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송이 보약큐티 365일 성경통독 >
*오늘의 읽을 말씀 – 삿17장~21장
*묵상자료들
1. 미가의 혼합 신앙
삿17장에 나오는 미가와 그 어머니, 그리고 그 집에 고용되어 신당을 지키며 제사장 행세를 했던 레위인 청년 이 3 인방의 신앙행태는 모두가 `헛방`신자의 전형이다. 마지막 심판 때 예수님께 저주 받을 자들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일단 미가의 이름만 들으면 굉장히 은혜로운 이름이다. ”여호와와 같은 이가 어디 있느냐?”라는 뜻이니 조상들이 굉장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이었는데 세심한 독자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창세기에는 특별히 복된 축복을 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지파였는데 민수기에 와서 좀 내리막을 타더니 사사기에 와서는 막가파가 되어 실제 싸움에는 안 나갔다가 꼭 승전하고 오면 왜 안 불렀냐고 시비를 걸어, 기드온은 살살 달래어 그들을 보냈지만 입다는 그들 수만 명을 쳐 죽여 버렸다. 에브라임은 창세기를 보면 요셉의 둘째 아들로써 형 므낫세를 제치고 야곱에게 오른손을 얹히고 더 큰 축복을 받는다.
그러나 출애굽 하면서 민수기를 보면 첫 번째 인구조사에서는 40,500 명의 군사로서 형 므낫세 지파(32,200명)보다 훨씬 숫자가 많게 출발했으나, 광야생활 40 년 후 두 번째 인구조사에서는 현저히 역전되어 에브라임 지파의 군사 수는 32,500 명이었으나 므낫세 지파는 무려 52,700 명에 이르렀다(민26:28~37).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형보다 더 축복받은 지파라는 자만심이 그들을 교만하게 하여 내리막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항상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임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그 교만기가 사사기에서는 노골적으로 나타나 주제넘게 입다에게 시비 걸다 그들은 폭삭 망한 지파이다.
바로 그 에브라임 지파에 미가라는 자가 살았는데 그 어머니의 돈 은 천백 세겔을 도둑질했다가 엄마가 하도 저주를 하는 바람에 슬그머니 도로 그 돈을 어머니에게 돌려 드렸다. 정상적인 신앙의 어머니라면 거액을 손 댄 자식을 엄히 꾸짖어야 하건만 이 엄마는 생뚱맞게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빌려 축복하였다. 사사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의 신앙이 무식하고 말씀이 없는 제멋대로의 신앙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술 더 떠 그 어머니는 돈 찾은 김에 신상을 만들어 아들에게 복이 돌아가게 하겠다고 돈을 투자하여 우상을 만들어 자기 집 신당에 세워놓고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과 가정우상 드라빔을 만들고 사설 제단을 만들어 주었다. 그야말로 혼합주의 신앙의 전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명을 버리고 직업을 찾아 다니던 한 떠돌이 레위인 청년을 만나 미가는 연봉과 의식주 해결을 조건으로 이 레위인을 자기집 신당 사설 제사장으로 채용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삿17:13).
그야말로 `내맘대로`의 신앙이다. 우상과 레위인이 혼합된 사설 제단에서 레위인 채용했다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몽상에 사로잡힌 썩은 신앙을 본다. 한 그릇 밥에 레위인의 사명을 저버리고 삯군 목자가 된 레위인 청년이나 여호와께 복 받으라고 아들에게 비싼 돈 들여 신당 차려준 어머니나 그리고 그 무식한 아들 미가나… 이 세 명이 어쩌면 한결같이 오늘날 무슨 신천지나 안상홍 증인회 같은 이단 집단의 사람들과 꼭 닮았는지 모르겠다. 설마 교회에서 우리 가운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신자들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어제 평소 존경하는 고려신학대학원의 박영돈 교수님이 페이스북에 올리신 글이 공감되어 나의 담장에 퍼 날랐다. 박교수님의 글을 읽어 보자.
“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있는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를 만났다. 그는 목회가 전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장로 몇 사람을 상대하는데 목회의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랜 세월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여러 가지 기득권을 행사한 관행을 뜯어 고치려 하니 거센 반발과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목사의 푸념이 긴 여운을 남긴다. “교회에 불신자보다 훨씬 더 악한 자들이 있어요. 교회에 성령만 계신 것이 아니라 사탄도 있어요.” 훌륭한 장로님들도 많지만 양심이 굳어져 하나님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 장로들도 적지 않다.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의 특징은 곧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곧 불에 던져질 하루살이 운명임을 망각하고 산다. 장로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목사를 비롯한 장로들이 죽어야 산다”.
참으로 추상 같은 무서운 지적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도 초기에 잡지 않으면 내성이 생겨 좀처럼 병이 치료되지 않는다. 교회생활을 오래하면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작은 이권 챙기기와 텃세에 길들여 지면 에브라임 지파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왜 나와 의논하지 않았느냐고 `내`가 교회에서 중요한 중심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을 방치하면 나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교회 전체를 오염시키는 것이다. 삿17장에 등장한 미가가 만든 가정 우상은 나중 단 지파가 가져가 그 지파 전체가 숭배하는 우상으로 발전이 된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2.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삿18장은 단 지파가 어떻게 북쪽 라이스 지역에 자리를 잡았으며 집단적으로 우상을 섬기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7장에서 시작된 미가의 개인 우상 숭배가 단 지파 전체에까지 파급되는 개탄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삿18:1에 그때까지 단 지파는 기업을 분배 받지 못했다고 되어있는데 사실은 분배는 받았지만(수19:47`48), 정복과정에서 거주하던 아모리인들을 온전히 이기지 못하고 산지로 물려나면서(삿1:34), 그들이 거할 영토가 너무 협소해지자 새로운 지역을 끊임없이 물색하고 있었다. 5 명의 수색대를 특별히 파견하여 그들이 거할 곳을 찾던 중 이 5명의 특전대가 에브라임 미가의 집에 잠입했다. 그리고 사이비 레위 청년 제사장에게 형통하리라는 축복을 받고 라이스 땅을 발견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 땅은 너무나 비옥하고 평화롭고 정복하기도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그래서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본진과 함께 이 땅 정복에 나섰는데 가는 도중에 미가의 집에 들러 그의 신상과 에봇 드라빔을 갈취하고 개인 제사장 레위 청년을 꼬드겨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게 했다.
처음에는 그들은 너무 행복하고 만족했다. 비옥하고 평화로운 라이스 땅을 정복하여 단 지파의 본거지로 삼았고 북쪽에서 멀리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실로까지 가서 제사드릴 필요 없이 신상도 있고 고용 된 레위인도 있으니 자기들끼리 편하게 제사 드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제사는 모세가 전해준 율법에 근거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라 미가의 집안 우상이 지파의 우상이 되어 혼합된 자기편의의 제사였다. 결국 그들의 육체적 안락과 물질적 풍요,그리고 우상숭배가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형통은 축복이 아니라 결국은 저주라는 것을 단 지파의 역사가 여실히 보여준다.
훗날 역대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언약의 족보를 소개할 때 단 지파를 아예 제외시켰다(대상2장). 그리고 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의 인 맞은자 14만4천을 소개할 때도 다른 지파는 다 이름 불러 언급 하면서도 유독 단 지파는 삭제해 버렸다. 이것은 단 지파의 우상숭배와 무관치 않은 것이다. 이 사실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은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삭제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창49:17에서 야곱은 단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는 뱀이요 독사라고 하였다. 살살 기어가 남의 우상과 재산을 갈취하고 평화로운 땅을 차지하고 세상에서는 행복한 것 같았으나 우상숭배의 대가는 혹독했다.
오늘날 무신론, 합리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 등의 현대판 우상에 빠져 스스로 만족해하며 사는 이 시대의 단 지파들이 많다. 교회도 내 편리하게 안 가고 싶으면 안 가고 세상 향락 누리면서 꼭 단 지파처럼 사는 이름만 크리스챤인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오직 성경을 늘 상고하면서 천국 소망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 떠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한다.
3, 성직자가 타락하면…
- 사사기를 마무리 하는 19장~21장은 당시의 심각한 타락상과 혼란한 사회상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며 그 막을 내리고 있다.
그 시대의 영적 부패를 가중시킨 가장 큰 원인이라면 각 지역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 가르치고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도록 이끌 사명을 가진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레위인들의 타락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성직자가 타락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막장을 예고 한다. 삿19:1에는 어떤 에브라임 지역의 한 레위인이 첩을 취했다는 얘기로 시작한다. 모세의 율법에는 제사장들의 혼인에 대해서 엄격히 규정하고 있으며 그들은 깨끗한 가정생활의 모범을 백성들에게 보여야 했다. 그런 성직자가 첩을 취하였고 그 첩이 또 음행을 하여 집을 나갔다는 것은 그 때의 이스라엘 사회가 얼마나 어둡고 타락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첩이 음행 하여 가출했으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부끄러워 하며 회개하고 집에 남은 본 부인과 살아야 할 성직자가 첩이 너무 그리워 첩의 친정집으로 그녀를 데리러 간데서부터 후일 6만5천명의 엄청난 사망자를 낸 동족상잔의 비극의 싹이 트게 되었다. 에브라임에서 첩의 친정이 있는 유다 베들레헴으로 찾아간 이 타락한 레위인은 장인의 환대를 받고 5일을 머물다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첩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온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사건은 거기서 터졌다. 기브온의 불량배들이 이 타락한 레위인이 머물던 집을 습격해 주인의 만류를 무시하고 남색하려 할 때 비열하게도 그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로 내 주었다(삿19:25). 그 불량배들은 강제로 그 레위인의 첩을 집단 성폭행 하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아침에 자신의 첩의 시체를 본 그 레위인은 그것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가져와 싸이코패스처럼 시체를 12 조각 내어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소포로 부치면서 자초지종을 적어 보냈다. 이에 이스라엘 나라는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났다. 자고이래로 이런 극악무도한 일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총회로 모인 그들은 악행을 저지른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로 결의하고 연합군을 보내어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벌였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은 서로를 죽이는 자기 동족과의 전쟁에서 3차에 걸쳐 6만5천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다. 처음 두 번은 베냐민 지파가 자기를 치러온 이스라엘 연합군들에게 승리하여 4만명의 군사들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결국에는 연합군에게 베냐민 지파는 대패하고 종족 말살의 위기에까지 갔다. 베냐만 지파 2만 5천명이 죽고 겨우 600명의 남자들만이 생존한 것이다. 하나님은 너나 할 것 없이 타락했던 이스라엘 전체를 징계하고 계셨던 것이다. 서로 정신 없이 흥분하여 자기 동족끼리 죽고 죽이다가 겨우 제정신이 든 그들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자기 민족 중 한 지파가 궤멸될 위기에 처한 상황을 생각하며 뉘우치고 울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의를 지키기 위해 꼼수를 써 엉뚱한 사람들을 죽이고 베냐민 지파 회생작전에 들어 갔다. 시작부터 과정 결말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하나님 백성들 다운 선한 것이 없었다.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참된 지도자가 없는 그들은 오합지졸이었다. 사사기의 저자는 그들이 왕이 없으므로 제멋대로 행했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왕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호와 경외하는 신앙이 투철하지 못하여 그들은 흔들렸던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모세가 전해 준 말씀을 따라 철저히 순종했다면 그런 끔찍한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운명도 믿는 성도들에게 달려있다. 소돔성이 의인 10 명이 없어서 망했다. 특히 성직자들이 더 중요하다.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그 참람한 레위인을 보라. 사고를 당하던 그날 밤 자기 목숨 살리려고 불량배들에게 내어준 첩이 그토록 처참한 일을 당했으면 그때라도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부끄러운 줄 알고 자중했어야 했겄만 성직자라는 인간이 첩을 두는 것도 모자라, 자기 민족들끼리 싸우다 6만 5천명이나 죽게 만드는 그런 엄청난 비극이 일어 나도록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에 우리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레위인 성직자가 천박하기 짝이 없다. 성직자가 그 사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그들이 무너지면 소망이 없다.
한국 교회에 그 레위인 제사장 같은 자질 없는 목회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다.
욕심과 탐욕과 음행의 바벨탑을 쌓는 일을 중지하고 하나님께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은 나부터 엎드려야 한다.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염려하는 상황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직자들의 타락을 막아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