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북, 가조, 거창유람(8월23,24,25일)
지난 토, 일, 월요일에 거창을 여행하면서 거창과 가조 가북 주위의 서원과 사당, 정자들 그리 가북 동네 구석구석을 둘러 보았다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원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 평촌 최숙량을 거쳐서 조광조, 이언적에 이르기까지 조선 성리학의 흐름을 보았고 그 이후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율곡 이이 선생의 면면히 이어 오는 선비정신 속에 경상우도에서는 남명 조식의 학풍이 많이 불었었다 그리고 내암 정인홍, 동계 정온으로 이어 졌다. 남명학은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으로 성리학이 학문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인간의 완성을 보려 했음이라.
남명 조식 선생의 “욕천”이라는 시를 보면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실천을 하려는지 알 수 있으리라. “온몸에 40년 동안 찌든 때를/ 천섬 맑은 물로 씻어 버리고 말리라/ 그래도 만약에 티끌이 속안에서 생긴다면/ 곧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 보내리”. 이 시를 감악산을 오르면서 지었다네. 거창에서 보면 이 산이 어머니 산이라 한다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무서운 결기(潔己)가 담긴 시라고 보여지고 사나이 뜻을 세우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요즘도 이렇게 뜻을 세운다면 살아가기가 많이 힘들 것이다. 다들 도전을 하더라도 생각을 하시고 참고들 하시게나. 거창에는 참으로 많은 유적지들이 지금도 있어.
맑은 가을 하늘은 더 높이 올라가고 들녘에 익어가는 곡식들을 보면서 지천명의 나이에 역사기행을 떠난다니 여간 고맙지 않은가? 아침 일찍 서둘러 가는 마음 벌써 고향 하늘을 머리에 이고 그렇게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져 가고 뻥 뚫린 시계를 보면서 내 달렸다. 서울에서 출발한 자동차는 경부선을 옆으로 하여 계속 국도를 타고 달렸다. 그리고 평택에 이르러서야 고속도로 위로 올려 중부선을 거쳐 경부선을 타고 대진고속도로를 거쳐서 함양 서상으로 내렸다. 서상에서 내려 거창으로 오다 보면 거연정이 있더라.
이 거연정은 정선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고 그리고 그 옆에 군자정도 있었지. 이 정자는 일두 정여창 선생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일두 선생의 처가가 이 봉전마을이었나 보다. 해동군자가 쉰 곳이라 하여 군자정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두정자를 보고 물 좋고 계곡이 좋으면 언제나 정자가 있게 마련인가 보다 생각했다. 우리의 선현들은 자연과 일치되어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너럭바위 위에 기둥을 세우고 팔각정 혹은 육각정을 세워서 책도 읽고 시도 쓰고 그랬던가 보다.
거창에서 약속한 시간이 있어 서둘러 거창을 향해서 출발하였다. 모인 장소는 전영주가 점장으로 있는 축협에서 운영하는 애우 전문점 거창 축협 한우 펠리스에서 모였다. 이곳에서 옥산선생의 유고집과 유무재의 문집과 무신 창의록에 기록된 일련의 사건들을 짜깁기 시작하였다. 우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영주가 맛있는 소고기와 육회를 가져 나왔다. 역시 신토불이인가 보다. 너무 맛있네. 맥주도 한잔 곁들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불리 먹었으니 구경이나 해야겠다.
거창박물관에 도착을 하니 이날이 토요일이라 학예사분이 5시에 퇴근인데 너무 늦게 왔지만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이곳 저곳으로 안내를 하더라. 거창 분은 아니신데 거창으로 시집을 와서 이제는 거창사람이 다 되었다고 하면서 설명을 아주 잘해 주셨어. 역시 재수가 좋은 날이었다.
거창 박물관에서 그래도 제일 감명 깊게 본 것은 고인돌의 유래와 금원산 유적지, 대동여지도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조선말의 유학자 면우 곽종석 선생의 의관을 보았다네.
고인돌이라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성혈이 있으면 고인돌이라 한다더군. 성혈을 만드는 방법은 북극성을 만들 수도 있고 북두칠성을 만들 수도 있다네. 정으로 크게 쫓은 다음에 다시 갈아내는 방법을 사용한다더라. 이 성혈을 만든다고 얼마나 손에 피를 보았을까 생각하면 뭐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 같구나. 우리들이 배울 때에는 남방식 북방식으로 나누었지만 지금은 탁자식 기반식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더라구.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고인돌의 무덤에서는 꼭 뭔가가 나온다고 하더라구.
그리고 금원산의 유적지는 너무나 소중하게 들었다네.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상 탁본을 떠서 설치 해 놓았더라. 은은한 미소가 내 마음속까지 퍼져 아주 좋았다네. 꼭 추천함세. 금원산 휴양림은 너무나 좋아 거창군에서 관리를 안하고 도에서 관리를 한다고 하니 모두들 시간되시면 예약을 하시고 들러 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보물이 있을 줄이야.
대동여지도의 탄생 배경은 다음과 같은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지게 되었답니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부친이 지도를 들고 부역을 하러 가다가 잘못된 지도로 인하여 실족사하게 되어 앞으로 지도 하나는 꼭 상세히 그려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정성을 다해 만들었답니다. 범례를 통하여 아주 상세한 내용을 담았으며 강의 깊이도 깊은 곳은 세 줄, 두 줄, 한 줄을 사용하여 깊이도 나타냈으며 산세도 험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도 분명히 밝혔답니다. 가는 길에 점을 찍는 것도 꼭 10리를 기준으로 찍었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지도를 이용하여 등산을 해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답니다. 백두대간의 기록도 아주 뚜렷이 그려 넣었습니다. 이 그런데 이렇게 좋은 지도는 핍박을 받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도를 만들면 왜놈이나 청에 넘어 갈 경우 우리나라가 불리해 집니다. 대원군이 모두 불질러 버립니다. 안타깝습니다. 모두 불타 없어집니다. 하 그런데 거창에서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는 거창 박물관을 세우신 제창의원 월정 김태순 선생께서 남하의 밀양박씨로부터 쌀 4되를 주고 샀다고 합니다. 인연이 되려고 하다 보니 이런 인연으로 우리들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곳의 대동여지도는 위 아래로 22단인데 거창에서 발견된 것은 21단이랍니다. 아주 좋은 지도입니다. 다들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고견사는 옛날에는 견암사였습니다.
일층을 그렇게 둘러보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면우 선생의 의관도 보았습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면우 선생은 구한말 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동네의 자랑거리입니다. 많은 유학자를 양성하시고 독립에 당신의 생명을 묻었으니 얼마나 거룩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께서는 많은 문집을 남기셨고, 향후 그분의 얼에 대하여 연구를 더해 우리들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학문으로 발전시켜야겠습니다.
이렇게 보고 나오니 밖에서는 동계선생의 시조가 한수 보입니다. “책 덥고 창을여니 강호에 배떠있다. 왕래백구(오고가는 갈매기)는 무슨뜻 머것는고. 앗구려 공명도 말고 너를 조차 놀리라”. 나를 하늘 높이 배 띄워 주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 그 옛날 정온 선생의 무덤가에 세워졌던 작은 돌 두 개가 어느 날 안 보였는데 여기서 보았다며 즐거워한 친구가 있어 더욱더 좋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 돌을 가지고 자빠뜨리고 놀았다며 좋아라 했습니다.
박물관을 뒤로하고 우리는 심소정을 향해 갔습니다. 이곳은 단성현감을 지낸 파평윤씨 윤자선이 지은 정자입니다. 이곳에서 지방 유림들이 파리장서거사를 논의한 곳입니다. 심소정 밑에 소심루가 있는데 단청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윤상거라는 분의 비도 있습니다. 이분은 거창에서 무신년(1728년) 이인좌 난에 대항해서 의병을 창의한 의병장이었습니다. 그분들의 후손이 이곳에 비를 세웠나 봅니다. 아 무신년 이후의 거창은 어둠에 휩싸입니다. 함양 안음에서 정희랑의 난이 일어난 것이지요. 합천, 함양, 산청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조를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관군들이 들어 오면서 합천 어느 부락은 씨가 마르게 흉가로 변하게 됩니다. 1728년 이후의 거창은 적들의 땅으로 변하게 됩니다. 정치적인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많던 벼슬도 사라지게 됩니다. 기절을 숭상하는 남명학파들로 매도되어 전라도와 함께 경상우도는 버려진 땅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조금 더 살목으로 들어가면 영호 윤경남 선생의 생가가 나옵니다. 이분의 처부가 이몽룡이신데 우리가 아는 춘향이의 부군 이름은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되었었습니다. 멀리서 한 분이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 때 같이 의병활동을 한 분은 모계 문위 선생과 동계 정온 선생이었습니다. 아마도 윤경남의 자손이 윤상거라는 분이고 또 그분의 자손이 교하 윤주하라는 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호 선생의 생가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고 지금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밖에서 안채가 조금 보일 정도였습니다. 전통가옥으로 이 때의 식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밥상을 사랑채로 가져 오기가 참 힘들어 보였습니다. 아무튼 오롯이 남아있는 기둥과 처마가 지는 황혼과 더불어 야릇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거창향교에 들러 대성전을 보았으며 상량문 기록이 남아있는 춘풍루도 보았다네. 그리고강회장이 거창 충혼탑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 우리도 그곳을 들러 마음으로 묵념을 올리고 나라사랑에는 좌와우가 없다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내려왔다네. 그날 저녁에는 진장기가 거창으로 와서 구구식당에서 어죽을 먹었는데 기가 막히더군. 지피가루와 마늘 그리고 풋고추 다진 것도 좀 넣고 후루룩 폭풍흡입을 하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진장기가 거창에서는 자기가 굳이 쏘아야 한다면서 우린 잘 얻어 묵고 왔습니다. 이럴 땐 참 행복합니다. 공짜 밥을 먹어서가 아니라 같은 밥상을 사이에 두고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모여서 서로 정다운 이야기로 밥상머리에 앉을 수 있을까요? 다시 가조로 넘어와 마상리에 들리니 김종석, 김동욱, 이상량, 이철순, 윤보훈, 이명수, 진장기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네. 다들 벌초하러 왔더구만. 이런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이 동네에서 세거한 지가 삼백년에서 오백년은 족히 되는 사람들입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그 이튿날은 용산리에 들러 모계 문위 선생이 배향되어 있는 용원서원을 둘러보고 그 오른쪽에 있는 용천정사도 구경을 하였다네. 용원서원에 제향된 모계 문위 선생은 임진왜란에 고령에서 창의한 김면 선생의 좌장군으로서 거창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분이라네. 이주 훌륭한 분이시지 아마도 용산리에서 태어난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네. 이 분의 관향은 남평문씨라네. 다들 이름을 날리는 가문이라네. 용천정사는 동계 정온 선생을 기리는 사당이지. 그 앞에는 비가 두 개 서있었어. 하나는 훼철이 된 비와 왼쪽에는 정온선생의 13대손인 종구 선생이 아주 큰 비를 하나 더 세워 놓았더군. 세월의 그 무상함을 그 무엇으로 말하리오. 동계 선생은 제주도에서 10년 이상을 귀양살이 하신 분 아닌가? 그분의 나라를 향한 충성된 마음이야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인조 때 일어난 병자호란시 주전론자로서 끝까지 청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결하려다 실패하고 3일 후에 깨어나 다시 상소하고 이 때의 관직은 이조참판이었지. 그리고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다. 다들 남한산성 책을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이때 끝까지 반대한 삼학사가 있었지. 이분들은 청으로 끌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 합니다. 오달재, 윤집, 홍익환으로 머리 숙여 이분들의 거룩한 죽음에 묵념합니다. 그날 삼전도의 치욕 이후 정온 선생은 북상면으로 귀향을 합니다. 그리고 5년후 죽음을 맞이하고 그분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는 영의정으로 추증됩니다. 그 용천정사 위로 한 300미터 올라가면 동계선생의 묘가 박유산을 향하여 있었다네. 박유산은 언제나 임금을 사모하는 산이라네. 신라가 망하고 “박유”라는 처사가 고려에 항거 하면서 들어간 곳이라 하여 박유산으로 이름이 지어졌다네. 그리고 단종폐위에 맞추어 고은 이지활이라는 분도 망월정을 지어 세상을 등지고 살았는데 원래 동례리에 있던 망월정이 소실되어 지금은 학산 부락에 망월정이 중건되어 남아 있어 이곳에서 그분의 얼을 기리고 있다지. 아무튼 무덤은 동계선생의 윗대 묘 1기와 아래로는 세 위의 묘가 있는데 누구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흉지라고도 한다네. 그런 이유는 1728년 무신년에 이이좌의 난이 일어나고 그의 좌장이 정희랑이라는 현손이 난을 일으킨 거지. 그때 비석이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다시 설명을 올리지. 용천 정사에서 어인골로 약 50미터 더 올라가면 낙모대라는 바위가 있고 그곳에도 비가 하나 있더군. 이 낙모대는 해마다 9월9일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고 취기가 올라 갓끈이 풀어져 물위로 떨어지는 모습으로 다들 즐거워하면서 이름을 낙모대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네.
그리고 찾아 간 곳이 면우 곽종석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네. 다전 마을을 향하여 출발 하였지. 가조에서 출발하여 가북으로 올라 가면 우혜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용암으로 들어 가는데 다전 마을은 발견치 못하고 개금부락으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진행을 하였다네. 이 곳에는 아주 큰 바위가 있었어. 용암초등학교의 분교로서 1966년 11월부터 개분교를 하고 폐교가 되기까지 약 6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더라. 개금 부락은 예전에 금이 많이 나온다고 하여 개금이 되었다네. 다음에 시간이 되면 이쪽으로 금캐러 단체 여행 한번 잡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금불상이 발견되어 개금불이라고도 한단다. 그런데 우리는 다전 마을이 없었기에 다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잘못 든 길은 다시 내려오는 게 제일이다. 내려오는 길에 길 옆 과수원에서 사과 향기가 진동을 하더군. 추석을 위한 수확을 하고 있기에 들러서 한 박스 사려고 하는데 오만원이더라구. 수중에 4만 6천원밖에 없었고 주인에게 포대기도 없다고 하니 아들을 시켜서 포대기를 하나 구해 오더군. 그 집 아들은 거창에서 전화국에 다닌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을 하시더군. 진주에서 학교를 하고 대학은 말씀을 안 해서 알 수가 없었지만 두 분을 많이 닮아 보였고 어르신의 얼굴에는 자식 칭찬에 어깨가 들썩이고 얼굴에는 미소가 여간 좋은 게 아니었네. 다들 건강하시고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기도 드리며 물러 나왔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가북이라는 땅에 들어 올 수 있었을까? 이 곳은 가조에 비하면 너무나 오지여서 신선들이나 이슬 먹으며 사는 동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친구들 보면 다들 입신양명 하여 건강하게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니 기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리고 이곳 출신 친구들은 너무도 각별하여 인정도 많고 수줍음도 많고 한번 정에 온 마음을 쏟아 붇는 친구들로 우뚝 선 기라. 이곳 산세가 아주 고운 마음들을 길러 주었다. 감사하다. 용암에서 내려 오다 보면 몽석리 위의 맞은편에 옥산 마을이 있다. 이곳은 아주 아담한 풍경이다. 새가 알을 품는 새집 같은 곳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 동네가 있을라구 하지만 여기에 정착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청빈한 생활을 쫓아서 사는 삶이었을까? 이런 골짜기 마다 동네가 들어서 있는 것은 아마도 세상사 힘든 일 핍박을 받아서 왔으리라. 숨죽여 사는 삶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여겼으리라.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피 눈물의 한을 품고 사시지 않았을 생각이 든다. 인생살이 지금은 너무나 빨리 외부로 알려지지만 그 당시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걸 절감하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옥산마을은 남쪽을 향해서 놓여져 있고 서쪽과 동쪽으로 산이 감싸고 있어 풍수적으로는 좋고 나쁨은 알 수 없지만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가북의 모든 동네가 그리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우혜리, 몽석리, 용암리, 중촌리, 해평리, 용산리 참 좋은 동네이다. 그런데 다전 마을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우혜리에 도착하여 중촌으로 향했다네. 조금 가니 해평리 월전(달이실) 마을이 나와서 느티나무 밑에 앉아 머리를 식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꿈같이 나누다가 잠깐 졸기도 하였다. 저 멀리서 벌초하는 소리에 잠을 깨어 우리가 가는 길을 재촉하였다. 월전 마을의 백일홍 꽃이 너무도 아름 다웠다. 누굴 닮았을까? 아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과 비통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누구는 삼백년 전 사화를 이야기 하고 누구는 100년전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을 이야기 하고 또 누구는 육이오사변을 이야기하고 또 누구는 삼공과 오공을 이야기한다. 우리 거창이 이런 땅이다. 면면히 내려오는 조상의 얼이 살아 움직이고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을 하는 거궁경리를 철학으로 삼는 곳이지. 이곳은 참으로 동네이름이 말하듯이 달이 뜨면 어떨지 생각하게 된다. 밭 위에 달이 뜨면 산으로 쌓여있는 동네는 어떤 모습일까? 참으로 고울 것 같다. 하얀 달이 산 위에서 올라 오고 휘영청 밝은 달은 달마다 그렇게 차 오르고 그리움을 달에게 전하던 그때를 기억하는 자는 마음에 아름다움을 품은 자이다. 출발. 차는 달린다. 옆으로 들이 펼쳐진다. 너무나 이뿐 그러나 힘든 수고로움이 느껴진다. 곡식이 잘 자라고 있었다. 회남을 지나 중촌 다전마을에 도착을 했다. 태극기가 걸려있고 면우 선생의 비도 보인다. 묵념을 올렸다. 선생의 정신들이 너무나 고결하기에 우리는 묵념을 안 올릴 수 없었다. 잠시 마을의 산세를 구경하고 아주 가끔씩 오고 가는 선세계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정신이 많이 혼미해진다. 우짠일이지? 조금 더 올라 가보기로 하였다. 심방이다. 더 올라 갈 수는 없는 찻길이다. 그런데 동네는 더 있는 것 같았다. 수재골, 불석동(폭시기)이 보였다. 참 나원.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기에 이리들 와서 사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다시 우리는 다천 서당을 향해서 달린다.
몽민은 내게 귀한 글을 소개 해 주었다. 면우 곽종석 선생의 “처곤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마음을 다잡는 글을 소개 해 주었네. “가난은 네가 검소함을 빛내 청렴을 떨치라는 것. 병은 네가 섭생 잘해 생명을 잘 지키라는 것 貧欲汝之昭儉而振淸 病欲汝之攝生而養命” 이렇게 좋은 말을 남겨 주신 선생의 일면을 볼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다천 서당으로 달렸다. 나도 기까이에 있었지만 한번도 원천 부락을 가보지 못했다. 가북에서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용산 숲에 들어가 푸른 솔숲의 향기에 취해 보슬비와 함께 즐겼다. 휘휘 바람과 함께 날리는 가랑비는 가을을 제촉하는듯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솔은 왜 모래에 심어졌을까? 우리동네 소나무는 진흙 위에 심어졌는데. 그래도 솔은 잘 자라는 구나. 이렇게 구부정하게 자라는 솔을 보노라면 이게 곧게 자랐으면 재목으로 얼른 베어갔을 것인데. 솔님도 세상사는 이치를 배웠나 봐. 부딪히면 휘어져 가고 그리고 다시 크고 하면서 세상에 나아갔으리라. 이곳은 팔송 정선생 숭모비가 하나 서있다네. 언제부터 이 숲이 있었을까? 이곳은 큰골과 작은골의 물이 합수되는 지점으로 아주 큰물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알지 않으신가? 일용산 이특골 삼병산, 삼부산 이라는 명성이 이 때에 진사에 급제한 사람을 기준으로 불려졌다네. 용산은 예로부터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네.
다천서당을 들러기 전에 우리는 원천정사를 동구 밖에서 살펴 보았다네. 깔끔하게 세워진 정사는 참으로 고귀한 멋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앞의 안내 돌에는 원천정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좀 더 안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으려만 문이 잠겨져 있어 더 이상 접근을 하지 못했다. 동네 어귀 느티 나무 아래 마을 사람 몇 분이 더운 여름을 식히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다천 서당은 어디에 있나요? 여쭈어 보니 “ 아이고 귀한 손님들은 오데서 왔소 묻는게 아닌가? 저는 조 밑에 특골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요 우에 용산에서 왔다고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우째 왔소 묻기에 다천서당을 보러 왔다고 알렸습니다. 우째 들어가면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조쪽으로 가서 조금 가다가 돌담길을 돌아서 가면 다천 서당으로 들어 가는 뒷문이 나온다기에 아무리 들어가 봐도 안 나온기라? 다시 물었더니 좀 더 상세히 알려 줘서 겨우 찾아 들어 왔더니 독구가 한마리 쏘아부치네. 무섭더라구. 그래도 매어진 걸 확인하고 서당에 들어섰더니 선비의 기상이 느껴지더라구. 그리 크지 않은 집과 다천서당이라는 편액과 그리고 선생의 비가 들어서 있었네. 1921년에 다천 서당이 세워졌고 신도비는 1979년에 전국 유림의 성금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면우선생은 전국유림을 대표하여 3.1운동의 33인으로 참여하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파리만국평화회의에 파리장서로 불합리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에 한평생을 바치신 분으로 추앙되어야 할 것이다. 다천 서당은 ㄷ자구조로서 남쪽으로 나 있었다. 금귀봉, 보해산, 장군봉, 박유산이 보이고 평지에 지워진 아주 단아한 모습으로 세월의 흔적을 일구고 있었다. 우리들 보다 휠씬 더 오래 남아있을 다천 서당의 맥이 만세에 전해지도록 기원하면서 조용히 물러 나오는데 차에 연락처가 있어 좋은 공부 많이 하고 간다는 메모를 남기고 나왔다. 이 때도 독구는 영 마음에 안들었는지 계속 짖기만 하였다.
다천서당을 둘러보고 허기진 배를 달래려 마상리의 추어탕 집을 향해서 출발했다. 내려오는데 강호역 친구를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올해도 하우스가 잘되었는지 물었다. 추어탕집에 모여서 술잔을 낮부터 기울였다네. 잠시 후 일손이 모자라는 호역이는 가고 나오는데 한채환이가 보인다.다시 또 그 자리로 둘러 앉아 또 술잔을 기울였다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지산 출신의 이상범이도 합석을 하고 김용민이도 합석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또 술잔을 기울이니 이분들은 가조의 노상술 멤버라더군. 아무튼 다들 건강하게 술을 이겨 내고 있음이 좋았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고향의 정겨움을 언제나 잘 지켜주길 바란다. 이제 오늘도 정리하고 난 노모가 계신 집으로 향한다.
다음날 아침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뉴스에서는 부산에 물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그래도 요기는 피해가 없이 빗소리 들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차에 전화가 울린다. 마상리에 손범규 집에 와있다면서 모현정에 들려보자고 하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지만 서울에서부터 계획한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범규 아내가 오늘이 월요일인데 출근을 안하시냐고 묻길래 난 휴가를 받아서 왔다고 하고 몽민도 어머니 기일이라서 왔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우째 사는지 물어 왔다. 사는 것은 똑 같습니다. 지금은 친구들이 고향에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면서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우린 우째 살고 있는가? 참 어려운 질문인데 사는 것은 서울이나 촌이나 매 한가지 아니겠는가? 우리가 어디 천석군 만석꾼만 아들이 아닐진데 다 똑 같이 산다고 자부한다 ㅎㅎㅎ. 자식들 공부 시킨다고 등골이 빠지고 회사에서는 위 아래 눈치 보기 바뿌고 뭐 그리 삽니다. 이런 것은 뻔할 뻔자 입니다. 안 그런가 친구들아.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모현정은 한훤당, 일두 선생을 추모하고 평촌공 최숙량을 추모하기 위해 정자가 지어졌다. 정자의 가운데 방이 하나 있어 독특한 구조물이었다. 그 옆에는 오도재가 있어 중건한 시대는 다르지만 다른 느낌의 문화재로 보였지. 한훤당과 평촌공은 동서지간으로 모현정에서 같이 공부를 하시고 같이 서울로 상경하려고 했지만 평촌공은 그 당시 상을 당해 올라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기본적으로 3년간 시묘 살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단한 정성입니다. 이 시묘 살이는 반상의 구분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가 많이 옵니다. 떨어지는 낙수 물이 아주 평화로워 보입니다. 앞에는 내가 흐르고 또 그 앞에는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현정에서 읇은 시가 있습니다.
모현정 그늘아래 맑은물 흘러가고
꿈같은 그날의향기 우러러 살펴보니
세월은 흘렀어도 그얼은 뚜렷하네
대학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말해주듯이 이곳은
학교였던 모양입니다. 내가 아는 이 동네는 천수답이 전부인 곳입니다.
가북댐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기 전의 이 동네는 비가 오지 않으면 모내기하기가 어려운 동네였다. 그래도
이 동네 친구들의 기상은 남달랐다. 언제나 앞서나갔고 앞 뒤를 재지 않았고 정이 남 달랐다. 오도산 자락의 수포대가 키워낸 인물들이라 그러했어리라. 역시 산세가
좋은 곳은 남 다르게 친구들이 커는 것 같다. 비계산과 오도산자락에 안겨서 부무님의 은공으로 이렇게
다들 자랐으니 앞으로도 이 은공 잊지 말기 바란다. 이제는 가조에서 계획했던 일은 다 보았다. 마상리로 출발하였다. 여전히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수제비를 먹으러 갔다. 옆에 마상리 어르신들이 나와서 수제비를 한술
뜨고 계신다. 옥산공의 제자 분도 보이고 친구 부친도 보인다. 다들
건강하시네. 소주를 곁들여 비 오는 날의 수제비를 만끽하시나 보다. 수제비에
감자가 좀 들어가면 맛이 좀더 좋은데 아쉽다. 그래도 수제비 가격은
4000원으로 참 착하다. 가조에 오시면 수제비 한그릇 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에 손범규가 합석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모현정을 방문하기
전에도 잠시 보았다. 거창 군청에 볼일이 있다면서 출발할 즈음에 내가 도착을 한 것이다. 거창에서 회의 내용은 법조타운(교도소:6만평규모) 건설에 대한 회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게 좀 이상하게 추진하는 갑더라. 절차상에 좀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보여지네. 다들 관심을 갖고 지켜 보시길 바랍니다. 술잔을
기울이고 다시 손사장 일하는 곳에 가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 들이키고 약간 비가 그친 틈을 타서 사진을 찍고 했다.
구름이 비계산에 걸려 있어 시계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름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또한 일품이지. 그래도 이 구름은 지나가는 구름이고 그 뒤에 있는 태양은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있지. 이게 우리들이 바라봐야 되는 본질이기도 하구 말이야.
거창 남상면 전척리에 위치한 일원정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일원정은 선산김씨 강호 김숙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일원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단 일원정을 찾으러 가는데 초행길이라 낯설다. 어떻게 된건지 가다보니 김숙자 사당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대산 마을이다. 계속 직진하였다. 저쪽에서 소나무 가지가 찢겨져 부서진 나무가 서있네. 그래도 소나무인기라. 비가 오는데 사당을 배알하려고 들어서는데 여기가 명성문인기라. 이 문을 거쳐서 들어가면 추원당이라는 정자가 나오고 그 뒤에 사당이 있는 기라. 사당 문을 살짝이 열어 향을 성냥으로 사르고 난 다음 우리는 묵념을 올렸다. 이분은 앞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조선의 성리학이 내려오는 길목을 제대로 짚어 내려온 분이시다. 목은 포은 야은을 거쳐서 강호 선생은 야은에게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또 그의 아들 점필재공에게 전하기까지 학문을 연마하신 게 아닌지 생각해 본다. 이분의 문집과 글을 읽어 볼 수는 없어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기라.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우리가 일원정을 찾으려 가는데 사당이 웬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김숙자 선생의 사당이 있는 것도 몰랐다. 누군가 우리를 부르고 있음이라. 조선의 성리학자가 불렀는가? 우리는 역사에 기록된 많은 사화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분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조의제문을 남겨서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하여 부관 참시를 당하는 분이셨다. 성리학의 근원은 잘 알지 못하지만 유학자로서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런 사적인 문구들이 언제나 화근이 되어 수많은 사림들이 핍박을 받는 등 사화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어 지금은 많은 연구를 해야지 알 수 있는 영역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런 연구를 누가 할 것인가? 앞으로 이런 연구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지도 편달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향을 피어 그분의 영혼이 평안함을 빌었고 앞으로 물려줄 우리들의 얼을 좀 더 잘 지켜 나가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해 차까지 가는데 비를 흠뻑 맞아 옷이 다 젖었다. 그리고 일원정을 찾아서 나섰다. 그쪽에서 약 3키로 내외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남상초등학교에서는 소풍을 일원정으로 왔답니다. 이 정자는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원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선생을 배향하는 장소이다. 이 일원정 정자 앞에는 비가 와서인지 황강에 황톳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황강이 흘러가는 길을 바라보는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를 감싸는 누각도 하나 세워져 있는데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단청도 칠해져 있고 나무로 만든 그 화려함은 어느 절에 못지 않은 예술작품으로 느껴졌다. 아마도 학문이 대단히 고귀하고 높아 그런 누각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일원정 방문을 끝으로 우리는 그동안 세웠던 모든 방문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가려 한다.
거창이라는 지역이 깊은 산중에 있어 인간왕래가 그리 잦은 동네는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선조들은 이런 척박한 땅에 세거를 하려면 사람으로 살아갈 구실을 찾고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야만 자신들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으로 여겨지네. 많은 학문을 경주한 것도 볼 수 있다. 각각의 자리에서 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언제나 흔적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비문, 사당, 서원, 재실 등등. 조선의 성리학이 거창에서 발원되고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사림(士林)들의 발판이 된 사람은 점필재 김종직부터 이다. 한원당과 일두 선생이 벼슬을 하셨고 그 뒤에 남명 조식 선생이 내암을 길러내셨고 동계 정온 선생도 동시대에 남명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정인홍이 실각되자 안음, 거창, 합천, 산음 모두 이 일을 기억하고 잠시 떨어지려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상감월에는 내암 정인홍의 친인척들이 숨어 들어와 동네를 이루고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내암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내암이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가 아니던가? 그리고 많은 서찰과 기록에도 내암의 문건은 모두 없어지고 말지.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100년 후 무신년(1728년)에 정희랑이 난을 안음에서 일으킨다. 거창에서도 또 이에 대항하여 창의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많은 공덕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오른쪽은 그후 200년간 배반의 땅으로 기록된다. 어사 박문수가 경상도를 둘러본 후 경상우도와 좌도를 차별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 때부터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경상우도는 버려졌고 경상좌도만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선비들은 거창에서 왜 이사를 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내 생각은 이렇다. 이사를 간다는 사실은 조상을 버리고 혼자 살려고 간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리학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되네. 이 버려진 땅에 사시는 분들은 어떻게 한평생을 자연 속에 묻혀 지냈을까? 답답한 삶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의 본연의 의지대로 사는 귀거래사 기분으로 사셨을까? 그대들의 부모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치열하게 사셨으리라. 그 누구에게 폐안끼치려 하셨을테고 자식 배 안골케 하려고 하셨으리라. 아마 선조들도 그리 사셨으리라 생각된다. 거창사람 특히 가조, 가북 사람들의 기본 정신은 참으로 기특하게도 반듯하다는 사실이다. 누구에게서 받은 교육인가? 우리들의 주변에서 가르친 것이려니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동네 사람들이 일심 단결하여 훌륭한 재목으로 길러 주시지 않았을까? 이분들이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사람 대하는 법도 가르쳤다지. 이 모든 것이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을 내포하고 있음이라. 글을 읽는 다고 모두 다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실천을 통해서 군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 그것이 삶의 방법이 되어야 함을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 오는 선비정신이 가조와 가북에 남아 있으니 우리의 복이 아니겠는가?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은 옛 것을 한번쯤은 살펴보자는 심산도 가졌다. 아직도 미학에 대해서는 공부를 더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거창의 건축미는 투박하다. 세심한 흔적은 잘 볼 수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인지는 좀 더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가조 선비들의 모임 장소가 많이 있듯이 가북에도 이에 못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가는 곳마다 정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내 어릴 때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이번에 방문한 곳은 아주 운이 좋은 것이다. 지금이야 큰길이 나서 다니기 불편함이 없지만 그 옛날이야 한번 들어가면 평생 그곳에서 살아야 하기에 땅의 생김새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살아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그렇게 자식들 공부를 시켰으리라. 부모님들의 굵은 손마디 마다 노력의 흔적이 보이고 언제나 쓸매끼리로 손톱을 잘라내는 소원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농사일로 언제나 손톱이 달아 손이 쓰렸지 싶네. 친구들아 우린 이런 공을 잊어서는 안될기다.
2014년 9월 2일 이명수 올림
첫댓글 거창에 몸담고 살고 있는 나도 다알지 못하고 다둘러보지 못한 곳들이
많이 있는것 같으네요
깨알같은 세심한 글솜씨와 함께 거창.가조 .가북 여행 잘한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좋은글 잘읽어보고 감사 드립니다.
잘 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