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평소처럼 대화를 이어가고 있던 도중, 다짜고짜 믿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하듯 다그치지만 말고,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면 좋지 않겠느냐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어떤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한 주간 내내 그의 말이 뇌리로부터 떠나지 않았습니다.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그대가 있음으로”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내 어떤 이름으로든
그대가 있어 행복하다
좋은 환경이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행복을 위한 절대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순간 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 속에 아무렇게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픔과 그리움이 진할수록
그대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별과 바다와 하늘의 이름으로도
그대 꿈꾼다
고치기 힘든 질병이 엄습해 와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음식을 먹으면 기도氣道로 넘어가서 폐를 상하게 하는 희귀한 질병에 걸렸습니다. 오랫동안 중환자실을 내 집처럼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행복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병문안을 위해 들른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돌아설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희망 때문에
억새풀의 강함처럼 삶의 의욕도 모두
그대로 인하여 더욱 진해지고
슬픔이라 할 수 있는 눈물조차도
그대가 있어 사치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희망이 넘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무기력하게 포기하고 주저앉기보다는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로움은 혼자 이기는 연습을 하고
될 수만 있다면
그대 앞에선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고개를 들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괴로움 속에서도 쉽게 주눅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밝고 환하며 건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참고 견디며 살아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의 가슴을 채울 수 있는
그대의 언어들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지극히 사소한 것 하나라도 절대로 흘려들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각인이 되어 사라지지 않을 때까지 마음 속 깊이 새기고 또 새깁니다.
아픔과 비난조차도 싫어하지 않고
그대가 있음으로 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감당하며 이기는 느낌으로
기쁘게 받아야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힘든 일은 물론 아픔과 비난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손해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대가 있음으로
내 언어가 웃음으로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삶은 웃음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존재가 주는 기쁨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시인은 “그대가 있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바람 부는 이 세상
그대가 있어 나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된다
서로 찡그리며 사는 이 세상
그대가 있어 나는 돌아 앉아
혼자서도 웃음 짓는 사람이 된다
고맙고
기쁘고
힘든 날에도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웃을 수 있습니다. 끝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딱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씨앗이 나무로 자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둡고, 완전히 잊혀 진 것 같은 땅과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땅과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씨앗 속에 숨겨져 있었던 무한한 에너지와 가능성이 폭발하듯 분출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새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새파랗고 탱탱하며 신선한 잎을 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아름드리나무로 자랄 수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들고나는 거대한 숲을 이룰 수 있습니다. 꽁꽁 숨겨져 있었던 자신의 실체를 온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땅이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땅도 다르지 않습니다. 씨앗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기름지고 윤택하며 풍성한지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그Satish Kumar의 주장대로, 씨앗이 있어 땅이 있습니다. 땅이 있어 씨앗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그가 있습니다. 그가 없이는 나도 없습니다.
내가 없이는 그도 없습니다. 그와 내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건사고와 만남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필연입니다. 성경은 이를 “마침הנה(힌네)”이라고 표현합니다. 가장 알맞은 사건사고와 사람이라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성민 이스라엘이 혹독한 핍박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환경에서 태어나야했습니다. 버려져야했습니다. 이집트 공주의 눈에 띄어야했습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했습니다.
동족을 짐승처럼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만나야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도 바꿔놓을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적나라하게 직면할 수 있어야했습니다. 사십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름 없는 목자로 살면서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내야 했습니다. 한 가지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같이 필연이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창세전에 작정한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나야했습니다. 온갖 사건사고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다 여호와께서 예비하셨습니다. 허락하셨습니다. 사건사고와 사람들은 여호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고해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반드시, 무조건,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도록 여호와께서 창세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바로 그 사건사고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히 만나지 않았습니다. 필연으로 만났습니다. 서로를 가장 자기답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만났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됩니다. 내놓을 것 없어도 됩니다. 소위 지랄 같은 성격의 소유자여도 문제없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성격까지도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누군가를 철저히 깨뜨리고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다듬는 거룩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그렇다고 누구도 신경 쓰지 말고 유감없이 발휘하며 생긴 대로 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신이 지랄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면 현재의 모습으로 만족하지 말아야합니다. 더 깎여지고 더 다듬어지기 위해서 몸부림쳐야합니다. 여호와께서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합니다. 여호와의 강력한 도와주심을 구해야합니다.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서로를 세우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사모해야합니다.
한편, 여호와께서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하계를 품고 있는 은하계들로 채워져 있는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동시에 시간과 함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에 빛을 품으셨습니다.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빛은 위대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완벽했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여호와 마음속에서 “좋다טוֹב(토브)”는 감탄사가 급격히 팽창했습니다. 쏟아지듯 터져 나왔습니다.
첫째 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에 끝없이 펼쳐지는 궁창을 품으셨습니다. 곧 하늘을 품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둘째 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에 물이 모인 바다를 품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뭍을 품으셨습니다. 바다와 구별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좋았습니다. 여호와를 기쁘게 해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식물 곧 풀과 채소와 나무를 품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좋았습니다. 여호와를 기쁘게 해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셋째 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에 해와 달과 별을 품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좋았습니다. 여호와를 기쁘게 해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넷째 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에 온갖 종류의 새와 물고기를 품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바다와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좋았습니다.
여호와를 기쁘게 해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다섯째 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에 온갖 종류의 짐승과 가축과 땅에 기는 것을 품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바다와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좋았습니다. 여호와를 기쁘게 해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에 사람을 품으셨습니다. 사람 안에 당신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담아두셨습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능력이었습니다. 당신과 언제 어디서나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한 치의 오차나 흠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창조 때보다 좋았습니다. 심히 좋았습니다. 여호와를 기쁘게 해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피조물들은 하나같이 지음 받은 대로 존재하는 자체만으로 여호와를 드러냈습니다. 여호와를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와께만 어울리는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행복하셨습니다. 사람들도 행복했습니다. 피조물들도 행복했습니다. 여호와는 피조물들의 존재만으로, 피조물들은 여호와의 존재만으로 행복했습니다.
하나같이 서로가 존재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피조물들은 창조주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증强迫症에 전혀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자유로웠습니다. 지으심 받은 원래의 모습대로 존재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여호와를 충분히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역시 존재만으로 그들의 기쁨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여호와가 있어 저와 여러분이 있고, 저와 여러분이 있어 여호와가 있는 그야말로 단 한 순간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믿음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는 최근 명예장로에 장립將立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리만 들어도 너무나 감사해서 펑펑 눈물을 흘릴 정도로 신실한 분이십니다. 거금의 돈을 들여서 장로 직분을 사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돕겠다는 마음으로 거부해오다, 그냥 주겠다고 해서 더 버티지 않고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명예 장로로 불리기 민망하니 명장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코로나19의 폭발적인 확산과 함께 몇 명이 의기투합했습니다. 방역과 관련된 회사를 차렸습니다.
개업과 함께 일이 끝임 없이 밀려들었습니다. 거의 쉬지도 못한 채 밤낮도 없이 정신없이 일했습니다.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의 때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도 정산할 때가 되면 자신에게 돌아갈 몫을 꼬박꼬박 챙겼습니다. 쓰지도 않은 판공비까지 잊지 않고 챙겼습니다.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하루도 쉬지 못하고 눈 코 뜰 새도 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던 동료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에게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모범을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렇게까지 파렴치할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그를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해야할 이유도 없고 더 이상 뼈 빠지게 일할 이유도 없다면서 차라리 당장이라도 떼려 치우든지 해야겠다며 핏대를 높였습니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그는 동료 장로를 찾아갔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장로는 단호했습니다. 이제까지의 행동과 뜻을 돌이킬 뜻이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회사가 아예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잘되고 있는 회사를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지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는, 자신이 투자했던 금액 이상의 몫까지도 요구했습니다.
그와 동료는 기가 막혔습니다. 폐업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지지부진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결국 장로의 요구를 일정 부분 들어주는 조건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료와 함께 다시 방역 회사를 차렸습니다. 회사는 점점 안정을 찾았습니다. 이제 그는, 잘되고 있는 회사를 동료에게 완전히 넘겨주고 물러나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계획이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는 매 번 이렇게 해왔습니다. 동료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결코 적지 않은 손해를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Max Lucado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무수히 많은 은하계로 구성된 우주도 담을 수 없을 만큼 크고 또 큰 분이십니다. 높고 높은 보좌 앉아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성들로 구슬치기를 하던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저와 여러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는 죄 값을 대신 갚아주기 위해서 작고 작은 이 땅에 낮고 천한 육체를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통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과 양 치던 몇 사람들만 영접했습니다.
경배했습니다. 입으로는 늘 여호와를 찾고 있었던, 누구보다 신실하게 보였던 아니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위장을 일삼던 성민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나타나신 사실 자체를 몰랐습니다. 당연히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탐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타락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누리고 있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앞장서서 배척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문둥병 환자의 몸에는 손을 얹으셨습니다.
병든 몸은 물론 상할 대로 상해 있었던 마음의 병까지 고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바쁘고 피곤한 일정 중에도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셨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일하셨습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최고의 경배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사셨습니다. 오직 공의와 정직과 진실을 추구하셨습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마음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셨습니다. 악이 팽배한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아름다운 선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고통 속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문제 속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환난과 시험과 핍박과 위험 속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는 근심과 번민에 사로잡히고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려고 작정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몸부림쳐도 도무지 견디기 힘든) 이 (죽음의) 잔을 저에게서 거둬주십시오.”(마26:39a)라고 절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응답되지 않을 기도를 드려야할 정도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버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자동차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Henry Ford의 아들에게 차가 없을 수 없습니다. 컴퓨터 업계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사람Bill Gates의 아들에게 컴퓨터가 없을 수 없습니다. 상식적인 면에서 볼 때, 결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바로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일어났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그날만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절규하며 드리는 간구를 냉정하게 외면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거절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하지만 존재 의미와 가치가 전혀 없었던 저와 여러분을 무無와 공空과 허무虛無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 저와 여러분이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편, 여호와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행동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깨어있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볼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내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주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이 피나는 수고와 노력과 몸부림을 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온전한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도 모르게 살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여호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있음으로 누군가가 있게 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1980년대 초반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던 “김용호, 김수철, 김석, 이현순, 홍성혜” 다섯 분의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박종수, 박영철, 권광일” 등의 목사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여호와께서 예비해 놓으신 분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누군가를 위해서 예비 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만나지게 되는 사건사고와 사람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와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여호와께서 창세전에 작정한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은 물론 여호와께서 창세전부터 구원하기로 작정한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복된 삶,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복된 삶,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