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朴昌和)선생 소개와 필사(筆寫)의 검증
남당 박창화(朴昌和) 선생은 손자인 박인규(朴仁圭)씨가 정리한 연보에 의하면 1889년 5월 9일 충북 청원군 강외면에서 밀양 박씨 38세손이며 3대 독자로 태어나서, 1908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배제고 및 황성기독청년회관 교사를 역임하다 1923년 도쿄(東京)로 건너갔으며, 1933년말 일본 궁내성 도서료(도서관)에서 조선전적담당 조사사무 촉탁직으로, 해방 전 1942년 5월 2일 귀국할 때까지 근무하였다고 한다. 해방 뒤에는 청주사범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다가 퇴임한 후 1962년 3월 6일 74세로 별세하였다고 한다.
(사)한배달에서 발행한 계간지 한배달 40호(1998년 겨울호) P70∼P74에 보면 박창화 선생과 관련된 글이 실려져 있는데, (사)한배달 최봉열 원로회 회장, 한애삼 부회장 등이 1998년 10월 최기철(崔基哲, 1910∼2002) 서울대 명예교수를 탐방하고 녹취한 내용에 의하면,
최기철 박사는 1945년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시절에 처음 박창화 선생을 만났으며, 박창화 선생은 일본 왕실문고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했다고 한다.
당시 박창화 선생은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던 중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으며, 요양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에 머물게 되었으며 청주사범학교 교장이던 최기철 박사를 찾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광복 직후 학교로 자주 찾아와 말동무를 하던 박창화 선생은 최기철 박사에게 “이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싶다.”라고 하였고, 최기철 박사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인정하여 청주사범학교의 국사교사로 채용하였다고 한다.
박창화 선생은 마땅한 말동무가 없어 자주 최기철 박사를 방문하였고, 자신이 왕실문고에서 보았던 책들과 일하던 내용을 말하곤 하였으나, 역사에 전문지식이 없던 최기철 박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고 한다.
교사로 재직하던 박창화는 한 학기 동안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할 정도로 단군에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문고에서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최기철 박사는 청주사범학교 교장(1년 재직)을 그만두고 충주사범으로 잠깐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옮긴 후 교수들 사이에서 박창화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서울대 교수들이 남당유고를 보았을 개연성이 높다.
최기철 박사는 서울대에 재직할 당시 이병도 박사(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에게도 일본 왕실문고에 소장된 우리나라에서 수탈해 간 고대사 관련 사료의 존재와 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알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또 1957년경 문교부 편수국장을 방문하여 박창화의 왕실문고에 관한 내용을 말해주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김용덕(金容德, 1944년생, 동북아역사재단 초대이사장, 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교수는 30세 무렵에 선생을 찾아와 “화랑도, 화랑정신을 알린 분이 박창화씨라는데 박창화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며 박창화를 수소문하였는데 친지가 있는 괴산에서 요양하다가 별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999년도 제작 방영된 역사스페셜(유인촌 진행)에 의하면, 충북교육청의 이력서에는 일본 궁내성 즉, 일본왕실도서관에서 1933년부터 12년 동안 근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는 일본 궁내성 직원록 1935년 명부에 박창화 선생의 이름이 있고, 1941년 명부에는 소원창화(小原昌和)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그는 정부 관계자에게 일본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하였으며, 하지만 번번이 무시되거나 정부에서 알아서 갈 테니 목록을 적어 보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본인은 해방 직후 선생께서 만난 정부 관계자가 이병도 선생이 아닐까 주목하여 왔다. 두계 이병도(李丙燾, 1896~1991) 선생을 특별히 주목한 이유는 선생이 생전에 남긴 말 때문으로 “고구려는 태조왕,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남당 유고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병도 선생의 해방 직후의 이력을 살펴보면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했으며 중앙도서관 관장(1947~52), 부속박물관 관장(1953~54)을 지냈다.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듬해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학술원 부회장이 되었고, 1960년 4~8월에는 문교부장관을 지냈다.
본인이 2010.07.24(토)에 선생의 유족들을 만나서 선생님이 이병도 선생을 만났다는 말씀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손자분께서 말씀하시기를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자신이 어렸으며 학교에 갔다 와서 역사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이병도 선생이 우리나라 역사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으며, 제자를 만나러 서울에 올라가시긴 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하였다.
혹자는 선생이 필사한 것이라면 세상에 알리려 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기철 박사의 녹취에 의하면 박사께서 선생을 외부로 알리려 하였고, 선생이 또한 서울대 교수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화랑정신을 알린 사람이 박창화씨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선생이 필사한 것을 알리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논지는 설득력을 상실했음이 분명하다.
남당유고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며, 1999년도 제작 방영된 역사스페셜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1999년도 제작 방영된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당시 번역자인 이태길 광복회부산지회장은 “김경자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부산시 문화재위원한테 갔다 보였어. 부산시 문화재위원이 보니까 자기로서는 감당이 안 될 정도인기라. 이게 어마어마한 일이거든, 역사가 뒤집히는 일인데, 그래 나한테 연락을 해서 갔는데 그때는 이미 복사를 다 해놨더라고, 이게 32면밖에 안되거든 16장인데, 그래가지고 일단 있는 그대로 신문에다 번역을 해서 신문 공간이 허용하는 대로 빨리 세상에 알리자 했지.”라고 하였다.
선생의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유고는 본래 선생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선생의 제자인 김종진씨가 보관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고 1989년에 김종진씨의 미망인 김경자씨가 부산시 문화재위원에게 감정을 의뢰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후로 남당 선생의 유족들이 김경자씨에게 반환을 요구하여 일부가 유족에게 돌아온 것이라고 한다.
남당유고에 대하여 노태돈, 이종욱 등 여러 학자들이 의견을 내기도 하였으나, 남당유고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 중 유일하게 고구려발견 저자 김용만 선생은 신중하게 “고구려에 대한 여러 개의 책들 저본을 보고 그냥 쓰신 걸로 보입니다. 일치하지 않는 책이 있다는 자체는, 이분이 의도적으로 편집하려는 것보다는, 자기가 본 것을 단지 필사만 했다는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지난 1984년부터 1994년까지 십여 년간 경주 월성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월성 주변에 방어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해자가 발견되었고, 화랑세기에 의하면 해자로 추측될 수 있는 단어가 나왔다고 한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색을 밝혀 무관랑과 살았는데 화랑들이 흉을 봤다. 그러자 무관랑이 성벽을 넘어 도망가다 구지에 빠졌다.”
역사스페셜은 도랑과 못이 이어진 구지(溝池)가 바로 해자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이사금이 사망연대는 A.D.284년인데, 당시 경주지역에는 토광목관묘가 축조되던 시기이며, 미추왕릉으로 전(傳)해지는 대형고분이 등장하기 이전이라는 것이 통설이어서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상반되고 있다.
고고학적 견해에 따르면 적석목곽분의 초기단계는 4세기 후반에 해당하므로, 미추이사금의 생존기간을 70~80년 정도를 늦춰 잡아야 한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미추이사금의 사망연대는 A.D.362년이므로 고고학적 견해에 부합하는 바가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적석목곽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황남대총이며, 아직 2/3정도가 발굴되지 않는 상태이므로 앞으로 황남대총보다 더 오래된 적석목곽분의 출현할 여지는 있다. 현재의 통설로써는 미추이사금의 사망연대를 늦추지 않으면 왕릉의 양식을 부정해야 하고, 왕릉으로 인정할 경우에는 생몰연대를 늦춰야 하는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현재까지 남당유고가 고기(古記)라고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여 개인의 창작품이라고 확증할 증거도 없다. 비록 남당유고를 고기(古記)라고 인정할 만한 금석문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창작품이라고 인정할 만한 금석문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1년에 발견된 무녕왕릉에서는 발굴을 통해 무녕왕의 나이가 밝혀졌는데 이로 인하여 무녕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잘못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남당유고에는 무녕왕의 어머니가 동성왕의 비(妃)라고 기록함으로써 비슷한 내용일지라도 무녕왕릉지석 금석문과 남당유고의 기록이 모순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남당유고의 기록을 부정할 수 없다.
또 1979년 발견되어 1981년에 국보 제205호로 지정된 중원고구려비에 관하여 남당유고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웠다는 기록은 비록 존재하지 않으나, 중원고구려비를 세운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나타난다.
중원고구려비에 대한 여러 학자의 의견을 모아보면 변태섭 교수는 비문의 간지를 통해 신유(辛酉)를 간지(干支)로 보아 421년(장수왕 9년), 481년(장수왕 69년)설, 12월23일 갑인(甲寅)의 간지로 보아 449년(장수왕 37년)과 480년(장수왕 68년)설을 주장하였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449년설이 가장 타당하다.
이기백 교수는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관작(官爵)과 함께 의복을 받았다는 위서(魏書, 고구려전)와 삼국사기(문자명왕과 안원왕조)의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 행세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창호 교수는 비문 중 신라매금기(新羅寐錦忌)에서 기(忌)는 신라왕이 고구려왕과의 만남을 기피(忌)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라 눌지마립간의 이름이 기(忌)라는 설을 주장하였는데 기(忌)를 전자(前者)의 신라왕이 고구려왕과의 만남을 기피(忌)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이 남당유고 신라사초 448년 기사에 등장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34년(A.D.450) 기사에도 신라 하슬라(河瑟羅)성주가 실직(悉直)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변장(邊將)을 습격하여 살해하였는데, 장수왕이 “대왕과 우호를 닦아 매우 기뻤는데 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질책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후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나빴으므로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연대를 450년 이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남당유고 신라사초에는 임금이 특별히 총애하는 신하에게 관직과 품계를 내리면서 의복을 함께 하사하는데 품계에 따라 의복의 색이 다르며 혹은 속국(屬國)에도 하사하는 것으로 나타나므로, 이기백 교수의 주장과 같은 부분이 있다.
이밖에도 남당유고에 의하면 왜여왕(倭女王) 비미호(卑彌乎)가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A.D.232년의 일이며, 삼국지 위서동이전 왜(倭)의 기사에 의하면 비미호가 조위(曹魏)에 사신을 보낸 것이 A.D.238년의 일이므로 중국정사조선전의 기록과 부합됨이 있다.
일본서기 신공(神功)황후 섭정 초년에는 신라왕을 살해하는 기사가 있는데, 당시에 사망한 신라왕을 내해의 아들 우로(于老)로 보는 것이 한국과 일본의 다수설이며, 남당유고에 의하면 A.D.331년이며 칠지도의 기년과 비교하여 옳음이 있다. 또한 응신(應神)천황의 출생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칠지도에 기록된 명문인 태화(泰和) 4년을 동진(東晋)의 연호인 태화(太和)로 보아 A.D.369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당시에 백제와 신라, 신라와 왜가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 인하여, 백제와 왜가 교통할 기반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이와 같이 일본서기의 왜왕의 실제 재위기와 생몰년의 추정이 가능해진다. 일본의 고대사는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 기년을 올바르게 수정하지 않으면 일본의 역사도 혼돈만을 함께할 뿐이므로, 일본왕실이 문고를 열어 우리와 함께 고대사를 연구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남당유고의 필사본에는 한지 또는 원고지 이외에, 궁내성(宮內省), 실록편수용지(實錄編修用紙)라고 인쇄된 용지에 적은 것도 있으며, KBS 역사스페셜팀의 취재시에 확인한 충북교육청의 박창화 선생의 이력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일본 궁내성 직원록, 주변사람의 증언으로 선생이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근무한 것은 믿을 수 있는 사실이다.
선생이 궁내성 도서관에 근무한 것이 사실이라면 필사라는 손쉬운 방법을 버리고, 수천에 달하는 인물의 가계를 그물처럼 얽어서 삼국사기의 왕실가계도와(기년에는 차이가 있음) 위배되지 않는 어려운 창작사서를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본인과 선생의 유족들과의 취재에 의하면 선생은 화랑세기 보다는 우리나라의 강역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남당유고가 선생의 창작이라면 일본에서 돌아와서, 유고의 보완보정하기도 바쁠 텐데 만주지역을 돌아다닐 여유도 있었을까?
남당유고 고구려사초(략), 백제왕기, 신라사초에는 기록들 간의 모순점이 보인다. 그것들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본 고기(古記)와 같은 내용도 있고, 중국정사조선전에 보이는 모순점도 담겨져 있다.
어느 기록이 옳은 것이냐는 사가(史家)들의 뛰어난 안목과 사서간의 교차검증 등으로 밝혀야 하며, 본인이 제시한 논지가 반드시 옳지는 않을 것이다.
남당유고 중에서 특히 기년이 모순되는 부분만을 골라서 단순해석, 삼국사기의 기록과 비교, 본인의 견해의 순으로 정리하였으며 많은 독자들이 쉽게 고대사를 이해하였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두계 이병도(1896~1991) 선생이 생전에 남긴 “고구려는 태조왕,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표로 설명하였으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