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드리* 잔치
송 용 식 (songys819@naver.com)
어렸을 적 우리 시골집 마당에서는 일 년에 두 번의 잔치가 열렸다.
아버지는 맘드리가 끝나면 우리 농사일을 도와준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돼지고기와 막걸리, 국수를 대접했다. 영산포 장날에 사 온 부채, 밀짚모자, 고무신 등을 선물로 드렸다.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 얼굴에 미리 풍년이 들었다.
시골 농부였던 아버지는 추석이 한 달쯤 남으면 어디서 신파조 같은 연극 대본을 구해오셨다. 마을 청년들을 모아놓고 배역을 정해 주는 등 연출까지 하셨다. ‘잘해도 웃고 실수해도 웃는 법잉께 그냥 부담 갖지들 말고 허게’하시며 덕석 모서리에 모깃불을 피우셨다.
추석 다음 날, 우리 집 마루는 무대가 되고 마당은 객석이 되는 작은 소극장이 되었다. 위아래 동네 사람들까지 다 모이는 두 번째 잔치는 마을 축제가 되었다.
내가 글을 쓰면서 언젠가 첫 책을 발간하게 되면 연극을 꿈꾸었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소극장 무대에서 출판기념 헌정 공연과 북 콘서트를 하고 싶었다. 그 자리에는 아버지가 맘드리 끝난 후 잔치를 하셨듯이 고1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하여 나의 성장에 길을 만들어 주신 소중한 분들을 모시고 감사의 잔치를 겸하면 의미가 더 크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놓고 구체적인 출판기념 북 콘서트를 준비하다 보니 어려운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코로나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백여 명 규모의 소극장을 찾는 일, 연극 공연할 배우 섭외하는 일, 그날 초대할 분 선정과 행사 끝난 후 식사 대접할 장소를 찾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극장은 교통 편의와 연극공연, 북 콘서트에 어울릴 분위기와 대관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했다. 연극공연은 기존 연극의 클라이맥스만을 보여드리기로 하고 공연시간은 20분 정도로 잡았다. 초대할 손님은 내 나이에 맞추어 칠십 분으로 하고 식사 장소는 초대받은 분들이 흡족해할 수 있는 고급연회장을 찾는 일이었다.
장소는 우여곡절 끝에 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 공연장을 찾았다. 연극공연은 대구, 대전, 용인의 지방 극단까지 섭외하였으나 여의치 못해 결국 국악공연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칠십 평생 살아오며 은혜 입은 분들을 선정하는 일도 힘들었다. 나중에 초대받지 못한 분들의 섭섭해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기념행사는 수필 낭송과 북 토크, 샹송 가수의 노래와 경기민요 공연 등 통상의 출판기념회나 북 콘서트와는 다르게 다채롭고 즐거웠다는 뒷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번 일은 누가 원해서, 시켜서도 아니고 내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 벌린 일이다. 내가 나와 약속하고 다짐했던 일.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연극 헌정 공연을 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내 ‘칠십 평생의 맘드리 잔치’를 통해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분들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다행스럽고 홀가분하다.
*초벌, 두벌 김매기를 하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하는 김매기의 순우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