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은진 송공 묘지명 병서(恩津宋公墓誌銘 並序)
아, 사람이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은진 송공(恩津宋公)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한 것과 같은 경우는 참으로 죽어야 할 때 죽은 자에 해당하는구나. 공의 휘는 희철(希哲)이고 자는 덕보(德保)이며 호는 경모재(敬慕齋)이다.
시조의 휘는 대원(大原)으로 고려 시대에 벼슬하여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졌기에 자손들이 은진을 본관으로 삼았다. 3대 뒤 쌍청당(雙淸堂)은 휘가 유(愉)이고, 그의 아들은 휘가 계사(繼祀)로 판관을 지냈으며 증직이 지평(持平)이며, 계사의 아들은 휘가 요년(遙年)으로 감정(監正)을 지냈다.
공의 증조부는 휘가 여림(汝霖)으로 군수를 지냈으며, 조부는 휘가 세적(世勣)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는데, 충청도 회덕(懷德)에서 경남 합천 삼가(三嘉)의 병목(並木)으로 이거하였으니, 당시 여론에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휘는 기(琦)이니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증직이 참의(參議)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양평공(襄平公) 종(種)의 증손자인 모(某)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을축년(1565, 명종20)에 공은 선친의 집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 근본하여, 부모를 섬김에 순종적인 태도로 하였고, 형제를 대함에 화목한 마음으로 하였다. 성장하여 더욱 영민하고 비범하여 뜻이 경국제세(經國濟世)에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일본이 침략해오자 아버지를 모시고 가야산 속으로 피난하였다.
임금의 수레가 의주로 피난가자 공은 초야의 포의로서 떨치고 일어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으며, 형 희순(希醇), 동생 희달(希達)과 함께 곽망우당(郭忘憂堂)의 의진(義陣)에 달려가 힘을 다해 함께 섬겼다. 이에 곽공이 매우 가상히 여겼으니, 이 사실이 《동고록(同苦錄)》에 실려 있다.
공이 아버지께서 병환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도록 달려가 뵈었는데, 아버지께서 바야흐로 위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 아들을 불러 큰 소리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충과 효는 일치하니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고인의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어버이의 장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뜻을 적용하라.”라고 하고서는 말이 끝나자 죽었다.
공의 세 형제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더욱 힘써 창을 잡고 왜적을 방어하였으며 더더욱 어렵고 위험한 일도 피하지 않았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형제와 함께 어버이의 빈소를 살피다가 길에서 적의 칼날을 만났는데, 적을 사살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형세가 위급하자 맨주먹을 휘두르며 입으로 왜적을 꾸짖기를 그치지 않다가, 끝내는 선 채로 죽었다.
아, 공의 재주와 책략으로 삼가 적을 피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만, 아버지의 유언을 체인하여 나라를 위하다 적에게 죽었으니, 그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다. 그 뒤 기해년(1599, 선조32)에 반장(返葬)하여 고향의 산 경좌(庚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부인은 서흥 김씨(瑞興金氏)로 응복(應福)의 따님이니, 한훤당(寒暄堂) 선생 굉필(宏弼)의 현손인데, 생몰 연대가 공과 동일하며 묘소도 쌍분이다. 외아들의 이름은 여원(慮遠)으로 첨정(僉正)을 지냈다. 손자는 네 명이니, 정인(挺仁),정의(挺義),통정대부를 지낸 정례(挺禮),별좌(別座)를 지낸 정지(挺智)이다. 그의 후손 병백(秉百)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루니 / 殺身成仁
가을 서리같이 늠렬하네 / 秋霜凜烈
표창하는 은전이 오히려 더디어 / 褒典尙稽
사람들의 마음에 답답하게 여겼네 / 輿情鬱結
묘지명으로 뒷시대에 드리우고자 하니 / 用銘要垂後
글솜씨가 운한(雲漢 은하수)을 따기에 부족한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네 / 自愧手乏雲漢決
<끝>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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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恩津宋公墓誌銘 並序
於乎。人之死於死難。若恩津宋公之舍生取義。其眞死於死者乎。公諱希哲。字德保。號敬慕齋。上祖諱大原。仕麗封恩津君。子孫因爲貫。三傳至雙淸堂諱愉。子諱繼祀。判官贈持平。子諱遙年。監正。曾祖諱汝霖。郡守。祖諱世勣。忠順衛。自懷德移三嘉之並木。爲時論所惎也。考諱琦。主簿贈參議。妣東萊鄭氏。襄平公種曾孫。某女。嘉靖乙丑。公生先人第。自幼孝友根天 。事父母以順。處兄弟以和。長益英邁。志在經濟。壬辰。當島夷孔棘。奉先公避伽倻山中。及大駕西狩。公以草野韋布。奮不顧身。與兄希醇。弟希達。赴郭忘憂陣。戮力同事。郭公甚嘉賞之。載在同苦錄中。公承先公患報。罔夜馳省。先公方病革。而呼三子。勵聲誠曰。忠孝一致。我死。汝等用古人君讎未報。勿葬親之義。言訖而終。公三人。奉命益勵。執殳捍禦。尤不避艱危。丁酉。同兄弟省親殯。路遇賊鋒。所射殺不知幾許。矢盡勢窮。張空弮。罵不絶口。竟至立殣。噫。以公才畧。謹避何難。而體親遺命。爲國死賊。其死也不虛死矣。後己亥。返葬故山負庚原。配瑞興金氏。應福女。寒暄堂先生宏弼玄孫。生卒與公同年。墓雙墳。一男慮遠僉正。四孫挺仁, 挺義, 挺禮通政, 挺智別座。其後孫秉百。奉家狀請銘。銘曰。
殺身成仁。秋霜凜烈。褒典尙稽。輿情鬱結。用銘要垂後。自愧手乏雲漢决。<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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