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紀 147. 6. 2(금). 세계환단학회 춘계 학술대회, 연세대학교
2천 년 동방 문명의 진정한 주인공 단군조선의 역사문화의 원형 정신을 찾는 「신지비사神誌祕詞」 즉 「서효사誓效詞」라는 짧은 제천문祭天文 양식의 역사서를 통해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신 역사정신과 국가 통치방식, 정치문화, 그리고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서 삼한三韓으로 다스린 이유와 정치철학 등의 문제를 살펴 보자.
오늘의 주제는 3가지로 첫째로 단군조선은 삼한三韓이었다. 둘째로 단군조선 역사문화를 찾는 열쇠가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것을 「서효사」 를 통해 알아보고, 셋째로 단군조선은 동방 천자문화(天子文化)의 고향이었다.
천자(天子)란 무엇인가? 천자의 상징물 용(龍)과 봉(鳳)
천자는 ‘천제지자(天帝之子)’의 약자로 ‘하나님의 아들’, ‘우주의 주재자이자 천상의 통치자[天帝]이신 상제님의 아들’을 칭하는 말이다. 예로부터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천자국이라 불러왔다.
고구려의 창업 시조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엄리대수淹利大水(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앞은 강물에 막히고, 뒤에서는 동부여의 군사들이 쫓아오는 절박한 상황이다.
이 때 주몽이 강의 수신水神에게 이렇게 외친다.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나는 하늘 하나님, 상제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라는 말이다.
‘천제지자’, 즉 ‘천제의 아들’이라는 말을 줄여서 ‘천자’라고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신의 아들(Son of God)’이라고 하는데, 이 ‘하나님의 아들’ 문화가 기독교에도 있다.
그들은 수도 없이 ‘주님’을 찾다가 천상으로 올라간다. ‘주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주님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주主 사상, 그 문화의 원 뿌리가 동방 조선의 천자사상이다.
또 신교神敎를 신앙했던 동방문화에서 천자(天子)는 ‘국가의 통치자’를 의미했다. 천자는 인간세계를 대표하여 하늘(상제님)에 제사를 올렸다.
우리나라가 천자국(天子國)임을 입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주변의 제후들이 천자天子에게 예를 올린 사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 요임금으로부터 정통을 물려받은 순임금 태산에 올라 하나님(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동방의 천자(天子)’를 찾아가 조근朝覲하는 예를 올렸다.
이 내용이 『서경』에 “동순망질(東巡望秩) 사근동후(肆覲 東后)”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순망질(東巡望秩), 동쪽으로 순행하여 산천에 제를 지내고, 사근동후(肆覲東后), 동방의 임금님을 알현했다.
‘사근동후’에서 ‘근覲’은 『강희자전』에 ‘하현 상(下見上)’,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뵙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근친(覲親) 가다, 조근(朝覲)한다고 할 때의 근覲자로 ‘제후(諸侯)가 천자(天子)를 뵙는다’는 뜻이다. 왜 순임금은 하나님께 제를 올리고 나서 동방의 천자를 찾아뵈었을까?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동방 고대문화와 역사의 비밀이 다 들어있다. 순은 “제가 이제 천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하고 천지의 주인 이신 하나님(상제님)께 고하고 나서, 자기들을 다스리시는 동방의 천자님을 찾아 뵙고 예를 올린 것이다.
여기서 순임금이 알현한 ‘동후東后’는 단군성조님을 말한다. 사근동후(肆覲東后)란 고조선의 제후(諸侯) 순이 동방의 천자인 단군왕검을 찾아뵈었다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후(后)’ 자를 제후 후(侯) 자로 해석을 하여 ‘가서 동방제후를 만났다’고 왜곡해 놓았다. 그러나 분명히 제후 후(侯)자가 아니고 임금 님 후(后) 자가 아닌가. 그러면 조선의 천자문화가 어떻게 중국으로 넘어갔을까?
앞의 기록으로 보면 순임금은 동방 천자로부터 임명받은, 천자의 영향력 하에 살던 제후였다. 그런데 4,300년 전인 고조선 초기, 요임금 말엽 부터 순임금 때까지 동북아 지역에 9년 홍수가 일어나 중국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다.
이때 요임금이 치수관(治水官)인 곤(鯀)에게 물을 다스리라고 하였으나 곤鯀은 실패했다. 곤鯀은 훗날 하夏나라를 연 우禹임금의 아버지다.
옛날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나 치수(治水)하는 일 등을 가가계승했다. 그래서 우禹가 아버지를 이어 치수를 맡았으나 방법이 없다. 그래서 완위산宛委山(회계산)에 가서 부루 태자를 만나게 된다. 그 때 단군성조의 맏아들 부루 태자夫婁太子(2세 단군)는 단군성조의 명을 받고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이 담긴 《금간옥첩金間玉牒》을 우禹에게 전수해 주었다. 이 내용이 『환단고기』와 후한後漢시대의 조엽趙曄이 쓴 사서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나온다.
우禹는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9년 홍수를 다스리는데 성공한다. 그 공덕으로 민심을 얻은 우禹는 후에 하夏나라를 열었다. 하나라는 순임금으로부터 법통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시 우禹에게 전한 《금간옥첩》 속에는 치수의 요결뿐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천자의 도道와 동방 고조선의 정치제도, 문화가 수록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국가 경영 지침서를 내려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도, 〈홍범구주洪範九疇〉다. 이를 줄여서 ‘범주’라고 한다. 영어 카테고리category의 번역어 어원이 바로 4,300년 전 〈홍범구주〉다.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조술요순(祖述堯舜)하시고 헌장문무(憲章文武)하시니라’(「중용中庸」 30章).
즉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상, 법통을 근본으로 하고 문왕과 무왕의 국가통치 제도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이 요순임금의 국가 경영 지침서, 그것이 바로 부루 태자가 전한 홍범구주인 것이다. 홍범구주의 다섯 번째가 황극皇極사상이다. 황극에 대해 주자는 “황극은 천자의 보위寶位다.”라고 정의했다.
황극은 나라의 임금님이다. 하늘도 땅도 인간도 전부 임금님이 주인이다. 그만큼 천자의 자리가 지엄하기 때문에, 천자의 역할, 천자의 영향력이 너무도 엄청나서 ‘천하에 미친다’고 했다. 또한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황극은 천하지중天下之中이다’라고 했다.
바로 이 황극으로부터 천자 사상이 나온 것이다. 천자제도의 기틀, 동양문화의 근본정신이 담겨있는 《금간옥첩》이 중국에 전해짐으로써 동방 고조선의 천자문화가 본격적으로 중국 문화의 토양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계기가 된 역사적인 대사건, 세기적인 대사건이 바로 9년 홍수다.
이후 전국戰國(전국시대 BCE 403~BCE 221)을 통일한 진秦왕 정政은 스스로 천자국을 자처하며 자신을 시황[秦始皇]이라고 칭했다. 진시황 이전의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다 왕이었다. 흔히 성왕이라 하는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도 다 왕이었다. 고대 중국을 천자국으로 묘사한 것은 모두 한漢 대 이후 중국 사가들에 의한 조작이며 윤색인 것이다.
중국 산동성 태산 입구에 ‘紫氣東來’라는 네 글자가 걸려있다. “자기동래”의 ‘자줏빛 자紫’는 천자天子의 별인 자미원의 紫자로 천자를 상징한다. 즉 자기동래(紫氣東來)는 ‘천자문화의 기운이 동방에서 왔다’는 뜻으로
중국 천자문화의 출원이 동방 한민족임을 그들 스스로 밝힌 것이다. 이 네 글자는 한민족의 역사를 되찾아 주는 천하의 명구다. 자기동래(紫氣東來) 현판은 심양의 고궁인 봉황루, 서태후 때 재건된 이화원 등에도 있다.
중국 후한시대 채옹(蔡邕)은 『독단獨斷』에서 천자제도의 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天子 東夷之所稱 父天母地故 稱天子) 천자제도가 동방족 문화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환국·배달·조선(고조선,단군조선) 문화는 인류의 황금시절, 역사문화의 근원이요, 인류의 문화 창조의 원형사상이다. 오늘의 주제는 ‘단군조선은 삼한三韓’이라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핵심인 삼한이란 북쪽에 있었던 진한, 한반도에 있었던 마한, 요서지역에 있었던 번한이다. 그런데 강단사학자들은 이 삼한 문화, 북삼한北三韓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강 이남의 남삼한南三韓만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역사교과서 왜곡, 역사 왜곡의 근본 주제다.
이 삼한의 역사정신의 핵심은 바로 우주 원형사상 삼신관三神觀에서 나왔다.
단군조선의 역사 창업의 원리는 「천부경」이 담고 있는 우주 원형사상에서 온 것이다. 모든 건 ‘하나’에서 나왔는데, 그 하나는 이 우주의 현상계에 펼쳐질 때 셋으로 작용을 한다. 이런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동방 문화역사의 해체 과정이라 할 수 있는, 배달국이 망하는 과정에서 신인神人 단군왕검이 조선(단군조선,고조선)을 삼한으로 나누어서 다스리게 된 것이다.
역사를 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동방의 치우蚩尤 천황과 중국의 역사 시조 황제헌원이 탁록에서 벌인 동북아의 제1차 역사 대전쟁에서 황제헌원이 무릎을 꿇었는데, 이 전쟁의 갈등이 강하게 지속되어서 황제헌원의 5세손인 요堯임금 때 중화 중심의 정권이 뿌리 내리려는 것을 동방의 단군 개국조 단군왕검이 친 것이 요임금과 사이의 제2차 역사 대전쟁이다. 그 역사전쟁의 중심에 9년 홍수가 있다.
동북아 역사에서 4천3백 년 전에 일어난 9년 홍수 사건으로 중국의 서방 정권이 완전 붕괴해서 패망당할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에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이 아들 부루 태자를 보내 오행치수법과 「홍범구주」를 전해 9년 홍수를 다스리게 해 주신 것이다. 이 홍수 사건을 계기로 해서 중국 3대 왕조의 첫 나라, 하夏나라가 건국되었다.
하夏 왕조 탄생의 배경은, 바로 단군왕검이 9년 홍수를 다스리는 비방을 전해 준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근원은 동이다. 중국은 동이문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무엇이 잘못되어 우리 역사문화의 근본을 잃어버렸는지, 우리 역사문화의 근원을 온전히 바로 세우기 위해서 해야 할 선행작업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신지비사神誌祕詞」 즉 「서효사誓效詞」는 정말로 자랑스러운 아주 짧은 제천문祭天文 양식의 역사서다. 이 속에 들어있는 깊고 깊은 뜻, 사상을 살펴보면,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신 역사정신과 국가 통치방식, 정치문화, 그리고 왜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서 삼한으로 다스렸으며 그 속에 어떤 정치철학이 있는지 이런 문제를 정리해 본다.
오늘 우리 한국인은 진정한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우리는 무엇으로 진정한 한국인의 참모습을 찾아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대한(大韓)의 참뜻은 무엇인가? 분단 역사의 첫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그 해답을 단군조선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단군조선의 건국자 단군왕검檀君王儉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조선을 개국했는가? 단군조선의 역사문화 정신의 핵심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단군조선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제가 한국 역사문화 정신의 뿌리를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인은 문화정신의 원형을 다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일제가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맺을 때 그 1조에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 했다. 그동안 조선이 중국을 큰집으로 받들어 왔지만 이제 일본이 그 상대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개항 이후에 일본제국은 조선인을 8백만 이상 무참하게 살해하고 역사의 근원을 말살했다. 그 역사 말살의 회심작이 무엇인가?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기에 나오는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조작하면서 환국과 배달, 조선은 건국사가 아니라 신화 인물사가 되었다. 그것은 실로 한국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서 한국 역사의 뿌리를 제거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보다 더 예리하고 강력한 근원적인 역사 말살은 있을 수가 없다.
일제가 한국 문화역사의 원천적 지혜, 원형사상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서, 조선 역사를 말살하여 그들 입맛에 맞게 중국과 일본 식민지 역사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꼼수를 썼다. 이제 그 핵심 내용이 거반 다 밝혀졌지만, 그러나 이 땅의 강단사학자들, 아카데미 사학자들이 오히려 일제 침략 식민사관을 공고히 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한국사의 원형문화를 복원하는 역사 경전이다.
우리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왜 제대로 읽어야 하는가?
『환단고기』는 한국사의 문화 원형정신을 기록한 역사 경전이다. 이 『환단고기』를 제대로 보려면 반드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주관과, 우주관을 기초로 한 신관神觀이다. 그 신관은 기독교처럼 유일신관唯一神觀이 아니라 삼신관三神觀인데, 서양의 삼위일체 신관과는 근본이 다르다.
그러면 삼신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만주를 가보면, 그 현장에서 정말로 놀라운 이 삼신문화에 감동과 충격을 받는다. 실제로 중국 홍산문화 유적지 주변이라든지, 산동성, 강소성·절강성, 심지어 저 남부 광동성에 이르는 중국의 중부, 서부 지역까지, 또 중국을 넘어, 티베트를 넘어, 중동, 유럽, 아프리카까지, 저 중앙아메리카 마야 문명까지 『환단고기』 문화가 꽉 들어차 있다. 『환단고기』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 역사를 찾으려면 지구촌의 역사현장을 많이 다녀봐야 된다는 것을 절감한다.
다섯 권으로 되어 있는 『환단고기』는 당대 최고의 지성 다섯 분이 명문장으로 한국 창세 시원문화 정신을 기록한 책이다. 『삼성기三聖紀』 상편을 쓴 안함로安含老(579~640)는 신라 때 수나라에 유학했고, 선덕여왕 때 왕실 고문 역할을 하면서 황룡사 9층탑도 짓게 했다.
안함로는 환국과 배달과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아주 간명하게 썼지만 그 내용에는 심원한 우주사상, 신관, 인간관이 함축되어 있다. 또 환국·배달·조선·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전해진 국통도 잡아주고 있다. 『삼성기』 하편은 조선조 태종 이방원의 스승 되는 원천석元天錫(1330~?) 즉 원동중元董仲이 썼다.
원동중의 스승은, 47대 단군의 역사를 정리한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의 아우 이교李嶠다. 행촌 이암의 손자 이원李原은 세종대왕의 스승으로서 우의정을 지냈다. 그래서 고성固城 이씨 인물들이 『환단고기』의 한 80%를 기록한 것이다.
단군조선 다음에 북부여 역사를 정리한 『북부여기北夫餘紀』를 쓴 사람은 원동중과 친구 사이였던 범세동范世東(?~?)이다. 다음으로 행촌 이암의 5세손 되는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1455~1528)이라는 분이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썼다. 이분은 연산군 때 충청도 괴산槐山에 귀양을 갔다가 거기서 역사 정리에 대한 자신감을 준 인물들을 만났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 조정으로 들어와서 왕의 역사를 기록하는 찬수관이 되었다.
이 분이 궁중에 있는 우리 역사 비밀문서들을 다 정리를 하고, 『태백일사』 여덟 권을 쓸 때 ‘우리 할아버지 행촌 이암은 도통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을 읽어보면 아는 것이다.
『단군세기』 서문을 제대로, 우주관과 신관에 근거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진리의 원형정신의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학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하여간 ‘일십당 이맥은 자신의 할아버지는 우리 역사문화 원형정신의 근본을 통한 일인자一人者’라는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그 금서(禁書)를 깊은 밤에 가슴에 품고, ‘숨겨놓을 수밖에 없는 책, 일사逸史’를 하늘의 정신으로 정리한 것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첫 문장을 보면,
‘태백산太白山이 북주北走하야 흘흘연屹屹然 입어비서갑지경立於斐西岬之境하야’,
백두산이 북쪽으로 달려가 우뚝 솟은 장엄한 모습으로 비서갑 경계에 서 있고,
‘우회언지처又回焉之處하니’, ‘대일왕제천지소大日王祭天之所’,
물길이 잡아 돌았는데 그곳이 대일왕이 천제를 지낸 곳이라고 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밝혀졌다. 그 비서갑斐西岬은 어디인가?
단군왕검의 어머니, 그리고 환웅천황의 황비가 속했던 웅씨熊氏 족속은 어디서 살았는가? 그곳이 역사의 자궁인데, 한민족 동방 6천 년 역사의 성지인데 그 성지가 어디인가?
우리가 만주 벌판과 중국 천하를 헤매면서, 또 정반대 쪽 유럽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박물관을 더듬으면서 영국, 불란서, 독일, 중동, 이집트 곳곳을 다니면서도 그 원형정신은 이 만주의 알 수 없는 역사 속에 잠겨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너무 경계해서 도대체 접근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최근에 시진핑 정권은 한 수 더 떠서 외국인은 3성급 이상 호텔에 투숙하게 하고 그 여권을 복사해서 정보부에다 넘긴다.
외래종교에 빠지거나 노예정신으로 살면 이렇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학계에는 단군조선의 머리가 없다. 시조, 건국자는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신화 인물로 싹 부정해 버린다. 그 과정에 역사가 아무것도 없다. 마지막 준왕準王이 연燕나라 장수 위만衛滿에게 패해서 왕검성에서 도망하여 저 군산群山 쪽으로 들어왔다는 내용만 있다. 그래서 유령의 역사, 역사의 혼백이 없는 무정신의 역사를 만들었다.
단군조선의 6세 달문達門 단군 때 역사를 기록하고 왕명을 받드는, 신교문화의 역사정신을 기록하는 사관인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왕명을 받들어서 천지에 올리는 제천문(祭天文)을 썼다. 그때 동방의 왕들이 다 상춘常春에 모여서 제천행사를 가졌다. 그 원본 「서효사誓效詞」, 천지에 맹세하며 올린 글을 제대로 들여다본다면 단군조선은 어떤 방식으로 국가가 건설되고 경영이 됐는지, 그 역사의 대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내몽골에서 볼 수 있는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나온 4,100년 전, 그러니까 6세 단군 달문 때 유물 채색 토기를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신성하고, 신비로운가? 기하학적 무늬는 음양론 언어로 순順과 역逆이다. 채색토기는 단군조선 초기의 문화 수준을 알 수가 있다.
우선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시 「님의 침묵」을 읊으면서 그 심정을 느껴볼 필요가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중략)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본래 이 ‘님’이라는 말은, 환인桓仁의 ‘인仁’에서 왔다. 그래서 9천 년 전 천산天山 동방, 환국의 통치자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오직 하나의 근본을 우주광명 환桓에 두었다.
국가나 사회나 한 개인이나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떠나서 영원한 삶의 근본 주제는 무엇인가? 이 우주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글자 밝을 환桓, 우주광명 환桓이다. 이 우주광명 환桓을 체험할 때, 우주광명 자체가 되어서 그 인간으로 살아갈 때 인간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환국의 통치자가 환인(桓仁)이고, 광명의 인간들을 인도하고 사회를 다스리는 그 마음이 인仁이다. 이것은 천지의 도덕, 그 마음을 말한다. 천지의 모든 도덕 가치가 이 한 글자에 있다. 「서효사」에 보면 ‘일심존인효(一心存仁孝)하시니’, 오직 한마음으로 그 인仁과 효孝를 가슴에 품고 살았기에 ‘사해진광명四海盡光明이로다’, 온 천지가 우주광명, 환인·환웅·단군 그분들의 삼신의 우주광명으로 천하가 충만하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바로 이 환인桓仁의 인仁사상이 천산 산맥을 타고, 기독교 문화의 근원이 되는 이라크 남부 수메르 문명 쪽으로 들어갔다. 그쪽에서는 통치자를 인En이라 불렀다. 기독교 신약에 나오는 ‘마이 로드My Lord’(나의 주님)라는 말은 환인의 인仁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인仁이 바로 후대에 와서 님이 된 것이다. 한 국가의 님일 때는 임금이라 한다.
임금은 원래 ‘왕검王儉’에서 왔다. ‘검儉’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의 자궁이라 할 수 있다. 검족(儉族)은 신성을 상징하는 종족이고, 동물 토템으로 말하면 곰이다. 왕검은 왕으로서 아주 신성한 분인데 이 말이 임금이 되었다.
고을마다 왕검이 있었는데 여러 왕검 가운데서 이 우주광명 자체가 된 천지와 같은 인물이 단군조선의 건국자 신인왕검神人王儉이다. 그리고 주상 또는 상감이나, 대감이라는 말도 전부 왕검문화와 연관이 있다. 그 근원인 님이라는 말은, 바로 이 대우주 광명 인간이 된 진정한 인류 역사문화의 근원, 통치자 아버지 환인桓仁에서 왔다.
그런데 환국이, 문화의 근원이 부정되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계는 환국을 무조건, 생각할 여지도 없이 부정하고 있다. 단군조선이 부정되기 때문에 환국, 배달은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부정하는 것이다.
환국·배달·조선 문화는 인류의 황금시절, 역사문화의 근원이요, 인류의 문화역사 창조의 원형사상이다. 우리가 지구촌 다니면서, 특히 동북아시아 여러 현장의 유물을 보면서 단군조선 역사를, 우리의 ‘역사의 님’을 찾아보자.
동서 문명을 보면 서양문명도 기독교를 빼면 가볼 데가 없다. 그런데 가끔 스코틀랜드라든지 여러 곳을 가보면 5천 년, 6천 년 전의 원형原型 제단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놀랍죠? 지구를 다녀보면 우리가 무엇을 공감하느냐? ‘동서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원형 역사문화의 정신에서 보면 수천 년에 걸쳐서 오고갔기 때문에, 옛날에 비행기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갈 수가 있었단 말인가 하고 따질 필요가 없다. 동방의 문화가 서방에 가 있고, 서방의 문화가 동방에 와 있다.
‘단군조선은 삼한(三韓)’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유교, 또는 불교, 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동양문화를 알 수가 없다. 중동문화에도 이슬람 문화라든지 신비주의가 있고, 유대교도 본래 하시디즘Hasidism이라는 신비주의가 있고, 또 인디언 문화에도 나름대로 높은 영성문화가 있다. 마야 문명에서는 심장을 칼로 뽑아내어서 제단에 올렸다고 하지만, 가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깊고 깊은 동방문화의 원형이 그대로 그들의 피라미드 안에 살아있다.
이 동방 신교문화를 알 때, 그 후에 동방에서 탄생한 유·불·선과 서양의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다.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자랑스러운 세계 종교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는가?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문화의 배경이 무엇이며, 불교의 역사문화의 배경이 무엇인가?
인도네시아를 가보면 엄청난 도깨비가 있다. 왜 힌두교 사당에 그렇게 도깨비 원형이 많은가? 그 도깨비 문화는 어디서 왔는가? 최근에 〈도깨비〉라는 드라마가 유명했는데, 이 도깨비를 가르쳐 주는 문화 원전이 바로 동학, 참동학 증산도에 있다. 우리 한문화에 있다. 그러나 도깨비의 역할이 뭔지, 도깨비신이란 어떤 신인지, 실제 있는 것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핵심은 삼한(三韓)이다. 우선 이 삼한의 한韓이란 무엇인가?
한韓에는 ‘왕, 하나, 크다, 중심이다, 밝다’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왕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마지막 왕조 조선왕조에서 이 「신지비사」를 불태우고 나서, 왕으로 낮추어 불렀지, 그 이전 고려까지는 천자(天子)였다.
그러면 삼한三韓이란 무엇인가?
진한(辰韓)은 북쪽에 있었고, 마한(馬韓)은 한반도에 있었다. 그리고 저쪽 요서지역은 번한(番韓)이었다. 지금의 북경 위에 있는 난하灤河, 그 왼쪽과 아래쪽이 요서遼西 지역이다. 산동성까지는 단군조 이전 배달국 때도 우리 땅이었다. 중국 즉 서방에 유·불·선·기독교 이전의 신교(神敎), 인류 창세문화를 전해 준 일종의 교육장, 연수원, 훈련소라 할 수 있는 문화의 전당들이 산동성을 중심으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강단사학자들은 이 삼한 문화, 북삼한北三韓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강 이남의 남삼한南三韓만 이야기하고 있다. 신라 이전의 진한, 가야 이전의 번한, 그리고 백제 이전의 마한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들은 어디서 왔는가?
이병도李丙燾 박사는 경기도에다가 진국辰國이라는 걸 설정해 놓고 여기에서 기운을 받아가지고 삼한이 떨어져 나왔다고 했다. 진국이 남삼한의 자궁이라는 것이다. 진국이 한 4백 년 그런 모체 역할을 했는데, 그것이 ‘원삼국原三國’이라는 것이다. 이건 없는 역사를 만든 것이다.
본래 단군조선 초기 4,300여 년 전에 전체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셋으로 나누어서 다스렸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삼한三韓의 역사 문화정신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왜곡된 역사교과서다. 그리하여 첫째로, 단군조선 시조를 부정한다.
그리고 마흔일곱 분 단군이 다스린 과정, 2천 년 역사가 없다. 중국과의 대외교섭사, 외교사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연燕나라 장수였던 위만衛滿이, 왕검성에 있던 번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準王에게 망명을 요청했다. 한漢나라에서 공신 숙청이 벌어져서 위만의 상관 노관盧綰은 흉노로 도망가고, 위만은 조선옷 입고 상투를 틀고 왔던 것이다.
당시 만주에서는 단군조선의 본조本朝가 망하고 북부여가 들어섰는데, 해모수解慕漱가 ‘위만, 그놈을 받아주면 너는 반드시 배반당한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해모수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준왕은 해모수의 경계의 말을 듣지 않고, 위만의 망명을 받아주어 상하운장上下雲障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장을 맡겼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위만이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단숨에 내리치자, 준왕은 옷이나 제대로 입고 도망갔는지, 발해로 해서 전라도 금강 유역, 군산으로 들어왔는데 거기에 어래산御來山이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준왕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히려 번조선을 강탈한 위만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한다.
위만조선이 정통 왕조가 된 것이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에 대해서는 아예 개념도 없고, 북부여 역사는 실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부여 182년 역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한고조 유방劉邦의 7세손으로 중국 5천년사에서 가장 강력한, 당태종과 비견되는 위대한 제왕이라는 무제武帝가 쳐들어와서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식민사학, 실제적인 망국사관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그런데 식민사학, 실제적인 망국사관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준왕이 쫓겨난 왕검성王儉城이나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는 낙랑군樂浪郡이 한반도 평양 대동강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다. 북삼한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신학(神學)을 근거로 한 삼한관경三韓管境의 국가 경영 방식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일제가 그려놓은 식민지 사학의 덫에 걸려서 오히려 그것을 변호하고 있다.
오늘의 강단사학은 식민사학의 대변자, 나팔수, 명증자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침묵을 지킬 것이 아니라 이 식민 역사의 질곡을 다 함께 종식시켜야 한다.
그러면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은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왕이 셋이다.’ 이렇게 정의를 했다. 18세기에 천문, 지리, 인사 등 여러 분야를 공부한 박식가博識家로서 백과사전을 편찬한 이규경李圭景(1788~1856)이라는 분은, ‘삼한은 우리 동방 조선에서 왔다. 요동을 삼한이라 했다’고 이야기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한韓‘이라는 것은 왕이 셋이라’는 것이다. 진한에 대왕이 있었고, 번한과 마한에는 대왕을 보필하는 부왕이 있었다’고 했다. 정인보鄭寅普 선생 또한 신채호 선생의 견해와 같았다. 그리고 연세대 교수로 계셨던 의학박사이자 문학박사인 최동崔棟(1896∼1973)이라는 분이 30년을 공부했는데, 이분의 지식이 대단하다.
지금 갈석산碣石山, 산해관山海關 부근에서 만리장성이 시작하는데 그곳에 있었던 조선은 번조선이라 했다. 또 ‘진한辰韓의 대단군은 총왕總王이다. 그리고 진국辰國은 삼한의 총왕국總王國이다’라는 술어를 썼다.
그러면 중국의 역사서나 고전에서는 우리 단군조선을 뭐라고 불렀는가?
관자管子는 지금부터 한 2,700년 전 사람이고 『관자』라는 책은 후대에 쓰여졌다고 하는데, 발조선發朝鮮이라고 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나눈 대화를 보면 발조선이 나온다.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이 쓴 논문을 보면, ‘발’이라는 나라와 ‘조선’이라는 나라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보면 ‘발’로 말한 것도 있다. 우리가 삼한역사관의 어떤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도 발조선은 밝은 조선, 밝조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22세 색불루索弗婁 단군 때, 단군조선을 세운 지 1,048년을 지나 단군조선 후기에 와서, 본래의 삼한을 삼조선 체제로 전환하게 됐다. 그때는 번조선과 밝조선은 중국어 발음이 거의 비슷해서 음동音同, 음편音便 현상으로, 역사 왜곡을 겸해서 아마 의도적으로 발조선으로 써놓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중국 사서에서는 우리 단군조선을 발조선發朝鮮, 발식신發息愼, 숙신肅愼이라 기록했고, 또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을 보면 진번조선眞番朝鮮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예맥濊貊이라는 말로도 부른다. 단군조선을 정식으로 제대로 부르지 않고 이렇게 꼼수를 부린 것은 바로 동서방 역사전쟁에서 패배당한 수치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지금 강단사학에서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인의 원 조상을,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을 통합해서 예맥족이라 하고, 그것을 나라이름으로도 말한다.
지금 춘천春川에 가보면 맥국貊國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본래 예와 맥이라는 것은 글자 원형이 왜곡된 것이다. 이 예濊는 더러울 예 자다.
예는 본래 새롭다는 세歲 자인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이 세 자에다가 삼수변을 덧붙여서 비하하는 호칭으로 썼다. 맥도 흰 백白 자 또는 일백 백百 자에다가, 치豸라는 부수를 넣어서 사나운 짐승 맥貊이 됐다.
그러면 우리 조상이 더러운 조상, 짐승 같은 조상인가?
예와 맥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우리 조상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맥은 본래는 밝다는 것이므로, 밝족이다. 그런데 중국 근대 역사의 사대학자 중 한 사람인 유절劉節은 뭐라고 했는가?
‘동이족東夷族이나 하화족夏華族이나 그 근원은 맥, 맥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맥이 무엇인가?
맥이 바로 배달, 밝족이다. 광명족이다. 우주광명을 사모하고 그 신성한 광명과 하나 되기 위해서 사는, 동방의 광명문화의 원형을 가지고 있는 선주민先住民이다. 물론 환국에서 이주해 왔지만, 동방 역사문화를 개창한 원 주인이 되는 그들이 바로 배달족이고, 밝달족이고, 광명족이다. 그 예맥의 원형은 여럿이 될 수가 없다.
우리 역사를 말하다 보면 예, 맥, 예맥, 환국·배달에서 말하는 배달 천손족, 단군조선의 조선족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일산일수위국一山一水爲國’, 물 하나 산 하나 끼면 하나의 나라였다 했고 거기에 지도자 왕검이 있었으니까, 단군조선도 다민족 유목국가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그 문화정신, 역사를 경영하는 기본은 바로 천지의 광명을 숭상하고 광명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천부경天符經」, 배달국의 「삼일신고三一神誥」 이후 문화 원전을 공부하고 체험하는, 득도하는 인간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단군조선의 핵심은 삼한관경제이다.
삼왕조 시대의 지도를 보면 진한은 그 수도가 송화강松花江 아사달인데 지금의 하얼빈이다. 하얼빈은 원래 우리말의 ‘하늘’이 변한 것으로, 중국 사람들이 그렇게 음사音寫했을 것이다.
하얼빈은 여덟 가지 유래가 있는데, ‘새’로도 말하고, 만주어, 여진어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광명문화의 어떤 큰 틀에서 볼 때 하얼빈은 바로 하늘가, 하늘 평원, 하늘 뜰, 천평天坪과 같은 뜻이 아닌가 하고 추정을 한다. 이 송화강 아사달을 근본으로 해서 진한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서효사」를 지어 올린 제천단이 있는 상춘常春, 지금은 장춘長春이라 하고, 중국 사람들은 짱춘이라 하는데 여기서 제2 왕조 시대가 열렸다. 그 다음에 단군조선의 삼한체제가 실제로 붕괴된 44세 구물丘勿 단군 때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개원開原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었다.
이 대부여에 부여 역사의 근원이 있다. 그래서 제1 왕조 아사달 1,048년, 제2 왕조 상춘 860년, 그리고 제3 왕조 대부여시대 188년이 이어진다.
그래서 단군조선 역사가 2천 년이 넘는다. 이 제3 왕조 시대를 지나면 과도기 열국시대, 여러 나라 시대로 들어간다. 중국으로 말하면 전국시대와도 같다.
로마 역사가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늑대 젖을 먹고 컸다는 형제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로물루스는 돌궐족이라고도 한다.
로마는 동로마가 패망할 때까지 2천 년의 역사다. 이집트도 제1 왕조로부터 쭉 내려오면 한 2천 년이다. 우리 신라는 천년사다.
우리가 배운 고구려는 7백 년인데, 최치원崔致遠이 중국 유학을 가보니까 9백 년 왕조라 했다. 북부여 역사 182년에, 원 고구려 역사를 덧붙여서 9백 년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단군조선 2천 년 역사를 못 믿을 것도 없다. 우리가 삼한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면, 삼한 역사의 세계관, 인간관, 신관, 우주관을 납득하면 단군조선 왕도국가의 문화정신의 성립 배경을 제대로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여기서 정리하고 싶은 것은, 이 삼한의 역사정신의 핵심이 바로 우주 원형사상 삼신관三神觀에서 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삼한은 삼신관에서 왔다. 지금 기독교 신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 사상의 원형이 삼신일체三神一體, 삼신은 하나라는 것이다. 신이 셋으로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 삼신일체 사상을 알아야, 삼한은 하나요 한 나라라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된다. 삼한일통三韓一統, 삼한일가三韓一家라는 이 문제를 이해하게 된다.
단군조선 창업은 「천부경」의 원형사상에서
단군조선 창업은 「천부경」의 원형사상에서
「천부경」은 동서 철학, 종교사상의 원형이다. 「천부경」은 오늘날 0과 1을 근본으로 하는 컴퓨터 문화의 근원이다. 그래서 이 「천부경」은 늘 아주 머릿속에 입력이 돼서 컴퓨터 이상으로 돌아가야 된다.
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櫃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運三四 成環五七
一玅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 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모든 건 ‘하나’에서 나왔는데, 하나는 이 우주의 현상계에 펼쳐질 때 셋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우주의 신이 됐든, 우주의 조화 생명계가 됐든, 인간의 근본 마음자리가 됐든, 그 하나는 셋으로 작용을 한다. 한 손가락이 세 마디로 작용하듯, 일 년이라는 시간은 봄, 여름, 가을 셋으로 작동하고 겨울에는 휴식, 본체로 돌아간다.
일체삼용一體三用이다. 체體는, 근본은 하나인데 그 용用은 셋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의식의 구성 원리도 그렇고, 우리 몸도 머리, 몸통, 사지로 되어 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체와 용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단군조선의 역사 창업의 원리는 「천부경」이 담고 있는 우주 원형사상에서 왔다. ‘석삼극析三極’, 하나는 그 근본을 들어가서 보면 셋으로 보인다. 원자과학도 그렇다. 바탕은 공空인데, 입자粒子가 터져 나올 때는 전하電荷의 부호가 반대인 반입자反粒子도 함께 나온다. 그러나 입자가 사라지면 다시 공으로, 완전 영零이 된다.
우주는 영이라는 것이다. 현대 양자물리학에서도 바탕은 공이요 무극無極이다. 바로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하나에서 비롯됐는데 그 근본은 무, 무극이다. 일태극一太極의 바탕은 바로 우주 본체의 본원, 창조의 근원자리인 무극이다. 이런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동방 문화역사의 해체 과정이라 할 수 있는, 배달국이 망하는 과정에서 신인神人 단군왕검이 조선을 삼한으로 나누어서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 단군조선, 삼한이라는 것이 실제 있었는가?
당시의 조선과 중국, 바로 조선과 서방정권, 중화정권의 관계에서 단군조선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있었다. 단군조선이 삼한으로 있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다. 동북아 역사에서 한 4천3백 년 전에, 이곳뿐만 아니라 지구의 전체의 환경에서 볼 때 당시에 일어났던 다른 자연재앙보다 더 큰 사건이 있었다. 그것이 소위 9년 홍수 사건이다.
9년 홍수 때문에 중국의 유가에서, 유학자들이 공자 전후부터 성인 제왕으로 섬겨온 요임금, 순임금의 왕조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가 닥쳤다. 이처럼 당대 중화정권이 패망 위기에 있을 때 직접 지원해서 9년 홍수를 다스리게 해 준 분이 누구인가?
단군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이다. 그 역사 내용이 여기저기 많이 나와 있고, 중국 현지에 가보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시조 단군왕검은 어떤 분인가?
우선 『단군세기』를 보면 ‘왕검의 부는 단웅檀雄이시오, 모는 웅씨왕녀熊氏王女시라, 신묘년 오월 이일 인시寅時에 박달나무 우거진 숲에서 태어나셨다’ 이렇게 단군왕검의 사주팔자가 나온다.
해모수는 임술년 4월 8일 날 태어나셨다고 나오고, 고주몽高朱蒙 성제는 임인년 호랑이 해 5월 5일 날 태어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이분이 워낙 영민하고 지혜가 출중해서 열네 살 때 대읍국大邑國의 비왕裨王, 임금을 보필하는 노릇을 했다.
24년 동안 거기서 정치수업을 받다가 38세 되던 해에, 웅씨국의 왕이 전쟁터에서 돌아가시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고국을 단국檀國이라 그랬는데 38세 되던 해에 즉위를 하셨다. 『단군세기』를 보면 국조 단군왕검의 역사가 쭉 나와 있다.
역사를 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 역사 시절은 4,700년 전 황제헌원黃帝軒轅에서 시작한다.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한 두서너 시간 달리면 탁록涿鹿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 탁록이 중화문명의 발상지다. 제2의 탁록으로 장안長安 쪽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여기 탁록에서 동북아의 제1차 역사 대전쟁이 폭발했다. 그것이 바로 동방의 치우蚩尤 천황과 중국의 역사 시조 황제헌원이 벌인 10년 대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난 배경은 「신시본기神市本紀」라든지 여기저기에 나와 있다.
본래 동방의 신선문명의 근원은 치우 천황이고, 그분의 스승 자부선사紫府仙師가 종주宗主다. 그분 밑에 가서 신선도를 배웠다. 우리가 중국의 신선도를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 해서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말한다.
치우 천황은 자기 스승님을 존경해서 삼청궁三淸宮을 지어드렸다. 자부선사가 거기에 머물 때 황제헌원黃帝軒轅과 공공共工, 창힐倉詰 이런 사람들이 와서 선仙을 배웠다. 본래의 원형, 불멸의 선도정신을 배웠다. 그러고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이라는 경문을 받아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황제헌원의 총명이 아마 단군왕검 못지않았는가 보다. 이 양반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서방 중화정권을 아주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려 했다. 그래서 동방 신교문화를 우습게 여기고 보은의식이 약화되어 도발을 하니까, 치우 천황이 그 불의를 뿌리 뽑는다고 전쟁 선포문을 붙이고서 토벌하러 간 것이다.
탁록에 가보면 황제헌원이 말을 몰고 와서 머물렀다는 황제천黃帝泉이 있다. 중국은 황제성黃帝城이 있던 곳에 귀근원歸根苑을 세우고 그 안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만들어서 전쟁을 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도 그려놓고, 치우 천황을 모시고 있다. 전쟁신으로, 병법의 태조로 모시고 있다.
이 탁록 전쟁에서 황제헌원이 무릎을 꿇었다. 치우 천황이 헌원의 무릎을 꿇리면서 아주 혼을 내는 말씀이 『환단고기』를 보면 아주 잘 나와 있다.
요임금과 단군왕검 사이의 역사 대전쟁
그러고서 세월이 흘러 황제헌원의 5세손 가운데서 유명한 요堯임금이 나왔다. 이 요임금이 자기 할아버지 대에 당한 참담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더 강력한 서방 중심 중화정권을 세우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제2의 치우 천황 같은 분이 나타났는데 그분이 바로 단군왕검이다. 여기서 제2차 역사전쟁이 붙는데 그 역사전쟁의 중심에 9년 홍수가 있다.
요임금은 자신의 이복형을 쳐내고서 정권을 잡았다. 반대하는 자를 아주 무참하게 숙청해서 천하를 피로 물들였다. 중국의 고전을 보면 그런 내용이 여기저기에 나와 있다.
그리고 삼묘족三苗族이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를 왕통으로 삼아라고 주장하다가, 요임금에게 미움을 받아서 남쪽으로 쫓겨났다.
삼묘족은 원래 치우 천황을 시조로 모시고 저 북쪽에서 살았기 때문에 삼신문화 원형을 그대로 다 가지고 있다. 지금도 자기들 마을에다 거대한 치우 천황 상을 세워서 모시고 있다.
요임금은 정적들이 많아져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니까 정치에 피로증이 왔는지 천하를 물려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우리가 『서경書經』을 보면, 신하들이 ‘윤자주계명(胤子朱啓明)하나이다, 맏아들 단주가 총명합니다’라고 했지만, 요임금은 ‘은송嚚訟이니 가호可乎아, 말다툼 잘하고 싸우기를 좋아하는데 되겠느냐’ 하면서 물리쳐 버린다. 그러고서 허유許由를 찾아가서 천하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허유가 더러운 소리 들었다고 영수潁水에서 귀를 씻고, 그 이야기를 들은 소보巢父가 물 먹이던 소에게 귀 씻은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고질병에 걸려서 천하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한 자주지보子州支父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나라 요임금보다 24년 뒤 무진년에 즉위하신 동방의 단군왕검께서 요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동방의 대천자로서 역사문명의 종권宗權을 쥐고 있던 단군왕검이 요에게 말하기를 ‘순舜에게 넘기라’고 하셨다. 그래서 순에게 넘겼다. 『환단고기』에는 ‘의순이보명(依舜而保命)’, 순에게 의지해서 자신의 잔명殘命을 보존했다고 했다.
순의 아버지는 고수高叟인데, 그 친형 고시高矢는 단군조의 농림부 장관이었다. 순임금의 아버지는 후처後妻와 짜고 순을 죽이려 했다 해서, 후세 사람들이 당달봉사 같은 인간이라고 고瞽 자를 써서 고수瞽叟라 했다. ‘앞도 못 보는 늙은이’라는 말이다.
정리를 해보면, 제1차 동서방 역사 대전쟁 즉 탁록 대전쟁의 갈등이 강하게 지속되어서 중화 중심의 정권이 뿌리 내리려는 것을 시조 단군왕검이 친 것이다. 그것이 요임금과 동방의 단군 개국조 사이의 역사 대전쟁이었다.
단군왕검 재위 51년에 홍수가 일어나서 지금의 강화도 마리산에다 참성단塹城壇을 쌓고, 그 다음 해에 단군왕검께서 직접 올라가서 천제를 올리셨다.
그러고서 17년 뒤에 중국 본토에서 홍수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위 9년 홍수라 하는데, 중국 천하에 물난리가 나서 황하, 양자강 하류가 다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치수관治水官 곤鯀이 치수에 실패해서 우산羽山에 가서 무참하게 죽고, 후에 하夏나라를 연 그 아들 사우姒禹가 치수관이 되었다. 우禹는 생명을 바쳐서 치수를 하려고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때 순임금이 자신의 큰아버지가 조선(단군조선,고조선) 조정에 있으니까 단군왕검께 치수 법방을 좀 전해 주옵소서 하고 전통을 보냈다.
『오월춘추吳越春秋』를 보면 이것을 뭐라고 조작했는가?
꿈에 창수사자蒼水使者가 나타나 법방을 알려 주어서 치수에 성공했다고 거짓말을 해놨다. 이 9년 홍수 때 단군왕검이 맏아들 부루扶婁 태자를 산동성 제성현에 있는 낭야성琅邪城에 보냈다. 낭야성을 쌓은 낭야는 누구인가?
낭야는 삼한의 하나인 번한의 초대 왕 치두남蚩頭男의 아들이다. 단군왕검께서 치우천황의 직손 가운데서 지혜가 뛰어나고 기상이 훌륭한 치두남을 전략적으로 번한 왕으로 삼았다. 그 아들 낭야가, 원래 있던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해서 낭야성이라 한 것이다. 지금 중국 현지에서도 낭야성이라 한다. 낭야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이 천지 간에 오직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밖에 없다.
순임금은 홍수에 대한 전말을 직접 부루 태자에게 보고했다. 그때 부루 태자가 이 천하대란에 대해 진단을 내린다. ‘요임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그 원한이 가득 차서 천지신명들의 저주로 홍수가 일어났다. 동방 신교문화의 근본을 잃어버려서 이런 대재앙을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하에 경당扃堂을 많이 짓고, 신교문화의 씨를 크게 뿌리라’고 했다.
그래서 그 이전 황제헌원 때를 이어서, 중국 천하에 동방의 삼신 우주광명 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바로 부루 태자, 2세 단군 때부터다. 그러고 나서 사태가 심각하니까 중국의 동서방 제후들을 전부 회집會集을 시켰다.
지금 강소성에 있는 회계산會稽山, 소위 도산塗山에 모이게 해서 천하대란 9년 홍수의 참상을 실제로 듣고, 거기에서 단군왕검의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과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해준 것이다.
『서경』을 보면 이 「홍범구주」 전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거기에 보면 단군왕검을 천제天帝라 기록했다. 동방의 천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임금님으로 말하고 있다.
『오월춘추』를 보면, 우임금이 치수에 성공해서 인심을 얻는다. 그리고 순임금은 정권의 힘이 무너지면서 남쪽으로 순행을 갔다가 창오蒼梧에서 갑자기 죽는다. 그때 요임금의 두 딸, 순임금의 왕비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오빠 단주에 얽힌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두 왕비는 소상강瀟湘江에 몸을 던져 자살해 버렸다.
동정호洞庭湖를 가보면 그 무덤 이비지묘(二妃之墓) 바로 뒤에 있는 대나무에 검은 반점이 있다. 이걸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 한다. 아황과 여영이 비통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그 피눈물이 대나무에 새겨졌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시황본기始皇本紀」에 진시황이 동정호에 배를 띄워서 노는 내용이 있다. 그때 갑자기 물결이 사나워지자 진시황이 “여기 수신水神이 누구냐?” 하고 물었는데 “아황과 여영입니다.”라는 대답을 듣고는 전각을 당장 부숴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두 왕비의 전설이 그때도 그렇게 내려온 것이다.
이 9년 홍수로 중국의 서방 정권이 완전 붕괴해서 패망당할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에 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이 오행치수법과 「홍범구주」를 전해 주신 것이다. 우주사상을 담은 「홍범구주」는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큰 규범이다. 그 다섯째를 보면 천자天子 사상이 있다. 그게 바로 황극皇極이다. 이렇게 「홍범구주」가 전수되어서, 중국의 천자사상, 역사 통치자 사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누루하치 아들 청태종이 자신을 ‘황타이즈’라고 했다. 황타이즈는 황태극皇太極인데, 그 사람도 황극과 태극을 알기는 좀 안 것이다. 이렇게 천자를 황극이라고 했다.
우임금이 연 하夏나라는 중국 고대 3대 왕조의 첫 나라로 3백 년을 간다. 그 다음에 상商나라, 뒤에 은殷나라라 했는데 두 배로 6백 년간 지속되고, 그 다음에 동방 사람 강태공姜太公이 보필하여 연 주周나라는 한 9백 년을 내려갔다.
단군조 2천 년 삼왕조 시대는,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 다음에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진秦나라, 한漢나라에 해당한다. 진시황 진나라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보면 ‘진자秦者는 이야夷也라’ 그랬다. 진나라는 동이東夷란 말이다. 진시황도 중국 한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중국에는 한족이 없고 전역全域이 동이계다.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도 방위에 따라서 폄하하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 사관에 의해서 이夷를 동방 오랑캐로 부른 것이고, 본래 이夷라는 건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황제헌원의 본래의 혈통이 웅씨족熊氏族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분의 조상이 공손公孫인데, 공손은 누구냐? 바로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아버지 소전씨少典氏의 별파別派라는 것이다. 소전씨는 어디서 왔는가? 만주에 있었던 웅씨족 계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 시조 황제헌원은 우리 동방족에서 왔다.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는 인류의 성씨의 원조이고, 황제헌원은 염제신농씨 집안의 맥이다. 중국 서방족의 전체 왕족은 사실 동방족과 형제 사이다. 그래서 중국과 우리 대한은 형제처럼 잘 지내야 되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이런 역사관계는 이번에 남북의 갈등, 또는 대결구도, 전쟁과 평화 어느 쪽으로 가느냐 하는 실제적인 위기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본다.
지금 분단의 역사의 근원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는 동방족과 서방족은 원래 뿌리가 같고 문화사상도 같다고 보았다. 역사정신이 한 근원에서 왔기 때문에 동서방족은 한 가족처럼 지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단주는 동서방 문화역사의 융합주의자, 평화주의자였는데 그 사상이 아버지의 정치철학에 의해서 깨져 버렸다. 부정당하고 쫓겨나 버렸다. 그래서 불초자로 몰려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지 않은 불효자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단주를 알아야 남북 분단 역사의 비밀을 안다. 참동학 증산도 사상을 보면, 단주가 지금 천상 자미원紫微垣에서 이 세계 정치, 국제 질서를 주관하고 있다. 그런 소중하고 놀라운 상제님 말씀이 있다.
하나라 건국은 홍수 사건이 그 계기
우리가 노아 홍수는 아는데 왜 단군조선, 그 유명한 성인 제왕 요순시대 때의 9년 홍수는 전혀 모르는가?
노아Noah의 아들이 셈, 함, 야벳 해서 거기서 무슨 족속이 나왔다고 족보를 다 꿴다. 그런데 노아 홍수는 단군조선보다 한 50년 전에 일어난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태생의 미국 저술가인 제카리아 시친Zecharia Sitchin(1920~2010) 같은 사람은 5,100년 전에 그런 홍수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것은 수메르 문명을 근거로 해서 말한 것이다.
인류 역사에는 홍수가 주기적으로 있었다. 노아 홍수 때는 전 지구 인류가 다 멸망당하고 노아 가족만 방주를 타고 저 터키 아라랏 산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때 지구촌에 인류가 똑같이 다 살았다. 그 지역을 중심으로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뿐이다.
중국과 우리 한국의 고대 사서를 보면 9년 홍수에 대한 여러 기록이 있다. 이 홍수 사건을 계기로 해서 중국 3대 왕조의 첫 나라, 하夏나라가 건국된 것이다.
예전에 70년대 후반에 중국 고고학 팀이 옛 하나라의 성터에서, 그 성벽이 홍수에 의해 무너진 자취를 현장 답사해서 직접 확인했다는 그런 내용이 중국 고고학 잡지 『문물文物』에 실린 적이 있다. 최근에 중국에서는 과학자들이 약 3,900년 전에 황하, 양자강 수천 km 아래에서 어마어마한 홍수 대재난이 있었을 것이라는 내용을 『사이언스』지 작년(2016년) 8월호에 실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탄생했을 것이다.
하夏 왕조 탄생의 배경은, 바로 단군왕검이 9년 홍수를 다스리는 비방을 전해 준 것이다. 아들 부루 태자가 간 오나라, 월나라가 있었던 강소, 절강 그쪽 지역도 단군조선에게 직접, 간접으로 다스림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기에 제후들이 모여서 단군왕검의 명을 집행하는 부루 태자의 명을,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북경대 엄문명嚴文明 교수와 대만학자 임혜상林惠祥 같은 사람도 ‘중국문화의 근원은 동이다. 중국은 동이문화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서양문화의 뿌리는 동양이라고 말하는 서양의 학자들
서구 유럽의 역사왜곡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블랙아테나』이다.
유럽에서는 원래 유럽문명의 기원은 이집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학자들이 19세기 후반 같은 아리안인종의 고대 그리스를 적극 발굴하여 유럽과의 연계성은 강화하고 이집트와의 연계성을 축소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문명과는 별도로 성장해온 독창적인 문명으로 그리스를 부각시켜 그 때부터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었다.
많은 서구학자들은 『블랙 아테나』를 읽고서 그리스의 역사와 서양사, 그리고 세계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반성을 했다.
그리스문명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2000~2500년 늦게 시작돤 문명이었으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나 페니키아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시켜왔으리라는 것이 순리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약소국인 아테나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이 될 사람들과 함께 크레타로 간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그리스신화는 이집트신화와 터키지역의 히타이트신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탈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솔론, 유클리드, 플라톤 등 그리스의 유명학자들이 이집트를 갔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피타고라스보다 1500년전의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서 찾아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의 기원은 이집트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수학의 기원도 이집트라고 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많은 그리스신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말했다.<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볼프강 작스가 『반자본 발전사전』12쪽에서 이야기한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도 세계사, 사상, 학문은 서구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학자들이 수많은 역사왜곡으로 서구에 편향된 세계관을 만들어왔고 우리는 지금도 따르고 있다. “서구중심의 탈식민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오리엔트』는 일찍부터 서구가 앞섰다는 주장을 모두 부정한다.
영국이 벵골을 식민지화하면서 인도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유럽은 중남미의 은을 착취하여 부를 이루고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투자가 증가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다음에야 겨우 아시아을 앞섰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추월한 것이 15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동양을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곳으로 낙인을 찍고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문명적인 곳으로 서양은 긍정적인 것으로 동양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자신들이 만든 동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자신들이 야만적인 세계를 문명화시키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현실 자체를 유럽학자들이 왜곡하여 거짓말을 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1820년대까지 유럽이 아시아에 뒤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서구가 세계사를 가장 발전시켜왔다고 배워왔고 따라서 근대를 서구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중세는 동양의 중세보다 뒤쳐진 암흑중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칼 맑스나 막스 베버 같은 학자들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은 서양이 우월하다는 관점에서 자료들을 해석하고 이론화 했기 때문이다. <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서양사는 아시아 문명이 모태
20세기 초중반 미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1885∼1981)는 1930∼50년대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를 통해 철학과 역사의 교류에 눈을 떴다고 평자들은 풀이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문명의 응석받이이자 손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상인 동양의 풍요로운 유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꼬집는다.
종래 서양사 중심의 서술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듀런트는 “서양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문명들이 서양의 시작인 그리스 로마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그리스와 로마가 현대 지성의 모든 원천은 아니다”면서 “서양 문명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들, 예컨대 서양의 정치 기구 및 경제 과학 문학 철학 종교의 뿌리가 이집트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출처: 세계일보 2011년7월15일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가짜다.
리 오리엔트 = 다시 동방으로 !!
저자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수정하고 세계사에 관한 사고의 틀을 완전히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2000년 미국 사회학회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 된 바 있는 이 책은 서구의 발전과 세계체제의 기원에 관하여 근본적인 재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혁신적이고 흥미진진한 프랑크의 역작이다.
" 오리엔트" "빛은 동양에서".
세계 문명의 근원은 동양이었고 동양 역사의 시작이 곧 세계 역사의 시작이었다.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강조하며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역사관과 세계사를 수정 하기를 요구한다. 우선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남짓이다. 그 이전, 그러니까 1800년 이전까지는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 하고 있었다.
1800년 이전 변변한 자원도, 풍부한 자본도 없었던 유럽은... 자원과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1800년 이전 유럽은 아시아의 기술에 미치지 못했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계기는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 때문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2003년 3월 07일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존 M. 홉슨 저 / 정경옥 역 / 에코리브르 / 2005년 1월/ 18,000원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동도동기(東道東器)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특징을 축약해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을 쓴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이 말은 동도동기(東道東器)로 바꾸어야만 할 것 같다. 정신문명은 물론이고 기계문명마저도 그 발원지는 동양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동양이 서양과의 문명발달 경쟁에서 근소한 시간적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을 통틀어 ‘숙련된’ 동양에서 ‘미숙한’ 서양으로 ‘모든’ 인문적 지식이 ‘전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 전수목록에는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거의 완제품 수준까지 아우르고 있다. 저자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료와 자료들은 충분히 치밀하고 방대하다. 따라서 구태여 저자가 존 M.홉슨이라는 전형적인 서양인 혈통이란 걸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문명발달의 원조 논쟁에 있지 않고, 인류문명에 있어서 동양의 명백하고 압도적이었던 문명사적 역할이 얼마나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는지를 밝히려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서양이 자기기만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부터임도 알게 된다.
동양은 ‘창조’ 서양은 ‘모방’
“서양 사람들은 독일의 발명가 구텐베르크가 문명에 혁신을 가져온 인쇄기를 최초로 세상에 소개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은 이동형 인쇄기에 사용하는 최초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적어도 50년은 먼저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서문 중)
흔히 인류의 3대 발명을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라고 한다. 이 발명품들은 모조리 동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서양으로 전수되었다. 앞서 저자의 서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는 인쇄기술을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입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고정관념의 먼지를 털어 내어야 한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은 훨씬 오래 전부터, 아니 역사의 전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교류는 일방통행이었다는 점이다. 즉 서양은 늘 문명의 수혜자였다.
동양은 ‘창조’하고 서양은 ‘모방’했다. 사실상 근대까지도 유럽인들의 기술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동양에 비해 아주 조악했다.
한 유럽 지식인은 그의 저서 『위대한 우(禹)임금과 공자(Yu le Grand et Confucius)』에서 ‘유럽이 17세기에 이르러 마치 ‘유전자 대혁명’을 겪는 것처럼 일대 변신을 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뉴턴 등을 비롯한 대과학자들의 세기가 열린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양은 더 이상의 ‘창조적 지식’의 출현이 없는 까닭 모를 정체기로 빠져들게 된다
서양인들의 모방과 착취
문제는 서양인들이 주도권을 쥐자마자 그것을 남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약적인 발흥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지적인 부채에만 기인했던 것이 아니다. 서양은 식민지화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독점에 가까운 시장확보라는 이중 삼중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저자는 영국의 산업혁명 또한 동양으로부터 이러한 경제적인 이득뿐 아니라 기술적인 모방까지 동원되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을 말함에 있어서 수학(數學)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오늘날의 십진법 수 체계 그 외에도 항해술, 조선술, 천문학, 도로망 등 세계를 이미 하나로 만들었던 교통수단은 그 어느 것도 동양인들의 지적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이라고 착각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작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을 비롯한 소위 제3세계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이하 생략)
대만출신으로 일본 도카이대학 교수로 있는 사세이키가 쓴 『유럽 중심사관에 도전한다』에 따르면 “유럽중심 사관이 대두된 것은 17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서구가 직선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사관을 확실하게 확립시켰고 이러한 발전의 최첨단에 서구가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정립되던 시기이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중심사관이 유럽을 우월한 모습으로 역사를 과장하고 왜곡하였다. 유럽에서 만든 세계사는 서구편향적으로 쓰여졌다며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유럽학자들이 주도하여 세계사를 유럽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왜곡하여 썼고 이러한 해석과 왜곡에 의존한 세계사가 현재도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 미국 부통령 엘고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말했지만 서양의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뒤 얻어 온 기술"이라며 "이런 면에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두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 발전 기여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5월 19일 서울디지털포럼 개막식 연설에서 -
첫댓글
제 뿌리를 못 찾고 환부역조하는 한국인을 경계하심
朝鮮國 上計神 中計神 下計神이 無依無托하니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 무의무탁
不可不 文字戒於人이니라
불가불 문자계어인
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 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 말고 잘 받들 것을
글로써 너희들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노라.
※ 상제님께서 한민족사의 뿌리문화 시대를 개창하신 환인과 환웅과 단군의 역사 시대를 실존사로 인정해 주신 것이다.
목 넘기기를 잘 하라
운수는 가까워 오고 도(道)는 멀리 가리니 마음을 굳게 가져 목 넘기기를 잘 하라.
부하고 귀하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든 척(隻)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하리라.
지금은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시대니 혈통줄을 바르게 하라.
환부역조(換父易祖)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환부역조(換父易祖): 자신의 조상과 국조(國祖)를 바꾸고 부인하는 모든 행위. 즉 성(姓)을 바꾸거나 조상 제사를 거부하며 타민족의 민족신을 하느님으로 믿는 행위 등을 말한다. 여호아는 이스라엘의 민족신이다. 이는 제 뿌리인 조상을 부정하는 큰 죄악이라 말씀하셨다.
제목에 크게 공감합니다.
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