병 외국 군대와 함께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단계에서 더이상 자체 군사력으로 나라를 지키기가 불가능한 지경에 빠집니다.
이 같은 혼돈 속에서 이제 일본을 이길 나라는 러시아밖에 없다고 여긴 고종과 명성황후가 급격히 친러시아 성향을 보이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게다가 대원군마저 명성황후 제거에 뜻을 같이하니, 결국 1895년 10월 8일 우범선 등 “민비를 없애야 조선이 부활할 수 있다.”고 여긴 내부협력자들이 경복궁 문을 열어주고,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 측 동조자의 행위를 부각해 조선인들이 스스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으로 꾸미려고 했지만, 그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설계사 사바친의 증언으로 들통나고 맙니다.
일본군의 감시 속에 경복궁에 고립되었던 고종은 1896년 1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한 뒤 돌아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청으로부터 독립하는 한편, 미국에서 군인 20만 명을 빌려 청나라를 격파하고 평양을 새 수도로 삼겠다는 꿈을 꾸며 평양에 조선의 마지막 궁궐인 풍경궁 건설을 시작하고 이하영을 미국에 파견하지만, 미국이 이를 거절하자 다시금 러시아에 붙어 청과 일본의 간섭을 피하는 중립국으로서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게다가 러시아가 1898년 덥석 요동 반도를 접수하자, 기껏 청을 몰아내고 한반도에 이어 만주까지 차지하려던 일본은 대륙 진출 계획에 방해가 되는 러시아와의 한판승부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아무리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지요. 그러자 일본은 러시아에게 사이 좋게 조선을 38도에서 갈라 나눠 먹자고 제안합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 8도 중 남쪽 4개 도를 일본에 달라고 하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죠. 이에 러시아가 반대하면서 무력 충돌을 일으키자 러시아가 미워 죽으려던 영국이 일본의 손을 덥석 잡아줍니다.
당시 영국이 직접 동아시아까지 와서 전쟁을 하기엔 너무 부담이 큰데,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화에 박차를 가한 일본이 청나라를 격파한 신식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러시아의 바다 진출을 막는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한 것이죠, 이에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동아시아로의 러시아 남하는 일본이 대신 막게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국이 부담스러운 러시아가 “우리는 부동 항구만 있으면 된다.”며 39도선으로 양보하려 하지요. 마치 페르시아 북쪽 타지키스탄을 먹을 때처럼요. 그러자 이번에는 영국이 그건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해 옆구리 쿡쿡 찔러 미국도 일본을 적극 지지하게 만드니, 이에 든든한 강대국을 등에 업은 일본이 1904년 전쟁을 시작하고, 이로써 ‘러일전쟁’은 실은 러시아 대 일본-영국-미국 세력 간 싸움이 된 겁니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의 승자가 된 일본은 러시아 저지가 주목적이던 영국, 미국의 묵인하에 한반도를 차지하고, 대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해주는 ‘카쓰라-태프트 밀약’에 사인한 뒤, ‘을사보호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며 착착 식민지화를 준비합니다. 또한 태프트 역시 외교 성과를 바탕으로 1908년 2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지요. 그후 일본은 영국, 미국과 베스트 프렌드로 지내며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지만, 만주와 중국으로 지나치게 세력을 넓히다가 거꾸로 영국, 미국이 간섭을 하자 오만하게 미국에 선제공격했다가 원자폭탄 2방 맞고 항복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2차대전 이후에는 힘 빠진 영국 대신 미국이, 러시아를 계승한 소련 및 중국과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 즉 20세기 냉전을 벌이면서, 소련은 베트남, 쿠바 등에 부동항을 확보하려고 하고, 미국은 전 세계 바다를 장악하면서 각 지역마다 우방국을 만들어 이를 저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미국이 중국의 남중국해 진출 저지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여전히 일본을 우방국으로 선택하고, 대만도 지지하는 현 상황이 이해되는 겁니다.
어쨌거나 그런 사정을 꿈에도 모르던 고종은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 을사보호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지만, 이미 게임이 끝난 서구 열강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상황이 되고, 이런 사실이 발각되자 매국노 송병준은 고종에게 “자결하라!”고 다그치는 등 수모를 겪고, 결국 강제로 폐위당해 태황제란 허울뿐인 이름하에 덕수궁에 갇히게 되지요.
또한 애초엔 독립협회 초대회장을 맡아 독립문 현판을 쓰는 등 청의 간섭을 반대하는 친미파였다가 러시아가 접근하자 친러파로 갈아탄 뒤 러일전쟁 이후에는 결국 친일파로 돌아선 이완용 등 기회주의자들과 다수와 대한제국 황실 가족은, 일본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으며 ‘대한제국과 일본이 동등하게 합쳐진다’는 ‘한일합방’을 추진하게 됩니다.
다만, 이완용만 대표 매국노로 욕을 먹고 있는데 여기에도 나름의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애초 구한말 지식인 중 일본과 친했던 다수는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본을 본받아 우리나라를 세계 열강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모든 아시아 국가가 일본의 지도하에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란 사탕발림에 동조했다가 배신을 당한 거지요. 특히 김옥균 등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인재들은 본인과 집안이 멸문당할 지경이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지만, 오히려 고종은 상복으로 갈아입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듯 애도를 하고, 일진회 송병준 등은 조선 사회를 완전히 해체해 일본에 흡수되어야 한다는 한일합방성명서를 발표하며 일본 정부에 신속한 조선 합병을 촉구하고 나섭니다. 이런…!
그러자 이완용 등 온건 친일파는 “저런 미친놈들이 일본과 합병을 추진하면 조선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니 우리가 먼저 나서자.”며 조선 황실과 귀족층의 보장 등을 조건으로 한 온건한 합방을 주장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누가 먼저 나라를 팔아먹을지 경쟁에 뛰어든 겁니다. 아, 물론 이런 작태는 다 일본이 쳐놓은 그물이었지요.
이에 이완용 등 온건 친일파가 1910년 8월 22일 합방 조약에 사인을 하는데, “순종 황제의 생신 기념 파티는 하고 발표하자.”고 간청하여 시간을 번 뒤 성대히 생일 파티를 벌입니다. 당시 이미 합방조약이 끝났다는 첩보를 접한 후 이 생일 파티에 참석했던 주한 미국대사는 워싱턴에 보고서를 보내며, “나라가 망하는데 저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화기애애하게 생일잔치를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보고할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대한제국의 멸망은 1주일 뒤 8월 29일에 발표가 되니, 소위 ‘대일본제국’은 ‘두 나라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합방이란 가식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평화적으로 일본제국이 대한제국과 한 나라로 통합했다고 전 세계에 거짓 선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동조했던 이용구 등 일부 일진회 멤버들은 한일합방이 되면 실제로 유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처럼 조선의 자치가 허용될 줄 알았다가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알고는 귀족 칭호를 내팽개치고 은둔하기로 했다는군요. 그렇게 후회한들 어차피 그들이 앞장서 저질러 놓은 일이니,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인보다 이들 친일파에게 더 이를 갈면서 처단하러 나서게 되는 것이 이해가 되죠.
또한 저 ‘합방’이란 가식적 단어 때문에, 이후 2차대전 막판인 1943년 미국, 영국, 중화민국 간 종전 준비 협상이던 카이로 회담 당시,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이 강력히 “조선은 일본과 별개 나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제스에게 마냥 고마워할 필요도 없어요. 당시 장제스 역시 중국 공산당을 몰아낸 뒤 옛 한무제처럼 한국과 베트남 등 옛 땅을 다시 중화제국에 합병할 꿈을 꾸었다고 하니까요.
첫댓글 조선말 역사를 정확히 올려주어서 역사 공부 닷시 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학교역사시간에 배우지 못했던
이야기를 많이 알게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귀중한 자료를 올려 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