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越로 가는 길
수양대군에게는 모사(謨士) 권남(權擥), 무사(武士) 한명회(韓明澮) 양인
을 비롯하여 문종 선왕 때부터 중용(重用)을 받았던 정인지사가 있었다.
때는 단종 삼년 육월 임금은 끝내 양위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빌린 그들의
탈권에 아무 힘없이 대보를 물려 주고 말았다.
그가 곧 세조(世祖)이다. 단종과 단종비는 수강궁(壽康宮)으로 거처를 옮
기고 이름 좋은 상왕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수강궁을 드나드는 종친 혹은
야인들에게 듣는 소식이 중전에게는 하나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었
다.
그런데 세조의 탈권이 어긋나는 일이라고 보는 몇몇 구신(舊臣)들이 있었
다. 이들은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 형조참
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사예(司藝) 유성원 등이었다.
거기다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전절제사(前節制使) 유응부의 일곱
사람이었다.
상왕의 내종(內從) 권자신(權自愼)이 가담한 이 왕위 복구의 대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중전 귀에도 들어왔다. 중전에게는 보통 걱정거리
가 아니었다. 그 무서운 세조가 알게 되면 일가멸족은 물론일뿐더러 상감
의 신상에도 절대로 이롭지 않으리라는 것은 작은 가슴으로도 추측을 하고
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슴은 설레이다 못해 답답해지고 미어지는 듯 했다. 상감은 무엇
을 하는지, 이런 것을 아는지, 궁금이 지나쳐 초조해졌다. 이 일을 상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자기 발로 상감 처소로 쭈르르 갈 수는 더욱 없었다. 금해진 법
은 아니지만 언제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어머님 말씀이 생각나서였
다. 잠깐이라도 자기 처소로 거동을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간
절한 염원은 상대쪽에도 통하게 되는 법인 듯했다.
한나절이 지나서 고요하기 이를데 없는 중전 처소로 단신 상왕이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 예고없이 대낮에 이렇게 자기 처소
로 용체를 옮기는 일이라는 건 별로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전, 무엇을 하시오? 하두 무료하기에 중전은 무엇을 하나 엿보러 왔
소..."
상왕은 기색이 혼연하여 농담을 던졌다.
"신첩 낮이나 밤이나 상감 용체만을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어디 그럼 얘기해 보시오. 중전, 아니 이제는 중전도 아니고 나도 실은
상감도 아니지만..."
"상감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옵니까? 신첩에게는 언제나 어디서나
상감임에 틀림없사옵니다."
"하하... 그럴까? 모르겠소. 우리들만의 세상에서는 상감인들 어떻고 그저
지아비라고 부르면 어떻겠소. 그렇지 않소? 중전."
"예, 황공하옵니다."
지당한 말이지만 그녀는 듣기에 황공하였다. 상왕이 되고 이궁으로 옮겨
온 후로는 더욱 상감과 가까워진 것 같은 나날이었으므로 그녀로서는 다시
없이 흐뭇하고 즐거운 일의 하나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어린 부부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먼저 중전이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듣자옵건대 성삼문이하 많은 중신들이 상감의 왕위 복구를 위
해서 모의하고 있다고 들었사옵는데. 더구나 신첩의 아비도 연관이..."
"응, 그것이 걱정이요. 또 그동안에 겪은 피비린내도 지긋지긋한데 그들
이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하루도 마음 편안할 날이 없구료..."
"상감께서는 일을 아신지 오래 되셨습니까?"
"오래 되었나 보오. 종친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한 소리지. 또 드나드는 사
람도 일일이 뒤따르고 한다는데 가지가지가 마음 안 쓰이는 일이라곤 없구
료. 상왕이고 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언젠가 중전에게 말한 것같이 우
리 둘이 초토에나 묻혀서 자연과 벗하고 살고 싶구료. 진정이요. 그러나
그것도 맘대로 못하는 신세가 바로 나와 비의 신세가 아니겠소?"
그녀는 가슴을 치고 대성통곡이나 하면 조금은 시원해질까 생각했다.
"상감마마, 하오나 마음을 굳건히 하시고 또 인간이 할 수 있는 진인사대
천명을 잊지 말아 주시옵소서."
"옳소. 비의 말이."
"그리고 상감께서는 그 일을 막도록 할 생각을 하신 일은 없사옵니까?"
"내게는 아무 힘도 없소. 빼앗겨도 어쩔 수없고 찾아 준다 해도 어쩔 수는
없는 몸! 그렇지 않소? 중전."
'그렇다. 지존이신 상감의 자리가 힘없고 나이 어린 상감이시니 이렇게 불
우해야 되는 것이구나..'
중전은 어디 눈에 안 보이는 그 무엇에라도 호소하고 싶었다. 이 어리고
착하기만 한 임금에게 힘이 되어 줍시사 합공하고 빌고 싶었다.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배운 그녀가 의지하고 바랐던 존재는 하늘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었다. 다만 이 나이 어린 상감 하나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상감을 조용히 불렀다. 이시간! 지금! 그녀의 취할 태도는 오
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상감마마! 힘을 내시어요. 신첩 아녀자의 몸으로 아무것도 모르옵니다마
는 어디까지나 상감을 따라 죽거나 살거나 할 작정이옵니다."
"중전!"
"상감마마!"
두 사람은 두 손을 마주 쥔 채 바라보았다.
단종의 수강궁 생활은 하루도 즐거울 날이 없었다. 따라서 중전의 아리따
운 자태도 발랄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지금 이순간이 그들에겐 좀처럼 찾
기 힘든 시간이었다.
김상궁이 기쁜 얼굴로 밖에서 읍했다.
"김상궁! 무엇 좋은 일이라도 생겼소?"
오십이 가까운 김상궁은 대대로 동궁빈을 모시던 지밀상궁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중전의 눈에 들어 중전 지밀상궁으로 올라선 여인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충성심과 과묵한 태도가 누가 보아도 믿음이 가는 노년으로 접어
든 상궁이었다.
"예! 황공하옵니다. 이번에 명(明)나라 대사가 오셨사온데 내일은 창덕궁
에서 연희가 베풀어 진다 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그리 기뻐서 상궁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오?"
"그런게 아니오라 상감마마께옵서 수강궁으로 듭시옵고는 한 번도 거동을
아니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그야 유폐되시다시피 하신 용체가 어찌 상감 마음대로..."
여기까지 말하고는 중전은 가슴이 메어온다.
"중전마마! 그렀사온데 내일 연회에 상감마마께서 참례를 하신다 하옵니
다."
"김상궁! 상감마마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소?"
"예!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오래간만에 거동이시니 기쁘실까?'
다른 사람들은 다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중전인 자기만은 결코
상감이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튿날은 명나라 사신의 환영을 위한 연회가 창덕궁에서 벌어졌다. 한편
성삼문, 박팽년 등은 호기(好機)가 왔다고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그들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雲劒)을 잡기로 결정하고 대사를 성취시키려
고 모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모(智謀)의 사람으로 세조의 한 팔인 한명회가 이 기미를 알아차
렸다. 몇 달만의 거동으로 상쾌해 하던 상왕의 모습이 흐려졌다. 상왕의
연회거동을 중지하라는 세조 명이 온 것이다. 성삼문 등도 상왕이 참례 안
하는 자리에서의 혁명은 허사라고 깨달았다.
운검을 가지고 들어가려던 무인 유응부는 한명회가 연회석에 들어가지 못
하게 막는 태도가 괘씸하기 이를데 없었다.
"생각컨대 연회장소가 좁아서 운검을 잡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응부는 한명회를 치려고 했다.
성삼문 등은 굳이 만류했다.
"상왕이 안 계신 이 자리! 무엇 때문에 만용을 내시오? 제발 참으시오."
응부는 이를 갈고 참아야만 했다. 무릇 무사와 문사의 다른 점은 이런 것
이리라.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이미 일이 틀린 것을 눈치 챈 김질(金 )과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의 고
발이 기어코 일을 벌여 놓고 말았다. 유여가 있을 리 없었다. 성삼문, 박
팽년 등 여섯 사람이 입은 화(禍)는 여기서 길게 부연하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수강궁의 봄은 봄을 외면한 듯싶었다. 상하가 수심에
싸인 가운데 어디를 들어서나 찬바람이 불었다.
중전의 처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제 와서 모든 경위를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얘기하던 금성대군(錦城大
君)의 말이 소름이 끼치면서 되살아 왔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
은 언제나 단종의 편에 서 있었다. 호탕하고 뛰어난 무예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그였지만 이미 정권을 장악해서 상감자리에 오른 형 세조와 겨루기
에는 너무도 적은 힘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호읍(號泣)했다. 땅을 치며 하늘을 쳐다보며 나라 형편
을 비탄했다.
상왕인 단종도 상왕비도 같이 소리 없이 울었다. 더구나 비의 슬픔은 말
할 수 없었다. 삼족을 멸할 일, 즉 모의를 했으니 그 형이 극심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걱정을 얼굴에서 감추지 못하는 상왕비의
연연하 모습이 금성대군으로서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상왕비마마, 심려를 놓으십시오. 설마 강도 같은 그들이기로서니 상왕비
마마의 친가를 건드리기야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중전은 더 길게 친가 걱정만 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고 깨달았다. 언
제 어느 때 상왕인 단종에게 화가 올는지 예상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을 태연히 가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떤 불행한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니려면 굳은 마음 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전의 마음이었다.
상왕비 처소에서 느끼는 계절은 앞마당에 피었다 졌다 하는 초목들에게 있
었다. 모란이 피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 까닭이 없다는 듯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상왕비는 아침부터 이름 모를 불안감에 사로 잡혀 좌정을 할 수가 없었다.
책을 펴놓고 앉아 있어도 눈이나 머리로 새겨 들어가지가 않았다. 꽃을 둘
러보아도 마음의 평화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가슴 속까
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혹시 친가에 무슨 변이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상감에게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길 징조인가?'
맑은 예지(銳志)를 지닌 여자의 가슴은 예민하다. 드디어 일이 난 것이다.
상왕도 그녀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예기했던 일이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성삼문 등이 역적모의한 일을 상왕이 몰랐을 리 없다고 핑계삼
아 그의 허울 좋은 상왕의 존칭마저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 노산군(魯山
君)으로 강봉이 되었다. 자연 상왕비인 그녀는 노산군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사자의 전서(傳書)는 추상 같기만
했다. 노산군 부인이 된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다음 말이 더욱
무서운 것이라고 예측하기 과히 어렵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산군으로 강등
된 상감의 용안은 별로 흔들림이 없었다. 사자는 계속해서
"군사 오십명의 호송하에 강원도 영월(寧越)로 내일 안으로 떠나십시오."
노산군 부인의 가슴은 오히려 담담했다.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진리를
배운 이상, 그것을 아는 이상, 당황할 일이 없었다. 자기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상감을 따라 나서기만 하면 되리라고 마음 먹으니 별로 초조할
것도 없었다.
사자도 물러가고 노산군 부인은 짙어오는 황혼을 받고 앉아 있었다. 노산
군이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서 보고, 위로도 해드리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에 대한 말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황혼이 짙어오는데도 노산
군은 오지를 않았다.
그녀는 참기가 어려웠다. 오늘밤이 수강궁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어찌하여
상감은 이렇게도 무정하신지 원망스러웠다. 술시경(戌時頃)이나 돼서야 노
산군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상감마마! 신첩 많이 기다렸사옵니다."
"음....."
침통 그대로의 용안이었다.
"비는 어째 아직도 침소에 안 드셨소?"
"수강궁에의 밤이 오늘 뿐이온데 어찌 신첩 안온히 자리에 들겠사옵니까?"
"이제는 중전도 비도 아닌 노산군부인이요. 지금부터는 부인이라고 부르리
라. 부인, 얼마나 친근하고 좋소. 부인! 어디 그 얼굴 잊지 않게 눈 속에
새겨 둡시다."
"상감께서는 무슨 말씀을... 죽는 날까지 상감을 따라야 하는 이몸... 새
겨 두시지 않아면 설마하니..."
"부인, 참으로 답답하구료."
노산군은 그 말을 한숨과 함께 내뱉다시피 하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상감마마 신첩이 아뢴 말에 어디 잘못이라도 있사옵니까?"
"아니오... 그게 아니라 부인이 너무나..".
노산군은 또 말끝을 맺지 못하고 부인의 얼굴만 뚫어지라고 바라 보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어떤 걱정이 상감 위에 생긴 것이라고 부인은 생각
하였다.
"상감마마! 신첩에게 못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첩의 몸이 오나 언젠가도 말씀한신 것같이 신첩의 몸과 말이 힘이 된다
고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노산군도 이제는 할 말은 해야 되겠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부인, 나를 똑똑히 보시오. 그리고 언제나 부인의 마음은 여전하리라고
믿고 있소마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들어 주시오."
노산군 부인인 그녀에게 번개같이 머리 속을 스쳐간 것이 있었다. 예상하
기 어렵지 않던 친가의 불행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부인, 내가 가는 길이 무슨 길인지 아시오? 노산군이라는 것도 급작스레
상왕이라는 칭호를 빼앗기 어려워 그렇게 붙여 준 것 뿐이요. 나는 임금으
로서 아니 왕자의 몸으로서 강원도 두메 산골 영월로 정배를 당하는 몸이
요."
"허나, 상감, 신첩은 오히려 이 궁을 벗어나 상감마마와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그 길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지는데 아녀자의 미련스런 마음이오
니까?"
열다섯의 어린 노산군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부인 얼굴을 정시하지
못했다.
'어서 빨리 정확하게 이 처지를 알려 주고 납득시켜야만 할 텐데. 착하고
순박하기만 한부인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그녀도 상감의 용안이 말 못할 무슨 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헤아렸다.
"상감마마! 신첩은 어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사와도 마음 흔들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사오니 심려를 놓으시고 시원하게 이 몸에게 들려 주
시옵소서!"
"오! 중전!"
노산군은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이런 일은 일찍이 한 번도 없던 일이었으
므로 상감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중전은 뛰는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었
다.
"부인!"
노산군은 드디어 가슴에 안았던 부인의 머리를 가만히 풀고는 조용히 부인
을 불렀다.
"예, 상감마마."
"내일 아침 동이 트자 나는 영월로 떠나야 하오..."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럼 혼자서만 가신단 말인가?'
온 신경을 모은 채 상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인은 친가에 가서 계셔야 하오."
"예? 상감, 무슨 말씀이오니까?"
"나는 정배를 당하는 몸... 부인도 그만한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인데...
정배를 당하는 사람이 어디 부인을 동반하는 법이 있겠소..."
상감은 너무 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 신첩은..."
부인은 기어코 자제를 잃고 그대로 몸이 내동댕이쳐지듯 방바닥에 쓰러지
고 말았다. 이대로 큰 소리로 무정한 나라법을 욕하고 울고 항거하고 싶
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ㅡ어떠한 불행한 처지가 닥쳐와도 국모의 체모를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언제나 목숨과 바꾼다고 생각하면 못하고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ㅡ
전에는 서릿발 같은 교훈이라고 생각했으나 바로 지금이 그경우라고 어린
가슴에도 무언가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부인, 일어나 앉으시오.."
그녀는 엎드려서 눈물을 닦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허트러진 옷과 머
리를 매만졌다.
"상감마마.. 신첩 상감에게 잠시라도 심려를 끼쳐 드려 황공하기 그지 없
습니다."
'이것은 안 되는 일. 부질없는 아녀자들이나 일삼는 일. 나는 중전이다.
나는 나라의 왕비였다. 어머니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전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부인, 친가는 아무 화가 없다고 들었소. 모의에는 직접 가담도 아니 했을
뿐더러 그럴수는 없다고 해서 그 화는 면했다고 합디다. 그러니 내일 내가
떠난 후 부인은 친가에 나가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다가 하늘의 뜻이 있어
다시 만나게 되는 날까지 부디 평강히 지내시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 것일까? 하늘도 무정하였다. 분명 궁중은 낙토가
아니었다.
斷腸의 曲
중전은 초라한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떠났다. 시종도 없이 친가에서 궁으
로 들어갈 때 같이갔던 몸종 월선만이 따랐다.
궁으로 가는 길과 민가로 나오는 길은 판이했다. 가마 속의 노산군 부인은
이제 얼굴에 눈물자국마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마를 따르는 월선이
가 눈물을 흘러 길이 보이지가 않았다.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중전의 가마라고 앉아서 절들을 하고 있었다. 그
것을 보는 월선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왔다. 군사 오십명이 호위하는 가운
데 따나던 상감과 중전의 이별 장면이 지금도 월선의 눈에 아롱거렸다. 보
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서러운 이별이었
다. 호송대장인 금부도사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친가에서는 노산군 부인인 딸의 후원 별당을 깨끗하게 치워 놓았다. 온 세
상이 다 변했는데도 친가의 후원 별당만은 변하지 않았다. 나무나 꽃도 돌
도 이끼도 여전했다. 어머니의 깊은 배려는 딸을 위해서 새로이 장판, 도
배, 창호지를 깨끗하게 해놓았다.
그녀는 진정으로 방성통곡(放聲痛哭)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은 가
슴이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순간으로 지나가
는 여심(女心)에 지나지 않았다.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
수도 없었다.
처녀의 몸으로 온갖 궁중의 양상(樣相)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한
여인에게 매어서산 월선이도 불쌍했다. 울음도 맘대로 울 수 없는 몸이 양
반의 몸이란 말인가? 지아비를 맘대로 지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하늘같이
우러러보며 지낸 짧다면 짧은 사년 동안의 생활, 그것은 왕후가 된 죄이던
가?
"중전마마.. 자리를 보았습니다. 어서 침소에 드셔야 됩니다. 마마의 양안
(兩眼)이 뵐 수 없도록 핏발이 서려 있사옵니다."
"오냐... 월선이 네 고생이 말이 아니구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니까? 대방마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
옵니다. 진지를 안 드셨다고 깨죽을 쑤어 올리라고 하시어 지금 또 부엌
에서는 깨죽을 쑤고 있사옵니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어라. 나야 이렇게 편안한 친가에서 양친님 비호 아
래 무슨 걱정이 있느냐? 상감께서는 무딘 두메에서 어떻게 소일하시는
지..."
입만 벌리면 상감 얘기였다. 상감의 옥체가 걱정이 되었다.
"얘, 월선아. 깨죽은 고만두라고 하고 잠이나 들고 꿈이나 꾸자. 꿈 속에
서 뵈옵는 상감은 어떻게 그렇게도 어지신지..."
그녀의 입가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었기 때문에 월
선이 눈에도 띄지 않았다. 그것은 노산군을 그리는 부인의 즐거움 같은
표정이었다.
친가에 온지도 한달이 지났다. 꿈을 꿀 만큼 잠을 이룬 날이면 상감과 회
포를 풀었다. 생시와 똑같았다. 오히려 생시에는 그렇게 정다운 눈길과 부
드러운 음성을 들은 일이 없었다. 잠이 안 온다. 눈을 감고 꿈길을 더듬어
야 그리운 상감을 만나볼 수 있으련만...
청량포(淸凉浦)의 한 객사, 거기가 노산군이 지내는 우거(寓居)였다. 그
녀는 청량포인지 무언지 그 강의 이름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녀는 민가
에서 입던 옷 위에 중전의 예복을 덧입고 머리에는 중전의 족두리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뛰어 상감이 계실 동헌으로 가고 싶었으나 왕후의 몸임을 생각하고
마구 행동할 수 없었다.
이윽고 상감이 보였다. 용상(龍床)이 아닌데 용상에 올랐던 그 자태와 조
금도 다름없이 위엄이 서린 용태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있었다. 황송
스런 걸음으로 그녀는 상감 앞으로 조용히 한발 한발 다가갔다.
왜 멀리 이 곳을 자주 찾아오느냐고 역정을 낼까 두려웠다. 그녀는 용기
를 내어 상감을 불렀다.
"상감마마, 신첩 우러러 뵙고 싶어 다시 왔사옵니다."
단정히 앉아서 무엇엔가 골몰하던 상감은 무척 반색을 했다.
"아, 부인.. 어서 올라 오시오. 하루종일 기다렸소이다."
그녀는 다시 없이 기뻤다. 그 한마디를 위해서 며칠을 지냈던가?
"상감마마, 수라는 무엇을 드셨사옵니까?"
"응... 나야 여기서 갖가지 생선이 좋아 많이 먹고 지내오. 부인은 오늘도
식음을 전폐한거야 아니겠지? 거듭하는 부탁이오마는 많이 자시고 푹 쉬
어야 몸과 마음이 더불어 평안해서 오래 사는 법이요. 또 오래 살아야 하
늘의 도움을 얻어 그대와 내가 다시 가깝게 만나 평생을 지낼 게 아니겠
소?"
중전은 가슴이 뛰도록 기뻤다.
"예, 상감... 신첩도 상감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정진하겠사옵니다."
오래 오래 상감과 정다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 말없이 그대로 곁
에 앉아만 있어도 좋았다.
그러나 벌써 동창이 밝아지고 있었다.
덧없는 꿈이었으나 꿈 속에서 만나는 상감이 그녀에게는 사는 힘을 공급하
는 근본이 되었다. 소세를 마치고 머리를 빗었다. 분단장은 아니 했다.
소세를 하는 거나 머리를 빗는 것도 그리운 님을 꿈길에서나마 만나기 위
해서였다.
사랑에서 대감마님께서 올라오시라는 분부를 월선이가 전했다. 왠지 불안
한 예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오!"
그녀는 늙은 아버지에게 사뿐이 절을 하였다.
"거기 앉게나. 그래 요사이는 음식을 좀 드오?"
"예, 아버님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많이 먹고 많이 자고 하옵니다."
"암 그래야 하오. 세상 일이란 그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것, 언제 다시
햇빛이 비칠 날이 올지 알겠소. 그러니 오래 몸을 보중하는 게 제일이
오."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사옵니다."
"벌써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안 잔다고 해
서 말을 못 드리고 있었소. 다행히 요사이는 마음을 고쳐 음식도 하고 잠
도 이룬다고 해서 드리는 말이니 마음 든든히 먹고 들어 주오. 알겠소?"
"예..."
그녀의 가슴은 많은 슬픔과 겹친 불행으로 이제는 거의 무감각의 상태가
된 것을 아버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름 아니라 현덕왕후(顯德王后)께도 화가 돌아가서 서인으로 추폐(追廢)
가 내렸다는 것이요. 그리고 금성대군도 순흥(順興)으로 귀양을 가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상감의 생모인 돌아간 양반에게까지 화를 입힌 것
을 생각하고 또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면서 조정 소식을 알려 주고 왕
위 복구를 위해서 애쓰던 금성대군을 생각해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아버님, 내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오. 너무 심려를 하지 마시고 몸 조심에나 힘을 쓰오."
송부사의 얼굴도 그림자가 자욱했다. 그는 그대로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
다.
한편 경상북도 순흥으로 귀양을 간 금성대군은 며칠을 번민 속에서 지냈
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 형인 세조의 탈권이었다. 탈권
에만 그치면 그대로 참을 수 있었다. 어린 상왕을 왕위복구에 가담했다는
구실로 정배를 보낸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며칠
몇 밤을 울어 새웠다. 기어코 그는 동지 규합에 나섰다.
원래가 호탕하고 잘난 대군의 모습은 많은 사람의 공명을 일으키게 했다.
그 중에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는 흉금이 맞고 뜻이 맞았다. 그리
하여 노산군 복위를 위한 모의는 착착 진행되었다. 여기에 집합되는 우국
지사와 순흥병사(順興兵士)는 굉장한 숫자였다.
그러나 이 또한 천시를 못 얻었으니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금성대군에게
가깝게 있던 시녀와 순흥 한 관노(官奴)는 이 일을 사전에 고발하기에 이
르렀다는 얘기였다.
금성대군의 하옥(下獄)은 물론 영남 인사들의 주살은 고을의 냇물을 붉게
물들였다.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漢南君), 영풍군(永豊君) 등도 이때
연루자로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금성대군은 사사(賜死)를 받게 되었다. 그는 단정히 꿇어 앉아 영
월땅을 향해 서배(西拜)하고 통곡하면서 죽음에 이르렀다. 이 참혹한 소식
이 노산군 부인의 귀에 아니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안절부절했다. 이 일을 상감께서 모를 리 없고 이 일을 알 상감의
흉중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했다. 물론 금성대군의 참사를 안 순간 가슴
이 덜컥 떨어져 없어지는 것 같은 것을 감출 수는 없었으나 그보다 으레
뒤에 상감에게 닥쳐올 후환이 더욱 더 몸서리가 쳐지면서 두려웠다.
'설마 하니 그럴 리야 없겠지! 설마 일국의 왕자를 제아무리 잔혹무도한
세조일망정 삼촌인 지금의 상감이 화를 주지야 않겠지! 그러나 정배까지
보낸 후의 화라는 것은 너무나 뻔한 것이 아닌가! 세조의 친 동생인 금성
대군도 사사했다는데. 조카쯤이야...'
자욱한 혼란이 그녀 머리를 휩싸 왔다.
'오냐! 내게는 수강궁에서 친가로 나오던 날, 아니 생이별을 고해야만 했
던 날 지녔던 비상(砒霜)이 있다. 나는 목숨이 아깝지 않다. 만일 상감
인 지아비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나도 같이 따라가서 저 세상에 가서나 영
원히 지아비라고 부르면서 섬기자.'
그녀는 서릿발 같은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그 소식
을 들은 날부터 도저히 목에 물 한 모금 넘길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보는
아버지 어머니의 근심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월선이도 대방마님의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잠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중전마마, 오늘은 아니 주무십니까?"
"오냐, 너 먼저 자거라. 난 조금 있다가 자마."
"아니올시다. 어서 침소에 드셔야 상감을 만나 뵈오려 떠나시지 않으시겠
습니까? 그래서 쇤네가 말씀 올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잠이 아니 오니 그 아니 딱하냐? 네말이 옳긴 옳다마
는..."
큰 한숨이 저도 모르게 뿜어 나왔다. 걱정하다 못해 꽉 차 있다가 몰려 나
오는 호흡이다. 이미 각오는 서 있건만 설레이는 가슴을 달래기가 어려웠
다.
"월선아, 어머님 자리에 드셨나 가서 보고 오너라."
"예..."
월선이가 안채로 사라졌다. 근래 어머니는 딸 걱정하느라 부쩍 백발이 늘
었다.
"중전마마, 아니 듭시고 불이 켜진 채 기침소리만 들립니다."
"오냐, 그럼 나 좀 안에 들었다 나오리라."
대청에 올라선 그녀는 아직도 불이 켜 있는 어머니 안방을 열었다.
"어머님, 어째 아직껏 침소에 안 드시고 앉아 계십니까?"
"오, 중전이요? 왜 아니 자고 밤중에 나왔소. 하긴 사랑채 아버님도 주무
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머님, 불효자식 때문에 받으시는 아버님 어머님의 심려를 어떻게 하면
저의 힘으로 덜어드릴 수 있사옵니까?"
"우리들의 걱정은 중전의 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요. 중전은 숨
기지 말고 속 마음을 이 어미한테 얘기할 수 없겠소?"
"예, 그러지 않아도 어머님께나 이 심회를 밝혀서 마음의 안정을 얻어 볼
까 하옵니다."
"오, 그렇게 하오. 어서 말해 보구료."
"중전 몸이 아닌 이 몸이 요사이 그래도 위로를 받사옵는 것은 어머님의
인자하신 그 음성속에서인가 합니다."
"다행이요. 중전을 위해서도 난 좀 더 오래 살면서 세상 되어 가는 꼴을
봐야겠소."
"어머님. 금성대군 참변이 그걸로만 그칠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오래 조정과 국사를 보아온 어머니는 익히 짐작하
고도 남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그저 신명이 도와 주시기나 빌고 지내야지. 아버
님께서는 벌써 며칠 전부터 앉아 계신 대로 눕지도 않고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계시니 그저 딱하기만 하구료."
"전 이미 각오를 가졌습니다. 아버님께도 어머님께서 여쭈어 주십시오. 저
의 결심은 이미 되어 있다고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딸의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중전은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니요. 언제나 부모 슬하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오."
그녀는 어머니의 혜안(慧眼)이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그러하오나 어머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무얼 어쩐단 말이요.. 목숨은 하늘이 점지하시는 것, 함부로 다루었다가
는 그 화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되오."
언제나 인자하면서도 추상 같은 말을 주는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님, 상감의 용체에 무슨 일이 있으시면... "
그녀도 어머니도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말 잘했소. 상감마마께옵서 천수를 다 못하시고 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중전은 더욱 이 세상에 남아서 상감의 억울하신 넋을 진혼(鎭魂)해 올릴
의무가 있지 않소?"
"어머님, 어찌 저 혼자만 남아서 천수 다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중전은 어찌 이 에미 말을 못 알아 듣소? 억울한 일은 언제나 백일하에
나타나는 법,"
그것이 내 생전에 나타날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중전만은 오래 살아서 그
억울함을 설욕해야 되지 않겠소?"
"예, 어머님 말씀 가슴에 명심하고 받들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일국의 국모될 자격이 있소."
어머니는 진정으로 딸을 우러러보고 싶도록 갸륵하게 생각했다.
"어서 내려가 자도록 하오. 월선아! 게 있느냐?"
"예, 대방마님 여기 있사옵니다."
"너 각별히 마마님 잘 모시고 받드시는 거 잊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예, 대방마님, 조금도 염려 마시어요. 쇤네 몸이 없어질 때까지 중전마마
를 모시고 받들겠사옵니다."
노산군 부인은 월선이를 앞세우고 친정 어머니의 방을 물러나와 자기 처소
로 돌아갔다.
한편 멀리 영월 산골에도 금성대군의 참변소식은 날라왔다. 왕자의 기품을
잃지 않고 지내는 노산군의 태도는 누구나 경의를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
었다. 오늘도 동헌에 앉아서 책 읽기에 여념이 없는 그의 심회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금성대군의 복위운동이 사전에 탄로되어 사사 받은 일과 영남 인사들이 피
가 내를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은지 수일이 지났다. 이제 다가올 일은 자
신의 차례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 화가 오늘 올지 내일 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 황급히 뛰어와서 알리
는 소리가 있었다.
"아뢰옵니다. 금부도사가 저기서 온다고 하옵니다."
'오냐, 시끄럽게 하지 마라. 이미 각오하고 있는 몸, 걱정할 일이 못된
다."
나이 어린 왕자가 이토록 죽음에 이를 때 태연한 것은 이왕 죽을 몸이니
하루 빨리 죽는 길만이 이 무섭고 몸서리쳐지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을 안
보는 첩경이라고 알고 지내 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약을 받들고 동헌으로 들어온 도사는 감히 노산군 앞에 이것을 바칠 수
가 없었다. 나장(邏將)의 재촉에도 그는 왕년의 상감이었던 당년 열일곱
의 왕자 앞에 약사발을 드리기에 하늘이 무서웠다. 이것을 보고 섰던 노산
군을 모시던 한 서생이 말했다.
"그렇다면 소인이 상감을..."
그는 몸에 지녔던 활 시위를 가지고 달려들어 노산군의 목을 졸랐다.
하늘도 땅도 울고 산골 두메의 초목도 같이 통곡하였다. 전하는 말은 상감
시체마저 강물에 띄어서 어복(魚腹)에 장사지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