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홍길동은 왜 세종대왕 시절에 활약했을까요?
우리나라 금융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는 누구일까요?
아~, 아신다고요? 맞아요. ‘홍길동’이죠.
요즘에야 다 ATM 기기나 앱으로 거래하지만, 예전에는 돈을 찾으려면 은행 창구에 가서 입금증을 써서 내야 했기에 앞에 놓인 샘플을 보고 따라 썼는데…, 대부분 샘플 속 이름이 ‘홍길동’이었어요. 지금도 여러 금융기관에서 SMS 인증받을 때 성명 칸에 들어가는 예시 이름이 여전히 ‘홍길동’입니다.
이처럼 홍길동이 널리 인용된 건, 학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이고 최초의 한글 소설은 허균의 《홍길동전》이라고 배웠고, 약자의 편에 서서 싸운 조선시대 슈퍼 영웅으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기 때문인데요.
우리나라 첫 극장 애니메이션 역시 1967년 신동헌 감독님의 ‘홍길동’이었지요. 홍길동 시리즈 2탄은 ‘호피와 차돌바위’. 아, 이건 뭐 중요한 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말입니다…,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건 가리지날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1700년대 후기 어느 이름 모를 저자가 썼을 거라는데,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고 잘못 알려지게 된 건 한 일본인의 기고문이 시초였다고 합니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던 다카하시 도루 교수가 쓴 《조선문학 연구-조선의 소설》이란 기고문에서 “옛 문헌을 살펴보니 이식 선생의 《택당집》이란 책에 ‘허균이 또한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가히 수호지 급이었다.’라고 되어있다니뽄. 그런데 허균이노 다른 작품이 죄다 한문 작품인 걸 보면 《홍길동전》 역시 한문 소설이 오리지날이었을뇌피셜.”이라고 쓰면서 비로소 알려진 것이라지요? 하지만 경성제국대학 제자들은 이 내용의 앞부분만 받아들여 당시 알려진 한글 소설 《홍길동전》이 허균이 쓴 것이고, 이게 우리나라 첫 한글 소설이라고 정의내린 것이 지금껏 알려져 왔다고 하네요.
이 외에도 허균이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가 아닌 이유는 많다고 합니다.
우선, 현재까지 알려진 30여 판본 모두에서 허균이 사망한 1618년보다 70여 년 뒤인 1692년 《숙종실록》에 등장한 도적 장길산이 작품에 나올 뿐 아니라 숙종 때 처음 설치된 ‘선혜청’이란 관청 이름이 등장하고 있으니, 허균이 알 리 없는 내용들인 거죠. 또한 홍길동이 만들었다는 ‘활빈당’은 실제로 조선 후기 전국의 부잣집을 털어가던 도적 떼들이 즐겨 쓰던 이름이기도 했지요. 300년 부잣집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은 평소 덕을 쌓아 주민들이 스스로 자경단이 되어 최부잣집을 지켜주면서 활빈당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조선 중기 문인 황일호(1588~1641)의 《지소선생문집》에 홍길동의 일생을 그린 한문 소설 《노혁전》이 실려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과는 많이 다르답니다.
그 외에도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들어서야 《전우치전》 같은 유사한 한글 소설이 여럿 나오게 되는데, 200여 년 전 《홍길동전》이 나온 후 중간에 한글 소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왜 18세기 후반에 그토록 많은 한글 소설이 등장할까요? 그건 영·정조 때에 이르러 민간 상공업이 발달해 전국에 시장이 발달하면서 오가던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세책집이 크게 유행하면서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오호~, 이미 이 시절에 도서 대여점이 존재했군요.
이처럼 여러 의문점이 많았음에도 허균이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라고 알려진 데에는 앞서 언급한 다카하시 도루 교수의 한국인 제자들의 애국적 연구 태도가 그 원인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무리수를 둔 이유는, 이미 일본은 11세기에 《겐지모노가타리》라는 장편 소설이 등장하고 중국도 14세기에 《삼국지》, 《서유기》 등 장편 소설이 다수 등장한 터라 허균이 한글 소설을 썼다고 주장한다면 주변 국가보다 한참 늦은 고유 문자 소설의 출발점을 200여 년 앞당길 수 있었으니 민족적 자존심에 그렇게 주장했을 거라네요.
그런데 황일호의 한문 소설이건 후대의 한글 소설이건 왜 홍길동이란 동일 인물이 등장할까요? 이는 실제 연산군 시절에 홍길동이란 엄청난 도둑이 존재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한자가 달라요. 소설 속 홍길동은 洪吉童인 반면, 실제 홍길동은 洪吉同.
실존 홍길동은 전국 단위 도적 떼의 수령으로서 특히 충청도에서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형인 홍일동이 세조 시절 호조참판에 오르는 등 권세가였기에 주변 고위직에게 뇌물을 바쳐 잡히지 않았고, 조카 딸마저 성종 후궁인 숙의 홍씨였으니 대단한 뒷배경을 가진 도둑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결국 중종 시절 붙잡혀 옥사하고, 그를 도와주던 관리들도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흘러 300여 년이 지나자 진짜 나쁜 도적이었음에도 영국의 로빈후드 전설처럼 후대에 ‘연산군의 폭정에 대항해 일어난 의로운 도둑’이란 이미지로 각색되고, 《서유기》의 손오공처럼 분신술을 통해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조선판 슈퍼히어로로 이미지 세탁이 된 것이라네요.
그런데…, 실존 인물을 토대로 구전되어 온 내용으로 만든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시대적 배경이 좀 이상합니다. 소설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됴선국 셰둉대왕 즉위 십오년의 흥희문 밧긔 한 재상이 있스되 성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 실제 존재한 도적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 사람이었고, 이야기 속 조선 사회도 탐관오리가 판을 치는 어두운 사회인데 이상하게도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배경은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여기는 세종대왕 시절로 그려진 것이죠. 왜 그랬을까요?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여러분도 그게 궁금하셨죠? 아~,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요?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고 평가받는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때에도 최고의 성군이라 인정받았습니다. 다만 지금은 세종을 한글 창제자이자 천문, 지리, 기술, 음악, 농업에도 조예가 밝으셨고, 백성을 위해 관료들을 24시간 달달 볶아 과로사시키던(?) 문화 군주로 여기지만, 당대에는 평가가 좀 달랐어요. 문화 융성이 핵심 성과였다면 붕어(사망)하신 후 ‘문종’이나 ‘성종’ 같은 묘호를 드려야 하는데, 북방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넓힌 업적을 더 높이 찬양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한 군주에게 붙이는 ‘세종’이라는 시호를 받으셨지요. 즉 조선판 광개토대왕이신 셈입니다. 실제로 세종 이후에 영토를 더 넓힌 임금이 없고 우리 역사상 압록강, 두만강 남쪽 한반도 전체를 한 국가가 차지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긴 합니다.
이후 성종, 정조 등 후대 임금에게 통치자로서의 롤모델이 되신 세종의 업적은, 500여 년 뒤 대한민국에서도 크게 존경을 받으시어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새로 서울의 거리 이름을 재정비하면서 가장 넓은 도로인 옛 육조 거리를 세종로라고 새로 이름 지었고, 광화문 앞 광장에 동상과 기념관을 마련한 데 이어, 행정수도 이름도 세종특별시, 첫 번째 남극 과학기지 이름도 세종기지라고 짓는 등 여전히 사랑받고 있지만…, 조선시대 서민층에겐 지금 우리가 잘 모르는 세종의 흑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홍길동 이야기의 주무대가 된 겁니다.
세종은 잘 알다시피 유교적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군주가 되고자 노력하신 성군이십니다. 역대 어느 임금도 이분처럼 다방면에 걸쳐 넘사벽의 실력으로 문화 정치를 실현하신 분이 없지요. 그리고 자녀 생산에서도 열과 성을 다하사 18남 4녀를 낳으시니 조선 임금 중 넘버원이시고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다 잘하셨어요. 하지만 완전무결해 보이는 세종도 노년에는 수많은 질병 때문에 그랬는지 한짜증 하시면서 신하들의 간청에도 고집을 굽히지 않고 세상 물정과 다른 정책도 여럿 펼쳐 백성들의 원망을 받으신 분입니다. 뭐 다른 임금들은 더 원망받으셨지만요.
세종 역시 인간인지라 여러 실책을 범하시지만, 그중에서도 백성들에게 가장 가혹했던 실책은 4군 6진 개척 이후 백성들을 강제로 북방 개척지로 옮겨 살게 한 ‘사민 정책’이었습니다. 세종 15년인 1433년 최윤덕 장군에게 명해 압록강에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 장군에게는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만들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장토록 했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새로 얻은 국토에 주민이 들어와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현지 주민들에게 국경 수비를 맡길 수 있는데, 춥고 척박한 새 땅으로 가려는 농민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4군 6진 지역으로 이주시키는데, 이주민 숫자가 모자라자 1437년부터는 평안도, 황해도 등 북부 지역에서도 이주를 진행시켜 약 4만 5000여 명이 이동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혜택을 준다고 해도 남쪽 지방에선 3000리 길을 봇짐과 수레에 짐을 싣고 3달에 걸쳐 걸어가야 했으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가는 길에 병으로 죽고 얼어 죽은 경우가 수천여 명에 이르렀단 기록이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가 700만 명 내외였으니 상당히 많은 백성들이 피해 입는 상황이었지요. 이에 신하들이 지나친 처사라고 진언하지만 북방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 세종은 버럭 화를 내며 “그런 하소연에 국가 대계를 양보하란 말이냐!”라며 밀어붙였다네요. 그러나 실상은 백성들 중에 권세가와 연이 닿은 집안이거나, 돈을 많이 내거나, 중국 명나라에 바칠 특산물인 해동청 매를 잡아와 바치면, 예외로 빼주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죠?
사실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때에도,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들이 단체로 반대하는 상황에서 정창손이 “백성은 교화되지 않는데 왜 그런 쓸데 없는 일을 벌이시냐.”고 말하자 그를 파직 처분할 정도로 밀어붙였기에 한글 반포가 가능했던 것이긴 합니다. 파직시킨 정창손도 바로 그해 복직시킵니다만, 세종은 신하들에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어요. 엄청 당찬 군주였다니까요!
또한 전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 또 하나의 정책은 화폐 개혁의 실패였습니다. 고려 말기부터 중국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만들었던 저화(종이돈)를 다시 조선 초에 새로 만들어 유통시키지만 활성화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오랜 기간 쌀을 들고 가 다른 물건과 교환해 오던 사람들이 종잇조각에 불과한 지전을 믿지 못해 이용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러자 관졸들을 풀어 시장에서 물물교환하던 이들을 적발해 강제로 수군에 징집하고, 끌려가던 이들은 “내 자식들마저 대대로 수군 노예로 살게 할 순 없다.”며 자살해버리자, 이 소식을 들은 부인마저 목을 매고 말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 수군은 군역 중에서도 가장 힘든 보직이었기에 이탈자가 많아지자 부모에서 자식으로 대대로 강제 차출되는 노역으로 변질되어 일생을 지정된 바닷가 지역에서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평민이라고는 하나 유럽 중세의 농노와 다를 바 없었지요. 하지만 그런 처우를 받은 수군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하게 되니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처럼 자살하거나 고리대금업자에게 벌금을 빌려 평생 고생하는 이가 속출해 백성들의 원망이 커지지만, 세종은 “좋은 정책인데 어린 백성이 종이돈을 못 믿는다니 금속으로 만들면 되겠지.”라며 다시금 동전인 ‘조선통보’를 만들게 하시죠.
하지만 고려 말기 상공업의 발달로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권문세족만 부를 차지한다.”는 사회 불만을 이용해 역성혁명에 성공한 뒤 농본주의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한 왕조가 바로 조선이었는데, 느닷없이 다시금 경제 부흥이라니요….
조선 초기에 농사를 통한 자급자족만 중시하고 상공업을 억제해 한양 종로 상전을 제외하곤 지방 시장마저 폐쇄하면서 화폐가 제대로 유통될 리가 없었는데 말이에요. 이에 궁궐에 각종 물품을 조달하던 종로 시전에 불을 질러 잿더미가 되는 등 폭동의 기미가 보이자 화폐 사용 정책은 중단하고 물물교환도 인정하게 됩니다. 실제로 화폐 유통은 200여 년 뒤 숙종 대에 가서야 ‘상평통보’가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니, 취지는 좋았으나 현실은 이에 못 따라가는 형편인데도 세종의 의욕이 너무 앞서신 것이죠.
또 백성들에게 비난받은 정책 중 하나는, ‘부민고소금지법’이었습니다. 아버지 태종은 유명무실했다고는 하지만 신문고제도 등 지방 수령의 악행을 고발할 수 있게 했는데, 세종은 “상하의 질서를 바로 잡는 유교적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눈물로써 간청한 허조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방 수령의 악행을 고발하지 못하게 막아 원성을 듣게 됩니다. 다만 세종 당시에도 고려에 대한 향수에 젖은 지방 토호 세력이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를 쫓아내기 위해 고발함으로써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었던 것도 감안해야겠지요.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지방은 호족이 관장하는 느슨한 자치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 고려 정부가 비록 사민관을 파견해 감시했다고는 하나 지방 호족은 사병을 거느리고 중세 봉건영주처럼 행사할 수 있었는데, 조선은 초기부터 강력하게 중앙집권 체계를 구축해 각 고을까지 한양에서 파견한 관리가 직접 다스리고 기존에 칼을 차고 다니던 지방 호족은 이방, 호방 등 향리로 격하시키죠. 참고로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전까지는 우리의 고려 무신 정권 시절처럼 일왕은 허수아비이고 쇼군이 권력을 쥐고 각 지방 영주의 자치를 허용하는 중세 봉건사회를 유지했어요. 따라서 15세기 당시 조선은 남송 시절 주자학을 뒤늦게 신봉하는 처지이고 일본은 고려시대 수준이었으니 중국-한반도-일본 순으로 사회 발달 과정이 수백 년씩 더디게 연쇄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시행 당시엔 호평이었지만 나중에 큰 문제가 된 것이 금광, 은광 폐쇄 조치였습니다. 명나라에서 매년 조공을 요구했는데 해동청 말고도 과도하게 금과 은을 요구하자, 아예 금광, 은광을 막아버리고선 중국 사신에게 “원나라 때부터 너무 많이 채굴해서 이제 더 이상 없다.”고 버틴 것이죠. 그래서 조공 물품을 줄인 것까진 참 잘하셨는데…, 문제는 광부들의 생계에 대해선 별다른 보완책이 없었던 겁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외 무역 루트를 통해 귀금속이 유통되었는데, 조선에선 민간 해외 무역을 금지시키고 왕궁 및 특정 사대부들이 사용할 귀금속만 소량 발굴하게 했으니 왕실에 납품할 수 있던 몇몇 광부를 제외하고는 먹고살 길이 없어져 광산 채굴 기술과 제련 기술이 퇴보하게 됩니다. 반면 마르코 폴로가 원 나라를 방문할 당시에도 은이 많은 나라 ‘지팡구’로 알려져 있던 일본은, 은 제련법이 낙후되어 순도 높은 은을 만들지 못해 중국산에 비해 낮은 가격에 수출하고 있었던지라 중국과 조선의 은 제련법을 배우고자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1526년 세계 최대의 은광인 이와미 은산을 발견한 후 1533년 조선인 기술자 2명을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해 순도 높은 은을 생산하게 되면서 중국을 거쳐 유럽에 수출할 수 있게 되지요. 당시 일본이 채굴한 은이 전 세계 유통량의 25%에 이를 정도로 커지자 1543년에 일본 은을 직접 구매하러 포르투갈 상인들이 찾아와 조총을 선물합니다.
이에 서양 무기의 유효성에 눈 뜬 일본은 은 수출 대금으로 대량의 철과 무기 제작 기술을 수입하고, 그후 기술 국산화 노력 끝에 조총과 총알마저 자체 생산해 역으로 포르투갈에 수출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처럼 조총 제작 및 전법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룬 일본은 100여 년간의 내란을 마치고 통일되자마자 조선을 넘어 명나라, 인도까지 집어삼키겠단 야심을 품고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후 조선 도공까지 끌고 가 세계 시장에 일본 도자기를 팔아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메이지유신을 이룩하면서 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해 조선을 집어삼키게 된 것이니, 결국 기술자를 홀대하고 상공업을 천시한 조선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일본의 경제 발전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야기가 너무 나갔네요.
하여튼 이처럼 세종은 명나라의 지나친 조공 요구에 대해서는 광산을 막아버리면서 개기셨지만, 정작 본인에게 개긴 백성들에겐 아주 가혹하게 대응하십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고요? 서울시 구로구 온수(따뜻한 물)동은 옛날 이곳에서 더운물이 솟아 나와 붙여진 이름인데, 이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세종은 할아버지 태조, 아버지 태종과 달리 운동을 즐겨 하지 않고 고기를 즐겨 드신 비만 체질이어서 20대 때부터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합병증 등 다양한 성인병으로 고생을 했고, 당뇨 합병증으로 손발이 건조해지자 자주 온천 여행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1438년 지금의 구로구 온수동에서 온천이 발견되었다는 기쁜 소식에 새 온천에서 목욕을 하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임금님 전용 온천으로 지정되면 인근 주민은 모조리 강제 이주해야 했기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향을 지키려는 마을 유지들이 온천이 발견된 곳을 묻어버리곤 “온천을 발견했다는 건 다 헛소문”이라고 부인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에 진노한 세종의 지시로 아전과 주민들을 고문하지만 끝내 장소를 찾지 못하자 결국 주동자들이 처형되고 마을 주민 전체를 천민으로 강등했다고 합니다.
구전이라 과장되었겠지만, 실제 《세종실록》에도 3년에 걸쳐 수차례 해당 지역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는 구절이 나오고, 해당지역이 강등된 뒤 40년 뒤에야 원래 행정구역으로 복원된 걸로 봐선 실제 큰 사달이 난 것은 확실한 것이니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신 군주라고만 알고 있는 우리들로선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온수동 온천에 대한 탐사는 일제시대인 1920년대에도 실패했고 1969, 1970, 1985년에도 탐사를 했으나 찾지 못했다네요.
당시 세종이 본인의 병 치료에 얼마나 관심이 컸던지 온수동 온천 사건 4년 뒤인 1442년에 강원도 온천 여행 때 타고 가야 할 가마가 테스트 도중 부서졌다는 이유로 그렇게 아끼던 장영실을 단박에 매몰차게 곤장 때리고 내쳐버릴 정도였으니까요. 뭐 이에 대해선 여러 다른 의견이 존재합니다만….
그후로 당뇨가 악화되어 눈도 잘 보이지 않자 전국의 온천물을 길어오도록 지시합니다. 이에 각 온천물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니 경기도 이천의 갈산 온천물이 가장 무거웠대요. 이에 함유물이 제일 많은 온천물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여긴 세종은 몸소 갈산에 행차해 목욕을 하고, 실제 좋은 효험을 보자 이후 갈산온천을 최고로 쳤다고 하네요. 이처럼 말년의 세종은 장남 문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본인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가장 역점을 두었습니다.
게다가 세종을 보좌하던 사대부들도 여성의 사회활동이 그나마 자유롭던 고려 시절을 ‘예의범절이 타락한 시대’라고 규정하고 남존여비, 사농공상이란 유교적 질서 수립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에 여성이 말을 타고 궁궐을 출입하던 풍속을 금지해 가마를 타고 오도록 하고, 외출 시 여성은 얼굴을 가리도록 하며, 일반 백성은 가죽신을 못 신게 하는 등 사대부만의 특권을 강화해 나갑니다.
또한 불교 탄압도 가속화해 고려시대에는 고을 곳곳에 존재하던 사찰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선 산 속으로 숨어들게 되는데, 태종 6년인 1406년에는 국가 인정 사찰이 242개소로 축소된 데 이어, 세종 6년(1424년)에는 선종과 교종 양대 종파 각 18개 사찰씩 36개 사찰만 인정해 그 사찰에 속한 3700여 승려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환속시켜버립니다. 공자천국, 불신지옥.
또한 서자 차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을 결정하는 ‘노비종모법’을 시행함에 따라 전체 인구 중 50% 이상이 노비로 규정되었고,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무과시험은 치를 수 있었던 서자의 과거시험 응시 자체도 불허하게 됩니다. 원래 서자는 집안을 승계하는 장자 이외의 아들을 의미했기에 본처가 아닌 이에게서 난 반쪽짜리 아들이란 개념은 고려시대까지는 없었다고 앞서 단군 편에서 설명드렸지요? 그러니 천민 출신 어머니를 가진 양반 서자들로서는 무과시험이라도 합격해서 출세하려던 꿈은 고사하고 느닷없이 노비로 신분이 떨어지는 상황에 맞닥뜨렸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따라서 《홍길동전》 초반부에 홍길동이 아버지 홍문(홍판서)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며 적서차별 제도를 질타하는 장면은, 세종 이후 조선시대 내내 이어진 서자 차별에 대한 원망을 나타낸 것이에요. 이들에겐 진짜 오리지날 헬조선이었겠네요.
그런데 당시 상황에 대해 아버지 홍판서를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데, 그 이유는 이조판서 정2품 고위직에 계신 사회지도층 인사로서 주군인 세종대왕이 막 공표한 실정법을 위반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비범한 홍길동이 집안의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한 본처가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 하지만, 오히려 자객을 죽인 홍길동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호부호형을 허락받아 앙금을 턴 채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 가출하니, 그의 나이 불과 11세. 알고 보니 홍길동은 무서운 초딩이었군요.
이처럼 서자 차별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가진 《홍길동전》을 지은 이름 모를 저자 역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서자 출신 지식인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런 역사적 지식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과시험 응시 기회까지 몽땅 박탈당한 서자 홍길동 이야기를 만들면서 폭군 연산군 시절 실존 모델이 있음에도 서자의 아픔을 처음 겪게 된 세종 시대로 배경을 옮겨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 것입니다. 슬프네요.
그러니 소설 속에서 홍길동은 위선적인 양반 사대부 중심의 암울한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곡식을 나누어주게 된 것이죠. 그러나 조정 입장에선 백성들의 희망이 된 홍길동과 활빈당은 국가의 적이었을 뿐이니, 그를 타도하기 위해 결국 홍길동의 아버지와 형을 볼모로 잡고 홍길동이 원한 병조판서 자리를 주겠다고 회유한 뒤 궁에 들어오면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니 홍길동은 자수하러 왕 앞에 홀연히 등장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홍길동: “내 아버지와 형을 볼모로 잡다니치사만빵. 나는야 활빈당 당수. 대표 당수끼리 정상회담 하자스랴.”
세종대왕: “어허~, 어디 서자주제에 맞장을! 난 임금 넌 노비, 아직 니처지몰이해? 하지만 너의 한을 잘 알겠으니 니가 그토록 원한 병조판서 자리 줄게. 찬성?”
홍길동: “일단 콜~! 허나 서자는 조선 공무원 시험도 못 치는 이 오리지날 헬조선에서 나만 특혜 받으면 뭐함? 내가 이 나라를 떠나면 임금도 해피, 울 아빠도 해피, 다들 해피이니 난 이제 그만 헬조선 탈출. 뿅~.”
이에 홍길동이 구름을 타고 조선을 떠나 새 세상으로 향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고, 이 소설을 읽던 당시 조상님들은 헬조선 탈출기를 읽으며 답답한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 같네요.
그런데…, 율도국으로 간 홍길동의 이후 행적을 다룬 부분은 각 판본마다 다르긴 한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율도국에 도착해 요괴를 물리치고 제물로 바쳐진 두 아가씨와 결혼한 후 율도국 왕이 되어 30년간 잘 다스린 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한다는 거예요.
잠깐, 어이~ 이봐요. 이름 모를 작가님. 결국 아내 둘 다 정실부인으로 인정해 서자 문제를 해소한 게 홍길동이 원한 새 세상의 결말이란 거예요? 뭔가 좀 더 인간적이고 원대한 유토피아스러운 비전 제시는 없나요? 남녀차별 금지나 군주제 폐지 뭐 이런 거요~.
우리나라 역대 임금 중 대왕이라고 존경받는 군주가 몇 없는 가운데에서도 워낙 다양한 업적을 쌓아 후대로부터 최고의 성군이란 칭송을 받는 세종대왕이시기에 그분의 실정을 언급하는 것이 살짝 겁나기도 하네요. 하지만 실제로 세종에 대한 평가는 성종이 추앙하면서 격상되기 시작해 점차 신격화되는 양상을 보여왔습니다. 이처럼 위인들의 일생이란 것도 누구나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하기에 역사는 여러 관점에서 봐야만 입체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랍니다.
첫댓글 그런일이 있었네요.
그래도 세종대왕 인것은 부인할 수 없네요. ㅎ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어찌되었든 홍길동과 세종대왕은 제 마음속에선
영웅이자 수퍼맨들입니다.
세종대왕은 얼마나 훌륭한일들을 마니 하셨으면 역사가들이 뒤에 대왕이란 칭호를 붙였을까도 생각하구요.
안좋은일들은 생각하고 싶지않네요.
늘 좋은 역사공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은 어디일까요 ?
역사공부 하고 갑니다
좋은일을 하자면
나쁜일도 있겠죠
허지만 좋은일이 많으면 나쁜일도 묻히는법 세종대왕님은 제마음속에 영원한 성군임에 변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