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104)
형제 사이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2022. 09. 21. 수)
본문 : 눅 17:1-4
눅 16장은 제자들이 재물에 대해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한데 모여 있었습니다.
이어 눅 17장에서는
‘제자가 갖추어야 할 신앙의 기본 덕목’ 4가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 앞의 두 가지는
‘형제 사이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1-4)입니다.
- 뒤의 두 가지는
‘하나님을 향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5-10)입니다.
오늘은 먼저 ‘형제 사이에서 갖추어야 할 기
본 덕목’(1-4)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1-2절>
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절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여기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실족’입니다.
이 말의 헬라어 ‘스칸달론’은 ‘미끼를 건 막대기’
즉 ‘덫’이라는 뜻인데, 어떤 행동이나 사건이 미끼가 되어
다른 사람이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바로
‘실족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예를
신약(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롬14: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20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로마교회 안에 무슨 대단한 일로
갈등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음식 문제, 먹는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우상에 드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 합당한가,
아닌가에 관하여 성도들 사이에 이견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상대방을 비판하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권면하기를 이러한 일들로 인해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러한 일들은 매우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진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 서로 비난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상대방이 불편해하거나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말라”(13절)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시험에 들 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음식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14절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20절b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바울에게 있어서 음식의 문제는
하나 거리낄 것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어떤 이들에게 거리낌이 된다면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먼저 배려하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고전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자기 나름대로는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주장을 강요한다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갈등이 생기고, 교회가 분열하게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1)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있을 수는 없다’ 하지 않으시고 ‘없을 수는 없다’ 하십니다.
우리들이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동시에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불가피성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지중에 그럴 수는 있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고의성을 가지고 미끼를 던져서
상대방을 실족하게 했다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합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특히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했을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작은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작은 자’ 또는 ‘소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주님은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18:10)고 말씀하셨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들을 ‘작은 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나보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작은 자’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적은 분들이 ‘작은 자’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하고,
양보하고 이해할 책임이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중 첫 번째 것은
작은 자를 실족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교훈입니다.
<3-4절>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절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여기에서 ‘형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한 교회를 섬기면서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입니다.
만일 어느 믿음의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단계로 대처해야 합니다.
1) 먼저 경고해야 합니다.
주님은 먼저 형제의 죄를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한 생활방식이나 성격 차이를 가지고 지적하라는 뜻이 아님).
이것은 묵인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꾸짖어 회개할 길을 열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의 죄를 보고도 묵인합니다.
상대의 체면 때문에 묵인하고,
혹시라도 성도가 교회를 떠날 것을 두려워해 못 본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믿음의 형제를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처럼 경계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경고 없이 회개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경고를 하는 방법은
마18:15-20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마18:15-17>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한편 경고를 하는 사람이 반드시
주목해 보아야 할 문구가 있습니다.
3절 제일 앞 문장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 말씀이 경고하라는 말씀보다 앞에 있습니다.
경고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요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한 사도 바울도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믿음의 형제가
잘못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한 심령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사랑의 동기’에서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만일 우리의 경고를 듣고 그가 회개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조건절입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필요 충분 조건’입니다.
상대의 회개가 없음에도 일방적으로 용서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아닙니다.
‘화해’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반대로 나는 회개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용서했다고
그것으로 됐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사람에게 지은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므로
그것으로 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마5:22-24>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절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러면 용서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요?
4절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심지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같은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서 회개한다고 하더라도 ....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 18장에는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하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대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마18:21-22).
유대인들에게 7은 완전수로 통합니다.
3은 하늘의 숫자이고(삼층천), 4는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땅의 숫자입니다.
3+4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합한 완전수입니다.
최대한을 의미하고 완벽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누군가의 잘못을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최선이며 완벽한 용서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70×7, 490번이라는 뜻일까요?
이것은 수치계산으로 나오는 정확한 횟수가 아니라
그 제한을 아예 무너뜨리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즉 끝없이, 한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일곱 번’과 ‘일흔 번’이란 표현은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복수와 관련하여 이미 나온 표현입니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죄악의 세대를
상징하는 복수의 노래를 창세기에 남겼습니다.
<창4:23-24>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복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보복의 칼에서 보호해 주셨습니다(창4:15).
그러나 그의 후예는 오히려 그 보복의 정신을 증폭시켜
증오심을 후대에 물려 주었습니다(77배).
과도한 복수가 정당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주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멕의 보복의 수를 용서의
수로 바꿔 놓았습니다.
동태복수법을 뛰어넘어,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하되
번 수에 구애받지 말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셨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윤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계명이요,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 위에 세워진 교회의 새 윤리입니다.
<더 큰 용서를 받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해는 되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렵지요? 분명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요구처럼 여겨집니다.
“그럼 우리는 매일 용서만 해주는 호구로
살라는 것인가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매번 우리만 억울한 일을 당하며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귀한 깨달음을 주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18:23-35>
23절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절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절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절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절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절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의 비유의 결론은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해 주는 것보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용서가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에 수십 번도 더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그래도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를 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구원받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가 범한 단 한 번의 실수와
죄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입에 달고 사는 주기도문에서도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은 ‘제자가 갖추어야 할 신앙의 기본 덕목’ 4가지 중....
먼저 ‘형제 사이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하나님을 향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5-10)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 기본 덕목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현실적으로
죄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 실족하는 사람도 있고,
상처 입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나로 인하여 나보다 연약한 누군가가 실족하지
않도록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실족한 형제, 죄 가운데 거하는 형제를 정죄하지 않고.....
‘온유한 심령으로’ 권면하여 회개케 하고,
또한 용서를 구하는 형제를 지체하지 말고 용서하여,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더 큰 용서’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