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C.S. 루이스 <천국과 지옥의 이혼>
교과특강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3년 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다시 해도 좋겠다는 제안을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론 성경과 선생님들 모셔놓고, 아이들과 신앙 Q&A를 주고 받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조금 벅찰 수 있겠지만,<천국과 지옥의 이혼>을 연극으로 함께 하면 아이들이 몸으로 기독교교육을 배우면서 동시에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이들 중 함께하고 싶다고 손을 든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연극으로 결정했습니다.
신학대학원, 신학교수님을 통해 들은 <천국과 지옥>은 건조한 이론 수준에 애매하고 어려운 말이거나 아예 <천국과 지옥>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주관적인 체험과 경험을 담은 뜨거운 간증 책들이 흘러나왔고, 우리가 생각하거나 접하는 <천국과 지옥>은 거의 후자입니다. 이 공연을 통해 꿈의학교 공동체가 첫째, <천국과지옥>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둘째, 불신-지옥, 믿음-천국 단편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를, 셋째, <천국과 지옥>은 죽고 난 다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여기에서도 이루어 지는 곳임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천국은 실재합니다. 지옥도 실재하구요. 다만 저와 우리 부모님이 알고 있는 천국은 온전하지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루이스도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천국과 지옥을 소개합니다. 우리 모두는 일부의 진리만 담고 있을 뿐입니다. 누구도 그곳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매일 천국과 지옥을 선택하면서 그곳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어져 갑니다.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무조건 다 멸망하지 않습니다. 단지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 때 올바른 길로 돌아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사실 마지막 대사는,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으니 열고 나오세요.'가 아니라 '그렇게 자신 안에만 갇혀 있더니 결국 스스로 문을 잠그고 말았군' 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지옥은 최종 상태입니다. 마음의 감옥 정도가 아닙니다. 그 지옥에 오기까지 수많은 선택과 결정,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죄는 최후까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합니다. 우리 인생 최후가 오기 전, 지옥의 문은 안쪽에 잠겨 있으니, 그 문을 열고 나갑시다.
#2 문화 속에 작동하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라.
in-formation(정보전달)을 통해 성화를 이룰 수 있다는 관점이 근대교육에 틀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in-formation)만으로는 잘못 형성(de-formation)된 우리의 생각을 바꿀수는 없습니다. 잘못 형성(de-formation)된 관점 사고를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마음, 습관(몸), 문화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어떻게 성화를 이루느냐에 답을 한다면, 우리는 욕망하고, 예배하는 존재이고, 우리가 무엇을 예배하느냐에 따라 성화되어 간다고 답하겠습니다.
우리는 주일에만 예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평일에도 무언가를 예배하고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쇼핑이 되었든, 아이폰이 되었든, 드라마, 운동이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하고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교육의 핵심은 무엇을 아느냐 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의 싸움입니다.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성화되어 간다는 말은 그분의 생각을 따라 가는 것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갈망하며 우리의 마음의 습관을 재조정(re-new-ing) 해 가는 과정입니다.
매일 큐티의 적용(몸)과 실천(습관)을 위해 고민하시고 생각하시는 아이님, 해피맨님, 화목한님께 감사드립니다. 실천적이고, 습관적이면서도 마음에 호소하는 파토스를 통해 아이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형성(formation)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보만 아는 아이가 아니라, 몸에 마음에 형성된(formation)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인격적인 소통, 잔소리도 계속 하겠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연합하고, 섬기고 나누는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계속해서 보여주도록 애쓰겠습니다.
저에게 잊혀질 수 없고, 지워질 수 없는 사랑을 가르쳐준 친구, 교회성도들, 동료, 가족공동체로 인해 감사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따라할 수 있고, 따라가고 싶은 모방이 되는 삶을 위해 저도 예수님을 더 묵상하고, 우리 어른들의 삶을 모방하겠습니다. 6월부터 묵상하는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바울은 예수를 본받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을 본받고, 북부의 마케도니아와 남부의 아가야 지방의 사람들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본받은 것처럼요.
매일 간식으로 섬겨주시고, 댓글로 소통해주시며 함께 해주시는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 저희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고, 아이들에게 교육되고 있습니다. 교육하는 교사로 제일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는 제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우리 아이들이 저를 사랑하며 함께하고 있다는 그 고백입니다.
#3 너희는 내 심장(영화: 킹콩을 들다)
캠핑 끝나고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를 이번 주에 보여주었습니다. <킹콩을 들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지봉 선생님은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킹콩입니다. 심장이 아픈 것.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 멍이 들었다는 표현 아닐까요? 도태되고, 실패한 인생은 이지봉 선생만이 아닙니다.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편부, 가난한 고아, 왕따, 테니스에서 뒷정리만 하는 아이가 역도부에 지원합니다. 그런 실패한 선생님이 아이를 만나 새로운 사명, 심장이 만들어 집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단어가 헬라어 원문으로 심장,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심장, 너는 내 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장은 무엇을 뜻할까요?
심장은 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네시모에게 바울이 없었다면, 오네시모는 무익한 존재로 끝날 것입니다. 반대로 오네시모가 없으면 바울은 그 힘든 감옥을 온전히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심장과 몸의 관계만큼 스승과 제자는 긴밀한 관계입니다. 양과 목자는 서로가 서로를 살립니다. 교사로 내가 가진 무언가를 준다기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하면서 스승도 삽니다. 영화에서 아이들이 떠난 다음 ,이지봉 선생님은 곧 죽음을 맞이합니다. 스승과 제자는 심장으로, 마음으로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너는 내 심장(몬1:12)이란 또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배운 내용은 심장, 마음에 새겨집니다. 심장에 새긴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 선생님이 떠난 순간에도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이지봉 선생님이 죽고 떠나간 다음에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주인공 박영자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인생의 고비마다 이지봉 선생님의 가르침을 생각합니다.
애들아, 너희들은 내 심장이란다. 너희들은 그런 사실을, 그런 선생님의 마음을 아니?
#4 집중 보다는 관심으로
어제는 한 친구와 점심시간부터 저녁 9시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라는 나태주 시 풀꽃처럼 아이 곁에서 오래 함께 하면서 아이의 새로운 모습을,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모습을 보게됩니다. 떠들고 장난치는 그 순간, 말썽피우는 그 장면만을 보고 아이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보다 통으로 전체적으로, 부모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길 기도합니다.
집중은 내가 온 신경을 다해 하나의 본질에 접근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관심은 기다림과 관찰을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꿈의학교에서 설교준비에 집중하느라 조급함, 불안함으로 주변에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집중을 넘어 관심을, 특별한 목적없이 아이와 함께 하면서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잡담을 더 많이 하고 싶습니다. 앗, 그런데 이번주 수요일 설교 담당이네요. “애들아,이번주 수요예배는 의무참석이다.”
#5 안식
너무 애쓰지 말자. 너무 마음쓰지 말자. 너무 의식하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의 것이다. 저번 주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제 안에 물질에 대한 탐심보다 자아실현에 욕구, 욕심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문에 누구도 원하지 않는 피곤함과 분주함 속에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무를 지나 기쁨을 맞이하기 위해, 아이들과 진정한 교제와 사귐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의도적으로 고독한 시간, 거룩한 시간을 보내며 제 삶을 재충전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를 온전히 안식한다면 세상은 천국과 같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