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건국-고주몽이 동명성왕이라고요?
- 고조선의 멸망
쓰다 보니 단군 할배 이야기가 길었네요. 이제 고조선의 멸망과 삼국시대의 시작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고조선은 단군 할배의 후손인 준왕이 통치하던 BC194년, 혼란기 중국에서 피난 온 위만 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맙니다. 이때 중국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해 춘추전국시대가 끝났지만 불과 3대, 15년 만에 망하고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우다가 한나라 유방이 다시 천하를 통일하던 격변기였습니다. 유방은 통일 후 한신 장군 등 자신을 도운 신하들을 토사구팽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전국시대 연나라 지역을 통치하는 제후, 연왕으로 봉해진 노관 역시 숙청을 두려워해 흉노로 망명하자, 그를 따르던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합니다. 애초 우수한 철제 무기를 가진 이들을 눈여겨본 준왕은 연나라 접경지대에 이들을 살게 하지만 세를 키운 위만은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켜 본인이 스스로 고조선 왕이 되고 맙니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 원통하지만, 막상 당시 기록을 보면 발달된 철기 무기를 보유한 이들 세력은 중국에 맞서 조선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게다가 일부에선 위만이 살던 지역이 원래는 연나라에 빼앗긴 조선 땅이었기에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 후손이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답니다.
어쨌거나 위만 왕조는 진번, 임둔 등 주변 지역을 장악해 고조선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더욱 세련된 문화로 바꾸는 한편, 중국 한나라와 한반도 동쪽, 남쪽 여러 나라와의 중개무역을 통해 이익을 취하며 한 단계 성장한 시기였습니다.
벗뜨, 그러나…, 혼란기를 극복한 중국 한나라는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한무제(BC157~BC87)는 그동안 조공을 바치던 흉노와 싸워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원래 중국 말은 중앙아시아 말에 비해 작고 힘도 달렸는데, 당시 흉노 내부의 갈등 때문에 한나라에 투항한 흉노 기병 부대를 이용해 흉노 본토를 치는 이이제이 전략이 성공하면서 BC115년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둔황 일대를 점령해 4군을 설치하니, 이를 고조선 땅에 설치한 동쪽의 한사군과 구별해 ‘한서사군’이라 부르죠.
이로써 자신감을 갖게 된 한무제가 중국 변방의 오랑캐 영토 중 쓸만한 영역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BC111년 지금의 홍콩, 마카오, 하이난섬 등을 포함한 광동성 일대와 베트남 북부에 위치했던 남월을 멸망시키고 한구군을 설치한 뒤 1000년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BC109년 고조선을 침략합니다. 한반도 동남쪽 여러 나라의 한나라 조공을 방해했단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침공한 한나라 군대는 흉노와 베트남을 무너뜨린 강군이었기에 고조선도 쉽게 멸망시킬 줄 알았다지요? 그러나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정복 전쟁은 고조선군의 분전으로 인해 1년여를 끌게 되고 지휘관들마저 내분에 휩싸이지요. 그러나, 벼슬과 땅을 내어주겠다고 꼬드기는 중국 특유의 심리 전술에 말려든 고조선의 신하들과 왕자까지 배신하면서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과 성기 장군이 암살당하는 비극적 결말로 고조선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맙니다.
이에 BC 108년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설치되는 데, 일부에선 한사군 위치에 대해 한반도가 아닌 만주, 요동 지역이 라고 주장하지만, 평양 일대에서 나온 낙랑 유물이 너무 많기에 낙랑군은 고조선 후기 수도인 평양 지역임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19세기 일본은 이 역사를 부각시키며 “한반도는 예전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데스. 그러니 조센징은 니뽄 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구라.”라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전쟁 후 한나라 장군들은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간 반면, 항복한 고조선 신하들과 왕자가 4군의 지배자로 임명되어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허용하고 세금만 걷어가는 느슨한 형태로 지배했지요.
그럼에도 기존 주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은 한사군은 평양 일대 낙랑군을 제외하고는 점차 그 세력이 약해지면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새로이 우리 조상들이 건국한 여러 국가가 탄생하고, 그중 고구려가 독보적인 존재로 커져 이후 마지막 남은 낙랑군, 대방군을 몰아내며 당당히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패권자가 됩니다.
- 고구려의 시조, 주몽
그런데, 고구려의 시조는 누구인지 아시죠? 네. 다들 아시다시피 주몽입니다. 아, 송일국 님이라구요? 네네.
주몽의 고구려 건국 신화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야기가 아주 풍부하지요.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초기의 기록은 아주 풍부하게 남아 있습니다. 《삼국사기》 전체를 보면 신라 기록이 가장 많지만, 통일 이전 기록은 오히려 고구려 내용이 신라보다 더 많답니다. 김부식은 그저 억울할 뿐….
앞서도 설명했지만 김부식은 가급적 우리 사료가 남아 있으면 다 수록하려고 노력했는데 아마도 고구려 시절 만든 역사서 일부가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 아닐까 추정된다고 하지요. 특히 동명성왕, 유리왕, 대무신왕 등 초기 3대 왕들의 기록은 후대에 비해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야기는 다들 아실 테지만 《삼국사기》 기록을 간략히 정리해볼게요.
부여 왕 해부루가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리러 다녔는데 어느 날 그가 탄 말이 연못가 큰 돌을 보고 울기에 그 돌을 옮기니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를 닮았기에 금와라 이름 짓고 태자로 삼았습니다.
이후 재상 아란불이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이 여기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동쪽 바닷가 가섭원이라는 땅에 가라’고 하셨다.”며 도읍을 옮기길 권해 나라를 동쪽으로 옮겨 동부여라고 했고, 기존 부여 땅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나타나 새로이 부여를 여니 이를 북부여라 부르게 됩니다.
그후 금와가 동부여의 왕이 되었는데, 순행 중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저는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여러 동생과 놀고 있는데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저를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강가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나를 책망하여 여기에서 귀양살이 중입니다.”라고 말했다네요. 이에 금와는 이를 불쌍히 여겨 유화를 궁으로 데려왔는데 햇빛이 유화가 머무는 방에 쫓아와 계속 비추더니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에 금와왕이 알을 버렸으나 개, 돼지 모두 먹지 않았고 길가에 버려도 소나 말이 피했다네요. 이에 들판에 버려도 새가 날개로 덮어주기에 왕이 알을 쪼개려고 했으나 깨어지지도 않자 마침내 어머니에게 돌려주었고, 유화부인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의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었고 쏘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합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고,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같이 성장했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하길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라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기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는데,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지요. 그후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어도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아 능력을 드러냅니다. 이에 왕자들과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어머니 유화부인이 눈치채고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며 탈출을 권합니다. 이에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세 친구와 함께 탈출해 강(엄시수)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 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건널 수 있었고,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드디어 졸본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합니다.
이게 고구려를 세운 주몽 신화인데요. 실은 이 신화는 팩트로는 가리지날이에요. 이보다도 2000여 년 전 지금의 이라크 지역 기록에 남은 최초의 건국 신화, 사르곤 신화의 아류작입니다.
- 이스라엘, 로마, 부여, 고구려 건국 신화의 모델, 사르곤 신화
BC2330년경 역사적으로 한 인물이 스스로를 스토리텔링한 것이고 구려 건국 신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니, 그는 수메르 북쪽 아카드 제국의 황제로서 수메르 도시국가를 정복한 남자, 사르곤 1세 황제였지요.
그가 정복한 수메르 도시국가를은 지금의 이라크 남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도시국가들로서 이를 수메르 문명이라 부르지요. 일부에선 이 수메르문명이 원래 환국 12국 중 막내인 ‘수밀이국’이었다고 주장을 합니다만…, 수메르란 이름은 사실 가리지날입니다.
이는 수메르 북쪽에 살던 아카드 민족이 BC2330년경 수메르의 사륜마차보다 더 빠른 공격 무기인 이륜마차를 개발해 침략하여 수메르 문명을 흡수한 후에 아카드족 언어로 ‘Su(남쪽) + Mer(사람)’란 의미로 부른 기록만이 남았기 때문이에요. 그 후 Su(남쪽)는 영어의 south, 독일어의 süd, 프랑스어 sud로 이어지고, mer는 영어의 men, 독일어 Mann, 프랑스어 monde(세상), mere(어머니) 등으로 변형되지요. 따라서 원래 이들 수메르인들이 스스로를 뭐라고 불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이들 수메르 도시국가들을 무너뜨린 아카드제국 사르곤 1세는, 애초 메소포타미아 중부의 도시국가 키쉬(Kish)의 왕이었으나 이륜마차 부대를 동원해 페르시아만부터 지중해 연안까지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전체를 다스리는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는 아카드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타 도시국가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본인 스스로를 신성한 존재로 부각시키는 최초의 프로파간다(정치선전)인 자신의 출생 신화를 퍼뜨리게 합니다.
사르곤 1세: “여봐라르곤. 제국의 새 백성들은 세금 꼬박꼬박 잘 내고 있나카드?”
신하들: 황제 폐하~.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다 거짓말~, 다들 개기고 있다포타미아.”
사르곤 1세: “뭣이라르곤? 내가 다른 왕과 달리 신이 축복한 신성한 황제란 사실을 널리 알려 돈을 거둬라카드!”
신하들: “리얼리? 신성한 존재라니그리스? 쿠데타 일으킨 왕인 거 우리가 다 아는데프라데스.”
사르곤 1세: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르곤. 만나서 더러웠고 더이상 보지 말자키쉬. 저 넘들 목을 쳐라리아.”
그래서…, 그가 스스로 퍼뜨린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대한 황제, 사르곤 1세는 여사제의 사생아, 즉, 처녀의 몸에 신의 뜻으로 잉태된 아이 였다네요.
신성한 존재여야 할 여사제는 아이를 낳은 사실이 드러날까 봐 갈대 바구니에 넣고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발라 유프라테스강에 띄워 보냅니다. 그런데 키쉬 왕의 정원사가 강물에 떠내려온 이 바구니를 발견해 아이를 정성껏 키우게 되고, 어느 날 이슈타르 여신이 나타나 이 아이는 ‘산의 신’ 아들이라고 축복을 줬답니다. 이 광경을 본 키쉬 왕이 여신이 축복한 아이, 사르곤을 왕국의 후계자로 정합니다. 이후 사르곤은 키쉬 왕국의 왕이 되었고 이슈타르 여신의 의지를 받들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국가를 통합한 제국을 만들어 평화를 실현했다.”라고 널리 알리게 됩니다.
그는 왜 이런 신화를 만들었을까요? 추정해보면 사르곤 1세는 키쉬 왕국의 주요 귀족 출신이었는데, 어느 날 세력을 모아 기존 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을 겁니다. 그런 뒤 본인 특유의 친화력과 든든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무력 정복하는 데 성공했겠지만 복속 당한 백성들의 반발이 만만찮았겠지요. 이에 본인의 어두운 과거를 덮고 신성함을 드러내야 통치가 가능하리라 여기고 성공 스토리를 만든 겁니다. 그래서 친아버지는 흔적을 없애고 대신 신과 여사제가 신성한 결합을 통해 나온 아들이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왕가에 위탁되어 키워지다가 신의 축복을 받아 기존 왕으로부터 평화롭게 정권을 물려받았다는 신분 세탁을 감행한 것이 진실이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역사상 첫 제국을 건국한 황제의 탄생 스토리텔링이 먹혀들어 가면서 제국 전역이 안정되는 효과를 가져오자, 그 후부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정복자들이 이를 벤치마킹하고 본인 현실에 맞게 살짝살짝 각색하기에 이릅니다. 어이 이봐요들~! 사르곤 황제에게 저작권료는 내고 쓰셔야죠.
이 같은 변주 중 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성경 속 모세 이야기일 겁니다. 아, 모세 이야기를 잘모르신다고요?
《구약성경》 첫 권 ‘창세기’에 이은 두 번째 권 ‘출애굽기(Exodus, 탈출기)’에 나와요.
짧게 줄이면,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아들 야곱을 낳고, 야곱은 다시 요셉 등 12형제들을 낳았는데, 요셉이 이집트에서 장관으로 출세합니다. 역사적으로 당시 이집트는 중기 15대 왕조 시기였는데, 이때 중동 지역의 힉소스족이 이집트인들을 정복해 통치하던 때여서 힉소스인들과 이웃사촌인 유대인들도 통치 계급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마치 몽골족이 중국 송나라를 정복한 후, 서역 색목인들을 제2계급으로 삼아 중국인을 다스린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권력자 요셉이 이들 형제들을 초청해 12형제는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로 집단 이주해 잘 살았고 거대한 이주민 집단으로 성장했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금 이집트인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그만 유대인들은 노예 신세가 됩니다. 그 후 히브리인이라 불리며 새 수도 건설 사업에 강제 노역을 하던 암담한 상황이었는데, 이집트의 왕자였지만 유대인으로 밝혀진 모세가 지도자가 되어 홍해를 가르고 집단 탈주를 감행해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여러 의견이 존재하지만 역사학자 중 다수는 이 사건이 BC1260년경 람세스2세 시절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네요. 실제로 영 화 ‘십계’에서도 그 시기로 간주하지요.
그런데 성경의 첫 5권(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즉, ‘모세 5경’은 모세가 직접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가리지날~. 역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초기 《구약성경》 서술 시기는 바빌로니아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이 정복되어 다시금 피지배 신분이 되었던 BC6세기경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이 고난을 극복하고자 과거의 위대한 탈출을 기술해 민족의 단합을 도모하면서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이들 저술가들은 유대 민족의 구원자 모세를 설명하면서, 사르곤 황제 탄생 신화를 차용합니다. 당시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모든 유대인 사내아이는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모세의 어머니는 제례를 담당하는 레위지파 여인인지라 차마 아들을 죽일 수 없어 갈대 바구니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바르고 아기 모세를 태워 나일강에 흘려보냈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아이가 없던 이집트 공주가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이 바구니를 건져 내어 양자로 삼아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했는데, 청년이 된 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자 왕자 신분을 버리고 광야로 도망갔다가 야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히브리인의 지도자가 되지요. 이에 배다른 형제였던 파라오에 맞서 10가지 재앙을 일으켜 히브리인의 이주를 승인받지만, 뒤늦게 파라오가 후회하고 군대로 쫓아오자 홍해를 갈라 무사히 탈출한 뒤 시나이산에서 10계명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무려 40년이나 고행을 하다가 후계자 자리를 여호수아에게 물려주고 눈을 감았다는 장대한 이스라엘 건국 신화로 기록됩니다. 즉, 모세의 정당성을 부여할 탄생 신화를 만들 때 사르곤의 신화가 유용하게 쓰인 것이죠.
참고로, 숫자로 해석해보면,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는 12가 ‘절대수’여서 요셉 등 12형제가 나오지만, 태양과 10을 신성시한 이집트 문명권에 거주하면서 10가지 재앙과 10계명을 받은 후, 다시금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12개 지파로 거주지를 분할하는 것으로 나와, 각 문명에 따른 상징 체계의 변화도 고스란히 보여준답니다.
이 같은 전통은 BC573년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레무스 형제 신화에도 고스란히 차용됩니다.
원래 로마 근처에 알바롱가 왕국이 있었는데, 이 나라는 그리스 연합군의 트로이목마 기습 작전에 의해 멸망한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이네이아스와 난민들이 세운 나라였다지요. 당시 알바롱가 왕국 누미토르왕의 외동딸인 레아 실비아 공주가 전쟁의 신 마르스와 사랑에 빠져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 레무스를 낳게 되지만, 권력을 빼앗은 작은 아버지 아물리우스가 이 쌍둥이에게 권좌를 빼앗길 것을 우려해 바구니에 실어 테베레강에 버리게 합니다. 이에 강을 따라 내려가던 바구니는 로마 인근 강변에 도착했고 이를 불쌍히 여긴 늑대가 젖을 물려주고, 딱따구리가 물어준 음식을 먹고 살아남게 되지요.
지금 우리가 봐선 늑대와 딱따구리가 우습게 보이지만, 당시 남부 유럽에선 사자 등 맹수가 없어져 늑대가 가장 무서운 맹수였고, 하늘과 땅을 오가며 신의 뜻을 알리는 전령 역할을 하는 새가 지켜주었다는 이야기는 이들이 신성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데 그만큼 좋은 배경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계속 늑대 젖을 먹고 살았으면 송중기처럼 늑대소년이 되었겠지만…, 다행히 양치기 목동에게 발견되어 목동들의 우두머리로 성장했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자 알바통가로 쳐들어가 삼촌 아물리우스왕을 죽이고 그들의 본거지로 주민들을 옮겨오니 그때부터 로마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두 형제는 테베레 강변 일곱 언덕 중 어느 언덕에 도시를 세울 것인지 언쟁을 벌이다가 독수리 점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는데 먼저 동생 레무스 머리 위로 6마리의 독수리가 날아가지만 형 로물루스는 머리 위로 12마리의 독수리가 날아갑니다. 이에 서로 먼저 본 사람이 우선이냐, 더 많이 본 사람이 우선이냐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서로 전투를 벌여 동생 레무스가 죽고 형 로물루스가 나라를 건국했으니, 이에 나라 이름도 로물루스의 이름을 줄여 로마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아마도 원래 이 형제는 그저 로마 언덕 주위의 청년 세력을 모은 지도자였겠지만 이후 로마사 작가들이 건국자들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사르곤 1세의 신화를 차용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신화에서 보듯, 아직 로마는 중동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영향을 더 많이 받던 시기였습니다. 이는 로마의 스승이자 유럽의 첫 문명국가였던 노리스 사람들도 올림포스 12신을 숭배하는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먼저 받아들여 전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이에 로마 역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존재이자, 페르시아 에서 시작한 조로아스터교의 창조주, 아후라마즈다 신이 타고 다닌 독수리를 권위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완전수 12마리의 출현을 강조해 로마 건국의 정당성을 나타냅니다. 이후 실제로도 첫 로마법은 12항목으로 구성되었지요.
그리고, 로마 군단의 상징으로 차용된 독수리는 이후 동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오스트리아제국 등 로마제국의 후계자라고 자처한 유럽 강대국의 주요 상징물이 되었고, 이후 로마 후계자는 아니지만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쿡도 국가의 상징으로 독수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째 얘기하다 보니 조금 엇나갔네요.
고대 중동과 유럽 국가들의 건국 신화까지 듣고 보니 주몽 신화가 매우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남다른 출생, 탈출…, 네 맞아요. 앞서 소개한 사르곤 1세 건국 신화와 모세 신화 등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시아 동쪽 끝에서도 유용하게 쓰인 것이죠. 다만 저쪽은 강을 가른 반면, 동아시아 버전에선 견우와 직녀를 위해 은하수 위로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만들었듯이 강 위로 물고기와 자라가 올라와 다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차이가 있지요.
그리고 이 사르곤 신화는 20세기 들어 태평양을 건너 미쿡에서 재활용되기에 이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1938년 탄생한 ‘슈퍼맨’ 이야기가 바로 사르곤 1세 신화의 변형이에요. 크립톤 행성이 멸망하게 되자 왕과 왕비는 갓난아기를 우주선에 태워 지구로 보냈고, 마침 농사를 짓던 부부의 밭에 떨어져 이들 부부가 키웠는데, 엄청난 힘을 가진 아이로 자라났고 이후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르곤 도대체 당신이란 인물은 얼마나 위대한 작가이신 겁니까?
- 동명왕은 원래 부여의 건국자
그나저나…, 우리는 고구려 시조를 동명성왕이라 알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편’에도 첫 문장에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다.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주몽이 동명성왕이란 건 가리지날입니다. 고구려의 시조이니 후대인들이 이를 높여 ‘동방의 밝은 임금’ 동명성왕이라 시호를 붙였구나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은 ‘동명’은 주몽보다 200여 년 전 부여 건국 시조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동명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논형》, 《후한서》, 《삼국지 위서 부여전》 등 중국 사서에 부여의 건국자 동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쪽 오랑캐 탁리국(또는 고리국) 왕의 시녀가 임신했습니다. 왕이 노여워하며 그 시녀를 죽이려 하니 대답하기를 “달걀만 한 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까닭에 제가 임신했습니다.”라고 답해 목숨을 구합니다. 그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우리 안에다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다시금 마구간 안으로 옮겨 말에게 깔려 죽게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지요. 이에 왕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여겨 그 어미로 하여금 거두게 하고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짓고 말과 소를 기르게 했는데,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동명을 죽이려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했는데 말이나 키우고 죽이려 하다니…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에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하여 강(엄호수)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버려 추격병은 건너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에 강을 건넌 곳에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왕이 된 까닭에 북이에 부여국이 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부여 건국 신화는 앞서 본 주몽 건국 신화와 거의 똑같습니다. 신성한 출생, 활 잘 쏘는 신동, 시기를 받아 강을 넘어 탈출해 국가 건설 등. 뭐 이건 복사한 수준이죠. 또한, 고구려 중반기에 적힌 《후한서 동이전》, 《삼국지 위오환전》에도 부여 건국 신화로서 동명 신화는 적혀 있지만 고구려 주몽 신화는 없습니다. 하지만 부여 멸망 이후 고구려 후반기에 만들어진 중국사서 《위서 동이전》, 《주서 동이전》, 《북사 동이전》에서는 동명 신화가 아닌 주몽 신화가 적혀 있습니다. 즉, 주몽의 고구려 신화는 동명의 부여 건국 신화를 그대로 베낀 것입니다.
이미 200여 년 전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은 이 사실을 간파해 《아방강역고》란 책에 “부여가 망한 뒤 그 건국 신화가 거룩한 것을 알고는 그 이야기를 표절하고 동명이란 이름마저 빼앗았다.”라고 강한 어조로 비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이 같은 사르곤 1세 건국 신화를 응용한 것은 비단 부여와 고구려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AD2세기 중엽 동북 초원 부족을 통합해 동쪽 부여에서 서쪽 돈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텡스퀘이, 137~181)의 탄생 설화 역시, 동명 신화와 거의 동일합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보면 탱그리, 단군과도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처럼 동북아시아 건국 신화는 서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만큼 서로의 문화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후 실제 고구려인들의 기록인 광개토대왕비가 19세기 말에 발견되었는데, 여기 비문에도 동명성왕이란 시호 대신 추모왕이라고 나옵니다. 즉, 장수왕 당시만 해도 시조 이름인 ‘추모’를 그대로 사용했지 동명성왕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석에 적힌 건국 이야기는 후대 기록에 비해 단촐해요.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창조하시었다.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녀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시니, 나면서부터 성스러움을 지니고 계셨다. 수레를 타고 남으로 순행하다가 길에서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길,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녀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은 떠올라라.” 하니 소리에 응하여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 떠올랐다. 그러한 연후에 건너가 비류곡의 홀본 서쪽의 성 위에 도읍을 정하였다. 세상에서의 위치를 즐기지 않아, 황룡을 아래로 보내어 왕을 영접하니, 왕이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에 올라타고, 하늘로 승천했다.
이때까지는 해모수라든지, 알에서 출생, 활을 잘 쏘는 신동, 왕자들의 시기, 대소왕자 등의 추격전 이야기는 빠져 있고, 강을 스펙타클하게 건넌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다가, 동명 신화와 겹쳐지며 후대에 이야기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또한 고구려 당시의 기록인 모두루의 묘지 속 기록에도 고구려 건국 신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루는 북부여자사라는 벼슬을 했던 신하로, 광개토대왕 당시부터 장수왕까지 모신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의 기록 역시 장수왕 때의 고구려인들의 건국신화 이해도를 잘 보여주는데, 그 기록은 이렇습니다.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께서는 원래 북부여에서 나오셨도다. 천하 사방이 이 나라가 최고로 성스러움을 알았다.
이 기록 역시 당시까지는 추모성왕이라고 불렀지 동명성왕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삼국사기》에서도 태조왕 이전 고구려 임금들은 ‘유리왕’처럼 본명 뒤에 ‘왕’ 칭호만 붙였기에 동명성왕은 매우 이례적인 이름인 걸 알 수 있는 것이죠. 게다가 《삼국사기》 기록인 ‘주몽’보다는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부른 ‘추모왕’이 고구려의 건국자로서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 부여 역사까지 합치려 한 고구려의 역사관
그럼 왜 고구려의 시조를 부여의 시조 이름인 동명성왕이라고 붙이는 역사 왜곡이 벌어진 것일까요?
북부여는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장수왕 시절까지도 남아 있다가 장수왕의 아들인 문자왕에 의해 최종 정복당하는데, 그 이후에 고구려 왕실은 부여 백성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포용하기 위해 부여 시조, 동명의 건국 신화를 따와서 주몽의 신화로 새롭게 포장하며 명칭도 동명성왕으로 바꾸어 부여와 고구려의 일체감을 강조했던 겁니다.
이에 실제 《삼국사기》 기록에 나오듯 고구려가 멸망하던 AD668년, 즉 BC37년 건국 후 700여 년 경과 시점인데도, 당시 고구려인들이 “나라를 건국한 지 900년 만에 멸망하는구나!”라고 탄식한 이유가 이처럼 부여의 역사까지 고구려 역사로 이해했기 때문에 200년 오차가 발생한 겁니다. 하지만 이처럼 두 나라의 역사를 합칠 정도로 공을 들인 부여는 야속하게도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시 당나라에 투항해 고구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말지요.
또 하나, 한사군의 핍박 속에서 민족 자주독립의 뜻을 이어받은 주몽이 옛 땅을 되찾는다는 다물 사상을 가지고 부여를 떠나, 단군의 옛터를 찾아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이해하는 것도 후대의 착각입니다. 요하에서 압록강 유역에 걸쳐 살던 예족의 나라가 ‘조선’, 그 북쪽 송화강 일대와 연해주에 살던 맥족의 나라가 ‘부여’로 원래 연관성이 없는 나라들입니다.
실제로도 동명이 송화 강변 길림에 부여를 세울 BC230년경, 당시는 그 남쪽에 단군조선이 엄연히 존재하던 때였고 아직 위만이 등장하기도 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몽은 북부여에서 나온 사람이므로 단군이 세운 조선을 조상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여 남쪽의 옛 조선 땅에 힘의 공백이 생겼기에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규보(1168~1241)가 1193년 작성한 《동명왕편》 기록에서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직후 옆 나라 비류국 송양왕이 찾아와 나라를 합치자고 제안하면서 “나는 선인의 후손”이라고 지칭합니다. (선인은 단군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라면서 어디서 선인 따위 자손이 자랑질이냐며 비류국을 합병하고, 송양왕을 다물후로 임명합니다. 중간에 두 임금이 서로 여러 동물로 변신하면서 힘겨루기하는 장면은 뽀나스~ 재미.
즉, 맥족 계열 고구려인들에게 예족의 건국 시조 단군은 다른 나라 조상이었고, 자기네는 하늘나라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아들인 추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독자적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뒤 세월이 흘러 만주와 한반도 북부 영토를 공유한 단군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역사까지 한데 묶어서 이해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군의 부인은 유화부인, 아들은 부루(동부여의 해부루왕)라고 옛 역사가 압축되면서 단군조선에서 부여로, 다시 고구려로 이어지는 단일한 역사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동명성왕이라 잘못 알려진 추모왕은 부여에서 탈출한 뒤 졸본부여 땅에 이르러 소서노라는 걸출한 여인을 만나 700여 년 이어진 고구려의 첫걸음을 내딛고, 2000여 년 뒤 후손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건국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첫댓글 역사는 아리송해 인간이 태여나는데 알에서 태여나고 그것참 신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