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제패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승리의 순간 샴페인을 마신 나폴레옹
출생사망
1769년 |
18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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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라고 말하며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비주류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만으로 프랑스 지도층에 진입하여 마침내 황제가 되었지만 결국은 머나먼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런 그를 잘 표현해주는 것이 바로 위의 명언과 함께 그의 영웅적 기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이라는 그림일 것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에 상당한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1769~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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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의도를 가진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신고전주의 작가로 나폴레옹 당시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였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지지자였는데 나폴레옹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에는 곧 그의 열렬한 숭배자가 된다.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제1통령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이탈리아로 기습 진격해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의 일전을 계획한다. 1880년 5월 마침내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협곡(Saint Bernard Pass)을 넘은 나폴레옹군은 마렝고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대승을 이끈다.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이 위업을 기념하는 초상화를 의뢰받게 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시작부터 철저히 나폴레옹의 정치적 계획 아래 진행된다. 다비드는 말을 탄 모습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말에 앉은 자세에서 장시간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런 영웅적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 개성의 표현이라며 요청을 일축한다. 실제 나폴레옹은 그림에서와 같이 악천후를 배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은 것이 아니라 먼저 군대가 험준한 지형을 돌파한 뒤 맑은 날씨에 안내인이 이끄는 노새를 타고 안전하게 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노새 대신 준마를 타고 있는 모습을 원했기 때문에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애마 두 마리를 모델로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 전면의 바위 돌에 그의 이름과 함께 한니발(Hannibal)과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의 이름을 세겨 놓았는데 이 역시 과거 알프스를 넘었던 역사적인 영웅들과 그를 동격화하려는 시도였다.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추가로 만든 세 작품을 포함해 모두 다섯 작품이 남아 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묘사와 달리 나폴레옹은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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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명언도 후세에 약간 변형된 것이다. 이 말의 유래는 나폴레옹이 그의 부하 장군인 르 마르와(Le Marrois)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Ce n’est pas possible, m’ecrivez-vous; cela n’est pas français”라는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이 말은 “장군이 나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는데 그런 말은 프랑스어가 아닐세”로 직역할 수 있다. 이 말이 간결하게 바뀐 것이다.
나폴레옹은 지중해에 있는 프랑스령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 마을에서 지역 명망가인 변호사 부친과 엄격한 절제를 강조한 모친의 8명의 자식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다. 이탈리아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과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안 형편은 그에게 다른 코르시카 소년들에 비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폴레옹은 1779년 1월 만 10세가 채 되지 않았을 때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의 한 종교학교에 등록했고 곧 이어 5월에는 브리엔느 유년 군사학교에 입학해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한다. 그는 학업 기간 내내 진한 코르시카 사투리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지만 수학을 비롯한 지리, 역사 과목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84년 군사학교를 졸업한 나폴레옹은 당시 권위를 자랑하는 육군사관학교(Ecole Militaire)에 입학한다. 그는 부친의 사망으로 인한 재정 문제 때문에 2년 과정을 1년으로 단축해 1785년 9월 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코르시카 출신으로는 첫 졸업생이었다.
졸업한 뒤 나폴레옹은 포병 소위로 지방연대에 부임한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코르시카로 귀향해 몇 년을 보낸다. 이 동안 나폴레옹은 왕당파, 혁명파, 코르시카 국민군 사이의 복잡한 싸움에서 코르시카 국민군의 지도자 파올리(Pasquale Paoli)의 부관으로 일한다. 이때 프랑스 육군은 나폴레옹에게 군대 무단 이탈과 2중 군적에 대한 제재를 가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은 파리로 가서 상부를 설득해 오히려 대위로 진급한다.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1792년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로 다시 돌아가나 프랑스와의 결별을 결정한 파올리와의 마찰로 1793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도피한다. 그 후 그는 1793년 툴롱 공략 작전에서 부상까지 입어가며 왕당파 반란을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공적을 세운다. 이로 인해 불과 24세의 나이에 일약 장군이 되고 곧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의 포병 책임자가 된다.
1794년 당시의 실권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milien Robespierre)가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 쿠데타로 실각하자 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나 2주 만에 풀려난다. 석방 후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75년 반동 쿠테타군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파울 바라스(Paul Barras)에 의해 발탁되어 10월 파리에서 일어난 국민공회(國民公會)에 대한 왕당파의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수훈을 세운다. 이 전공으로 부와 명성과 권력을 한손에 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파견군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796년 3월 9일 바라스의 옛 정부이자 당시 사교계의 꽃이었던 조세핀(Josèphine de Beauharnais)과 결혼한다.
결혼한 지 불과 이틀 후 이탈리아로 떠난 나폴레옹은 1797년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면서 프랑스의 힘을 과시한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의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한층 더 높아져 일부에서는 독재자의 출현 가능성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출병한다. 그의 목적은 이집트를 장악함으로써 당시 프랑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영국의 인도 루트를 차단시키는 것이었다. 인도의 무슬림군과 연합해 영국을 협공하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영국 해군과 일전일퇴를 거듭하나 전황이 여의치 않은 데다 프랑스 본국에서의 정세도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나폴레옹은 1799년 10월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곧 이어 쿠데타를 일으켜 세 명의 통령(consul)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자신은 원로원으로부터 임기 10년의 제1통령으로 임명된다. 세 명의 통령이 있다고 하나 실제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되어 그는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권력의 정상에 선 나폴레옹은 내정을 개혁하는 한편 1800년에는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당시 이탈리아는 그가 이집트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다시 오스트리아군의 지배에 들어가 있었다. 일부에서는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작전을 우려했으나 마렝고 전투의 승리를 포함해 결국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킨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화려한 업적과 나날이 치솟는 인기를 바탕으로 1802년 종신 통령을 거쳐 1804년 12월 2일에는 마침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나폴레옹 1세가 된다. 조세핀도 자연히 황비가 되었다. 이때 평소 나폴레옹의 예찬자였던 베토벤이 그의 즉위 소식에 실망해 〈영웅 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것을 취소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러시아에서 길을 잃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결성한 제3차 대프랑스 동맹과 전쟁을 치른다. 10월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는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 패배 제해권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그로부터 6주 후인 12월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을 격파해 프랑스 육군의 위상을 전 유럽에 떨친다. 나폴레옹은 곧 샤를마뉴 대제에서부터 거의 1000년간 이어져온 신성로마제국을 사실상 해체시킨다. 이에 위협을 느낀 프로이센이 영국·러시아·스페인 등과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지만 이들과의 전투도 승리한다. 1807년에는 폴란드에 진격하고 이어서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쫓고 스페인 통치권도 확보한다.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역시 성공적으로 방어한 나폴레옹은 1810년 오랜 연인이었던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스와 혼인한다. 이 일로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관계였던 교회와 더욱 거리가 멀어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때까지 유럽은 그야말로 나폴레옹의 세상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프랑스의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1812년 6월 23일 주위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러시아 원정이 그를 몰락으로 몰아넣는다.
러시아 원정을 떠난 프랑스군은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도주한 러시아군의 전술과 동토의 혹한에 시달리면서 원정 실패를 인정하고 비참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전승을 구가하던 프랑스군의 패배를 목격한 주변국들은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해 1813년에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격파한다. 1814년에 들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3월 31일에는 마침내 동맹군에 의해 파리가 함락되기에 이른다. 전쟁의 패배에 부하 장군의 배신까지 겹치면서 결국 나폴레옹은 4월 16일 폰텐느 블로우 조약에 의해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된다.
나폴레옹은 이듬해 2월 26일 엘바 섬을 탈출하고 3월에 파리로 돌아가 다시 황제에 즉위하나,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재기에 실패하고 만다. 그 뒤 남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고, 결국 1821년 5월 5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프랑스, 군대, 군통수자, 조세핀(France, L’arrmeé, Tête d’armée, Joséphine)”이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유언처럼 누구보다도 프랑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은 그만큼 시대의 영웅으로 또 매력적인 풍운아로 지금까지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그가 프랑스의 상징인 와인과 샴페인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전투에 꼭 가지고 다닌 샹베르탱 와인
나폴레옹의 술 중에서 먼저 부르고뉴 지방의 유명한 명품 와인 샹베르탱(Chambertin)을 들 수 있다. 샹베르탱은 지역-마을-포도밭 순으로 등급 체계가 나뉘어져 있는 부르고뉴 AOC 지역에서 코드드뉘(Côte de Nuits) 지역, 주브레 샹베르탱(Gevrey-Chambertin) 마을에 속해 있는 특등급(그랑크뤼) 포도밭의 이름이다. 주브레 샹베르탱 마을에는 무려 9개의 그랑크뤼 포도밭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샹베르탱이 가장 유명하다. 나머지 8개의 그랑크뤼 포도밭에서 나는 와인도 샤르메-샹베르탱(Charmes-Chambertin), 샤펠-샹베르탱(Chapelle-Chambertin) 등에서와 같이 모두 샹베르탱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 명성이 샹베르탱에는 미치지 못하고 유일하게 샹베르탱 클로드베즈(Chambertin-Clos de Bèze) 와인만이 샹베르탱에 필적할 품질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드넓게 펼쳐진 샹베르탱 포도밭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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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베르탱 포도밭이 조성된 것은 12세기에 들어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7세기부터 베즈(Bèze)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수도원 소유로 클로드베즈 포도밭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베르탱(Bertin)이라는 사람이 자기도 바로 옆에 포도밭을 만들면 똑같이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이 포도밭을 ‘베르탱의 밭(Champs de Bertin)’이라고 부르게 되고 이 말이 줄어들어 샹베르탱이 되었다.
샹베르탱은 피노누와 포도를 주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으로 강하고 풍부한 맛을 자랑한다. 샹베르탱은 특히 예로부터 ‘와인의 왕(King of Wines)’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높이 평가되어 왔는데, 같은 부르고뉴 AOC에서 지명도 측면으로 샹베르탱에 견줄 만한 와인으로는 로마네 콩티(Romanée-Conti)와 몽하세(Montrachet) 정도만이 거론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샹베르탱 역시 부르고뉴 지방의 다른 와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소유자들에 의해 밭이 분할되어 현재 샹베르탱에는 무려 23명의 소유자가 존재한다. 이 때문에 똑같은 샹베르탱 상표의 와인이라도 생산자에 따라 그 품질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 상당수 와인이 샹베르탱의 명성에 못 미치는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샹베르탱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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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이 샹베르탱 와인을 어떤 경로로 처음 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와인을 무척이나 즐겨 마신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50여 차례 각종 전쟁에 나서면서도 절대 잊지 않고 이 와인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러시아 원정 때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나서 그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크렘린궁에서 샹베르탱을 마셨다. 그러나 그 후 러시아에서 패주할 때는 코사크(15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까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있었던 군사 집단으로 구성원의 출신 국가는 다양하다.) 기병들에게 샹베르탱 저장고가 노획당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한다.
나폴레옹의 샹베르탱 와인 사랑을 화제로 삼아 일부 호사가는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결국 재기에 실패한 이유도 전투 전날 샹베르탱 와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이를 마시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폴레옹은 술을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술이 센 편은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샹베르탱 와인을 즐기면서 종종 물에 타서 마셨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독특한 음주 취향이다.
승리의 순간 샴페인이 필요하다
샹베르탱 이외에 나폴레옹과 인연을 맺은 술에는 모에 샹동(Möet & Chandon) 샴페인이 있다. 1743년 에페르네 마을에서 클로드 모에(Claude Möet)에 의해 창립된 이 회사는 19세기 들어 나폴레옹과의 인연으로 일약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792년 클로드 모에의 사망으로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게 된 손자 장 레미 모에(Jean Rémy Möet)는 1802년 에페르네의 시장이 된다. 그리고 1804년 새롭게 지은 회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나폴레옹과 그 일행을 성대히 대접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모에 샹동 샴페인을 대접한다. 나폴레옹은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명예로운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를 수여한다. 이후 이 회사의 샴페인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 사교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모에 샹동 사는 나폴레옹과의 이런 추억을 기리기 위해 1860년대에 출시되어 지금까지 가장 판매량이 높은 샴페인인 브뤼(Brut) 제품에 황제라는 뜻의 ‘임페리얼(Impèrial)’을 상표에 넣는다. 오늘날 국내에서도 접할 수 있는 ‘모에 샹동 브뤼 임페리얼(Möet & Chandon Brut Impèrial)’이 바로 그것이다.
모에 샹동 브뤼 임페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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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샴페인은 승리의 순간 마실 가치가 있으며 패배했을 때도 필요하다(In victory you deserve champagne, in defeat you need it)”라고 했다. 우리도 개인적인 성취의 순간이나 아니면 좌절의 순간, 나폴레옹의 추억이 스며 있는 술을 한잔하면서 그의 영웅적 기백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