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신가?_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결정적인 순간
리처드 보컴, 새물결플러스, 2023, 15-17쪽.
서론
점점 더 세속화되어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든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신중하게 다루려면 우리는 “누가 하나님인가?”라는 질문도 함께 던져야 한다. 사람들이 “신”이라는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는 여전히 무척 다양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은 정말로 어떤 종류의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가?”, “어떤 하나님인가?” 또는 “누가 하나님인가?” 성경 시대에 이런 질문은 너무나도 당연하였다. 사실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 “신들” 또는 “신적 존재”라는 단어를 적용할 수 없는 대상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신이 진정한 하나님인가?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으며, 지금도 나는 여전그렇다고 생각한다.
비록 신적 존재라는 개념이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고, 어떤 개념은 다른 개념보다 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는 그런 결정적인 사건과 경험을 더욱더 중요시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계시하셨는지에 주목하면서 “누가 하나님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의 계시가 중요하다. 성경 전체가 무엇에 관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성경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이야기와 그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태초에 이루어진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나타날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성경은 집약적으로 하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며, 광범위하게는 하나님과 이 세상의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포괄적인 이야기 안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계시의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은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그저 단 한번만 서술되지 않고, 성경에서 계속 언급하는 기준점과도 같다. 이것은 전체 이야기를 통해 계속해서 반향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커다란 의미를 지닌 다른 모든 사건처럼 이 사건이 지닌 의미는 단번에 포착할 수도 없고 그 무궁무진한 의미도 다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건을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사건으로 읽어야 하며, 하나님의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정체성을 일러주는 사건으로 읽어야 한다. 이 사건들은 필립스(J. B. Philips)가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나도 작다”라고 한 유명한 말처럼 우리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도전을 주어야 한다.((J. B. Phillips, Your God Is Too Small: A Guide for Believers and Skeptics Alike (New York: Touchstone, 2004), 이 책은 1952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우리가 본서에서 다룰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의 순간은 결코 성경에 나타난 유일한 계시의 순간이 아니며, 다른 계시의 순간들이 포함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고려할 대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시의 순간들이다.
그 계시의 순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창28:10-22), 타오르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사건 (출 3장),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사건(출33:17-34:8), 그리고 마가복음에 기록된 세 가지 결정적인 계시의 사건 (1:9-11; 9:2-8; 15:37-39)이다. 이 모든 경우에 우리가 성서신학적으로 탐구할 영역은 이 계시의 순간보다 훨씬 더 넓지만, 이 계시의 순간들은 우리가 그 지역을 지날 때 우리를 인도할 별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채택한 방법론은 성경을 하나의 정경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성경 텍스트의 배후와 주변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작업은 나의 큰 관심사이며, 다른 곳에서 그 작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고, 또 정경에 들어 있는 텍스트에만 집중한다. 정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증언하는 신성한 글을 하나로 묶은 모음집이다.
나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안에서, 그리고 신구약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 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나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 나타나 있는 다양성을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신학적인 성경 해석은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론은 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지만, 세부적인 주해가 그 핵심이다. 주해는 정경 전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제들을 강조함과 동시에 어떤 특정 본문들을 그 문학적 정황 안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서는 무척 광범위하며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작은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하나님의 은혜로 일부 독자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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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하나님의 “편재”(omnipresence)는 종종 형이상학적 속성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에 관해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므로 그분은 그의 피조물을 지키시고 그들과 항상 함께 계시며,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긴밀하게 관여하신다. 이것이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임재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공간적인 의미에서 온 세상에 만연해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적으로 “그곳에 계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인격적이며 적극적이다. 그분은 모든 순간에 모든 피조물과 함께 존재하기를 원하며 또 그렇게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모든 순간에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이 근본적인 생각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성경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강조하긴 하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으로서의 우리-개인이든 집단이든-와 관계를 맺을 때만 이것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편재”에 대한 성경의 증거로 종종 인용되는 시편 139:7-10도 단순히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는 사실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심지어 우주의 가장 끝자락까지도-하나님은 거기서 그를 만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_1장 하나님의 임재의 계시
이 구절을 요한복음 1:14에 대한 우리의 해설과 함께 상고해보면 우리는 성육신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 1:14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리라는 예언자의 소망은 예수, 곧 새 성막 안에서 성취된 반면, 요한계시록 21:3에는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이야기만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계속 읽어나가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언자는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라고 말한다(21:22). 어떻게 보면 이 성 전체가 성전이다. 왜냐하면 이 성 전체가 하나님이 계셨던 성전 지성소의 완벽한 정육면체(21:16)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성에는 성전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성은 지성소처럼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하나님이 계셨던 특별한 장소 대신에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인 셈이다.
_1장 하나님의 임재의 계시
히브리어 성경 나머지 부분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6,800번 이상 등장한다. 이것이 구약 신학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하나님 이름의 중요한 의미는 이 단어에 담긴 어떤 의미에 있다기보다는 그 이름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한 개인의 이름이 하는 역할이다. 이름은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름은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요약해준다. 하나님의 경우에는 유한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을 모두 다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약할 수도 없고, 확정할 수도 없는 무한한 신비로 남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분을 알고 그와 연관 지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특별한 정체성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이 하나님 이름의 계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알려지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기로 작정하신 그 하나님이 베푸시는 최상의 은혜 행위다.
_2장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부분적으로 예수의 용법을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한 문구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 아마도 히브리어로는 그것이 “주(YHWH)의 나라”였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어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 단어는 아마도 예수가 아람어로 하나님의 이름 대신 “하나님”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이름 대신 “하나님”을 사용한 것이 예수가 “주”를 사용하지 않은 점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단순히 “주” 대신 “하나님”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언급할 때 발견되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그가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사실은 이 점이 예수가 하나님을 지칭하는 방식 가운데 가장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유대인들이 그 당시 하나님을 가끔 “아버지”로 부르긴 했지만, 사실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에 비해 예수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 단어를 훨씬 더 선호했던 것 같다.
_2장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
우리는 구약성경 안에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성품 계시가 어떻게 규범적으로 주어졌으며, 또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고 발전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계시는 예언자들과 시편 저자들이 그 계시를 반추하는 가운데 그 의미에 대한 추가적인 통찰이 주어졌다. 가장 중요한 점은 출애굽기 34장에서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의 관계가 요점인 반면, 다른 본문들에서는 그 문맥이 모든 민족과 심지어 모든 피조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에서 핵심 용어들이 관계적이라는 점을 기억한다. 이 용어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가리킨다. 우리가 예언서와 시편에서 고려한 본문에서 분명해진 것은 이러한 묘사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하심과 특별한 돌보심과 자비를 약속하셨던 언약 백성을 다루심에 있어서뿐 아니라, 그의 백성이 아니거나 아직 아닌 다른 모든 민족을 다루심에 있어서도 규범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은 일관성이 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초점을 맞추는 구약성경 저자들은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라면 이것이 바로 그분이 모든 민족과 모든 피조물을 다루시는 방법일 것이라고 본다.
_3장 하나님의 성품의 계시
하나님의 성품 묘사에 대한 구약성경의 많은 암시처럼 요한은 다섯 가지 성품 중 두 가지를 선택하여 이를 요약했다. 하지만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이란 어구에서 성품 묘사의 마지막 부분-“인자와 신실함이 많은”-의 구조를 따랐다. “신실함”(에메트)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종종 그리스어 성경에서 알레테이아(“진리/진실”)로 번역된다. 신실함은 자신의 말에 진실하다는 것이다. 신실함은 어떤 개인적인 특성으로서 진실을 가리킨다. 요한은 헤세드 곧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카리스 곧 “은혜”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특이한 번역이긴 하나 결코 불가능한 번역은 아니다. 요한은 단순히 헤세드를 번역하기보다는 첫 네 가지 성품, 곧 자비로움, 은혜로움, 노하기를 더디 함, 변함없는 사랑을 모두 요약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이 네 가지 성품은 모두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해당하며, 그것이 “은혜”가 지닌 의미다. 요한은 예수가 그의 인격과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을 나타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듣긴 했어도 보지 못했던 것을 예수가 눈에 보이게 한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
_3장 하나님의 성품의 계시
이 세 이야기는 여러 가지 특징으로 서로 연결된다(본 장 끝의 도표 4.2를 보라). 첫 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마가복음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이 두 경우에서 모두 하나님은 예수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마가복음의 이 두 본문에서만 사용된 표현)로 언급하신다. 이 두 표현은 모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며, 세 번째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 처형 장면을 목격한 백부장이다. 따라서 세 번째 경우에는 차이점이 있지만, 이 세 장면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정체성을 계시한다.
이러한 관찰은 예수의 세례와 변용 사건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세 번째 계시의 순간은 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마가는 또한 첫 번째와 마지막 계시의 순간을 하나로 밀접하게 연결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예수는 세례를 받을 때 환상을 통해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본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표현이다. 성경에서는 종종 하늘이 열릴 때 환상이 나타난다. 사실 마태와 누가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본환상을 묘사하면서 “갈라짐” 대신 “열림”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마 3:16; 눅 3:21). 그러나 마가는 이처럼 하늘이 갈라지는, 눈에 띄게 폭력적인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스키조”(schiz?)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열한 번 사용되고, 마가복음에는 두 번, 즉 여기서 한 번, 그리고 다시 15:38에서 한 번 사용된다. 그는 15:38에서 예수가 죽을 때 성전에서 휘장이 둘로 찢어지는 기상천외한 사건을 묘사하는 데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따라서 이것은 1:10에 대한 의도적인 반향, 즉 이 두 사건 간의 연관성을 어휘적으로 암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_4장 삼위일체의 계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영광"은 무언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언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세가 실제로 보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사고에서는 어떤 사람을 실제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강한 표현력을 지니고 있다. 당신은 누군가의 얼굴을 볼 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는 것이며, 특징적으로 자신을 구름에 감추시는 하나님의 비밀(신비)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우 그분의 얼굴은 눈부실 정도로 영화롭다. 하나님의 얼굴은 신적 존재의 눈부신 광채를 발산한다. 히브리어 성경이 우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보여주었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보면 결코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런 경험은 너무나도 압도적이다. 적어도 이 땅의 삶에서 는 말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를 비추시지만(민6:25), 우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의 요구를 단순히 거절하지 않으신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볼 수 있는 권한이 없지만,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처음 들어본 자신의 이름을 말씀해주시고, 떨기나무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사건을 연상시키는 진술을 그 이름에 덧붙이신다.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일러주시기 전에 ”나는 내 자신이 될 것이다“(출 3:14)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중대한 순간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자유롭게 결정하는 분이시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기로 결정하고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다.
그것은 그때의 일이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은혜 베풀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여기서 (매우 특이한) 문법 구조는 서로 같으며, 말하고자 하는 요점도 비슷하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신다. 그의 자비하심은 통제되거나 조종을 당할 수 없다. 그가 특별히 크신 은혜를 이스라엘에 베푸신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의 자유 의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한 것을 자신의 공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모종의 열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기로 결정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계시적인 만남을 약속받는데, 이것은 구름 속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초월하는 경험이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선하심 - 하나님의 영광이나 찬란함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 - 이 모세에게 지나가도록 하시겠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그 영광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놀라우리
만큼 신인동형론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등을 언급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신인동형론적인 언어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러하듯이 무언가 매우 신비로운 것을 연상시킨다.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이러한 하나님의 현현은 완전히 특이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성경에는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전혀 없다.(1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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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중에서
하나님은 누구신가? 저명한 신약학자가 이 질문에 관한 흥미롭고 명쾌한 대답을 성경신학적으로 풀어 내놓는다. 논의는 포괄적이고, 전망은 탁 트이고, 기술은 유려하고, 요점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성경 전체의 빛 아래서 확연하게 드러낸다. 내가 쓰고 싶었던 주제를 리처드 보컴 박사가 선점했다는 생각이 든다. 구약학자로서 나는 이 책이 많은 독자층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류호준, 한국성서대학교 구약학 초빙교수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이다. 조직신학은 한결같이 이 신지식을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등의 주제로 다룬다. 그에 비해 이 책은 하나님이 스스로 누구신지를 계시한 성경 말씀을 따라 그 지식을 탐구하였다는 점이 독특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계시의 순간을 포착하여 거기에 함축된 다양한 의미를 신구약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드러낸다. 저자는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의 풍성함으로 인도한다.
박영돈,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명예교수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만큼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은 없다. 이 시대 최고의 신약학자인 리처드 보컴은 성경을 종횡무진하면서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내었다. 보컴의 인도를 따라 이 책을 읽다 보면 하나님은 우주 저 어딘가에 숨어 계신 분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며, 자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내어주시는 인격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신숙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그리스도인 독자라면 구약과 신약의 문서들 속에 흘러넘치는 은총의 장엄함을 직접 맛보고 싶을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의 그러한 기대를 하나님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적은 분량이지만 신학적 중량감을 지닌 이 책은 성서의 중심에 “하나님의 정체성”이 위치한다고 단언한다. 특히 “아디아포라(adiaphora)의 시대”에 설교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시킨다는 점에서 반드시 읽어볼 소중한 책이다.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신약학 교수
신학의 춘추전국 시대에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라는 질문 못지않게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말하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졌다. 이 책은 아무리 묻고 따지며 파헤쳐도 헷갈리는 하나님의 미묘한 비밀을 회의론적으로 말하기보다 그의 백성들과 여전히 함께하시고 그들 앞에 임재하시며 그들의 애환 어린 삶의 자리에 자비와 긍휼과 인내로 돌보시는 하나님, 그리하여 적극 신뢰할 만하며 전적으로 의지할 만한 새 언약의 계시적 주체로서 우리의 하나님을 말한다. 성서학자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성경신학자가 될 수 있다.
차정식, 한일장신대학교 신학과 신약학 교수,전 한국신약학회 회장
인간의 몸에 급소가 있듯이 이 책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관통하는 성경신학적 맥으로서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다룬다. 구약과 신약에 대한 정경적/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읽기의 좋은 예시가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성경신학적 독법이 지향하는 삼위일체적 계시와 함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적실한 기독교적 읽기를 지향하고 있다. 분량과 가독성을 고려할 때 교회와 신학교 안의 ‘약한 자’와‘강한 자’ 모두를 즐거이 초대하는 보컴의 성육신적 수작이다.
허주, 아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하나님은 누구신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관한 책이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계시다! 이 책은 모든 목회자, 평신도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더 잘 알기 원하는 모든 이들의 책장에 있어야 하는 필독서다. 이 책은 보컴의 명석한 두뇌와 영혼을 살찌우는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번에 고전 반열에 오를 책이다.
벤 위더링턴 3세, 애즈버리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리처드 보컴은 그의 성서학에 대한 방대한 학문을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흥미로우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달여 냈다. 이 책은 매우 거대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를 담은 짧지만 매우 강렬한 책이다.
N. T. 라이트,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신약학 및 초기 기독교 연구교수
보컴은 깊은 사고와 학문이 뛰어난 학자로서 글을 쓴다. 그는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썼다.
존 골딩게이, 풀러 신학교 구약학 명예교수
이 탁월하고 읽기 쉬운 책에서 보컴은 오랫동안 제기되어온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이를 통해 그는 매우 계시적인 성경신학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한다. 그의 명료한 산문과 깊이 있는 성경 지식은 성경의 하나님을 다시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독자를 인도한다.
마리암 코발리쉰, 리전트 칼리지 신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