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생각한다
내가 상호문화학교에 온 것은 우연이었다. 산에서 3년을 보내니 사람들이 더 싫어졌고, 한편 아이들이 그리워졌다. 마침 삶터를 옮겨야 할 때가 됐다. 그런데 강진에서 상호문화학교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농촌에 내려와 다문화가족이 많아지고 소통 없이 커가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차였다. 다문화주의라고 표방한 동화주의에 문제의식을 가진 상호문화 학교가 시대적 요구와 잘 맞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전라남도는 아직 내가 살아보지 않은 곳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왔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상호문화주의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상호성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이다. 하지만 사회가 상호적인가? 학교는 상호적인가? 겉으로는 상호적으로 보이지만 일방적이고 위계적인 게 사실이다. 평등하다고 가정하지만 그건 가정이고 계급과 권력이 세습되는 사회로 진입해 불평등이 익숙하다. 그러니 상호성이나 평등 같은 말이 녹녹치 않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강진은 상설시장이 있지만 5일장이 선다. 하지만 토착과 생태를 소중히 여기는 나조차 5일장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학교의 리듬과 맞지 않다. 읍에서 벗어나 살다보니 장날을 맞추는 것도 마땅치 않다. 이것저것 책을 사는 것도 인터넷으로 구매하다보니 과연 내가 상호문화적으로 사느냐고 자문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주 비판하는 소비자로서 충실하다. 이 정도면 입으로만 상호문화고 몸은 안 상호문화다. 꼴이 사납다.
옛날 5일장 문화가 살아 있던 시절은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우리 부모님이 결혼하게 된 것도 논산장에서 만난 외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인연 때문이다. 옛날에 시장은 소비하기 위해서 가는 곳이 아니라 만나고 소식을 듣고 교환하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물건을 사는 것을 판다고 말을 했다. 돈이 있었지만 쌀이나 곡식이나 나물 같이 물건을 팔아 가른 물건을 사오는 식이다. 그러니 쌀을 사는 것이 쌀을 파는 것이 된다. 태국의 사파 트레킹을 할 때였다. 지금은 외지인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지만 예전에는 사파에 장날이 되면 산악부족들의 젊은이들이 연애하고 사랑하는 축제가 같이 열렸다고 한다. 시골 장터에서 소식을 주고 받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나누고 인척관계를 맺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장자본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상호성 호혜성이 남아 있는가? 자본가는 이익을 얻기 위해 상품을 팔고, 소비자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품을 산다. 상호적 시스템을 이용해 이기심을 채운다. 그것이 서양인들이 이해한 시장자본주의이고,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시장이다. 적어도 옛 시장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자급자족하는 생활의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사람은 자립할 수 있어야 타인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그럴 때 타인은 나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환대받는 손님이다. 시장은 대등한 개인들이 호혜적으로 만나는 장소이다.
삼국유사에는 고기를 인용해 옛날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신시(神市)에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신이 내려와 거주하는 성스런 시장도시였던 셈이다. 이후 환웅은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고 단군이 아사달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시장에서 혼인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어째 먼 옛날이야기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시장은 그렇게 인류가 긴밀하게 서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으며 문화를 낳았던 상호문화적 장소였던 것이다. 인류의 원초적 관계 방식은 호혜적 물물교환 혹은 증여다. 그것을 규칙적으로 했던 장소가 바로 시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결혼은 시장이 꽃이 되었던 것이다.
지구의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는 시장의 타락 때문이다. 시장에서 우리가 자신의 무한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지구를 돌보아야 할 책임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된 소비자/노동자로 살아가는 한 자립도 호혜도 불가능할 것이다. 시장도 영원히 신화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많은 대안학교들이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린다’를 모토로 삼고 있다. 자립과 호혜는 상호문화의 원리이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짜 시장의 원리이다. 자본주의가 왜곡한 시장으로부터 신시로 불렸던 호혜의 시장을 되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