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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1 왕조의 기틀은 다졌으나, 요절하다.
1031년 현종22년에 16세의 어린 나이에 고려 제9대 임금에 오른 덕종은 어린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너그럽고 총명하며 민첩하게 나라를 이끌어 갔습니다.
선왕 현종의 제3비 원성왕후 김씨의 소생으로 5남 8녀나 되는 현종의 자녀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덕종은 이름은 흠(欽)이요, 자는 원량(元良)입니다.
영민하고 너그러운 덕종이 왕위에 오르자 만백성이 기뻐하였으나 다만 그의 몸이 병약하여 과중한 업무를 감당할 수가 있을까 염려들이 많았습니다.
고려의 왕으로서 본격적인 치세를 시작한 덕종은 조정의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문무백관들을 대폭적으로 물갈이 함으로써 새로운 정치를 위한 틀짜기를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거란의 사신 남승안이 와서 거란의 왕 성종이 죽었음을 알렸습니다. 부왕 현종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바 있는 거란이지만 너그럽고 영민한 덕종은 공부중랑 유교를 장례식에 파견하는데 유교에게 친서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명을 하였습니다.
“경은 거란에 도착하는 즉시 거란의 새로운 왕에게 이 문서를 전하면서 압록강에 가설한 다리를 철폐할 것과 거란에 억류중인 우리 사신들을 송환해 달라고 요구하라”
이때까지 거란은 고려에서 파견한 8명의 사신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상황 이었습니다.
그러나 달이 바뀌어 거란에 장례식에 사신으로 갔던 일행이 돌아와 거란이 요구를 거부한다는 보고를 받자, 하정사(賀正使, 정례적인 사절단) 파견을 정지시키고 거란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해 버리고자 합니다.
당시 고려는 현종 대부터 이어진 안정기를 바탕으로 상당히 부강한 형세를 이루고 있었던지라 군사 면에서도 결코 거란에 뒤질 것 없다는 자신감에서 덕종은 고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따져서 요구를 관철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고려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거란은 1032년 2월 초하루 통주를 공격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고려의 호장 김거 등이 성을 완강히 지켜낼 뿐만이 아니라 거란의 대장 마수까지 생포하여 버립니다.
이에 기가 꺾인 거란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에 이르고 승리는 간단히 고려의 몫이 됩니다. 이듬해 거란은 전열을 정비하여 또다시 쳐들어오나 이번에도 고려는 어렵지 않게 물리쳐버립니다.
연거푸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덕종은 더욱더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면서 한편으로는 내치에도 힘을 기울여 나라의 기강을 튼튼히 하고 여러 제도들을 완성시켰습니다.
현종 때부터 시작한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사초의 복원을 완성하여 덕종 대에 이르러 7대 실록이 끝을 맺었으며, 국자감시를 시행하여 지방까지 두루 포용하는 인재선발의 체계를 완성하였습니다.
목종의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인 국자감시는 국자감에서 실시한 예부시(禮部試)의 예비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합격자는 진사로 뽑혔으므로 진사시 또는 감시, 사마시, 남성시라고 불렸습니다. 진사가 되면 고려사회의 상층신분이 되어 신역(절을 짓는데 동원되는 노동)과 군역을 면제 받는 특전을 누렸습니다.
국자감시는 양인 출신 중 상층 향리의 자손이나 문무관의 자제 이상이 응시할 수 있었는데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응시자격에 대한 기록입니다.
중앙의 국자감생에게는 물론 지방의 계수관시에서 선발된 향공(鄕貢)에게도 응시자격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종이 인재선발을 위해 지방교육을 강화한 이래, 계수관시에서 국자감시를 거쳐 예부시까지 이어지는 과거시험의 체계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하겠습니다.
원래부터 병약한 덕종이 병석에 누운 것은 1034년 9월, 그러나 병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5명의 왕비에게서 2명의 어린 공주만을 남기고 세상을 뜨게 됩니다. 재위 햇수는 겨우 3년, 그래도 짧은 기간에 여러 업적을 남긴 덕종은 동생 평양군(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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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1
*실리 외교를 추구하다
정종은 이름은 형(亨)이요, 자는 신조(申照)로 동복의 형 덕종으로부터 유언을 받아 1034년 9월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종은 등극하자 전국에 대 사면령을 내리고 치세의 틀이라고 할 관료들의 직위와 인물을 새롭게 선정하였습니다.
이때 정종에 의해 중용된 인물 중 황주량과 최제안이 있는데, 황주량은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덕종1년 1032년에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 36권을 완성시킨 사람으로 한림원과 사관의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제안은 1020년 현종 11년 천령절을 하례하려고 거란에 다녀 온바가 있었으며 태조의 훈요십조가 병화로 망실되었을 때 최항의 집 서고에서 이를 발견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한 사람입니다.
1031년 거란은 성종이 죽자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성종의 뒤를 이어 16세 밖에 안 되는 어린나이의 홍종이 즉위하였는데 직접 치정이 어려운 상황인지라 흠애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성종의 사위 소필적이 홍종을 폐위하려고 모의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덕종은 거란의 혼란을 틈타 압록강의 다리를 철거하고 두성을 헐어내어 고려의 영토를 돌려줄 것과 거란에 억류 중인 고려 사신들을 송환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앞장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거란은 이 같은 고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국교가 단절된 채 두 차례나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상대가 강국이라 하여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면서 그것이 관철되었을 때 평화를 모색해 나가는 것. 덕종의 외교정책은 이렇게 압축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덕종의 뒤를 이은 정종 또한 즉위한 이듬해인 1035년 7월에 거란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종용하는데, 이에 정종은 덕종이 펼친 외교정책과 동일한 방식을 내 보였습니다. 거란이 보내온 통첩의 내용은, 자신들은 지금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있으며, 남쪽의 모든 나라들이 자신들의 올바른 정치를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는데, 고려는 이러한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만약에 우리 황제께서 뇌성벽력 같은 위엄을 보인다면 고려의 백성들이 편안 하겠는가 하고 완전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정종은 목종과 마찬가지로 압록강의 다리를 철거한 일, 성벽을 허물고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한 일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거란은 1037년 10월 해군을 동원하여 압록강을 통하여 처들어왔습니다. 초기에 일순간의 동요는 있었으나 이미 거란의 침입에 대비를 하고 있었던지라 준비를 철저히 해왔기 때문에 고려는 침착하게 대처를 하였고 강력한 반격을 하게 됩니다.
거란 역시 덕종 조에 2차례의 패배를 경험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군대를움직이지 못하고 관망을 하다가 결국은 고려의 요구를 들어주고 억류되었던 사람들이 되돌아오자 국교를 다시 맺게 됩니다.
이후 두 나라는 상호 호의적인 분위기가 지속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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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2
* 천리장성의 축조와 노비제도 정립.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재현의 평을 보면 정종이 거란과 화친을 맺은 것은 진심으로 그리 한 것이 아니고 기묘한 책략이었다고 단정을 짓고 있습니다. 단지 선대 임금의 유업을 계승하여 국가를 보전하고자 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정종은 거란과 우호관계가 회복되었음에도 덕종 대에 시작된 천리장성의 축조공사를 계속 추진하여 완성을 시킵니다.
압록강에서 동해의 도룡포까지 장성이 완성되자 고려는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는 고려의 군사력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정종은 이러한 안정감 속에서 새로운 제도들을 속속 도입하게 됩니다.
정종은 1039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제정하여 노비의 신분이나 종사하여야 할 역처, 그 주인을 결정할 때 모계를 따르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적처(嫡妻) 두세 명에, 노비를 첩으로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양인녀(良人女)는 적처가 되는 것이고, 노비는 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처 자식과의 혼란을 막기 위해 비첩의 자식은 노비를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자수모법의 근간입니다.
보다 상세히 설명을 하자면, 노비 상호간의 혼인으로 생긴 자식의 소유권을 비(여자 노비)의 소유주에게 귀속시킨다는 법규입니다. 이는 노비의 자식들이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과, 어머니 쪽이 중요시 되는 토속적인 혼인풍속을 배경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가양부(婢嫁良夫 : 여자 종과 양인 남자의 혼인)의 경우에도 적용되어,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과 같이 노비로 하고, 비의 주인이 이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당시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지배계층들의 지속적인 노비 증식의 방편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후삼국의 통합과정에서 양인(良人)들이 유역체계(有役體系)에서 이탈하거나 전쟁포로로 노비가 됨으로써 양천(良賤)의 신분이 뒤섞이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양천교혼[良賤交婚 : 비가양부와 노취양녀(奴娶良女)의 두 유형]이 증가되어, 신분상의 혼란도 법 제정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는 처음부터 양천교혼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어기는 당사자는 물론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노비의 주인도 처벌을 하였습니다.
특히, 노취양녀(奴娶良女 : 양인 여자와 남자 종의 혼인)는 강상(綱常)의 윤리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에서 더욱 엄격하게 규제하여 극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천교혼이 근본적으로 억제될 수 없다 보니, 천자수모법의 보완조처로서 일천즉천(一賤則賤, 한쪽이라도 노비신분이면 자손도 노비)의 원칙을 마련하였습니다.
즉, 비가양부의 자식은 천자수모법에 따라, 노취양녀의 자식은 일천즉천의 원칙에 따라 노비로 하되, 각각의 부모 소유주가 자식들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자수모법과 일천즉천의 원칙은 고려 후기 이래의 사회적 혼란에 편승해 양인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라는 문제를 유발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원(元)나라의 간섭 시기에 정동행성평장사(征東行省平章事) 활리길사(闊里吉思)가 고려의 이 노비제도를 혁파하려 하였으나, 고려 조정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후 권력층의 농장 확대와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양인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차례에 걸쳐 노비의 변정사업(辨正事業)이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1392년(공양왕 4) 양천교혼은 금지하되, 특례로 이제까지의 교혼소생은 양인이 되는 신분 상승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천자수모법과 일천즉천법은 퇴색하고, 양인의 확대를 목적으로 한 종부법(從父法)이 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이씨조선에 접어들어 1397년(태조6)에는 노비합행사의(奴婢合行事宜)에 따라 양부의 자기비첩산(自己婢妾産, 자신의 노비나 첩에서 나온 자식들)도 양인이 되었고, 1405년(태종5)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비첩산까지도 양인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414년에는 타인비첩산을 포함한 비가양부 소생을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 하는 종부법(從父法)을 마련하였습니다.
다만, 적처에 대한 우대로 서얼차대법을 실시하여, 양반의 자식일 경우는 양반으로, 첩이나 노비의 자식은 양반은 되지 못하고, 양인, 혹은 중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무튼 이는 고려시대보다는 발전적인 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천자수모법에 따라 서얼은 노비가 되어야 했으나, 조선에서는 종부법에 따라 양인이나 중인은 되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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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3
*새로운 제도들...
정종은 천자수모법에 이어, 과거제도를 재정비하여 1045년에는 악공(樂工)과 각 관아의 말단 에 속하는 잡류(雜類), 오역(五逆), 불충(不忠), 불효한 자와 향(鄕)과 부곡(部曲, 천민부락)인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오역은 부모를 죽인 자, 파계하였거나 수행하는 자를 죽인 자, 출가하여 몸에 피를 묻히는 자 등을 말합니다. 또한 재위 마지막 해인 1046년에는 장자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종의 재위기간에는 자연재해가 참 많았습니다. 먼저 지진의 기록을 보면 1035년 6월에 개경에 지진이 났고, 8월과 9월에는 개경과 동경(경주)지방 19개 주에서 지진이 났는데 마치 우레와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1036년 6월에는 여러 지방에서 지진이 났고, 동경에서는 3일 만에 멈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에 지진이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요즘 간혹 약한 지진이 나는 것으로 보도가 되는 것에 비하면 이러한 큰 지진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기만 합니다. 아무튼 이후로도 지진에 관한 기록이 계속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보다는 뭐니 뭐니 해도 제때에 내려주지 않은 비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농사가 나라의 근간이다 보니 극심한 가뭄이 찾아 올 때마다 임금은 하늘을 향해 비를 빌었고, 스스로 반찬의 수를 줄여가며 근신하고 근심에 휩싸였으며 혹이라도 천재지변이 자신의 부덕의 소치가 아닌가, 혹시라도 형벌을 올바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하고 마음을 졸이며 죄인들을 방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임금이란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나라의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인지라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 재위12년만인 젊은 나이 29세에 정종은 병들어 자리에 눕고 맙니다. 자신의 병세를 잘 아는 정종은 5명의 부인에게서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는데, 자신의 아들이 아닌 동생 휘(徽)를 불러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고 그날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내가 왕대의 위업을 이은지가 12년이 되었다. 그동안 천행으로 나라를 무난히 다스렸는데 봄 여름 이래로 노심초사하던 끝에 병을 얻어 백방으로 약을 써도 효능이 없다. 이제 나라의 중책을 덕행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려 한다. 내사령으로 있는 나의 사랑하는 아우는 사람이 어질고 효성이 있으며 공손하고 검박하여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왕위를 물려줌으로서 우리나라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인자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도 돈독하였고, 식견과 도량이 넓으면서도 영용하고 과단성이 있어 사소한 절차에 구애되는 일이 없었던 임금의 죽음은 모든 백관과 백성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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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1
*문종의 등극과 치적 (1)
고려시대의 최고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고려의 제10대 문종 임금이 등극하여 치세를 시작한 것은 1046년 5월 이었습니다. 문종은 고려 제8대 임금인 현종과 제3왕비인 원혜태후와의 사이에 셋째 아들로 1019년 12월에 출생하였습니다.
문종은 등극하자마자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용상과 이불 요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립니다. “돌아가신 선왕께서 사용하시던 용상과 발돋움은 전부가 금은으로 장식되어 있고 이불과 요 또한 금은실로 짠 계금으로 만들었으니 담당관리로 하여금 견직으로 고치게 해야 할 것이다” 문종의 소박하고 검소한 성품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문종은 토론을 통한 국사의 결정을 즐겨하여 수시로 당면 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에 귀를 귀울여 보다 나은 정책을 정하고 이를 시행하는 것이 정치가의 기본 덕목이라는 것을 문종은 잘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토론문화를 통하여 여러 방면에서 보완 발전시킨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재면법(災免法),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 고교법(考校法),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법률가들을 모아 종래의 율령(律令)·서산(書算: 글을 읽을 때 번수를 세기 위해 쓰는 물건)의 분명치 않거나 의문 나는 점을 상세히 점검해 밝히도록 했습니다. 이 결과 고려의 형법(刑法)이 크게 정비되었습니다.
위에 나열한 각종 법령들을 조금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음전시법이란, 고려의 토지체계는 일부 호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토지와 임야는 국가의 소유로 관리들에게 임시로 나누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관리가 죽거나 그만두면 그가 받은 토지나 임야를 국가에 반납해야하는 체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퇴직이나 사후에 생활에 문제가 있어 이를 해결하고자 일부 땅을 영구히 나누어주는 제도로 보완을 합니다. 원칙적으로는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에게만 분배하였으나, 차츰 국가에 공이 큰 하급관료들에게도 분배가 되었습니다. 이 땅들은 상속, 양도 매매가 가능하도록 하여, 양반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을 목적으로 한 제도입니다.
재면법은 홍수나 가뭄 등 농사의 피재액(被災額)에 따라서 피재액이 4분 이상일 경우 조(租)를 면하고, 6분일 경우 조·포(布)를 면하고, 7분일 경우 조·포·역(役)을 모두 면제해주는 제도였으며, 답험손실법은 현지의 농사상황을 관(官)에서 잘 조사해서 피해의 정도에 따라 조세를 경감·조절해 주는 법령이었고,
삼원신수법은 죄수를 신문(訊問)할 때 반드시 형관(刑官)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범죄의 조사가 공정히 이루어지도록 하고, 사형수의 경우는 반드시 3심을 거치도록 한 조치였습니다.
고교법은 국자감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의 재학연한을 제한하는 제도로서, 유생(儒生)의 재학기간은 9년, 율생(律生)은 6년으로 제한해서 자질이 부족해 재학 기간 중 학업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는 강제 퇴학시키는 제도이며,
양전보수법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결(結)의 면적을 확정하였습니다. 이에 의하면 양전(量田)의 단위는 보(步)로써 정하되 6촌(寸)을 1분(分), 10분을 1척(尺), 6척을 1보로 하고, 방(方) 33보를 1결, 방 47보를 2결로 하여 이하 10결에 이르기까지 그 면적을 명시하였습니다.
선상기인법은 지방호족과 향리(鄕吏)의 자제를 개경에 인질로 보내었던 기인법을 완화시킨 것으로 이 제도 역시 집권적 지배체제가 강화되어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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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2
*문종의 치적 (2)
1076년(문종30)에는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가 다시 정해져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최종적으로 완비되었습니다. 또한 녹봉제도가 문무백관 및 유역인(有役人)들에게도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집권적 지배체제의 물질적 토대가 정비되어감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1077년(문종 31)에는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되었습니다.
또한 양반의 지위를 확고히 해주기 위해서 남반직(南班職 : 문반과 무반에 들지 못하는 중류계급의 반열)의 최고 계급을 종래의 4품위(品位)에서 7품위로 낮추어 격하 시켰는데, 이는 문무양반에 비해 남반이 천시된 결과이며 양반관료의 신분적 우월성을 정착시키게 된 것입니다.
한편 대외관계는 1050년·1052년·1064년·1068년·1073년에 걸쳐 5번의 동여진(東女眞)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하였습니다. 여진과의 관계는 대체로 평온해 여진이 토산을 바쳐 내부(內附)할 정도였는데, 훗날에 보이는 여진과의 갈등이 당시에는 예측되지 않았습니다.
문종의 재위 37년 동안 문물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흔히들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합니다. 불교, 유교를 비롯해서 미술, 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이것은 신라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나라 문화를 수용, 창조적인 고려문화를 형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가 다시 정비되고 관제가 개편되었으며, 백관의 서열과 녹과(祿科: 녹을 지급하기 위해 구분한 품등)가 제정되는 등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제도가 완비되었습니다. 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송나라의 제도(宋制)를 모방, 수용한 흔적도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고려의 실정에 맞게끔 수정되어 실시되었습니다. 실제로 하부구조인 사회, 경제의 상태가 송나라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전시과제도와 같은 고려 독자의 토지법이 여러 번 개편되어 실시되었던 것입니다.
지방통치체제도 성종(成宗) 때 처음 외관(外官)이 설치된 이래, 현종(顯宗)을 거쳐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양계(兩界)에 방어사(防禦使), 진사(進士), 진장(鎭將)의 수가 늘어났고, 남쪽의 여러 도에서는 지주부군사(知州府郡事), 현령(縣令)이 증설되어 수령의 관료제가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정비는 역시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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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3
*고려의 자존심, 불교와 유교의 융성
1055년 7월 초하루였습니다. 도병마사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립니다.
“전날 압록강 지역을 우리 고려영토로 한다는 것을 거란에서도 인정을 한 바가 있으나 그들이 최근에는 압록강에 다리까지 가설하며 점차 옛날 경계선을 넘어오고 있고 오늘에 와서는 우정(郵亭)까지 설치하여 우리 영토를 침식하고 있으니 마땅한 조치를 취해야만 할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이에, 예전 같으면 이러한 일로 사신을 보내면 거란 조정에서 군사를 일으켜 무력시위라도 할까 두려워 잠잠히 있었을 것이나 이번엔 달랐습니다.
문종은 비약적으로 강대해진 국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 사신을 보내 옛 지역을 돌려주고 동시에 성벽, 보루, 궁구란자[弓口欄子 ; 돌이나 목책으로 올린 울타리], 정사 등 일체의 건축물과 시설들을 철거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국서를 받아본 거란 조정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이렇다 저렇다 하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무력시위도 해오지 않았습니다. 고려의 국력이 날로 강성해지는 때인지라 잘못 건드렸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창피만 당하는 결과를 당할까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상수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문종은 1057년 4월 사신을 파견하여 궁구문 바깥에 있는 우정을 철거하고 고려의 북방 땅에 들어와 토지를 개간하고 가축을 증식시키는 등 실질적으로 고려의 영토를 점하고 있는 모든 거란 유민들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예전 같으면 눈치나 보고 말만 무성하였을 터인데 이처럼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가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제를 통한 신진 관료들이 등장하고 여러 법제가 마련되어 중앙집권 체제가 안정 궤도에 접어들자 만조백관들과 양반사회 귀족층을 중심으로 유학을 배우고 생활화하려는 열풍이 불어 닥치게 됩니다. 문종으로서는 상층부 뿐만이 아니고 일반 백성들의 생활까지 두루 살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유교만이 비대해지고 그에 따라 관료들의 힘이 필요 이상으로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는 불교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문종은 불교를 중심으로 민심을 통일시키고자 불교 융성책을 모색하기에 이릅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시작된 것이 흥왕사의 창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교에 심취한 관료들은 문종이 불교 육성을 위하여 전국 각지에 사찰을 건립하라는 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납니다.
사원을 건립한다고 나라가 화평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원을 증설하기 위해 동원되는 백성들의 부역과 세금으로 원성이 자자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일면 타당성은 있어 보이나 문종은 자신의 뜻대로 흥왕사부터 창건을 밀고 나갑니다.
이처럼 문종 대에는 왕족과 귀족 그리고 상층부 관리들을 중심으로 유교의 발전을 가져왔고,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는 불교가 융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083년 7월, 37년간의 재위기간 동안에 고려시대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하였다고 평가받는 문종은 향년 64세를 일기로 다섯 명의 왕비에게서 얻은 10명의 아들들 중에서 제12대 순종, 제13대 선종, 제15대 숙종 이렇게 3명이 왕위에 오르는 기록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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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왕위에는 올랐으나....
1046년 12월 9일, 선왕 문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순종(順宗)은, 이름은 훈(勳), 자는 의공(義恭)으로 언제 태자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른 걸로 봐서 꽤나 오랜 기간을 태자의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태자 시절부터 몸이 나약했던지라 이래저래 부왕과 신하들의 걱정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종이 죽자 너무 슬퍼한 것이 탈이 되어 안 그래도 원래부터 병약한 몸이 더 악화되어 3개월 만에 결국 부왕의 뒤를 따라가고 맙니다.
1083년 7월 18일 ~ 1083년 10월 23일
너무나 짧은 재위 기간인지라 아무런 업적도 없이 가버려 그의 동생 국원공 왕운(선종, 宣宗)이 엉겁결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자식에게 물려준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봐서 병약한 몸 때문에 후사도 낳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비로는 정의왕후 왕씨, 선희왕후 김씨와 장경궁주 이씨가 있는데, 정의왕후 왕씨는 순종과 사촌지간입니다.
선희왕후 김씨는 경주출신 김양검의 딸로, 순종의 사랑을 받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선왕 문종이 심하게 그녀를 미워하여 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폐출되어버렸는데, 나중에 인종의 명에 의해 복원이 되고 순종 사당에 모셔질 수 있었습니다.
장경궁주 이씨는 인주출신 이호의 딸입니다. 이호는 이자겸의 아버지기도 하니 이자겸과 순종은 처남 매부지간이 되는 셈.
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순종이 죽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외궁에 거처하였고 장경궁주에 봉해졌으나 젊은 나이로 물이 오를대로 오른 과부는 끓는 육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신분도 망각한 체 자기 집 노비와 밤낮으로 놀아나다가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이자겸도 부정한 왕비의 오라비란 이유로 잠시 축출되기도 합니다.
순종이 했던 일은 문종의 장례를 치른 그달 경자일에 대 사면령을 내리고, 10월 초하루에는 회경전에서 3일간이나 소재도장을 배풀어 승려를 포함하여 3만 명에게 음식을 먹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왕은 상차(喪次, 부모의 영위를 설치한 곳)에서 죽었습니다. 향년 37세에 재위기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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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1
*대각국사 (1)
1083년 10월, 3개월 사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고 경황이 없는 가운데 왕위에 오른 선종은 큰 변화보다는 기존의 인물들과 협조의 체제를 택합니다.
전왕들이 정치, 국방, 문화, 사상 등 모든 분야에서 워낙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다져 놓았기 때문에 변화보다는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즉위 이듬해인 1084년 정월 보제사의 승려 정쌍 등이 선종에게 승과에 관한 의견을 아뢰었습니다. “아홉 개의 절간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중들을 진사 규정에 준하여 3년에 1차씩 승직에 선발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이는 곧 승려가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이었습다. 선종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3년에 한 번씩 승과를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승려들의 청에 의해 이러한 제도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당시 고려사회 전반에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겠습니다. 광종 때에도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승과 시험이 있었으나 이는 비정규적이었던데 반해 선종 대에는 이를 3년에 한 번씩의 정규시험으로 격상 시킨 것입니다.
승과제의 시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의 불교는 선종의 적극적인 장려책에 힘입어 많은 발전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명 있으니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입니다.
의천은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으로,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로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입니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선종에게는 둘째 동생입니다.
의천은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는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체없이 출가를 자원하였습니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의천은 송나라로 건너가 구법할 뜻을 여러 번 밝혔으나 왕자의 신분 때문에 거란을 의식한 조정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자 어쩔 수 없이 밀항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송나라로 들어가는 배들을 바라보면서 불법(佛法)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죄를 무릅쓰는 신을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이제 신은 만 번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며 험한 파도에 몸을 맡기옵니다.” 송나라로 밀항하면서 의천이 선종에게 남긴 편지 내용입니다.
1085년(선종 2)에 송나라로 유학을 떠난 의천은 유성법사(有誠法師)와 함께 인도불교, 천태종, 화엄종 등 각 종파의 불교이론에 관하여 깊은 연구를 하고 귀국 후,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 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습니다.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지에서 불교서적 4,000 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간행목록으로서 3권을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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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2
*대각국사 (2)
1097년(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 해 5월에 초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 뒤 1099년에는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하였습니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가 된 것입니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회삼귀일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의 차별이 있는 것은 방편으로 설하기 때문이므로. 그 차별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서 그와 같은 설법을 절대의 일승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의미하며, 일심삼관이란, 일심(一心)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세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는 관법(觀法)으로서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으로, 공가중(空假中) 삼관이라고도 합니다.
공관은 삼라만상이 모두 공무(空無)하므로 한 물건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으로 견사(見思)의 혹(惑)을 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가관은 삼라만상의 어느 한 물건도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상적으로는 분명하게 있는 것을 관하는 것으로, 진사(塵沙)의 혹(惑)을 끊게 된다는 것이며, 중관은 모든 법이 공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 공이면서 유요, 유이면서 공임을 관하는 중도적 입장의 관법으로서, 이 관법에 의하여 무명(無明)의 혹을 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하고, 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1101년(숙종 6)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세, 법랍 36세로 입적하였습니다.
저서로는 3권, 22권, 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23권과 13권, 3권, 3권 등 방대한 저술이 있으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는 3권과 , 의 낙장본, , 의 일부, 만이 전하여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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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3
*고려 외교의 중심에 서다.
종교적인 입장에서만 보면 불교와 유교는 분명 적대적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선종의 입장에서 본 불교와 유교는 공히 부흥을 꾀하여야 할 대상들이었습니다. 불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모든 백성들의 심적 유대감을 유지해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유교는 그때 이미 고려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기본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선종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유교와 불교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의천에 의해 불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국학에 공자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등 유교의 발전에도 많은 공을 들인 결과, 공자의 가르침을 언행의 기본으로 삼았던 고려 사람들이 이제는 공자를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선왕들이 이루어 놓은 빛나는 업적 위에 불교와 유교의 발전이 이어지면서 나라의 상황이 더욱 튼튼해지자, 고려는 곧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게 됩니다. 고려사에서 확인이 되듯이 선종대에 이르러서는 눈에 띄게 늘어난 송과 거란, 여진, 일본과의 교류, 교역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진과 일본보다 국력이 우위에 있었던 고려는 그들을 부드럽게 포용하는 한편, 강경한 정책을 병행하기도하여 길을 들였고, 거란과 송에 대해서는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에 걸 맞는 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늘 영토분쟁을 겪던 거란에 대하여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나라의 이권을 챙기려 들었고, 문화 선진국 송으로부터는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교류를 확대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중에서 특히 주목할 사안은 거란과의 외교 변화입니다. 물론 선왕대부터 고려는 거란에 대하여 제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줄 아는 국가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선종대에 와서는 특히 유래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였으며 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던 거란이 친히 사신을 보내 화친을 도모하였다는 점입니다.
동북아의 최강국가 거란, 고려는 이미 변방의 귀퉁이에 위치한 조그만 국가가 아니라 동북아 최강국과 전쟁을 불사할 만큼 모든 면에서 강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늘 강대국의 눈치나 보면서 그들의 비위나 맞추며 눈치를 보며 사대외교로 일관하였던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참으로 통쾌하고 자랑스러운 시대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폭넓은 외교와 힘을 바탕으로 한 자주적 통일국가를 이끌어 오던 선종이 과로로 병이 든 것은 1093년 3월이었습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보다 화려하게 태우고 사그러져 가듯이 잠시 쾌유하였던 선종은 이듬해 5월 병이 악화되어 승하하였으니 향수 46세에 재위기간 10년 7개월이었습니다.
세 명의 왕비와 4명의 아들 그리고 3명의 딸을 두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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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헌종의 등극 그리고 스스로 내준 왕위
덕종과 정종이 그러했고 선종이 그러했던 것처럼 왕의 소생이 없거나 어려서 국사를 관장할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그의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것이 전통처럼 굳어버린 시대였습니다.
선종이 재위 10년 7개월 만에 임종하자 조정의 대신들과 형제들과 왕의 형제들은 11세에 불과한 선종의 아들 욱 대신에 선종의 동생이자 문종의 셋째아들인 계림공 왕희가 대권을 이어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종은 자신의 11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 욱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명군으로 일컬어졌던 선종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왕욱은 선종과 두 번째 비 사숙태후 사이에서 1084년 6월에 태어났는데, 그는 어려서 소갈이라는 병(소위 소아당뇨병)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병석 생활이 잦았습니다. 때문에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는 신하나 종친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병석에 누운 11살의 헌종 대신에 모후인 사숙태후가 대신 수렴첨정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화궁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 및 군사를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헌종은 병세가 좋아지기는커녕 날로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이런 판국이니 나라가 조용할 리가 없었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중신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동생으로 선종의 3비인 원신 궁주의 큰아들이자 헌종의 이복동생인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합니다.
이자의는 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중추원사에 왕의 숙부라는 지위로 왕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가졌으며, 사병을 양성할 정도로 재력도 막강했습니다. 그는 왕이 병들어 있는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옥새는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다음의 왕인 숙종이 되는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의 야심을 지목한 것이었습니다.
조정은 종친대표 계림공과 외척대표 이자의의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왕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결국 1095년 이자의가 반란을 도모하자 계림공이 그를 척살하고 그의 일파를 제거하게 되자, 조정은 계림공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섭정하던 사숙태후와 헌종은 아무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3개월 후 두려움 속에 헌종은 병을 이유로 계림공에게 양위를하고, 계림공은 숙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계림공에게 양위하는 헌종의 양위 조서가 참 눈물겹네요.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보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여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력가들에게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 난신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짐은 뒷 궁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이렇게 조서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양위식에서 쓴 걸 보면 헌종은 정말로 껍데기 왕이었나 봅니다.
신하들 중에서 헌종 편에 선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 신하라도 있었던 단종보다도 몇 배는 더 불쌍한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상왕이 된지 얼마 후 1097년 11월 6일 에1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소갈증 즉 소아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병석에만 누워있었으니 숙종의 입장에선 나중의 단종의 사례처럼 직접 조카의 목숨을 거두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병약하고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에 혼인은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진주 소씨의 족보에 따르면 소계령(蘇繼笭)의 딸인 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와 혼인했다고 하는데, 이건 소씨 족보를 제외한 어떤 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조선시대의 다른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가문의 끗발을 높여볼 목적으로 소씨 문중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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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
*숙종, 조카의 왕위를 빼앗다.
고려의 제15대 왕 숙종(肅宗)은 1054년 7월28일에 부친 문종과 인예왕후(仁睿王后)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근검했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습니다.
오경(五經)과 제자백가서 및 사서를 빠짐없이 두루 공부해 문종이 “장차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다.”라며 무척 아꼈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종이 죽으며 모든 종친과 만조백관이 그에게 갈 줄 알았던 왕위를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었습니다.
숙부의 몸으로 병약하고 나이 어린 조카, 헌종의 왕위를 강탈했다고 하지만, 숙종은 사실 명분상으로는 그다지 꿇리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훈요 10조에 따라 형제상속이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 있었기에 왕이 후사가 없거나 뒤를 이을 태자가 너무 어리거나 허약하면 인망이 높은 왕족을 다음 후계자로 삼는 일이 빈번했고, 거기다 헌종은 총명은 했으나 어려서부터 소갈증에 시달리는 허약한 몸이었는지라 병치레가 심해서 과연 국왕 노릇을 제대로 할지가 불투명했던 상태였는데도 자신의 아들인지라 밀어붙인 것이지요.
실제로 왕위를 이어받은 헌종은 1년만에 왕위를 넘기고 얼마 안가 병이 악화되어 죽어 버린 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가 성립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헌종이 조선의 단종의 대선배라면, 숙종은 바로 조선의 세조 수양대군의 대선배이네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숙종과 세조 두 사람의 대선배는 바로 신라에 있습니다. 신라 41대 국왕인 헌덕왕이 바로 그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헌덕왕은 애장왕을 제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리고 옥좌에 앉았지만, 고려의 숙종과 조선의 세조는 조카를 쫓아내기만 했지 제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선왕 헌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종친들이나 모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기고 있었으며, 자신도 능력이 되는 야심가여서 별 어렵지 않게 다음 왕이 되겠거니 하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웬걸, 형인 선종이 자신을 제치고 병약한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버린 것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이래저래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고, 어차피 본인이 야심가인데다 조카인 헌종이 워낙 병약해서 왕위를 포기 할 수도 없는 형국이었습니다.
병석에 누운 11살의 헌종 대신에 모후인 사숙태후가 대신 수렴첨정을 하지만, 헌종의 병세가 날로 쇠약해져가자, 종친대표 계림공(숙종)과 외척대표 이자의의 패권 다툼으로 이어지고, 결국 1095년 이자의가 반란을 도모하자 계림공이 그를 척살하고 그의 일파를 제거 하면서 게임은 끝이 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군주라고는 하지만 신하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기대한 만큼 여러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화도감을 만들어 화폐인 해동통보를 생산하고, 사찰도 많이 지어 불교를 융성케 했습니다.
숙종이 만든 해동통보는 고려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화폐가 통용된 건 18C경으로.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불교에 대해서는 의천을 통해서 교종을 통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고려의 왕가는 대대로 성골 왕족을 중심으로 족내혼이 보편적이었는데, 이는 왕가의 뿌리를 지켜나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족외혼과 가족윤리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에, 1096년 숙종은 6촌 이내의 근친혼을 금지하는 명을 내립니다. 근친혼을 막은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유교적인 것은 나중 문제였고, 문벌 귀족들의 혼맥의 난맥상을 막기 위한 의도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이나 백성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여, 근친혼을 금하는 중국풍속에 호응도가 별로라서 사실상 실효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신하건 백성이건 "그 딴 중국 풍습을 왜 우리한테 강요하나요??"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친혼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현재의 관념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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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
*동요하는 고려사회
숙종은 자신은 왕위를 빼앗다시피 물려받았지만, 그의 동생 부여후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등, 다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하자 그를 역모죄로 잡아 들여 귀양을 보내버리고 왕수는 귀양지에서 객사하게 됩니다. 숙종 자신은 조카를 몰아내고 형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 왕위는 자기의 큰아들 왕우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고려에서는 형제상속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듯합니다.
이 때 형제상속이 자연스럽게 보인 데에는 고려 전기의 왕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40을 넘긴 왕들이 많치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사후 자식의 나이가 제위를 잇기에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선종이나 숙종, 더 나아가 예종의 경우를 보면 정작 왕 자신은 형제상속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보다는 “내 핏줄이다” 인 셈. 자세한 경위는 기록에 없지만 왕수가 형제상속을 염두에 두고 나대기라도 했던 모양입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직접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습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궁궐터는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입니다.
그 후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궁을 지으니. 이 때 찍어 놓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을 당시 도저히 상상을 못했을 것입니다.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를 폐위시키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점에서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왕 숙종은, 조선의 태종과 세종을 비교하며 세조가 훨씬 못하다고 평가받듯이, 고려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려 광종이랑 비교 당하기도 합니다.
비유하지면 역시 대후배 세조처럼 광종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광종은 피의 개혁을 함으로써 국가 초석의 포석을 쌓았던 반면, 숙종은 측근정치를 하여 외척이나 신권의 권한이 커지게 만들었으며 남경 건설 및 여진 정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사에는 이때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전부 부역에 동원되거나 심지어는 부역과 징병을 피해 도망친 경우였습니다.
말년에는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 김자진의 난을 겪기도 하고, 또한 재위기간 중에 유독 우박이 많이 내려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었고, 송충이가 들끓어 개경의 소나무가 많이 피해를 봤다고 하는데,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를 두고 왕위찬탈에 대한 천벌이라고 했대나요.
재위 말기, 여진의 침략에 크게 놀란 숙종은 그에 대한 대비를 세우고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여, 서경에 나아가 출정을 준비하려고 동명왕 사당에 참배하던 중에 병을 얻어 개경으로 환궁하다가 왕성 서문인 장평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수레 안에서 죽게 됩니다.
사망 당시 52세였는데 수명 또한 대 후배인 세조와 똑같네요. 재위 년수 10년에 부인 명의왕후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넷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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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1
*여진정벌에 대한 맹세
1079년 2월 11일 부친 숙종과 명의태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17세의 성년이 되어 고려 제16대 황제에 오른 예종(睿宗)은 이름은 우(俁), 자는 세민(世民)으로,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해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장성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태자로 책봉되지 못하다가 1100년에야 왕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태자 책봉이 그렇게 늦어진 것은 부친 숙종의 왕위 계승과정에서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였기에, 자신의 후속 타자를 넘보고 줄줄이 버티고 서있는 형제들을 외면하고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려고 하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당시에 숙종의 뒤를 이을 만한 형제들 중에는 부친 문종과 인경현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왕수가 있었는데, 왕수는 예종이 태자로 책봉되기 전에 역모혐의로 귀양을 가게 되고, 숙종이 가장 총애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마음먹고 있었던 둘째아들 왕팔 마저 갑작스레 죽자, 숙종은 예종을 태자로 책봉하기에 이릅니다.
비록 부왕의 절대적인 믿음 속에 왕위를 물려받기는 하였으나, 이미 장성한 태자는 부왕의 비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왕 숙종의 여진정벌(女眞征伐)에 대한 서소(誓疏: 맹세하는 축원문)를 간직했다가,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神騎軍: 고려시대 별무반의 기병)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썼습니다.
여진은 원래 고구려의 한 부락으로 개마산 동편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고려에 조공을 하여오던 족속이었는데, 세력이 차츰 불어나 강성해지자 고려를 배반하고 틈만 나면 경비가 약한 지역을 골라가며 재물을 약취하고, 고려 백성들을 살육하였으며 심지어 고려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삼기도 하는 등 피해가 크게 늘어가자, 숙종은 군대를 정비하여 여진을 정벌하려고 준비하던 차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부왕의 숙원을 잘 알고 있는 예종은, 우선 정국을 전시체제로 개편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핍박하는 탐관오리들을 척결하는 등 개혁에 힘을 쓰자 정국과 사회는 안정과 평화를 찾게 되었고 심지어는 전국의 모든 감옥이 텅 빌 정도로 세상이 평온하여졌습니다. 실제로 형조의 남쪽거리에 ‘옥이 비었다’는 의미의 옥공(獄空)이라는 방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가히 요순시대에 버금가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정국이 안정되자 예종은 드디어 여진정벌의 깃발을 들어 올립니다. 1107년에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이 여진을 쳐서 대파하고, 이듬해에는 함흥평야 일대에 9성(城)을 설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 9성 방비의 어려움, 또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책동으로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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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2
* 예종의 치적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해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습니다.
1112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해 빈민들의 시약(施藥: 무료로 약을 지어주는 일)을 담당하게 했고, 이듬해에는 예의 상정소(禮儀詳定所, 신분에 따른 의복제도와 공문서 양식 및 예의 등을 제정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서)를 설치하였습니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해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자, 요(遼)나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원병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나중에 후환을 불러오게 됩니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
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라는 글로써 화친(和親)하기를 청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과거 고려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무시해 버리는데, 그 후 금나라는 그 세력이 크게 불어나 수도를 북경으로 정하고 120년 동안 중국대륙을 호령하게 됩니다.
예종은 특히 학문의 증진에 힘써, 1116년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서(經書)를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크게 일으켰으며, 송나라로부터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아악(雅樂)이라는 궁중음악입니다.
1119년는 국학에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 재단을 설립하였는데, 이 때 유사(有司)에게 명해 학사(學舍)를 널리 설치하고, 국학 칠재의 정원을 유학 60명과 무학 17명으로 하며, 명유(名儒)를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니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1120년에는 서경(西京:평양)에서팔관회(八關會) 열고 이두문으로 된 향가(鄕歌) 형식의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짓기도 합니다. 도이장가는 고려의 개국(開國) 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과 김낙(金樂) 두 장수를 추도한 것으로, 이 두 장수는 태조 왕건(王建)이 대구의 팔공산(八公山)결전(決戰)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군대에 포위되어 형세가 몹시 위급하게 되자 왕건 대신 나가 싸우다 죽었습니다.
이후 고려에서는 공식연석에서 군신이 함께 이 두 장수를 추도했는데, 예종은 팔관회 석상에서 즉시 한시(漢詩) 한 수와 함께 이 도이장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이 가요는 장절공유사(壯節公遺事)에 실려 있는데 향가식(鄕歌式) 표기로 전하는 것으로서 신라의 향가형식이 이때까지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예종 때의 이러한 학문 중시의 풍조는, 그 당시 인주 이씨들이 득세하면서 문치주의가 더욱 팽배해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이러한 풍조가 지속되었으나, 숙종의 손자인 인종 대에는 여러 혼란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는 숙종이 조카 헌종의 제위를 찬탈할 때, 숙종은 당시 추원사 직위에 왕의 숙부라는 지위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사병까지 양성하면서 헌종의 후견인을 자처하던 이자의와 그 세력들을 제거합니다.
이자의는 유명한 이자겸의 사촌으로 경원(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자겸은 사촌인 이자의가 숙종하고 권력 다툼에서 패해 암살을 당하고, 또 설상가상으로 12대왕인 순종의 왕비였던 자신의 누이가 노비하고 사통하는 죄를 짓고 쫓겨나서 이자겸 본인도 벼슬을 삭탈 당하고 귀양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숙종 대에는 이 인주 이씨들이 세력이 많이 쭈그러 들었습니다.
하지만 숙종이 죽고 나서 3년 뒤에 예종이 자신의 두 번째 비로 이자겸의 딸을 들이면서 경원 이씨 세력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종 또한 강성군주인지라 외척들이 설치는 것을 그냥 두지는 않았습니다. 예종은 숙종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다.
앞서 헌종 대에 경원 이씨들이 난립했다고 하는 부분도, 정작 예종 대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정작 백관들이 경원 이씨가 외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혼사를 강행처리할 정도로 예종의 권력은 강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왕권을 튼튼히 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예종은 1122년 4월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4명의 부인과 다음 인종으로 등극하는 아들 하나 그리고 2명의 딸을 남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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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1
*분쟁의 씨앗
17대 인종은 예종과 순덕왕후 이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해, 자는 인표입니다. 그는 1115년 예종 10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1122년 예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인종은 성품이 어질고 효성이 있었으며 너그럽고 인자하였는데 왕위에 올랐다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 내면에는 수많은 갈등과 염려가 꽈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예종에게는 여러 아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인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은근히 임금의 자리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헌종의 삼촌 숙종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을 알고 있는 인종은 그러한 걱정으로 항상 근심에 싸여 있었고 겁도 났던 것입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살펴보면 어느 한편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던 예종이 어느 한편으로 권력이 편중되지 않도록 정치를 해온 덕분에,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임금의 총애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온 한안인을 축으로 하는 관료세력이 서로 경계하며 힘을 나누어 갖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안인은 공공연히 예종의 동생 대방공 왕보를 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 잘 알고 있는 인종은 즉위와 함께 두려운 마음에 한안인을 멀리하고 자신이 무난히 왕위에 오르도록 해준 공신이자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소성군 개국백 이자겸에게 의지를 하게 됩니다. 특히 인종의 즉위 과정에서, 왕족인 대방공보를 비롯해 제위를 넘보려는 세력이 움직이자 이자겸이 황궁을 먼저 장악하여 태자가 보위에 오른데 공을 세웠기에 더욱더 인종은 이자겸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자겸의 이러한 행동은 정통군주에 대한 충성이라기보다는 3대에 걸쳐 누려온 외척으로서의 권세를 잃지 않으려는 측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등극에서부터 외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인종으로서는 이자겸의 전횡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차츰 그러한 이자겸에 대한 반감이 싹터가기 시작합니다.
이자겸의 딸이자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 이씨의 소생인 인종은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가 식구들과 정도 많이 들었기에 외가 측을 믿고 의지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자겸은 인주 이씨 가문의 자손들을 왕실과 혼사를 맺게 함으로서 권력의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혼맥을 이용해서 아예 권력에 쐐기 박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자연이 자신의 세 딸을 한꺼번에 문종에게 시집보낸 이래 80년 이상을 외척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실과 중복 혼인을 통하여 후비 귀인의 자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그러다보니 왕실의 왕자나 그 소생들이 인주 이씨가 아닌 자가 드물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자겸이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비로 들이게 하자 인종의 반감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자겸은 선대왕 예종의 장인으로 인종에게는 외조부가 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다보니 인종은 자신의 이모와 결혼을 하게 된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자겸은 이제 고려에서는 왕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는 상왕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장사 척준경과도 사돈을 맺는 등 자신의 권력 기반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자손들을 인주 이씨 집안의 자손들과 혼사로 묶어 자신을 추종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태조 왕건이 지방 호족들의 딸과 혼인으로 그들을 지배하였던 것처럼....
이자겸은 왕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권세가 높아졌고, 반대로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중요 요직에는 자신의 자식들과 친척들을 앉혔을 뿐만이 아니라,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또 자신의 아들인 승려 의장을 수좌라는 자리에 앉혀 불교계를 장악하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부르게 도를 넘는 일을 일삼자, 인종은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이자겸을 제거할 궁리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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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2
*왕의 치욕
아무리 허수아비와 같은 왕이라지만 인종의 주위에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자겸의 전횡에 불안을 느낀 인종은 드디어 뜻을 같이하는 신하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내시지후 김찬, 상장군 최탁과 오탁, 대장군 권수 등 이들로 하여금 이자겸을 처치하도록 명을 내립니다.
이리하여 최탁 김찬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가 병부상서 척준신(척준경의 동생), 척순(척준경의 아들)을 죽여 궁밖으로 던져버립니다. 이에 당황한 이자겸과 척준경은 잠시 당황하였으나 이내 척준경이 군사를 끌고 궁으로 처들어가고 이자겸의 아들 이자 수좌인 의장이 승병 300여명을 끌고 지원을 해오자, 기세가 오른 척준경은 궁궐에 불을 지르면서 처들어가 왕을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을 물리치고, 인종에게 다가가 주모자를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결국 빼앗긴 왕권을 되찾고자 일으킨 거사는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주모자라 할 수있는 지녹현과 김찬 등은 곧 바로 유배의 길에 올랐고, 인종은 남궁에 옮겨 앉았다가 이자겸의 집인 중흥택에 감금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자겸은 인종을 감금하고 나서 행동의 제약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까지도 통제해 가며 자신이 왕위에 오를 꿈을 키워나갑니다.
한편 1126년 3월 금나라가 거란을 멸망시키자 조정에서는 금을 섬기는 문제로 왈가왈부하였는데, 고려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이 세운 금을 상국으로 섬길 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중신들이 반대를 하지만, 이자겸과 척준경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금나라를 섬김으로서 대외관계를 평온하게 하여야만 내분없이 자신들의 권력을 탈 없이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금나라가 이전에는 작은 나라여서 거란과 우리를 섬겼지만 지금은 흥왕하여 송나라와 거란을 멸망시키고 거대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국가와 인접되어 있으니 형편상 우리도 섬기지 않을 수 없고,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섬기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니 우선 사신을 보내어 예빙하여야 합니다”
이지겸과 척준경이 이러한 주장을 펴자, 이들에게 인질이나 다름없이 억압되어 있는 인종으로서는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대로 따를 수밖에는.....
고려 스스로가 신하가 되기를 자청하며 신하를 파견하여 오니 금나라로서는 싫어 할 이유가 없겠지요,
한편 이자겸의 제거에 실패하여 그의 집에 감금 상태이던 인종은 겁에 질려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조서를 내립니다. 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일인가, 이자겸으로서는---. 그러나 양부(兩府)의 의논과 세간의 눈이 두려워 감히 그 조서에 응낙하지 못하고, 조서를 품에 안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시간을 끕니다. 보나마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때가오면 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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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3
*이자겸을 처단하라.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신료 이수가 이자겸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아무리 인종이 조서를 내렸다하더라도 신하 된 입장에서 어찌 그럴 수가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자겸은 마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종에게 조서를 반납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자겸이 왕이 되고자하는 욕망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設,, 十八子를 합하면 李가 됨))“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종을 연경궁으로 옮겨 앉게 하고 여전히 척준경과 짝짝꿍이 되어 정사를 농단하며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는 왕이 되겠다고 독심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음식에 독을 넣어 인종을 두 번이나 죽이려 하였지만, 공교롭게도 이자겸의 넷째 딸인 왕비가 이를 알아차리고 방해하는 바람에 인종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이일을 계기로 인종은 왕권의 회복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더 급선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급기야 내시 최사전을 은밀하게 불러 다음과 같이 명을 내립니다.
“이자겸이 권력을 농단하며 왕실의 위엄을 땅에 떨어뜨린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척준경으로 하여금 왕실에 충성토록 하라 이르라”
최시전이 왕의 조서를 보이자 척준경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권력은 탐하였지만 이자겸처럼 왕위를 넘볼 처지는 아니었고, 당시 이자겸과도 사이가 약간 틀어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인종이 다시 한 번 최사전을 보내 회유하자 척준경은 인종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실은 왕실에 대한 충성보다는, 어려울 때는 이자겸과 힘을 합쳐 권력을 지켜냈으나, 세상이 안정되니 날이 갈수록 이자겸과의 사이가 삐꺽거려 가는데다가, 만약에 이자겸이 왕이 되면 자신은 팽 당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이자겸을 제거해 버리면 자신이 모든 권력을 독점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겠지요.
그러나 권신임을 내세우는 척준경의 횡포와 금나라의 압력등 인종의 왕도는 험난하기만 하였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명을 지켰줬던 왕비들을 역도의 핏줄이라는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출시켜야 하였습니다.
문벌귀족과 권신들을 견제하려 노력하던 중 좌정언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기회로 척준경을 귀양 보내면서 개경문벌귀족과 거리가 먼 인물 왕실고문 묘청, 검교소감 백수한, 좌정언 정지상들을 가까이 하며 그들이 주장하는 서경천도와 칭제 건원등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개경문벌귀족의 영향으로부터 왕실이 벗어남은 물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척준경은 군사를 동원하여 이자겸을 기습하는데 성공하고, 이자겸과 그의 부인을 포박하여 인종 앞에 끌고 나옵니다.
그러나 인종은 자신의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을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이자겸을 비롯한 그의 일가와 일파들을 귀양 보내는 선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러나 중신들은 인종의 비이자 이자겸의 셋째, 넷째 딸들도 사가로 내쫓아 버립니다. 비록 죽음은 면하고 영광으로 유배되었으나 그해 12월 이자겸은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자겸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척준경은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謨同德衛社功臣)이라는 긴 훈작을 받고 일등공신에 책봉되어 변함없는 권세를 누리게 되지만 이듬해 3월 정지상의 탄핵을 받고 암타도라는 외딴섬으로 유배되고 맙니다.
이제 척준경까지 몰락함으로써 정치를 농단하던 무리들은 모두 정리가 되었고, 인종은 왕권을 되찾았지만 잃은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궁궐이 소실되었는가 하면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하여도 이러한 상처를 보듬으며 왕으로서 결단성이 있는 정치를 펼쳤더라면 이후 전개될 비극은 만들어 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인종은 정치 질서가 문란해지고 문벌귀족들이 분열하여 대립하는 꼴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다가 묘청의 무리가 제기하는 서경 천도론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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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4
*묘청의 난.
정치가 권력이라는 단물을 내포하고 있는 한 그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대립과 암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이자겸의 난이 정리 된 후, 개경의 문벌귀족 가운데 크게 부상한 것은 김부식 형제와 이공수(李公壽), 지저(之氐) 부자 그리고 새로이 외척이 된 임원애(任元敳) 등이었습니다.
이자겸 이래로 이들은 당시 동아시아의 새 강자로 등장한 금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는 등의 외교로 대외적인 안정을 꾀하며 정권을 주도했습니다. 한편 척준경을 탄핵하는 등의 공로를 세운 정지상과 그의 천거로 등장한 묘청, 백수한(白壽翰) 등의 세력이 대두되었는데, 이들은 개경 문벌귀족과는 배경을 달리하는 서경출신의 신진관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과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 등을 내세우면서 서경천도 운동을 벌여 개경에 기반을 둔 문벌귀족세력을 누르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려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종의 마음을 움직여 1128년(인종 6)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에 걸쳐 묘청의 주장대로 임원역지(林原驛地)에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이어서 1131년에는 그 궁성 안에 8성당(八聖堂)을 두는 등 설비를 갖추고 자주 순어(巡御)를 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문벌귀족들의 반대로 천도운동이 난관에 부닥치고 결국은 천도 자체가 무산될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자신들이 의도했던 서경천도가 무산되자, 1135년 정월에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趙匡), 분사병부상서 유참(柳旵), 분사사재소경 조창언(趙昌言)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먼저 개경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제거함과 동시에, 서경의 분사조직체를 장악하고, 서경과 개경 사이의 군사교통상의 요충지인 자비령을 차단하여 버립니다.
그러고는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칭호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며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고 공표를 합니다.
이 반란은 칭제건원은 하였으나 국왕을 새로이 옹립하지도 않았고, 그들 스스로가 국왕에게 거병소식을 알리는 등, 왕권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개경의 문벌귀족 타도에 목적을 둔 것이었습니다.
반란의 소식을 접한 조정은 김부식을 총책임자로 하는 토벌군을 편성하여 반란군에 대처하게 합니다. 김부식은 먼저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을 서도(西都)의 모반에 관여했다는 명목으로 처단하고 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김부식이 지구전법을 쓰며 여러 차례 항복할 것을 종용하자 조광은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호(浩) 등의 목을 베어 그 수급을 윤첨 등에게 들려 보내면서 항복할 뜻을 비쳤습니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 윤첨 등을 옥에 가두는 등 강경책을 쓰자, 조광 등은 설령 항복을 해보았자 죄를 면치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끝까지 대항을 하게 됩니다.
천도파군은 서경과 그 주변지역의 민중들의 호응을 받으며 결사적인 항쟁을 전개했으나, 이듬해인 1136년(인종 14) 2월 관군의 총공격을 받아 서경성이 함락되니, 묘청이 난을 일으킨 지 거의 1년 만에 진압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