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 |
제1장. 서설 제2장. 한국고유사상의 본질과 그 특성 제3장. 삼국시대의 철학사상 제4장. 고려시대 철학사상의 전개와 위상 제5장. 유불교체와 조선전기의 사상경향 제6장. 성리학의 전개와 발전 제7장. 조선후기 성리학과 예학의 전개 |
제8장. 호락논쟁의 근본문제 제9장. 양명학의 수용과 전개양상 제10장. 실학의 성립과 발전 제11장 척사위정론의 대두와 그 의의 제12장. 개화사상의 대두와 그 의의 제13장 애국계몽사상의 특징과 그 의의 제14장 근대민족종교의 발흥과 민족운동. |
제7장 조선후기 성리학과 예학의 전개
1.영남학파 성리학의 특성
1)퇴계학파
퇴계학파는 퇴계이황(1501-1570)과 그 문인 월천 조목(1524~1606), 학봉 김성일(1538~1593), 서애 유성룡(1542~1607) 등과 후학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이다. 이황학문의 특징은 주희의 이기 심성론을 따르고 있다. 도산서원을 창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조목은 體仁 공부에 역점을 두고 『사문수간(師門手簡)』을 편찬하였다. 김성일은 학문의 第一義로 삼고『상례고증』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문인으로 경당 장흥효(1564~1635)등이 있다. 유성룡은 학문적으로 師說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양명학을 비판하였지만, 내면적으로 상산학·양명학에 상당히 관심을 가져 폭넓은 사상 편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219쪽)
그의 학문은 우복 정경세 와 아들 수암 유진(1582~1635)에게 이어져 조선 말기 방산 허훈(1836~1907)에 까지 전해진다. 퇴계학파는 이황이 죽은 후 병파와 호파로 분파 되었다. 마침내 유성룡파와 김성일파로 갈리게 되었던 것이다. 병파는 양현의 官爵을 기준으로 , 호파에서는 年齒를 기준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황의 학문과 사상은 김성일과 유성룡을 이어 갈암 이현일(1627~1704), 밀암 이재(1657~1730), 대산 이상정(1711~1781), 정재 유치명(1777~1861), 한주 이진상(1818~1886), 서산 김흥락(1827~1899)에게 계승되었다. 이현일은 이의 능동성·주재성·실재성을 강조하고 理氣를 이원적인 입장에서 파악한다.
이현일의 아들 이재는 가학을 계승하여 퇴계학을 적극 옹호하며 기호학파를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理氣관계에 있어서 不相離는 외손인 대산 이상정과 소산 이광정 형제에게 계승되었다. 이상정은 ‘소퇴계’로 추중되고, 그의 사상은 남한조·정종로→유치명→김흥락으로 또 하나는 정종로·유치명→이원조→이진상→곽종석 계열로 발전 하였다. 유치명은『대학』의 명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덕은 심(心)의 본체가 광명한 것을 말한다. 심은 이와 기를 합한 것이요, 명덕도 이와 기를 합한 것이다. 명덕은 심상의 도리가 광명하게 두루 비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와 기를 합한 가운데 이를 주로 한 것이다.
명덕을 ‘합이기(合理氣)’중에서 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심의본체’를 理라고 하였던 것이다. 기호학파에서 ‘심시기(是氣)’라고 하는 것과 상반되는 유치명의 心觀은 이진상과 곽종석에게 영향을 끼쳐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2)남명학파
남명학파는 남명조식과(1501~1572)과 그 문인으로 덕계 오건(1521~1574), 내암 정인홍(1535~1623), 수우당 최영경(1529~1590), 한강 정구(1543~1620), 망우 곽재우(1552~1617), 동강 김우옹(1540~1603), 성암 김효원(1532~1590), 약포 정탁(1526~1605)등이다. 조식은 대곡 성운과 이웃에 살면서 도의를 탁마하였다. 그는『주역』「문언전」의 “경으로써 안을 곧게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하여, 「패검명」에서는 “내적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외적으로 행동을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은 의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하였다.
3)한강학맥
한강 정구(1543~1620)는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성주 출신이다. 정구는 국가 경영에 이르기까지를 ‘성’과 ‘경’으로 관철시키고자 한 것이다. 영남학파의 학통을 ‘회퇴한여’, 즉 회재이언→퇴계이황→한강 정구→여헌 장현광으로 꼽고 있다. 남계 박세채는 자신의 예론을 전개하는데 있어, 정구의 예설을 매우 중요하게 참고하면서, “예학은 마땅히 정구를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고 평하였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정구의 응용구시의 학문을 계승하고, 이를 기호 남인 학자들에게 전하여, 성호학파의 경세사상을 낳게 하였다.
4)여헌학맥
여헌 장현광(1554~1637)은 경북 인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가학이 있었지만, 대부분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경위설」을 제시하여, 理氣一本 ‘理氣一物’을 주장하였다. 그는 존재하는 이 우주를 소급하여 관찰하면 그 시초는 오직 하나일 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통체인 것을 태극이라고 하고, 본연인 것을 이라고, 작용인 것을 기라고하고, 유행인 것을 도라고 하여, 상황이나 경우에 따라 다양한 명칭과 개념으로 적절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철학체계는 경위설이고 분합설이다.그는 理는 곧 도의 날줄이요, 氣는 곧 도의 씨줄이다. 그는 이·기를 도의 두 가지 측면으로 규정하여 도일원적인 철학 체계를 세운 것이다.
2. 기호학파 성리학의 특성
기호학파는 이황을 조종으로 하는 학자들과 철학적 논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학파의 선구자들로 이이(1536~1584)·성혼(1535~1598)·송익필(1534~1599)등으로 점차 이이를 조종으로 삼게 되었다. 이이·성혼·송익필은 평소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성혼문하의 조헌·이귀·정엽·안방준·황신 등과 송익필 문하의 김장생·김집·정엽 등은 성혼과 송익필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이이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던 인물들이다. 오늘날 성혼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하고 있는 절충파의 비조로 인정되고 있다.
1)율곡학파
이이는 “내 다행이도 주자의 뒤에 태어나서 학문이 거의 틀리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을 정도로 주희의 학문 체계를 존중하였다. 이이가 이무위를 부동의 정론으로 고수하는 반면에, 이황은 이발설(理發說)·이자도설(理自到說)을 주장하고 있고, 이이가 ‘칠정포사단’을 고수하며 사단칠정을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로 해석하고 있는데 비해,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소종래(所從來)가 다른 것으로 보고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의 호발설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격물(格物)과 물격(物格), 인심과 도심, 수양의 방법등에 대한 견해차로 연결되는 것으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학문적 구분점이 된다.(233쪽)
율곡학파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성리학은 조선조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예학 발전, 호락논쟁,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이이의 실학적 측면은 이재·김원행 등을 거치며, 홍대용·박지원·박제가·정양용 등 까지 영향을 끼쳤다. 의리정신의 실천이었다. 조헌의 의병정신과 송시열의 춘추대의정신, 이항로 척사위정론 및 실천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밖에 조선조 양명학의 대표자들인 장유·최명길·정제두등을 비롯한 율곡학파의 인물들과 사승관계 선상에 인물로는 김장생·조헌·정엽·안민학·이귀·안방준 등이 고, 이후 김집·송시열·김창협·권상하·이간·한원진·임성주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2)성혼과 송익필의 성리학
우계성혼은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청송 성수침의 아들이다. 그는 조광조를 사모하였다. 성혼은 군자와 소인의 등용여부에 따라 治亂이 결정된다고 하였으며, 역법과 공법의 폐단을 논하고, 경장의 시기임을 강조하며 혁폐도감의 설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성혼은 주희의 이른바 “인심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하고, 도심은 性命의 바름에서 근원한다”는 글을 보고 깨우친 바가 있은 후, 이황의 학설에 동조하여 이이에게 편지를 띄우게 되었다. 논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황의 학설에 동조하였다고 하여, 호발설 전체를 무조건 따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혼과 이이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견해의 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거의 없었다. 제 6서신의 끝에서 성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발하기도 전에(주리·주기)두 가지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막 발할 즈음에 있어서 근원하고 형기에서 생함이 있는 것이다. 곧 이·기는 하나로 발하는데[理氣一發] 사람이 그 중요한 점을 취하여 이를 주리·주기라 이르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윤증·박세채 등을 비롯한 소론계와 김창협·김창흡등의 일부 노론계학자들에게 계승·부연되어 하나의 학맥을 형성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근세 척사위정파의 거목인 이항로의 주리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송익필은 성리학에 밝아 『태극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動靜함이 있는 것은 기요, 이는 스스로 동정하지 않는 것이다. 氣없이 발현하는 理는 있을 수 없다”, “동정하는 것은 음양이고 동정하게 하는 소이는 태극이다”라 하기도 하고, 이이의 ‘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식의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송익필은 ‘직’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의 직사상은 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며 더욱 심화되었다.
3)기호학파의 발전
김장생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문제가 되었던 격물·물격의 의미와 관련하여 정경세와 논변을 벌였다. 정경세는 『대학』의 ‘물격’에 대해 주희가 ‘물리지극처 무불도지(物理之極處 無不到也)’라고 주석한 것을 해석함에 있어, 도를 ‘내마음에 내도함을 이른 것이다’라 하였다.
김장생의 ‘직’사상은 문인에게 전승되었다. 문인으로는 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윤선거·장유·조익·최명길·김경여·정홍명, 등이다. 우암송시열(1607~1689)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발전시킨 인물이다. 한편 송시열은 정민정의 『심경부주』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이를 군주의 교육에도 활용하였다.
이·기는 하나이면서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를 따라 말하는 것이 있고 기를 따라 말하는 것이 있다. 대개 이와 기는 혼융무간하나,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여서 또한 일찍이 뒤섰인 바가 없다. 송시열은 송익필·김장생 이래로 수양론의 핵심으로 ‘직’을 강조하였다.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권상하·이단하·이희조·정호이며 권상하의 문하에서는 한원진, 이간, 윤봉구를 비롯한 이른바 강문팔학사들이 배출되었다. 녹문 임성주(1711~1788)는 도암 이재의 문인이다. 사상적으로 이이·이재·김창흡 및 중국의 장재·정호·주희등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은 근래가지 기일원론·유기론·기학등으로 평가되어 왔다.(242쪽) 노사 기정진(1798~1879)은 임성주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하여 학문을 이룩하였다. 기정진은 이와 기의 관계를 ‘이존기비’, ‘이주기복’등으로 표현하며 이를 높이고 있다. 기정진은 여전히 전통적인 시각에서 ‘이기불리’를 긍정하고 있었으며, 기를 불필요한 존재나 이의 부속물 정도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항로 계열의 김평묵·최익현 등은 기정진을 크게 칭송한 바 있다.
4)절충파의 성립과 발전
성혼과 같이 호발설을 비판하면서도 일부 수용하여 사단과 칠정을 주리·주기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는 기호 계열의 학자들을 보통 절충파라 명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들로 윤증·박세채·조성기·임영 김창협·김창흡·박필주등을 들 수 있다. 김창협·김창흡의 학문은 ‘농암학파’라고 불리는 학맥을 형성하였다. 어유봉·이현익·박필주 등은 이들 형제의 영향을 받았고, 이재는 낙학의 학문적 풍토에서 박필주 등과 교유하며 자신의 학문을 이룩하였다. 이재의 문하에는 김창협의 손자였던 김원행 및 임성주등이 있었고, 김원행의 문하에서는 박윤원·오윤상·심정진·황윤석 및 북학파의 홍대용 등이 배출되었다.
오윤상의 학문은 오희상 등에게, 박윤원의 학문은 홍직필등에게 이어졌으며, 오희상과 홍직필은 당시 낙론의 양대 거장으로서 교의가 깊었다. 홍직필의 학문은 그후 임헌희를 거쳐 윤치중·서정순·전우 등에게 이어졌다.
오희상의 학문 또한 김만식·윤치담·유신환 등을 거치며 다수의 근세 학자들에게 이어졌다. 한편 조선조 말기에는 김창흡 계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화서 이항로 계열과 홍직필·오희상 계열의 문인들 사이에 ‘경가양파의 분열’이라고 불리는 명덕·본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농암 김창협(1651~1708)은 김상헌의 증손이며, 이단상의 문인이다. 그는 「우율논이기서평(牛栗論理氣書評)」에서 이이의 설에 대해 “끝내 주자의 성명·형기의 설에 미치지 못하였다”라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김창협은 기발이승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이발을 “기가 능히 이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기발을 “기가 이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수용한 것이다. 김창흡은 김창협처럼 이이를 존중하면서도,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낙론계의 종장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기질의 편전에 관계없이 본연한 진체로서의 이는 기의 제약을 받지 않고 물물마다에 오상으로서 완족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보았다.
3.예학의 성립과 발전
1)성리학 시대에서 예학 시대로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주목해야 할 흐름의 하나가 예학의 발전이다. 대개 임진 왜란 이후부터 실학이 대두하기 이전 1백여 년간을 ‘예학시대’로 규정하는 것이 통설인데, 근세유학의 변천과정을 보면 한국에서는 성리학→예학→실학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왜란과 호란으로 신분제가 동요되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이에 사대부들은 무너진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회복하여 강상 윤리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기존의 예제와 예 정신을 더욱더 엄격히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종법에 기초한 『주자가례』를 깊이 연구하고 일상 생활화하여, 유교적 국가 사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2)대표적 예학자와 학문 경향
한강 정구(1543!1620), 사계 김장생(1548~1631), 신독재 김집(1574~1656), 우복 정경세(1563~1633),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우암 송시열(1607~1689), 미수 허목(1595~1682), 초려 이유태(1607~1684), 시남 유계(1607~1664), 남계 박세채,(1631~1695), 도암 이재(1680~1746)등을 들 수 있다. 김장생은 실천을 통한 진리 인식을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예제 실천을 통해 궁극적 진리를 체득해 가는 과정을 중요시한 것이다. 정구는 종래의 가례위주의 예학에 만족하지 않고 고금의 예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저술로 『오선생예설분류』,『예기상례분류』,『가례집람보주』,『오복연혁도』등이 있다.
정구의 예학은 허목으로 이어졌다. 그 역시 스승 정구처럼 고례에 입각한 예학이었다. 고금의 예론을 집성하여 예 전반에 걸쳐 연구하고, 이를 『예설』이라는 저술로 정리하였다. 김장생을 종사로 하는 기호예학은 『가례』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며, 주자의 예설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와 달리 정구를 도사로 하는 영남 예학은 국가의 전장제도로부터 일상의 사례에 이르기까지 예의 전반적인 영역을 연구하였다.
3)가례의 연구와 정착
조선초에는 예를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일이 당면문제였다. 따라서 가례보다는 국가 법제의 제정과 시행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명종·선조조 이후 점차로 성리학이 깊이 연구되고 체계화되자, 가례의 예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소학』과 향약의 보급을 통해 이를 지역 향촌 사회와 국가 전반에 걸쳐 적용하고자 했다. 조선초의 예학은 관학중심으로 『경국대전』등의 법제적 측면에 관한 저술이 많았다. 16세기 이후에는 상례와 제례에 관한 연구 저술이 많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왜란과 호란을 계기로 붕괴되기 시작한 사회질서의 재편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현안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가례 중심의 예학에서 방례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성호이익(1681~1763)을 거쳐 다산 정약용(1732~1836)에 이르러 그 완성을 보게 된다. 가례를 연구하면서인간의 보편적 의례의 근거로 정립하려고 하였다.
4)예학사상의 근본적 이해
(1)천리와 예제
예학은 인간 본성에 따른 이성적 생활에 투처하고 동물적 욕구나 감정에 따르는 삶을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바를 제시하고, 사회와 정치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 주자는 “예는 천리의 절문이요, 인사의 의칙이다”라고 했다. 예가 성립하는 근거는 단순히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합의한 규칙이 아니라, 천지에 내재하는 절대 불변의 법칙을 본 떴다는 것이다. 17세기 예학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 한다’는 이기성정의 철학에 바탕하고 ‘존천리’를 철학으로 하여 천리의 ‘절문’을 밝히고 사회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예학의 본령은 예를 실천하여 ‘천인합일’을 이루려는 것이 된다.
(2) 예와 자기 절제의 정신
예학이 추구하는 바는 극기복례를 통해 천인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극기 복례는 인간 개개인이 이기심이나 욕심을 극복하고 사회의 객관적인 예제를 준행하여 사회의 안정과 조화를 이루며, 이러한 가운데서 개개인의 삶을 완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극기를 통해 어질고 선한 자기 본성을 깨닫고, 이로써 스스로 자율 의지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자기를 극복하는 수련자체가 예의 실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극기하는 과정이 예를 실천하는 일상생황이 되기 때문이다. 예로써 절제하고 예를 실행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3)예제와 종법 질서
예학자들이 예제 시행에 있어서 가장중요하게 여겼던 『가례』는 종법을 토대로 하며, 종법은 조선조 사회 질서의 근간이었다. 17세기 조선 예학이 끼친 사회적 영향의 하나가 바로 종법 제도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종법 질서의 확립으로 인해 친족제도가 부계 중심적 종족이라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고 문중 중심적인 사회질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가족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가정에서 종자와 가부장의 권한이 강화되고, 검박하고 근면한 부인상이 확립되었다. 혼인 문제에 있어서는 동성동본간의 혼인과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였다.
(4)예학사상의 의의
조선 예학자들은 예의 근본정신에 따라 예제를 정리하였으며, 당시 조선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에 알맞게 적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공맹과 주자가 실현하고자 했던 인의의 이상사회 실현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세도를 자임하였다. 그들이 『주자가례』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그 예의 형식에 내재한 인본 정신이었으며, 또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배우고 실현하고자 한 것은 인의의 사회, 인의의 국가질서, 인의의 국제 질서였던 것이다.
제8장 호락논쟁의 근본 문제
1. 호락논쟁의 배경
사단 칠정 논쟁과 더불어 한국 성리학의 야대 논쟁으로 꼽히는 호락논쟁은 조선후기 성리학사를 풍미했던 논쟁으로서, 논의된 내용의 풍부함과 논쟁의 규모나 기간은 오히려 사단칠정논쟁을 능가하는 면이 있다. 외암 이간(1677~1727)과 남당 한원진 1682~1751)의 논쟁으로부터 야기된 호락논쟁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 및 미발시 본연지심과 기진지심 또는 본연 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 문제를 주제로 한 논쟁이었다. 이간은 인물성동론 및 미발시 본연지심과 기질지심의 이위이시를 주장하였는바, 그를 지지한 학자들이 대부분 낙하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주장을 낙론(또는 낙학)이라 일컬었다.
반면에 한원진은 인물성 이론 및 미발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동위동시를 주장하였는바, 그를 지지한 학자들이 호중에 살고 있었기에 그 주장을 호론(호학)이라 일컬었다.(268쪽) 이간과 한원진은 권상하의 문인이었다. 따라서 호락논쟁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발단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는 일직이 맹자와 고자가 서로 논변한 이래, 주희와 이이 등 많은 학자들이 단편적으로나마 계속 논급해 왔던 문제였다. 그러므로 호락논쟁은 기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여 집중적으로 논변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반성적으로 음미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이간과 한원진의 논쟁
1)이간의 주장
오상을 오행수기의 이라고 정의한 한원진이 인간만이 오상의 전부를 얻었고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고 주장한 것과 오상을 오행의 이라고 정의한 이간이 인간의 오상은 정통한 것이고 동물의 오상은 편색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서로 대조해 본다면, 이간과 한원진이 말하려고 하였던 근본내용은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 이간의 본연지심이란 명덕 본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성인과 범인이 함께 얻은 것이라고 보며, 심·도심·본심·천군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이간은 일원과 이체를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보아, 본연지성은 사람과 동물이 같고 기질지성은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고 말하였다.(276쪽)
2)한원진의 주장
호론을 대표하는 한원진의 주장은 사람만이 오행의 뛰어난 기운을 모두 얻었으므로 사람은 오상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으나, 동물은 오행의 편색한 기운을 얻었기 때문에 오상을 모두 얻었다고 볼 수 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이 오행의 기운을 모두 얻은 것은 마찬가지라 하더라도 동물도 오상을 모두 갖춘 것이라 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인성과 물성의 동이를 판단하는 척도는 주희의 ‘이동기이’와 이이의 ‘이통기국’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원진의 ‘인기질’은 기를 겸한 것이기도 하고 겸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3)호락논쟁의 근본문제
(1)오상의 개념 문제
호락논쟁의 쟁점 가운데 하나는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이다. 이간은 사람과 동물이 모두 오상을 전부 갖추었다고 보았지만 인성은수하고 물성은 불수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인성과 물성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정한 것이다. 한원진은 동물도 오행지리를 모두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동물의 기는 편색하기 때문에 ‘오행수기지리’인 오상을 동물이 모두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간이 오행의 양만을 고려하여 오상을 정의하고 인성과 물성을 질의 차원에서 구분한 것과, 한원진이 오행의 질을 고려하여 오상을 정의하고 인성과 물성을 양의 차원에서 구분한 것이 명백해진다.
(2) 미발의 개념문제
이간은 미발순선(未發純善)을 주장했고, 한원진은 미발기질유선악(未發氣質有善惡)을 주장했다.(284쪽) 이간의 중저미발(본연지심)은 한원진의 심지본체에 해당되고, 이간의 부중저미발(기질지심)은 한원진의 심지기품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간과 한원진은 심지본체와 심지기품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보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호락논쟁의 핵심문제이다.
(3) 중저미발(中底未發, 심지본연[心之本然])과 부중저미발(不中底未發, 심지기질[心之氣質])의 관계 문제
중저미발과 부중저미발의 관계에 대하여, 이간은 이위이시(異位異時)를 주장했고 한원진은 동위동시(同位同時)를 주장했다. 여기서 ‘위’란 일원적이냐 이원적이냐를 말하고 ‘시’란 같은 때에 존재하느냐 서로 다른 때에 존재하느냐를 말한다. 이간에 의하면 심은 스스로 심이고 기품은 스스로 기품이어서 경계와 소속된 영역이 또한 매우 정연하다는 것이다. 즉 , 이간은 본연지심과 기질지심은 두개의 것으로서 서로 혼동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한원진은 허령(신지본연)과 기품(심지기질)은 하나로서 같은 시간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두개의 것이 아니므로 시간적인 선후나 지위의 피차로 나누어서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동위동시’라는 의미이다
3. 호락논쟁의 발전
1)논쟁의 추이
병계 윤봉구(1683~1767), 봉암 채지홍(1683~1741), 정암 이현익(1678~1717), 존재 위백규(1727~1798)등은 호론을 지지하거나 계승하였고, 도암 이재(1680~1746), 기원 어유봉(1672~1744), 관봉 현상벽, 미호 김원행(1702~1772), 매산 홍직필(1776~1852) 등은 낙론을 지지하거나 계승하였다. 호론은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녹문 임성주(1711~1788)는 이간의 ‘이기동실 심성일치’라는 명제를 준칙으로 삼아 마침내 기존의 이일 분수론에 짝하는 기일분수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기정진은 이분원융론 (또는 이분상함론)을 주장한다. 사실 이제까지의 이일분수론은 이일과 기분수를 결합시킨 것 이였다.(290쪽)
기정진의(1798~1879) 이분 상함론에 의하면 같은 것 속에 다른 것이 있는 것[同中有異]이요, 다른 것 속에 같은 것이 있는 것[異中有同] 이다. 기정진은 낙론이나 호론이 모두 이일과 분수를 격리시켜서 인물성동론이나 인물성이론을 고집한 것은 이분상함을 몰랐던 소치라고 비판하였다. 임성주와 기정진의 사상은 각각 유기론과 유리론이라고 규정되기도 할 만큼 독창성과 극단성을 지닌 것이다.
2)이철영의 성삼양설
이철영의 성삼양설은 본연지성 기지본연지성 기지기질지성으로 표현되는데, 기지본연지성을 줄여서 기본지성이라 하기도 하고, 기지기질지성을 줄여서 기질지성이라 하기도 한다. 이철영은 사람과 동물의 기본지성이 모두 선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선한 기본지성이 사람과 동물이 다르고 사람은 모두 같은 이유는, 사람의 정통한 기지본연이 동물의 편색한 기지본연과 같지 않지만 명덕의 본체는 성범이 동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철영은 중저미발과 부중저미발, 단지와 겸지로 삼양성을 말하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의 동이와 선악을 논할 때에 논리적인명확성을 보여준다
4. 호락논쟁의 의의와 영향
인성과 물성의 동이를 논할 때에 이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개념화 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한원진은 성을 삼층으로 나누어 보는 삼분법에 의하여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개념화 했고 그것이 바로 중층의 인기질한 성이었다. 이철영이 비록 기본지성을 사람과 동물의 고유한 본성으로 파악하고 이것은 사람과 동물이 서로 다르다고 하여 결과 적으로 인물성 이론에 서게 하는 것이지만, 이철영의 삼양설은 이간의 동론이나 한원진의 이론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학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라는 문제제기는 또한 『주자언론동이고』라는 한국성리학의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호론의 인수대별론은 화와 이를 준엄하게 구별하는 의리사상으로 연결되며, 이것은 한말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침략에 굳세게 저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296쪽) 도와 기의 관계에 있어서 실천적 가치관의 역전을 초래하였고, 마침내는 북학사상의 정립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말의 개화사상(특히 김옥균 등의 개화파)은 연원적으로 북학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는 한국의 근대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 하였다고 하겠다.
제9장 양명학의 수용과 전개 양상
1. 양명학의 전래와 수용
1)양명학의 사상적 구조
정주학이 당시의 우기를 극복하는데 무력함을 예민하게 느꼈던 사상가가 바로 양명 왕수인(1472~1528)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불만스럽게 여겼던 것은 주자학이 “심과 이를 둘로 나누어 ‘支離’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궁리를 지에 가두고 이것을 행과 분리시켰기 때문에 지리한 폐단을 낳았다는 것이다. 양명학은 심즉리설 치양지설 지행합일설이다. 정덕 3년 귀양살이 중 용장에서 심즉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심즉리’는 심이 이와 합일되는 것이 아니고 심(心)이 이(理)인것이며, ‘심리위일(心理爲一)’은 심과 이가 합일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하나라는 것이다.
2)양명학의 수용과 배척
1521년에 『전습록』의 초간본이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명종대를 지나 선조때에 이르러서는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왕수인의 책을 접하게 되고 큰 거부감 없이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퇴계 이황이 양명학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비판을 가하자 이것이 곧 전체적인 의견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있어서 양명학은 정통사상의 주류에 끼일 수 없었다. 이황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양명학 비판의 선봉에 서자, 양명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조는 “이황의 말에 의혹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그의 문인 및 후학들이 「전습록논변」에 의지하여 양명학을 비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2. 양명학파의 성립과 전개
1)양명학파의 성립
계곡 장유(1587~1638)는 학자들이 양명학을 거의 맹목적으로 배척하여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데 대한 학문의 자율성과 개방성을 요구한 것이다. 조선의 양명학파는 동강 남언경과 이요에게서 그 조짐이 보이지만, 조선 양명학의 선구자격인 지천 최명길(1586~1647)과 장유에 이르도록 학파가 성립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활동하였던 하곡 정제두(1649~1736)와 그 문도들에 의해 학파가 성립되어 가학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정제두는 정주학을 두루 연구하였으나 왕수인과 마찬가지로 주자의 격물치지에 의심을 품었고 이를 양명학을 통해 해결하려하였다.
정제두는 무조건 ‘반주자’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정제두는 ‘마음이 곧 이’라는 입장에서 사물에서 이를 구한 주희의 격물치지론을 비판한 것이다. 참된 것과 망령된 것이 함께 들어있는 생리 가운데서 참된 체를 주로 삼는것, 즉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정제두의 학문 목표였다. 생리 가운데 선한부분인 진리가 바로 명덕이다. 정제두의 이기일원론은 주희의 이기이원론과 다르다. 주희는 인식론적관점에서 심(心)과 물(物)을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방식으로 맞대어 놓았다. 그러나 정제두는 ‘심즉리’, ‘현상즉본체’라는 입장에서 주희의 방식을 거부하였다.
그는 또 양지의 ‘치’가 곧 ‘행’이라고 보고, 이것은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의 일체의 공부와 수양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본체의 양지를 사사물물에서 ‘치’하는 것이 바로 지행합일이다. 반드시 먼저 외물을 격(格)하여 지(知)를 이루고 난 다음에 능히 행동할 수 있다는 주희의 선지후행설과 비교해 볼 때 정제두의 지행설 보다 간이직절한 공부론이라 할 수 있다.
3) 정제두 이후의 양명학자들
덕촌 양득중(1665~1742)은 윤증·박세채·정제두에게 배웠다. 영조로 하여금 ‘실사구시’넉자를 벽에 걸고 늘 바라보도록 청하였다. 홍대용·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거장들도 이용후생을 주장하면서 내면적으로 양명학의 영향에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항재 이광신(1700~1744)은 정제두로 부터 양지학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그는 스승 정제두가 주자학과 양명학 중 어느 한가지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도 도한 주자학과 양명학의 분기점이『대학』의 ‘격물’을 해석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주자학과 양명학의 절충을 시도하였다. 초원 이충익(1744~1816)은 이영익과 (1738~1780)과 양지학을 강론하였다. (313쪽)
영재 이건창(1852~1898)은 고문에 뛰어나 여한십대가의 한 사람으로 「시심당기」에서, “지금의 백성이 옛날의 백성이요, 지금 백성의 마음이 옛날 백성의 마음이다.”고 하여 심의 보편성을 강조하였다. 난곡 이건방(1861~1939)은 이건창과 함께 학문을 탁마하였다. 문인에는 국학의 대가인 정인보가 있다. 사람의 정에 합당하는 것이 진이요, 성현의 도에 합당하다는 것은 인간의 정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성현의 도는 인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대로의 정감이 양지라 보는 양지학의 주장이 그러한 것이다. 이건방은 나의 마음은 곧 성현의 마음이며, 나의 행동은 성현의 행동이다”고 하였다.
정제두 이후 근 1백여년 동안 양명학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백암 박은식(1859~1925)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같은 시대의 다른 애국계몽 사상가들과는 달리, 그는 양명학에 의거한 유교구신을 주장하고 대동사상을 제창하였다. 위당 정인보 양명학과 한문학을 수학하다가 1913년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전공하고 신규식·박은식·신채호·김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 참가하여 독립운동과 동포의 계몽에 힘썼다. 정인보에 의하면 진과 실은 하나로 직결되는 것이었으니, 양명학이 곧 실학으로서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품인 실학과 그 개념상의 차이가 별로 없을 정도로 깊은 유기적 연관을 갖고 있다.
3. 한국 양명학의 특성과 의의
실학파와 개화파의 가교자라 할 수 있는 혜강 최한기(1803~1877)가 양명학을 크게 칭송하고 또 김옥균(1851~1894)·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 인사들의 막후에서 사상적 지도자 역할을 하여‘백의정승'으로 불렸던 대치 유홍기(1831~?)가 양명학과 불교에 심취했던 사실은 간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맥락이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였던 김택영·박은식 등이나, 일제강점기에 국혼을 환기하고자 노력했던 정인보등에 면면히 이어졌다. 조선후기의 권철신·정약종·정하상 등 신서파는 양명학을 통해 천주교와 유교의 조화를 꾀하였다. 양명학은 천주교와 유교의 사상적 교량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토의문제: 조선후기 실학이 등장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성리학·예학의 지루하고 관념적인 밀폐에 있었고, 실학의 형성에 양명학이 끼친 영향이 상당하였다고 한다면, 한국근대사상사에 있어서 양명학의 존재와 위치는 실학파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그 영향이 개화파에게도 이어졌던 것이 아닐련지?
첫댓글 조선시대의 유학적 사상을 인물 중심으로하여 개괄적으로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큰 틀에서의 학파의 흐름과 조선후기, 한국의 근대사상에 미친 영향을 충분히 유추할 수가 있네요. 모처럼 들어와서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