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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 : 요한복음3:31-36.
사람이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물질이 필요합니다. 물질의 대표적인 것은 돈입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우리 일상생활에 지극히 필요하지만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더더구나 재물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고 생각하며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은 복음을 들어도 믿지 않으므로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그 돈이 하나님의 왕국을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변을 둘러보시고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시니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들에 깜짝 놀라더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얘들아,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심히 어렵도다!”(막 10:23-24).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주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이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비유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매”(마 19:24).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5).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눅 18:25).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을 말합니다. 아마 농담하는 자들은 바늘을 낙타보다 크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바늘은 바늘로서 사용할 수 없을 것임으로 더 이상 바늘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부자란 악한자로 상징되거나 나쁜 것으로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로 나오며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으로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재물이 많았습니다. 그는 318명의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형제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듣고 자기 집에서 태어나 훈련을 받은 종 삼백십팔 명을 무장시켜 단까지 그들을 쫓아가서”(창 14:14).
그의 아들 이삭도 재물이 많았으며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도 재물이 너무 많아 그들이 함께 거할 수 없었습니다.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아들딸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 가축과 모든 짐승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자기 동생 야곱의 얼굴로부터 떨어진 지역으로 갔으니 그들의 재물이 너무 많아서 그들이 함께 거할 수 없었더라. 또한 그들이 나그네로 거하던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수용할 수 없었더라.”(창 36:6-7).
“가난한 자는 자기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으나 부유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잠 14:20).
그러나 재물이 많은 불의한 사람은 좋은 친구나 평안이나 자유가 없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기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근심 걱정과 수고가 많습니다.
자,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롬3:23).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합니다(롬6:23). 그러나 그 멸망에서 살길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의 종으로 살아야합니다. 종으로 산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평안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라.”(요 8:34).
죄를 지은 자는 항상 떳떳하지 못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즐겁거나 행복하지 못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는 자같이 삽니다. 자기가 지은 죄가 사람들에게 알려 질까봐 전전긍긍합니다. 그 죄가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그 죄를 공개하려는 자에게 끌려 다니고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그에게 복종해야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자유를 박탈당하므로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자고 싶을 때 잘 수 없습니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습니다. 밝은 곳에 마음대로 다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죽을 맛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특별히 들어나는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았다고 고백하나 구원 받은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소망보다는 무언가 불안하고 무엇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분명히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셨는데 구원 받은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해서입니까?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질문한 빌라도와 같습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길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진리고 그분이 길이고 그분이 생명입니다. 그분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고 영원히 삽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 14:6).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를 알고 진리를 믿으면 자유를 얻고 쉼을 얻고 평안을 얻습니다. 평안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요 14:27,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평안이 없고 불안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이 안 보이고 소망이 없다면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헛되이 믿었든지(고전15:2),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마11:28)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 신을 받아들였다면 그에게는 안식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체험이나 감격을 경험한 사람이 당시의 기쁨이나 가슴 벅찬 흥분이 잠시잠깐 있었을 뿐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첫사랑을 잃었거나 주님을 만난 설레임보다 근심걱정이 있다면 성경을 잘못 적용하거나 잘 못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아무리 친절한 사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옷을 입으면 불편합니다. 몸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연령이 다르면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내게 맞지 않으므로 불편합니다. 신발도 그렇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신발을 사거나 옷을 사도 상표가 무엇이냐?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냐? 따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내 몸에 맞지 않으면 나에겐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없었습니다. 옷도 귀하고 신발도 귀하고 먹을거리도 귀했습니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먹을 수 없는 것까지 초근목피로 연명했습니다. 그러니 수시로 배가 아픕니다. 고무신도 짝짜기로 신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헐벗을 수 없어서 맞지 않는 옷도 많이 입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내 몸에 맞지 않는 것은 불편함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성경전서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받는 대상은 각각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모두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시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말씀 앞에 대단한 혼란을 일으키고 또 모든 말씀을 자신에게 하신 것으로 받는다면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억누를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고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고 이방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고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즉, 하나님의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 있고 마지막 때에, 즉 대환란 때에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대환란 동안에도 땅에 거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고 이방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고 환란 동안에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날 구원 받은 여러분은 대환란 전에 들림 받아 하늘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해를 입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자들은 적그리스도들과 그에게 속한 자들로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대적하지 못하고 다만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할 뿐입니다. “그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하되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계 13:6).
대환란 당시에 땅에 거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면 여러분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므로 여러분들은 대환란 때에 이 땅에 거하지 않고 하늘에 거할 것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만 짐승의 형상에 경배할 것입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이런 말씀들을 믿지 못하는 성도들은 항상 평안이 없고 자유가 없고 안식이 없습니다. 아직 환란이 시작도 안 됐는데 짐승의 표를 받으면 어떻게 하나? 근심합니다. 근심하지 말라하신 주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요 14:1).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마 11:28-30).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자들에게 너그러우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시고자 합니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가볍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자녀 삼고자하십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면서 사람들을 외모로 구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가문이나 됨됨이나 학벌이나 나라나 피부색을 구분 하지 않으십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통해서 받아 주십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 모두의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느니라.”(요 6:47).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 10:28).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았다면 그가 받는 말씀도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맞이할 지라도 주님이 오라 하시면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니”(요 11:25-26). 이런 사실을 믿으면 근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얼마나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 평안을 줍니까? 죄인인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어찌된 말입니까? 이 말씀은 대체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입니까?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24:13).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 받았는데 끝까지 견디어야 구원 받는 다는 말은 도대체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어느 시대에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방인들에게 해당됩니까?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구원받은 교회에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대상을 모르면 불안하고 근심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행 16:31). 하신 말씀을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끝까지 견디란 말입니까? 진리가 자유를 준다고 했는데 구원 받은 자에게 무엇을 더 요구합니까? 진리의 말씀을 믿고 구원 받았는데 왜 자유와 평안이 없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받는 구원과 끝까지 견디어서 받는 구원은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도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받은 구원을 잃어버립니까?
오늘날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불안해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평안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너무 부담이 됩니다. 무엇을 끝까지 견딥니까? 목사가 하는 말을 끝까지 견딥니까? 무슨 요구를 하더라도 끝까지 견딥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시대별로 나누어야합니다. 구약시대인가? 신약시대인가? 환란시대인가? 그리고 그대상이 누구인가로 나누어야합니다.
유대인에게 하신말씀을 내가 받고 그대로 지키려 한다면 대단한 시행착오를 낳습니다. 율법을 지켜야하고 안식일을 지켜야하고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물론 예루살렘에 가보아야 지금은 성전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구약유대인들에게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기록은 대상을 어떻게 나누는지 보십시오. 엄연히 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로 나누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어떤 실족거리도 주지 말되”(고전 10:32).
그러면 우리함께 성경을 탐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24:13).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 있다 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환란장입니다. 대환란은 교회가 휴거되고 이 땅에 임하는 전무후무한 환란입니다. 대환란은 구원 받은 교회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아직도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됩니다. “아아, 슬프도다! 그 날이 커서 그것과 비길 날이 없나니 그 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로다.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로다.”(렘 30:7).
큰 환란은 교회가 휴거되고 이 땅에 남아 있을 유대인들과 모든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큰환란은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기위한 것입니다.
마24장 문장을 살펴봅시다.
이글이 누구에게 해당되는지 문맥을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세상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시므로 제자들이 놀라서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느냐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분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마 24:3).
마태복음 24장은 세상 끝에 올 큰 환란을 말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세상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지만 아직은 온 세상에 임하는 큰 환란은 아닙니다. 신랑 되시는 어린양의 신부(교회)가 들림 받기 전에는 환란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데려 가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아무 것도 걱정 근심하지 마십시오. 근심하는 자들은 구원 받지 못했거나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이 지구상에는 크고 작은 환란들이 있었습니다. 큰 지진이 있었고 해일이 있었고 홍수가 있었고 토네이도가 있었습니다. 세계 1, 2차 대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온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큰 환란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큰 환란을 교회, 즉 우리 구원 받은 성도들이 겪어야 할 환란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을 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큰 환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평안과 자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임할 환란을 끌어다 근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짐을 지고 근심하며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므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큰 환란이 임하기 전에 교회가 휴거(들림) 된다는 믿음이 없다면 마24장의 문맥을 다시 살펴보면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자유와 평안을 찾으십시오.
자 큰 환란이 시작됩니다.
16절입니다.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할지어다.”(마 24:16).
지명이 어디입니까? 유대 땅이고 유대에 있는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유대인들도 아니고 유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아직 큰 환란이 오지도 않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너희는 기도하라.” (마 24:20). 여러분들은 지금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도 안 됩니다. 돈을 써도 안 됩니다. 여행을 가도 안 됩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불을 피워도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입니까? 혹시 메시아닉 쥬라면 모르지만 여러분들은 한국인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 받은 크리스천이라면 해당사항이 전혀 없습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큰 환란의 시기는 하나님의 교회가 들림 받은 후이며 대상은 구원받지 못한 땅에 거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큰 환란 때에 구원 받는 성도들도 있지만 특별히 육체로 구원 받는 자들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혼이 구원 받았습니다(벧전2:9).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삽니다. 그러나 큰 환란에서 육체로 구원 받은 자들은 끝까지 견뎌야하는 자들로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것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질병뿐만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정치적인 핍박과 종교적인 핍박을 말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바로 그 선택 받은 자들을 속이리라.”(마 24:24). “또 그가 그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줄 권능을 소유하여 그 짐승의 형상이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려 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자연재해나 질병이나 전쟁은 물론 적그리스도나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아야하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끝까지 견디고 육체로 구원 받고(살아남아야) 천년왕국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담의 속성을 가진 육체로 자녀를 낳으며 천년왕국 백성으로 천년동안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으로 더 이상 시집가거나 장가가서 자식들을 낳는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들림 받을 때 썩지 않을 부활의 몸을 입고 하늘에 올라가 어린 양과 혼인을 하고(계19:8-9) 주님과 함께 내려와 이 땅을 심판하고 이 땅에서 천년동안 통치하게 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능을 갖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로다.”(계 20:6).
마24장은 큰 환란을 말하며 큰 환란 동안에 육체로 구원받는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혼의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순교하여 하늘로 들림 받습니다.
“그 날들이 짧아지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로되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짧아지리라.”(마 24:22). 오늘날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혼이 구원 받은 것이고 큰 환란 동안에는 혼의 구원을 받는 자들도 있지만 육체로 구원 받는 자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이 왜 육체로 구원 받고 살아남아야 합니까?
창조의 처음엔 아담과 이브를 통하여 다산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채웠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는 노아의 가족 8명을 통하여 이 땅을 채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창 9:1). 그렇다면 큰 환란 뒤에 천년왕국에서는 누가 천년동안 다산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채웁니까? 큰 환란에서 끝까지 견디고 육체로 구원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 땅을 천년동안 채워 갈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끝까지 견뎌야 구원 받는다”고 협박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해서 돌아서야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혼이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더 이상 견딜 것도 노력할 것도 없습니다. 구원 받은 혼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과 구원은 별개입니다. 어떤 행위로 구원을 유지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견디는 것은 은혜 시대의 교회 교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요한복음 3장 말씀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변개된 성경으로 인하여 구원 받았으면서도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복음을 듣고 한평생 주님을 섬기며 살아온 어느 노년의 자매를 예로 들겠습니다. 그분은 누가 보더라도 진실한 성도입니다. 이웃을 돌아보며 복음을 전하며 기도에 열심을 내시는 분입니다. 성도들 가운데에는 그분이 그리스도인들의 롤 모델이 될 만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항상 근심하며 자신을 자책합니다. 그 자매님에게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레 그분께 물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매님의 믿음을 본받고자 하는데 무엇을 그렇게 근심하며 염려를 하고 계십니까? 그분은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싫은 제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영생을 얻겠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구원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왜 그런 근심을 하십니까? 했더니 성경말씀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개역;요3:36). 자매님은 아무리 아들에게 순종하려 해도 온전히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근심한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대로라면 아들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더라도 아들을 순종치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어찌합니까?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는데, 성경말씀대로라면 아들을 믿어도 아들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설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잘못되다니, 이는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일이 아닐까? 오히려 송구스러워합니다. 오히려 (없음)구절이나 변개된 부분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고,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고, 모든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려합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왔고, 기록된 말씀을 가감하고 불신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신4:2, 12:32, 잠30:6, 렘26:2, 계22:18-19).
이런 일들은 신약성경에도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함에서 난 자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참으로 안타깝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서신이 주님께서 주신 신앙의 참된 교리로써 성경으로 기록되었는데 당시에도 가짜 바울 서신도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외경도 이런 경우입니다. 외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어낸 소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보내지 않은 가짜 서신들로 인하여 불안해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너희는 영으로나 말로나 혹은 우리에게서 왔다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살후 2:2).
자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요3:36절을 바른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아들을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아들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많이 다릅니다.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죄인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온전해 지면 그 때에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전체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5-16).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요 3:18).
그렇다면 요3:36절에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맞습니까? “아들을 믿지 않는”것이 맞습니까?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것은 변개된 성경으로 마귀의 걸작품입니다. 이런 성경 변개로 인하여 신실한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고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 가감되어서는 안 됩니까? 왜 변질 되어서는 안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되거나 변개 되면 구원 받고도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평안함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래도 개역성경을 바른 성경으로 믿고 따르고 순종하시겠습니까? 원본이 다르면 아무리 개역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그러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개정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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