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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 좌수사 이순신으로서 삼도 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한산도에 결진(結鎭)하여 거제에 있는 적과 대치하여 한 달이 넘지 않아서 수비(守備)가 이미 완전히 준비되었다. 때때로 거북선을 발동시켜 나오는 적을 잡으니, 적은 겁내고 움츠러져서 감히 나오지 못하여 경상 우도의 연로(沿路)와 호남의 일면이 안전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으면서 지은 20운(韻)의 시 가운데, “바다를 두고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아네.” [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 등의 구절이 있다.
○ 유정(劉綎)이 여러 번 경고하고 타일렀더니, 행장이, “단기(單騎)로 중도에서 만나 면대하여 약속하자.” 청하여 유정이 허락하였다. 밤에 서로 만났는데 행장의 눈빛이 횃불과 같았다. 물러간 뒤에 유정이 탄식하기를, “하늘이 영걸(英傑)을 해외(海外)에 출생시켜 중국이 편안히 잠을 잘 수 없구나.” 하였다.
○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ㆍ장성 현령 이귀(李貴)가 번갈아 감사 이정암(李廷馣)에게 글을 올려 김덕령(金德齡)을 천거하니, 계문(啓聞)하였다.
11월 이때에 유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팔거(八莒)에 그대로 머물고, 본국 원수 권율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낙상지(駱尙志) 등과 경주에 머물러 지키고, 이빈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의령에 머물러 지키고, 송대빈ㆍ곡수(谷遂) 등은 삼가(三嘉)에 그대로 주둔하였다. 창원(昌原)의 적이 또 영선현(永善縣)에 나와서 불태우고 약탈하므로 이빈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잡으러 갔다가 불리하여 퇴각하였는데, 충청도 조방장(助防將) 옥천 군수가 총알에 맞아 죽었다. 통분하다! 통분하다! 만여 명의 군사를 가지고서 5백 명의 적에게 굴했는데 한 번이면 말거니와 두 번이나 불리함을 겪으니, 통분하다! 통분하다! 허다한 사람 가운데 남아 하나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분하다! 통분하다! 곽 첨지(郭僉知)가 꼭 이 일을 맡을 것만은 아니니, 저 국가의 녹을 먹는 무리들을 장차 어디에 쓸까.
○ 유정이 또 행장에게 글을 보내어 타일렀더니, 행장이 답하기를, “일본 선봉 풍신 행장은 진실로 황공하여 대명 총부(大明總府) 유노야(劉老爺)의 휘하에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아뢰나이다. 전월 27일에 봉해 보낸 글은 이달 4일에 떼어 보았더니 말한 뜻은 대략 먼저 편지와 같으므로 그 답장을 사절에게 주었으니, 지금 또 무슨 말을 하겠소? 두 나라 화친의 일에 이르러서는 남을 겁내라고 공갈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천조(天朝)에서 만약 화친을 허락하지 아니한 뒤에 남을 겁내게 하여도 무방하지 아니하겠소. 비록 휘하의 말을 듣더라도 어찌 겁내는 뜻이 있으리요. 어찌 일본의 명을 듣지 아니하고 군사를 끌고 돌아갈 리가 있으리오. 또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 일은 내가 일체 제어하고 있는데 적(賊)이 틈을 엿보아 약탈하는 것은 나의 아는 바가 아니니, 지방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진정시키면 될 것이요. 나머지는 먼저 편지에 있으므로 자세히 진술하지 않나이다.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이만 줄입니다.” 하였다. 글에 해득하여 못할 것이 많으나 본문대로 기록하여 아는 이를 기다린다.
○ 세자 저하(世子邸下)가 전하(殿下)의 뜻을 받들어 남으로 내려와 무군(撫軍)하기 위하여 26일에 학가(鶴駕)가 서울을 출발하여 한강을 건너서 곧 호서(湖西) 무군사(撫軍司)로 내려오자 모든 재상들이 따랐는데 삼도체찰사 윤두수도 또한 호위하여 남으로 내려왔다.
○ 경리(經理) 송응창(宋應昌)의 제본(題本)에, “조선 국왕의 세자가 청년으로 영발(英發)하여 국내의 신민(臣民)이 모두 추앙하고 복종하니 마땅히 전라ㆍ경상 등지에 나가 주둔하도록 하여 총병 유정과 협력하여 지킬 것입니다.” 하여, 경리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알렸다 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 본국 배신(陪臣) 허진(許晉) 등이 병부(兵部)에 글을 올려 궁면(弓面)을 무역하기를 청하였더니,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청하여 절선은냥(折船銀兩 선척(船隻)의 대가로 주는 은)을 회동관(會同館)에 주어 개시(開市)하는 날 무역하게 하고, 또 회동관으로 하여금 수레를 주어서 연로(沿路)에서 번갈아 수송하여 유정의 감독을 받아서 발용(發用)하도록 하기로 황제의 허가를 받았다. 고사에서 나왔다.
윤11월 4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고 6일에는 안개가 끼어 종일토록 사방이 막혔다.
○ 광주(光州) 상인(喪人) 김덕령(金德齡)은 도내 각 고을 여러 군자(君子)에게 공경히 고하나이다. 요사이 보건대, 흉악한 적이 이미 서울에서 나와 영남 변두리에 벌떼처럼 주둔하여 변경(邊境)의 성보(城堡)에 멧돼지처럼 돌격하여 가만히 엿보는 생각을 품고 날로 미친 짓을 방자히 하매, 관군(官軍)이 패배하고 의병도 또한 움츠러져서 군사를 멈추고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무찔러 멸하는 데는 뜻이 없으니 위엄을 상실하고 적을 길러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부지런히 힘쓰는 이가 없고 밖으로는 제 몸을 잊는 충신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오늘날의 사세를 보건대, 진실로 답답합니다. 김덕령은 처음부터 소탈한 바탕으로 뜻은 갓끈을 청하는 데 간절하였습니다. 변이 난 처음에 군중에 몸을 던져 감히 조그마한 힘이나마 바치려는 생각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늙은 모친이 병이 들어 서산에 지는 해와 같았으므로 마지막으로 봉양할 정이 간절하여 차마 뿌리치고 갈 수 없어 두 해를 집에 엎드려 있으면서 칼을 어루만지며 동쪽을 돌아볼 뿐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시어 자식으로서 믿을 데가 없고, 국가에 일이 많으니 신하로서 절개를 다할 때입니다. 다행히 담양 부사 이후(李侯) 경린(景麟)을 만났더니, 그는 종실(宗室)의 후손으로 일찍이 나라 위해 적을 칠 뜻을 품은 이라, 나의 헛된 이름을 듣고 전구(戰具)를 준비해 주면서 일어난 국난(國難)에 임하기를 권하므로 두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침내 어쩔 수 없어 애통한 정을 끊어 상복을 벗고 사세에 따라 군중(軍中)으로 나왔나이다. 장수 노릇하는 방략(方略)은 비록 표요(票姚)에게 부끄러우나 의기(義氣)는 적이 조사아(祖士雅)를 사모하나이다. 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위엄을 기르며 날랜 기운을 쌓아서 범의 굴을 바로 더듬어 백성의 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고 칠묘(七廟 임금의 종묘)의 수치를 쾌히 씻으려 하오니, 오직 바라건대, 먼 데나 가까운 데서 마음을 협력하여 위태한 나라를 붙드는 지극한 계책을 함께 정합시다.
지금 이에 충심(衷心)을 밝혀서 고하오니, 각 읍의 장사 중에 혹시 나를 따를 이가 있을는지요. 아! 2백 년 동안 기르고 가르친 나머지에 한 사람의 선비도 분에 겨워 순국(殉國)할 이가 없을쏜가. 몸을 버려 국난을 구제해야 할 때가 이때로다. 소매를 떨치고 단(壇)에 오름을 어찌 가히 늦추랴! 김덕령의 힘은 솥을 들기 어렵고, 용맹은 만인을 대적할 사람이 못 됩니다. 회고하건대,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할 것이므로 재주와 지혜의 졸렬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같은 무리의 선비를 불러 모아 모두 단심(丹心)으로 공업을 성취하려 하나이다. 기회를 타서 변통하는 데는 비록 능히 묘한 계책으로 적을 제어하지는 못하나마 칼날에 부딪치는 데는 마땅히 군사의 선등(先登)이 될 것을 맹세하나이다. 방금 7도가 병화(兵禍)를 입지 않은 데가 없는데 오직 우리 호남만이 도륙을 면하였으니, 회복할 일맥이 여기에 있는데 근자에 물력(物力)이 거의 다 되고 민생이 곤궁하여 병화를 겪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때에 적이 이른다면 누가 다시 막아내리오! 부모 처자는 사람마다 있지 않은 이가 없고, 상재송백(桑梓松栢)도 집집마다 기르지 않은 이가 없는데 하루 아침에 살육 약탈되고 분탕질을 당한다면 어찌 그것이 바라는 바이겠는가. 진실로 사람마다 노한 마음을 품어서 사사로운 원수 갚듯 한다면 이 적을 멸하지 못할 이가 없다. 혹시 목전의 편안함을 보존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부모를 적에게 주는 것이며, 제 손으로 송백(松栢)을 스스로 자르는 것이니, 어찌 그럴 이가 있으리요. 원하노니, 각 읍의 선비들은 마음을 주저하지 말고 분발하는 기운을 배나 더하여 서릿발 같은 창날과 철기(鐵騎)로 우레처럼 굴리고 바람처럼 몰아쳐 간다면 다 죽어 가는 남은 적들이 반드시 흙처럼 무너지고 와해(瓦解)될 것이며, 칼날에 피 묻히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달려와 죽기를 기다릴 것이니, 비수(淝水)의 공을 오늘에 세울 수 있고, 전연(澶淵)의 승리를 불시(不時)에 얻을 수 있으리니, 어찌 매우 다행하지 아니한가. 아! 명 나라 군사가 항상 불의(不意)의 습격에 욕을 보고, 우리의 강토는 오랫동안 왜놈에게 더럽혀졌네. 칼을 짚고, 수레바퀴를 울려도 군사들이 일어나지 않는도다. 경계에 다다라 목을 찌르니, 옹문(雍門)을 누가 회복하리. 거사(擧事)할 것은 아래와 같이 조목을 나열하니, 이 격문이 도착하거든 자세히 생각하여 힘쓸지어다. 또 군사는 정예하기를 힘쓰고 많기를 힘쓰지 않는 것이니, 오중 장사(吳中壯士) 10여 인을 얻어 함께 가기를 원하나이다.
○ 동궁(東宮)이 좌의정 체찰사 윤두수를 황주(皇州)에 보내어 유독부(劉督府)를 잔치하여 대접하고 돌아왔다.
○ 유학(幼學) 김덕령이 담양에 군사를 모아 수천여 명을 얻어서 원수 권율에게 보고하였더니, 초승군(超乘軍)이란 석 자로 표장(標章)을 삼게 하였다. 김덕령이 또 스스로 편비(褊裨 부하 장교)들을 부절사(赴節師)라고 표장하고, 아병(牙兵)은 첩평려(捷平旅)라는 표장을 하고, 하리(下吏)는 신첩(信牒)이란 표장을 하게 하였다. 김덕령은 광주 사람으로 일찍부터 초승(超乘)이란 이름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중에서 기복(起復)하였다.
○ 송응창(宋應昌) 등의 아뢰는 말에 왜병이 다 철퇴하였다고 하므로 황제가 또 행인(行人)을 본국에 보내어 적의 실정을 탐사한 뒤에 남은 군사를 모두 철수시키기로 하여 명 나라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니, 유정(劉綎)이 팔거(八莒)로부터 서울로 향하였다.
○ 계의병(繼義兵)을 파하고 그 군사와 군량은 초승군에게 소속시켰다.
○ 유정이 서울에 도착하여 명 나라 사신을 보고 면대하여 왜적의 정상을 진술하고는 도로 충청ㆍ전라로 내려왔다.
12월 2일 유정이 임실(任實)로부터 남원에 들어왔는데 접반사 동지(接伴使同知) 김찬(金瓚)이 따랐다. 다음날 남원부에 머물며 잔치로 대접 받고, 4일에 팔거(八莒)로 향하였다.
○ 호남 선비들의 통문(通文)은 아래와 같다.
국가의 운수가 불행하여 화란이 매우 위험하였다. 전란에 임금과 떨어져서 천리 밖에서 모든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길에서 분주하기 지금까지 2년이었네. 다행히 백성이 한(漢)을 생각하고, 하늘이 당(唐)을 도와서 임금의 행차가 처음으로 환도하여 옛 제도를 다시 만드시어 이에 학가(鶴駕)를 명령하여 남쪽 나라의 군대를 위로하시니 주관(周官)의 거룩한 위의를 보게 되었소. 우리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니 실로 전에 없던 경사요. 늙은이를 붙들고 어린이를 이끌고 대궐 아래에 달려가 위로를 드림은 할 수 없지마는 우리 임금의 아들이 멀리 이 땅에 다다랐으니, 오직 남중의 부로(父老)와 백성들은 향로를 받들고 길에 가득히 나서서 깃발 아래서 절하고 뵈어야 할 것이오. 이에 경상(境上)에 일제히 모여서 우리 신민(臣民)의 기다리고 반기는 정을 표시하고자 하니, 여러분은 모름지기 여산(礪山)에 와서 모여서 기일에 뒤짐이 없음이 어떠하겠소. 초야(草野)에 있는 신하도 역시 기뻐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정성으로 변변치 못한 시를 읊기를,
남도에 남은 백성이 북녘 구름을 바라보니 / 南土遺氓望北雲
우리 임금의 아들이 기이한 공을 세웠구나 / 吾君之子建奇勳
영무(靈武)에 무군(撫軍)함은임금의 명을 받은 것이요 / 撫軍靈武由宸命
임안(臨安)에 감국(監國)함은 옛법을 모방함일세 / 監國臨安倣典墳
땅이 구르고 하늘이 돌아 학가를 맞이하니 / 地轉天旋迎鶴馭
항아리에 미음 바구니에 밥이며, 머리에는 향불 피운 동이를 이었도다 / 壺漿簞食載香盆
세자가 오셔서 우리를 살리시리니 / 后來蘇我其無罰
빨리 돌아가지 말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는 것을 구해 주시오 / 勿遄回旋救溺焚
하였다.
9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안개가 가리어 막혔다.
13일 태양이 셋이 나오고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동궁이 공주에 도착하여 행차를 멈추었다.
25일 학가가 전주에 도착하여 다음날 알성(謁聖 임금이 공자 신위에 참배하는 것)하고, 27일에 과거를 보여 문신(文臣) 11인과 무신(武臣) 1천 6백 인을 뽑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또한 명령을 받들어 합천(陜川)으로 진을 옮겨 과거를 보여 무과(武科) 9백 인을 뽑았다. 영남으로 간 장사들을 호남으로 모을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나누어 시취(試取)하였는데, 철전(鐵箭) 다섯 개를 일순(一巡)에 두 번 맞히고, 말타기 1차(次)에 두 번 맞힌 자는 뽑고, 그 나머지는 합하여 1방(榜)으로 하였다.
○ 조정에서 이정복(李廷馥)의 장계로 인하여 김덕령(金德齡)에게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주었다.
○ 낙상지 등은 경주로부터, 송대빈 등은 삼가(三嘉)로부터 모두 군사를 철수하여 서울로 향하여 이내 명국으로 돌아갔다.
○ 익호군중 선비들의 통문은 아래와 같다.
김덕령 장군은 좀처럼 보기 드문 용력(勇力)을 가졌고, 여러 해 동안 적을 평정하지 못함을 분히 여겨 상중(喪中)에서 몸을 빼내 칼을 짚고 일어서니 웅장한 명성에 격동되어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그림자처럼 따랐다. 번개처럼 발동하고 구름처럼 모여들어 소탕해 맑히기를 한가지로 맹세하였다. 의기가 이미 영남 바다 한쪽에까지 진동하니, 몇몇 남은 적들은 가마 속에서 노는 물고기처럼 죽을 때만 기다리고, 전라도 한 구석이 도륙을 면하였으니 심히 다행이다. 다만 관청이나 민간의 저축이 모두 다 되어 군중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모두 스스로 판출하려고 장수나 군사가 그렇지 아니한 이가 없다. 다 같은 신하요 백성인데 어떤 이는 도망해 숨느라고 겨를이 없는데, 스스로 싸우고 스스로 먹어야 하니 겨울에 종군하는 자만 어찌 잘나서이겠는가. 아! 종군하는 괴로움은 어느 누가 꺼리지 않으며, 가정의 기쁨은 누군들 좋아하지 않으리오마는 남들의 하고 싶어하는 바를 버리고 꺼리는 바를 즐거이 따름은 어찌 딴 뜻이 있으랴! 그들은 전란을 겪은 백성들이 적이 와도 막지 못하여 부모는 칼날에 죽고 처자는 포로로 잡혀가서 집을 잃고 재물을 잃고서 울부짖는 자들을 보고 함께 망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어 드디어 손바닥에 침 뱉고 소매를 떨치고 격동하여 구름처럼 모여서 위로는 국가를 위해 무궁한 수치를 씻고, 아래로는 집에 자물쇠를 굳게 하기 위하여 만번 죽더라도 아깝지 않은 행동으로 깃발을 들고 갑옷을 걸치고서 영남에까지 싸우러 왔으니, 그 뜻은 장하고 계책은 깊다. 그런데도 그 고향에 처하여 살림을 편안히 하여 집안 처자의 즐거움을 앉아서 누리는 자는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 이 적이 있으면 이 재물이 없어질 것이며, 이 적이 없어져야 이 재물이 있을 것이니, 재물을 가지고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재물을 내어 적을 제거함이 낫지 않겠는가? 옛사람의 말이 있는데, “잠깐 소비하지 않으면 길이 편안할 수 없다.” 하였고, 또, “재물을 저축함은 능히 잘 쓸 수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하였는데, 혹시 쌓아 두고 흩지 않아서 훗날의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비루하지 아니한가? 대저 사람을 물에서나 불에서 구제해 주면 반드시 그 은덕을 갚으려고 생각함은 나를 살려 준 은혜가 지극히 중하기 때문이다. 지금 왜적의 날뜀이 수화(水火)보다 심한데 그의 해를 입을 사람들이 평범히 보고 돌이켜 생각할 줄 모르니, 이 무슨 뜻인가? 엎드려 원하건대, 창을 메고 싸우는 괴로움 대신에 보존하기 어려운 미곡을 아끼지 말고 빈부(貧富)에 따라 각기 한 되 한 말이라도 내어 군자(軍資)에 보조하면 저 토벌하고 방어하는 군사들이 반드시 기운을 다해 급히 달려서 죽도록 힘껏 싸워서 흉악한 칼날로 하여금 이 도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그러면, 오늘날 한 되 한 말을 내는 것이 장래에 창고를 보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이라도 오히려 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여러 군자의 밝고 지혜로움으로 이것을 모르겠는가? 그리고 또 김 장군의 생각으로는 거느린 장사들과 적진에 달려가 싸우더라도 부모 처자는 모두 도내의 제일되는 산성에 들어가게 하였다가 만약 뜻밖의 변이 있을 때에는 군사를 돌이켜서 지키고 방어하여 몰사하는 화를 면하게 하려고 하니, 이것은 실로 싸우고 지키는 상책(上策)이다. 이에 모집된 곡식을 거두어 모아서 한편으로는 싸우러 가는 군사에게 주고, 한편으로는 성을 지키기 급할 때에 대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실책이 없게 하려 하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곡식을 모집한 것은 아래에 조목을 나열해 기록하였다. 도유사 전 첨정(都有司前僉正) 기효증(奇孝曾) 등.
도내 산성 가운데 장성(長城)ㆍ입암(笠巖)ㆍ담양(潭陽)ㆍ금성(金城)이 서로 비슷한데 군사를 간직하고 싸움을 하는 데는 입암이 더욱 나으므로, 김덕령 장군이 여기의 형세를 둘러보고 장차 한 도의 주장(主將)의 처소로 삼아서 도내 사람의 부모 처자를 다 여기에 두어 보호하고, 싸우고 지킬 자리를 만들겠다 하였다.
○ 원수 권율은 합천에 그대로 머물고, 승의장 첨지(僧儀將僉知) 처영(處英)으로 하여금 남원의 교룡산성을 수축하게 하니, 처영이 의령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교룡산성에 주둔하여 수축하였다.
○ 전란이 난 지 2년에 군사와 백성이 생업을 잃고, 적의 분탕질이 극히 심하여 저축되었던 물자가 잿더미가 되니 국가의 경비를 판출할 길이 없으므로 이에 모속사(募粟使)ㆍ조도사(調度使) 등을 각 도에 보내어 온갖 방법으로 곡식을 모집하는데, 공명첩(空名帖)을 많이 만들어 유사(有司)에게 나누어 주어서 이것은 방유사(坊有司)가 아니라 모속유사(募粟有司)다. 살 사람을 모집하였다.
○ 남원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은 도체찰사 상공(相公)ㆍ태감(台鑑) 합하(閤下)에 글을 올리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성상(聖上)께서 합하로 하여금 잠깐 자리를 비우고 영남에 와서 군사를 살피게 한 것은 그 뜻이 간절한 것입니다. 남방의 병세와 민생이 어찌 되어 있는 곡절은 합하께서 자세히 들으셨습니까? 합하의 이번 행차가 실로 국토의 회복에 관계된 것이오니, 원하건대, 상공(相公)은 채택하여 대궐에 아뢰어 주심이 어떠할지요? 영남은 끝났습니다. 텅 비어서 다시 착수할 곳이 없고, 믿는 바는 호남인데 호남도 역시 전란이 난 후로 군량을 대기에 고달프고, 그 위에 잔혹한 무리들이 일 처결 잘하는 것으로 일삼아서 반드시 군률(軍律)을 썼으므로, 남원ㆍ전주 같은 웅장하고 부요한 지방도 역시 분탕되어 남은 것이 없어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었으니 말하자니 비통합니다. 이렇게 되니, 비록 성인이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병세(兵勢)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생(老生)이 역시 군사를 일으켜 정벌에 나선 지가 이미 한 해가 지났습니다. 여러 장수의 뒤를 따라 병세를 익히 보았는데, 아! 이 군세를 가지고서 만약 군률을 고치지 아니하면 적을 소탕하여 회복할 리는 만무합니다. 다만 적세만 날로 성해지고 우리나라는 장차 다 말라 어찌할 수 없을 뿐입니다. 아! 옛날의 제왕(帝王)과 어진 장수는 백성 보기를 상처난 이를 불쌍히 여기듯 하되 군정에 대하여서는 엄하고 밝아서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군세가 용동(聳動)되어 장수는 순국(殉國)하는 절개가 있고, 백성은 죽어 줄 마음이 있어서, 군사의 많고 적음은 족히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전단(田單)이 제(齊) 나라를 회복한 것과 우리 태조(太祖)의 단천(端川) 싸움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흉악한 적이 한 해가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고, 또 불측한 말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두려워할 만한 장수가 없고, 또 두려워할 만한 군사도 없는 줄을 알아서,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한 것입니다. 아! 이러한데도 군률의 기강을 고치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겠고, 세월이 흘러가도 전에 하던 그대로 장수된 자는 싸우려 하지 않고, 군사된 자는 반드시 도망하기로 능사(能事)를 삼아서 원수가 매양 여러 장수의 병영에 군사를 첨가시켜 주어도 도망하는 자가 5분의 4는 되고, 여러 장수는 헛명부만 만들고, 장차 온갖 꾀로 병을 핑계하여 편안히 있을 계책만 할 뿐이었고, 하물며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은 왼쪽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기 불편하고,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는 총알에 맞아 중상을 입어 걷지를 못합니다. 이러므로 여러 장수는 기운이 쇠침하고 군사들은 고무될 가망이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오리까? 원하옵건대, 상공 합하는 시급히 아뢰어 군사를 퇴각시키는 장수에게는 반드시 연좌법(連坐法)을 쓰고, 도망하는 군사에게는 처자를 몰수하는 법을 써서, 장졸들로 하여금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힘을 같이하고 세력을 합하여 전진할 줄만 알고 퇴각할 줄 모르게 하여 정병(精兵)으로 빠지고 등록하지 않았다가 수령(守令)이 조만간 발견한 자와 정병의 대신으로 온 자도 역시 중한 율로 다스리고, 또 군령이 반드시 한 군데서 나와서 절제에 문란한 폐단이 없게 하면 군세가 진동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을 수 있고, 소탕하기를 기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듣기로, 계미년(癸未年) 이후에 출신(出身 문ㆍ무과(文武科) 등에 급제한 자로 아직 벼슬을 못한 사람)한 무사는 일국의 정병인데도 싸움터에 달려가기를 싫어하여 모두 한가롭고 수월한 자리를 도모하여 조정에서도 간 곳을 모르고, 비변사에서도 간 곳을 모르며 각 진에서 거느린 정병들도 한 사람도 그럴 만한 자가 없으니, 이는 또한 웬 일입니까? 이럭저럭하는 습성이 되어 엄하고 밝은 정치는 행하지 아니하고, 장수와 재상이 국사에 힘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생(老生)이 망령된 소견을 진술하오니 합하는 반드시 우활(迂闊)하고 긴하지 않다 할 것입니다. 노생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여러 장수의 뒤에 있어 군세를 보고는 통곡을 금할 수 없어 감히 엄한 위엄을 무릅쓰고 진술하는 것이오니 미친 말이라고 배척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나이다. 우리 태조 때에 단천(端川)의 싸움에 몽고의 군사는 70만이요, 우리 군사는 3천이었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대적할 수 없으니 퇴진함만 같지 못하다 하였는데, 휘하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이 죽음을 각오하고 권함을 힘입어 마침내 능히 크게 이겨서 몽고병이 겨우 70기(騎)로 도망해 갔으니, 노생의 오늘 청함이 만분의 일이나 도움이 될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합하는 살피어 채택하여 위에 아뢰어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주-D001] 바람 …… 머물고 :
설담(薛譚)이 진청(秦靑)에게 노래를 배우다가 돌아가는데 진청이 들에서 전송하면서 슬프게 노래를 부르니, 소리가 숲에 진동하고 가던 구름이 멈추었다 하였다. 《列子》
[주-D002] 여계암(呂繼庵) 태화보(太和甫) :
계암은 그의 호요, 태화는 자다. 보(甫)란 것은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남에게 대하여 쓰는 말인데 근세에는 자기에게 아칭(雅稱)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주-D003] 복수병(復讎兵) :
고경명(高敬命)이 의병장(義兵將)으로서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으므로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가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복수병이라 칭하였다.
[주-D004] 계의(繼義) :
최경회가 의병대장으로 진주(晉州)에서 전사하였으므로 그의 형이 의병을 일으켜서 계의병이라 칭하였다.
[주-D005] 창을 베개 삼고 :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잘 때에도 거적자리에 창[戈]을 베개로 삼고 원수와는 같은 하늘 밑에서 살지 아니한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나라와 임금의 원수를 두고 한 말이다.《禮記》
[주-D006] 무딘 칼[鉛刀] :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말에, “무딘 칼[鉛刀]도 한 번 베어 볼 수 없겠는가?” 하였다. 둔하고 무딘 칼도 혹시 한 번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주-D007] 수레 …… 일임하여 :
장수가 출전할 때에 임금이 수레를 친히 밀어주며, “성 안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밖은 네가 알아서 하라.” 하였다. 《史記》
[주-D008] 장순(張巡) :
장순은 허원(許遠)과 함께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반란 때에 수양성(睢陽城)을 굳게 지키다가 순국한 충신이다.
[주-D009] 오묘(五廟) :
조선 국왕의 종묘(宗廟)에는 태조(太祖)와, 고조(高祖)로부터 4대를 모셨다.
[주-D010] 종거(鍾簴) :
종거는 종묘에 설치한 악기(樂器)다. 당 나라 장수 이성(李晟)이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여 수도를 수복한 뒤에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에, “종거가 놀라지 않고 종묘의 모양이 전과 같습니다[鍾簴不驚 廟貌如故].” 하는 구절이 있었다.
[주-D011] 월출(月出)의 의관(衣冠) :
한(漢) 나라 때에 고조(高祖)의 원묘(原廟)에 의관(衣冠)들이 달마다 나가 놀았다[月出遊].
[주-D012] 한식(寒食)의 맥반(麥飯) :
당 나라 주온(朱溫)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자손들이 한식(寒食)날 무덤 앞에 맥반(麥飯)이나 가지고 제사지내기를 바란다.” 하였다.
[주-D013] 답답하게 …… 간절하였던고 :
한 고조(漢高祖)가 파촉(巴蜀)에 있을 때에, “나는 동으로 나가고자 한다. 어찌 답답하게 오래 여기에 있으랴.” 하였다. 여기에서는 의주에서 환도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14] 위의(威儀) :
왕망(王莽)의 말기에 유수(劉秀)가 한(漢) 나라를 광복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하내(河內)로 지나가니 부로들이 반겨 맞으며, “오늘날에 다시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볼 줄을 몰랐다.” 하였다.
[주-D015] 감추었던 …… 기다리랴. :
한 나라 소후(昭侯)가 자기의 입던 헌 바지를 시신에게 간직하라고 명하니, 시신이 말하기를, “입던 바지를 신하에게 주지 않고 간직하라 하니 인색합니다.” 하니, 소후가, “아끼는 것이 아니라 후일 공이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였다.
[주-D016] 촉중(蜀中)의 …… 돌아왔으나 :
당 명황(唐明皇)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촉중(蜀中)으로 파천하였다가 수복한 뒤에 환도하였다.
[주-D017] 회계(會稽)의 …… 맛보노라 :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회계(會稽)에서 오(吳) 나라에게 패하여 항복하는 수치를 당하고 돌아와서 짐승의 쓸개를 자리 옆에 두고 앉으나 누우나 음식 먹을 때나 쓸개를 빨아 맛보며, “네가 회계의 수치를 잊었느냐?” 하고, 국력을 길러서 마침내 원수를 갚았다.
[주-D018] 무군(撫軍) :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에 임금이 출정(出征)하고 태자가 수도를 지키면 그것을 감국(監國)이라 하고, 태자가 출정하면 그것을 무군(撫軍)이라 한다. 이 때에 세자 광행군이 남도로 와서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였다.
[주-D019] 학가(鶴駕) :
주(周) 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이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갔다 하므로 후세에 태자의 행차를 학가(鶴駕)라 한다.
[주-D020] 갓끈을 청하는 데 :
한(漢) 나라 종군(終軍)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신에게 갓끈[纓]을 주시면 남월왕(南越王)의 목을 매어 오겠습니다.” 하였다.
[주-D021] 표요(票姚) :
한(漢) 나라 명장(名將)으로 흉노(匈奴)를 쳐서 공이 있었다.
[주-D022] 조사아(祖士雅) :
진(晋) 나라 조적(祖逖)의 자가 사아(士雅)인데 난세를 당하여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면서 돛대를 치며 맹세하기를, “중원을 숙청하지 못하면 이 강을 두고 맹세한다.” 하였다.
[주-D023] 솥을 들기 어렵고 :
중국에 국보(國寶)인 구정(九鼎)이 제일 무거운데, 항우(項羽)가 힘이 세어 그 솥을 들 만하다 하였다.
[주-D024] 비수(淝水)의 공 :
남북조 시대에 비수(淝水) 싸움에 사현(謝玄)이 8만의 군사로써 진(秦)의 백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주-D025] 전연(澶淵)의 승리 :
송 나라 진종(眞宗)이 거란의 침략군을 전연에서 퇴각시켰다.
[주-D026] 경계에 …… 회복하리 :
월(越) 나라와 오(吳) 나라가 싸울 때에 월 나라 결사대(決死隊)가 적군의 앞에서 세 줄로 서서 제 목에다 칼을 대고 찌르겠다고 소리치며 적군들이 구경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급히 공격하여 이겼다.
[주-D027] 오중 장사(吳中壯士) :
항량(項梁)이 진(秦)에 대한 반란을 일으킬 때에 오중(吳中)의 장사 10여 명이 따르기를 원하였다.
[주-D028] 초승(超乘) :
좌전(左傳)에서 나온 말인데, 군사들이 날래어 말에서 내렸다가는 뛰어서 탔다는 것이다.
[주-D029] 기복(起復) :
부모의 상중에는 나오지 않는 것인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에는 상주 일을 중지하고 나와서 일하는 것이다.
[주-D030] 백성이 …… 생각하고 :
한(漢) 나라 신하 왕망(王莽)이 나라를 빼앗아 신국(新國)이란 국호(國號)로 16년 임금 노릇을 하였는데, 백성들이 다시 한(漢) 나라를 생각하여 각처에서 군사가 일어나 마침내 나라를 회복하였다.
[주-D031] 주관(周官)의 …… 위의 :
중국에 주(周) 나라의 관제(官制)와 예의(禮儀)가 가장 구비되었다 한다.
[주-D032] 영무(靈武)에 무군(撫軍)함은 :
당 나라 숙종(肅宗)을 말한다.
[주-D033] 임안(臨安)에 …… 모방함일세 :
송 나라 고종(高宗)을 말한다.
[주-D034] 익호장군(翼虎將軍) :
범에 날개가 났다는 뜻인데, 임금이 듣고 너무 과하다 하여 초승(超乘)으로 고쳤다.
[주-D035] 공명첩(空名帖) :
국가에 관직을 많이 팔아 먹기 위하여 아무 관직을 임명하는 첩(帖)에 사람의 성명을 기입하지 않고 비워 둔 채로 사방으로 나누어 보내어 값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 성명을 기입하여 임명한 것을 말한다.
[주-D036] 전단(田單)이 …… 회복한 것 :
전국 시대에 연(燕)이 제(齊)를 쳐서 70성이 모두 함락되었는데 전단(田單)이 즉묵성(卽墨城)을 지켜서 마침내 연 나라 군사를 부수고 나라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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