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 25
유천기는 그 불상이 일천 개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
면 일만 개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는 이렇게 많은 불상을 한꺼번
에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평생에 걸쳐 나무를 깎아 만든 것
같았다.
"아미타불.... 그 분 젊은 시주는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다.
그 분은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분인데 네가 어찌 붙잡아 두고 있
는 것이냐? 어서 풀어 드려라."
여승의 말에 희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이 분은 저의 남편이에요. 평생 저와 함께 있어
야 되요."
"아아! 어리석은 것.... 너와는 인연이 없는 분이다. 아무리 붙잡
아도 결국은 떠나게 될 것인데 어찌 고집을 부리느냐?"
희사의 얼굴에 섬뜩한 기운이 어렸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 분은 결코 사아를 떠날 수가 없어요. 사아
는 이 사람의 칠대경락을 막아 놓았고, 소녀잔음진기(素女殘陰眞
氣)로 임독양맥도 폐쇄시켰어요. 사아가 아니면 아무도 혈을 풀
수 없어요. 사아의 곁을 떠나면 이 사람은 얼마 살지 못할 거예요."
유천기는 그 말을 들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
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기운이 없고 사지에 온기가 없으며
머리가 흐리멍텅해졌구나. 소녀잔음진기는 팔황진경상의 가장 악
독한 마공이거늘......'
그는 순간의 미색에 홀려 이런 처지가 된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
게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녀가 마녀의 딸이라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 천추의 한을 남기
게 되었구나!'
다음 순간 그는 한 가지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희사는 분명 희옥화의 딸이다. 그리고 희옥화는 죽었다. 그런데
여승은 누구길래 그녀를 어머니라 부른단 말인가?'
유천기는 실눈을 뜨고 여승을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얼굴이 닮았다. 혹시... 저 여승이 죽었다던 희옥화란 말인가?
그렇다면 희옥화는 죽지 않았단 말인가?'
그때였다. 문득 멀리서 은은한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그 방울소리
는 아주 가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 고막에 또렷이 울려왔다.
그 순간 여승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아미타불.... 그가 왔구나. 얘야. 너는 어서 가거라. 오늘 이곳
에서는 수십 년에 걸친 은원(恩怨)의 혈사가 벌어질 모양이다.
아! 결국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는 것 같구나."
여승은 초조한 듯 염주를 자꾸만 헛 돌렸다. 그런 여승의 아름다
운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똑똑 흘러내렸다. 눈을 지그시 감은채
그녀는 불호를 외웠다.
"나무 관세음보살.... 모두가 부처님의 뜻이다. 정해(情海)로 인
한 인과가 이다지도 깊고 큰 고통의 피바다를 이루게 될 줄이
야... 업보로다. 업보로다... 어찌 그는 출가인으로서 눈 앞에 다
가온 겁(劫)을 모른단 말인가?"
희사가 종알거리듯 물었다.
"누가 출가인이란 말인가요? 태무황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가 출가했나요?"
여승은 탄식했다.
"얘야. 너는 끝내 가지 않으려는 것이냐?"
"가지 않아요. 사아에게는 약이 떨어졌어요. 이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거든요. 태무황이 오면 얻어야 해요."
여승의 안색이 변했다.
"사아야! 그 아이에게도 복용시켰단 말이냐?"
희사는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좋았어요. 이 이와 저는 나란히 누워서 환희경에 함께 올랐어요.
이 사람도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여승의 눈에서 문득 차가운 빛이 흘러 나왔다.
"그 약을 함부로 쓰다니! 너는 어미의 말을 듣지도 않는구나!"
"사아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 사람이 곁에 있어도 말도 하지않
고 느끼지도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우리는 함께 즐거움을
느끼고 함께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해요."
여승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때였다. 어디에선가 차분하게 가
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소. 옥화, 당신의 딸과 같은 마음을 그대가 지녔더라면 우리
는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요."
"......!"
여승의 안색이 얼음처럼 차디차게 굳어 버렸다. 그녀는 나직이 불
호를 외우더니 말했다.
"풍진세월 속에 지나간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당신은... 어떻
게 해야 그 어리석음을 깨우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리들의
삶은 아득히 멀리 사라져 갔고, 남은 것은 허무 뿐이에요. 무엇을
그리 집착하고 욕망에 그리도 번뇌하는 건가요? 사바세계의 더러
운 욕념은 한낱 허망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왜 모르나
요?"
"허허허허! 옥화. 그대는 여전히 아름답고 나 또한 옛날에 비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어찌 허허로운 말만 하는 것이오? 우리
는 다시 출발할 수가 있소."
순간적으로 여승의 얼굴에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떠올랐다. 하
지만 그런 표정은 극히 잠깐이었을 뿐, 곧 여승의 얼굴은 고요하
게 가라앉았다.
"도도(屠刀)를 버리면 그 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당신이......"
그 순간 불당 안에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회의에 목면구를 쓴 삼
안마군 혁련광이었다. 혁련광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옥화. 나는 달라지지 않았소. 얼마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소.
잃어버린 행복을 찾을 수 있단 말이오. 나는 오로지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오늘까지 당신이 한 말을 이룩하기 위해 천하
를 장악했소.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니, 정녕 날 당혹
케 하는구려."
여승은 탄식했다.
"보세요. 이제는 희옥화가 아니예요. 희옥화는 죽고 오직 불도에
귀의한 한 비구니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요."
혁련광의 음성에 분노가 어렸다.
"왜, 왜 안 된다는 것이오? 나, 나는 모든 것을 버렸는데 그대는
어찌......"
그때였다.
"크아악!"
멀리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그 비명은 잠시 사이를 두고 연달
아 울렸다. 비명소리에 묻혀 은은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
왔다.
"아니?"
혁련광은 흠칫했다. 그 사이로 여승의 음성이 흘렀다.
"아미타불... 돌아가세요. 옛날로....... 불심은 무한한 것이에
요. 사문(沙門)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부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
실 거예요."
"푸하하핫.....!"
혁련광은 문득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광소에는 이상한 울분과 비
애가 깃들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웃음을 멈추었다.
"나더러 다시 돌아가라고? 왜, 옛날에 나에게 환속(還俗)하라고
했지?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대는 벌써 잊었단 말인
가?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라고?"
그렇게 소리치는 혁련광의 눈에는 가는 핏발이 어렸다. 멀리서 들
려오던 비명은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옥화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모든 것은 부처님의 뜻이에요. 천기(天機)를 누설
하는 것은 금기이나... 빈니는 어쩔 수 없이 보았지요. 아미타
불.... 저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힘으로 이룬 기업은 힘에 의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무림성의 운명은 다했어요."
혁련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그대의 짓이오? 그대가 아니고는 감히 누가 본성을 무
너뜨릴 수 있겠소?"
"아미타불.... 잘못 생각하셨군요. 천하에는 이인(異人)이 많답니
다. 하늘 밖에 하늘이 또 있어요. 빈니는 다만 천기의 흐름을 읽
었을 뿐이에요. 천살성(天煞星)을 밀어내고 대자미성(大紫微星)이
도래한 것은 구주(九州)의 신성(新星)들이 이룩한 일이에요."
챙그랑!
법당의 창문이 부서지며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는 전신이 피로 물
들은 복면청년이었다. 청년이 입고 있는 백의는 완전히 붉게 젖어
마치 혈의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노적! 이제 그대는 뿌린 씨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중원무림에
뿌려진 수많은 협의지사의 피를 목숨으로 보상해야 할 것이다!"
혁련광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가소로운 빛이 흘렀다.
"아직 어린 아이군. 아이야. 너는 누구냐? 네 사부는 누구냐?"
청년은 복면을 벗었다. 준수하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다름아닌 사검무정(死劍無情) 장무진이었다.
"나의 사부님은 옥향진인, 사문은 무당(武當)이오."
혁련광은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휘휙!
창문을 통해 무엇인가가 날아와 바닥에 데구르르 굴렀다. 그것은
십여 개가 넘는 사람들의 수급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수급은
추악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
혁련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수급은 언제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심복들이었던 것이다. 이때 다시 창문을 통해 십여 명의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바로 광명회의 지사들이었다. 앞장 선 중년부부는 검군도
후였고, 개방의 전임방주인 병서생과 현임 방주인 일진풍, 개방
장로들, 그 밖의 인물들이 속속 안으로 들어왔다.
혁련광은 서서히 가슴을 폈다. 비로소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
을 깨달았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이곳에 올 때 극소수의 수하들
만을 대동했다. 광명회에서는 그 점을 노리고 이 곳에 함정을 파
놓은 것이었다.
그의 눈은 장무진에게서 서서히 개방의 전대 방주인 병서생에게로
옮겨졌다.
"정말 노부는 머리가 둔해졌군. 너희들이 다시 일어설 줄은 몰랐
었지. 아무래도 능력을 과소평가 한 것 같군. 특히 개방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다."
병서생은 담담히 말했다.
"귀하는 이제 포기해야 할 것이오. 무림성도 곧 무너질 것이오.
광명회에 의해 완전히 고립되었소이다."
"헛헛헛헛! 그대들은 무엇을 착각하고 있군. 숫자가 많다고 노부
를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네."
그는 소매를 떨쳤다. 그러자 그의 장포가 바람을 맞은 듯이 팽팽
히 부풀어 올랐다.
"으허허허허헛! 과연 노부의 운이 다하였는지 시험해 보겠네!"
문득 혁련광의 몸이 훨훨 날아올랐다. 그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신
법이었다. 어느 순간 허공에 뜬 그의 몸이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네 개로, 다시 여덟 개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장내의 군웅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갑자기 허공에서 수십 명
의 삼안마군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콰콰쾅!
"크아악!"
굉음이 들리며 처절한 비명이 연달아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군웅
들이 피보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정도 무림인들은 복부가 터지
고 뇌가 짓눌린 채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죽어갔다.
삽시에 불당 안은 수라장이 되었으며 가공할 지옥경으로 화하고
말았다. 수십 개로 늘어난 삼안마군을 뉘라서 상대할 수 있단 말
인가? 처절한 비명과 분노에 찬 절규가 들리는 가운데 불당 안에
는 주검이 점점 늘어만 갔다.
"으하하하하하!"
삼안마군의 일진광소만이 불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장무진은 벌써 십여 개의 환영을 베었다. 그의 검법은 이미 천하
무적의 경지에 들어가 있었다. 검이 움직이면 몸이 따르고, 몸이
가면 검이 따랐다. 마음이 일면 검이 가고, 검과 마음과 육체가
하나가 된 검도상 궁극(窮極)의 경지에 들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환(幻)이요, 허(虛)다. 하나를 베면 다시 하나
가 생긴다. 끊임없이 베어 보아야 끝이 없다. 허허실실의 맥을 끊
어야 한다. 그렇다면......'
장무진은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무진의 귀에 하나의 소리가 들
려왔다. 수없이 많은 환영들이 장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나 그
소리는 오직 한 군데에서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
장무진은 신검합일한 자세로 그 소리를 따라 서서히 움직이기 시
작했다. 그의 가슴에는 비장한 결심이 어리고 있었다.
한편, 유천기는 장내의 상황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나서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그는 삼안마군이 팔황진경의 가공할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광명회의 군웅
들은 얼마 가지 않아 모두 죽고 말 터였다.
그는 내공을 일으켜 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칠대경락이 막혀있
고 임독양맥에도 음기가 가득 차 있어 조금도 진기를 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희사는 넋을 잃고 장내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삼안마군이 펼치는 무공을 보며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때였다. 유천기의 귓전으로 한 가닥 가는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시주. 빈니의 말을 잘 따르도록 하세요. 태무황을 막을 사람은
오직 시주 뿐이에요, 시주가 익힌 팔황경의 하경 속에 있는 무공
만이 그를 꺾을 수 있어요. 지금부터 빈니가 말하는대로 경맥을
움직여 봐요.)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