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1
8월13일[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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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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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99t1JwYgKEE (김은기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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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 예수 그리스도>
이스라엘은 좁은 국토면적을 가진 소국이지만 아주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서쪽의 지중해라는 큰 바다와 동쪽의 거대한 사막 사이에 끼어있는데 그래서 ‘사이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아열대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가 교차하는 독특한 기후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고산지대가 있는가 하면 바다 수면보다 수백 미터나 낮은 지역들이 있어 지역적으로 다양한 기후를 갖고 있지요. 고산지대인 예루살렘은 꽤 쌀쌀하지만, 저지대인 사해 부근은 혹독한 더위를 견뎌내야 합니다. 메마른 유다 광야에는 풀 한 포기 찾기 힘들지만, 해안가나 갈릴래아 호숫가는 푸르고 온난합니다.
갈릴래아 호수 역시 이런 독특한 지리와 기후의 영향을 받아 자주 특별한 모습을 보입니다. 평소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깜짝 놀랄 정도의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멀리 헤르몬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찬바람과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 상공에서 부딪치기라도 하면 심한 기류의 이동이 발생해 마치 바다처럼 높은 파도가 일렁거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라고 하지 않고 바다라고까지 칭할 정도였습니다.
군중을 해산시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육로로 가기는 너무나 먼 길이었기에 제자들은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지르는 배에 승선합니다.
하필 제자들이 배에 오르자마자 악천후가 시작되고 맙니다. 제자들의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낸 시간은 오후 4~5시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새벽녘까지 호수 한가운데서 헤매고 있었으니 적어도 10시간 가까이 탈진할 정도로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했으면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 자신들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다!”라며 소리까지 질러댔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단절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스승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정체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확신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직도 스승을 향한 제자들의 믿음이 확고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우리 각자 역시 갖은 역풍과 맞서면서 인생이란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때로 그 역풍이 너무나 커서 삶 전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때로 지레 겁을 먹기도 합니다. 파선될 것 같은 기분에 다 포기하고 바다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인생의 조각배 위로 올라오시면 아무리 큰 풍랑이라도 순식간에 잔잔해질 것이기에 무조건 참고 견디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당신의 현존으로 인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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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DTn_ieqb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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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면 수영은 배울 수 있겠지만, 기도하면 물 위를 걷는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은 배 위에서 세찬 바람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도가 세상의 고난을 밟고 걸을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킴을 보여줍니다.
바다 위는 하늘 나라, 바다 밑은 지옥, 그리고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본모습을 봄으로써 자신 또한 세상의 그러한 풍파에 시달릴 존재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파도 위로 뛰어내려 밟아봅니다. 기도의 본질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하는 것은 ‘노력’입니다. 수영을 배우거나 물에 뜰 수 있는 것들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고 맙니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한공주’(2014)란 영화가 있습니다. 부모도 그녀를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성당을 다니는 친구가 외톨이 한공주에게 이유 없이 잘 대해주기는 합니다. 공주는 수영을 필사적으로 배웁니다. 자신도 자신과 함께 당하여 다리에서 뛰어내린 친구처럼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가해자들의 부모가 한공주를 괴롭히자 한공주는 도망 다니며 찜질방에서 자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공주에게 잘해 주었던 유일한 친구도 유포된 동영상을 보며 충격을 받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오갈 데 없는 한공주는 다리 밑으로 뛰어내립니다. 다시 생겨나는 살고 싶은 욕망으로 그동안 배웠던 수영을 시도해 봅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다시 물속으로 잠깁니다. 그렇게 다시 떠오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수영이나 결국 가라앉아버릴 것에 의지해서는 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배우지 말고 믿음을 가졌더라면!’ 성당 다니는 친구는 그녀에게 그런 것과 상관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인정받지 못해 생깁니다. 사랑받지 못해 생깁니다. 인정받음은 곧 자존감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부모와 같은 본성임을 믿게 됩니다. 사람의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사람이라 믿게 되고 그러면 적어도 세상에서는 살 힘을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만하다’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 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습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며 나병 환자촌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말씀하십니다.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어머니는 다시 살 결심을 하십니다. 나병 환자도 잘살게 해주시는 분이 어머니도 잘살 수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영화 ‘명량’(2014)에서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따르지 못하는 나머지 배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이렇게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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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혹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세 때와 같이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길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다정한 친구처럼, 은밀히 속삭이시며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말씀하시며 나타나신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고 빨리 지나가는 그분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엘리야는 그분을 알아 뵙고 존경의 표시로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다.”(1열왕 19,13).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사건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작은 사건 속에서도 현존하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작은 일들을 통하여 충실성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 고통과 걱정에서까지도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느님께서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결코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방관자가 되기 쉽다.
복음: 마태 14,22-33: 풍랑에 시달리는 배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분이지만, 또한 우주 지배자의 권능도 가지신 분이시다. 또한, 마태오는 예수님의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야훼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홍해를 무사히 건너는 모세의 모습에 비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빵을 많게 한 기적 후에 즉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예수께서는 밤새워 기도하시려 혼자 산에 오르시고(23절) 제자들은 폭풍우 속에서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 그 폭풍우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야 멈추게 된다(32절).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 뵙고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만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자 물에 빠지게 되고 예수께서 그를 구해주시며 믿음이 약함을 책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친다. 이때 제자들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다(28-33절).
여기에 교회론적 관점이 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보려고 자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청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 그러나 처음보다는 신앙이 강하지는 못했다. 그러시다면 이라는 가정을 붙이고 있다. 또한,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거센 바람을 보자 그 믿음은 곧 사라져 버렸다. 베드로는 불과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의심으로 인한 극도의 두려움을 체험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 제자의 모습은 아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
우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의 모습에서도,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교회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느껴진다.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믿음이 별로 강하지 못하다. 위기에 부딪히게 되면 즉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 위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의탁하여야 한다.”(G. Barbaglio, in I Vangeli, Assisi 1975, p. 344).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져라”는 말은 우리 교회에 해당한다. 오늘의 교회는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휩쓸려 갈 듯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항상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항상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이 필요하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용기 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충족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은 절대 약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베드로 사도처럼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며, 그리고 풍랑에 시달리는 배와 같이 교회도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가며 격랑에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담고 있는 이 가르침을 교회론적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보이도록 한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삶의 도우심을 청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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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980년 고등학교 때입니다. 성당 친구들과 문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문산가는 기차는 서울역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늦게 오는 친구들이 있어서 저는 남아 친구들에게 표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저와 친하게 지내던 여자 친구를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제 친구는 저의 여자 친구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서울역에서 문산으로 가는 길에 둘이 더 친해졌습니다. 저는 나중에 문산에 도착해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알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여자 친구는 친구의 여자 친구가 되었고, 저는 둘이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는 아니었지만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43년 전 딱 이맘때의 일입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표를 전해 주었던 저를 하느님께서는 어여삐 봐 주셔서 제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제가 되는 동기는 거룩할 수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여름이면 ‘남량특집’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날이 더우니 무서운 내용의 드라마를 보여주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미호’였습니다.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한 여름의 열기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남량특집에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저는 신학생이어서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 되었습니다. 처음 3달은 잘 지냈는데 저의 부족함 때문에 성당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본부중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잔디밭에 거름을 주라고 했는데 귀찮아서 몇 군데만 주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니 거름을 지나치게 많이 뿌린 곳의 잔디는 노랗게 변하였습니다. 그 뒤로 몇 번의 실수가 있었고, 신부님은 저를 다른 곳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입니다. 신부님의 엄한 질책이 있었기에 저는 남은 군 생활을 정신 차리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제가 되어서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할 때였습니다. 저는 4시에 강의가 있었지만 1시에 미리 와서 분위기를 보았습니다. 봉사자들은 제가 미리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분위기를 대충 보았고, 성당 앞을 보니 ‘불가마’ 사우나가 있어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사우나에서 쉬고 있는데 방송으로 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사우나에 방송 시설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한편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사우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연을 들으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2시에 강의를 해야 할 신부님이 교통체증으로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제가 있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와 시간을 바꾸면 된다고 했습니다. 봉사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봉사자는 제가 성체조배하는 줄 알고 성당에 갔는데 거기에 저는 없었습니다. 제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줄 알고 성모상 앞으로 갔는데 거기에도 저는 없었습니다. 사제관에서 신부님과 대화하는 줄 알고 사제관에 갔는데 거기에도 저는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불가마에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저의 이름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부랴부랴 사우나에서 나와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한편의 남량특집같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하느님께서는 큰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진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성공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재물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권력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깊은 침묵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면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여정 속에 자주 흔들리곤 합니다. 유혹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교만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의 바다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빠지지 않고 주님께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인생과 역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어떠한 시련에도 의연하게 맞서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화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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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2-27)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제자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당신이 직접 군중을 해산시키십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자들과 군중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려고 산에 가시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시고, 그들을 먼저 보내신 것은, “군중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서 흥분 상태가 되어 있는 제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그 상황은 분명히,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에게 시련을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괴롭힌 ‘맞바람’과 ‘파도’는, 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회초리’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회초리는 제자들 자신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그 상황을 상징으로 생각하면, ‘맞바람’과 ‘파도’는 제자들 마음속에 생긴 여러 가지 의혹과 의구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임금이 되어 달라는 군중의 요구를 거절하셨을까?”라는 의문, “예수님의 활동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의혹,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라는 의구심. 그런 의문과 의혹과 의구심 등이 마치 ‘맞바람’과 ‘파도’처럼 제자들의 마음속을 휘저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세속의 임금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분, 즉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 세속의 임금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또 얼마나 세속적이었는지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엇인가가 다가올 때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린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았을 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긴 한데, 그들의 심리 상태를 생각하면,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자기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실감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령인 줄 알았던 그 무엇이 사실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크게 안도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세속의 임금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28-33)
예수님께서 이미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베드로 사도는 그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라고, 즉 주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은, 아직도 그의 믿음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던 사탄이 했던 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마태 4,3)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드로 사도가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을 한 것은, 사도들이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기까지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은, 주님의 권능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님처럼 자기도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지만, 제자들 쪽에서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물 위를 걸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말씀은,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 자체를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받아주신 것은,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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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 곁에 머물며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맞바람을 맞으며 호수를 건너갑니다. 복음사가는 그 시대의 교회 모습을 이 이야기에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도와 바람에 흔들리는 제자들의 배는 안팎으로 난관 속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고, 무엇보다도 ‘도대체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의문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그때 상황을 빗대는 듯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많은 이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돌보면서 때때로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멀리 계신 듯 느껴지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난관과 주님 부재의 체험. 이에 대한 복음서의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곁에 계신 것은 맞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그분께서는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복음서 주해』(Commenti ai Vangeli), 바티칸출판사, 279면 참조)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시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에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러 믿음의 항해를 하다가 물속에 빠졌을 때 그분께서 다가오시어 베드로의 손을 잡아 구하여 주셨습니다.(31절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한결같이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참례하는 미사에서, 우리가 촛불을 켜고 마음 모아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바로 그때, 그리고 살면서 겪는 많은 일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아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고 그분의 이끄심에 우리의 인생을 내맡기는 순간순간 우리의 삶은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지고, 우리는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히브 10,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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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한해성 요한 세례자 신부님]
<두려움 끝에 계신 예수님>
찬미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맞아 두려워하던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어 "용기를 내어라." 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거센 풍랑이 일던 새벽 시간, 호수 위를 걸어오는 사람을 본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들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이심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십사 청하며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에 기꺼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베드로의 시선에는 오직 예수님만, 예수님의 시선에는 오직 베드로만 보입니다. 이 사이에 그들을 가로막는 호수가 있다는 사실 은 중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시선이 하나 됨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없는 인간이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태'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베드로의 시선은 예수님을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예수님과 시선을 맞추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이 물 위를 걷는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곧장 손을 뻗어 물에 빠져 놀란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의심한다‘는 표현은 '자기 자신 안에 마음이 두 개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가 오직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의심'의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사랑하는 그 순간에는 주변 모습은 내 두 눈에 담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이고 다양한 이유로 우리 눈에 상 대방이 아닌 다른 것들이 담기기 시작하면 그 관계의 지속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러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직 베드로만을 바라보듯이, 예수님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적에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구하러 오시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시선에서 벗어날 때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향해 언제나 다가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한눈을 팔고, 마음이 갈라져 헤매고 있는 우리에게 질책하시기보다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1열왕 19.12)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이로써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 하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곳을 함께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시선과 눈을 맞추고자 노력한다면 결국 우리 입에서는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예레 30.22)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심연의 어둠 속에 빠지더라도 언제 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바라보고 계시고, 항상 손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우리를 사랑해 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두 눈에 나의 모습을 비춰보도록 합시다. 그분의 눈에 비친 우리 모습은 언제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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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고병수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을 향한 굳센 믿음의 자녀가 되자>
1900년대 초반 무렵에 미국 출신의 저명한 작가이자 인간관계론의 강사인 데일 카네기가 저술한 '근심이여 안녕'에 실린 한 대목입니다. 어느 날 메리큐스 마네 부인은 급작스레 남편이 부도를 내고 잠적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고 알거지가 되어 어린 자녀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앉습니다. 여기다 어린 아들은 문구점에서 연필을 훔치다 발각되어 학교에서 퇴학당합니다. 이에 그녀는 풍비박산((風飛雹散) 난 집안도 모자라 자녀마저 일탈하자,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더는 살 의욕을 잃고 맙니다. 급기야 '깨끗이 죽자'란 모진 마음을 품고 아이들을 재우고 가스 밸브를 켭니다. 가스가 새어 나오면서 서서히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바로 그때 이웃집에서 기도와 성가 소리가 들립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 깊숙이에서 "너의 무거운 짐을 왜 내게 맡기지 않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 밸브를 잠그고 잠자는 아이들을 깨워 서둘러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런 다음 무릎을 꿇고 “주님, 죽을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기도할 마음은 갖지 못한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 후에 그녀는 시골로 내려가 지난날의 얼룩진 과거에서 벗어나 오로지 주님을 향한 굳센 믿음으로 자녀들과 함께 안정되고 축복받는 새로운 삶을 삽니다.
이렇듯, 우리도 마네 부인과 정도는 달라도 과거의 크고 작은 아픈 편린(片鱗)들을 안고 삽니다. 때때로 이것은 작금의 우리네 삶을 옥죄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이럴수록 마네 부인처럼 깨어있는 자세로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서 건네시는 사랑의 손길을 꼭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과거를 딛고 주님을 향한 굳센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 주님께서 우리네 삶의 여정에 함께하시며 생명과 축복이 충만한 미래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굳센 믿음의 본보기로 나옵니다. 어느 날 엘리야는 말씀을 선포하다 이스라엘의 이제벨 여왕의 분노를 사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합니다. 하루하루 두려움과 불안감에 피 말리는 나날을 보냅니다. 그래서 너무도 힘든 나머지 하느님께 죽기를 간청합니다. 이에 하느님은 엘리야의 손을 잡아주시며 작고 조용한 음성으로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주님께서 건네시는 사랑의 손길을 꼭 잡고 굳센 믿음을 회복합니다. 이로써 그는 영혼과 육신을 휘감은 절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혼의 기지개를 활짝 켜고 주님을 증거하는 위대한 예언자로 우뚝 섭니다. 이처럼 굳센 믿음은 우리의 영혼 육신을 충만케 하는 은총과 축복의 통로입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물 위를 걷는 기적 이야기를 통해 확인해 주십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 예수님께서 따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는 사이에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서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며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물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곁으로 오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며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건네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즉시 주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물 위를 걸어 한 발짝 한 발짝 예수님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자 오직 주님께 눈길을 두고 걷다가 그만 자신에게 눈길을 돌리고 맙니다. 삽시간에 의심과 불신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그와 동시에 물에 빠지면서 크나큰 신앙의 위기를 맞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나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당신 사랑의 손길을 건네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부여잡고 굳센 믿음을 회복합니다. 이로써 그는 다시 물 위를 걸으며 온전히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은총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이번 한 주 연일 계속되는 불볕더위에 항상 건강 유의하시고, 주님을 향한 굳센 믿음의 자녀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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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이유수 요아킴 신부님]
<믿음이 점점 약해진다면 큰일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인생의 근거에 깔린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다른 태도를 묵상할 수 있겠습니다.
한 부류는 두려움의 바다와 맞서 끊임없이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평생 자기 힘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에게 두려움이라는 것은 오직 자기 노력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보는 것은 마치 유령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미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현실이 아니라 유령처럼 바라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다른 한 부류는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극복하려 합니다. 베드로는 조금 다른 태도로 접근합니다. 두려움의 바다를 예수님처럼 걸어보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으로 그 바다를 넘어 보려 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리고 물 위를 걷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다시금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베드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미 배 위에서만 머무는 제자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입니다. 배 위에서 스스로 노력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 살겠지만, 베드로는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물 위를 자유롭게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이 힘든 것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너무너무 열심히 노력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력보다는 '용기를 내어 믿으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믿어야만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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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박종우 야고보 신부님]
<거센 파도가 우리를 덮칠 때>
이탈리아로 유학을 나가기 전, 하느님께 몇 가지 기도를 드렸습니다. 심근경색의 경험이 있던 아버지와 나이가 많으신 외할머니의 건강을 지켜달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 기도를 전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석사 1년 차 여름, 아버지는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고 같은 해 겨울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아버지와 할머니의 부고를 차례로 전해 들었던 그 괴로웠던 밤들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슬픈 마음으로 엉엉 울었지만 곧 원망이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제가 드렸던 간절한 기도를 보란
듯 거절하신 하느님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 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저는 이렇게 투덜거리고 싶습니다. "두려움을 느끼기 전에 먼저 어려움을 좀 해결해 주시면 안 될까요? 곁에서 바로바로 지켜주시면 안될까요?"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다르지요. 그러다 보니, "주님께서 정말 내 곁에 계신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부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은 것이 있다면, 주변에 저를 위로하고 힘을 주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신자분들이 모여 위령기도를 바쳤고, 수많은 신부님이 함께 매일 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가 돌 아가신 뒤 정확히 1년 하고 3일이 지난 뒤에는 사랑스러운 막내 조카가 태어나 아버지와 같은 세례명으로 직접 세례를 줄 수 있었지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유학을 나오기 전에 드렸던 나의 기도는 거센 바람을 보고 미리 두려워하며 의심했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대신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제가 겪게 될 어려움을 이겨낼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바쳤다면 주님을 덜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올바른 기도의 자세란 먼저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과 도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생, 다양한 고통, 수많은 갈등과 미움. 우리의 삶은 참으로 고단하지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피하고 싶은 파도가 느닷없이 우리의 삶을 덮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는 예수님께 당신이 정말 주님이 맞냐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러하셨듯 조금은 슬픈 목소리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지금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이 있다면 두려움은 잠시 놓아두고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비록 주님의 방식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잖아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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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주님, 구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새벽녘에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고, 눈앞에 있는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걱정되어서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놀랍니다.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하다니 이상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놀란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요한 호숫가에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둠이 온 누리를 덮고 있는데, 어둠에 덮여있는 호숫가에는 물안개가 자욱했을 것입니다. 물안개가 자욱한 호숫가에 파도와 바람이 몹시도 불어오고 있어서, 눈앞을 분간하기도 힘든데, 저 멀리에서 무엇인가 희끄무레한 게 보인다면, 여러분은 어떨까요? 아마도 놀라겠지요? 귀신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무엇을 청하는가 하면 바로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되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베드로는 거센 바람을 보고는 의심이 들어 그만 물에 빠지고 맙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아등바등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 베드로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면서도 의심을 하고, 물 위를 걷는 그분을 따라 살아가면서도, 한편으로 는 거센 바람을 보고 의심을 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는 자야!'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약한 사람아!'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베드로와 같이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심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구해 주시듯이 우리를 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의심하더라도, 예수님께 "구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오늘 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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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김동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거친 호수 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호되게 가르칩니다. 이번 예에는 회당이나 산이나 집이나 길에서가 아니라 거친 호수 위에서 가르칩니다. 그렇게 하여 제자들이 몸과 마음으로 당신을 몸소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뜨거운 믿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수를 건너는 중에 험악한 파도를 만납니다. 파도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 버립니다. 새벽에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서 다가오지만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스승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없는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없는 시공은 시달림이고 두려움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걸을 때는 땅 위를 걷듯 사뿐히 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서 겁에 질려 의심을 하자 곧바로 물속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다행히도 그가 용기를 내어 큰소리로 살려 달라고 외치자 예수님께서는 곧장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믿음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을 믿는 것이야말로 당신께 나아갈 수 있는 온전한 길임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거칠었던 바람 이 그치고 험악했던 물결이 잔잔해집니다. 배 안에 있던 다른 제자들은 비로소 스승이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얼마 전 바람과 호수에게 "잠잠 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고 꾸짖던 스승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너나없이 스승 앞에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 들에게 교회를 체험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당신을 머리로 하고 제자들을 몸통으로 하는 공동 체임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있음과 당신의 없음을 체험하게 합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과 당신에 대한 의심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함께하는 공동체와 당신이 없는 공동체를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참으로 알아보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당신을 뜨겁게 고백하고 따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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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강승수 요셉 신부님]
<주님,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기후재난이 점점 거세 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7월의 홍수로 많은 이가 고통을 겪었고, 해 외 뉴스들은 거의 매일 세계 곳곳에서의 가뭄과 산불, 홍수와 태풍에 대하여 알려오고 있다. 우리의 공동의 집 지구가 울부짖고 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1-2항 참조) 저명한 진화생물학자는 인류라는 생물종의 멸종이 금세기 (2100년)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섬뜩한 결론을 제시하고 있고, 환경 훼손을 멈추지 않으면 50년 안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류의 문명이 붕괴될 것이라는 경고 가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요즈음이다.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지금 인류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급속한 변화와 훼손으로 상황이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들은 대규모의 자연재해와 사회적 위기, 심지어 경제 위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엄청난 위험에 놓인 지역이 있으며, 종말론적인 예언은 차치하고라도 현재 세계 체제는 여러 관점에서 봤을 때 지속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61항)
학자들도, 교황님께서도 이대로 살면 인류의 미래가 없다고 한다. 왜 이런 결과를 받아들게 되었을까? 회칙은 그에 대한 답 또한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인간 활동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이다."(61항)
인간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가? 교리 시간에 이렇게 배웠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 목적에 따라 살지 않고 있고 그 결과는 미래가 없는 멸망인 것이다.
우리 존재의 목적에 따라 살지 않고 무엇 하고 있는가? 나 자신과 욕망을 사랑하고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해 물신(物神)을 섬기느라 하느님의 기대에 한참 어긋나 있다.
인류의 삶이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유한한 지구에 살면서도 그 욕망이 무한한 데에서 기인하고 있다. 유한한 삶을 살면서 무한한 욕망을 제어하지 않고,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지만 무한히 성장하려 하고 있으니 불행을 넘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우리 욕망이 무한한 것이니 유한한 이 지구상에서는 그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무한하신 주님을 만나야만 인간의 깊은 욕망이 만족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께서 만나주실 때까지 줄기차게 외쳐야 한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
주님, 멸망으로 치달아가고 있는 저희 인류를 구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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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마산》 말씀의 향기
[마산교구 임성진 요한 신부님]
<변화와 변질>
변화와 변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잘 아시다시피 변화는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반면에 변질은 원래의 모습과 달리 더 좋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변질이라 합니다.
누군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두 개의 그릇에 빗물을 담아 두고 하나는 그냥 두고 하나는 개구리 한 마리를 넣어 두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니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물만 담아둔 그릇에는 이물질이 끼고 점점 변질하여갔는데 개구리를 넣었던 물은 변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구리가 움직이면서 물을 계속 움직이게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활기차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공동체는 변화가 일어나겠지만 오랜 타성에 젖어 해오던 것만 고집하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공동체에도 신앙생활의 변질이 일어날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로 수많은 신앙생활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은 변화와 변질 중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합니다. 26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움에 싸여 소리만 질러 됩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의 말씀에 제일 먼저 응답한 사람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체면이나 눈치 보는 신앙이 아니라 항상 제일 먼저 주님 말씀에 반응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남다른 삶을 사는 은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 베드로는 배 안에 머물러 있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새로운 은총을 누리기 위해 모험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가톨릭이라는 편안한 배 안에서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착한 신자들과 친교, 안정된 교회 환경과 가톨릭이라는 배경, 안정된 배 안에서 적당히 머물러 신앙생활을 누립니다. 개신교처럼 배 밖(세상)으로 더 나아가는 것은 내 품위 유지에 부담거리입니다.
그래서 29절 주님께로 "오너라." 1독서 11절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라는 주님 말씀에 머뭇거리거나 적극적으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려 하니 내 삶에, 신앙생활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신앙의 모습은 흔들리는 배 안의 위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배 안에 가만히 있기보다는 물 위라도 걸어서 주님께 가고자 하는 고백을 주님께 드릴 때입니다. 베드로처럼 "오너라"고 초대하시는 주님 말씀에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너라"는 주님 말씀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변화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축복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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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강종석 베드로 신부님]
<한시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그분>
오늘 복음에서 사도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하고 말씀드린 뒤,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는 주님을 의심하면서 물에 빠져듭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믿는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어쩌면 믿음과 성격이 다른 것들이 많은 세상에서 들리는 것, 보이는 것들을 듣고 보다 보면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의심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우리 주님을 향한 목적지의 여정을 멈추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여정에 거센 바람만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이 물 위에서의 걸음은 우리 신앙의 여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이 길을 조금 더 연장해서 길게 보자면, 거센 바람도, 풍랑도, 아예 앞이 안 보이는 안개를 포함해서 무수한 난관들이 가로놓여 있다고 봅니다. 그 모든 것들을 헤쳐나가는 것, 믿음으로 이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다행히도 "살려 주십시오."하고 죽지 않으려고 외치는 일도 있겠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죽어가면서도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 살려달라고 외치는 행동조차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잠시 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걸어갈 때, 멀리 보이는 거센 바람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가깝게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를 주시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능하신 주님께서 사랑이 크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한시도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상황이 우리에게 편하고 유리하게 작용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하고 우리 요구나 욕심과는 전혀 딴판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더 생생하게 느끼는 신앙이 이 모든 것을 극복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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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독서의 동굴 속의 엘리야와 호수에 빠진 베드로의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이 두 상징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풍부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소심한 인간의 양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어가는 이야기로, 그 이야기란 다름 아닌 자신이 누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신 또한 옆집의 그 사람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소시민적인 근성과 그렇고 그런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렬한 자기 깨달음의 이야기 말입니다.
먼저 엘리야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묵상해 봅시다. 엘리야는 거짓 예언자가 활개 치는 세상에서 홀로 하느님의 영으로 불타올라 갈멜산에서 누가 진짜 예언자인지, 누가 참된 하느님의 사자使者인지 판가름하는 진검승부를 펼쳐 승리하지만, 이세벨 왕비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위협에 엘리야는 이세벨이 무서워 호렙산으로 줄행랑을 쳐 도망칩니다. 나름대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정의로운 행동에 목숨까지 걸면서 싸웠던 위대한 존재가, 자신을 위협하는 이세벨의 기세가 무서워 줄행랑을 쳐 도망치는 꼴은 마치 우리 자신의 어두운 구석, 내면의 그림자와 콤플렉스를 보여 줍니다. 남자란 가끔은 이런 허망한 구석이 있답니다. 자기 딴에는 제법 그럴싸한 객기로 강한 척하면서도 남이 이해할 수 없는 하찮은 것으로 말미암아 꼬리를 내려 뒷걸음치는 면이 있고, 이를 심리학에서는 퇴행이라고 하지요. 자기 안의 어둠(=동굴)에 머물고, 자기 열등감이나 콤플렉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지극히 나약한 모습을 엘리야는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도록 해 줍니다. 남자란 자기 어둠, 문제로부터 스스로 제 발로 동굴이나 방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 열왕기에선,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합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는(19,11) 이 명령은 단지 엘리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자신의 내적 어둠, 동굴에서 처박혀 있지 말고, 자신의 열등감이나 콤플렉스에 연연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더 잘 아시고, 골수와 머리카락까지도 꿰뚫으신 분이시기에 당신 앞에 당당히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고 강한 바람,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고 오히려 미풍 가운데 서 계시는 하느님의 자애 앞에 있는 그대로, ‘지금 너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3,9~10)라는 대답을 대신해서, 그야말로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나와 서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지만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의 존재인가를 깊이 깨닫고, 사랑과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느님 앞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순수와 거짓, 정의와 불의, 선과 악으로 늘 내적 싸움을 하는 존재로 사랑하게 되며 떳떳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남을 변화시키려는 것이고,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길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자신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불같은 열정 속에 숨겨진 욕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진과 같은 외침 속에 숨겨진 자기 교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바람 같은 부드러움 몸짓 속에 드리워진 콤플렉스의 그림자를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끌어안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세상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이야기 또한 아주 미묘한 상황입니다. 저녁에 호수를 건너기 시작한 배는 이미 새벽, 여명이 떠오르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풍랑(=내적 갈등)에 허덕이고 겁에 잔뜩 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의기양양한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14,28)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참으로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은 행동은 어떤 누구도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었던 존재는 없었고 없을 만큼 대단히 신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행한 위대한 일처럼,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위대한 일을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14,30)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비굴하고 나약한 자기 모습을 직면하자 이내 호수에 빠져듭니다. (*엘리야의 동굴로 칩거와 동일 이미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모순적 실존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누구도 예외가 없으며, 다만 이런 자신의 콤플렉스나 열등감에 주저앉지 않고 기꺼이 인정하면서 ‘주님 앞에 서라, 오너라.’는 주님의 따뜻한 격려와 지지에 힘입어 극복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이러한 과정은 주님과의 믿음의 여정이며 관계의 심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호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동굴에 스스로 칩거할 수 있고, 상황이나 외적 환경과 현실에 의해 호수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음을 인정합시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놓일 때 자신의 나약함이나 실패나 열등감에 연연하거나 집중하지 않고 ‘여기 지금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14,30)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동굴에서나 호수에서 벗어나고 빠져나올 수 있으며,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나라한 자신의 본래 모습대로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을 관상의 경지라고 하며, 이런 관상의 경지에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영혼을 보시듯이 영혼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내면이 미풍처럼 가라앉고 잠잠할 때 느껴지며,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인간의 허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자신, 이미 내 안에 내 것이 되어 버리신 하느님과 참된 일치와 친교의 관계를 누릴 것입니다. ‘진계유’라는 분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자신의 진면목을 듣고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의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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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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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는 10초대에서 경기 자체가 끝납니다. 그렇다면 거의 10초대에 끝나는 경기라서 이를 준비하는 시간도 짧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 짧은 순간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엄청난 양을 훈련해야만 합니다. 만약 훈련을 전혀 하지 않고 시합에만 집중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이 세상 삶을 마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자신의 준비 없음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준비 없이 우리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요? 무작정 하느님 자비에만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 경기보다 훈련에 쏟는 시간이 더 길 수밖에 없고 또 더 중요한 것처럼, 지금 주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훈련의 시간이 길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결국은 모두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물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입니다. 마침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모습에 “유령이다” 하며 두려움의 소리를 지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맞바람이 부는 거센 파도에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아보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을 알아보는 것은 편하고 쉬운 삶 안에서만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거센 파도가 이는 고통과 시련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결과만이 아닌 계속된 훈련, 즉 믿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베드로가 청합니다. 예수님의 “오너라.”라는 대답에 그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지고 맙니다. 주님만을 바라봐야 했는데, 바로 거센 바람에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도 훈련이 계속 필요했습니다. 하물며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늘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참 하느님의 아드님과 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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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2023. 08. 13 연중 제19주일
마태오 14,22-33 (물 위를 걸으시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기도>
홀로
당신 곁에
머무름
기도의
시작입니다
힘겨운
벗들 곁으로
다가섬
기도의
중간입니다
당신처럼
벗들 곁에
더불어함께
기도의
마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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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수도자라면 더더욱 하느님 현존 체험을 원합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할까요? 원한다고 하지만 그 갈망과 원의가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야말로 체험의 가장 근본적인 결격사유이고, 그렇다면 왜 갈망과 원의가 약할까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그것은 초월적 감수성이 본래 약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삶이 평안하고 안전하고 그래서 하느님 없이도 사는 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살만하면 하느님을 잘 찾지 않고 오히려 불평이 많은 법이고, 삶이 위태로워지고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찾곤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 연중 제19주일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엘리아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얘기를 전하면서 위기와 두려움 체험의 상황을 먼저 전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모두 작살낸 다음, 그로 인해 이세벨에게 쫓겨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고, 거기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풍랑으로 죽게 되었을 때 구원의 주님을 체험하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선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더 잘 체험할 것 같은데 보통 선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악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면 보통 우리가 체험하는 선들은 우리가 그 선에 주저앉고 머물게 하고 대림 만족하게 하지, 그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지혜서는 이런 통찰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 ‘아! 아름답다. 참 좋다,’라고 하지 ‘이 아름다운 꽃들을 지어내신 참으로 좋으신 주님이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워 볼 때’를 노래하면 선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 곧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악을 경험하면 그 싫어하는 악에서 도망치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제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으면 그때 그 악에서 구해줄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것을 바꾸면 선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두려운 악에서 구하소서.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고통의 악에서 구하소서. 이 세상의 온갖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불안의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선과 기쁨과 즐거움과 안락함은 우리를 거기에 머물게 하고 안주케 하지만 두려움과 고통과 불안의 악들은 거기서 도망치게 하고 주님을 찾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종종 당신을 체험하도록 악의 방법을 쓰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일부러 제자들만 따로 호수를 건너게 하십니다. 당신 없이 그 두려운 풍랑을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다른 곳에선 한배에 타고 계시지만 잠자고 계시고, 풍랑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살려달라고 할 때에야 일어나시어 풍랑에서 구출해주십니다.
악의 체험, 한계 체험, 두려움의 체험을 먼저 하시고, 당신의 현존과 구원을 체험하게 하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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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모두 ‘믿음의 뿌리’를 튼튼히 합시다.>
- 기도하라, 사랑하라, 함께하라 -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시편85,8)
오늘 화답송 후렴의 기도가 참 간절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구원 은총이 우리 믿음의 뿌리를 튼튼하게 합니다. 순수한 ‘뿌리’란 우리말이 참 좋습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뿌리가 죽으면 나무는 저절로 죽습니다. 뿌리없이는 잎도 꽃도 열매도 없습니다. 뿌리가 병들면 나무도 병들고 머지 않아 죽습니다.
푸르름 짙어가는 나무들과는 대조적으로 죽은 나무들은 보기도 흉합니다. 흉물같습니다. 뿌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병든 사회, 병든 개인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바로 뿌리가 병들었음을 뜻합니다. 나무 뿌리가 상징하는 바 믿음입니다. 믿음의 뿌리입니다. 내 믿음의 뿌리는, 내 공동체 믿음의 뿌리는 튼튼합니까? 병들거나 죽지 않고 살아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뿌리가 가리키는 바 내적성장입니다.
카눈 태풍의 위력이 여기 수도원에는 미미했지만 커다란 소나무가 뿌리 뽑혀져 넘어져 있었습니다. 거대한 소나무를 받쳐 주기엔 뿌리들은 참 허약했고 이미 많이 썩어있었습니다. 새삼 내 삶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를, 내 공동체의 뿌리가 연상되었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뿌리살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
뿌리로 살아야지
세월 땅속에 묻혀 뿌리로 사는 거야
꽃사랑으로
피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살이 고달플 때
꽃사랑 추억으로 갈증 축이며
하늘사랑 꽃으로 피어날 그날 그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 -1999.7.2.
수도원 여기 이 자리에서의 24년전 시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공동체의 정주의 뿌리가 되어 큰 나무로 살아온 기분입니다. 지금까지 날마다의 강론은 집요한 뿌리내림의 표현이었습니다. 정주의 믿음, 정주의 뿌리입니다. 어떻게 하면 날로 깊어지는 튼튼한 정주의 뿌리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공동기도는 물론이고 개인기도도 필수입니다. 고독과 침묵을 사랑했던 옛 수도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고독과 침묵중에 하느님을 찾아 날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렸던 사막의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내적 깊이의 뿌리 내림에 개인기도는 결정적입니다.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설파한 토마스 머튼입니다.
고독이 궁극으로 지향하는바는 연대입니다. 새삼 오늘 말씀의 순서대로 하느님의 종들인 엘리야, 바오로, 예수님의 믿음의 뿌리는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세분 공히 하느님의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우선 찾은 것이 하느님의 산 호렙이었고 여기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호렙에 있는 동굴에서 밤을 지낼 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밤은 주님을 만나라 있는 은총의 기도시간임을 깨닫습니다.
“나와서 주님 앞에 서라.”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났지만 거기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지진이 일어났지만 거기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불이 일어났지만 불 속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으니 바로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 엘리야는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섭니다.
고독과 침묵의 산에서, 외딴곳에서, 또는 내 삶의 자리에서 특히 밤시간,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소리를,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 예수님도 밤시간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깊은 관상 상태에 있었음을 봅니다. 5천명 군중을 배불리 먹여 돌려 보내시고 제자들을 먼져 떠나 보내신후 불야불야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시어 밤샘기도에 돌입합니다. 어쩌다가 아니라 매일 외딴곳에서 밤샘 기도로 충전시킨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기전 다음 찬미가를 바칩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우리 수도자들은 잠자는 중에도 영혼은 깨어 주님 안에서 관상의 휴식을 누리며 내적 친교를 깊이합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자나깨나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또 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기도는 기술의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께 이웃에 더욱 깊이 사랑의 뿌리를 내리기 마련입니다. 보십시오, 바오로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지 그 사랑의 뿌리는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하느님 찬미의 사랑에 깊이 뿌리내린 이웃사랑임을 봅니다. 불교의 지장보살을 연상케하는 가톨릭의 지장보살 바오로 같습니다. 바로 지옥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기 위해 스스로 부처가 되기를 포기하고 지금도 지옥 문전에 있는 지장 보살입니다. 어제 읽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설적 기도도 생각납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저는 지옥에 남아 그들과 고통을 나누겠습니다.”(영혼의 자서전, 하권 424쪽)
하느님 사랑에 까지 그 사랑의 뿌리가 도달한 성 바오로, 성 프란치스코를 닮은 불가의 지장보살입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초보자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봅니다. 더욱 사랑의 훈련, 습관화로 하느님과 이웃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함께입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섬겨야 합니다. 회개-친교-섬김의 순서입니다. 마음의 순결이, 자유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 더불어 섬김입니다. 섬김을 위한 자유요, 섬김을 통한 자유의 완성입니다. 홀로인 듯 하나 함께 안의 홀로입니다. 더불어와 단절된 고립단절은 환상이요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함께 안의 홀로” 성서의 위인들, 교회의 성인들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곁 관상기도중에도 영안은, 사랑의 눈은 제자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음을 봅니다.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깨어 우리를 살펴보시며 위기시 우리를 구원할 채비가 되어 계십니다. 이를 안다면 전혀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그대로 인생 항해 여정중의 제자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얼마나 위험한 인생 항해 여정중인 크고 작은 무수한 공동체들인지요! 좌초하거나 조난당한 공동체들도 많습니다. 각자도생의 비정한 사회, 온전한 공동체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래서 무수한 이들이 자살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개입을 기도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그러했습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물위를 걸어 한걸음에 달려 오시는 주님은 흡사 축지법을 쓰는 듯 그대로 하느님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곤경을 한눈에 보신 주님의 개입이 고맙습니다. “유령이다!”외치는 제자들에 이어 주님의 감로수 같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말씀 상기하시고 흩어진 정신을 수습하시기 바랍니다. 물위를 걸어오다 두려움에 주님 향한 눈길을 놓치고 물속에 빠져드는 베드로의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외침에 즉각 응답하여 손을 내밀어 구원하시며 베드로의 믿음 약함을 꾸짖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몇이나 될런지요? 함께의 인생항해 여정중 참 많이 깨닫고 배웠을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혼자라면 이런 주님의 체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배에 오르시어 중심에 자리 잡자 바람은 그쳤고 도래한 내적평화와 안정입니다. 공동체 제자들은 그분께 엎드려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습니다. “스승님”이라니 “주님”이라 부름이 맞습니다. 저 같으면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장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주님이자 스승인 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 살아난 제자들입니다. 평생 믿음의 여정중에 늘 이 구원의 추억을 상기하여 분투의 노력을 다했을 제자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참으로 병들지 말아야 할 믿음의 뿌리들입니다. 늘 살펴봐야 할 내 믿음의 뿌리, 공동체 믿음의 뿌리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뿌리내리기 영성훈련의 기도가, 사랑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하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이요,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1.기도하십시오!
2.사랑하십시오!
3.함께(together) 하십시오!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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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14,30)
<용기를 내자!>
오늘 복음(마태14,22-33)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호수 위를 걸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칩니다.
6호 태풍 카눈이 지나갔습니다. 한반도 내륙을 관통하는 태풍이었고, 이곳 고성쪽을 지나는 태풍이어서 걱정을 했지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태풍이라는 큰 풍랑을 맞이할 때마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큰 자연의 힘 앞에서 그동안 자연의 순리, 곧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오지 않은 모습, 교만과 탐욕을 드러낸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서 '공동이익'을 위한 회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마도 더 큰 자연의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7호, 8호 태풍. ...)
제자들이 파도가 이는 풍랑 앞에서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그 풍랑을 잠재우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나)의 배도 종종 크고 작은 풍랑에 시달리면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넘어지고 풍랑을 피해 달아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 모든 풍랑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나아가서 외칩시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고, 다시 부활하게 하십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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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50yJUcowi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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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 27)
풍랑에서
만나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실천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길을 내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흔들림이 있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풍랑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닮아갑니다.
의혹과 의심이
커질수록
멀어지는
믿음의
용기입니다.
풍랑으로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
풍랑처럼
모든 여정이
위험하지만
풍랑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헤엄쳐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건너가게 하십니다.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 것은
풍랑이라는
믿음의
선물입니다.
생명과 두려움은
용기와 믿음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풍랑은
예수님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고
만나게 하는
풍랑입니다.
사람은
풍랑으로
성장하고
풍랑으로
겸손을 배웁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풍랑같은 현실은
주님을
이야기합니다.
풍랑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풍랑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풍랑의 뒷면에는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믿음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용기를
나누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가득한
믿음의 가장 좋은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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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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