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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황릉(皇陵)은 어디에 있는가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卷之二十九]
値金雞自滅之期,乘丙鹿再興之運,不離鄕井,便作闕庭,定遼浿之驚波,得秦韓之舊地,十有九載,統一寰瀛,可謂功莫高矣 [생략]
이에 금계(金鷄 신라)가 스스로 멸망하는 시기를 만나고 병록(丙鹿 려(麗))이 다시 일어나는 운수를 타서 향리(鄕里 송악(松岳))를 떠나지 않고 문득 그대로 대궐이 되어, 요수ㆍ패수[遼浿]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韓 진한(辰韓))의 옛땅을 얻어서 19년 만에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이보다 높은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략]
요수[遼水) 패수[浿水]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천하[天下]의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룬 고려[高麗] 왕조[王朝] 오백년[五百年]의 역대[歷代] 제왕[帝王]들의 왕릉[王陵]들은, 어디에서 오늘의 한국[韓國]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가 ?
현재[現在]의 개성[開城]에 공민왕[恭愍王]의 능[陵]이 있다고 하였는가 ?
공민왕[恭愍王]이, 원[元]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못잊어, 죽어서도 봉분[封墳]을 나란히 하여 같은 묘역[墓域]에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묻혀 있다고 하였는가 ?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을 속이고 우롱하며, 후세[後世]들에게 역사서[歷史書]와 하등의 관계[關係]가 없는 거짓된 내용을 역사[歷史]라고 가르치는 역사[歷史] 학계[學界]의 행태는,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정신[精神]을 무너트리고, 얼과 혼[魂]을 병들게 하며, 이 나라, 이 땅 위에,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을 뒤흔드는 묵고 할수 없는 일이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보면서 논[論]하기로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공민왕 능(恭愍王陵) 능호는 현릉(玄陵)이다. 노국대장공주 능(魯國大長公主陵) 바로 공민왕의 비(妃)이니, 능호는 정릉(正陵)이다. 공민왕 능과 함께 도성 서쪽 봉명산(鳳鳴山) 속에 있다. [중략]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卷之二十九]
夏四月,作壽陵於正陵之西,以宦者金師幸,董其役,師幸傾巧,影殿正陵之役,逢迎王意,皆極奢麗 [중략]
여름 4월에 수릉(壽陵 왕이 생전에 만들어 두는 자기의 능)을 정릉(正陵)의 서쪽에 만드는데, 환자 김사행(金師幸)에게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사행이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교묘하게 아첨을 잘하여, 영전과 정릉의 역사를 왕의 뜻에 맞추어 모두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였다. [중략]
고려[高麗]의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릉[陵]은, 현재의 개성[開城]에 있는, 공민왕[恭愍王]의 왕릉[王陵]이라고 하는 것처럼, 같은 묘역[墓域]에 합장[合葬] 한 것이 아니다.
수릉[壽陵]을 정릉[正陵]의 서쪽에 만드는데,....................
영전[影殿]과 정릉[正陵]의 역사[役事]를, 왕[王]의 뜻에 맞추어 극도로 화려하게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의 능호[陵號]는 현릉[玄陵]이고,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능호[陵號]는 정릉[正陵]이다.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 자들은, 개성[開城]의 공민왕[恭愍王] 릉[陵]이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릉[陵]과 합장[合葬]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事實]이 아니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들이, 침략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의해서, 멸실[滅失]되고, 편집[編輯] 교감[校勘]되어, 후세[後世]의 사람들이 조선사[朝鮮史]를 보면서 의문[疑問]과 의혹[疑惑]만을 가득안고, 알수 없는 혼란[混亂]스러운 역사서[歷史書]로 변질[變質]되어 있지만, 그 중간에 짧은 기록[記錄]으로 전하는, 내용들을 실, 낫으로 엮어서, 역사서[歷史書]가 가리키는 지역[地域]의 현지 조사[調査]를 통하여 이를 고증[考證]하고, 그 증거[證據]와, 유적[遺跡] 유물[遺物]들을 대입시켜보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의 조작[造作]과, 왜곡[歪曲]의 범위가 그대로 들어나게 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卷之二十九]
庚申,葬玄陵,諡曰敬孝,是日,虹圍日,日傍又有大小二日 [중략]
경신일에 현릉(玄陵)에 장사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올렸다. 이날 무지개가 해를 에워싸고, 해 곁에 또 크고 작은 해 2개가 생겼다. [중략]
고려[高麗]의 공민왕[恭愍王]은 현릉[玄陵]에 모셔졌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정릉[정릉]에 모셔졌으니, 현릉[玄陵]과 정릉[正陵]은, 합장[合葬]되어 있는 왕릉[王陵]이 아니다.
고려[高麗]의 왕릉[王陵]에는, 영전[影殿]이 있었고 재실[齋室]있었다. 한국[韓國]에 있는 고려[高麗]의 왕릉[王陵]에 이러한 건축물과 유적[遺跡] 유물[遺物]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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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의 시에, “정릉에는 세시(歲時)에 거마(車馬)가 많이 오나, 현릉에는 세시에 사람이 아니 오네. 푸르고 푸른 소나무는 두 능(陵)에 둘러 섰는데, 전각(殿角)에 달린 풍금(風琴)에 날리는 눈을 뿌리네. 임금 계실 때 여러 번 노셨던 곳, 사객(詞客)이 시 읊으며 창자가 찢어지려네. 세상을 우습게 보는 중이 빙그레 웃으면서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뜬구름을 가리킨다.
아침에 종을 치고 저녁에 북을 울려 범패(梵唄) 소리 섞였으나, 마침내는 어찌 나를 위해 결정하리. 조정의 벼슬아치 모두 전조(前朝) 사람, 누가 주지(酒池)의 옛 자취를 찾겠는가. 산비탈에 누운 비석 글자를 새겼는데, 깊이 부끄럽다 내 이름이 앞줄에 들어 있네. 옛날 은총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하니, 천지에 내 한 몸이 어찌 이리 외로운가.” 하였다. [중략]
고려[高麗]말, 삼은[三隱]중의 한사람이며, 문신[文臣]이고 학자[學者]였던 목은 이색[牧隱李穡]의 시[詩]를 보더라도, 지금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개성[開城]에 있는 공민왕릉[恭愍王陵]이라고 하는 릉[陵]이, 고려[高麗]의 공민왕릉[恭愍王陵]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
목은[牧隱] 선생의 시[詩]는 사서[史書]의 기록[記錄]과 일치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전에 중국[中國]을 현지 조사[調査]하면서, 소위 중국 측에서 명[明]과 청[淸]의 왕릉[王陵]이라고 하는 것과, 쓸쓸히 버려지고 페허[廢墟]가 되어 있는 인근 주변의 왕릉[王陵]들을 정밀[精密]히 조사[調査]한 적이 있었다.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과, 조선사[朝鮮史]의 대신[大臣]들이 남긴 문집[文集]속에서 드러나는 역사[歷史]의 내용들과, 이들 왕릉[王陵]들의 위치[位置]와, 지형[地形], 지리[地理]가 일치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
역사서[歷史書]의 원전[原典]을 보고, 조선사[朝鮮史]의 그 진위[眞僞]를 가리고, 허[虛]와 실[實]을 판별하여,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의 흐름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역사서[歷史書]가 가리키는 방향[方向]을 따라서, 그 지역[地域]을 현지 조사[調査]하여, 역사서[歷史書]의 허[虛]와 실[實]을 증거[證據]하고 고증[考證]하며, 그에 부합[符合]되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을 찿아서,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실체[實體]를 소멸[消滅] 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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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세조 능(世祖陵) 능호는 창릉(昌陵)이니, 예성강(禮成江) 위 영안성(永安城)에 있다. [중략]
태조 능(太祖陵) 능호는 현릉(顯陵)이니, 송악산 서쪽에 있는 파지동(巴只洞) 남쪽에 있다. [중략]
혜종 능(惠宗陵) 능호는 순릉(順陵)이니, 탄현문(炭峴門) 밖 경덕사(景德寺) 북쪽에 있는데, 속칭 추왕능(皺王陵)이라 한다. 정종 능(定宗陵) 능호는 안능(安陵)이니, 남소문(南小門) 밖에 있다. 광종 능(光宗陵) 능호는 헌능(憲陵)이니, 송악산 북쪽 기슭 적유현(狄踰峴)에 있다. 경종 능(景宗陵) 능호는 영능(榮陵)이니, 진봉산(進鳳山) 밑에 있다.
성종 능(成宗陵) 능호는 강릉(康陵)이니, 남교(南郊)에 있다. 목종 능(穆宗陵) 능호는 의능(義陵)이니, 도성(都城) 동쪽에 있다. 현종 능(顯宗陵) 능호는 선릉(宣陵)이니,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다. 덕종 능(德宗陵) 능호는 숙릉(肅陵)이니, 북교(北郊)에 있다.
정종 능(靖宗陵) 능호는 주릉(周陵)이니, 북교에 있다. 문종 능(文宗陵) 능호는 경능(景陵)이니, 불목사(佛目寺) 남쪽 기슭에 있다. 순종 능(順宗陵) 능호는 성릉(成陵)이니, 진봉산(進鳳山) 남쪽 양양현(壤陽峴)에 있다. 대종 능(戴宗陵) 능호는 태릉(泰陵)이니, 해안사(海安寺) 밑에 있다. 선종 능(宣宗陵) 능호는 인릉(仁陵)이니, 도성 동쪽에 있다.
헌종 능(獻宗陵) 능호는 은릉(隱陵)이니, 도성 동쪽에 있다. 예종 능(睿宗陵) 능호는 유릉(裕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 인종 능(仁宗陵) 능호는 장능(長陵)이니, 도성 서쪽 벽곶동(碧串洞)에 있다.
의종 능(毅宗陵) 의종이 경주(慶州)에서 시해되어 그곳에 임시로 장사지냈는데, 명종(明宗) 4년(1174)에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이의방(李義方)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사하지 아니한 죄를 말하여 밝혔기 때문에 명종 5년에 발상(發喪)하고 도성 동쪽에 옮겨서 장사지냈으니, 능호는 희능(禧陵)이다.
신종 능(神宗陵) 능호는 양릉(陽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 강종 능(康宗陵) 능호는 후릉(厚陵)이다. 원종 능(元宗陵) 능호는 흠능(歆陵)이니, 개성부 북쪽 15리에 있다. 충렬왕 능(忠烈王陵) 능호는 경릉(慶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선왕 능(忠宣王陵) 능호는 덕릉(德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숙왕 능(忠肅王陵) 능호는 의릉(毅陵)이다.
충혜왕 능(忠惠王陵) 4년에 원(元) 나라에서 대경(大卿) 타적(朶赤) 등을 보내 왕을 잡아 가서 게양(揭陽)에 귀양 보냈는데, 도착하기도 전인 다음 해에 악양현(岳陽縣)에서 돌아가니, 그해 6월에 상구가 원 나라로부터 이르러 마침내 이곳에 장사지냈다. 능호는 영릉(永陵)이다. 충목왕 능(忠穆王陵) 능호는 명능(明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정왕 능(忠定王陵) 능호는 총능(聰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 [중략]
고려[高麗]의 수많은 왕릉[王陵]들, 왕도[王都]를 중심으로, 서쪽, 동쪽, 북쪽으로 산재되어 있는 고려[高麗]의 왕릉[王陵], 이러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는 지역[地域]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현재 중국에 이와 같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유서 깊은, 도시가가 있다. 준비가 되는대로 사진을 첨부하여 모두 공개 할것이다.
고려[高麗]의 개성[開城], 고려[高麗]의 신경[神京], 고려[高麗]의 송악[松嶽], 고려[高麗]의 남경[南京], 고려[高麗]의 서경[西京], 고려[高麗]의 요동[遼東]과 압록강[鴨綠江] 등 조선사[朝鮮史]의 핵심 문제들을, 국내에서 역사서[歷史書]만으로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보기 위해서는, 역사서[歷史書]의 원전[原典]이 말하는 지역[地域]을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현지를 정밀[精密]히 조사[調査]하여 증거[證據]을 찾아내어 고증[考證]하고, 그 실체[實體]를 만천하[滿天下]에 밝히는 길밖에 없다.
고려[高麗]의 송악[松嶽]을, 숭산[崇山]이라고 했다고, 지금 숭산[崇山]이 있는 지역[地域]의 인근이, 고려[高麗]의 개성[開城]이라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설이 난무하는가 하면, 현 중국의 지명[地名]을 근거[根據]로 들면서 조선사[朝鮮史]를 맞추려고 하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면들을 지켜 보면서,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반세기에 걸친 교육[敎育]이, 얼마나 뿌리깊이 국가[國家]와 국민[國民]들과, 후세대[後世代]의 정신[精神]을 무너트리고 있는지 실감[實感]하게 되고, 탄식을 금할길이 없게 하고 있다.
많은 분들이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의문[疑問]과, 의혹[疑惑]을 풀고,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실체[實體]를 밝히고자 심혈[心血]을 기울이고 있으나, 확실[確實]한 역사[歷史]의 근본[根本]적인 핵심[核心]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지[論旨]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가 가리키는 지역[地域]은, 최소, 동서 2만리, 남북 2만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광활[廣闊]하고 방대한 면적의 지역[地域]을, 개인이 정밀[精密]히 현지[現地] 조사[調査]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 하겠는가 ?
조선사[朝鮮史]의 의문[疑問]을 풀고, 멸실[滅失]되고,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의 실체[實體]를 밝히고, 피폐[疲弊]된 조선사[朝鮮史]를 바로 세워, 일만년의 위대[偉大]하고, 찬란[燦爛]한 조선사[朝鮮史]의 도도히 흐르는 맥[脈]을 이으려면, 반드시 선행[先行]되어야할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운명[運命]과도 같은 과제이다.
본인이 조선사[朝鮮史]의 영역[領域]을 현지 조사[調査]하여, 근본[根本]이 되는 역사[歷史]의 자료[資料]를 확보 하는데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현실을 바라보며, 답답한 소회[所懷]를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 조상[祖上]님들의 선대[先代]의 일이요,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로서, 이 시대[時代]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또한 후세[後世]들을 위하여,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미래[未來]와 만년대계[萬年大計]를 위하여,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자들이 무너트린 조선사[朝鮮史]를 바로 세워야할 준엄[峻嚴]한 지상 명령과, 천하[天下]의 사명[使命]이, 오늘을 사는 이시대[時代]의 한국[韓國]의 국민[國民]에게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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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선사 말살을 위해 희생된 민중의 한을 풀어 주여야 합니다,계속 수고 하세여.
조선의 남아있는 릉은 경상도 =현 중국 릉 밖에 없습니다.전쟁으로 릉은 다 파헤쳐서 보물은 없고 유적만 남았습니다.현재 유적은 일부 이적하여 반도에 남고,중요한건 권세에 있는 곳에 있습니다.
좋은 내용!
감사하게 봅니다. 사실 조선(통칭)의 학자, 대신들이 쓴 기록물을 보더라도 당시 "조선의 경내"에는 옛 왕릉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 왕릉을 지키는 관리를 임명해 보호했다고 하는데, 지금 반도 땅에는 단 1기의 묘 조차 확실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나, 만약 반도 땅이 "조선"이었다면, 옛 조선으로부터 구한말까지의 왕릉과 공경대신, 이하 사대부들의 묘소때문에 이 반도 땅은 "한 삽의 흙도 마음대로 뜰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많은 유적유물에 마음대로 땅속을 헤집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 1 개의 유물유적도, 근거를 갖은 곳이 없다는 것은 사학(死學)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현재있는 능도 지나역사 중심으로 조작하고 있는데 과연 알고 있다는 능침들의 진실성을 담보 할 수 있을까요? 능이란 릉은 이미 다 발굴을 해서 유물과 유적을 남김없이 회수했는데요. 제가 알고 있기로 누 천년에 걸친 역사에서 한 왕조가 종말을 고하면 그 왕조의 릉은 관리나 군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간인에 의해서 도굴되고 파혜쳐졌다고 합니다. 물론 그전에 전문 도굴꾼들이 작업을 한뒤겠지만,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돈이되는 물건은 부잣집이나 또는 왕가의 무덤을 도굴하면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구한말에도 여러 군벌들이 도굴을 했다 들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어떤 왕조의 황릉이 올곧게 남아있을까요?
대륙은 "문화대혁명"때, 수많은 고대의 유물유적들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왕릉에 대한 것는 사서에 기록된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현재의 대륙 형편은, 발굴을 한 후 그 내용은 수년 후에 공개를 하는데, 공개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다고 하며, 발굴과정에서 다시 묻어버리는 경우도 허다 하다고 합니다.
앞으로 어떤 기회가, 어떤 세상이 펼쳐질 지는 모르나, 대륙의 유물유적의 진실이 공개될 때, 세계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