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이유>
복음: 마태오 5,38-42
오늘 복음은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악인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세상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밭을 노립니다. 나봇은 아합에게 포도밭을 팔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벨 여왕이 나서서 일을 꾸며 나봇을 죽게 합니다. 나봇은 반항도 못 해보고 포도밭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말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 독재자가 나타나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데모라도 해서 저항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 복음대로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지배하에 있었지만, 로마에 세금을 내라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악인에게 맞서면 같은 수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주인공은 사이코패스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본인이 그 사이코패스보다 더 악랄한 존재가 됩니다. 같이 놀면 같은 존재가 됩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독재정권을 뒤집어엎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권을 잡으니 더 악랄한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쿠데타를 해 보니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들고일어서지 못하게 하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싹부터 잘랐습니다. 그리고 무려 49년 동안 20세기 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독재정권을 유지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를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악인과 맞서면 나를 따르는 이들도 그를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중에서 많은 이들은 마음에 미움을 가지게 될 것이고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민중이 귀족과 종교에 대해 들고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런데 몇몇 선동에 일반 시민들은 수많은 사제와 귀족들의 머리를 단두대에 올려 잘라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미움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들도 모르게 범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와 맞서지 않고 그를 감싸셨습니다.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기기 위해 입맞춤하실 때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끌려가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유다를 감싸신 이유가 ‘하.사.시.’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에 잘 드러납니다.
“적어도 마지막 시간까지, ‘죄악’을 숨겨 두어, 제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로 그들의 몸을 더럽히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7-224).
만약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드러내셨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당신 제자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였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나쁜 생각이 깃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악인에게 맞서면 안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하고 분별하는 장소입니다. 더 큰 고통과 시련이 있을수록 더 정화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 저항하거나 맞서기보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으셨는지 먼저 배워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윤리를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구약성경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행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면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꼬마 아이와 큰 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어른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이가 예의 없이 행동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서 많은 이가 어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것입니다.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나요?”
스승이 말했습니다.
“바보들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남자가 정색하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말에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스승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렇다. 네 말도 맞다.”
어쩌면 자기를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기분이 안 좋아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진리를 향하는 방법인 바보들과 다투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자기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설득해 봐야 무의미한 논쟁이고 이를 얼른 끝내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 동의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과 논쟁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보들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당시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것이 가장 공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 맞서게 될 때, 그 안에서 더 큰 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아니 그보다 큰 사랑으로 다가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넓은 마음으로 적대적인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난과 죽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그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본시 단순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자꾸 복잡하게 만들려고 한다(공자).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하느님만이
악인을 이길 수 있다네.
오직 그분만이
심판에 대한
권한을 갖고 계시므로
끓어오르는
우리의 분노 위에는
겸손과 인내라는
십자가를
얹어 놓아야 한다네.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우리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대개 이기심과 욕심이 많은 사람이
인색하기 마련입니다.
타인보다 자신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돌보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대개는 나눔도 잘 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정화된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갈지 모르지만
나의 재산과 재능,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빵이 어떤 것이든
물의 흐름에 내맡기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빵을 배고픈 사람에게 나눠준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불공정한 사회구조와 불합리한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눈 것은
결국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나눔이 가장 인간적인고
그 인간적인 모습이 오늘 인간의 역사를
발전시키고 지탱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행과 아낌없는 나눔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영원합니다.
복음말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첫댓글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행과 아낌없는 나눔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영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