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출발―알아보자, 단군 할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독자 여러분들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은, 이 책의 이야기를 ‘역사를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봐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 민족의 첫 국가를 여신 시조, 단군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네요.
매년 10월 3일 개천절이 되면, 한민족의 시조이자 고조선을 건국하신 단군 할아버지를 기리는 개천절 경축식을 통해 ‘우리 모두는 한겨레이며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합니다. 이 같은 자긍심은 우리 역사서에 단군의 건국 이야기가 당당히 실려 있기에 가능한 것인데요. 단군 신화는 여러 형태가 존재합니다만 가장 널리 알려진 《삼국유사》 버전으로 분석해보죠.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를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머언 옛날, 하늘나라를 환인이란 신이 다스리고 계셨는데, 그에게는 환웅이라는 서자가 있었답니다. (워워~ 릴렉스. 단군의 아빠가 서자 출신이라고 너무 열 받지 마세요. 뒤에 설명이 있어요.) 환웅은 하늘나라보다는 저 아래 인간 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인간 세계를 교화하고자 한다고 청하니, 아버지 환인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천부인 3개(청동검, 청동거을, 청동방울)를 주며 그곳을 다스리도록 했고, 이에 환웅은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불렀다고 합니다.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 운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던 어느 날,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인간이 되기를 청합니다. 이에 환웅이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 20매를 주며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될 것”이라 하니, 둘 다 동굴에 들어갔으나 호랑이는 못 견디고 뛰쳐나가고 곰은 21일 만에 사람이 되자 환웅이 웅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지요. (저기요? 애초 말한 날짜보다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하지만 결혼을 못 한 웅녀가 박달나무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바라며 계속 기도를 올리자 이에 환웅이 감복해 그와 혼인해 아들 단군왕검을 낳았습니다.
이후 단군이 평양성에 이르러 드디어 나라를 여니, 나라 이름을 조선(고요한 아침)이라 지었고, 이후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1500여 년 간 나라를 다스린 후,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셨다고 하네요. (역시 우리 민족의 시조는 반인반신이셨어.)
그리하여 단군왕검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군 할배의 건국 이야기 속에는 가리지날 정보가 너무 많아요. 자~,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 환웅이 서자라는 의미
일부에서 단군 신화 첫머리에 환웅이 서자라고 써진 것을 보며 “어째 우리 민족은 단군 아버지부터 첩의 자식이냐, 시작부터 꼬였다, 당시에도 이미 중국에 밑지고 들어간 증거”라고 자학하는 멘트를 하는 것도 보았는데요.
서자가 ‘첩의 자식’이란 개념은 가리지날입니다.
원래 서자는 집안을 승계하는 장자 이외의 아들을 의미했던 것으로, 본처가 아닌 이에게서 난 반쪽짜리 아들이란 개념은 고려시대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때는 처와 첩을 구분하는 개념도 없었고 자식들을 차별하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고려를 세운 왕건은 지방 유력 호족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통일에 성공했고, 이들 개국공신 호족의 딸들과 잇따라 혼인함으로써 정국을 안정화시켰기에 모든 부인에게 동등한 처우를 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기인제도를 통해 호족의 자식을 수도 개경으로 불러 일종의 인질로 잡고 늘 견제했기 때문에 유력 귀족들은 어릴 적부터 고향과 개경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본거지엔 본처(향처)를 두고 개경에는 현지 처(경처)를 두는 두 집 살림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두 부인 모두 정실로 인정하고 두 부인의 자식 모두를 친자식으로 인정했다고 하네요. 따라서 고려 말기 공민왕을 도운 아버지를 따라 출세하게 된 이성계 역시 본처(신의왕후 한씨)는 고향에 두고 개경 집에는 두 번째 부인(신덕왕후 강씨)과 살림을 차립니다. 그러다가 첫 부인은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사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이지만 첫 정식 왕비가 된 신덕왕후에게서 얻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웠다가 첫 부인의 자식들이 일으킨 왕자의 난을 두 번 겪게 된 겁니다.
그러니 배다른 동생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한 태종 이방원으로서는 방번, 방석 형제를 첩의 자식, 서자로 규정해 적자인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했고, 그의 아들인 세종에 이르러서는 아예 서자에 대한 차별을 법률로 못박아버린 겁니다.
따라서 150여 년 뒤 서자의 개념이 그렇게 바뀔 것이라곤 알 수 없었던 고려의 일연 스님이 ‘환웅은 서자’라고 쓴 것은, 그저 하늘나라를 이을 첫 아들이 아니어서 지상으로 올 수 있었다는 배경 설명일 뿐이에요. 그러니 자학은 이제 그만~ 끄읕!
- 단군 이름의 유래
단군이란 이름도 실은 가리지날입니다.
이걸 한문 뜻 그대로 해석해 ‘박달나무 임금’이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찾거나, 혹은 중국에 사대해 임금 호칭부터 ‘군’으로 격하한 것이니 ‘단제’라고 격상해야 한다는 등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실제로 단군이란 명칭은 ‘제사장, 하늘’이란 의미인 ‘탱그리(Tengri)’란 북방 유목인 단어를 한자로 표현한 겁니다. 그리고 왕검이란 명칭은 임금을 부르던 옛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의견입니다. (혹시나 해서 대학원 교양 강좌 수업 때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김영하 교수님께 여쭤본 바, 단군은 탱그리에서 유래했음을 확인해주셨습니다.)
지금도 터키어, 몽골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북방 유목계 언어권에선 부족장이나 무당을 ‘탱그리’ 또는 ‘당골’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청동기시대는 제정일치 사회여서 부족이나 국가 지도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건국자의 자손으로서 하늘의 뜻을 이해하고 이를 전파하는 제사장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남들은 가지지 못한 청동검을 허리에 차고, 청동거울을 목에 걸고, 청동방울을 울리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이죠.
따라서, 환웅은 당시 북방 유목민 사회에서 남하한 세력의 수장으로서 강력한 청동기 무기로 권력을 장악한 뒤, 기존의 원주민들에게 농사 기술을 가르쳐준 지배자였을 겁니다. 환웅과 함께 지상에 내려온 이들이 바람을 관장하는 풍백, 비를 다스리는 우사, 구름을 다스리는 운사 등 기후와 관련된 직책을 가진 것을 보면, 이들이 중시한 것이 농업 기술임을 잘 알 수 있지요. 그래서 환웅이 해당 지역의 토착 부족 중 곰을 숭상하던 부족의 여인과 결혼한 뒤 본인의 뒤를 이은 후손들이 자기네 북방 유목 부족의 최고 권력자 명칭인 ‘탱그리’ 즉, ‘단군’을 대대로 이어서 썼던 것이죠.
지금도 남아 있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탱그리 신화에서 원래 탱그리는 우주를 만든 신으로 나옵니다. 태초에 어두운 안개와 성난 바다만 존재하던 세상에 밝은 원이 빛을 흩뿌리며 생겨나더니 황금 알이 나타났고, 그 알 속에서 탱그리가 깨어나 하늘과 땅을 가르고 쇠로 만든 지팡이를 박아 다시 붙지 못하게 하고는 백마를 타고 하늘을 돌며 세상을 둘러보았다고 합니다. 이 같은 유목민의 탱그리 신화를 잇는 ‘탱그리 시즌2’로서, 세상의 탄생 이후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 신화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겁니다.
반면 중국의 창조 신화는 북방 유목 민족의 창조 신화와는 다릅니다. 장자가 쓴 저서 《장자》에 수록된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데요.
태초에 이 우주에는 세 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앙의 신 ‘혼돈’과 남쪽 바다의 신 ‘숙’과 북쪽 바다의 신 ‘홀’이었다지요. 이들은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어느 날 혼돈이 두 신을 집으로 불러 성대히 음식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에 감동받은 숙과 홀은 어떻게 보답할까 얘기했다지요?
“누구에게나 보고 듣고 숨 쉬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데, 혼돈은 달걀처럼 얼굴에 구멍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우리가 불쌍한 혼돈에게 구멍을 내주면 어떨까?” 그리하여 하루에 한 개씩 일주일에 걸쳐 7개의 구멍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7개의 구멍이 열리던 날, 혼돈은 영원히 깊은 잠에 빠지면서 드디어 지금의 세상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일곱 개의 구멍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해와 달, 다섯 행성(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즉 ‘음양오행’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리고, 호의를 베풀다가 본의 아니게 세상을 만들어버린 두 신의 이름을 붙인 ‘숙홀’은 번개라는 의미로 쓰인다네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번개를 들고 다닌 것처럼 고대 중국인들은 번개가 혼돈에 구멍을 내어 해와 달, 행성들이 탄생한 것이라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렇게 혼돈에서 탄생한 세상에 여와라는 여신이 나타나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어 냈다지요. 여와는 흔히 복희와 남매로 묘사되는데, 특이하게도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뱀의 모습을 한 두 남매가 서로의 꼬리로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여신 여와가 만 든 첫 번째 인간을 ‘반고’라고 하지요. 그는 2개의 뿔, 2개의 어금니, 많은 털을 가진 몸으로 알 속에서 튀어나와 하늘과 땅을 분리하고, 해와 달, 별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바다를 넷으로 나누고, 땅을 긁어 골짜기를 새기고 산을 쌓아 올렸다고 하지요.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중국 신화 속 ‘여와’라는 신과 이스라엘의 ‘여호와’ 또는 ‘야훼’와의 발음이 유사한 것에 빗대어 중국과 중동 창조 신화의 유사성을 거론하고 있어요. 또한 여와의 하반신이 뱀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도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 이야기와 유사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여기지요.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도 기독교 성경 속 노아의 방주처럼 대홍수 당시 데우칼리온과 피라 부부가 제우스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고 방주를 만들어 위기를 모면한 뒤 지상에 내려와 “어머니의 뼈를 등 뒤로 던져 새 인간을 만들라.”는 명을 받고는 고민하다가 ‘어머니의 뼈’란 의미가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의 돌임을 깨닫고 돌을 등 뒤로 던져 새 인간을 창조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중국과 중동, 그리스를 잇는 지역에서는 흙에서 사람을 만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처럼 애초 중국 문명은 하늘에서 인간이 내려왔다는 북방 아시아 신화나 태초에 알에서 모든 게 비롯되었다는 남방 아시아 신화와는 출발점이 다른 문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고대 중국 역시 창조신을 믿는 고대 신앙이 있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혼란과 격변을 겪으며 기존 종교는 사라져 가고, 유가, 법가 등 제자백가의 시대가 되면서 현실적인 정치철학 위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러던 중국인들도 황하상류지역에서 점차 영토를 확장하면서 북방 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북방계 신화를 알게 되면서 이를 응용하기에 이르죠. 즉, 황제는 일반 백성과는 출신이 다른 신성한 존재라고 알리기에 ‘천손 사상’이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황제를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라 부르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권리는 황제에게만 있으며, 제후국이 별도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중화사상으로 정립합니다.
- 건국 당시 총각이었던 단군
또한, 우리가 흔히 단군 할배라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하지만 단군은 결코 할배가 되어서 나라를 건국한 건 아닙니다. 쌩쌩한 총각 때 건국했어요.
단군 신화를 소개한 여러 문헌에는 단군이 건국한 후 결혼해 자식을 얻은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게 왜 잘 안 알려졌느냐 하면, 단군의 아내가 송화강을 다스리는 하백의 딸, 유화부인으로 나오는 등 설명하기 아주 곤란한 관계도를 보여주거든요.
우리에게 유화부인은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엄마로 잘 알려져 있고, 단군의 첫아들 이름마저 부루예요. 이는 동부여 금와왕의 아버지 해부루왕과 이름이 같습니다. 그래서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단군 신화 말미에 “그래서 부루와 주몽은 형제”란 결론을 냅니다만, 단군의 아들과 주몽과는 2300여 년 차이가 있는데 형제라니요.
그리고 해부루왕은 주몽의 양아버지인 금와왕의 양아버지이니 주몽에겐 할아버지인 분이라 그 기록을 그대로 믿기엔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되어 잘 소개하지 않지만, 그렇게 적힌 이유는 바로 뒷장 고구려 주몽 이야기에서 제가 설명드릴게요.
- 단군의 네 왕자
이후 단군은 네 아들을 낳았고 여덟 신하가 이들을 잘 보위해 나라가 발전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동양에서 예전부터 숭상해 온 절대수, 4와 8을 통해 국가의 신성함을 표한 것입니다. 여기서 4가 죽음을 의미하는 ‘죽을 사’와 발음이 같아 불길하게 여기는 것은 가리지날입니다.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동서남북 4방향이 있고, 하늘에도 4방향이 있기에 4와 8이란 숫자를 신성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고조선의 법률은 8조법이 되었죠. 또한 인간의 운명은 이 ‘팔자’에 달려 있다는 점술이 지금껏 내려오고, 유학자들은 4대조 조상까지 제사를 올리고, 문방사우(붓, 먹, 종이, 벼루)를 곁에 두고, 추운 겨울을 이기고 피어나는 4가지 식물, 매난국죽을 4군자라 부르며 즐겨 그림을 그렸지요.
그러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 발음이 ‘죽을 사’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숫자 4를 멀리하는 미신이 나타났고, 이게 우리에게도 전파되어 괜히 4를 불길하게 여겨 층수를 표시할 때 4층을 아예 빼거나 F층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아요.
이처럼 4를 신성하게 여긴 것은 《신약성경》을 편찬하던 히브리 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절대수로 여긴 12에 맞춰 예수님의 수많은 제자 중 12명만 주요 제자로 규정 했듯이,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제자들의 저서 중4개 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만 추리고 그외 기록 등 27권을 《신약성경》 정경으로 인정하기로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결정한 것이죠.
- 우리 역사는 반만년일까요?
또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건 엄밀히는 가리지날입니다.
우리가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를 BC2333년이라고 하는 건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기록이 아니라 그 후에 나온 《제왕운기》, 《동국통감》 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래야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BC2311년보다 22년 더 전에 나라를 열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선 국가의 출현은 청동기 문명과 함께 시작된다고 여기기에 한반도에 청동기 문화가 보급되는 기원전 8~10세기 무렵에야 진정한 국가 체계가 갖추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북한에서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연대를 올려 잡고 있는데, 둘 다 문헌 기록에 비해 기간을 짧게 잡고 있는 것이니, 우리가 자랑스레 말하는 반만년 역사보다는 사실 짧아요. 그리고 반만년 역사도 우리끼리 잘 기념하면 되지 외국인에게 자랑할 필요도 그다지 없어요.
아시아권에서 베트남만 봐도 건국 시조 흥브엉이 나라를 연 때는 무려 BC2919년이라는 신화가 존재하거든요. 단군 할배보다 580여 년 앞섭니다. 중국도 우리보단 앞서고요.
그리고, 제주도 탐라국을 연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시조가 땅에서 솟아났다고 하는 삼성혈 신화 역시 단군 할배보다4년 더 빨라요.(BC2337년)
제주도의 건국 신화 속 세 시조 역시 한반도를 거쳐 내려온 북방계 유목민 정복자들이었을 겁니다. 이들이 종자를 가져와 농사를 시작하게 해준 벽랑국 세 공주를 맞이해 결혼했다는 혼인지 신화는, 이들 건국 부족이 외부에서 온 농경 세력과 합쳐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되죠. 그러나 세계 최초의 문명을 만들고 명확한 역사 기록도 남아 있는 이라크, 이집트, 인도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나라 역사나 베트남이나 다 고만고만하게 보이겠지요.
또, 양력 10월 3일에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긴 한데 이 역시 가리지 날입니다. 기록대로 한다면 음력 10월 3일이어야 하지요. 설날도 오랜 논란 끝에 다시금 음력설로 되돌아갔고, 추석 등 우리 고유의 명절은 다 음력을 기준으로 삼는데, 왜 개천절과 한글날은 양력으로 기념해야 하는지 국가와 사회의 검토가 절실히 필요해 보입니다. 국경일 산정에 원칙이 없잖아요, 원칙이.
- 우리나라 첫 국가 이름은 고조선이 아닌 ‘조선’
아직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첫 국가 이름을 ‘고조선’이라 부르는 건 가리지날입니다.
원래 이름은 그냥 조선이에요. 글자 뜻 그대로 보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이성계의 조선을 원래 단군이 세운 조선과 구분하려고 과거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씨조선, 줄여서 이조라고 많이 불렀지요. 격하 하려는 의미로 이해해 우리나라에선 요즘 거의 안 쓰지만, 원래는 동일한 국호를 쓰는 왕조를 구분하기 위한 명칭이었을 뿐이에요.
우리가 정작 이 최초의 국가 이름을 조선 대신 고조선이라 부르게 된 건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때, 이미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고자 그보다 옛날 조선이란 의미에서 고(옛 고, old) + 조선이라고 썼기 때문입니다. 흔히 알려졌듯이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려고 쓴 것이 아니에요.
국내 사학계에서 그 존재가 부정되고 있지만, 중국 사서 《사기》 등 여러 문헌에 “은나라의 왕족이자 주나라 무왕에게 통치법을 가르친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후로 책봉되었다.”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일연 스님 이전에는 ‘기자조선’이 우리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기자가 봉토를 받은 곳은 단군조선 영토의 남서쪽인 북경과 요하 사이 대릉하 지역, 그곳의 옛 명칭인 ‘조선’에 땅을 받은 것인데, 인접한 단군조선과 똑같은 명칭으로 인해 후대에 와서 오해한 것이라고 하지요. 실제로 AD3세기 중국 위촉오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한 진나라(서진) 시절을 다룬 역사서 《진서》에도, “요하지역 선비족 출신 모용외 장군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자 그를 달래려고 조선공으로 봉했고 이를 아들 모용황이 승계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 모용황이 그 ‘조선’ 땅을 기반으로 세운 나라가 5호16국시대의 ‘전연’이었고, 그 영토는 대릉하 지역이었지요.
따라서 단군이 세운 조선이란 국호는 단군 본인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 중국이 새로 인지한 동북방 오랑캐 나라를 자기네 입장에서 ‘동쪽 끝 조선’이란 지명을 넣어 부른 것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거지요. 그러다가 그 오리지날 중국 ‘조선’ 땅 이름은 잊혀지고, 그보다 동쪽 한반도 지역이 새롭게 ‘조선’이라 인식되었다는 겁니다.
다만 이후 중국에서 피난 온 위만 등 이민 세력이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왕위를 찬탈하면서 위만조선이 된 것은 정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때 단군의 후손인 준왕은 한반도 남쪽으로 도망쳐 삼한의 왕이 되었다고 하며, 고조선은 왕위를 뺏은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한나라 무제의 침공에 맞서 1년여간 저항했으나 끝내 내부 반란으로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며 조선의 역사가 막을 내리니, 이때가 BC108 년이었습니다.
- 단군 신화는 왜 《삼국유사》에 처음 소개되었나?
우리 모두가 단군 할배로부터 이어진 단일민족이란 건 사실 가리지날입니다.
고조선의 영토는 요하 지역에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까지였고, 한반도 남쪽은 엄연히 ‘진국’이라는 별개의 나라가 존재했습니다. 다만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해 멸망시킬 당시의 명분이 “남쪽의 진국 등과 무역을 하는 데 조선이 방해했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상황이에요.
다만 최근의 유적 발굴을 통해 이 진국의 권력 중심지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송죽리 지역이라는 정도는 파악이 되고 있지요. 따라서 일단 한반도 남쪽은 단군이 조상이 아닌 셈이긴 한데…, 나중에 단군 후손인 준왕이 내려와 다스렸기에 하나의 역사로 묶일 수 있는 거예요.
실제 역사 문헌과 언어학적 분석, 유전체 분석 등을 통해 종합해보면, 우리 민족은 크게 예족(고조선), 맥족(부여, 고구려, 백제), 한족(진국, 삼한) 등 세 집단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여러 차례 한반도에 유입된 이들은 통일 왕조 등장 이후 한반도에 갇히면서 오랜 기간 동일한 언어, 문화, 사회적 관습을 공유하면서 하나의 민족이란 의식으로 결합된 것입니다.
그럼 한민족이라는 의식이 보편화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이 아니라 실은 고려 중기 1231년부터 30년간 이어진 몽골 침략이라는 사상 초유의 비극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맥족이 중심 이 된 부여, 고구려,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삼국시대엔 그 어느 왕조도 단군을 시조라고 여기지 않고 자기 네 건국자를 추앙했습니다. 고려 역시 강력한 불교 국가로서 태조 왕건과 기자를 숭상한 가운데 각 지방별 호족의 힘이 강해 지역별로 각자 신라의 후예, 백제의 후예, 김알지의 후손 등등 지역별, 가문별 의식이 강했고, 고려 중기까지도 가야, 신라, 백제 독립을 주장하는 반란이 심심찮게 발생하지요. 그러다가 30여 년간의 몽골 침공 속에 나라는 물론 백성들마저 다 사라질 위기 상황에 처하면서 비로소 하나의 민족이란 공동체의식이 형성됩니다.
이 위기의 시절에 일연 스님(1206~1289)이 1281년 75세 고령의 나이로 《삼국사기》에 빠져 있던 내용과 불교계 전승을 모아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첫머리에 우리 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소개했고, 이 책을 국가 차원에서 공인하고 발간하면서 비로소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상징성을 전 백성이 공유하기 시작한 겁니다. 젊은 시절부터 고스란히 몽골 침략의 현장을 바라봐야 했던 일연 스님이 단군을 구심점으로 내세우신 것이죠. 사실 그 이전에는 단군은 평안도 지역 주민들 말고는 잘 몰랐다네요.
실제로 많은 분들이 단군을 소개한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을 찬양하며, 단군을 누락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란 책이 써진 시대적 배경을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흔히 김부식 혼자 《삼국사기》를 썼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는 고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직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국정 역사서 제작TF’ 11명 중 책임자로서 공동 집필에 참여해 1145년에 책자를 발간했습니다.
원래 새 나라가 건국되면 그 직전 국가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동양 왕조들의 의무사항이었어요. 이를 통해 하늘의 뜻에 따라 정당 하게 정권을 이양받은 새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지요. 그러니 《삼국사기》는 후삼국시대를 종결한 고려로서는 당연히 직전의 왕조인 신라 역사를 정리해야 했고, 그러려면 신라가 시작된 삼국시대 초기부터 통일신라를 거쳐 후삼국시대까지 1000여년의 역사를 집필해야 했던 겁니다. “어이쿠야! 너무나 길잖아. 중국은 보통 300년마다 왕조가 바뀌던데 1000년이라니… 이런 막막한 심정이었겠지요. 그래서 신라 이전의 역사는 저술 범위가 아니므로 굳이 넣을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려 이전의 모든 역사’를 편찬하는 게 목적이 아닌 거예요.
조선 역시 왕조‘초기에 고려왕조 시대를 정리한 《고려사》를 정통성 차원에서 집필한 것이고, 심지어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가 주도해 《고종실록》, 《순종실록》을 완성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초기는 왕권이 불안정해 4대 광종이 되어서야 안정되지만, 이후 거란과의 세 차례 전쟁을 겪게 되고 그중 거란의 2차 침공 당시 잠시 개경이 점령당하면서 다수의 사서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건국한 지 200여 년이 지나 17대 인종 때인 1145년에야 비로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됩니다. 이는 그 직전인 1135년 서경(평양)으로 천도해야 나라가 부흥한다며 일어난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인종 자신의 정통성을 부각할 필요까지 더해진 것이라 국가사업으로 편찬하게 된 것이고, 그 책임자로 김부식이 지목된 겁니다. 신채호 선생이 ‘조선 제1대 사건’이라 부른 묘청의 난을 일으킨 서경 북벌파가 몰락하면서, 고려 태조 왕건부터 내려온 고구려 계승 의식 대신 신라를 중심으로 한 삼한일통 의식으로 전환하는 시기와도 마침 맞물리면서 《삼국사기》는 신라-고구려 -백제 순으로 정리된 것이죠.
게다가, 김부식과 관련 학자들이 참고할 만한 국내 역사서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문제였어요. 고구려의 《유기》, 《신집》, 백제의 《사기》, 신라의 《국사》등의 공식 역사서는 이 당시에도 이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패망하는 상황에서 사라졌거나 거란 침공 시 불타 버렸을 겁니다. 일부에선 일제 시기 초기에 총독부가 10만 부가 넘는 옛 사서를 압수해 고대의 찬란한 역사서는 다 불태우고, 가장 졸렬하게 저술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남겼다고 주장하는 경우 도 있는데…, 그것도 가리지날입니다. 당시 태운 책의 총 수량이 10만 부이지 10만 가지의 책을 태운 것도 아니고, 당시 압수한 책자의 목록도 다 기록되어 있는데, 의미 있는 고대 사서는 없고 대부분 일본을 비판한 저술이거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도서들이었어요. 그러니, 김부식이 편찬할 당시에도 이미 국내 사료가 절대 부족한 상황이어서 결국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 역사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에 중국 시각이 반영된 사서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지금도 그때와 사정은 다르지 않아 삼국시대 초기 역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등 중국사서에 크게 의존하고, 삼국시대 후기 역사는 《일본서기》 등 일본 사서와 《수서》 등 중국 사서를 상호 대조해서 빈자리를 메꾸고 있습니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예전 제가 학창시절때만 해도 국정 역사 교과서의 삼국시대 초기 내용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내용이 더 많이 인용되어 만들어졌어요. 특히 부여나 옥저, 동예 등은 전적으로 중국 기록입니다.
하지만사대주의자라 알려진 김부식은 남아 있던 우리나라 옛 기록과 중국 기록을 대조해 내용이 겹치면 우리나라 기록을 우선 채택하고 나머지 빈 영역은 중국 사서를 인용하는 등, 우리 기록을 우선해 집필했고, 그때까지 우리 기록엔 남아 있지 않던 을지문덕과 장보고 관련 자료를 찾아 되살려 내면서 “당태종을 물리친 안시성주의 이름은 끝내 알아내지 못해 안타깝다.”고 기술하지요.
실제로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란 정보 역시 가리지날일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 기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가 파병 나온 명나라 장수 구정도에게서 《당서지전통속연의》 소설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쓴 《월정만필》이란 저서에서 출발합니다. 그후 현종 시절 송준길의 《동춘당별집》이란 책에서는 현종 10년 경연 도중 임금이 안시성주의 이름을 묻기에 ‘양만춘’이라 답하자 다시 출처를 물었고, 이에 “명나라사신으로 다녀온 윤근수가 중국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하니 내용에서 다소간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 윤근수가 들은 내용에서 출발한 것은 맞는 것이죠. 그후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이 기록에 따라 안시 성주는 양만춘이라고 적었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 중국 장수가 말한 책자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소설이어서 과연 양만춘이 진짜 이름인 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답니다.
그리고, 김부식 본인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각주를 통해 “다른 의견도 있다. 앞뒤가 안 맞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솔직한 의견을 기입합니다. 또한 삼국의 임금들은 모두 중국의 황제와 동일하게 ‘본기’에 서술해 우리 역사가 중국과 대등하다고 기술했는데, 다음 왕조인 조선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임금들을 ‘본기’가 아닌 제후 열전인 ‘세가’로 기술해 중국의 제후국으로 스스로 격하하지요. 그랬기에 유학자들이던 조선 역사가들은 감히 삼국시대 임금을 중국 황제와 대등하게 적은 김부식을 ‘사대의 예를 따르지 않은 인물’이라고 비판했는데, 정작 지금에 이르러서는 김부식을 오히려 사대주의자라고 욕하니 지하에서 엄청 억울해하실 겁니다.
그리고 실제 김부식도 단군이란 존재를 알고 있었고 《삼국사기》에도 살짝 등장합니다.
응? 그런 얘긴 못 들어봤다고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21년 기록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잠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을 기술하면서 ‘평양자 본 선인왕검지댁야(평양은 원래 선인왕검이 살던 곳)’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왜 단군을 선인왕검이라고 불렀을까요? 그건 단군왕검은 1500여 년간 고조선을 다스린 후 신선이 되었다고 알려졌기에, ‘선인’이라고 불리고 있었거든요.
그럼 왜 이때 김부식은 그저 무심하게 평양을 수도로 한 건국자 정도로만 기술했을까요? 앞서 설명드렸듯이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때만 해도 고려 왕실이건 귀족이건 다들 보편적으로 건국 시조는 ‘기자’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삼국사기》에도 “해동에 나라가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기자가 주 왕실로 부터 봉작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했습니다. 실제로 《고려사》문종 9년(1055), 거란에 보낸 국서에도 “우리나라는 기자의 나라를 계승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지금 시각에선 황당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중국 은나라 왕족이 직접 나라를 여신 이곳은 여타 오랑캐와 달리 글로벌 중심인 중국 문화를 일찌감치 수용한 넘버2 국가’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죠. 이는 조선말 흥선대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소중화’라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지금 상황에 빗대면 미쿡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구호였던 America First’에 이은 Korea Second’란 자부심이 있던 것이죠.
이처럼 아직 고려가 강성하던 시기에 《삼국사기》가 편찬되었고, 130여 년 뒤 몽골의 침략을 받는 암담한 시기를 맞게 되는데, 토호 세력이 강성해 지역별 정체성을 가지던 고려인들이 드디어, 공동의 적 앞에서 하나의 공동 운명체라는 인식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에 민족적 자긍심을 되찾자고 생각한 일연 스님이 새로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비로소 단군을 우리 민족 첫 건국자로 기록하며 우리 역사가 중국에 맞먹는 독자적 전통을 가졌음을 강조한 것이나, 암울한 상황이 낳은 시대적 산물인 것이지요. 이후 서서히 단군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나, 정작 고려 말기까지는 여전히 기자사당인 숭인전만 있었을 뿐 단군은 그만큼의 대접을 못 받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비록 명나라에 사대는 할지언정 민족적 자부심을 가진 관학파 대신들이 단군을 추앙하기에 이릅니다. 태종 16년(1416년) 6월 1일, 변계량은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이며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천자가 분봉한 나라가 아니니 우리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라고 간언했고, 드디어 세종 11년(1429년)에 평양에 숭령전이란 단군 사당을 세워 기자 사당인 숭인전과 나란히 두니 단군조선은 물리적 시조로, 기자는 정신적 시조로 삼아 제를 올리는 이중 시조 개념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사대주의의 끝판왕이라 여기는 조선시대 때 오히려 단군의 위상은 올라갔으니 아이러니하네요.
하지만 성종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해 다시금 기자 숭배가 극대화됩니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다시금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중국인 기자를 조상으로 모시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단군을 통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게 됩니다. 그런 자주 사상이 너무 강화되다 보니 일부에선 단군조선은 광대한 영역을 가진 잊혀진 제국이며, 그 위대함은 바로 고유한 문화와 대륙을 호령한 민족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하면서 각광 받기에 이르렀지요.
현재 우리 역사학계는 공식적으로 기자는 부정하고, 단군만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물 등 다양한 분석을 통해 그 논리가 입증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요? 과거 우리 역사 기록이나 지금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평양이지만 이는 고조선 후기의 수도였고, 단군 할배가 처음 나라를 연 곳은 지금의 요하(랴오허 강) 지방이란설이 대세입니다.
기록보다 더 명확한 팩트는 유물의 존재 여부인데, 고조선의 상징적인 무기인 비파형 청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지역이 바로 요하 지역입니다. 이후 기원전 3세기 무렵 중국 전국시대 7웅(7대 강국) 중 가장 북쪽에 있던 연나라의 공격에 밀려나 대동강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고, 이 과정에서 기존 고조선의 중심 민족이던 예족이 만주 중앙부 거주자인 맥족과 섞이면서 예맥족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한발 더 나아가 요서 또는 요동 지방에서 고조선이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단군이 나라를 연 곳은 평양이고, 기후 신선이 된 곳은 묘향산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고조선이 독자적인 대동강 문명을 이룩했다고도 하며, 1993년에는 단군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거대한 단군릉을 조성하며 기원전 30세기에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고 우리 민족의 출발점이 평양이니 북한이야말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민족이란 명분으로 역사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현실은 안타까울 뿐입니다.
- 우리는 어떻게 하나의 민족이 되었나?
이처럼 단군에 대한 인식 변화를 쭈욱~ 훑어 왔는데요.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나의 민족이 되었을까요?
앞서 우리 민족은 원래 여러 갈래의 집단아 모여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문헌적으로, 언어적으로, 유전학적으로도 사실로 증명되고 있답니다.
우선 문헌에 따르면 세 부족이 우리 민족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실제 한반도는 과거에 수많은 종족이 모인 격동의 땅이었습니다. 북방에서 내려온 두 종족 중 고조선 계열인 예족과 부여 및 고구려 계열인 맥족, 그리고 고조선 시기에 한반도 남쪽에 존재한 진국을 구성한 한족이죠. 그리고 여기에 간헐적으로 북방 유목민(스키타이, 흉노 계열), 여진족, 중국인, 일본인 일부가 합쳐지면서 우리 민족이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실제로 광개토대왕비의 마지막 부분에 묘지 관리 규정이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왕이 잡아온 예인과 한인들에게 대대로 이곳을 관리토록 하라.”고 나올 정도로 같은 민족이란 개념은 당시엔 없었습니다.
이 같은 다양한 종족의 결합은 언어학적으로도 우리말이 상당히 특이한 형태가 되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 제가 학교 다닐 때에는 우리말은 ‘우랄알타이어족 퉁구스어 계열’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란 건 가리지날입니다. 최근 언어학계에서 이 이론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럼 우리말은 어느 어족에 속하냐고요?
그게…, 한국어는 기존의 어느 어족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완전히 독립된 한국어족이라네요. 어족 독립 만세~!
어족이란 한 조상에서 여러 자손들이 나오듯이 하나의 공통 조상언어에서 여러 언어가 갈라져 나온 유래를 찾아 묶은 것인데요. 문법이나 발음이 유사하면 같은 어족으로 인식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 단어 중 동일한 조상을 가진 단어가 있느냐라고 합니다. 우리말이 우랄알타이어 계열이라고 잘못 알려진 건 19세기 당시 서양 학자들이 한국어 단어를 면밀히 분석하지 않고 어순이 우랄알타이어 계통과 닮았다는 이유로 한데 묶었던 것에서 비롯된 거예요.
그런데… 퉁구스어 계열엔 어떤 언어들이 있는지 아세요? 중국 북방 여러 유목 민족 언어가 퉁구스어입니다. 만주어도 남퉁구스 어파에 속하지요. 19세기 당시 상황은 이랬다고 합니다.
유럽 학자: “여~, 청나라 나으리, 우리랑 토킹 어바웃 좀 하자유럽.”
청 학자: “안녕들 하신누르하치? 뭐가 궁금하만주?”
유럽 학자: “너네 만주족 말은 한족 말이랑 완전히 다르더라유로파. 근데 저 동쪽 끝 조선이랑 일본말은 어순이 너네랑 비슷하더리아?”
청 학자: “그렇청. 우리 고귀한 만주족은 고유한 말을 오랫동안 써왔홍타이지. 조선이랑 일본은 보다시피 쩌리들이니 위대한 우리 조상님한테 배웠을뇌피셜.”
유럽 학자: “아, 그렇겠구니케이션. 너네 만주족 말은 퉁구스 계열이라 부르기로 했으니 조선말, 일본말은 퉁구스어 계열로 정리하면 끝이겠피날레~.”
이는 문장구조가 우랄알타이어족과 동일하게 주어 + 목적어(보어) + 서술어 순으로 되어 있어 중국어나 인도유럽어족과는 확연히 다르고, 나는(주격), 나의(소유격), 나를(목적격) 등 교착어 (단어가 활용될 때 단어의 어간과 어미가 비교적 명백하게 분리되는 언어) 형태였기에 초기에는 우랄알타이어족으로 묶였던 겁니다.
그런데 이들 19세기 유럽 학자들이 우랄알타이 계통 언어를 연구 할 당시엔 만주인들이 지배하는 청나라 시절이었는지라 당시 조선과 일본은 청나라에 비해 약소국이었으므로 만주족의 퉁구스어에서 한국어, 일본어가 파생되었다고 여긴 거지요.
하지만 이후 연구가 거듭될수록 한국어가 다른 아시아 언어들과 계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한국어와 제주어는 별도의 ‘한국어족’로 분류되고 있고, 한발 더 나아가 제주어는 2010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소멸이 우려되는 언어’로 지정되기까지 하지요.
이처럼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근원은 우랄알타이어족 계통이라는 초기의 언어학적 분석과 과거 역사 기록에 근거해 북방계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학자들이 언어의 특성을 근거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 북방 아시아가 아니라 남부 아시아 계통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7년 2월 울산과학기술원 게놈연구소와 영국, 러시아, 독일 등 국제 연구팀은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합니다. 유전자 분석 결과 한민족은 3만~4만 년 전 동남아~중국 동부 해안을 거쳐 극동지방으로 흘러들어와 북방인이된, 남방계 수렵 채취인과 신석기시대가 시작된 1만년 전 같은 경로로 들어온 남방계 농경 민족의 피가 섞여 형성됐다는 겁니다. 즉 우리 민족의 뿌리는 북방계가 아니라 혼혈 남방계라는 것이죠. 이미 2009년 울산과학기술원은 한민족이 동남아시아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한 남방계의 거대한 흐름에 속해 있다고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한 바 있는데 이제 더 구체화된 것입니다.
이 같은 결과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위쪽 프리모레 지역에 있는 ‘악마의 문’이란 동굴에서 발견된 7700년 전 20대와 40대 여성의 두개골에서 추출한 DNA 내 미토콘드리아 유전체 분석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이 분석은 모계 유전자 분석에 대한 것인데 여성 유전자는 대부분 남방계인 반면,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만 전달되는 Y 염색체 유전체 분석에선 북방계 2종(O2b 37%, 03 40%) 및 남방계 1종(C3, 10%)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여성과 반대로 북방계가 80%에 이르는 것이고, 지역별로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 같은 결과는 일본 학자들의, 한강 이남은 남방계, 한강 이북은 만주계(북방계)라는 ‘이원적 종족설’이 거짓이란 것도 증명하지요. 심지어 이들은 백제는 남방계라 한강 이남에 수도를 두었지만, 조선은 이성계가 만주계라서 한강 이북에 수도를 두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유전적 분석은 앞서 소개한 문헌상 예, 맥, 한의 3종족과도 일치하고, 골상학에서 북방계(예족, 맥족) 70%, 남방계(한족) 30% 정도라고 분석해 온 결과와도 거의 맞아 떨어집니다.
즉,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구석기시대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이동해 온 남방계 한족이 주류가 되어 한반도에 살았습니다. 빙하기 시절 한반도는 초원이 우거진 마른 땅이었지만, 이후 간빙기가 되면서 기온이 올라 구석기 말기에는 잠시나마 매머드와 코뿔소가 뛰어놀던 아열대우림 지역으로 변해 해안가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었기에, 강가나 해안가에서 조개 잡아먹고 고인돌을 올리면서 부족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이들 한반도의 선주민들의 흔적이 바로 고인돌과 돌하르방 이지요.
이 거대한 돌무덤과 수호신은 인도 남쪽 타밀 지역과 동남아시아에 이어 한반도까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데,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밀집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때 당시는 중국 양쯔강에서 시작된 벼농사 기술을 습득한 후발 농경민들이 중국 북부를 거쳐 만주를 지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지역까지 농사를 짓고 부락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온화한 날씨 였는데, 3000여 년 전 다시금 지구가 서서히 냉각되면서 고위도 지역까지 올라갔던 정착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에 중원에서는 흉노와 중국 간의 투쟁으로 인해 만리장성을 쌓게 되었지요.
같은 시기 우리 민족의 70%를 차지하게 될 북방계 예족, 맥족이 바이칼호 호수 근처까지 북상해 살던 중 만주와 한반도로 내려오게 된 것도 다 지속적인 기온 저하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중앙아시아로 부터 청동기 지식을 습득한 북방계 조상들은 월등한 청동 무기로 무장한 채 침략해 기존 남방계 남성들을 몰아내며 만주와 한반도의 남방계 여성과 혼인하는 식으로 혼합이 됩니다.
따라서 북방계 지배층이 기존 정착했던 남방계의 인도유럽어족 계열 단어를 차용해 우랄알타이 계통의 문장 구조로 소통하면서 우리말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정복자 남편은 자기 식으로 소통했겠지만, 남방계 엄마가 키운 2세대부터는 주로 어머니로부터 익힌 남방계 명사 단어를 혼용했을 겁니다.
그동안 세계 언어학계에서 그 유래를 알기 어려웠던 한국어의 비밀은 인도유럽어족 단어와 우랄알타이어족 문장구조가 융합된 독특한 언어라는 게 이처럼 밝혀지고 있는 것이고, 이는 우리 민족이 남방계와 북방계 아시아인이 결합되어 형성된 결과인 것이죠.
이처럼 언어 면에서도 보이듯, 우리 역사 초기에 요동 및 만주 등 북쪽지역에서 먼저 고조선, 부여 등의 국가가 성립된 것도 이미 정착생활을 통해 사회화가 이루어진 집단이 남하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후 기온이 더 낮아지면서 만주지역의 논농사는 어려워진 반면, 한반도가 농사에 적합한 지역이 되면서 우리 역사의 중심이 남쪽 한반도로 서서히 내려오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 민족 여러 고대 건국 신화에서도 북방계 ‘천손신화 (하늘의 자손)’와 남방계 ‘난생신화(알에서 태어남)’가존재하는 반면, 중국 등 유라시아 내륙 지방 민족들의 창조 신화인 신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아 태생이 다르다는 것이 알려져 왔죠. 뿐만 아니라 북방계 고인돌과 남방계 고인돌이 혼재하는 등 신화, 역사 유물, 언어에서 여러 문화가 융합되었던 증거에 이어, 유전학적 팩트까지 더해지면서 우리 민족의 근원에 대한 의문도 서서히 그 구름이 걷히고 있습니다.
- 단군 신화,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앞서 설명한 이 같은 여러 팩트를 토대로 단군 신화를 다시 들여다보면, 북방계의 정복 역사가 보입니다. 즉, 신석기시대 석기를 무기로 삼아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남방계 한족들 앞에 청동기로 무장하고 논농사라는 첨단 농사기법을 보유한 북방계 예족이 들이 닥칩니다. 당시 원주민 한족들은 사물을 숭배하는 토템 문화를 갖고 있어 종족에 따라 호랑이를 모시거나 곰을 모셨겠지요. 보통 그 지역에서 가장 강하고 무서운 동물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주나 한반도에서 가장 무서운 맹수가 바로 호랑이와 곰이거든요.
그런데, 새로이 나타난 북방계 예족과 맞닥뜨린 이들 원주민은 월등히 앞선 첨단 청동 무기와 새 기술 앞에서 저항하거나 굴복하는 두 가지 선택밖엔 없었을 겁니다. 이에 호랑이를 숭상하는 부족은 저항하다가 철저히 멸망해갔고, 곰 숭상 부족은 이들의 지배를 받아 들였을 겁니다.
이에 새로이 지배자가 된 북방계 이주민은 피지배 계층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게 종교지도자와 통치자 두 가지 역할을 맡은 그들의 수장인 ‘탱그리’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천손임을 내세워 지배해 나간 것이죠.
비록 애초에는 고조선 지배층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을 건국 시조 단군 이야기는 요동과 평안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드디어 몽골 침략기 이후 일연 스님에 의해 국가 공식 역사서에 기록되고,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여러 차례 국난 극복과정에서 민족의 시조로서 위기 극복을 위한 구심점이 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 모든 민족의 건국 또는 시조신화는 대부분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토대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즉,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세 종족이 한데 모여 구성되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가치나 독자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가치관과 문화를 공유하면서 내부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에 국가와 사회 유지에 큰 기여를 해 왔으니까요. 실제로는 이 세상 어느 국가도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매우 단일한 혈통을 가진 국가입니다. 혈액암 환자 치료를 위한 ‘조혈모세포이식(stem cell transplantation)’이라는 치료법이 있습니다. 흔히 골수이식이라고 부르는 이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와 조직형이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부모나 형제 중 일치자가 없으면 기증희망자 중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나라나 일본에선 조직형이 일치하는 사람을 찾을 확률은 2만 분의 1 정도이지 만, 다인종 국가인 미국은 200만 분의 1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혈통이 그나마 단일하다는 것 자체가 더이상 자랑일 수는 없습니다. 글로벌시대에 여러 해외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 단일민족 이데올로기를 더이상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주위를 호령한 과거를 가져야 위대한 것도 아닙니다. 이탈리아인들이 과거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언급하며 자랑한다고 주변 유럽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존경해줄까요?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아시아에서 수천 년간 초강대국 지위를 누려 온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권 바로 옆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위대한 것입니다. 한때 중원을 차지해 영광을 누리던 다른 민족들이 거대한 중국 문명에 흡수되어 소멸했지만, 우리는 굳건히 단군이라는 우리 마음속의 구심점을 통해 고유한 문화를 지켜왔기에 그 역사에 대해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 신화는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삼아 자긍심은 지켜가면서도, 다문화 가정을 꾸린 외국인과 그 자녀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잘 융화시켜 다 함께 발전하는 나라여야 합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간날때 천천히 음미하듯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