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명사초청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 일시 : 2009년 3월 5일(목) 14:00
❒ 장소 : 안동시민회관
❒ 강사 : 유안진(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주제 : 경험이 천재보다 낫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선지자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는데, 저는 선지자는 아닌가 봅니다. 고향에서 제가 이렇게 환대를 받으니까 너무 민망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고향에 오니깐 역시 푸근하고 참 좋습니다. 오늘 서울에서 출발할 때 날씨가 추울 줄 알았는데 따뜻해져서, 안동이 이렇게 따뜻한 적이 없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는 땅이 딱딱 갈라질 정도로 추웠고 3월이나 이런 때 학교 개학해서 가면 손등과 발등이 다 터서 갈라져 피가 나고 그랬습니다. 세월이 참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안동에는 지금도 좋은 시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여기와 계시는 지례예술촌 촌장이신 김원길 시인, 이동백 시인, 안상학 시인, 김명자 시인, 이희발 시인, 한경희 국문학박사, 이런 분들이 있고 독립운동사 전공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김희곤 교수님, 임재해 교수님 이런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시는 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같이 살고 계시는 그분들한테서 더 좋은 말씀이 나올 것 같은데 제가 떠나 사는 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제가 이 강연요청을 받았을 때는 주로 시에 대해서 강연요청을 받고 많이 돌아다니니깐 저는 그것인줄 알고 주제를 ‘삶속의 시 시속의 삶’이란 제목으로 드렸는데 직접 통화를 해보니 주제가 맞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목을 ‘경험이 천재보다 낫다’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경험이 천재보다 낫다. 제가 참 건강한데 어제밤에 고향에 간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와서 억지로 자려고 도넛을 두개 먹고 잤더니 그게 속 탈이 나서 오는 도중에 아주 나빴습니다. 그래서 목소리가 가버렸어요, 본래 이쁘지 않은 목소리지만 가버렸습니다. 제가 자랑은 절대로 아니고 정년 퇴임하고 백수로 노니깐 여기저기서 시간 여유가 많다고 해서 강의를 와서 주절 주절거려 달라고 요청을 해서 제가 가는데 그중에 한곳이 지난 가을에 갔었던 마산입니다. 제가 마산에 잠깐 살았어요. 한 일년 반 정도 교직에 있었는데 거기 분들이 상당히 저를 좋게 보셔서 무슨 일만 있으면 저를 부르세요. 오히려 안동보다 더 자주 가는 곳이 마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마산시장님께서 외국에 나가 보시더니 마산시를 관광명소로 만들어서 살리려고 하는데, 그래서 시 제언도 들어오고 시를 다른데 홍보를 하고 국내적으로 홍보하고 국제적으로 알려서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려고 하는데 우리시가 뭔가 있어야겠다.
그래서 마산을 詩의 도시로 만들자 이런 생각을 하셨대요. 그 옆에 충무에서는 유치환 선생의 깃발축제가 해마다 개최되고 있습니다. 유치환 선생의 시에 깃발이라는 시가 있죠? 누구누구의 노스텔지아의 손수건이냐 뭐 이런 시구절의 시가 있습니다. 근데 깃발축제가 있고 이쪽 옆에 창원에 가면 우리의 애국가라고 할만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이원수 선생의 고향인 마산 창원이 바로 붙어 있어요, 그리고 진해에서는 김달진 축제라고 해서 김달진 이 분이 시인인데 이 시인의 축제가 아주 대대적으로 진해시장이 재원을 대고 상금도 3천만원짜리도 있고 그래요. 이 진해가 군항이다 보니깐 외국 배들도 많고 그래서 수입원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근데 마산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예요.
마산시장님이 고생하셔서 머리를 짜내다가 내가 국내에서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외국의 사례를 좀 찾아 봐야겠고 가보니 아무것도 없는 아주 조그만 마을에 이름 없는 시인이 살다 갔다고 해서 거기에 관광객들이 버스로 줄을 서며 찾아오고, 똑같은 볼펜도 시인 이름 넣어서 팔아서 먹고 살더란 거예요. 근데 마산은 이게 뭐냐? 공단도 없고 뭐도 없고...
바다는 오염되고 이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를 짜내기를 詩의 도시를 만들면 마산이 좀 잘 살지 않느냐! 왜냐하면 마산 출신 시인이 여러분 계신데 그중에 하나가 유안진이라는 거예요, 사실 저는 마산 출신이 아닌데 마산에 짧게 살았던 게 인연이 되어서 저를 불러서 얘기를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마산 출신의 좋은 시인들이 계시지 않느냐? 생존한 분들도 계시고 돌아가신 분들이 사후에 평가가 그게 진짜 평가인데 이은상 선생이 계시다.
이은상 선생은 어떤 부류에서는 만주에서 친일행위를 했다고 얘기를 해서 그걸 알아봤더니 친일은 아니었는데 친구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조선에서 살지 못하고 만주에서 살게 되어서 해방 후 친구가 죽고 나서 다시 조선에 들어와서 살면서 시조를 쓰고 사셨다고 해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은상 시인의 시조에 ‘가고파’라는 시조가 있죠? 마산 앞바다를 보면서 ‘내 고향 남쪽 바다 ~ 그 파란 물...’ 이라는 노래화 된 시조가 있습니다. 마산 뒤에는 무학산이 있는데 그 산에 올라서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보니 산천은 의구한데 옛 시인의 허사로고...’ 또, 청년 때 폐병에 걸려서 부모님이 바닷가 섬에서 요양을 시켰는데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던지 그것을 시조로 썼는데 그 시조도 노래화 되었고, 시조시인 중에서 노래화 된 시조가 가장 많은 시인이 이은상 선생의 시에요.
그래서 제가 시장 사모님께 그랬어요, 마산과 시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마산이란 곳은 시와 연결이 되지 않지만 마산 출신 시인은 참 많다. 그래서 마산역을 하지 말고 作故 시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분이 이은상 선생이다. 그래서 마산역 이름을 ‘가고파’라고 하면 어떠냐?
그랬더니 모두들 너무 좋아하시고 시장 사모님께서 계시다가 ‘시의 도시 마산’보다 ‘시의 도시 가고파‘라고 하자. 가고파역이 어디냐고 하면 잘 모르니깐 가고파역(마산)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나?
제가 목포에 초청받아서 특강을 한적이 있는데 목포 갈 때 완행 기차를 타고 내리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나와요. 가요인데도 너무 너무 좋아요. 그 간들어진 목소리로 목포의 눈물을 애절하게 불러요. 마산에 가면 버스로 내리던지 기차로 내리던지 이은상 선생의 내 고향 남쪽바다~ 노래가 나오면 정말 마산의 이름보다 가고파역이라는 이름이 너무너무 잘 어울리고 마산하면 詩의 도시 같다. 마산 앞바다가 많이 오염되었는데 그걸 국비로 청소하고 詩의 도시로 키워줄 것이다고 추켜드렸어요. 이은상 선생과 저는 만난적도 없지만 마산에서 학생을 가리켰던 인연 때문에 그랬더니..그 이튿날 밤 2시쯤 전화가 오기를 마산 이름을 가고파로 바꾸기로 했데요.
너무너무 좋다고 전화가 왔어요. 이은상 선생의 노래는 작곡이 된 노래가 여러 곡 이어서 그 노래를 계속해서 버스터미널에서나 기차역에서 들려줘도 너무 좋다는 거예요. ‘그것이 후배들에게도 희망을 줘서 나중에 노벨문학상이 마산에서 나올 것이다;’ 라고 칭찬을 해줬더니 그 밤에 전화가 온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너무너무 좋아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런데 양주는 그곳에서 태어난 김삿갓 시인을 마산의 이은상 시인처럼 이야기 해줬더니 2~3년이 지났는데도 마산처럼 기차역을 바꾼다고 하지 않더라고요! 통영은 깃발축제를 하고 진해에서는 김달진 축제를 하듯이 마산에서는 이제 가고파 축제를 크게 해서 성공하라고 말씀드렸어요.
안동을 오면서 제가 그랬어요. 안동이 뭐로 먹고 살 것인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근엄한 양반의 이미지를 안동이 벗어날 수 는 없습니다. 그걸 벗기면 안동은 또 안동이 아니죠?
고려조 때 왕건에게 삼태사가 공을 세운 후 안동 인근 주변 청주, 청송, 영양, 영주 등 이 안동문화권인데 이 안동을 뭘 해서 관광객이 많이 찾게 할 것인가? 서울은 가지 않더라도 안동은 꼭 가는 곳으로 만들면 좋겠다. 그런 좋은 방법이 없을 까 생각했는데 육사 선생이 계셨어요! 육사선생은 여순 감옥에서 옥사를 하신 애국시인이신데 이분을 어떻게 잘 활용해서 안동이 먹고 살고 경북이 먹고 살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내시면 어떨까 제의해 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환대를 받으니 부끄럽습니다.
제 고향은 임동면 박실이란 곳인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지금 쯤 되면 곡식이 없어서 나물죽을 먹고 쓴 쑥을 가지고 죽을 써서 먹고 살았어요. 살다 살다 못사니깐 외숙부께서 대전 와서 뭐라도 하면 먹고 살지 않겠느냐 해서 대전으로 갔습니다.
어머니 팔자가 그런지 아들 셋은 낳자마자 다 죽고 딸만 셋이 남았어요. 그래서 두 딸을 데리고 대전으로 가서도 아들은 못 낫고 막내딸만 나아서 딸 셋이 자랐는데, 이건 눈에 가시예요. 여기 안동 분들 딸 우습게 여기지 마세요. 제가 더 잘나야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는데 사실 전 이런 얘기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만, 너무 너무 딸이라고 구박을 받아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오기로 뭔가를 해야만 했어요.
어느 누구도 저처럼 구박받는 딸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남자로 태어나지 누가 여자로 태어나고 싶겠어요. 그래서 내가 이런 현실을 벗어나려면 대학가는 방법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울분을 삭히려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게 되었어요.
시골 살다 도시로 가니깐 기초가 없어서 공부를 잘 하지 못하니깐 그냥 혼자 외우는 것만 달달 외워서 성적을 높여서 대학을 들어갑니다. 대학도 등록금이 없는 사범대학을 들어가게 되었어요. 들어갔더니 집에 갈 때는 집에 가는 여비를 학교에서 주더라구요. 그것을 가지고 제가 스커트와 브라우스를 해 입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4년 공부를 하고 마산에 직장을 구해서 중고등학교 선생을 하는데 힘이 드니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대학교수가 되려고 유학을 가야하는데 유학시험을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겨우 붙어서 유학을 갔다 돌아오니깐 이제 밥이 생기는 거예요. 점심이 두 그릇씩 생기는 거예요. 여자가 외국 학위 받은 게 귀했으니깐 여기저기서 오라고 하고 굴러먹다가 보니 어떻게 서울대학교 까지 왔습니다.
제가 좀더 잘 났더라면 안동이라는 고향을 빛낼만한 인물이 되서 안동이 유안진 하나만 팔아서 먹고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후대를 잘 키운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를 잘 키울 것인가? 그것이 안동의 희망이예요. 양주에 김삿갓을 알리고 마산에 가고파의 이은상 시인을 소개하면 아이들이 자기 고향에 훌륭한 인물이 있다고 자랑스러워하며, 훌륭한 분들의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탈수 있도록 야심을 키워줘야 합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공부를 안 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기간을 거친다는 것이 참 좋은 일이예요. 어렵고 서럽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기간을 거친다는 것이 사람의 능력을 개발해주는 기간이 아닌가 합니다.
저희 집이 참 못 살았어요.
고조부가 진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고조부의 자제분이 두 분이었는데 증조부께서 을미사변 때 일본낭인들에 의해 우리 왕후와 궁녀들이 윤간을 당하고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한 사건에 분통이 터져서 젊은 선비들이 들고 일어나서 항의를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간 뒤 돌아와서 젊은 나이인 스물여섯에 돌아가셨어요.
후손들이 부족해서 독립운동을 한 조상님을 독립유공자로 올려드리지도 못했어요. 제가 유학가서 미국 박사를 취득해서 오니깐 어른들이 이제 저를 인정해 주시는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제가 딸이라고 한번도 상의를 하신 적인 없는데 공부를 잘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랑스러워 하셨던 것 같아요.
할아버님이 제가 시를 쓴다고 하니깐 뭐라고 하시냐면… “저녁에 죽을 먹고 아침까지 자는데 요강 몇 번 비우고 나면 배가 꺼지잖아요. 그땐 뭐 먹을 것이 없었으니깐, ‘냉수 한 그릇 떠오느라’ 그래요. 제가 물을 한 그릇을 떠가니깐 할아버지가 ‘거기 앉아라’ 그래요. 무릎을 꿇고 않으니깐 이야기를 하세요.
“두 소년이 훈장에게 글을 배우러 갔는데 한 소년은 부잣집 아들이고 다른 소년은 과부의 외아들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과부의 외아들이다 말씀하시면 그 얘기가 길어지는 걸 알아요. 할아버지가 과부의 외아들이거든요. 그래서 당신이 과부의 외아들이기 때문에 과부의 외아들 성공사례는 잘 아시잖아요. 한 훈장에게 두 소년이 글을 배우는데 서리아침에 훈장댁에 글을 배우러 갔는데 훈장이 소년에게 뭘 얘기를 하냐고 하면 서리상(霜)자를 주고 글을 지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부잣집 외아들이 뭐라고 시를 지었느냐 하면
서리오고 눈이 내리니
둥지가 따뜻한 새는
알을 까서 새끼를 친다.
가난한집 과부의 외아들을 보고 너는 하고 물으니?
서리오고 눈이 내리니
집이 없는 호랑이는 눈 덮인 산에서
백수의 왕이 될 기량을 키운다.
호랑이는 자기가 잘 수 있는 굴을 차지하기 위해 고생을 하면서 백수의 왕이 될 기량을 키운다하고 이야기를 하니 훈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는 거예요.
저는 속으로 할아버지 당신이 과부집 외아들이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할아버지께 부잣집 외아들도 시를 잘 짓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께서 부잣집 아들의 시는 이치에 맞지가 않는다. 시에도 이론이 있습니다. 이치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서리오고 눈이 내리면 새들이 알을 까지 않아요. 언제 알을 깝니까? 새끼를 키우기 쉬운 봄에 알을 까요? 풀씨와 벌레를 잡을 수 있는 따뜻한 때 새끼를 키우지 서리오고 눈오는 추운때 어떻게 새끼를 키우냐?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시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 부잣집 아들은 집에서 따뜻하게 사니깐 추운 현실을 모르니깐 그런 시를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난한집 과부의 외아들의 詩는 ‘초년 고생은 금을 주고 사서라도 한다’. 그것은 철칙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도 리어카 한대 없던 사람이 리어가 한대를 가지는 성공을 이루자면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예요. 고생이란 참 좋은 것입니다. 고생할 때는 참 싫고 혐오스럽지만, 고생하고 나면 좋다는 거예요. 저는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근데 제가 시를 쓰면서 내내 우리 할아버님이 그렇게 이야기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는 겁니다. 그래서 외국의 락강시인, 보들래르의 시 이론을 이야기 할 때도 우리 할아버지의 이치에 맞는 시가 좋은 시라는 글 말씀이 항상 생각나요. 시가 이치에 맞아야 해요, 이치에 맞지 않은 詩가 너무 많아요. ‘발끝만 쳐다보며 한없이 걸었다.’ 젊은 시인들이 그래요. 발끝은 내려보지 쳐다보지 않잖아요?
또 뭐라고 썼더라!
“시디신 소태맛 같은…” 그래요,
소태란 쓰디 쓴맛이지 신맛이 아니예요. 소태나무 잎은 써서 몇 개만 소죽솥에 들어가면 소가 그걸 안 먹어요. 뭘 모르고 이치에 맞지 않는 시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때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 해주신 서리상(霜)자를 가지고 지은 두 소년의 詩가 생각나는데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자는 것은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우리가 IMF라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는데 또 세계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는데 그동안 너무 흥청거렸어요. 그래서 이 어려운 위기가 온게 아닌가! 이 어려운 위기를 잘 극복하고 우리가 성찰을 하고나면 다시 좋아질거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이 좋은 때만 생각하면 그 사람을 망칩니다.
특히 어려서의 어려운 시기는 참 좋다는 겁니다. “어려서 고생은 금을 주고 사서라도 한다.” 제가 어려서 어렵지 않았으면 미국 박사를 따고 이 자리에 설 수 가 있었겠습니까? 좋은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좋은 집 며느리로 가서 밤새도록 손에 물마를 날 없이 제사 음식 장만하느라 고생했겠죠?
'죽은 귀신 섬기느라 산 자손들 다 잡는다'는 어머니의 말씀 생각나고 특히 그런 곳이 안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려면 어린 청소년을 잘 키워야 합니다.
터키에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주 가난한 청년이 졸업이 가까워졌어요. 졸업을 하고나면 자기가 상급학교를 갈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자기가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도 현재 수준 밖에 안되요. 취직을 하려고 해도 아무도 와달라는 곳도 없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일주일을 고민한 후에 묘한 방법을 알아내고 옷을 말끔하게 입고 인상을 좋게 해서 그 도시에서 제일 큰 회사로 들어갔더니 수의가 못 들어가게 막아요. 그래서 사장님아 불러서 간다고 속이고 회사에 들어가서 회사의 상무를 만나려니 비서가 또 못 들어가게 해서 “꼭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다가 상무가 듣고는 청년을 들어오라고 해서 만날 수 있었는데 젊은 청년이 상무님께 하는 말이 ‘저와 5분만 시간을 내주세요. 하고 나를 이 회사에 두 달간만 취직을 시켜주세요. 두 달간은 무료입니다.” 상무가 자네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일을 하라고 허락을 합니다. 이 청년이 아침에는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은 남들보다 늦게 퇴근하며 인사도 깍듯이 하고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니깐 두 달 후 상무가 열심히 하는 이 청년을 채용하였는데 청년의 조건이 “첫날 일이 끝나면 1,000원 둘째날은 2,000원 씩 매일 갑절로 주세요”하고 일을 합니다. 한달 후 급여를 엄청나게 받게 된 이 청년은 화를 내는 상무에게 자신의 사업적인 두뇌와 치밀함을 인정해 주시면 된다고 하고 그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터키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 나라 교과서에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보면 ‘창의성, 창의성’ 하잖아요. 詩가 왜 중요하냐면 서울 기업에서 시를 읽혀요. 저도 몇 군데 가서 특강을 하고 서울대학교 최고 경영자과정에서도 특강을 하는데...시는 아무것도 아닌데 엉뚱하게 창의성을 연결시킨 거예요.
제가 차를 타고 안동에 오느라 몸이 안 좋아서 목소리가 이상하잖아요. 가끔 내가 감기가 들었는데 마이크가 먼저 감기가 근게 아닌가 느낄때가 있어요. 제 시를 읽은 분은 알겠지만 마이크가 감기 들어서 찍찍 하는게 있어요. 내가 입으로 키스도 안했는데 마이크로 감기가 옮아갔다고 시를 쓴게 있어요. 사실 감기와 마이크는 아무 관계가 없는데, 시의 창의성으로 두개가 연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업과 외국에서는 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시인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 많이 되는데 그것도 가난의 덕을 봅니다.
어려우니깐 많은 경험을 하고 창의성이 길러집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떡 장사를 할 때 그곳을 돌아서 지나가본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시인이 많아요. 그런 경험을 해본사람들의 생각이 훨씬 깊고 그런 생각이 바로 경험입니다. “경험이 천재보다 낫다”고 합니다.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해보거나 고민을 해본 것, 생각을 해본 상상력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실제적으로 몸으로 해본 경험을 직접경험이라고 하고 영화나 책으로 본 경험을 간접경험이라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해본 상상력을 제3의 경험이라고 합니다.
창의성은 제3의 경험이예요.
미국의 애플사를 세운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도 학교를 다니다 중태 했어요.
그 사람이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에 가서 학생들에게 ‘좀 어리석어지라!’는 말을 했어요. 어리석어져서 남이 안하는 생각을 꿈꿔 보라는 거예요.
다음에 MS사의 빌 게이츠도 학교를 중태하고 남이 안한 상상력의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예요.
지금부터 3~4백년 전 쯤 임진왜란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왔잖아요. 그때 승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휴정이라는 서산대사란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제자중에 사명대사란 분이 있어요. 이분은 정유재란때 승병을 일으켜 왜군을 쳐부수는데 많은 공로를 세운 분입니다.
이 두 분이 스승과 제자인데 가을에 길을 떠났어요. 너무너무 심심하고 다리도 아프고 하니깐
사명대사가 서산대사보고
‘선생님 저 풀밭에 소가 풀을 잔뜩 먹고 누어있네요. 한 마리는 검정소가 다른 한 마리는 누런소인데 풀을 많이 먹어서 배가 불룩하게 들판에 누워 있네요.’
사명대사가 ‘선생님 두 마리 소중에서 어떤 소가 먼저 일어날까요?’
그러니 서산대사가
‘사명당 자네가 미리 맞쳐 보게...’
사명대사가 주역의 점괘를 뽑아보니 불화(火)자가 나왔어요.
사명대사가 ‘스승님 누런소가 먼저 일어날 겁니다’ 그러자
서산대사께서 ‘아닐걸!’ 하고 말하자마자 검정소가 먼저 일어나고 누런소가 따라서 일어났어요.
사명당이 선생님 주역에 효는 불화(火)자인데 어떻게 검정소가 먼저 일어납니까?
서산대사 말씀이 ‘사명당 자네는 불도 안 피워보셨는가?’
시골에서 추우면 애들이 불을 피우잖아요. 서리해서 먹고...불을 피우면 검정 연기가 펑 터지면서 붉은 불꽃이 일어나는 법일세. 그러니 검정소가 벌떡 일어나고 누런소가 일어나는 게지.
우리가 점쟁이에게 사주를 보는데 그 사람들 모두 거짓말 이예요. 그 사람들 우리보다 경험이 많이 없잖아요. 글자만 보고 해석을 하는거예요. 글자만 보고 해석하니 누런소가 먼저 일어날 줄 아는데 실제 경험을 해본 사람은 검정연기가 먼저 나는걸 알지요.
두 사람이 하루 종일 걸어서 어느 산속 오두막 불자의 집에 들어갔어요.
오두막에 사는 주인부부는 저녁을 먹고 물을 마시고 자려고 하는데 두 분이 들이 닥치는 거예요.
‘대사 두 분이 어찌 늦가을 서리밤에 오셨습니까?’ 라고 묻자,
‘우리가 밖에서 노숙을 할 수 없으니 하룻밤 신세를 져야 겠네!’ 주인이 불을 켜고 보니 하루 종일 굶으며 걸어온 초췌한 몰골의 두 대사를 보니
‘두 대사님께서 저녁 공양을 못하셨죠?’ 하고 물으니 ‘저녁은 무슨 저녁 냉수나 한잔 주면 마시고 자겠네.’
이 주인 불자가 아내에게 저녁공양을 준비하라고 하자 아내가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데 뭘로 공양을 준비하느냐? 하고 묻자
뭐든지 찾아서 저녁 공양을 하라고 해, 부인이 찾다가 밀가루 한 사발을 찾아 가지고 와서 부인이 밀가루로 국수를 해면 두 그릇은 되겠다고 말을 하자 빨리 준비해서 나오라고 주인이 말을 했어요.
사명당이 하도 배가 고프니 ‘선생님 오늘 저녁공양으로 뭐가 나올까요?’ 하고 묻자 서산대사가 ‘자네가 먼저 말을 해보게’ 하자.
사명당이 주역에서 효를 뽑아보니 뱀사(巳)자가 나오자 ‘스승님 오늘 저녁은 국수가 나오나 봅니다.’하자
서산대사가 ‘나와봐야 알지!’
그때 주인이 들어가면서 ‘이번에는 선생님이 지셨습니다. 우리 내자가 반찬이 없다고 국수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서산대사가 다시한번 ‘나와봐야 알지!’ 하는겁니다.
잠시 뒤 부인이 상을 들고 나오는데 보니 국수가 아니고 수제비가 나왔어요.
그러자 사명당이 ‘선생님 주역은 뱀사(巳)자인데 어떻게 국수가 아니고 수제비가 나왔습니까?’고 하자,
‘사명당 지금 계절이 언제인가?’ 하고 묻자
‘늦 가을이지요’
‘사명당 늦가을에 뱀 어떻게 되는가?’ 하고 물으니
사명당이 ‘땅속에 들어가 자지요’하고 답을 한다.
서산대사가 ‘그럼 잘 쭉 펴고 자는가? 아니면 따배기를 뱅뱅 틀고 자는가?’ 하는 거예요.
국수가 따배기를 트니깐 수제비가 된다 이거죠.
주인이 난감해서 당신은 국수를 한다고 해놓고 왜 수제비를 만들었나 하고 다그치자 부인이 제가 반죽을 하다가 물을 많이 넣어서 국수를 밀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수제비를 했다고 하니,
서산대사가 말하기를 그러게 옛날부터 ‘경험이 천재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늦가을에 뱀사(巳)니깐 뱀이 따배기를 틀고 있네!
경험이 천재보다 나은 거예요. 제가 지금 계속해서 경험을 강조하는 거예요.
경험은 직접경험, 간접경험,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제3의 경험 이 세가지 경험이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옛날에 컴퓨터가 있었나요? 없었지요? 옛날에는 10년간만 공부를 하면 젊은 청년들도 어른들 앞에 가서 묻고 대소사를 고하고 그랬어요. 어른으로 인정을 한거죠.
요즘에는 도리어 어른들이 하나도 몰라서 아이들을 불러서 다 물어봐요. 설명서를 읽어도 이해도 안 되고...
옛날 같으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물어야하는데 요즘은 그게 아니예요.
요즘은 어른이 초등학생한테 물어봐야 해요.
시대가 이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이라는 건 우리 후대가 잘 자라야 한다는 거예요.
옛날 서산대사 시절에도 경험이 중요한데 그 중에 상상력이라는 경험이 제일 중요해요. 프로이드는 생산성이라든지 창의성은 어렸을 때 아이들이 기저귀 가는 시기인 1살 반이나 2살 반쯤 대소변을 가리는 시기에 자기 힘으로 조절을 할 수 있는 대소변 훈련을 잘 시키면 창의성과 생산성이 어려서부터 키워진다고 프로이드가 이야기 했어요.
요즘 젊은 엄마들 대소변 훈련을 어떻게 시키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들 대소변 훈련을 너무 강압적으로 시키지는 마세요. 옛날에는 ‘아이를 하나 키우자면 똥가루 서말은 먹어야 한다고 했어요.’
생산(창의)적인 아이들은 이론도 만들고 글도 쓰고, 남과 다른 학문도 만들고, 예술 작품도 놀라운 걸 만들고, 라면도 기막힌 걸 만들고 ...모든 것이 이 대소변 훈련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엄마, 아빠의 아이키우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젊어서의 3개월은 늙어서 3년보다 중요해요.
제가 미국가서 유학한 것이 35년 전인데 공부할 때 체력이 감당을 못해요. 일년을 가야 고기 구경을 못해요. 하룻밤만 새우고 공부하면 몸이 감당을 못하는데 외국 애들은 수없이 밤을 새워도 멀쩡해요. 그 힘이 어디서 나느냐 면 버터먹고 치즈 먹어서 그래요. 거기서 공부할 때는 제가 자동차를 운전할지는 꿈도 못 꿨어요.
창의성 우리의 미래가 어떤 것으로 올지 몰라요! 50년 후는 우리가 생각하는 50년 후는 어떻게 바뀌고 변화할지 몰라요. 그런 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살아남고 안동이 살아남기 위해서 안동이 국제적인 도시가 되고 세계인이 몰려오는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가 고민해야 합니다.
시에서 돈을 주지 않더라도 젊은 엄마들이 동아리를 만들어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저에게 ‘여자는 바느질을 잘해야 손에 물을 안 묻히고 천한 일을 하지 않고 잘 살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바느질을 많이 강조를 하셨는데 지금 제가 바느질을 안하고 잘 살잖아요. 지금입고 있는 4만원 주고 산 옷을 제가 만들면 40만원이 들어도 못 만들어요.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그 시대에 대비해가지고 50년 후 100년 후 300년 후 ...
그 시대에 대비해서 아이들을 키워야해요.
아이들에게도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해줘야 해요.
옛날에 외사촌동생에게 어른들이 만화만 본다고 야단을 쳤는데 요즘은 대학에 만화 학과가 있죠? 우리나라가 만화를 게임에 접목해서 외국에 수출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려요. 이인화라고 제 조카벌인데 무실에 살았어요.류기룡 교수란 분이 대구에서 독학을 해서 교수가 되었는데 그분의 아들이 소설「영원한 제국」을 쓴 이인화라고 이화여대 교수예요.
이인화 교수가 문화콘텐츠와 접목해서 게임을 개발하는데 엄청 돈을 많이 벌었어요. 다음에 이인화 교수를 한번 불러서 특강 하세요. 이인화교수가 심청전, 흥부전, 놀부전 같은 고전을 책으로 읽으라면 아이들이 안 읽은데 그 내용을 게임을 만들면 아이들이 다 읽는 다는 거예요.
앞으로의 시대는 어떤게 올지 몰라요.
우리아이들에게 자꾸 이런걸 해라, 저런걸 해라 말하기 보다 상상력을 키워 주세요.
중국 무술이라는게 모두 상상력 아닙니까? 사람이 어떻게 날라 다닐 수 있나요? 모든게 상상력이예요.
저번에 신문에 봤더니 ‘영생을 하는 법을 가리키는 대학’이 나왔는데 그 대학을 만든 사람이 하루에 150알의 약을 먹는 다고 하는데 그 대학에 미국의 MS사를 비롯해서 돈을 막 가져다 주는 거예요. 우리나라 같으면 돈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참 고쳐야 할 것이 많아요. 퇴계, 학봉, 서애 선생들은 그분들의 시대로 유명하고 업적이 있고, 그분 들의 후손들은 그 분들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겨서 안동을 빛내야 해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 성경 창세기 6장에 인간이 120세까지 살수 있다고 해요.
예전에 제 옆방에 있던 선생님이 노년학을 전공했는데 예전에는 학문으로 인정도 못 받았는데 요즘은 노년학이 유망한 학문이예요. 노년학 하는 분의 이야기가 머리카락이 한번 나서 5년을 사는데 이 머리카락이 일생동안 25번 태어나는데 그걸 합하면 125년을 살수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그렇게 산다고 합니다.
거기에 대비해서 어떻게 할것인가? 이런 것이 상상력인데 상상력은 엉뚱함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다 가능하게 되는게 상상력이예요.
여기 계신 분들 다 500살까지 사세요. 이렇게 고생하고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그렇게 살수 있도록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해요. 그런 후손들이 안동에서 5명만 나오면 안동이 세계적인 도시가 될 거예요. 공갈 치는게 아니고 제 평소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좀 늙지 않으려고 아침마다 에어로빅도 하고 있어요. 병원에서 주는 약보다 운동하고 배우는 게 낫습니다. 걷는 운동이 최고 좋아요. 안동이 장수도시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관광상품이 됩니다. 뭔가로 특화를 해야 되는 겁니다.
많이 걷고 에어로빅, 밸리댄스 등 뭘 하시든 간에 땀을 흘려서 건강하시고 안동을 국제적인 도시로 만들고 정말 양반의 자손들이 다르더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제 고향이 안동이라는게 자랑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절주절 너무 많이 떠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