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丘公遺事 [松巖 李魯] 公諱, 濟臣; 字, 彦遇; 自號, 陶丘. 皇明正德, 庚午生, 實本朝中廟五年也. 有忠孝之衍·淸狂之節, 少隆文譽. 嘗於發解, 作「蘇軾論」, 考官覽之大驚, 擢置第二. 與裵洛川紳, 遊國庠, 上書明倫堂, 請行年齒坐, 事雖不行, 聲名藉甚. 見時事, 將有不靖之漸, 欲溷其名迹, 求爲淸河敎官. 仍佯狂不赴擧, 未久乙巳之禍作. 晩從南冥先生於方丈山下居焉. 遇水石淸幽, 輒移之無定所. 嘗服仁廟喪三年, 爲作「桐林別曲」以見其志. 産業頗饒, 而輕財好施, 散盡不惜. 或時屢空, 而曠然不以爲意也. 其爲詩率意應口, 不致精思而其天得之句, 無非警絶, 人多誦之. 嘗登三嘉金城山, 作四韻. 其 一聯曰, ‘巖下淸泉新雨水, 石間枯竹古僧栽.’, 南冥擊節歎賞. 鄭相國士龍, 被罷來鄕, 築亭鼎湖陰, 扁曰, ‘十玩堂’, 請公作詩, 走筆書呈. 其一聯曰, ‘雲橫遠峀呈奇狀, 雁落平沙送好音.’ 上句, 譏其多畜娼妓; 下句, 譏其折簡徵索. 他句類, 是鄭未之覺, 亟稱之, 懸于楣後. 蘇相國世讓, 見之曰: “此, 乃譏令公也.” 釋之. 鄭大笑, 曰: “豈意洞生侮弄我也?” 然亦未之慍也. 南冥先生之葬也, 士子之會者, 殆數百餘人. 吳德溪健, 以吏部郞在門人之首, 立于東偏; 崔徵士永慶, 居其二. 將題主, 金參判宇顒·鄭掌令仁弘·鄭郡守逑等, 以爲題主者當素服而逑力主其議. 餘人皆曰: “宜從國制, 著吉服.” 久未決. 公以弊衣破冠, 立于西偏, 抗手歷位而進, 曰: “吳正郞以先生高弟, 位望非輕, 朝廷大事, 尙且參決, 宜定于一言.” 正郞謹愼人也, 謙讓以未敢. 公輒正色大聲曰: “此足下所以得銓曹地”. 正郞微哂之. 崔徵士曰: “是翁矍鑠”. 壬午八月, 無疾而逝, 享年七十三. 門生親故以其喪, 旋塟于宜寧毛兒故山. 도구공 유사 [송암 이노] 공의 諱(휘)는 濟臣(제신)이며, 자는 彦遇(언우), 스스로 호를 陶丘(도구)라고 하였다. 명나라 正德(정덕) 경오(1510)년생인데, 본 조정으로 보면 中宗(중종) 5년이다. 忠孝(충효)를 널리 펴고, 淸狂(청광, 마음이 깨끗하여 청아한 맛이 있으면서도 언행이 상규에 어긋남)의 절개가 있었고, 젊어서부터 文譽(문예)가 있었다. 일찍이 과거의 초시에 합격하였을 때, 「蘇軾論(소식론)」을 지었는데, 고시관이 이를 보고 매우 놀라 2등으로 선발하였다. 洛川(낙천) 裵紳(배신, 1520~1573)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明倫堂(명륜당)에서 글을 올려, 나이 순서대로 앉기를 청하였는데, 요청한 바대로 일은 비록 시행되지 않았으나, 聲名(성명)이 藉藉(자자)하기는 더욱 하였다. 장차 時事(시사)가 점점 편안해지지 않음에, 그 이름과 행적이 더럽혀지려고 하자, 淸河(청하) 향교의 교관이 되기를 원하였다. 이로 인하여 세속을 벗어난 듯 미친 체하며, 과거에 나가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乙巳士禍(을사사화)가 1545에 일어났다. 만년에 남명선생을 따라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다. 水石(수석)이 淸幽(청유)한 곳을 만나면, 문득 그곳으로 옮겨 살았으니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일찍이 仁宗(인종) 임금의 상에 삼 년 상복을 입었고, 「桐林別曲(동림별곡)」을 지어 그 雄志(웅지)를 나타내었다. 생업이 자못 여유가 있었지만, 재물을 가벼이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여, 모두 소진하였어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자주 끼니를 거른 적이 있어도, 너그럽게 여기고 마음을 두지 않았다. 시를 지을 때는 마음대로 응하여 대답하듯이 하여, 정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하늘에서 타고난 듯 얻은 구절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지 않음이 없어, 사람들이 많이 암송하였다. 지난날 三嘉縣(삼가현)의 金城山(금성산)에 올라, 律詩(율시) 한 수를 지었다. 그 일련에 이르기를 “바위 밑 맑은 샘은 새로 내린 빗물이나, 돌 틈사이 시든 대나무는 옛 승려가 심어 그렇다.”라고 하니, 남명선생이 擊節嘆賞(격절탄상)을 하였다. 相國(상국) 鄭士龍(정사룡, 1491∼1570)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鼎巖(정암) 호수 북쪽에 정자를 짓고, 편액에 이름하기를 ‘十玩堂(십완당)’이라고 하고, 공에게 시를 지어 달라고 하니, 走筆(주필) 하여 지어 보냈다. 그 首聯(수련)에 이르기를 “구름은 먼 산봉우리에 걸쳐 기이한 형상을 바치고, 기러기가 백사장으로 낙방하면 湖陰(호음, 정사룡의 호. 好音(호음)과 발음이 같음으로 쓴 것이다)에게 보낸다.”라고 하였다. 윗구는 정사룡이 娼妓(창기)를 많이 둔 것을 기롱한 것이고, 아래 구는 정상국이 접은 종이편지로 科題(과제)를 유출하고, 徵求討索(징구토색, 돈이나 곡식따위를 강제로 요구하는 일)한 것을 놀린 것이다. 다른 구절도 유사하였는데, 정사룡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시를 칭찬하고서는 門楣(문미, 창문 위에 가로로 댄 나무) 뒤에 걸었다. 재상 蘇世讓(소세양, 1486~1562)이 이를 보고 하는 말이 “이것은 곧 令公(영공)을 놀린 것이오.”하고 해석해 주었다. 정사룡이 크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 “어찌 마을 유생이 나를 업신여겨 조롱한 것을 생각이나 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역시 성을 내지는 않았다. 1572년 남명선생의 장례에 선비들이 모이기를 거의 수백여 인이었다. 德溪(덕계) 吳健(오건, 1521~1574)은 以吏部郞(이조정랑)으로 문하인의 선두로 東偏(동편)에 서고, 徵士(징사) 崔永慶(최영경, 1529~1590)은 두 번째에 자리하였다. 장차 題主(제주, 신주에 글씨를 쓰는 것)를 하고자 할 때 참판 金宇顒(김우옹, 1540~1603)과 掌令(장령) 鄭仁弘(정인홍, 1535~1623) 그리고 군수 鄭逑(정구, 1543~1620) 등이 제주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소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고, 정구가 그 논의를 주도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나라의 제도에 따라 보통 옷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니 오랫동안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공이 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서쪽에 서 있다가, 손을 들어 자리를 지나 앞으로 나와서 하는 말이 “정랑 오건은 남명선생의 高足弟子(고족제자)이니, 位望(위망)이 가볍지 않아, 조정 대사에 항상 참여하고 결정을 하였으니, 마땅히 한 마디로 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정랑은 신중한 사람이라, 謙讓(겸양)하게 감히 결정하지 않았다. 공이 문득 정색을 하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것이 足下(족하)가 吏曹銓郎(이조전랑) 지위를 얻은 까닭이네.”라고 하였다. 정랑이 빙그레 웃었다. 최징사 영경이 하는 말이 “이 노인네는 矍鑠(확삭, 늙은이 기력이 정정한 것을 말함)하시네”라고 하였다. 임오(1582)년 8월에 질병도 없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73세였다. 문하생과 친척과 친구들이 상례를 치르고, 의령현 毛兒里(모아리) 고향 산에 장사지냈다. 陶丘公行錄 公姓, 李; 諱, 濟臣; 字, 彦遇; 自號, 陶丘. 生而穎悟聰明, 過人. 兒時, 聞人讀書, 輒成誦. 十歲, 受學於鄕人司成安公宙. 安一時聞人也, 授公以『小學』·『詩』·『書』, 又敎以史學. 十五, 已能成材, 安公每稱之曰: “李某年雖少, 乃史庫也.” 公十八, 丁外艱喪, 塟祭祀一依家禮. 二十一, 遊太學, 與金範·金禧年·裵紳·呂應龜, 爲友. 定館中年齒坐, 事雖不行, 而時人以此稱歎. 仁廟在東宮, 聞公等名字, 使宦者來館中, 問: “李某·金某等好在乎? 我欲一見, 而未能云.” 中廟末年, 公又與金範等, 入太學于時. 仁廟未卽位而心誠愛士, 故多士爭趨館下. 懽然鼓舞, 謂太平將立致, 而仁廟當宁, 未久賓天. 文定垂簾, 尹元衡當權, 時事艱危, 禍起不測. 元衡以公等, 在館中時嘗議, 已必欲置之死地而後已乃曰: “李某等, 在先朝, 爲尹任·柳灌等門客, 與新進少年, 專事虛僞, 變亂是非. 及新聖嗣服, 餘習尙存, 議論愈激, 謗訕朝政, 侮弄公卿, 不可不治.” 方欲拿鞫. 時, 鄭相國湖陰, 以公鄕人, 方在京. 語人曰: “李某三代獨子. 且有老母, 若不免禍實可哀也.” 卽日付公淸河敎官. 而言於元衡曰: “孰謂李某爲士? 吾見吏曹下批, 李某乞爲雞塜, 實爲可笑.” 元衡笑, 曰: “李某爲人, 我實賤之, 湖陰蓋抑之也?” 或曰, 公訓導付標事, 湖陰亦欲害. 公云此虛傳也. 公以此免禍而實不行. 其任爲仁廟, 心喪三年, 每遇諱日, 則公整衣冠, 終日獨坐, 噓唏太息, 默然不語. 傍人莫知其所以焉. 公少時, 以彦遇爲字; 晩年, 改遇字爲愚; 示不遇於世也. 公正德庚午, 生於昌山, 乃母家也. 年五歲, 收養於宜寧從祖家. 家業豊富, 而公不以爲關, 常以爲人後爲恨. 公生父母田民, 亦爲豊足, 而從母之命, 分賜兩妹, 使之生活. 文官成夢說於公外從也, 家甚貧乏. 公給善針婢子, 使爲衣服, 人謂之難能. 公自少時, 師事南冥先生. 先生之在鳳城廬所也. 公往來侍側, 終始如一, 言行出處. 惟先生是慕一時聞達, 非公之素志而老母在焉, 不得已從事於擧業. 以論策屢中發解, 喪母後, 遂絶意世事. 戊午, 從先生, 入德山居焉. 去先生精舍未遠, 逐日往來, 談論不懈, 或留宿焉. 公嘗有事, 未得趨拜者三日. 先生題葉上, 來示有曰: “未阻如阻, 情似無情.” 公見之, 卽往謝焉. 先生亦有時來, 見笑語移日. 亹亹不倦如是者, 殆十五年矣. 公愛山水於德川, 上下移卜者累焉. 所居不蔽風雨, 而公自以爲樂. 又輕財好施, 見人飢餓, 則憫若在己. 雖盎中之儲, 朝夕之資, 有所不惜, 妻孥苦之, 而公不以爲意也. 公嘗居母喪, 有事於德山, 因謁先生焉. 陪奴有㗖肉者. 竊公之匙子食之, 匙著口中, 氣息不通. 下人告急, 公命他奴, 拔去鼻孔, 流血艱以得生. 觀者驚駭, 皆以爲公之孝感所致云. 乙巳七月, 過咸陽郡. 主倅成公夢說, 爲公暫設酒肴. 又烹小鮮於近處, 鼎蓋忽飛上, 至空中. 而下如是者, 再俄而鼎底坼裂, 鼎實俱流下. 公曰: “此不忍食肉之兆也” 相顧失色, 亟命撤之. 是時, 乃仁廟不豫, 已久曠, 不視事之日也. 公憂懼涕泣, 終夜不寐. 明朝, 仁廟陟方之音, 乃至聞者, 驚服. 亦以爲公之忠誠所感云. 公早有文名, 尤長於詩, 如四皓詩. 濟川亭次韻, 十玩亭題詠及金城山‘巖下淸泉新雨水, 石間枯竹古僧栽’之句, 送曹判書潤孫, 赴京詩. 七旬, 有五曹三宰, 承命還朝. 丁卯年, 此行不是貪官爵 爲感. 無遺壽耈天, 此等詩語, 皆著在人口. 晩節放浪, 形骸以淸狂. 自許遇酒, 輒飮或歌舞, 無時爲文, 率意無矯飾. 其得意處極, 其淸遠, 且有警人之辭. 南冥先生, 嘗戒其圍棊射革. 公卽咏詩曰: “看棊口絶論人語, 射革心存反己思.” 先生覽之,極嘉 歎. 乙巳年間, 公之友人, 掌銓曹, 以公有名行, 再薦于朝. 公聞之, 馳書告之, 略曰: “某以淺陋學術, 已足鄭虔之廣文; 況今年齒老, 大身又多病, 安敢以山野之孤蹤奔走揮汗於靑雲之後乎?” 其友人, 見之曰: “倔强哉! 是翁! 遂止之云.” 辛未夏, 南冥先生, 避寓於公之德川茅舍. 公侍先生累月, 不妄言笑, 曰: “日端坐, 略無惰容.” 先生曰: “彦遇, 或詼諧曠蕩, 雜以鄙語, 或收斂身心, 動以禮節, 何也?” 公答曰: “某不能主一, 見他人, 則自不知, 詼諧曠蕩, 見先生, 則自不覺, 其收斂身心也.” 時, 河覺齋沆, 諸公在坐, 先生顧而笑, 曰: “彦遇得淸狂之名, 固其宜也.” 公平生, 不事産業. 嘗語諸孫曰: “使汝等貧乏者, 我也. 然余觀時事, 必有大亂. 雖有財産, 將無所施汝等. 若何而謀生, 及變亂, 以後追思.” 公所言, 則皆歷歷可驗矣. 壬午春, 有龍入德山侍側, 公曰: “今年, 我必死. 夢有星芒自天而下著我額角引而上天, 此終年之兆也.” 其生七月得疾, 築數間於薩川倉下斷麓, 卽移居曰: “此可爲吾永歸之地也. 常飮水, 曰: ‘洗腸胃而歸’” 八月十二日早朝, 冠帶而坐, 口占一律, 曰: “望野黃兼綠, 看雲白又玄. 陶翁知止處, 只是爲寒泉.” 問侍者曰: “巳時遠乎?” 其時, 適有友人塟事, 公操筆, 成祭文, 未畢. 又問巳時, 否答. 日 巳時, 公脫冠, 授侍者, 如就寢然因而奄忽, 壽七十三. 河覺齋挽詞曰: “異人神人不羈人, 三人合作一人身.” 皆云, “此公之實錄也.” 公之家世, 乃鐵城, 著姓也. 戶部尙書諱, 璜; 爲公鼻祖. 是生保勝郞將諱, 田枝; 是生景安公諱, 國軒. 是生上護軍諱, 永年; 是生檢校門下侍中諱, 嚴沖, 爲麗朝名相. 是生判典農寺事諱, 俊明; 是生檢校樞密院使諱, 松茂; 是生民部議郞諱, 應卿, 爲麗末大臣. 是生都總制諱, 允柱; 是生右軍總制諱, 伯; 自鐵城移于宜寧, 乃妻邑也. 有子曰, 乙孫官至少監; 有子曰, 彦中郞將; 有子曰, 貴陽典簿; 有子曰, 斯永司直; 有子曰, 根副護軍; 有子曰, 世亨, 龍驤衛副司果. 有子曰, 瓊乃公之皇考也. 已上三世, 皆武人也, 官不著顯. 公常曰: “我累代, 武家之孫, 粗知詩禮而曰子曰孫, 皆無骨相. 且無積德, 吾恐其後世之殘矣.” 公母夫人, 昌山世族成玉崑之女, 乃名相萬庸之後也. 公之內夫人, 碧珍大將軍李悤言之後, 乃平靖公約東之曾孫, 通政承元之孫, 司果有儉之女, 廣平李秀堰之外孫. 公生二男一女, 男曰, 鐵城·德城; 女曰, 僉正田潭. 鐵城男, 大胤; 女, 田遇秋. 僉正德城男, 彭祖. 田潭男, 有龍·景龍·伏龍, 有龍以公之外孫, 往來侍側, 近二十年. 其於公之行蹟, 或親見而知之, 或傳聞而知之. 平時, 粗有記錄; 亂後, 則幷公之私稿而失之惜哉! 李都事魯氏於公宗人也, 嘗爲公作傳. 外孫, 高峯田有龍 도구공 행록 [외손 전유룡] 공의 성씨는 李(이)이고, 휘는 濟臣(제신), 자는 彦遇(언우)이고, 自號(자호)는 陶丘(도구)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보다 영리하고, 총명하여 사람들을 능가하였다. 어릴 적에 남이 독서하는 것을 들으면 어느새 그것을 외워버렸다. 열 살 때 고을 사람 司成(사성, 성균관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종3품직) 安宙(안주, 1500~1569)에게 수학하였다. 안주는 당시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는데, 공에게 『小學(소학)』과 『詩經(시경)』, 『書經(서경)』을 전수하고, 史學(사학)을 가르쳤다. 십 오 세에 이미 材木(재목) 감이 되드니, 安(안) 공이 매번 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모의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그대는 역사 창고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나이 18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장례와 제사가 오로지 朱子家禮(주자가례)에 따랐다. 공은 이십 일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金範(김범, 1512~1566)과 金禧年(김희년) 그리고 裵紳(배신, 1520~1573)과 呂應龜(여응구, 1523∼1577) 등과 교우하였다. 성균관에 머무를 때 나이순으로 앉을 것을 주장했는데, 일은 비록 시행되지 않았지만, 그때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여 감탄하였다. 仁宗(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공을 비롯한 유생들의 이름을 듣고는, 환관으로 하여금 성균관에 와서, 묻기를 “이제신과 김범 등은 잘 있는가? 내가 한번 보고자 하였는데 아직 그러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中宗(중종) 말년으로 공이 다시 金範(김범) 등과 더불어 太學(태학)에 입학한 그때였다. 인종은 즉위하기 전에도 성심으로 선비들을 사랑하여, 고로 많은 선비들이 다투어 성균관으로 모였다. 모두 기뻐하며 고무되어, 이르기를 ‘태평성대가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인종 임금은 얼마 되지 않아 昇遐(승하)하고 말았다. 文定王后(문정왕후)가 垂簾聽政(수렴청정)을 시작하여, 동생 尹元衡(윤원형, 1503~1565)이 권력을 잡으니, 時事(시사)가 어렵고 위태하고, 사화가 일어나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윤원형이 공을 비롯한 선비들을 성균관에 있을 때 의론한 바가 있었는데, 이미 기필코 死地(사지)로 내 몰 것이라 하고, 그 후 이내 하는 말이 “이모 등은 선왕이 재위할 때, 尹任(윤임, 1487~1545)과 柳灌(유관, 1484~1545)의 門客(문객)으로, 신진소년과 더불어 일을 허위로 전횡하고, 변란을 시비하였다. 새로운 왕이 왕위를 이어받았음에도, 남은 습성이 尙存(상존)하여, 議論(의론)이 더욱 격렬히 조정을 비웃고 헐뜯기고서니, 公卿(공경)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니,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이윽고 잡아다가 鞫問(국문)을 하고자 하였다. 그때 上國(상국) 호음(湖陰) 鄭士龍(정사룡, 1491~1570)은 공과 동향인으로 마침 서울에 있었다. 남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제신은 삼대독자다. 또한, 노모가 있는데, 만약 화를 면치 못한다면, 실로 애처롭다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당일로 공을 淸河(청하, 포항시 청하면 일대) 향교의 교관으로 부임하게 하였다. 그리고 윤원형에게 말하기를 “누가 이제신을 선비라고나 한답니까? 내가 吏曹(이조)의 下批(하비, 임금이 세 사람의 후보자를 골라 점을 찍어 임명하는 일)를 보니, 이제신은 깃털로라도 관을 만들어 장사지내 주기를 구걸하였다는데, 실로 가소로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윤원형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제신의 사람됨은 나는 실로 천하게 여깁니다. 호음 정사룡 대감도 어찌 또한 그러하지 않습니까?”라고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공이 訓導(훈도)가 되고, 標事(표사, 수표 등을 원본과 맞추어 봄)를 해 주었으니, 호음 정사룡 역시 해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거짓말이 전해진 것이라고 하였다. 공이 이처럼 화를 면하여 실제로 이행되지 않았다. 인종 임금에게 본분을 다하기 위해 마음으로 3년 상복을 입었는데, 매년 기일이 되면 곧 공은 의관을 갖추고, 종일 혼자 앉아, 흐느껴 슬퍼하며 크게 탄식하여, 침묵한 채 말을 하지 않았다. 곁에 있는 사람도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공은 젊었을 때 彦遇(언우)로써 자를 삼았는데, 늙어 막에 遇(우)을 바꾸어 愚(우)로 한 것은,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을 보여준 것이다. 공은 명나라 正德(정덕) 경오(1510)년, 昌寧(창녕)에서 태어났는데, 곧 외가였다. 다섯 살에 의령의 종조부 가에 收養子(수양자)로 갔다. 가업이 풍부하였으나, 공은 상관을 하지 않고, 늘상 양자가 된 것을 한으로 여겼다. 공의 생부모의 재산도 역시 풍족하였지만, 모친의 당부에 따라, 두 누이에게 나누어 주어 생활하도록 하였다. 문관 成夢說(성몽열)은 공의 외사촌인데, 가세가 너무 가난하여 가진 것이 없었다. 공이 좋은 바늘과 계집종을 보내, 의복을 만들게 하였더니, 사람들이 이를 일러 불가능한 것이라 하였더라. 공은 소싯적에 남명선생을 師事(사사)하였다. 남명은 鳳城(봉성, 합천군 삼가면의 옛 명칭)의 빈소에 있었다. 공이 왕래하면서 곁에서 모시기를 始終如一(시종여일) 하였으니, 言行(언행)이 나온 근거가 되었다. 오로지 선생은 일시에 聞達(문달)하기를 바랬지만, 공의 본래 뜻을 아니었고, 노모가 계셨기 때문에 부득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다. 시사문제에 관한 방책을 논하는 문체로써 여러 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상 이후에 드디어 세상사에 뜻을 끊었다. 무오(1558)년에 남명선생을 따라 德山(덕산)에 들어가 그곳에 거주하였다. 남명의 精舍(정사)와 거리가 멀지 않아, 날마다 왕래하며, 담론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간혹 거기에서 머물러 자기도 하였다. 공이 일찍이 일이 있었는데, 예를 갖추어 나아가서 절을 한 것이 3일이 되었다. 남명선생이 나뭇잎 위에다 시를 지어 보내주며 하는 말이 “아직 막히지 않은 것은 막힌 것과 같고, 정이 닮은 것은 정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것을 보고 즉시 가서 사례하였다. 선생 역시 때때로 와서 보며 해가 지도록 웃고 말하였다. 부지런히 힘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이처럼 한 것이 거의 15년이 되었다. 공은 덕천의 산수를 사랑하여, 아래위로 여러 번 옮겨 살았다. 처소가 비바람을 막지 못하였지만, 공은 스스로 낙을 삼았다. 또한, 재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베풀기를 좋아하였는데, 남이 굶는 것을 보면 곧 불쌍히 여기기를 자기 때문으로 여겼다. 비록 동이 안의 양식이 아침저녁 먹을거리라 해도 애석해하지 않는 바이니, 그것은 처자의 고통이었지, 공은 개의치 않았다. 공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산청 시천면의 덕산에 일이 있어, 인하여 선생을 그곳에서 배알하였다. 모시는 노비가 고기를 먹는 자가 있었다. 공의 몰래 숟가락으로 먹었기로 숟가락이 입안에 붙어, 氣息(기식)이 통하지 않았다. 하인이 급하게 보고하니, 공이 다른 노비에게 명하여, 콧구멍에서 빼서 제거하도록 하였더니, 피를 흘리고 어렵게 살아났다. 본 사람들이 몹시 놀라 괴이하게 여기니, 모두 공의 효성스러운 마음이 정성에 이른 바라고 말하였다. 을사(1545)년 7월에 함양군을 지나갔다. 함양군수 成夢說(성몽열)이 공을 위해 별안간 술과 안주를 차렸다. 또 작은 생선을 근처에서 삶았는데, 솥뚜껑이 갑자기 위로 날아가, 공중에 이르렀다. 이에 밑에는 이와 같았는데, 다시 별안간 솥바닥이 터져 깨지니, 솥안에 찬 것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렸다. 공이 말하기로 “이것은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할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서로 돌아보고 失色(실색)을 하고, 얼른 그것을 치우기를 명하였다. 이때는 마침 인종대왕이 몸이 좋지 않아, 이미 영원히 자리를 비움으로 정사를 보지 못하는 날이었다. 공은 근심하고 두려워 눈물을 흘리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인종의 陟方(척방, 임금의 승하를 말함) 소식을 이내 들었으니, 몹시 놀라 탄복하였다. 이 또한 공의 충성스러움이 感應(감응)한 바라고 일러 말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文名(문명)이 있었으니, 시에 더욱 뛰어났는데, 商山四皓(상산사호, 진나라 때 학정을 피해 은둔한 세 절사를 지칭. 곧 나이가 많고 덕도 높은 은사를 뜻함)의 시와 같은 것이었다. 濟川亭(제천정) 차운시나, 十玩亭(십완정)에서의 題詠(제영)을 비롯하여, 錦城山(금성산)의 “바위 밑 맑은 샘은 새로 내린 빗물이지만, 돌 틈사이 시든 대나무는 옛 승려가 심었네.”라는 구절은 병조판서 曺潤孫(조윤손, 1469~1548)에게 보내, 燕京(연경)으로 가는 시로 하였다. 그는 칠순에 五曹(오조)와 三宰(삼재)가 있는 가운데, 명을 받들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정묘(1567)년에 행하기로 官爵(관작)을 탐하거나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노성한 사람을 하늘에 버리지 말라는 詩經(시경)의 이와 같은 시어는 모든 사람의 입에 암송되었다. 만년의 절개는 방랑이었고, 形骸(형해)는 淸狂(청광)하였다. 술 만나는 것을 자부하니, 문득 마시고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었고, 無時(무시)로 시를 짓고, 마음이 솔직하여 꾸밈이 없었다. 그 마음을 얻은 곳은 극적이었고, 더불어 그 淸遠香(청원향, 침향 등 태우는 향의 한 가지)은 사람을 타이르는 말이 되었다. 남명선생은 지난번에 바둑두는 것과 활쏘기를 警戒(경계)하라고 하였다. 공이 즉시 시를 읊어 말하기를 “바둑을 두고 있으면 입에서 남을 평판하는 말이 끊어지고, 활을 쏘노라니 마음엔 자기를 돌이키는 생각이 보존되네.”라고 하였다. 선생은 그것을 보고,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였다. 을사(1545)년 간에 공의 友人(우인)이 吏曹銓郎(이조전랑)에 있으면서, 공으로 하여금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으로써 재차 조정에 추천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 급히 편지를 써서 알렸는데, 대략 말하자면 “나는 淺陋(천루)한 학술로써, 廣文先生(광문선생) 鄭虔(정건, 당나라 때 시, 서, 화에 능하여 정건삼절로 일컬음)의 삶에 이미 만족하고, 하물며 금년에는 나이가 들어 육신 또한 병이 많은데, 어찌 감히 山野(산야)의 외로운 나그네로서, 분주히 높은 벼슬아치 밑에서 땀을 흩뿌릴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그 친구가 그것을 보고 “倔强(굴강, 고집이 세어 굴하지 아니함)하다. 이 늙은이여!”하고는 비로소 그 일을 멈추었다. 신미(1571)년 여름에, 남명선생이 덕천의 공의 초가집에 피하여 거처하였다. 공이 선생을 모시기를 수개월에 망령된 말이 아니라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거의 惰容(타용, 게으르고 단정하지 아니한 용모)함이 없습니다.”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언우는 혹은 익살스럽기가 그 끝이 없어, 점잖지 못한 천한 말이 뒤섞이고, 어떤 때는 심신에 언행을 각별히 삼가여, 예절에서 살아나니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는다. 공이 답하기를 “이 사람은 마음을 한곳에 모으지 못해 다른 사람을 보면, 곧 스스로를 알지 못하여, 詼諧曠蕩(회해광탕, 諧謔(해학)스럽고, 헛되고 방탕한 것)하지만, 선생님을 보면 곧 스스로 깨닫지 못해, 장차 심신에 收斂(수렴)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覺齋(각재) 河沆(하항)이 공의 옆에 앉아 있었는데, 선생이 돌아보며 웃으며 하는 말이 “彦遇(언우)가 淸狂之名(청광지명)을 얻은 것은 참으로 마땅하도다.”라고 한다. 공은 평생토록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일찍이 諸孫(제손)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 등으로 하여금 가난하여 가진 것이 없게 한 것은 내다. 하지만 나는 세상살이를 반드시 대란이 있을 것이라 보았다. 비록 재산이 있어도, 장차 너희 등에게 베푸는 바가 없었다. 어떻게 살 궁리를 하여, 변란(을사사화)이 닥친 이후에 돌이켜 생각을 해보았다.”라고 한다. 공이 말한 바는 곧 모두 歷歷(역력)하게 證驗(증험)이 가능한 것이다. 임오(1582)년 봄에 이 사람 전유룡이 입산에 들어가 곁에서 모시는데, 공이 말하기를 “금년에 나는 필시 죽을 것이다. 꿈에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밑에 있는 내 이마에 붙었다가 머리를 끌고 하늘로 올라갔으니, 이는 終年(종년)의 兆朕(조짐)이다.”라고 하였다. 그해 7월에 질병에 걸렸지만, 지리산 薩川倉(살천창) 아래 산자락에 몇 칸의 집을 짓고, 즉시 이사하여 살며 말하기를 “이곳은 가히 내가 영원히 歸依(귀의)할 땅이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항시 물을 마시면서 이르기를 “胃腸(위장)을 씻으며 돌아간다.”라고 하였다. 8월 28일 이른 아침, 의관을 正齋(정재)하고 앉아, 구두로 시 한 수를 읊기에 “들판을 바라보니 누르고도 푸른데, 구름을 우르러니 희고도 검다네. 도옹(陶翁)이 머무를 곳을 알았으니, 이곳이 바로 寒天(한천)이라네.”라고 지었다. 곁에다 묻고 하는 말이 “巳時(사시, 9시~11시)는 아직 멀었나?”라고 하였다. 그 당시 마침 벗의 장례가 있어, 공이 붓을 들어 제문을 짓고자 했으나, 미처 마치지 못하였다. 또 사시를 물어보았으나 답을 하지 않았다. 해가 사시가 되자 공은 갓을 벗어 시종에게 주고, 마치 就寢(취침)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忽然(홀연)히 하였으니, 나이가 73세였다. 覺齋(각재) 河沆(하항)이 挽詞(만사)에서 지어내기를 “異人(이인)이요, 神人(신인)이며, 얽매이지 않는 不羈人(불기인)이니, 세 사람이 합작해서 한 사람의 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모두가 이르기를 “이것이야말로 공의 實錄(실록)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家世(가세)는 곧 철성인데, 著名(저명)한 성씨이다. 戶部尙書(호부상서) 휘 璜(황)이 공의 시조이다. 이분이 保勝郞將(보승랑장) 휘 田枝(전지)를 낳고, 이분은 景安公(경안공) 휘 國軒(국헌)이고, 이어 上護軍(상호군) 휘 永年(영년)을 낳고, 영년은 檢校門下侍中(검교문하시중) 휘 嚴沖(엄충)을 낳으니, 고려의 유명한 재상이었다. 이분이 判典農寺事(판전농시사) 휘 俊明(준명)을 낳고, 또 檢校樞密院使(검교추밀원사) 휘 松茂(송무)를 낳았으며, 이어 民部議郞(민부의랑) 휘 應卿(응경)을 낳으니, 고려말의 대신이 되었다. 이분이 都總制(도총제) 휘 允柱(윤주)를 낳았고, 이어 右軍總制(우군총제) 휘 伯(백)을 낳으니, 철성으로부터 의령으로 이주를 하였는데, 곧 처가가 있는 고을이었다. 乙孫(을손)이라는 아들을 두었으니, 벼슬이 少監(소감)에 이르고, 소감의 아들 彦(언)은 中郞將(중랑장)이었는데, 아들 貴陽(귀양)은 典簿(전부)이다. 귀양의 아들은 斯永(사영)이라고 하는데 司直(사직)이다. 사영의 자 根(근)은 副護軍(부호군)이고, 아들이 있어 世亨(세형)이라 이름하는데, 龍驤衛副司果(용양위부사과)이다. 세형의 아들이 瓊(경)은 곧 공의 부친이다. 이상 3세는 모두 武人(무인)인데, 관직은 顯著(현저)하지 못하였다. 공은 늘상 이르기를 “우리는 누대에 걸친 무인 가문의 후손인지라, 시와 예법을 大綱(대강) 알았으니, 자손 들이 모두 뼈대가 없었다. 또한 덕을 쌓은 것이 없어, 나는 장차 後世(후세)가 없어질까 두렵다.”고 하였다. 공의 모부인은 昌寧(창녕)의 世族(세족) 成玉崑(성옥곤)의 딸이니, 곧 명재상 成萬庸(성만용)의 후손이다. 공의 부인은 碧珍(벽진) 대장군 李悤言(이총언)의 후손으로, 곧 平靖公(평정공) 約東(약동)의 증손이고, 通政(통정) 承元(승원)의 손자인 司果(사과) 有儉(유첨)의 딸로서, 廣平(광평) 李秀堰(이수언)의 외손이다. 공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鐵城(철성)과 德城(덕성)이고, 딸로 말하자면 僉正(첨정) 田潭(전담)이다. 철성의 아들은 大胤(대윤)이고, 딸은 田遇秋(전우추)이다. 첨정 덕성의 아들은 彭祖(팽조)이다. 전담의 아들은 有龍(유룡)과 景龍(경룡) 그리고 伏龍(복룡)인데, 유룡은 공의 외손으로서 왕래하여 곁에서 모시기를 근 20년이었다. 그래서 공의 행적에 있어서는 혹은 직접보고 알았으며, 어떤 것은 전해 들어 안 것이다. 평시에 기록이 대강 있었으나, 왜란 이후에는 즉 공이 직접 쓴 기록까지 아울러 없어진 것은 애석하다. 慶尙都事(경상도사) 李魯(이노) 씨는 공의 宗人(종인)인데, 이미 공의 傳(전)을 지었다. 외손 고봉 전유룡 근서 寒泉亭記 南冥曺文貞公之門, 有陶丘李先生. 晉之人祭於其鄕曰, ‘鼎岡書院’. 先生丘墓在於宜春闍崛山. 宜之宗人及外裔田氏, 與其遺孫之散處者, 崇奉之, 迄四百年, 無替. 先生之高風卓節, 其入人深可知也. 惟其運化迭遷, 浩㤼悽悽于今. 瞻依之地, 惟有霜露焄蒿之原, 而常以未置潔濯庖湢之所, 爲憂. 今年就崛下, 辦得一屋, 與士林落之, 名之曰, ‘寒泉亭’. 李君泰植, 遠跼山門, 請晩燾記其事. 噫! 晩燾, 何敢當! 何敢當? 謹按先生; 諱, 濟臣; 字, 彦遇; 生於正德庚午. 少隆文譽, 發解作「蘇軾論」, 名噪一世. 與裵洛川, 嘗遊國庠, 請於明倫堂序齒事. 雖不行, 識者偉之. 俄見時事, 將有不靖之漸, 欲溷其名迹, 求爲淸河敎授, 仍佯狂不赴擧. 仁廟賓天, 服三年之喪. 從南冥於方丈山中, 遇水石淸幽, 輒移之無定所. 有詩曰: “看棊口絶論人語, 射革心存反己思.” 又曰, “巖下淸泉新雨水, 石間枯竹古僧栽.” 南冥擊節歎賞. 年七十三, 自語死期, 期之日, 吟哦自若, 遂悠然而逝. 詩曰: “望野黃兼綠, 看雲白又玄. 陶翁知止處, 只是爲寒泉.” 此詩泛看之, 則不過考槃衡門之隱居自樂也. 深味之, 則知止, 卽『大學』至善之所在, 如知爲子而必孝爲臣而必忠也. 寒泉, 『易』亦曰, ‘井道之至善而天道之自然’也. 於六義內句, 賦也; 外句, 比也. 蓋此至善之義發於易簀之時. 亦猶曾子得正斯己之意也. 然, 晝夜往來, 其理則一, 而吾人爲學亦舍至善何以哉! 人性之本善, 如水之本淸也, 泉之本寒也. 若爲私慾所蔽而汨, 爲黃流濁流, 已非本然之體也. 旣感地水之無乎不在而又同得萬川. 皆圓之月, 則吾知其逝者, 必不舍晝夜矣. 盈科者必放乎四海矣. 又有天光徘徊於其上而蒙衝自在於中流矣. 於以涵泳而溯其源流之所, 自於以藏修而思其名. 義之所在, 斯爲得之矣. 斯爲得之矣. 亭凡六間, 軒曰知止, 樓曰吟月. 合而扁之曰, ‘寒泉亭’. 若其溪山泉石烟雲花鳥之勝, 南州耆宿, 固已播之歌詠渢渢乎, 盈耳矣. 上之三十八年辛丑, 小春節, 通政大夫, 前行承政院同副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眞城李晩燾謹記. 한천정기 南冥(남명) 曺文貞公(조문정공)의 문하에 陶丘(도구) 이 선생이 있었다. 晉州(진주) 사람들이 그 향리에서 祭享(제향)을 하는 곳을 이름하여 鼎岡書院(정강서원)이라고 한다. 선생이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은 宜春(의춘, 의령의 옛이름)의 闍崛山(자굴산)에 있다. 의춘의 宗人(종인)들과 외손 田(전) 씨와 더불어 흩어져 사는 후손들이 선생을 崇奉(숭봉, 거룩하게 여겨 떠받듦) 한 지 400년에 이르렀으나, 멈추지 않았다. 선생의 고상한 풍도와 우뚝한 절개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이 移入(이입)되었는지 알 수 있다. 천지의 운행이 번갈아서 거듭되니, 지금까지 구슬픈 마음이 매우 두려웠다. 瞻依(첨의, 어버이처럼 항상 바라보고 의지하며 사모함)하는 곳이라야, 오로지 霜露(상로)가 피어오르는 언덕일 뿐이니, 여태 깨끗하게 씻을 부엌 칸을 세우지 못한 것이 근심이었다. 금년(1901)에 자굴산 아래에 집 한 채를 辦得(판득, 변통하여 얻음)하여, 사림들과 이를 落成(낙성)하고, 이름을 지어 이르기를 寒泉亭(한천정)이라 하였다. 李泰植(이태식) 군이 멀리 山門(산문)을 찾아와서, 晩燾(만도)에게 그 사적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아! 만도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당이 된다던가? 삼가 선생을 살펴보니, 휘는 濟臣(제신)이고, 字(자)는 彦遇(언우)인데, 명나라 正德(정덕) 경오(1510)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이 이름나고, 「蘇軾論(소식론)」을 지어 과거 초시에 합격하여, 한 시대에 이름이 떠들썩하였다. 洛川(낙천) 裵紳(배신, 1520~1573)고 더불어 일찍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明倫堂(명륜당)에서는 나이순으로 앉을 것을 청원하였다. 비록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식자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갑자기 시국이 장차 점점 편안하지 않을 것을 보고, 그 명예와 자취를 숨기고자, 淸河(청하) 향교의 교수를 원하여 갔으니, 이윽고 거짓으로 꾸며 미친 체하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인종임금이 승하하자 삼년상을 치렀다. 남명선생을 따라 지리산에 살았는데, 水石(수석)이 맑고 그윽한 곳을 만나면, 문득 그곳으로 옮겨 살아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시에 이르기를 “바둑을 두고 있으면 입에서 남을 평판하는 말이 끊어지고, 활을 쏘노라니 마음엔 자기를 돌이키는 생각이 보존되네.”라고 하였다. 또, “바위 밑 맑은 샘은 새로 내린 빗물이건만, 돌 틈사이 시든 대나무는 옛 승려가 심어 그렇다네.”라고 하니, 남명선생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73세에 이르러, 스스로 죽을 때를 말했는데, 그날에 이르자 태연하게 시를 소리높여 읊조리다가, 마침내 유유하게 세상을 떠났다. 시에서 이르기를 “들판을 바라보니 누르고도 푸른데, 구름을 우르러니 희고도 검다네. 도옹(陶翁)이 머무를 곳을 알았으니, 이곳이 바로 寒天(한천)이라네.”라고 하였다. 이 시를 泛然(범연)하게 보면 곧 考槃(고반, 오두막을 말함)의 사립문에 은거하는 自樂(자락)에 불과할 것이지만, 깊이 이를 음미한다면 머무를 곳을 앎일테니, 곧 『大學(대학)』의 至善(지선,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음)이 있는 바이니, 자식이 되어서는 반드시 효도하고, 신하가 되고서는 필히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寒泉(한천)은 『易經(역경)』에서 역시 일컬은 ‘井道(정도, 주역의 水風鼎(수풍정) 괘를 말함)가 지극히 善(선)한 것이고, 天道(천도)는 세상에 천연 그대로 있다.’라고 한 것이다. 六義(육의, 『詩經(시경)』의 여섯 가지 문체)에 있어서 내구는 賦(부)이고, 外句(외구)는 이것이다. 어찌 이 止於至善(지어지선)한 의리는 易簀(역책, 임종을 이르는 말. 曾子(증자)가 죽을 때 댓자리를 바꾼 것에서 유래)할 때 발현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曾子(증자)가 죽음에 임하여 자리를 바꾸면서 자기 몸을 바르게 한 뜻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낮과 밤이 가고 오는 그 이치는 곧 하나일 테지만, 우리가 학문을 할 때에 역시 至善(지선)을 버리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이라던가. 人性(인성)의 근본은 선하여, 마치 물의 근본이 맑은 것과 같을 것이니, 샘의 근본은 차가움이다. 만약 사욕이 가려지고 汨沒(골몰)하다면, 누런 물이고 혼탁한 물이 흐를 것이니, 이미 본연의 형상이 아니다. 땅속에 물이 없어 부재함을 느낄 것이나, 더불어 물은 만 갈래인 것을 함께 터득할 것이다. 모두가 달은 둥글다고 하는 것인 즉, 나는 장차 흘러가는 것임을 알았으니, 주야로 멈춘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차고 넘치고 나서야 반드시 四海(사해)에 이르게 된다. 또한, 맑게 갠 하늘이 물 위에 배회하고, 蒙衝(몽충, 옛날 전투함을 말함)이 저절로 한가운데 있을 것이다. 涵泳(잠영, 자맥질을 함)으로써 그 원류를 거슬러 오르는 장소가 되니, 스스로 학문을 전심으로 닦아 그 명성을 그리워한다. 道義(도의)가 있는 바는 그것을 얻을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亭子(정자)는 모두 여섯 칸이다. 추녀로 말하자면 ‘그칠 줄을 안다는 것’이고, 대마루를 이르자면 ‘달을 읊었다’는 의미다. 이를 합쳐 편액하여 이름 짓기를 寒泉亭(한천정)이라 한다. 그 계곡과 산, 산수의 경치와 烟雲(연운) 그리고 花鳥(화조)의 뛰어난 경치는 南州(남주, 영남의 여러 고을)의 耆宿(기숙, 학문과 덕행(德行)이 훌륭한 노인)들이 참으로 이미 詩歌(시가)를 渢渢(범범, 소리가 중용(中庸)에 맞는 것을 말함)하게 傳播(전파)하여, 귀에 가득하다. 高宗(고종) 38년 신축(1901)년 10월(소춘절), 통정대부 전행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진성 이만도 삼가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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