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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묵상글 ( 주님 성탄 대축일. - 내게 어둠이 있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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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게 어둠이 있다면
오늘 복음은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빛으로 얘기하면서
빛과 어둠에 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어두운 것은, 빛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와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빛과 어둠의 이치는 사실 간단합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둠은 빛의 반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빛의 반대는 없고 빛의 반대말도 없습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가 아니라 밝음의 반대이고,
어둠이나 밝음은 그저 빛의 상태들일 뿐이며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이라면 밝음은 빛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빛이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
빛이 이 세상에 왔는데도 나만 빛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은
그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깨닫지 못하기에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요한복음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모두 빛을 비추시고,
빛에서 오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모두를 비추는 참빛이신데
그러나 선한 사람은 그 빛을 선으로 깨닫고 사랑하고 받아들여 어둠이 없지만
악한 사람은 그 빛을 악으로 깨닫고 미워하고 받아들이지 않아 빛이 없습니다.
그러니 빛을 선으로 깨닫는 선한 사람과
같은 빛을 악으로 깨닫는 악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탈렌트의 비유에서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이
주인을 주지도 않고 거둬들이는 모진 분으로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한 탈렌트가 선도 은총도 아니고
한 탈렌트 주신 것이 사랑도 아니었으며
그러니 한 탈렌트 주신 분은 모진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라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빛을 비추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빛을 비추지 않는 빛은 참빛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리 빛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일지라도 참빛이 아니고
선택적으로 그러니까 편애하여 빛을 주는 사람도 참빛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을 빛으로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참빛에 대한 오해가 형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몇 번 믿었다가 배신당한 사람이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처럼
빛으로 희망을 걸었던 인간들에게서 실망을 여러 차례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참빛이 왔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믿지 못할 놈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참빛이 아닙니다.
빛이, 빛이 아니라고 믿는 데는 방법이 없습니다.
선이, 선이 아니라고 믿는 데도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믿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믿음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확신까지 하면 더더욱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요한처럼 빛과 선과 사랑을 증언해도 그는 어둡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에게 주님 성탄을 축하 드리며
빛으로 오신 주님이 앞길을 밝혀주시고,
평화와 기쁨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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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대축일 밤 미사)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찬바람 부는 한겨울에”(크리스티나 로제티, 박정은 옮김);
찬 바람 부는 한겨울에, 성에 낀 바람은 탄식이 되고/ 대지는 철갑처럼 단단하고, 물은 돌덩이 같은데,/ 눈은 내려, 눈 위에 또 눈, 눈 위에 또 눈,/ 찬 바람 부는 겨울, 오래 전에,//
우리의 하느님, 하늘은 그분을 잡지 못하고, 땅도 더는 버틸 수 없어:/ 하늘과 땅은 도망쳐 버리지, 그분이 다시 오실 때는,/ 찬 바람 부는 한겨울에, 마구간이면, 충분했어,/ 만능의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는.//
천사들이 경배하는 그분께는,/ 넉넉한 젖과 포근한 목초면 충분하고,/ 천사들이 무릎을 꿇는 그분께는,/ 사랑스러운 소와 당나귀, 그리고 낙타면 충분하지.//
천사들과 대천사들이 거기에 모여서/ 날갯짓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의 어머니만은 순결한 기쁨 속에서/ 입맞춤으로 사랑하는 이를 경배했지.//
가난한 난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내가 목동이라면, 양을 가져다 드릴 텐데:/ 내가 동방박사 중 한 명이면, 나의 몫을 할 텐데:/ 하지만, 내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 나의 마음을 드리지.//
그러네요. 저도 이 추운 외진 양주골에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께 드릴 것이라고는 ‘고작 저의 이 작은 마음’ 뿐이네요. 이 시는 영국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년)의 작품으로, 영국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성탄성가의 가사이기도 하하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양떼를 지키는 목자에게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곧 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와 야근하는 노동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이는 “구세주 그리스도 여기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암울한 이 세상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평화를 주시러 오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의 약속이 실현되었음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
그러니 다른 표징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단지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우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천사들은 목자들이 ‘구유’에서, 곧 마구간의 거주자인 짐승의 밥그릇, ‘여물통’에서 아기를 보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교부들은 <이사야서>(1,3)를 읽으면서 베들레헴 ‘구유 곁’에는 ‘소’와 ‘나귀’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그 짐승들은 ‘유다인’과 ‘이방인’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곧 ‘아기’가 되신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온 인류’를 암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짐승의 ‘여물통’이 ‘그리스도 자신’이고, 우리 마음의 참된 양식인 ‘빵이 놓인 제대’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제대에서 당신 자신을 얼마나 ‘작게’ 하시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빵 한 조각(성체)’의 모습으로 ‘작게’하신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표징입니다. 곧 우리를 위해 ‘작게 되신 아기’, 우리에게 ‘선사된 아기’가 그 표징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작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이요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요, 우리를 다스리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드러나게 권위를 띠 띠고 오시지 않으십니다. 그토록 전능하신 분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기’로, 이길 자 없는 강력하신 분이 ‘연약하고 나약한 아기’로, 말씀이신 분이 ‘말못하는 아기 벙어리’로 오십니다. 그야말로, 당신은 ‘무방비 상태’로, 오히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권능으로 사로잡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위대함으로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을 간청’하십니다. 그래서 ‘아기’가 되십니다. ‘사랑 외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 그분의 생각과 뜻에 들어가는 법을 배워가고, 그분과 함께 사랑하며 사랑의 본질인 ‘겸손’을 익혀갑니다. 그토록, 하느님께서는 ‘작게’ 되시어, 우리가 당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탄”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아기”로 내어주신 하느님을 본받기 위한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양주골 우묵한 골짜기 여기 우고리에, “구원자 아기 예수 탄생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한 번,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가득한 기쁨 성탄 맞으시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오늘밤, 우리의 아기! 구세주 나셨습니다.
왕방울의 소의 눈이 기쁨에 경악하고, 어린양의 떨리는 탄성에 잠들었던 만물이 깨어납니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첫 울음 속에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는 백인대장의 고백을 듣습니다.
포대에 싸여 있듯, 뭇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가 눕지도 않은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세워질 연약한 아기, 내가 휘두른 채찍에 온몸이 부서질, 그러면서도 생명을 주시고자 저를 부르신 이여!
당신을 품에 안게 하소서, 안은 당신 가슴에 머리를 묻고 새로 나게 하소서! “목마르다”라고 외치는 당신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제 생명을 주신 이여!
당신은 남북이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우리의 마음 속 투박한 담 벽이 세워진 이 곳에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여기, 다윗의 조그마한 고을 한반도, 가로막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아성을 부수소서! 오, 임마누엘, 저희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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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축하의 인사를 하시겠습니다.
마음의 구유 안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해 오신 모든 분께 축하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실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맑은 영혼을 간직하게 되었고 특별강론에 귀 기울이면서 영적 양식을 충만하게 채웠으며, 성경 통독과 감사 노트 쓰기를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지길 노력했습니다. 주일 학교는 은총 잔치로, 젊은이는 음식 나눔을 통해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했으며,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의 친교와 일치, 실천하는 사랑을 위해 노력한 순간들이 주님을 잘 낳아드리고자 애쓴 모습이고 그러기에 그만큼 주님께서 기뻐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매사에 열성과 정성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더 큰 사랑을 담아서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맑고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맑고 거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비추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3,16). 그리고 성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드러내 준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 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주는 성탄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부르시길 바랍니다. 한번 불러보실까요? 예수님! 예수님! 이 이름에는 무슨 뜻을 담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많이, 자주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마음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주님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박대 하였을까요?
그분은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진 아기의 모습이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 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매번 차려져도 매일 같이 그 밥을 먹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상기시켜 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구유에 뉘어졌다는 것은 이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겁니다.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 빛으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일깨워 줍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하고 주님의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마침내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찬양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의 구유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2,6-12).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 하는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매일 매 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희망합니다. 매일이 거듭 태어나는 성탄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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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성탄 담화문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성탄을 축하드리며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탄의 충만한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 성탄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성탄 밤 미사) 이사야 예언자는 이 말씀으로 주님의 탄생을 선포합니다. 이어서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이사 9,2). 그리고 성탄의 날에(성탄 낮 미사) 교회는 같은 예언자 이사야의 위대한 선포를 전합니다.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이사 52,9). 빛, 기쁨, 위로. 예언자 이사야가 전하는 세 가지 말씀을 따라 성탄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1. 성탄의 빛
성탄은 빛입니다. 구약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에는 하느님의 첫 말씀이 나옵니다. “빛이 생겨라!”(창세 1,3)라는 말씀입니다. 빛은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첫 말씀입니다. 빛은 창조의 시작이고 생명의 기반이며 보는 것의 전제 조건입니다. 빛 없이는 살아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또한 보지 못하면 올바로 알 수도 없습니다. “빛”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상징이고 하느님을 바라보는 문입니다.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요한 복음사가는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가리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고백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묵시록의 마지막 장에는 빛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산 신자들의 미래를 빛과 함께 표현하는 찬미가가 나옵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5).
성탄으로 아기 예수님께서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도 깊게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둡고 차가운 세상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우리를 비추는 따뜻하고 환한 빛을 봅니다. 오늘 구세주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성탄은 신앙을 지닌 우리의 인생길을 밝히고 인도하여 생명으로 이끄는 영원한 빛입니다(이사 60,20 참조).
2. 성탄의 기쁨
성탄은 기쁨의 시간입니다.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참된 기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기쁨을 우리 안에 있게 하시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요한 15,11 참조).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내면의 기쁨입니다. 한없는 사랑의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내려누르고 옥죄는 이중의 쇠사슬을 끊어 없애십니다. 그 하나는 죄의 사슬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사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바라고 찾는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죄의 마지막 권세인 죽음의 사슬을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죄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올곧은 신앙을 간직하며 살게 하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우리 기쁨의 원천이신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 함께 기뻐합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비단 우리가 억눌린 죄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생을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를 따라 그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신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이 누리신 기쁨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우리 곁에서 고통을 겪고 절망하는 형제들에게 다가가 환한 미소와 따뜻한 손으로 그들을 돌보아 줌으로써 예수님께서 누리신 사랑과 평화의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리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3. 성탄의 위로
성탄은 위로의 시간입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위로의 시간입니다. 올 한해도 우리는 어김없이 험난하고 척박한 세상을 살았습니다. 힘겨운 세상살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며 올곧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쳐 사랑을 잊은 채 쓰러지고 넘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을 들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몸을 누일 방 한 칸조차 얻지 못해 마구간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시다(루카 2,7 참조). 욕망으로 휩싸인 세상의 혼란과 악의 권세가 떨치는 부정한 현실이 우리 앞에서 저절로 마술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세상, 아니 어쩌면 지금보다 더 험악하고 힘겨웠던 세상 한 가운데서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의 불을 지피며 겸손하게 당신을 낮추시고 당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아기 예수님,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아기를 바라보며 참된 위로와 평화를 얻으십시오. 이 아기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가 걷는 모든 순례의 길에서 우리의 모든 상처를 보듬어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마지막 날 죽음에서 우리를 또 한 번 일으켜주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특별히 매일 미사의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지친 우리 영혼의 위로를 얻고 험난한 세상의 풍파에 맞서 살아갑시다.
예수님께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려 오신 모든 신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아기 예수님의 위로와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히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2023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종강 시몬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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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셨습니다. ‘탄’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 드립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도 ‘예수성탄’을 축하드리면서 저처럼 축하의 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캐럴’이 있습니다. ‘징글벨, 루돌프 사슴 코, 울면 안 돼,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경사롭다.’와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저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구유와 트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저는 매년 구유와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1년 동안 잘 보관했던 구유 세트를 꺼내서 장식했습니다. 청계천 시장에 가서 ‘은하수 전구’를 사왔습니다. 별도 달고, 구슬도 달고, 빤짝이도 걸고, 전구를 연결하였습니다. 저와 동창 신학생이 기본 틀을 만들면 수녀님이 예쁘게 다듬었습니다. ‘성탄카드’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같이 만들어서 팔기도 했고, 사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카드를 쓸 일이 많지 않습니다. 주로 카톡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도 있습니다. 제가 살던 명동 거리에는 구세군 봉사자들이 종을 울리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진정한 의미는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생각하고, 그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학생 때는 성당에서 ‘성탄 예술제’를 했습니다. 초등부 학생들은 율동과 노래를 준비했고, 중고등부 학생들은 멋진 노래와 춤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연극의 제목은 ‘넷째 왕의 전설’이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연극입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서 출발한 박사들은 원래 4명이었습니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 조재형’입니다. 멜키올은 황금, 발타살은 유향, 가스팔은 몰약, 조재형은 다이아몬드를 준비했습니다. 조재형은 길을 가다가 굶주린 엄마와 아이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관으로 데려갔고, 여관 주인에게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고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입니다. 돈이 없어서 팔려가는 노예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마지막 남은 다이아몬드를 주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모두 써버린 조재형은 결국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30년이 지났고, 노인이 된 조재형은 예루살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30년 전에 경배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조재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이미 너에게 선물을 받았단다. 굶주린 엄마와 아이에게 준 것이, 강도당한 남자에게 준 것이, 팔려가던 노예에게 준 것이 바로 나에게 준 것이란다.’ 조재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넷째왕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갔습니다.”
연극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한 남자가 쓰러져있었습니다. 술이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천호동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봉천동에 살았습니다. 동창 신학생과 함께 그 남자를 택시에 태워서 천호동 집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집에는 남자의 아내와 딸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아내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이렇게 사제로 32년을 지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때 했던 작은 선행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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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찬미 예수님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성탄 시기가 되길 빕니다. 성당 앞 구유에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시니까 구유가 꽉! 차 보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들이 다시금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유 안에 고사리손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저 작은 손이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람들을 고통에서 건져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이 보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웃고 먹고 마시고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오늘 완성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 자체인 분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서 큰 것, 예쁜 것에서부터 깨진 것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그릇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릇이 어떻게 오래된 것인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릇에 개밥을 담으면 개밥그릇이 되는 것이고 사람 밥을 담으면 사람 밥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먹으면 죽는 것을 담으면 사약 그릇이 되는 것이고 먹으면 사는 것을 담으면 약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도 그릇과 비슷합니다. 우리 마음에 나쁜 것을 담으면 그 독함은 얼굴을 통해 드러나고, 악취는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담은 사람들입니다. 구유에 아기 예수님이 오셨듯이 우리 마음에도 아기 예수님이 오셨고 그 아기 예수님을 우리 마음이 담아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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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학원
저는 학원에 치여 산 기억이 없습니다.
학창 시절 학원에 다녔던 기억은 있지만
많은 학원에 다닌 기억은 없습니다.
언젠가 조리 있게 설명을 잘하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다른 친구는 그에게
‘너 학원 다니냐? 어쩜 그렇게 설명을 잘하냐!’라며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그때 진짜 ‘설명 잘하기’ 학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서로 오해하는 정도가 줄어들 테니까요.
또 이런 학원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청학원
공감학원
동행학원
위로학원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배우지 못해서 서툰 부분이니까요.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잘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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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디오를 듣다가 고등학생 때 즐겨듣던 팝송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카세트테이프 이 한 곡만 담아서 일주일 내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속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명곡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이 노래의 기타 전주가 너무 멋져서 잘 치지 못하는 기타 실력이지만 계속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했고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할까요? 지금도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예전만큼은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은 유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젊음과 열정을 나이가 찬 지금에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그토록 좋아했던 물건을 지금도 간직하면서 애지중지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기 몸만 보더라도 유한성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영원히 필요한 것처럼 착각하고,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의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인 사랑 실천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한성을 가진 이 세상에 영원하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단순히 2,000년 전에 단 한 번 함께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고 하십니다. 유한한 세상에 영원함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순간의 사랑이 아닌, 무한한 사랑을 담아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어렵고 힘들다면서 한숨짓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한한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무한한 하느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기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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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한 다발의 생각만 멈추면 평화, 사랑, 기쁨이 찾아온다. 이들은 모두 무념의 상태에서 생겨난다(디켄 베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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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참 기쁜 소식
-“오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태어나셨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하루종일 흥겹게 불렀던 대림 제4주일 미사시 화답송 후렴이었습니다. 요즘은 정말 하느님 사랑하는 기쁨으로, 재미로, 맛으로 삽니다. 도대체 삭막한 광야 여정, 이런 하느님 사랑하는 맛이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살아 갈 수 있을런지요! 하느님을 더욱 많이 사랑하고 싶어 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래도 임종을 맞이했을 때의 단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더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일거란 예감이 듭니다.
아무리 오래 산들 하느님 사랑이 빠진 삶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런지요. 사랑은 삶의 의미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니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의 정의 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절정에 도달하여 학수고대하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오늘밤 태어나셨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방금 성경독서 이사야서와 레오 대교황의 성탄 강론 노래를 통해서도 잠시 주님 성탄의 기쁨을 맛봤습니다. 마침내 제1독서 이사야서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어둠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주님 탄생으로 인한 기쁨의 빛이 온누리를 환히 밝힙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구유안에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도 아기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제부터 성탄시기만 아니라 매일 성탄의 기쁨 속에 빛으로 생명으로 희망으로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님 탄생으로 인해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몇가지 구체적 물음에 대한 답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체험한 이는 누구입니까?
모두가 잠든 밤, 밤새 깨어 양들을 보살폈던, 맡은바 책임에 충실했던 가난한 목자들입니다. 유명한 종교인들이나 신학자도, 부자도 아닌 참으로 가난하나 깨어 그 책임에 충실하던 목자들에게 선물처럼 예수님 탄생의 체험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을 때 목자들은 몹시 두려워하는 중에 천사로부터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영적 다윗 고을 베들헴이요 바로 오늘 이밤에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에서 구원자 예수님 태어나셨습니다. 아니 요셉 수도원만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성탄 밤미사전례를 봉헌하는 모든 곳에서 탄생하시는 예수님이요, 깨어 묵묵히 책임을 다하다 미사전례에 참석한 가난한 우리 모두가 지금 탄생하신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늘 깨어 책임을 다하는 가난하고 순수한 영혼들만이 주님을 만납니다.
둘째, 탄생하신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는 곳은 어디입니까?
하늘 높이에서가 아닌 땅 낮은 곳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귀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구중궁궐 고대광실도 아닌 여관집 마굿간에서 구유에 뉘어 있습니다. 다음 묘사 그대로입니다.
“마리아 요셉 부부가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장면입니다. 탄생하실 주님을 만나는 곳은 결코 부유하고 화려한 안락한 곳이 아니라 소외된 낮고 춥고 어두운 곳입니다. 바로 거기서 생명으로, 빛으로, 희망으로 탄생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말 구유하니 모든 이의 밥이 되신 주님을, 또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연상하게 됩니다. 여기 여관이란 말마디가 나오니 감동적 일화가 생각납니다.
오늘 상황은 아이들의 성탄 연극에도 자주 나옵니다. 바로 이 예수님 부모가 여관을 찾았을 때, 초라한 행색에 여관주인은 방이 없다고 내모는 순간, 여관주인을 돕던 배역을 하던 아이가 대본에도 없던 내용을 발설함으로 연극은 끝나고 말았지만 관중은 큰 감동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여기 방 있어요! 가지 마세요. 여기 이 방으로 들어오세요.”
여관 주인이 방이 없다고 하자 옆에 있던 배역이 아이가 예수님 부모를 쫓아가며 외쳤다는 대본에 없던 말마디입니다. 그 아이는 약간 부족한 아이로 걱정했는데 정말 큰 사고(?)를 냄으로 연극은 여기서 끝났고 관객은 크게 감동하여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일화입니다. 참으로 천진무구한 아이였던가 봅니다.
셋째, 탄생하신 구원자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실까요?
평화를 이루어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천사들의 하느님 찬미에 하느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참으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평화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독서기도시 독서 이사야서 11장1-10절까지 말씀도 만물의 평화공존의 유토피아를 노래합니다. 참으로 평화의 일꾼이 되어 사는 일이 탄생하신 주님은 물론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바로 탄생하신 구원자 예수님의 정체를 밝힙니다. 평화의 하느님 안에 평화의 예수님이 보입니다.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라.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실 것이다.”
이런 공정과 정의, 평화의 하느님을 닮은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들인 우리를 용기백배, 사기충천케하는 평화의 하느님이요 우리의 평화이신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땅에서의 평화는 하늘에서의 영광으로 화답됩니다. 평화와 영광은 한 구원실재의 양면입니다.
오늘 구원자 예수님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동시에 우리도 우리 마음의 구유안에서 빛으로, 생명으로, 희망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거룩한 주님 성탄 밤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가 되어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밤 탄생하신 구원자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시고 충만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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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5.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
White Christmas, Merry Christmas
(화이트 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
흡사 오늘 주님 성탄의 기쁨을 내다본 이사야 예언자 말씀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구원자 탄생을 갈망하는 영적 예루살렘이요 주님의 사제인 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입니다. 오늘은 참 기쁜 날,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새벽 눈뜨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온 흰눈 가득 덮인 풍경이었습니다. 저절로 터져나온 온누리 모든 분들과 피조물들에게 드리는 인사말입니다.
“White Christmas, Merry Christmas”
(화이트 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어제에 이어 오늘 성탄대축일 낮미사 화답송 후렴도 참 흥겹습니다.
“땅-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
어제처럼 오늘 하루도 이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면서 지내려 합니다. 어제의 화답송 후렴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이었습니다. 정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기에 오래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 임종시에도 유일한 아쉬움이 있다면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 아쉬움일거란 어제의 고백을 다시 확인합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어제 대림 제4주일 로마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교황님 강론 말씀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대로 주님 성탄 대축일 우리 모두를 향한 권고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 마음들을 하느님의 사랑에 열라, 모두에게 친절을 보여라!”
어제는 난생 처음 잠들었다가 수도형제가 깨주어 밤미사에 가까스로 참석할 수 있었으니 수도생활 41년째 초유의 체험입니다. 평생 벨소리 없이 일어났는데 어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늘 밤 12시쯤 일어나 눈붙이지 않고 하루를 지내다가 저녁에 잠들면 밤 12시후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된 까닭에 10:30분 밤미사전에 못 일어난 것 같습니다.
미사중에도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루하루 온힘을 다해 써왔던 산더미처럼 쌓인 강론이 순간 짚더미처럼 참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제 그만 멈출까하는 유혹도 잠시 들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천상체험후 자기가 쓴 모든 글들이 지푸라기 같다는 자괴감에 그 이후로는 글쓰기를 중단했다는 일화도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매일 강론 쓰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의 표현이자 살아 있음의 표현이요, 사랑 나눔의 기회이니까요. 오늘 역시 일기쓰듯 전개되는 강론입니다. 어제 밤미사시 제2독서 성 레오 대 교황의 강론 노래후 응송이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
참된 평화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은 어디서나 꿀을 흘러내리게 하는도다.
오늘은 세상 구원의 날이 되어
옛적부터 마련된 영원한 행복의 날이 빛나는도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런지요! 어제 저녁식사를 앞둔 수도원 식탁 분위기가 흡사 잔치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잔치날이 사라진 작금의 시대, 성탄 대축일 잔치날이야 말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이런 하느님께 25년전 성탄절에 썼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시를 오늘 헌시(獻詩)로 하느님께 바칩니다. 수차례 인용했습니다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언뜻 "난 하느님께 가스라이팅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흰눈 덮인 온누리가 ‘화이트 사일런스(white silence), 하얀 침묵중에 주님 탄생을 축하합니다. 어제 가난한 목자들이 주님 탄생을 체험한 루카복음 내용이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y from below)”을 뜻한다면, 오늘 요한복음의 주님 탄생에 대한 진리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y from above)”을 뜻합니다. 오늘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요약하는 요한복음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히브리서 서간 말씀 역시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말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존엄한 품위의 참나-참사람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아니곤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첫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수록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생명을 찾는, 빛을 찾는 인간들에게 말씀이신 그리스도만이 그 답입니다. 충만한 생명, 환한 빛속의 삶의 길은 주님뿐이 없습니다. 다음 요한복음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참생명, 참빛이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참빛이요,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의 사랑이 되게 하는 참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참생명이자 참빛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명실공히 우리를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참으로 영예로운 우리의 신원, 하느님의 자녀됨을 확인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둘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삶입니다. 요한 사도의 기쁨에 넘친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
새삼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 선물이 바로 오늘 우리 마음의 구유에 탄생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을, 빛을, 길을, 진리를, 은총을 잃어 존엄한 품위를 잃고 방황이요 전락입니다. 구원의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탄생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은총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날로 일치를 굳건히 할 때 참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진선미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답은 하나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 뿐입니다. 한결같이 “예닮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이런 주님을 닮아감으로 날로 생명과 빛,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존재이유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문득 떠오르는 부활의 봄과 더불어 생각난 “민들레꽃”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볓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아기 예수님 탄생으로 하늘은 땅이 되었고, 주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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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밤 아기 밥님 오시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
오늘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시네
포대기에 싸여계시니
갓난아기요
밥그릇에 담기시니
밥님이시네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신
갓난아기 밥님은
참하느님이시니
하느님 밥이요
밥 하느님이시네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신
갓난아기 밥님은
참사람이시니
사람 밥이요
밥 사람이시네
오늘밤
하느님 사람 밥이신
밥 사람 하느님이신
아기 밥님 오시네
오늘밤
믿음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믿음으로 뜸들일
믿음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믿음의 뜸들이네
오늘밤
희망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희망으로 뜸들일
희망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희망의 뜸들이네
오늘밤
사랑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사랑으로 뜸들일
사랑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사랑의 뜸들이네
오늘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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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주님 성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주님 성탄을 축하하고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어느 축일보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중에 보낸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신앙인들에 성탄의 참된 의미를 보여줍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날에는 담벼락까지도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먹일 수가 없어서 그 겉에다가 고기를 문지르고 소나 당나귀에게도 평상시 보다 더 많은 양의 여물을 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밀과 곡식을 뿌려서 새들도 이렇게 성대한 날은 실컷 먹게하도록 했습니다. 이날에는 무엇보다도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미천한 우리 내면의 마구간에 탄생 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많고 나약함으로 가득찬 이 지저분하고 보잘 것 없는 마음의 마구간에 감히 하느님께서 황송하옵게도 사랑의 아기 예수님으로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허물많고 죄많은 나약한 존재이기에 때문에 더욱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우리 각자가 묵은 인간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로 하느님의 참 모상, 즉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진실로 닮기를 바라고 실천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다시말해서 교만, 허영, 불순종, 시기, 질투의 옛 사람에서 사랑, 자비, 겸손, 평화, 기쁨의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다음의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상기하면서 우리 또한 일상의 삶안에서 아기 예수를 낳는 어머니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준 신학들
14) 웃음 · 새로움 · 기쁨:
하지만 액카르트가 경고한 대로, 돌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버림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 하느님에게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원론과 모든 이분법적인 영성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의 신비 공동체의 목을 휘감았던 타락/구속 영성의 패권을 돌파하고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액카르트가 단죄된 순간, 서양의 영성에서 무언가가 사려졌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끊어졌다.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신비주의와 손올 잡은 예언자 정신이었다. 그것은 자비를 지향하는 영성, 사회정의와 의식의 성장을 담은 영성이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술가, 우리 한가운데 있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것은 영성의 핵심 요소인 웃음과 기쁨이었다. 그것은 기교를 동원하는 영적 방법이 아니라 단순성이었다. 그것은 직업적 종교인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신비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요컨대, 사라지고 대가 끊어진 것은 창조 중심 영성이었다. 이처럼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풍부하고 건강하며 통전적인 전통으로 되돌아가자고 권면한다.(83)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묵시 21,1-8
새 하늘과 새 땅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이어서 “이것을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신 다음,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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