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괴물(怪物)
쏴아아아… 쏴아아……!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은 상큼한 소리가 들리며, 투둑툭 소리와 함께 그의 손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비(雨)라니? 훗훗, 정녕 봄(春)인가?"
그는 회양목 그늘 아래 서 있었다.
이 곳은 아주 넓은 삼림 한가운데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숲, 십오 리 반경 안이 수천 가지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자욱한 안개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허공에서는 눈물 같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시꺼멓게 물든 새벽 하늘.
돌연, 흑궁(黑穹)이 파랗게 물들더니 한 마리 뇌룡(雷龍)이 빗줄기를 타고 떨어지는 듯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다가 우르릉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초우(初雨)!
올해 처음으로 비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뇌전은 쉬지 않고 떨어졌고, 환하게 밝아지는 하늘 아래 거대한 탑신(塔身) 하나가 빗줄기에 휘감기는 것이 보였다.
<절대입금(絶對入禁), 제왕지릉(帝王之陵)>
꽈꽝-!
무시무시한 우레 소리. 삽시간에 주위는 귀역(鬼域)으로 화하는데, 한 시진 내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의 입가에는 오히려 미소였다.
"수 년 만이군, 비란 녀석을 본 지도!"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꽤나 굵은 빗방울이 죽립(竹笠) 테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섬전(閃電)이 내리꽂힐 때마다 그의 얼굴 윤곽이 파랗게 빛이 났다. 강인한 인상을 주는 아래턱, 콧잔등까지만 보이는 얼굴은 꽤나 준미했다. 강한 아래턱과 정렬적으로 보이는 입술이 정말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어딘지 모르게 섬약(纖弱)해 보이는 몸매에서는 말로는 형용하지 못할 기도가 흐르고 있었다.
마무정(魔無情), 그는 다시 죽립을 썼다. 왠지 모르게 지금은 얼굴을 가리고 싶은 것이다.
비 오는 소리는 처량하다기보다 상쾌했다.
"비란 놈은 시원시원하다. 운치는 없으되, 오는 대로 황진(黃塵)을 씻어 내지. 훗훗, 다 묻어 버리는 척하다가 나중에는 똥물을 토해 내는 눈(雪)이란 놈에 비하면 그래도 솔직한 놈이야!"
지금은 봄의 초입이었다. 며칠 간 기온이 온화하다가 급기야 비가 퍼부어지는 것이다.
비는 우막(雨幕)이 되어 숲을 뒤덮는다.
벼락치는 소리가 요란할 때, 마무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밥값만 하면 되지… 어이해 더 하는가, 잔풍(殘風)!"
대체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일까?
"과잉 충성도… 죄야!"
그는 미소를 지었다.
우중(雨中), 소리 없이 다가서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스슷- 슷-!
가벼운 파공성을 비 오는 소리에 감추며 다가서는 흑의들.
습관인 듯 그늘만을 틈타 다가서는 사람들의 수는 오백일(五百一)이었다.
제일 앞쪽, 안색이 밀랍처럼 파리한 중년무인 하나가 있었다.
그도 웃고 있었다. 번개가 칠 때마다 그의 흰 이빨이 희디희게 반짝거린다.
얼음 조각처럼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사람, 그의 가슴에는 보검(寶劍)이 안겨져 있었다.
잔풍, 그는 어지간히도 끈질긴 사람이었다. 마무정은 결국 그를 떼어 놓지 못한 것이다.
"비천옹(飛天翁)이 높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짐작했습니다!"
잔풍이 다가설 무렵, 제일위사대 중 동반(東班) 이백오십 인과 서반(西班) 이백오십 인은 숲그늘 구석구석에 숨어들었다.
츠츳- 츳- 츳-!
흐릿한 안개를 일으키며 은잠(隱潛)하는 사람들, 이들은 줄곧 마무정의 비위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한데, 강가에 폭약 터진 자국이 있더군요?"
잔풍은 허리를 넙죽 숙였다.
"시시한 폭죽(爆竹) 놀이였어! 구경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네! 조금 거친 부부(夫婦)의 초견례(初見禮)였지."
마무정은 뒷말을 가볍게 얼버무렸다.
부부라는 말에는 옥화삼이 숨어 있기에!
마무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속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아닐세! 나는 오히려 자네들이 걱정이네. 자네들이 항차 내가 측간 갈 때에도 따라올까 겁이 나네!"
"그것 역시 마도율법에 있는 일입니다. 살수 중에는 측간의 오물 속에 숨어 비검술을 시전하는 자도 있습니다."
잔풍은 정색을 한다.
기실, 마무정은 그가 외손자인 해검대장 사해황(四海皇)과 조손지락을 즐길 여유를 주기 위해 단독행동을 한 것이었다.
한데, 잔풍은 악착스레 마무정을 추종해 온 것이다.
잔풍의 추종술은 동영(東瀛)의 사막(死幕)에 비전되는 만리추종술(萬里追從術)에 필적하는 표풍추영술(飄風追影術)이었다.
또한 냉동되었다가 부활한 인간들은 특이한 후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후각을 통해 대총수를 느낀다.
때문에, 잔풍의 후각은 일천 위사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속하는 강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 여기고 급히 대총수의 자취를 따라갔습니다!"
"……!"
"흔적은 성문(城門)으로 이어졌습니다!"
"흠!"
"성문을 지키던 무장(武將)이 주자(朱字) 세 개를 발견하고 막 소리칠 때, 속하는 그 곳을 지나쳐 주가(酒家)로 갔습니다!"
"맞아, 나는 목이 컬컬해 주루에 갔었다네!"
"예, 북경향(北京香)이라는 주루였습니다!"
"……!"
"주인은 그 곳에서 죽엽청(竹葉淸) 세 주담자를 비우셨고, 안주로는 간단히 낙화생 한 접시만 드셨더군요."
"그랬었지!"
"나오실 때에는 점소이에게 은자 두 냥을 주시었더군요. 속하가 거기 당도했을 때, 점소이 녀석은 꽤나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훗훗… 그랬던가?"
마무정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잔풍의 표정이 굳어지며 숙연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일은 그 때부터 꼬였습니다!"
"꼬이다니?"
"주인을 추종하는 무리는 저희 위검대 이외에도 또 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수는 백팔(百八), 저희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초절정 고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성문에서부터 바로 대총수를 따랐습니다!"
"대체, 누가?"
"그들은 동창(東廠)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동창!
그 조직은 영락제가 만든 결사조직이다.
그 조직은 황실(皇室)을 거역하는 중신들을 견제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현재 자금성에서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는 조직은 바로 동창조직이었다.
동창은 지난 이 년 사이 큰일을 수없이 해냈다.
영락제의 위엄은 동창의 활약으로 인해 십 배로 늘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창을 이끄는 자는 황실의 금삼시위장(金衫侍衛長)인 황룡무존(黃龍武尊)이었다.
쏴아아아……!
쉬지 않고 내리는 비, 제왕릉은 한기(寒氣)와 습기에 묻혔다.
"동창이 어이해, 나를 따르지?"
"글쎄요?"
"흠, 계속 말하게!"
"그들은 주루에서 흩어졌는데… 반은 동창의 중심지로, 반은 왕부(王府)로 갔습니다!"
"왕부라니?"
"바로 그 말씀을 드리기 위해 속하가 여기 온 것입니다."
잔풍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무정도 따라 상체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훗훗… 나를 기쁘게 하는 소식을 알고 있다면, 내 자네에게 주인의 입장이 아니라 친구의 입장에서 독주 한 잔을 사겠네!"
빗물은 그의 얼굴에 뿌려졌다.
아주 강인하고도 신비한 인상을 주는 마무정, 그의 탁월한 용병술(用兵術) 덕에 잔풍을 비롯한 모든 마화성인(魔花成人)인 마무정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속하, 술을 마실 자격이 있습니다!"
잔풍은 또 웃었다.
번쩍-!
하늘은 번개로 갈라졌고, 뒤이어 천만 근의 뇌정이 떨어져 내리며 숲이 흔들렸다. 숲이 흔들릴 때 잔풍의 입술도 흔들렸다.
"동창의 밀위들이 간 곳은 바로 천금왕부(天金王府)였습니다!"
"천금왕부?"
"천금왕야가 머무르는 곳입니다. 천금왕야는 영락제에게서 승상(丞相)을 제수받고도 사양한 배포 큰 인물입니다!"
"으음……!"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는 황룡무존이라 하며 바로 동창제일위인 동시에 어전시위대장(御前侍衛隊長)입니다. 또한 지난해 팔십일만 대금군교두(大禁軍敎頭)가 되어 구문제독(九門提督) 이상의 권세를 갖게 된 자였습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이상하게도 빗줄기의 빛이 희었다. 여전히 겨울(冬)인 듯, 비는 어느 틈엔가 진눈깨비로 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동창을 이끌고 있고, 주인을 추격했던 자들은 그의 심복 중 가장 강하다는 백팔아라한(百八阿羅漢)이었습니다!"
"한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은 오대어의(五大御醫)가 연단한 금강대환단(金剛大還丹)을 세 알씩 먹고, 내공을 이 갑자씩 얻은 초절정 고수들입니다!"
"흠……."
"그들은 북원(北元)을 막고 황실의 반역자들을 막는 일에만 투입되는데, 이상하게도 천금왕부에 가서 병기고(兵器庫)를 열었습니다!"
천금왕야(天金王爺), 그는 왕씨(王氏)라던가?
그는 천하제일 부자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영락제가 천하를 얻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자였다.
"그들은 병기고 안에서 백팔 개의 무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마무정도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면 담담하나, 그는 습관적으로 조급함을 보이고 있다. 조급할 때 그는 손바닥으로 아래턱을 만진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오백의 숨은 그림자들은 그것을 안다.
잔풍, 그는 우중에 몸을 약간 떨었다. 그는 자신의 창자가 뱃가죽 밖으로 쏟아져도 떨지 않을 인물이다.
공포 따위는 아예 정서(情緖)의 명단(名單)에 갖고 있지 않은 철의 인간. 그런 그가 몸을 떨다니……!
진눈깨비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이 꺼낸 것은 백팔마병(百八魔兵)으로, 마병일천좌(魔兵一千座) 가운데 끼어 있는 물건입니다!"
그는 힐끔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 마무정은 순간적이나마 숨을 끊었다.
마병일천좌(魔兵一千座).
그것은 마도대총수에게 전해지는 전 마가의 유산 중 하나이다.
그것을 백 개 이상 지니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장로(長老)의 신분에 올라 있는 사람이었다.
"그… 그럼?"
마무정은 주먹을 거머쥐며 잔풍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습니다. 천금왕야가 바로 그였습니다. 그는 강한 자입니다. 속하, 마병을 보고 놀라 그의 거처로 다가가 보았는데… 놀랍게도 후예가 아니고 본인이더군요!"
"본인이라면… 혈왕검대를 꾸미기로 예정되었던 혈왕공(血王公)이란 말인가? 그가 살아 있단 말인가?"
"예. 그는 마도의 노충신이며, 마병야(魔兵爺)와 마박사(魔博士) 두 분을 제외한다면 마도서열이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으음……."
"그는 과거 한때 혈화삼의 휘하고수 중 두 번째로 강한 고수로 소문이 난 바 있습니다. 당시 첫째 고수는 마박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왕검휘(王劍輝)! 바로 제가 방금 전 보고 온 자입니다!"
"그… 그럼, 그가 반역을?"
"그렇습니다. 그는 감히 대총수를 죽일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하가 급히 여기 온 것입니다."
"으음……."
"걱정 마십시오. 대총수 아라한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하나, 속하들이 능히 막을 수 있으니까요. 주인은 팔짱을 끼고 계셔도 됩니다!"
"……!"
마무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는 눈을 들어 진눈깨비로 누벼지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놈은 시체만은 온전히 하라고 했습니다. 건방지게도……."
잔풍은 툴툴거리며 신형을 가볍게 틀었다.
그는 휘하들에게 휘파람으로 신호를 내리는데, 마무정은 그런 그를 향해 묘한 시선을 던졌다.
"시체만은 온전히 하라고?"
이글거리는 용암과 같은 열기가 담긴 젊은 용의 눈빛.
'이분이 또 이런 시선을……?'
잔풍은 일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게 꼬인다고 여겼다.
'주인의 시선이 이럴 때면… 늘 예측하지 못할 일이 생긴다.'
잔풍은 마무정의 미소를 보고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마무정은 점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닭갈비가 있지. 먹기 힘드나, 버리기는 아까운 것 말일세. 그러나 이빨이 튼튼하다면 능히 깨물어 먹을 수 있지. 사실, 뼈란 좋은 것이야. 살코기보다 단단해 잘 씹히지 않으나, 먹기만 하면 정말 몸에 좋아! 훗훗……!"
"주, 주인! 설마, 그 늙은 배반자를 용서하시렵니까?"
잔풍은 아예 울상이 되었다.
진눈깨비는 더 큰 소리를 내며 제왕릉을 뒤덮고 있다.
"제일위검대는 해검(解劍) 대기하게! 이것은 명이네!"
마무정은 오른손을 내밀어 나무등걸을 짚었다.
"휴우, 술 한 잔 얻어마시기 정말 힘듭니다요."
잔풍은 넋두리를 하며 스르르 안개로 화해 모습을 감췄다.
늘 이런 식이었다.
젊은 성주와 늙은 비위.
쏴아아… 쏴아아……!
숲은 잠들지 않았다.
콰르르르- 릉- 쾅-!
구천이 온통 푸른 빗줄기에 휘감긴다. 잿빛 하늘은 노한 번개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고, 진눈깨비는 한 많은 여인의 앙탈처럼 몸부림치며 뿌려진다.
부서지는 듯한 하늘. 그러나 그러한 혼돈 가운데에도 새벽은 깨어나고 있었다.
여명(黎明).
마무정은 나뭇가지를 쥔 채 여명을 맞이했다.
'위사들은 오백 장(丈) 밖으로 물러났다.'
마무정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기 자신의 무엇인가가 자신을 놀라게 하고 있다고나 할까?
'아아, 또 나의 짐승 같은 본능이 시작된다. 나도 알 수 없는 괴물적인 잠력(潛力)이 또다시 시작된다. 번번이 나를 수호해 준 그 강하고 질긴 야수의 힘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마무정은 선 자세로 대지(大地)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청력도 시력도 아닌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땅에서 기운이 흐른다.'
마무정은 섬뜩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콰아-앙- 쾅-!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뇌성벽력, 그의 얼굴은 번갯불로 인해 푸르게 번쩍거린다.
그는 지금 아랫입술을 가볍게 짓물고 있었다.
'대지의 기운을 느끼는 법을 일컬어 지인(地引)이라 하며, 그것은 용천혈(湧泉穴)의 감각으로 사방 삼 리 안의 살기(煞氣)를 느끼는 것이다.'
마무정의 마음 가운데에는 거대한 공간이 있다. 그 안에는 마가의 마공 이상 가는 절대적인 무공 구결이 가득 들어 있다.
그 구결은 필요할 때마다 뇌리에 떠오른다. 지금도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천년마고(千年魔庫)에서는 배운 적이 없는 구결을 외우고 있었다.
천둔지인(天遁地忍)!
대체 누가 그러한 것을 전수해 주었단 말인가?
퍼부어지는 눈발과 빗발, 사위는 흑막(黑幕)에 덮인 듯 차단되어 있다.
빗물은 죽은 듯 흐르고, 얼음 조각 섞인 진눈깨비는 발광이라도 하는 듯 모질게 뿌려진다.
그리고 마무정은 발바닥을 통해 강한 기운을 느꼈다.
'구로(九路)에서 다가서고 있다. 각 로(路)마다 십이 인씩이고, 각각이 지극히 강한 살기를 흘리는 마병(魔兵)을 지니고 있다. 그 기운이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나의 기이한 능력에 걸려들었다.'
마무정은 졸음에 취한 수탉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진눈깨비는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동서남북(東西南北) 사위에서 괴영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너무나도 조심스레 다가서는 자들, 그들은 환우잠영(幻雨潛影)이라는 절기를 시전해 세우(細雨)발에 몸을 감추며 다가서고 있었다.
빗소리, 우레 소리, 바람 소리… 제왕릉은 요란한 소리로 누벼졌고, 어두운 대기(大氣)는 모든 그림자를 검게 묻어 버렸다.
백팔 인은 그 와중을 틈타 원을 그리며 접근해 왔다.
'저 자다, 대총수는!'
'바로 저기 있는 자다!'
'무조건 암살(暗殺)해야만 한다. 저 자를……!'
차디찬 눈빛들은 암흑에 감춰졌다.
거의 느낌도 없이 다가선 백색인간(白色人間)들.
이들은 맥을 바람 소리에 감췄고, 호흡 소리를 폐부 안에서 참으며 점점 더 다가섰다.
마무정은 그들이 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 듯,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고얀 자로군, 혈왕장로(血王長老)는! 죽었다 하더라도 즉시 무덤에서 나와 내게 배례를 해야 마땅하거늘……!"
마무정은 툴툴거리는데, 갑자기 허공으로 향전(響箭) 하나가 날아올랐다.
꼬리에 호각 구멍이 뚫린 철전 한 발이 흑천을 뚫고 날아오르자, 마무정의 시선은 저절로 그쪽으로 돌려졌다.
"화살이 떠오르다니……?"
그는 눈길을 위쪽으로 돌렸고, 그와 함께 그의 자세는 무의식중에 흐트러지고 있었다.
고수들은 보폭이 반 치만 차이가 나도 감(感)을 잊고 만다.
고수들에게 있어 자세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고, 주의력이란 생사를 나누는 절대적인 교차점이다.
"누가 화살을 쏜단 말인가?"
마무정이 고개를 들 때, 먼 곳에서 다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총수, 그것은 성동격서(聲東擊西)입니다. 조, 조심하십시오. 그러다간 진짜 당하십니다!"
충직한 비위 잔풍의 애끓는 전음 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소리가 맺어지기 전 이미 마무정의 등판으로는 검(劍) 한 자루가 소리 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이미 늦었소, 대총수 나으리!"
파팟-!
소리도 없이 마무정의 등 뒤로 다가선 자, 그는 어린보검(魚鱗寶劍) 한 자루를 마무정의 등줄기 속으로 아주 힘차게 꽂아 넣으며 이를 악문다.
"가문의 주인, 용서하시오! 이것도 숙명(宿命)이오!"
푸우- 욱-!
"으윽……!"
마무정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의 등줄기 사혈(死穴) 일대가 시뻘건 피로 뒤덮였다. 검은 정확히 세 치 사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무정은 선 채 석상처럼 굳어졌고, 그의 등판을 찌른 자는 손을 후들후들 떨며 중얼거렸다.
"천자지검(天子之劍)으로 살해되었다는 것도… 하나의 영광이외다!"
씁쓸히 말하는 노인, 그는 바로 동창의 일인자이며 무반 제일고수인 황룡무존이었다.
그는 팔십일만 금군의 무공대교두를 겸임하고 있는 황제의 우비위(右臂衛)이기도 했다.
그는 단신으로 천 명을 베어 무명을 날린 사람이고, 나이 칠십이 되도록 남을 암습한 일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한데, 그가 자객(刺客)이 되다니…….
"맥이 멈췄다. 온기도 점점 사라진다. 죽… 죽은 것이다!"
황룡무존이 중얼거릴 때였다.
"우우, 저 놈을 찢어 죽여라!"
콰앙- 쾅-!
갑자기 지반이 갈라지며 흑의괴인 하나가 위로 치솟아 올랐다.
흑선풍(黑旋風) 신법으로 치솟는 사람, 그의 가슴에는 호화로운 보검 한 자루가 안겨 있었다.
"대총수, 용서하시오. 호법 서지 못한 것을… 크으으, 대총수를 벤 자를 죽이고 자진하겠소. 못난 놈, 잔풍은……!"
콰아아- 콰아아아-!
잔풍은 어기비풍술을 쓰며 쾌속하게 황룡무존 쪽으로 다가섰다.
그의 신형이 작살로 화해 쏘아지는 순간이었다.
"쳐라!"
"적이다!"
"시체를 갖고 가야 하니, 철저히 막으라!"
차앙- 창- 창-!
백팔 군데에서 검이 뽑혔고, 현란한 보기가 빛살을 끊었다.
낙화(洛花)가 뿌려지는 듯 수천 송이의 마화가 피어나는 가운데 백 장 안은 광막에 뒤덮였고, 백 년 냉동상태에서 깨어난 잔풍의 손은 위로 쳐들리고 있었다.
"빠드득-! 검기 따위를 무서워할 내가 아니다!"
혈안으로 변한 잔풍의 두 눈에서 핏빛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피부가 검기에 스쳐 갈라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막 속으로 파고들며 발검하려 했다.
분노한 잔풍의 손이 위로 쳐들리려 할 때였다.
"허어, 아직 해검(解劍)은 계속되고 있다네!"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대, 대총수?'
잔풍은 검을 끌어 내려다가 몸을 멈칫했다.
그 순간이었다.
파- 파- 팟-!
혈망도(血芒刀),
귀전만자탈(鬼戰卍字奪),
태양보창(太陽寶槍).
세 자루의 마병이 잔풍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고, 금강불괴(金剛不壞)도 마병 아래서는 소용이 없는 듯 잔풍의 피부는 쩌어쩍 갈라지며 붉은 핏물에 뒤덮였다.
한데, 잔풍은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있었다.
살이 베어지는데에도 웃다니……?
그는 지금 찡긋 움직이는 눈을 보고 있었다. 죽립 아래, 그를 향해 찡긋거려지는 눈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가는 목소리가 잔풍의 고막을 때렸다.
"놀랄 것은 없어. 피만 약간 흘린 것뿐이니까! 물론 피를 흘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러면 상대가 속지 않지! 이 수법은 일컬어 인(忍)! 어디서 배웠는지는 나도 모르는 수법이야! 하여간 가게! 어서!"
누구의 목소리일까?
인(忍)!
그것은 가장 신비한 호신공부(護身功夫)이다.
그것을 익히면 사지가 잘라지지 않고 수급이 끊어지지 않는 한, 조금도 다치지 않고 깨어날 수 있다.
쏴아아… 쏴아……!
눈과 비가 뒤섞여 오락가락거릴 때, 두 자루의 보도(寶刀)가 허공을 끊으며 잔풍의 목과 허리 쪽으로 다가섰다.
"괴물(怪物), 그러고도 죽지 않다니!"
"이제는 목이다!"
자색 빛줄기를 발하는 것은 자뢰빙벽마도(紫雷氷劈魔刀).
일곱 줄기의 빛과 더불어 아련한 용의 그림자를 허공 가득 흘리는 이 척 칠 촌 길이의 장도(長刀)는 파천황도(破天荒刀)!
츄리리- 릿- 팟-!
두 자루 마도가 잔풍 쪽으로 다가설 때, 잔풍은 갑자기 몸을 위로 끌어올리며 핑그르르 회전하기 시작했다.
선풍십팔번(旋風十八蒜)을 시전하여 잔풍은 거의 순간적으로 오십 장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새까만 하늘 위로 까마득히 날아올라 하나의 점(點)이 되는 잔풍.
그의 신형은 일순간적으로 사라졌고, 자뢰빙벽마도(紫雷氷劈魔刀)와 파천황도(破天荒刀)는 잔풍이 머물러 있던 허공만 열여섯 번 난도질하고 말았다.
바로 그 때, 잔풍의 목소리가 우레 소리와 함께 들려 온다.
"소원이니, 관(棺)만은 좋은 것으로 써 다오! 복수는 조금 있다 하마, 반역자들아!"
성난 목소리일까? 미친 목소리일까?
잔풍은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지는 가운데, 천리전음으로 그런 말을 남겼다.
남은 것은 비(雨), 그리고 도합 백구 인(人)의 묘한 숨소리.
"흠, 떠난 자가 진짜 대총수가 아닐까?"
"그가 더 강해 보이는데?"
아라한(阿羅漢)들, 이들은 황실의 특급시위이기 이전 천금왕야(天金王爺)의 양자들이었다.
이들은 본시 고아였고, 천금왕야는 훗날을 위해 이들을 선택해 절기를 가르친 후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본시 이들은 제팔혈왕대(第八血王隊)를 꾸며야만 하는데… 천금왕야의 뜻이 마도에서 정도, 아니 왕도(王道)로 기우는 통에 동창의 특급고수가 되고 만 것이다.
쏟아지는 비(雨), 그리고 축 늘어진 마무정.
툭-!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죽립은 황룡무존의 손에 의해 벗겨지는데… 황룡무존은 죽립 아래에서 나타나는 얼굴을 보고 자지러지고 말았다.
"아니, 이 얼굴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 죽은 자의 얼굴이고,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얼굴이다. 공허한 느낌을 주는 입가의 미소와 허망하게 벌어진 입매가 기괴했으며, 찌그러진 눈가에는 비웃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온기가 식어 가는 얼굴, 그 얼굴이 황룡무존의 얼굴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했다.
"그, 그 사람이 아닌가? 으으, 설마… 설마……!"
그는 사지를 부르르 떨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일까? 아아, 그 때에는 언뜻 봤기에 기억이 흐릿하다. 하긴, 그 때 그와 너무도 같다. 그 때에는 아주 야위었었는데, 지금은 살집이 좋군. 차림새가 봉두난발이라면 완전히 그라고 할 수 있다.'
황룡무존의 피부 위에 소름이 돋는다.
그는 두 사람을 존경한다. 아버지 천금왕야와 천자 영락제!
기실, 마도대총수의 출현으로 인해 번뇌하던 천금왕야를 설복시킨 사람은 다름아닌 황룡무존이었다.
황룡무존은 영락제의 제일가는 충복이었다.
-마무정(魔無情)! 그는 동창을 맡길 사람이네! 그는 어디엔가 있을 것이고, 그 곳은 필경 짐의 대지(大地)겠지! 그를 보는 대로 데리고 오게! 그는… 내 사람이야!
영락제는 가끔 그러한 말을 하곤 했었다.
'설마… 그란 말인가? 그일 리가 없는데, 그가 어이해… 마도대총수란 말인가?'
황룡무존은 마무정의 얼굴을 완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무정은 워낙 준수한지라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십 년 동안은 그를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라면 죽어서는 아니 된다. 으으, 아무래도 실수한 듯하다!"
황룡무존은 부르르 떨다가 부관을 봤다.
그의 부관은 비천제일도(飛天第一刀)라는 사람이고, 손에 차천황도를 들고 있었다.
"나는… 어의(御醫)들을 모셔 와야겠네. 그러니 한시빨리 이분을 왕부로 모시게. 가장 신속하게!"
"예?"
"자네는 차차 알아도 되는 일이네! 하여간, 나는 지금 하늘을 찌른 바보 같은 심정일세! 휴우, 정말 모를 일이네!"
황룡무존은 전음으로 말하다가 위로 떠올랐다.
팟-!
그는 거대한 매가 날개를 펴는 신법으로 칠 장 위로 날아올랐다가는, 즉시 비룡재천(飛龍在天)에 이어 한당도학(寒唐度鶴)으로 신형을 틀었다.
"우우……!"
그는 장소성을 발하며,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중의 용행구천(龍行九天)을 시전하여 비 오는 하늘을 가르며 백여 장 밖으로 사라져 갔다.
비(雨).
마무정(魔無情)… 그는 죽었다.
그는 업혀졌고, 빗속으로 빠르게 운구되었다.
일각 후, 제왕릉은 텅 빈 장소가 되고 말았다.
황룡무존은 허겁지겁 자금성(紫禁城)으로 사라져 갔고, 약간 다친 잔풍은 오백 위사를 이끌고 천금왕부 일대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아침이 완연해졌고, 청신한 대기(大氣)는 일월(一月)의 북경을 오랜만에 푸른색으로 살아나게 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