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보고―장군 이사부는 경주 이씨일까요?
2019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 치사하게 반도체 산업의 3대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를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양국 간 경제 전쟁이 이어지고 있지요.
과거부터 꾸준히 독도 문제로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더니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 문제를 무역 전쟁으로 해소하려 들다니요.
이런 가운데 문득 “일본과 관련 있는 어떤 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이 서든리 들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바로~, 이사부 장군이십니다.
사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사부 장군은 그리 유명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가수 정광태 씨가 발표한 ‘독도는 우리 땅’ 노래에서 “신라 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가사를 통해 우산국을 정복해 독도를 우리 땅으로 만든 분이란 것이 비로소 널리 알려졌지요.
그런데…, 혹시 이사부 장군의 성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사부 장군이니 당연히 이씨라고요? 그것도 경주 이씨? 하지만 그건 가리지날~ ! 이사부는 《삼국사기》에는 김씨, 《삼국유사》에는 박씨 성으로 나옵니다. 즉, 김이사부이거나 박이사부. 우리가 지금 그분을 성을 빼고 이름만 막 부르는 거예요. 이런 실례가….
《삼국사기》에선 내물왕의 4세손이 김이사부로 나오는데, 태종이란 이름도 있었다네요. 《삼국유사》에선 이상하게도 동일 인물인데 박이종이라고도 나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선 ‘이질부례’로 적혀 있다네요.
실제로 신라의 충신 박제상도 《삼국사기》의 기록이고, 《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연 스님이 본 옛 사서에 문제가 있었거나 신라 왕위를 서로 주고받은 박, 석, 김씨 왕족 가문이 상호 혼인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성씨를 혼용해서 썼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지요.
지금 우리가 유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기에 이해가 안 되지만, 일본에는 지금도 데릴사위를 들여 자녀들이 어머니 성씨를 따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럴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름 역시 실제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이두식 표현과 뜻으로 표기한 한자식 표현이 혼용되던 삼국시대여서 같은 인물에 대해 다양한 이름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여기서는 《삼국사기》 버전으로 표기할게요.
김이사부 장군은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을 정복해 독도까지 우리 땅으로 만드신 위인으로 유명한데 어떻게 우산국을 정복했는지는 다들 잘 모릅니다.
먼저, 김이사부 장군은 내물왕의 4대손이니 금수저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생년이 정확치는 않으나 505년 실직성(삼척) 군주로 처음 임명된 것으로 보아 485년경 출생했다고 여겨지므로 512년(지증왕 13년) 27~28세 젊은 나이에 지금의 강릉인 하슬라(또는 아슬라) 군주로 부임합니다. 앞서 광개토대왕 편에서 설명했듯이 그 두 지역은 신라의 고구려 방어 최전선이자 신라 수군의 중요한 군사항구였어요.
이처럼 당시에도 중요하게 여겨진 강릉은 그 후로도 번성해 조선 시대 지방 행정구역을 팔도로 개편할 때에도 강원도의 첫 글자로 쓰일 정도로 큰 고을이었고, 지금도 강원도에서 원주와 함께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참고로, 원주 역시 통일신라 5소경 중 하나였으니, 강원도의 대도시 두 곳은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네요. 하지만 당시 동해 바다에는 우산국(울릉도)과 대마도 해적들이 날뛰고 있어 어선을 공격할 뿐 아니라 때때로 상륙해 주민들을 납치해 가고 있었고 신라 수군은 패배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평생 해적질로 단련된 섬사람들과 맞상대해선 이기기 힘들겠다고 여긴 김이사부 군주는, 수군과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공표합니다.
김이사부: “친애하는 백성 여러분. 나 쫌 보이소. 이번 주말에 ‘라이온 킹’ 영화를 단체 관람하면서 사자를 자세히 관찰한 뒤 각자 나무로 사자를 하나씩 조각해 오이소신라.”
주민과 수군: “엥. 저기요? 군주님. 아침에 뭐 잘못 드신 게 아니슬라?
김이사부: “이번에 우산국 해적 글마들을 무찌를 신의 한 수이니 쫌만 기다려달라서라벌.”
주민과 수군: “어째 새파란 젊은이가 군주라고 오더니 어째 분위기가 좀 쌔하드래요강릉.”
왜 갑자기 사자가 등장했느냐면, 당시로선 아주 힙한 인도산 종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부처님이 고함을 치면 사자의 울음소리로 커져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마치 21세기 마블 유니버스 세계관 마냥 알려지던 때인지라 글로벌 얼리어답터 김이사부 장군은 일반 백성들로서는 세상 처음 보는 인도 사자를 이용한 심리전을 구사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와 관련해서 잠깐 삼국의 불교 전파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해야겠네요.
가야 건국 편에서 허황옥 왕후가 인도에서 불탑을 가져왔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불교가 정착되기 한참 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인도에서도 역시 불교가 체계화되지 않았는데, AD 1세기에 중국 후한에 전래되면서 황실에서 크게 환영받게 됩니다. 원래 초기 불교는 개인의 자기 수양을 중요시했는데, 불교의 윤회사상에 따르면 덕을 쌓은 이일수록 더 높은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점에 착안해 중국에서는 왕즉불, 즉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즉 귀족이나 백성들보다 왕 자신이 전생에 더 덕을 쌓았기에 황제로 태어났다고 강조함으로써 감히 반역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 데 요긴하게 이용됩니다. 이는 유럽에서도 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놓고 내전을 치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며 본인을 ‘신의 대리인’으로 신격화해 자신의 후손이 계속 황제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랬던 것처럼요.
이후 중국 위촉오 삼국시대와 5호16국시대의 혼란기를 거치며 백성들도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불교에 의존하게 되고, 남북조 각 왕실마다 한자로 번역된 불경을 보급함과 동시에 중국식 불당과 불상, 불탑 등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체계를 정립하지요. 이처럼 300여 년간 중국에서 숙성한 불교는 우리나라로 전래되는데, 우선 372년 중국 북조 전진에서 고구려로 순도 스님이 찾아오고, 뒤이어 394년 중국 남조 동진에서 인도 출신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로 오면서 불교가 전래됩니다. 당시 마라난타 스님이 도착한 곳이 지금의 전남 영광군 법성포라네요. 이처럼 당시 우리나라 임금들 역시 왕즉불 사상이 권력 안정화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그러나 중국과 직접 교류가 불가능했던 신라에는 고구려 승려 묵호자를 통해 400년대 초에 전래되지만 곧 격렬한 저항에 부딪힙니다. 당시 3개 성씨의 성골, 진골 왕족뿐 아니라 각 귀족들도 나름의 가문 탄생 신화를 가지고 있었고, 별도의 사당도 운영하던 상황에서 왕만 더 돋보이는 불교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던 거지요. (저희 창녕 조씨도 시조 할아버지가 창녕 화왕산 용지 호수 용왕의 후손이라는 가문 신화를 갖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쯤 되는 사인 이차돈이 527년 법흥왕과 모의해 사찰 건립이 늦어지게 했고, 법흥왕이 일부러 신하들 앞에서 “누가 감히 왕의 명을 어기느냐?”고 이차돈의 목을 치게 하자 하얀 피가 솟구치고 꽃비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나는 기적을 일으키니, 이를 본 귀족들도 마지못해 불교를 수용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이 이차돈 역시 이사부 장군처럼 성이 이씨가 아니라 이름이 이차돈이에요. 성은 김 또는 박이고요.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는 원효, 의상 등 많은 스님들의 대활약으로 백성들까지 독실한 신자가 됨으로써 오히려 삼국 중 가장 독실한 불교 국가로 거듭나게 되지요. 이 같은 불교 전파는, 왕실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귀족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고 국가가 정한 법으로만 집행하도록 하는 율령 반포와 맞물려 국가로서의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참고로 율은 나쁜 일을 한 사람을 처벌하는 형법이고, 령은 국가 행정 법규를 의미해요.
이처럼 고구려와 신라는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이 거의 동시간 대에 이뤄진 반면, 백제만은 3국 중 가장 빨리 율령을 반포하는 등 가장 먼저 고대 국가 체계로 발전하지만 그 전성기는 짧았지요.
삼국 불교 도입 및 율령 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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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불교 수용 율령 반포 참고
고구려: 중국 전진에서 전파, 수용(372년) 373년 소수림왕 재위 시절
백제: 중국 동진에서 수용(384년)(침류왕) 260년(고이왕) 백제는 율령 반포가 먼저
신라: 고구려에서 400년대 초 전파, 수용은 늦게(527년) 520년 법흥왕 재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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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본 역시 552년 백제 사신 노리사치계가 불교를 전파하지만, 워낙 호족들의 저항이 거세어 신라처럼 씨족 사당을 철폐하지 못하고 기존 토착신앙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은 수많은 토속신을 모시는 신사와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이 혼재되어 있지요.
따라서, 김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러 가던 512년은 이차돈이 순교하기 15년 전이어서 아직 불교가 신라 왕족들에게만 알려진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신라 백성이건 우산국 사람들은 아직 인도 사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때였기에 이걸 활용한 겁니다. 이런 센스쟁이 같으니라구~.
이에 김이사부 장군은 512년 6월(당시 20대), 배마다 사람보다 큰 사자 조각상을 태우고 한달음에 130km 바닷길을 가로질러 울릉도 앞바다로 몰려갑니다. 따라서 많은 어린이 역사 위인전 그림에 나오듯이 김이사부 장군이 수염을 휘날리며 배를 몰고 가는 할배 장군으로 묘사되는 건 가리지날~.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우산국 주민들은 신라 수군 배 앞머리에 괴상한 생물이 떡 하니 앉아 연기를 토해내는 것을 보며 경악하지요.
이때 김이사부 장군 스피커를 켭니다.
김이사부: “아아, 우산국 아재들요. 나 좀 보입신라. 우리 신라가 해외 직구한 이 인도산 사자를 풀어서 다 잡아 먹어삐리라 할낀데 항복할끼요, 싸울끼요? 우짤란교?”
우산국 우해왕: “허걱, 저게 뭐꼬우산? 항복하겠다울릉.”
울릉도 전설에 의하면 과거 대마도 해적들이 우산국에 수시로 침입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우해왕이 자신의 수군을 이끌고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주를 위협해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대마도주의 셋째 딸 풍미녀를 아내로 맞아 혼인 동맹을 맺었던 용맹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데려 온 풍미녀의 사치가 심해 우산국 백성들의 원망이 치솟고 있었으니 신라로서는 우산국을 제압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죠. 이처럼 재치로 적을 굴복시킨 김이사부 장군은 우산국 자치를 허용하고,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속국이 되도록 하는 선에서 타협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 주변 섬들과 대마도, 유구국(오키나와), 타이완, 필리핀까지 그들만의 해상 네트워크가 존재했기 때문에 무력으로 진압을 했다면 위기감을 느낀 이들과 지속적으로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이 커 이 정도 선에서 절충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신라는 중국에만 머리를 숙이고 주변 국가들로부터는 미니 황제국으로 대접받고자 했기 때문에, 탐라국(제주도), 우산국(울릉도), 대마국(대마도) 등 주변 섬들을 직접 지배하지 않고 매년 조공을 받고 금품을 하사하는 형식으로 자치를 허용했습니다. 어쨌거나 김이사부 장군에게 우산국이 종속을 다짐함으로써 그후 150여 년간 침입 기록이 없었다고 하지요.
이후 우산국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조공하며 계속 자치를 허용받았는데, 고려 중기 여진 해적들에게 습격을 받아 우산국 주민들이 고려로 피신해 오기까지 합니다. 으잉? 여진도 해적이 있었냐고요? 그럼요. 당시 여진 해적은 울릉도뿐 아니라 우리나라 동해안, 대마도와 일본 해안가도 털었다고 해요.
그래서 고려 초기 지도를 보면 지금의 평안도 지역은 북계라 하여 거란을 막는 군사 구역으로 정하고, 함흥 지역부터 강원도, 경북 지역 해안가까지 동계라 하여 여진족을 막는 군사 지역으로 정하는데, 이처럼 동해안 전체를 군사 구역으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진 해적에 대한 방어 때문이었죠. 그런데 대부분의 역사책엔 이런 이야기가 안 나와요.
그후 이 여진 해적의 노략질을 배운 일본 왜구가 고려 후기가 되면 또다시 고려를 털어요. 아놔~. 이처럼 신라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섬나라 간의 해상 네트워크는 그 후로도 1000년간 이어지지만, 16세기 들면서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한반도 주변 탐라국, 우산국 등은 미니 황제국 노릇을 포기한 조선 태종에 의해 완전히 조선의 직할지로 편입되고, 대마도와 오키나와, 북해도는 일본에 연달아 정복되고, 필리핀, 괌, 사이판 등은 스페인에 이어 미쿡이 차지하게 되며, 대만 역시 네덜란드의 침략 이후 명나라 장군 정성공에게 완전히 점령되면서 태평양 해상 세력은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독도가 삼국시대 때부터 신라의 영토였다는 건 사실 가리지날이에요. 물론 우산국을 신라의 속국으로 삼아 울릉도와 독도까지 한반도의 역사에 편입시킨 것은 위대한 업적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통일신라시대 학생들에게 역사 퀴즈를 내었다면, 당시 신라 학생들은 김이사부 장군의 업적에 대해 우산국 정복보다 더 큰 성과를 얘기했을 겁니다. 응? 그게 뭐냐고요?
김이사부 장군의 최대 업적은, 551년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을 주도하고 532년 금관가야, 562년 대가야를 정복해 500여 년 가야 역사를 완전히 지워 진정한 삼국시대를 열며 신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겁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군, 백제군과 왜군마저 쓸어버리신 위대한 정복 장군이셨지요.
20대 나이에 우산국을 굴복시킨 김이사부는 40대에 들어 신라의 병권을 한 손에 쥐게 됩니다. 당시 진흥왕이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까닭에 재위 초기 11년간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 자격으로 신라를 대신 다스리던 시기였고, 김이사부 장군이 신라 최고 장군 위치에 올라 있었습니다. 또한 이후 신라군의 주력이 되는 화랑도가 창설된 것도 이 무렵이었으니, 진흥왕의 업적으로 알려진 신라의 영토 확장을 실현해낸 진정한 영웅은 김이사부 장군인 것이지요.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인 550년(진흥왕 11년)에 백제 성왕의 고구려 공격 때 지원군을 이끌고 위기에 빠진 백제군을 구원하는 한편, 아예 충북 단양 고구려 도살성을 함락시킨 데 이어 원래 백제 땅이던 금현성까지 장악해, 드디어 신라가 백두대간 산맥에 의지해 영남 지역을 방어하던 상황을 뛰어넘어 충북 지역 남한강 상류 유역까지 진출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이 활약상은 충청북도 단양에 위치한 진흥왕 적성비에 김이사부 장군 이름이 적혀 있어 사실임을 입증해주지요.
그리고 그다음 해인 551년, 돌궐이 고구려를 공격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 고구려의 주력 부대가 북방으로 옮겨가면서 고구려의 남쪽 방어선이 약해진 틈을 노려 나제동맹군이 일제히 북상해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는 백제가 정복하면서 장수왕 때 빼앗긴 옛 영토를 되찾게 되지만, 신라는 기습적으로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 경기도 지역까지 차지해버립니다.
신라의 이 같은 기습이 가능했던 이유는, 육로는 제대로 된 길이 없어서 대규모 병력 이동이 어려운 반면, 강을 통한 병력과 물자 이동은 수월했던 당시 지형을 신라가 잘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즉, 신라가 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있던 터라 물살을 타고 배를 몰면 하루 이틀 만에 한강 하류 각지로 돌진이 가능했기 때문에, 백제 구원군이 오기 전에 오랜 전투로 지쳐 있던 백제군을 몰아내 그 지역을 차지했던 것이 아닐까라고 보는 것이죠. 또한 북쪽으로는 고구려군이 대규모로 넘어오기 힘든 백두대간 산맥 동쪽 해안가를 내달려 과거 동예, 옥저가 차지했던 함경도 해안 지역까지 일시나마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에선 백제 내부 사정으로 해당 지역을 포기해 신라가 어부지리로 한강 하류를 얻었다는 의견도 존재하는데, 실제로는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은 전투 기록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 터라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긴 합니다. 또 다른 기록에는 당시 백제 성왕이 기세를 몰아 평양성까지 함락하려 했지만, 신라가 반대해 더 이상의 북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후 신라가 한강 유역까지 차지한 후 고구려군이 신라를 공격하지 않아 신라가 고구려와 몰래 손을 잡고 강성해진 백제를 견제한 것이 아닌가라고 백제는 의심했다고도 합니다.
어떤 게 진실인지는 몰라도 신라의 배신에 분노한 백제 성왕은 절치부심합니다. 그래서 한강을 빼앗긴 2년 뒤인 553년에는 본인의 딸을 진흥왕과 결혼시켜 화해하는 듯하면서 뒤로는 왜국에 병력 지원을 요청해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당시 신라는 지소태후의 섭정이 끝나 진흥왕이 직접 통치에 나서며 어머니와 콤비를 이루던 김이사부 장군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뒤, 김무력 장군(김유신의 할아버지) 등 신진 장수들로 군 개편 작업을 진행했기에 백제 성왕은 애송이 임금과 새파란 장수들로 바뀐 신라군이 약해졌다고 오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554년 가야, 왜 연합군과 함께 신라 본토와 한강 유역을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한 관산성을 공격하지만, 오히려 신라군에 사로잡혀 목이 잘리고 백제군도 3만 명 이상 사망하는 비극으로 끝나면서 나제동맹은 소멸하고 맙니다.
임시 피난 수도 웅진성에서 지금의 충남 부여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바꾸며 부흥을 꿈꾸었던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지만, 결국 본인은 사망하고 총사령관을 맡은 태자도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오는 패배를 당해 백제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후 백제는 두 왕이 연달아 석연찮은 죽음을 맞고 귀족 세력에게 휘둘리는 등, 무왕이 등극하기까지 오랫동안 수습하기에 급급해지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지요.
어찌 보면 서로 뒤통수를 친 것처럼 보이나 약육강식이던 국가 간 경쟁에선 대의명분보다는 실리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100여 년 이어지던 나제동맹의 결렬은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백제와 고구려 간 투쟁 시절이 끝나고, 새로이 백제-고구려-왜 연합이 신흥 강국 신라를 몰아세우는 형세로 바뀌게 만듭니다. 이에 결국 100여 년 뒤 핀치에 몰린 신라가 생존을 위해 당나라와 손을 잡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니, 삼국시대의 종말과 통일 과정은 한반도 내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니라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국가 간 생존 경쟁이란 큰 그림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이처럼 백제의 대규모 공세를 물리친 신라는 백제와 왜를 잇는 연결고리, 가야 연맹을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에 은퇴한 김이사부 장군이 다시 소환되지요. 이때 가야 연맹은 광개토대왕의 공격 이후 금관가야의 위세가 꺾이며 경남 고령군에 위치했던 대가야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대가야의 16대 임금 도설지는 더 이상 백제의 도움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머니가 신라 귀족이었음에도 일본계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왜에 군사 지원을 요청해 1000여 명의 왜군이 백제 지원군과 함께 연합군을 형성해 신라에 맞서지요. 하지만 김이사부 장군의 지휘하에 신라군이 맹공을 퍼부어 이들을 격파한 뒤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 연맹이 모두 신라 영토가 됩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화랑 사다함의 활약에 주목하지만, 그 사다함과 낭도를 지휘해 가야의 마지막 보루이던 대가야 정복 전쟁을 이끈 총사령관이 바로 김이사부 장군이었으니, 그의 생애 마지막 활약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대가야를 멸망시킨 562년은 김이사부 장군이 512년에 20대 나이에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낸 이후 무려 50년 뒤에 이룩한 성과였기 때문이지요. 즉, 70대 중반 나이에도 최전선에서 활약하신 겁니다.
또한 살아생전 김이사부 장군은 전혀 몰랐겠지만, 본인이 멸망시킨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인 김유신이 이때로부터 100여 년 뒤 신라의 방계 왕족 김춘추와 손을 잡아 신라 왕실을 개혁하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니, 그분의 업적 중 울릉도 정복은 한강 진출, 가야 정복에 비하면 그다지 큰 업적은 아닌 거예요.
그럼에도 현재는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의 일생에서 실제 일본 지원군을 무찌른 가야 정복이 아니라 우산국 정벌이 가장 큰 업적으로 기억되면서, 삼척에는 이사부사자공원이 생기고, 김이사부 장군이 가본 적 없을 여수 앞바다에는 이사부 크루즈 여객선이 운행 중이니…, 김이사부 장군이 지하에서 이 광경을 보면 뭐라고 생각하실까요?
글을 마치면서 김이사부 장군이 등장하는 또 다른 국민 애창곡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를 보니 달리 보이네요. “만주 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신라 장군 이사부~” 예전엔 광개토대왕과 이사부 장군이 동급으로 놓인 건 솔직히 에러(?)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신라 입장에서는 영토를 2배 이상 넓혀주신 이사부 장군이 ‘신라판 광개토대왕’이 맞네요. 작사가 선생님에겐 다 계획이 있었던 거군요.
이제 고구려의 위기 편으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역사공부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역사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독도는 우리 땅.! 우리 땅 !
자세힌 역사공부 하고 갑니다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내용 감사드립니다^^