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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실 빈맥" 과의 투병은 계속되지만.......
1.발 병
2. 1차 진단
3. 2 차 진단 "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야! 기적 !"
4. 병원 생활
5. 일어서야 한다.
6. 합병증이 오고 " 암은 아니어서 다행이군 ! "
7. 세상은 아름답다.
[[나의 진료 병원]] 연세세브란스 심혈관 센터
1. 발 병
1989년 11월 29일 아주 맑은 좋은 날이었다.
삼천포 화력 발전소에 과장으로 진급하여 부임한지 9개월 째..... 몸이 조금 피곤했던 탓일까,
점심을 먹기 위해 직원들과 같이 식탁에 둘러 앉아, 도시락을 풀고 숟가락을 드는 순간...이상 하리만큼 점심을 들기가 싫다. 그리곤 '다음에 먹어야지' 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몸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구름위로 몸이 뜨는 것 같은 느낌! 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몸둥어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착각과 힘이 빠지는 상태, 무기력의 상태로 빠지는 것 같았다. 간호원을 불렀다. 혈압을 재어 보라고 했다. 이상이 없단다...조금 낮은 것 같긴 한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본능의 육감이었을까? 병원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을 했다.
운전기사가 점심 식사 중이란다.
불안한 가운데서 잠시 기다렸다. 죽음은 예견되는 것일까...
빨리 옮겨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리고 난 2.5톤 더블캡에 올랐다. 응급실을 가는동안 하늘이며 산천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마음은 한 없이 불안했다.
병원 응급실의 간판이 들어 왔다. 빨리 들어가야지.....그리곤 정신을 잃었다.
내 주위에 아내가 있었다. 의사, 동료직원, 부하직원, 간호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상했다.....꿈인가 싶었다. 내 몸에 산소호흡기가 부착되었다.
지금도 이상한 점이 있다...아내는 어느새 왔을까...?
손과 발이 마비가 되는 듯 싶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답답했다.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신은 자꾸 흐려지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갔을 까....앰브런스에 실려 진주의 큰 병원*으로 실려 갔다.
진주병원의 응급실에서 대기 중,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뒤가 마려웠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곤 또 정신을 잃었다. 난 어느새 병실에 누워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부착한 체.....
(*주 ; 병원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오진으로 난 1년간을 고생했기 때문에..)
2. 1차 진단
2주간의 정밀 진단과 입원 끝에 난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병명은 "항공장애"라는 병명이었다.
이름도 생소했다. 항공장애? 항공장애?
가슴이 뛰고 답답하며, 어지러웠다. 불안하고 손과 다리가 약하게 떨렸다.
그래도 퇴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가족과 친구도 모두 다녀갔다. 이렇게 나의 병원 생활은 시작이 되었다.
나의 진료과목은 "내과"에서 "정신과"로 바뀌었다.
이상한 질문-내가 보기에는 나의 병에 도움이 하나도 안가는 질문-을 의사에게서 들어야 했다.
그리곤 난 성실히 대답했다. 아주 정확하고 진실하게....심지어는 아내와의 방사까지도....
그리곤 2주간의 약을 받아 오는 게 나의 진료고 치료였다. 그러나 나의 병은 나아지지를 아니하고 일주일에 거의 주기적으로 2 회에 걸쳐 처음 내가 쓰러지든 형태가 계속되었다. 그 때 마다 난 "우황청심환" 을 복용했다. 이건 내 스스로 판단한 처방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일 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신과의 약은 정말로 독했다. 약 기운이 하루 종일 나의 몸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곤 주위에서는 별의 별 처방들을 제안 해 왔다. 물론 고마운 제안들이었다. 그러나 난 그런 면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지식했고 완고했다. 내가 내 병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이 되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몸이 허약해서 일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뱀탕을 먹어보라고 제안해 왔다.
한달간에 걸쳐 한잔에 30,000원 씩 하는 뱀탕을 아침 저녁으로 한 달간을 복용했다. 그러나 내 몸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정력이 좋아진다는데...성욕마저도 일지 않았다. 돈이 너무 들어 한 달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세월은 그래도 가고 있었다. 불안하고 힘든 상태로 일년이란 세월이 가고 있을 즈음 삼천포 시내의 동내 병원인 "김내과 병원"의 젊은 의사-(잊지 않고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는 아무래도 심장병 같으니 서울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권유했다.
종합병원의 진단과 개인 젊은 의사의 진단사이에서 난 갈등이 일기도 했다.
3. 2차 진단
해가 바뀌고 1990년 9월의 어느 날, 난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을 찾았다. 시골에서 서울의 병원을 선택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서울대병원, 고려대 병원, 이대병원.....어디로 가야 되는가 ....? 어느 잡지에선가 신문에선가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홀트아동복지재단" 이 신촌세브란스 병원과 관련이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재단이 있다면 심장병은 잘 보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촌세브란스 병원을 선택했다.
마침 일주일 간의 교육출장 중이라서 예약을 하고는 교육이 끝나는 날, 나의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나의 그 동안의 증상을 이야기하고, 지금 이곳에 오는 중에도 계단에 앉아서 쉬어야만했다고 ...' 그 동안의 증상을 말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의사선생님이 다짜고짜로 입원을 해야 된다고 했다.
"이 환자 바로 입원시켜, (?*)호 병상 비우고..." 간호사에게 지시하는 것이었다.
"당신 아직 까지도 살아 있는게 기적이야 기적!" 이라고 나에게 말하면서........
바로 입원결정서가 작성되고 난 집으로 가 보지도 못한 채 입원을 했다...
얼마나 위험한 병 이길래 바로 입원을 시키는 것일까, 서울의 종합병원에 입원 할려면 3~4 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의아해 했다. 그러나 아!~~, 그러나 일반 병실이 아니었다.
-- 입원 수속을 하고는 병상의 환자를 기다리는 동안 난 담배 한 값에서 무려 13 가치의 담배를 피웠다. 입원실이 비는데 하루 종일이 걸렸다.--
입원실은 중환자실 독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이라 24 시간을 감시해야 하는 병이었다.
이렇게 중환자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담당 의사는 전문의 김성순 박사였다. -(부정맥에 대해 권위자이시다.)
그리고 나의 병명은 "심실빈맥증" 이라는 병명이었고... 이때부터 아내는 나보다 더한 고통을 받기 시작해야 했다.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는 보호자의 심정은, 기다려 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모른다. 중환자 실에서 죽음을 맞은 환자가 나오는 것을 보지 않고는....
4. 병원생활
중환자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혼자만의 공간이...고독과 죽음에의 공포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시간이 흐를수록 심화 되어 갔다. 중환자실에서 3일을 보내며 나의 병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앞으로의 수술 및 치료과정을 설명 들으며 난 무기력한 실험실의 쥐가 되어가고 있었다.
3일이 지나고 수술실로 향했다. 두렵긴 했지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인지, 무기력인지 모르게 의사의 명령에 따라 내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수술실, 단순한 중앙의 조명등, 저 앞 벽에 달린 모니터, 넓은 실내 한 복판에 놓여 있는 침대, 가운을 입고 움직이는 의사선생님들... 어릴 때 두려움으로 보아왔던 바로 도살장과 같은 분위기.....
드디어 내 몸은 손과 발이 묶이고, 난 극도의 긴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사타구니를 절개 하고 동맥을 통해서 심장까지 전선을 넣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나의 육체는 공포로 인해 체온은 떨어지고 싸늘해져 갔다. 전선이 동맥들을 통해 심장으로 가고 있는 동안,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이야기를 어떻게 이곳에 기록할 수 있을 까.....긴 시간이었다는 것 외에는 표현 할 방법이 없다.
~~무언가 꿈이 깨어졌을 때 내 육체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고 아주 춥다고 느끼고 있었다. 심장부위는 심한 통증이 지속되었다. 웅성대는 의사들의 움직임 속에서...
난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것이었다. 무려 6시간이상 된 것 같다.
그렇게 4일째 되던 날이 가고, 난 걱정과 긴장 속에서 나의 삶을 기도하던 아내를 병상에서 손을 꼭 맞잡고는 눈물이 흘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것이었고, 이 심장 마비를 막는 것이 나에 대한 치료였다. 일 주일 동안 많은 약을 복용시켰다. 일 주일 후에 다시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일주일 후, 난 다시 수술실을 들어가기 위해 전야를 맞았다. 수술부위를 면도하는 시간, “아~~ 또 시간이 다가오는 구나”하고 두려워했다. '아무렇지도 않을거야' 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육체는 파래지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격었으니 이번도 격을 수 있겠지.....그렇지만 만약 내가 못 깨어난다면 그게 죽음인가? 그러나 이번만 지나면 살아날 수 있다는데.....용기를 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가고 있을 까? 아내는 남편을 수술실에 실려 보내고는 얼마나 발을 동동이며 마음을 졸이고 있을까? 아이들이 만약에 내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이게 세상의 마지막인가? 손과 발이 서서히 죽어갔다. 춥다고 느꼈다. 이불이라도 있었으면....
안심하라는 박사님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조금만 참으라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가슴이 답답하게, 숨 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꿈이었다. 아주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언젠가 하늘 나라 천당의 모습을 그린 영화 같았다. 아주 큰 천둥과 벼락 치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웅성대는 소리를 들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나의 머리와 팔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긴 시간이 또 지나가버렸다. 이젠 끝이 났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의 신호였다. 일주일간 먹은 약이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약의 종류가 바뀌고 투약의 량이 바뀌고....다시금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지금 심장모니터를 연결한 상태라 들리는 건 오직 뚜!~뚜!~뚜!~ 하는 짧고 냉랭한 전자음만이 들리고 있다. 1평 반 남짓한 나의 공간, 발 쪽엔 밖에서 날 감시할 수 있도록 큰 유리창 벽, 창 앞에 앉아 있는 간호사......저 간호사가 없다면~~옆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 까?
중환자실 저편에는 칸들이 막히지 않는 침상들이 있는 곳인데... 난 왜 독방일까? 무서웠다.
두려웠다. 혼자라는 것.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 잠시동안 볼 수 있는 아내의 얼굴.... 저 기계음 소리가 안들리면 난 죽은 것이지...기계음 소리는 계속 들려야 한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기계음 소리를 들어야 하니까.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냥 읽었다. 공포를 잊기 위해.... 가슴이 벌렁 일 때 마다 울리는 기계음!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책을 읽으면서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을 자면 그게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내 나이 39 살.....억울했다. 지금 저 발 아래 서울의 밤은 얼마나 아름답고 생동이 넘치는 곳인가.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그런데 난 왜 사라져야 하는가. 아냐, 난 살아야 돼.... 살아야 돼....살아야 돼!!!!~~~~
남들은 병원 밥을 먹지 못하겠다고 했다. 반찬하나 남기지 않고 들어오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싹, 싹 비웠다. 먹어야 산다. 오직 그렇게 판단했다. 정말이지 밥 그릇을 핥아 먹듯 했다. 간호사들이 쑤군대는 이야기가 들렸다.
"저렇게 밥 잘 먹는 환자는 처음이야....."
또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내일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날인데.......정말 두려웠다. 눈물이 나왔다.
박사님에게 간청을 했다...이대로 살 수는 없느냐고. 못 깨어나면 죽음 아닌가?
세 번째 수술실에의 입장은 내게 있어 정말 죽음과 삶의 기로였다. 영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난 이미 수술실의 모르모트........운명처럼 숙명 처럼 나약하게 수술실로 실려 갔다. 침대에 누워 실려가는 나의 시야에 힌 병원 벽이 천장이 삼차원의 공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약 3 ~ 4 분 정도의 거리지만 왜 그렇게도 그 길이 멀고 먼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만으로는 끝이 나겠지...난 살 수 있을거야!"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선생님을 믿었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기를 빌었다.
이제 완전히 몸도 마음도 지쳤다. 죽음, 삶, 무섭고 두렵고, 하나님을 불렀다.
벌써 39 일 째가 가고 있었다. 그 동안 나를 아는 모든 분들이 중환자실을 다녀갔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었다. 가까스로 허락을 받았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친구들과 함께 중환자실을 나왔다. 눈이 부셨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인걸......
친구들 앞에서 난 억지로 웃고 있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마지막 보는 장면이라고 생각이 들곤 했다. 억울했다.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싸늘한 감촉, 공포로 내 입술은 파랗겠지. "선생님...살려 주세요!" 선생님의 손을 꼬옥 잡았다.
믿어야 한다. 전선이 핏줄을 타고 들어가는 감촉은 피아노선으로 잇발 사이를 건드리는 느낌 이었다. 긴 시간이다. 정말로 긴 시간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의사들의 손 놀림. 그들의 여유있는 자세가 나를 조금은 안심을 시켰다. 이윽고 전선이 다 끼워지고, 박사님이 기기를 조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아팟다.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견딜 수가 없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땀이 났는 것 같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이를 악 물었다. 몇 번인가 반복되었다. "살려 주세요 ~ ~ 제발 살려주세요"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지를 아니한다. 갑자기 웅성이는 듯 했다. 박사님이 무릅을 치는 소리와 동시에 잊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흥분된 목소리였다.
"됐다!! 당신 이제 살았어!"
박사님이 나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가슴의 요동이 중지되면서 기쁨 보다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추석도 지나갔다.
43일째 되던 날, 죽을 때 까지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처방과 함께 집으로 돌아 왔다.
절반은 죽은 시체가 되어..........
5. 일어서야 한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한없이 기뻤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동안 또 죽음과 싸워야 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중환자실에서도 걸어 다니곤 했는데, 마지막으로 수술실에서 나오고 부터 전혀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갓집에서 15 일간이나 있었다. 물론 그 동안 심장마비 증세가 오는 바람에 119 를 불러 응급실을 두 차례나 가야만 했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정말로 간신히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정말로 아름다운 산하...경부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동안,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심장의 고통과 싸워야 하는 내 모습이 아주 서글퍼지기도 했다. 집에는 도착 하였건만....
간신히 숨을 쉬며 3~4 일이 흘렀다.
일어서야 했다. 그러나 이게 왠 일인가 일어 설 수가 없었다. 숨이 너무 차고,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벽을 잡고 일어섰다. 한 발, 두 발,...주저 앉고 말았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일어서야 한다. 새 날이 밝았다. 일어 서야지....벽을 짚고 일어섰다. 어젠 두 발을 갔다. 오늘은 세 발은 가야지, 눈물을 흘리며 벽을 짚었다. 한 발, 두 발, 세 발..... 그래 몇 번인가 죽음과 싸워 왔다. 오늘은 네 발..
일주일이 지나자 문을 열고 나 올 수 있었다. 오늘은 현관까지 ..... 일주일이 지나갔다. 병원을 나온지 벌써 3 주째...그러나 아직도 난 걸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어제 보다는 조금 더, 한발이라도 더 걸어야만 누웠다..... 열 발, 스무 발....... 11월 의 싸늘한 바닷바람이 내게는 싱그러웠다.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 혼자 걸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쓰러지면 죽는다는 공포 때문에 혼자 서는 다닐 수가 없었다. 아내가 항상 옆에 있었다. 그리고 병원 주위를 걸었다. 다른 곳은 갈 수가 없었다. 그 동안 회사에서는 많은 배려가 있었다. 직원들의 성금이 모아졌고, 특히나 영월 사업소의 직원들까지도 성금을 보내왔다. 명단을 꼬옥 쥐었다. 모두가 빚인걸....너무나 고마웠다. 아내도 울고 나도 울었다.
____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들에게 모두 축복을 주옵소서. 그렇게 해서 4개월이 지나서야
혼자 걸을 수 있고,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은 성하지를 않았다. 회사에서는 하루 종일 책상을 지키며 확인하는 일 외에는 하지 못했다. 내가 빨리 일어나서 회사를 위해 지금의 빚을 갚아야 겠다고 매일 기도했다. 어느덧 난 교인이 되어 있었다. 아내가 하나님에게 매 달렸다. 주님의 뜻을 따라 가겠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항상 빌었다.
"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게 준 고통은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시험은 제 하나로 만족 하시고, 더 이상 저와 같은 사람이 생겨나지 않도록 거두어 주소서..."
하나님에게 힘을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먹어야 산다고 생각했다. 닥치는 대로 열심히 먹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난 일어서야 한다~~!!!!!!
6. 합병증이 오고
그렇게, 그렇게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운동과 심한 일은 전혀 못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별 탈이 없었다. 불편한 것은 무언가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글을 한 시간 이상 쓰면 피곤이 겹치기로 몰려오는 듯 했다. 휴식시간이 길어졌다. 주위의 협조 -- 내가 신경을 쓰는 일이 없도록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배려를 하곤 했다.--로 회사를 나가는 일이며, 가정 생활을 하는데도 큰 무리는 없었다. 단지 지속적으로 일을 하게 되면 피곤이 겹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항상 불안한 속에서, 그러니까 멀리 여행을 하려 해도 병원이 멀어지면 왠지 불안했다. 언젠가 있을 수도 있는 심장마비의 돌발 사태로부터 항상 응급처치가 가능하도록 병원 주위에서 생활을 했다.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기도가 내 마음과 육체에 운동과 안정을 함께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늘 남을 위해 기도했다. 내 자신은 일어 설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내 마음이 무척이나 평온하게 되곤 했다. 찬송은 나에게 호흡운동과, 머리에 맑은 피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열심히 다녔다. 어머님은 늘 저를 위해 기도했고, 어머님에게 남은 생애 효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교회에 나가는 걸 보고 어머님은 그렇게 기뻐 할 수 가 없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지만 아직도 심장의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는 일이 계속되었다.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전근을 하였다. 부모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는 것이 "효" 라고 생각을 했다.
"코다롱" 을 먹는 한 심장마비는 안 일어 날 것이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믿고 또 믿었다. 내가 병을 치료 할 수 있는 건 의사선생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럭저럭 4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고 항상 생각했다. 난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항상 마음을 다지곤 했다. 모든 게 순조로울 즈음 체중이 눈에 띄게 빠지고 있었다. 보름사이에 10 kg 이상이 빠진 것 같았다. 힘이 없었다. 한 달에 한번씩 가는 진료일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병원으로 선생님에게 상의를 했다. 살이 보름 만에 10 kg 이 빠졌다고 알리자 곧 바로 응급실로 올라 오라는 전갈이 왔다. 다시금 입원을 했다. 온갖 검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온 육체의 기능을 모두 Check 했다. 왜 이렇게 심각하게 검사를 하는 것일까.
10일간의 검사가 끝나고 저녁 왕진 때 선생님께서 결과를 알려 왔다.
"음... 암은 아니어서 다행이네..!!"
앞이 캄캄했다.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가 나를 아주 두렵게 했다.
그 동안 다른 검사와 함께 암 검사를 점검한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눈치를 챘다.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이 각종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
그 다음날부터 진료 과목이 하나 더 늘었다. 추가된 병명은 "갑상선항진증" 이었다. 2 주간의 입원 생활 끝에 퇴원을 했다. 또 시련이 오고 있었다. 체중이 회복 될려면 갑상선 항진증이 어느 정도 치료가 되어야 했다. 갑상선과 또 싸움이 시작되었다. 갑상선항진증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목젖 부위와 눈이 튀어 나온다는 병이었다. 눈이 많이 튀어 나온 것 같았다.
심장과 싸우고 갑상선과 싸우는 동안 그래도 난 믿고 믿었다. 조금만 있으면 의학의 발달로 완치 되도록 치료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앞으로 5 년만 버티면 무슨 방법이 나오겠지....
그런데, 그런데....
또 세월이 2년이 가는 어느 날, 심한 가슴의 통증으로 응급실로 실려 갔다. 영월서 서울까지는 긴 긴 시간이었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생각했다. 저 앰브란스의 싸이랜 소리 좀 꺼 주었으면 ....
정말 긴 시간이었다. 이곳에다 그 때의 생각을 모두 적는 일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2년 마다 주기적인가? 다시 2년 전과 같은 검사가 시작되었다. 심실빈맥으로는 심장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너무나 많고 많은 상념들이 내 머리 속에서 그림같이 흐르고 있었다. 삶이란 무었일까..... 이번의 발작원인은 무었일까? 가슴의 통증을 안고 검사를 시작한다. 병원생활이 내게는 더 안락한 것 같았다. 우선 심장발작이 일어나도 바로 조치를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아주 안정이 되는 곳이 바로 병원이다. 20 일간의 병원 생활을 하고는 퇴원을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왼편 심장의 근육이 엄지손가락 정도 굳었어요"
더 이상 굳지 않게 치료를 한다는 것이었다. 심근경색이 온 것이다. 의지가 많이 꺾기고 있었다.
도저히 집에 가서는 살아 날 것 같지 않았다. 몸도 많이 쇠약해 있었고, 마음도 지쳐 있었다. 아내와 상의 끝에 산속에 가서 휴양을 하기로 했다. 모든 걸 잊고 싶었다. 휴양지의 조건을 물색했다.,.. 첫째 병원이 가까워야 했다. 두 번째는 너무 외롭지 않아야 했다. 세 번째는 적당히 운동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시골 병원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월에서는 휴양을 할 수가 없었다. 원주 치악산 자락을 정했다. 아내와 민박집을 정하는 날.... 아내는 아마 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 소쩍새 우는 마을 ...이름이 맘에 들었다. 휴양이 시작되었다. 모든 걸 잊기로 했다. 오직 살아야 된다는 것 외에는 모두 잊기로 했다.
아침 6시면 일어 났다. 5월의 산하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걷는 운동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오전과 오후를 나누어, 숨찬 가슴을 부여 안고 맥박을 점검해 가면서 오전 두시간, 오후 두 시간을 걸었다. 산길을 걷고 걸었다. 무섭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다. 소쩍새 우는 마을엔 정신박약아들을 돌보는 "소쩍새 우는 마을" 이란 요양원이 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이기지 못하는 지체부자유 아이들과 정신박약아 들이 산책을 하는 나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난 얼마나 행복한가? 혼자서 걸을 수도 있고, 정신도 맑다... 심장의 고통을 빼고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용기를 잃지 않기로 굳게, 굳게 다짐을 한다. 하루하루 나의 육체는 조금 씩 회복이 되어갔다.
" 그래, 난 오래 살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등질 순 없다."
무었이든지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관용을 베풀기로 정했다. 살아 있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인간의 욕심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저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또한 나도 아무것도 아니다. 억겁의 세월 속에 한 점,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일 뿐.....
오로지 먹는 것은 감사히 그리고 많이, 마음은 항상 아름답게, 육체는 언제나 운동을 ......
7. 세상은 아름답다.
오늘도 저 푸르른 하늘아래 대관령의 모습은 웅장하기만 하다. 쪽빛 하늘에는 힌 구름이 몇 점 흐르고.. 산허리에 피어나는 안개는 구름인가? 연기인가? 정말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출근길마다 대하는 대관령이긴 해도 항상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지난해도 2년 주기에 걸리는 해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
벌써 10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삼시 세끼 거르지 않고 나와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다. 항상 나와 함께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는 친구들...
@ 코다롱(아미오 다롱) 1번, @아달라트 3번, @아스트릭스 1번, @이스모 3번, @안티로이드 2번 정말로 그림자처럼 나의 분신처럼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아끼는 나의 동반자...이 금자 님.
그동안 어머님을 여의고는 많은 슬픔에 쌓이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잘 유지되고 있다.
산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바다를 바라보며, 갈매기를 쳐다보며 살아온 시간들을 재어 본다.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 왔는가?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일까? 아내와 떨어져 살기를 벌써 일 년, 이젠 혼자서도 어느 곳 어디를 가더라도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고, 나의 육체를 다스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의 정명(定命)은 120 세라고 한다. 벌써 그렇게도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다. 쓰러지던 날로 부터 어언 10년....아직 치료방법이 개발되지 않아 아쉽긴 해도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고, 내 나이도 50이 되어간다. 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처음 병원을 퇴원하는 날로 술과 담배는 인연을 딱 끊었다. 마음의 욕심을 버리는 게 제일 큰 손실이었다. 마음을 비워야만 심장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아주 규칙적으로 식사를 했고 한끼도 거른 적이 없다. 그러나 아직도 미흡한 건 운동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심장에 부담이 가는 운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보니 특별히 할 운동은 없지만... 궁도를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운동과 일들을 찾아 가능하면 많이 일을 하고 있다. 게으름은 심장을 약하게 하는 일이고 그건 내 생명의 연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게는 시간이 없다. 하루가 좀 길었으면 하고 늘 생각한다.
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세상에 , 나의 마지막 힘을 다해 아름다움을 그려 갈려고 난 24시간 노력하고 있다.
하늘의 힌 구름이며 새털구름,
쪽빛 하늘과 바다. 넘실대는 파도,
조용히 펼치는 백사장의 노트,
갈매기를 친구 삼아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검은 얼굴,
호수 위에 빗방울이 동그라미를 그릴 때 마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어린 날의 추억,
담배연기 피어오르는 해변 가 찻집의 음악,
사무실의 창 아래로 펼쳐지는 황금의 벌판 위에 일하는 농부의 모습하며,
장보러 가는 아낙네의 등에 업힌 어린아이의 잠든 모습,
멀어지는 가로수 아래로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고향버스,
소 울음 소리가 들리는 산촌의 풍경하며,
힌 눈에 덮인 태백산맥의 장엄한 모습하며,......
이 세상 어느 곳 어느 때라도 내게 보이는 건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아름다운 마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일게다.
비록 가슴의 아픔과, 마음대로 운동할 수 없는 나의 육체가 서러울 뿐, 아직도 내게는 모든 게 아름답고, 새롭게 펼쳐지곤 한다. 난 약을 반찬으로 생각하며 복용하고, 가볍게 등산을 할 수 있게 된 것에도 진실하게 감사를 드린다.
내 의지대로 태어나지 못한 몸, 그래서 죽음이란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게을음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침 일찍 정동진의 철 길 옆에서 붉게 타며 떠 오르는 저 태양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난 오늘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보려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항상 이웃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10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언제나 밝은 마음으로 저를 돌보아 주시는 연세대 심장내과 전문의 김 성순 박사님, 그리고 긴 세월 제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는 간호사 이 정숙 선생님, 가깝게는 나의 부하 직원들과 든든하신 사장님하며, 저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항상 그들이 베풀어 주는 것만큼 보답하지 못하는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오늘도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더 나아가 아름답게 꾸며가기를 신조로 삼고 열심히 살아간다.
한 가지 더 소원이 있다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박사님들이 제 병을 치료할 수 연구가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끝까지 읽어주신 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림니다.
1999. 09. 02. <이어서 추서>
이 글은 10 여년 전의 글입니다. 지금도 치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덧 21년의 세월이 가고 있습니다. 지난해(2010년) 11월 29일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재 입원을 했습니다.
병명은 혈전에 의한 신장경색입니다. 콩팟으로 가는 혈관이 혈전으로 막혔습니다. 다행히 헤파린으로 혈전을 녹였습니다. 10일간 입원치료를 하고 현재는 퇴원하여 쿠마딘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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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해에는 건강도 행운도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참 마음에 와닿는 글들입니다. 공감하는 글도 너무나 많고..그 아픔 또한 많은 공감이 됩니다. 꿋꿋하게 잘 버텨내셨으니까..앞으로도 더욱 좋은 일들만 가득하실 것입니다. 긴 글 너무나 감사드리고, 회원님의 글로 인해서 더 많은 분들이 많은 희망을 가지실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인사드립니다. 공주남편님, 좋은 사이트를 가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12월11일 퇴원을 했습니다. 주 병명은 '좌심실빈맥'이고 그외 '혈관 연축성 협심증' '3등급인 삼첨판 폐쇄부전증' '관동맥 폐쇄성 질환(경도)' 와 합병증 '의원성 갑상선기능 저하증(항진증에서 저하증으로 변했음)' 과'신(콩팥) 경색증'을 진단 받았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새해를 맞이 하기로 했습니다. 올해가 제 환갑이거든요 ^*^
저도 내일 진료 받으러 갑니다...뭐라고 진단날지 궁금하네요...그리고 선생님 꼭 좋아지실꺼라 믿습니다...우리 모두 화이팅!
답글 감사드립니다. 힘내시고,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화이팅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진료 받으시기를.....
저의 본명은 신동성 입니다. 51년생이고요.
어라연 님에 비하면 저는 새발에 피네요 마음이숙연해지네요 올해에는 더욱더 건강해지시구요 행복하세요
어언 21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의술의 발전으로 치료방법이 개발되고 있다는 군요! 힘 내시고
약을 반찬삼아 드세요/ 밥도 평생먹지않습니까! 힘내시고, 토끼해 슬기롭게 헤쳐기기를 기도합니다.
고통속에 아름다움을 찾아가시는 당신이 꼭 승자가 될거라 믿습니다. 감동이였습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 심장병의 고통은 두려움입니다. 마음의 병이라고 두려움을 극복한다면 병의 절반은 치료된 것일겁니다. 심방세동의 시술은 많은 발전이 있습니다. 힘내시고 용기 있게 도전하시길 기원합니다. 신동성 올림
한편의드라마같은글 잘읽었읍니다..새해에는 건강해지시고.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렵니다.
약을 먹고도 살 수 있다는 건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올해 더욱 행복하세요
힘내시고....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화이팅!!!!!!!!!!!!!
감사합니다. 님의 만남이 복이라 믿습니다. 올해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신동성
숭고한 싸움입니다. 감동으로 읽었으며, 반드시 건강하게 좋은 소식 또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감사드립니다. 올해가 가기전에 좋은 소식 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신동성 올림
글 읽는동안 눈물났습니다. 건강해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두서가 없는 글인데 무지 감사합니다. 어머님의 시술 한번으로 완치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서로가 도움이 되는 건강한 신묘년을 기대합니다.
신묘년 토끼띠 신동성 올림
가슴이 뭉클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결국 이겨내시고 계십니다.
왠지 감사합니다.
왠걸요,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꾸벅) 심실성 기외수축이시면 저와 비슷한 증상 같습니다. 저는 좌실실빈맥이라고 하면서 심장마비가 일어 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치료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20년 이상 기다려왔습니다.
올해는 저의 해라(51년 토끼띠) 많은 응원군을 얻은 것 같아 행복합니다. 30년을 도전하겠습니다. 힘 내세요^*^
더욱건강하시고 힘네세요.
저는 2009년 7월에 제주한라병원에서 ICD이식 시술을 했습니다.
공감하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화이팅 입니다.
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날이 갈 수록 좋은 결과있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창조주께서 님을 사랑하십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에게 맡겨진 몸입니다. 님의 기도에 보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원도 영월산 51년생 토끼띠 신동성입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우리들은 알 수 있었던 고통들 .. 진정으로 싸움에서 이기시고 승리 하는 삶을 이루시길,, 새해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님의 고통도 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지시고, 파이팅 입니다.
어라연님 항상건강하세요 숙연해집니다...
감사. 사람사는 세상을 애틋이 사랑하다 보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사무실에서 읽어면서 짠~한 감동...가족들의 힘들었을 간병, 느껴지네요..눈물이 흐릅니다.. 건강 하세요!
두서없는 글에 감동하셨다니 정말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꼭 부정맥을 이기는 날이 오기를 기도드립니다.
눈물을 한바가지 흘렷네요 ㅜ.ㅜ 그 고통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것입니다. 힘내시고 열심히 살아갑시다 ! 많은 생각이 교차합니다. 많은 그림들이 교차합니다. 저도 38살에 빈맥이 시작되어 45이 되도록 싸우는 중입니다. 반드시 극복하리라 다짐합니다. 님의 글에서 더 힘을 얻고 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먼저 감사드립니다. 저는 5년만 버티자, 5년만 버티자 한것이 어언 21년 째가 되었습니다. 지난 12월 혈전으로 입원하면서 주치의가 바뀌었습니다. 저의 새로운 주치의 선생님께서 심장시술을 다시 한번 시도해보자고 하는데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치료방법이 발전 되는것 같아 기쁨니다.
님도 힘든 일상을 보내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도 부정맥증세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하고 늘 불안하지만 이대로 라면 20년은 더 살 것 같습니다. 자~!! 힘냅시다. 님의 기도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하세요
너무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꼭 완쾌하시길 바람니다.
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일전에 CP의 부재시통화를 확인하고 전화를 했는데 영월사업소 박치호 팀장이 받더군요. 저도 영월사업소 에 전기팀장으로 근무했었습니다. 부디 힘 내세요 !!
힘내겠습니다 어라이언님도 힘내세요
정말 숙연해집니다. 삶과 죽음과의 싸움. 님께서는 저와는 나이차이가 꽤 나는 분인데 정말 시공을 초월한 공감글이네요. 저는 기외수축인데 평소에는 잠잠하다 한번 일어나면 정말 모든것이 다 싫어질정도로 예민해진답니다.. 앞으로 또 그럴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답답해지네요.... 정말 꼭 완쾌하시길 바라고!!! 정말 용기를 주는 글!!! 고맙습니다!
격려를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님께서는 아직 나이도 어리신데,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서 지난달 입원때도, 보니까 잘 치료가 되더군요. 빨리 완쾌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멋진 세상을 훨훨 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오늘도 힘 냅시다. 아자! 아자! 파이팅 ^&^
올해 부정맥발병으로 전극도자절제술을 받고 이까페에 가입을 하게되었고 이글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글을읽으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에 잠시 힘들기도 했네요~~~ 얼마나 힘든시간을 보냈을지 그 힘든 시간동안 얼마나 외롭고 두렵고 무서웠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옵니다~~~ 댓글에 환갑이 되었다는 말을 보고 긴긴 21년의 세월 지금은 25년의 세월이겠네요~ 그세월이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건강하시지요? 억겁의 세월동안 무사히 이겨내신 선생님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라연님..
계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넘 가슴이 아프고 오래 사셔야 되는데요.
아..
어찌 그런 일들이..
저희아기도 좌심실빈맥으로 현재입원중입니다 좌심실빈맥으로 여러 합병증이 생기신건가요 전극도자술로는 완치가 안되셨는지 긍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