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토벤 (Beethoven) / 교향곡 3번 `영웅(Eroica)' Symphony No.3 in Eb major, Op.55 "Eroica
배나무고개(梨峴)
2012. 4. 23. 07:00
Symphony No.3 in Eb major, Op.55 "Eroica"
베토벤 / 교향곡 3번 `영웅`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작곡 : 1803~4년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04년 12월 로프코비츠 후작의 사택에서, 공개 초연은 1805년 4월 7일 비엔나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06년
헌정 : 로프코비츠 후작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3,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연주시간 : 약 50분
* The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with Paavo Järvi live in Minato Mirai, Yokohama, Japan on May 26th 2006. Beethoven Symphony No.3 (Er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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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각 악장별 분석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영향이 엿보이는 「제1번」이나「제2번」과는 달리 이 「제3번」부터는 음악적으로 일대 비약을 보여준다. 즉 규모가 엄청나게 방대해졌고 독창적인 수법이 대담하게 구사되어 베토벤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악장의 길이만 하더라도 종전 교향곡의 전곡과 거의 맞먹는다. 또 제2악장에 장송행진곡을 사용했다던가 종악장에 장대하고도 호화 장려한 변주곡을 넣은 것 따위는 당시로서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제1악장 : 알레그로 콘 브리오, E 플랫 장조, 4분의 3박자, 소나타 형식,
장대한 제1악장은 우선 그 당당한 구성에 압도된다. 이것은 소나타형식으로 쓰여졌지만 전개부들은 종래의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고 제시부의 배나 되는 규모를 갖는다. 소나타 형색의 권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악장은 주제의 새로운 활용법, 활발한 운동성, 극적인 수법 등 그의 종횡무진한 테크닉과 다채로운 악상이 넘쳐 흐른다.
1-1. Beethoven / Symphony No.3 영웅(Eroica) 1st Mvt, (Pt 1-2) -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1-2. Beethoven / Symphony No.3 영웅(Eroica) 1st Mvt, (Pt 2-2) -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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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악장 : 「장송 행진곡」아다지오 앗사이, C 단조, 4분의 2박자,
유명한 제2악장은 영웅의 이미지와 죽음이 합치된 서사시로서 종교적 정화를 느끼게 해준다. 또 장중한 장송 행진곡 부분도 훌륭하지만 마지막 심판 나팔을 연상케 하는 듯한 시그널로 시작되는 웅대한 푸가 부분도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2-1. Beethoven / Symphony No.3 영웅(Eroica) 2nd Mvt, (Pt 1-2) -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2-2. Beethoven / Symphony No.3 영웅(Eroica) 2nd Mvt, (Pt 2-2) -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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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악장 : 이 악장은 일전하여 가벼운 음조를 취하는 스케르쪼-알레그로 비바체, E 플랫 장조, 4분의 3박자다.
A - B - A의 3부 구조를 취했으며, 「제 9 교향곡」제 3악장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음, 본격적인 스케르쪼인 제3악장엔 트리오 부분에 호른이 사용되는 등 베토벤 특유의 발랄한 주제가 구사되어 있다.
3. Beethoven / Symphony No.3 영웅(Eroica) 3rd Mvt -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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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악장 : 피날레-알레그로 몰토, E 플랫 장조,
4분의 2박자의 짧은 도입에 이어서 현의 피치카토로써 저음 주제가 제시된다. 이것이 변주된 후에 목관 악기로써 주제 멜로디가 나타나는 것은 작품 35의 「피아노 변주곡」에 있어서의 주제 제시와 동일한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이 주제는 방금 전에 언급했듯이 1795년에 작곡된 「12개의 콘트라탄쯔」의 제 7곡에 사용되었고, 이어서 1800년경에 작곡된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종곡에, 또한 작품 35의 「변주곡」 주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제 3의 교향곡」 종악장에 사용된 것이다. 제4악장(종악장)은 이 주제를 기초로 하여 일곱 개의 변주를 하며 그 후에 긴 코다를 두는 형태로(8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웅대하고 호쾌한 악장으로 이것은 <영웅>이란 이름에 어울릴 만큼 힘차고 늠름하다.
4-1. Beethoven / Symphony No.3 영웅(Eroica) 4th Mvt, (Pt 1-2) -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4-2. Beethoven / Symphony No.3 영웅(Eroica) 4th Mvt, (Pt 2-2) -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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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 교향곡 제3번 '영웅' : 작품개설
빈의 제19구의 데부링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는 특히 [영웅]의 집으로서 알려져 있으며, 그 가까이에는 '[영웅]의 거리'라고 명명되어 있는 도로가 있다. 베토벤은 33세의 1803년 여름, 데부링에서 교향곡 제3번 [영웅]의 작곡에 몰두했다. '[영웅]의 거리'는 그것을 연관지어 명명한 것이다.
베 토벤은 전부 9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교향곡 제3번]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뜻하고 있는 작품의 하나로 그는 이것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것을 생각하고 작곡했던 것이다. 자유의 정신에 불타 민중의 권리를 옹호한 인간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자기보다 1세 연상의 '코르시카의 영웅'인 나폴레옹이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초래할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교향곡 제3번]은 그와 같은 나폴레옹을 포함한 영웅들의 행위를 교향곡의 형식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악보가 완성하자 [제3번 E장조 교향곡] 총보 속표지 상에 '보나파르트' 아래에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헌정할 작정이었다.
이 곡은 1804년 봄에 완성 되었다. 신들러의 「베토벤 전」에 의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초대 집정관이었던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이 곡의 부본을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고 하던 차에 나폴레옹이 5월 18일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해서 그 악보의 표지를 찢어버린 후 악보를 마루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 표지에는,
Bonaparte
Ludwing van Beethoven
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코르시카 섬 태생의 일개 포병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은 1795년 10월에 의회군을 지휘, 이 대혁명에 참가하여 반란군을 평정함으로써 일약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마침내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신 출귀몰의 위력을 떨친 나폴레옹이야말로 베토벤의 눈에는 자유정신과 인간 해방의 기수로서 새 시대를 고하는 세기적 영웅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1798년 2월부터 4월까지 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베르나도트 장군이 베토벤과 개인적 친분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베토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베토벤은 그를 통해 영웅 나폴레옹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혁명의 풍운아, 영웅에게 바치는 교향곡이 탄생된 것이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리스(Ferdinand Ries,1784-1838)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 녀석도 결국 속물이었군. 그 녀석도 역시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폭군이 되겠지!』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2년이 지나서 출판된 파트 악보에는 「신포니아 에로이카」라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역시 이탈리아어로 된, 「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추억을 기리기 위해서」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곡을 나폴레옹 일대기의 표제악으로 생각하고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교향곡 「제2번」까지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소위 희유성은 이 「제3번」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 한층 더 진실한 도덕성이나 윤리성 같은 그 어떤 상한 힘을 이 「제3번」은 지니고 있다. 베토벤 자신도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는 이 곡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제 3번」은 확실히 장대한 곡이다. 시간적으로도 종래의 상식을 벗어나 50분이나 소요되는 긴 곡이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1806년에 출판된 악보 중의 제 1 바이올린 파트에는, 『이 교향곡은 일반 다른 곡들보다 길므로 연주회에서 후반부 보다는 가능한 전반부에서 연주하는 것이 좋겠다. 즉 서곡 1곡에다 아리아 1곡, 또는 협주곡 1곡 다음에 연주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앞 부분에서 이미 지쳐버리게 되므로 이 곡의 효과는 그만큼 상실하게 된다』라고 기술했을 정도다. 심지어 전술한 클레멘트 주최의 초연에서는 제2부의 첫 곡목으로 되어 있었다.
이 곡은 나폴레옹과 매우 관계가 깊은 작품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나폴레옹의 생애나 업적을 그린 것은 아니다. 다만 17년 후에 나폴레옹이 몰락해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은 "나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미리 결말에 적절한 음악을 써 두었다"라고 했다. 그것이 이 곡의 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이다.
이 곡은 1805년 4월 7일 빈에서 초연되었을 때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 전례가 없던 장대한 음악이었으므로 청중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이 작품에서는 지금까지 그의 선배들의 영향인 모방기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것으로 그의 감정을 나타내는 강한 개성의 힘과 양식의 균형으로 훌륭한 곡임을 증명하였다. 전부 4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2악장의 [장송행진곡]은 유명인이 죽었을 때 흔히 단독으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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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
프랑스 황제
재위 1804년 5월 18일~1814년 4월 11일
1815년 3월 20일~1815년 6월 22일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전임자 루이 17세
루이 18세
후임자 루이 18세
나폴레옹 2세
이탈리아 국왕
재위 1805년 3월 17일~1814년 4월 11일
대관식 1805년 5월 26일
배우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왕가 보나파르트 왕가
출생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아작시오
사망 1821년 5월 5일 (51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세인트헬레나 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어: Napoléon Bonaparte)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프랑스 대혁명 시기 말기 무렵의 정치 지도자이자 1804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의 황제였다.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의 민법 관할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지만,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 전체에 헤게모니를 형성했고,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을 퍼트렸으며, 이전 정권의 양상을 복원하는 제국 군주제를 통합했다. 그가 전쟁마다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장 위대했던 장군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프랑스 본부에서 포병 장교로 훈련받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제1 공화정에서 눈에 띄게 지위가 올랐고 제1과 2 대프랑스 동맹과 전쟁을 하고 승리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제1 영사에 취임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에 많은 충돌-나폴레옹 전쟁-에 모든 유럽의 주요 힘들을 포함하며 종사했다. 많은 승리 뒤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광범위한 제휴와 친구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나갔다. 나폴레옹 전쟁들은 많은 군대에서 연마되고 있다. 스페인의 비정규병과의 싸움과 1812년의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의 그랜드 육군은 전쟁에서 큰 손상을 입었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나폴레옹의 세력은 졌다. 그 다음해에는 그 동맹이 프랑스를 쥐어잡았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고 엘바 섬으로 추방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는 엘바 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했다.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제한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보냈다. 한 검시는 그가 위암으로 사망했다고 판단했지만, 이 주장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키고 몇몇 학자들은 그는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고 하기도 했다.
생애
어린 시절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는 귀족 회의에서 코르시카를 대표한 의원이었다.
나폴레옹은 1769년8월 15일,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인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토스카나 출신의 가난한 이탈리아 지주 집안에서 8명의 아이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인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프랑스식 이름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였으며, 어머니는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 태어났을 시의 이름은 나브리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bulione di Buonaparte)였다. 이름을 나브리오네로 지은 것은 요절한 장남인 나브리오네에서 따온 것이다. 부오나파르테 가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에 항의하며 파스콸레 파올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프랑스 측으로 전향하여, 가문의 명칭을 프랑스식인 보나파르트로 개명하고 귀족 자격을 얻었다.
유년기에 나폴레옹은 점잖은 성격을 가졌으며,하루 종일 독서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 처음엔 집안 살림이 어려워 형 조제프와 함께 학비를 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수도원 부속학교인 도툉 중학교에 들어갔지만,곧바로 그만두고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느 유년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784년에는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졸업 시험 성적은 58명 중 42위였지만, 통상 재적 시간이 4년인 곳을 불과 11개월 만에 필요한 과정을 모두 수료하였다.
군인 시절
아르콜의 다리에 선 나폴레옹.
1785년에 아버지를 여읜다. 같은 해 11월 30일 16세의 어린 나이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발랑스에 주둔한 라 페르 연대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1] 1789년 바스티유 감옥 함락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 자신도 프랑스 혁명에 참가하여 공화주의자인 자코뱅 파를 지지하는 소책자를 썼다가 체포되고 만다. 1792년에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아작시오의 국민위병대 중령이 되지만, 그로 인해 프랑스 왕당파와 연줄이 있는 파울리와 균열이 생겨 일가족과 함께 마르세유로 도피행에 가까운 이주를 하였다.
마르세유에서는 유복한 상인 집안인 클라리 가와 친해진다. 형 조제프는 클라리 가의 마리 줄리와 혼인하였고, 나폴레옹은 마리 줄리의 여동생 데지레 클라리와 연인 사이가 되어 약혼식을 올렸다. 1793년 말, 프랑스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에, 툴롱 공략 작전에서 왕당파 반란군을 시원스럽게 진압하는 최초의 무훈을 세워 젊은 나이에 사단장이 되었다.
1794년 공안위원장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실각하여 처형되자 로베스피에르의 남동생 오귀스탕과 연줄이 있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석방 후에 총재 정부의 총재 파울 바라스에게 등용되어 1795년 10월 5일 파리에서 왕당파의 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수도 시가지에서 대포를 쏘는 대담한 전법으로 시원스럽게 진압함으로써 사단장이 되었다.
1796년, 데지레와 파혼하고, 귀족의 미망인으로 바라스의 애인이기도 한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한다. 같은 해, 바라스에 의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 이탈리아 원정을 20년 동안 펼쳐진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는 27세였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혁명파간의 이념 대립 등의 혼란 상태가 지속되어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에 1796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려 하였다. 몇 달에 걸쳐 산맥을 돌아서 넘은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업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제 성냥을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스핑크스 앞에 선 나폴레옹
그러나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로제타석은 세 면으로 나뉘었고, 윗면은 고대 그리스어, 둘째 면은 이집트의 평민어였던 데모닉 그리고 마지막은 이집트의 고대어 하이에로글리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비문을 해석하길 적극 권장했으나 살아서 이 돌의 해석을 보지 못하고, 후에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히 해석된다.
브뤼메르 쿠데타
<SMALL>이 부분의 본문은 브뤼메르 18일입니다.
브뤼마르 쿠데타를 지휘하는 나폴레옹.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내세워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의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하고 거기에다, 7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서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당시 오백인회와 원로원은 이 문제로 인해 거의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정국을 지켜본 그는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시에예스,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백인회는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간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에게 장악된 군대와 30여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들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시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나폴레옹은 연합국에 강화를 제의하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 하였다. 과거 한니발 이후 대규모의 군사가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는 일을 당시 그의 부관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나폴레옹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외쳤다. 그리하여 험준한 알프스를 넘고 1800년 6월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고, 다음해 2월에 오스트리아는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라인 강의 절반을 프랑스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했다. 이 강화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어,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하다가 중심축인 소 피트 수상이 물러나자 1802년 3월 양국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안정을 맞았다.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혁명기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의 회복을 실시하여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했다. 또,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다. 또 국내 법 정비에도 임하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 이것은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도 교육 및 교통망 정비에도 진력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의 탄압을 받던 로마 가톨릭교회[2]와의 화해도 모색한 나폴레옹은 1801년에 교황 비오 7세와 정치 및 종교 조약을 맺어,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했다. 또, 왕당파와 자코뱅 파[3] 등의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1802년 8월 2일에 그는 종신통령(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나폴레옹의 황제 시절
대관식에서 조제핀에게 직접 황후관을 하사하는 나폴레옹, 다비드, 루브르 박물관 소장
나폴레옹의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그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측근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그것을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에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야심만만했던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나폴레옹은 기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서 자신이 직접 황제관을 썼으므로 교황 비오 7세는 축복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은 다방면으로 여러 가지 충격을 주었다. 그를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해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예정이었던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고 있던 베토벤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한탄하며, 나폴레옹에게 곡을 헌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목도 《영웅》으로 변경했다. 또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을 보면서 절대권력에 혐오감을 갖게 되어, 후에 왕정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산 마르띤과 결별하였다. 나폴레옹의 황제로 등극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독립하게 되는데 그 독립국이 훗날 아르헨티나였다.
일단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가구의 새로운 계산법(짝수법, 홀수법)을 마련하고,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광장과 회관,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및 공공 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 또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위인들의 동상이 거리 곳곳에 세워지고, 교량이 건설되었다.
얼마 후 《아미앵 조약》은 영국 측이 파기하여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다시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도버 해협을 접한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중립국으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 영국에게서 빼앗은 하노버를 프로이센에 양도한다는 약속을 했다.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 근위기병 대령 복장을 하고 있다.
프랑스 육군은 10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빈을 점령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구원하러 온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즉위 1주년인 12월 2일에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치렀다. 나폴레옹의 교묘한 작전 덕분에 프랑스군은 완승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트 조약을 체결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이 전투는 3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3황제 회전’이라고도 불린다. 나폴레옹은 이 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두 나라를 상대로 혼자서 능히 제압한 프랑스 육군의 위광은 곧 전 유럽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은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게 완패를 당하여 영국 상륙 작전은 실패로 끝나 제해권을 갖지 못하였다.
유럽 대륙의 중앙부를 제압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는 나폴리 국왕으로,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 국왕에 각각 앉히고 자신은 라인 동맹을 발족시켜 이를 보호국화함으로써 독일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샤를마뉴 대에서부터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프로이센은 결국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어, 1806년 영국·러시아·스웨덴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하였다. 나폴레옹은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으로 도망가 버렸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격하였다. 같은 해,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키고 폴란드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 바르샤바 대공국을 형성시켰으며, 남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를 베스트팔렌의 왕으로 임명하여 두 나라를 프랑스 제국의 괴뢰 국가로 지정하였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쫓고 자신이 스페인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10년 5월 25일 나폴레옹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남미 남부지역의 사람들은 스페인의, 더 정확하게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한 나머지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게 된다.
스웨덴에 대해서도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를 왕위 계승자로 파견하여, 베르나도트는 1818년에 즉위하여 스웨덴 국왕 카를 14세가 되었다. 이 왕가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정작 베르나도트 자신은 나폴레옹에 대해서 큰 호의를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스웨덴은 프랑스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강고한 동맹관계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또 덴마크는 영국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된다.
몰락
러시아에서의 철군
얼마 안 되어, 그의 가정사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은 14년 동안 함께 살아온 황후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혼인하였다. 마리 루이즈는 이듬해인 1811년에 로마왕 나폴레옹을 낳게 된다. 하지만 프란츠 1세는 사위인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나폴레옹 역시 장인을 망국의 군주로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에, 훗날 프란츠 1세는 대프랑스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처음에는 그동안 기득권층인 귀족에게 억눌림을 받던 유럽의 부르주아지와 민중은 자기 나라를 침공하는 프랑스군을 혁명군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프랑스군은 점령국에서 갖은 횡포를 부려 원성이 잦아지게 되었다.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국민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의 호세 1세로 왕위에 앉히고, 프랑스의 점령에 반대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하자,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는데, 이러한 학정은 스페인 사람들이 프랑스 군인들에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 담겨 있다. 그러자 점령국 사람들의 환호는 저항으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난 스페인 사람들의 프랑스에 대한 게릴라 투쟁은 프랑스를 계속 괴롭혀대서, 나폴레옹 자신도 스페인의 게릴라들을 위궤양에 빗댈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 영국이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형상 장점과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깊숙이 달아났다. 식량은 얻지 못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싸우지 않은 프랑스군은 예상대로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프랑스의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反)나폴레옹의 기치를 내걸었다.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프로이센이었으며, 주변 나라들에게 호소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에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도 참가하였다.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적으로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1813년 봄, 변변찮은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휴전을 하였다. 메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불발된 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동맹군에게 포위공격 당하여 대패한 후, 프랑스로 도망갔다.
1814년에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의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다. 3월 31일에는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결국 1814년 4월 16일 폰텐느 블로우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하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못하였다. 또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백일천하
<SMALL>이 부분의 본문은 백일천하입니다.
나폴레옹의 무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게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여 백일천하는 끝났다. (실제로는 95일)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되어 미국으로의 망명도 시도했지만 항구 봉쇄로 단념하였고,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아서 웰링턴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나폴레옹은 극히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롱우드의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그 저택 주위에는 많은 보초병들이 지키고 서서 나폴레옹의 행동을 실시간 감시하였다. 또 집밖으로의 외출도 제한되어 실질적으로 감금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수행원에게 구술 필기시킨 방대한 회상록을 남겼다(에마뉴엘 라스 카즈의 세인트 헬레나의 회상 등). 이것들은 그의 인생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관과 역사관, 인생관을 총망라한 것이어서 나폴레옹 전설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망
나폴레옹은 특히 섬의 총독인 허드슨 로우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는 무례하게도 자부심 강한 나폴레옹에게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부르며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는 등 나폴레옹을 철저하게 우롱했다. 또, 나폴레옹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본국으로 귀국시켰다. 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 매일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세상을 떠났다. 암살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정식 사인은 위암이라고 발표되었다. 그 유해는 1840년 5월에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시파리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한편 나폴레옹의 사인은 독살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으며[4][5] 나폴레옹의 모발 등 신체에서 비소 중독자의 질환, 증상이 나타났다고 한다.[4][5]
[편집] 나폴레옹의 키
나폴레옹의 키가 155cm 가량의 왜소한 체격이 상식처럼 되었으나, 실제로 나폴레옹의 사망 당시 키는 약 168cm로 당시 프랑스 군인의 평균 신장인 약 164cm보다 컸고 전혀 왜소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나폴레옹의 경호병들 키가 약 190cm 정도였으므로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이 작게 보였고, 기록 문헌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도량형의 차이 때문에[6] 나폴레옹은 왜소한 체격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 키는 약 170cm 정도로 당시 유럽에서는 전혀 작은 체구가 아니었고 도리어 체격이 좋은 편에 속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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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판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제프 칼 슈타이어가 그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초상화(1820). 장엄 미사를 작곡하고 있다.
기본 정보
본명 Ludwig van Beethoven
출생 1770년 12월 17일
독일 본
사망 1827년 3월 26일 (56세)
오스트리아 빈
국적 독일
직업 작곡가
베토벤의 친필 서명
루트비히 판 베토벤(독일어: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에는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생애
유년 시절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부친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토벤은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프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친척 [1](Franz Rovantini) 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침이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 나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이었다.
음악수업
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데 도와주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는데,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이었으나(1781년), 나중에 악장 안드레아 루체시가 지휘하는 궁정 예배당에 고용되었다.
사람들과의 만남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이때부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의대생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는 그를 폰 브로이닝 집안(von Breuning, 나중에 베겔러는 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에 소개해 주었다. 베토벤은 종종 폰 브로이닝 집안에 갔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으며, 이 곳 아이 몇몇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의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집안에 비교한다면 편안한 곳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되어 그는 평생 친구이자 재정 지원자가 되었다.
모차르트와의 만남
평소 모차르트를 존경해왔던 베토밴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가서 그와 만나고 싶어했으나 쉽지않았다 그것은 집안사정이 가난해 자신의 동생과 부모를 먹여살려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베토벤뿐이었기 때문에 베토벤도 빈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단념한지 오래였다. 그러던 중 1784년 그의 스승인 네페의 도움으로 빈으로 갈수있는 교통비와 숙박비를 얻은뒤 부모의 동의를 얻어 빈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데, 이때 당시 불과 그의 나이 14세때였다. 모차르트는 자신을 만나기위해온 베토벤을 정겹에 맞이하는 한편 그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연주한 짦은 음악마디로 베토벤에게 즉흥곡을 만들보라고 지시한다. 조금의 주저함도없이 베토벤이 즉흥곡을 만들어 기대 이상으로 연주하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후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때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받는 교육비를 일절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독일(프로이센)에 있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정을 모차르트에게 말한 뒤 빈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모차르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으며 만난지 불과 1달만의 일이다. (그뒤 하이든을 만나기 위해 빈으로 다시오게 되는데 이때가 1792년으로 모차르트 사망 1년후이다)
궁정 교향악단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교향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세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과의 만남
선제후의 도움으로 1792년 베토벤은 빈으로 갔다. 아마 1790년대 말 당시 런던으로 가던 요제프 하이든이 성탄절 쯤에 본에서 머물 때 그에게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2곡의 장송칸타타(WoO.87,WoO.88) 악보를 보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어 1792년 7월에 런던에서 빈으로 귀환한 뒤부터 베토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자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즉시 하이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이든은 그에게 만족했지만, 베토벤은 실제로 가르침을 받다보니 이전의 위대한 우상이었던 거장 하이든에게 여러가지로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하이든이 고치고 돌려준 베토벤의 악보를 본 요한 셍크(Johann Schenk, 1753-1836)가 미처 하이든이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주자 하이든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베토벤은 마침내 "하이든에게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하이든의 느긋하고 여유있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가르치는 상대가 젋은 혈기에 급한 성격으로 알려진 베토벤이었으니 둘이 서로 잘 맞지 않았음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후 베토벤은 당시 빈에게 뒤어난 이론가로 통하던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가르침을 받고, 모짜르트의 연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성악곡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793년말, 결국 베토벤은 하이든 곁을 떠나지만 두 사람간의 불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베토벤이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던 C단조 3중주곡을 출판하지 말라고 하이든이 충고한 것 때문에 베토벤은 심한 상처를 받았던 일도 있듯이,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개운치 않은 앙금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1794년, 하이든이 두 번째 영국 여행을 떠나자 베토벤은 선생님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1795년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곡을 완성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그해 8월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때 카를 리히노브스키 후작 저택의 연주회에서 직접 들려주었다. 이 3곡의 소나타가 작품2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하이든과 베토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토벤 쪽에서 말하자면 하이든은 과거의 업적을 놓고 볼 때 역시 위대한 대선배였다. 단지 그는 자시의 향학열을 만족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위와 연륜을 갖춘 하이든 쪽에서 볼 때도 신출내기 청년 음악가의 불평이나 불만 따위에 일일이 대응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정이 두 사람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막아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피아노 3중주 1~3번 작품1과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품2를 작곡한 것 외에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WoO작품번호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을 볼수록 작곡 양식이 성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어느 변주곡집에서 그의 교향곡 3번의 주제와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찾아낸 바 있다.
음악수업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서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관계는 1802년(또는 1809년까지일수도 있다.)까지 이어졌다.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연주활동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유명세를 타다
1803년의 베토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하였으며,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2] 임금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았다.[3]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4]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자유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5]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6]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7]
음악적 성숙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와 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의 부탁으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과 2번와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는데, 쿠퍼[8]는 이를 "성격의 강렬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 역동성, 음조 면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었다"[9]고 평가하였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 2월 2일에 베토벤은 교향곡 1번을 초연하기 위하여 도시 극장을 임대하였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의 7중주,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이들 곡은 당시 출판되지 않은 상태였다) 등 다양한 곡목을 공연하였다.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차이퉁(Allgemeine musikalische Zeiting) 지에서 "오랫동안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묘사했던 이 연주회는 어려움도 겪었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연주자들이 독주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목관 5중주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인다.)무지오 클레멘티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자신의 초기 작품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그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교습
맬러(W.J. Mähler)가 그린 1804년의 베토벤.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인 백작부인 안나 브룬스비크(Anna Brunswik)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교습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맏딸 요제피네(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와 관계를 맺어, 그때부터 수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교습이 끝난 직후 요제피네는 요제프 다임(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백작과 혼인하였으며, 베토벤은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도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10]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제자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를 가르쳤는데, 그는 작곡가가 되어 나중에 그들의 만남을 다룬 책인 "베토벤은 기억한다"을 썼다. 젊은 카를 체르니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체르니 자신도 저명한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 있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11]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를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2]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3]
청력 상실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14]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가령 전신 홍반성 루푸스) 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15]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때 이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결과 일반인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16] 이로써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중독임이 밝혀졌다.[17]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18]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바로 바깥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19]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임을 배려한 여가수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으며 그러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20]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1815년의 베토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21]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귀머거리가 되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뢰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22]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이런 책에다가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책에다가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으며,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그의 비서 안톤 신틀러(Anton Schindler 1795-1864)가 음악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버렸다.(또는 고친 것도 있다)[23]
후원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
베토벤은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었으나,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등 그의 초기 후원자들 몇몇은 작곡을 요청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함과 더불어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인 루돌프 대공이었을 터인데, 그는 1803년 혹은 1804년에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1824년까지 만났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곡을 헌정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대공 3중주(1811년)과 대작 장엄 미사(Missa Solemnis, 1823)도 있다. 루돌프도 답례로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품 한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 악우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보관되어 있다.
왕실 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악장(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Kinsky) 백작과 롭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롭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어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슈베르트와의 만남
베토벤은 훗날 "가곡의 왕"으로 불리우는 슈베르트와 만난적이 있었다. 두사람의 거처는 불과 2km 떨어져 있는 거리에 살았지만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재대로된 대화를 하지못해 때문에 쉽게 만나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소심한성격 또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내어 만나게 된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캄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고 한다. 또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명은 이제 다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그후 하고 싶은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허약한 목소리를 듣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슈베르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작품 시기별 분류
베토벤의 작품은 보통 세 시기, 즉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초기는 1802년 정도까지, 중기는 1814년 정도까지 그리고 1815년 무렵부터 후기로 나눈다. 초기, 즉 고전기는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평을 넓힌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첫 여섯개의 현악 사중주곡, 첫 세개의 피아노 협주곡,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든다. 여기에는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도 들어있다. 중기, 즉 영웅기는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면모를 나타내는 대 편성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부터 교향곡 8번까지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 열정 등), 또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가 있다. 후기는 1815년경부터 인데,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가령 현악 사중주곡(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9번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은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밖의 이 시기 작품으로는 장엄미사, 마지막 다섯개의 현악 사중주곡, 대 푸가,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등)이다.
낭만주의적 특징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러와 영국의 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와 E.T.A. 호프만과 같은 동시대인들로부터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불렸다. 그는 자주 연가곡의 첫 작곡가로 간주되며, 낭만주의적인 민속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SMALL>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교향곡
교향곡 1번 다 장조 작품번호 21 (1800년)
교향곡 2번 라 장조 작품번호 36 (1803년)
교향곡 3번 내림 마 장조 "영웅" 작품번호 55 (1805년)
교향곡 4번 내림 나 장조 작품번호 60 (1807년)
교향곡 5번 다 단조 "운명" 작품번호 67 (1808년)
교향곡 6번 바 장조 "전원" 작품번호 68 (1808년)
교향곡 7번 가 장조 작품번호 92 (1813년)
교향곡 8번 바 장조 작품번호 93 (1814년)
교향곡 9번 라 장조 "합창" 작품번호 125 (1824년)
교향곡 10번 내림 마 장조 Biamonti.838 (1824년) (미완성 원고로 남겨졌지만 베리 쿠퍼에 의해 1악장만 완성된채 출판됨)
피아노곡, 실내악곡
베토벤의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음악의 신약성서라고 부름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작품13 '비창'
피아노 소나타 11번 B flat장조 작품22 '화려한 대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작품27-2 '월광'
피아노 소나타 15번 D장조 작품28 '전원'
피아노 소나타 17번 D단조 작품31-2 '템페스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작품53 '발트슈타인'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작품57 '열정'
피아노 소나타 24번 F#장조 작품78 '테레제를 위하여'
피아노 소나타 25번 G장조 작품79 '뻐꾸기'
피아노 소나타 26번 E flat장조 작품81a '고별'
피아노 소나타 29번 B flat장조 작품106 '함머클라비어'
피아노 소나타 33~35번 WoO.47 no.1~3 '선제후'
바가텔 F단조 WoO.57 (Grove Op.170) "재미있는 안단테 (Andante Favori)"
바가텔 A단조 WoO.59 (Grove Op.173) "엘리제를 위하여"
그외 바가텔 24곡 (Op.33 no.1~7, op.119 no.1~11, Op.126 no.1~6)
디아벨리 왈츠 주제에 의한 33개의 변주곡 C장조 작품120 (바하의 골트베르그 변주곡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대작)
총 21곡의 피아노 변주곡 작곡
그외 미뉴에트,가보트,캐논,론도,전주곡,폴로네이즈,군대행진곡 4곡, 피아노 4중주 등의 다수 소품 작곡
피아노 3중주 7번 B flat장조 작품97 "대공" (피아노 3중주곡 역사상 최고의 명곡)
총 11곡의 피아노 3중주 작곡
현악 4중주 16번 F장조 작품135 포함 총 16곡의 현악4중주와 푸가1곡 작곡
바이올린 소나타 5번 F장조 작품24 "봄"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장조 작품47 "크로이처" (총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곡)
첼로 소나타 3번 A장조 작품69 (첼로 소나타 역사상 최고의 명곡, 총 5곡의 첼로 소나타 작곡)
미사, 오라토리오, 칸타타와 기타 성악곡
《미사 C장조》작품번호 86
《장엄미사 D장조》 작품번호 123
오라토리오《감람산 위의 그리스도》작품85
칸타타 《영광의 순간》작품136 외 다수의 칸타타 작곡
콘서트 아리아 《오, 무정한 자여》 작품65 (20여곡의 콘서트 아리아 작곡)
100여곡 이상의 성악을 위한 캐논 작곡
가곡 《그대를 사랑해》 WoO.123
가곡 《아델라이데》작품46
영국 민요를 주제로 한 가곡 300여곡 작곡 및 일반가곡 200여곡 작곡
오페라 《피델리오》작품72 (그외 미완성 오페라인 《베스타의 불》이 있음)
관현악곡, 협주곡
교향시 <<웰링턴의 승리>> 작품번호 91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E flat장조, 작품73
(세계 3대 피아노 협주곡 중의 하나, 총 7곡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 0번 E flat장조 WoO.4와 6번 D장조 미완성 협주곡 있음)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61
(세계 3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의 하나, 베토벤이 직접 플룻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곡도 있음)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 C장조 작품56
피아노,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C단조 작품80
극음악 <<코리올란>> C단조 작품62(총 11곡의 극음악 작곡)
극음악 <<아테네의 폐허>> 작품113 (베토벤의 터키행진곡은 4번째 나오는 부수음악임)
극음악 <<에그몬트>> F단조 작품84 * 발레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작품43
대 푸가 자필본
2005년 10월 13일, 공식적으로 179년 된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2005년 7월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Wynnewood의 Palm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 사서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이 악보는 115년간 분실된 상태였는데, 이 악보는 소더비 경매에 2005년 12월 1일 경매에 붙여져 195만 달러에 팔렸다. 전화로 경매에 참가하여 낙찰 받은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24] 이 악보는 원래 1890년 목록에 올라와 있었고, 베를린에서 열린 경매에서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한 사업가에게 낙찰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딸은 1952년에 그것과 모차르트의 〈판타지아〉를 포함한 다른 자필 악보를 펜실베니아 주의 한 교회에 주었다. 어떻게 그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도서관의 소유가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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